제13과 오늘 선택하라(질문, 대답, 설명) 12/27/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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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김명호 작성일25-12-19 13:14 조회121회 댓글0건본문
제13과 오늘 선택하라
(12월 27일 안식일 / 일몰: 오후 5시 20분)
연구 범위: 수 24:; 창 12:7; 신 17:19; 신 5:6; 왕상 11:2, 4, 9; 딤후 4:7, 8.
기억절: "너희가 섬길 자를 오늘 택하라 오직 나와 내 집은 여호와를 섬기겠노라 하니"(수 24:15).
여호수아의 마지막 장은 언약 갱신 의식의 맥락에서 진행되며, 이번은 고령이 된 여호수아가 의식을 주도한다. 새로 언약을 맺는 것이 아니라 언약 갱신 의식을 알려주는 형태이지만 이 장은 고대 근동 지역의 종주권 조약을 구성하는 요소를 갖추고 있다. (1) 조약의 발의자인 종주를 명시하는 전문, (2) 주군과 봉신 간의 관계를 설명하는 역사적 서언, (3) 봉신의 감사를 토대로 주군에 대한 전적인 충성을 표명하도록 요구하는 계약 조항, (4) 순종의 축복과 계약 위반에 대한 저주, (5) 봉신의 서약에 대한 증인, (6) 장래의 확인을 위한 문서 보관, (7) 조약의 비준.
여호수아의 생애는 마지막을 향해 가고 있었고 후계자는 아직 보이지 않았다. 언약의 갱신은 이스라엘에게 그들의 왕이 바로 여호와이심을 상기시키며, 그분께 충성한다면 그들이 보호를 받을 것을 말한다. 이스라엘은 인간 왕이 필요하지 않았다. 신정 국가로서 그들의 유일한 왕은 여호와이심을 그들은 항상 기억해야 했다.
학습 목표
깨닫기: 과거에 역사하신 주님은 오늘도 일하시며 우리가 주님과의 관계의 중요성을 깨닫고 섬기며 살기 원하신다.
느끼기: 언약은 주님과 산 관계에 들어가는 것이며 우상을 멀리하는 의식적 결단이 요구된다.
행하기: 백성들도 그렇게 이끌고 사는 날 동안 여호와를 섬긴 여호수아의 삶은 오늘 우리 삶의 모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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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여호수아는 왜 조상들의 때에 있었던 구속사를 이야기하며 너희가 거기에 있었다고 말합니까?(수 24:5)*답: 후손들은 조상들의 허리에 있었다(히7:10). 그들은 조상을 통해 하나님을 만난 것이다.
3.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인정하고 깨닫게 될 때에 우리의 반응은 어떤 모습으로 나타납니까?(수 24:14)
*답: 진실하고 성실하게 그분을 섬기는 자로 나타난다.
4. 충성을 맹세하였음에도 너희가 섬기지 못할 것이라고 여호수아가 경고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수 24:19)
*답: 그들 마음에 우상을 완전히 버리지 못하는 것을 지적한 것이다. 환경은 우상을 섬기기에 아주 알맞은 상태라서 더욱 그렇다.
5. 여호수아가 우상을 버리라고 호소한 이유는 우리 마음의 어떤 성향 때문입니까?(수 24:23)
*답: 우상에게 쉽게 끌리는 성질이 있고 환경은 그것을 시행하기 꼭 좋다.
6. 여호수아의 삶에 대한 평가는 어떠하였으며 이것은 어떤 의미로 나에게 다가옵니까?(수 24:31)
*답: 여호수아 사는 날동안 이스라엘이 여호와를 섬겼다는 말로 평가했다. 우리도 자녀들에게 이런 감화를 남겨야 한다.
7. 여호수아가 마지막까지 유의하도록 전한 교훈은 무엇이었으며 우리에게 무엇을 시사합니까?
*답: 우상을 버리고 여호와만 섬기라는 교훈이다. 우리도 자녀손들에게 이런 믿음과 사상을 끼쳐야 한다.
결론: 세겜에서 조상들과 현세대는 하나로 다뤄지며 언약을 맺는다. 과거의 교훈은 새 세대에게 적용되어야 한다. 조상들을 위해 일하셨던 하나님은 우리를 위해서도 역사하실 수 있으시다. 하나님은 우리가 당신의 위대함을 깨닫고 순종하며 섬기는 삶으로 이어지길 원하신다. 우리는 자유롭게 그분을 섬길 것을 선택할 수 있지만 그 일의 중요성을 분명히 이해해야 한다. 언약은 주님과 살아있는 관계이며 이를 위해서 우상을 멀리하는 의식적 결단이 요구된다. 백성들을 그렇게 이끌고 사는 날 동안 여호와를 섬긴 여호수아의 삶은 오늘 우리가 본받아야 할 삶의 모본이다.
12월 21일(일) 너희가 거기 있었다
“여호수아가 이스라엘 모든 지파를 세겜에 모으고 이스라엘 장로들과 그들의 수령들과 재판장들과 관리들을 부르매 그들이 하나님 앞에 나와 선지라”(수 24:1).
세겜은 아브라함이 가나안에 도착했을 때 제단을 쌓은 곳이며, 하나님께서 그에게 처음으로 땅의 약속을 주신 곳이다(창 12:6, 7). 이제 아브라함에게 주신 약속이 성취된 때에, 이스라엘은 첫 번째 약속이 주어진 바로 그곳에서 하나님과의 언약을 갱신한다. 여호수아의 호소는 “너희 중에 있는 이방 신상들을 버리”라고 말한 야곱의 말을 기억나게 한다(수 24:23, 창 35:2–4 비교). 이 일이 진행되는 장소 자체가 다른 모든 “신들”을 거부하고 여호와께만 온전히 충성을 바치라는 부르심을 말해준다.
여호수아 24:2–13을 읽어 보라. 이스라엘에게 주신 하나님의 기별의 핵심은 무엇인가?
[수24:2~13] 여호수아가 모든 백성에게 이르되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기를 옛적에 너희의 조상들 곧 아브라함의 아버지, 나홀의 아버지 데라가 강 저쪽에 거주하여 다른 신들을 섬겼으나 3 내가 너희의 조상 아브라함을 강 저쪽에서 이끌어 내어 가나안 온 땅에 두루 행하게 하고 그의 씨를 번성하게 하려고 그에게 이삭을 주었으며 4 이삭에게는 야곱과 에서를 주었고 에서에게는 세일 산을 소유로 주었으나 야곱과 그의 자손들은 애굽으로 내려갔으므로 5 내가 모세와 아론을 보내었고 또 애굽에 재앙을 내렸나니 곧 내가 그들 가운데 행한 것과 같고 그 후에 너희를 인도하여 내었노라 6 내가 너희의 조상들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어 바다에 이르게 한즉 애굽 사람들이 병거와 마병을 거느리고 너희의 조상들을 홍해까지 쫓아오므로 7 너희의 조상들이 나 여호와께 부르짖기로 내가 너희와 애굽 사람들 사이에 흑암을 두고 바다를 이끌어 그들을 덮었나니 내가 애굽에서 행한 일을 너희의 눈이 보았으며 또 너희가 많은 날을 광야에서 거주하였느니라 8 내가 또 너희를 인도하여 요단 저쪽에 거주하는 아모리 족속의 땅으로 들어가게 하매 그들이 너희와 싸우기로 내가 그들을 너희 손에 넘겨 주매 너희가 그 땅을 점령하였고 나는 그들을 너희 앞에서 멸절시켰으며 9 또한 모압 왕 십볼의 아들 발락이 일어나 이스라엘과 싸우더니 사람을 보내어 브올의 아들 발람을 불러다가 너희를 저주하게 하려 하였으나 10 내가 발람을 위해 듣기를 원하지 아니하였으므로 그가 오히려 너희를 축복하였고 나는 너희를 그의 손에서 건져내었으며 11 너희가 요단을 건너 여리고에 이른즉 여리고 주민들 곧 아모리 족속과 브리스 족속과 가나안 족속과 헷 족속과 기르가스 족속과 히위 족속과 여부스 족속이 너희와 싸우기로 내가 그들을 너희의 손에 넘겨 주었으며 12 내가 왕벌을 너희 앞에 보내어 그 아모리 족속의 두 왕을 너희 앞에서 쫓아내게 하였나니 너희의 칼이나 너희의 활로써 이같이 한 것이 아니며 13 내가 또 너희가 수고하지 아니한 땅과 너희가 건설하지 아니한 성읍들을 너희에게 주었더니 너희가 그 가운데에 거주하며 너희는 또 너희가 심지 아니한 포도원과 감람원의 열매를 먹는다 하셨느니라.
*답: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이 가나안에 정착도록 다 행하셨다는 것이다.
되돌아본 과거의 중심 주체는 하나님이시다. “내가 이끌어 내어,” “내가 주었으며,” “내가 보내었고,” “내가 재앙을 내렸나니,” “내가 행”하였고, “내가 인도하여 내었”으며, “내가 너희를 구원”하였다는 모든 이야기는 이스라엘이 이 이야기들의 주인공이 아니라 하나님의 행동의 대상인 것을 말해준다. 이스라엘을 존재하게 하신 분은 바로 하나님이시다. 만약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의 삶에 개입하지 않으셨다면 그들도 같은 우상을 섬기고 있었을 것이다. 이스라엘이 한 민족으로 존재하는 것은 그 조상들 덕분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은혜 때문이다. 이스라엘 백성이 약속의 땅에 정착한 것은 자만심을 가질 이유가 아니라 바로 하나님을 섬겨야 하는 확실한 이유이다.
주님의 말씀에는 “너희”와 “그들”(조상들)을 오가는 전환이 다섯 번 나타난다. 세겜에서 조상들과 이 세대는 하나로 다뤄진다. 여호수아는 신명기 5:3에서 모세가 이미 확인한 것을 보여주고자 한다. 즉 여호와께서는 조상들에게만 언약하신 것이 아니라 지금 이 순간 여호수아의 말하는 그 자리에 있는 모든 사람과 언약을 맺으셨다. 이곳에 있는 대부분은 출애굽을 경험한 적이 없었고, “모두”가 호렙산에 있었던 것도 아니다. 그럼에도 여호수아는 너희가 거기 있었다고 말한다. 요약하자면, 과거의 교훈은 각각의 새 세대에게 적용되어야 한다. 조상들을 위해서 일하셨던 하나님은 지금 세대를 위해서도 역사하실 준비가 되어 있으시다.
<교훈> 과거의 교훈은 각각의 새 세대에게 적용되어야 한다. 조상들을 위해서 일하셨던 하나님은 지금 세대를 위해서도 역사하실 준비가 되어 있으시다.
<부가설명> 나는 지난 기 출애굽기 공부와 이번 여호수아서 공부에서 가장 강하게 느끼고 감사한 것은 구원받기 위하여 내가 할 일이 하나도 없다는 은혜다. 출애굽이나 가나안 정복이나 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하셨다. 이스라엘은 하나님께서 하시는 대로 따라가면 되었다. 또 하나님께서 하라고 핫는 대로 따르면 되었다. 그것이 사람들에게는 어려운 것 같다. 스스로 무엇을 할 수 있다는 생각 때문일 것이다. 사실 스스로 할 수 있는 일이 하나도 없다. 창조주께서 나를 존재하기 해 주시지 않았으면 나라는 사람이 없다. 근본적으로 하나님께서 나를 있게 해 주셨기에 내가 생활할 수 있고 하나님께서 만들어놓은 환경이 있어서 그 환경에서 생활할 수 있을 뿐이다. 또 생활하기에 필요한 모든 것도 하나님께서 창조해서 내 옆에 두셨기에 내가 사용하고 활용할 수 있는 것이다. 우리는 생각하기를 사용하고 활용하는 것은 내가 아닌라고 물을 수 있다. 틀린 말은 아니다. 그 ‘내가’ 하나님이 있게 하셨다는 사실부터 생각해야 한다. 그러니까 내가 한 것이 무엇이 있는가? 모두 하나님께서 해주신 것을 감사히 받아 누리는 것뿐이다. 그렇지 않은가? 자기사 밥을 떠서 입에 넣는 것을 내가 한 것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근본적으로 생각하면 그것도 내가 존재하기 때문이고 그 존재는 하나님이 주신 것이다. 감사할 것밖에 아무것도 없다.
12월 22일(월) 성실함과 진실함으로
여호수아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무엇을 요청했는가?(수 24:14, 15) 여호와를 성실함과 진실함으로 섬긴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수24ㅣ14,15] 그러므로 이제는 여호와를 경외하며 온전함과 진실함으로 그를 섬기라 너희의 조상들이 강 저쪽과 애굽에서 섬기던 신들을 치워 버리고 여호와만 섬기라 15 만일 여호와를 섬기는 것이 너희에게 좋지 않게 보이거든 너희 조상들이 강 저쪽에서 섬기던 신들이든지 또는 너희가 거주하는 땅에 있는 아모리 족속의 신들이든지 너희가 섬길 자를 오늘 택하라 오직 나와 내 집은 여호와를 섬기겠노라 하니,
*답: 변함없이 하나님께 충성하는 것을 뜻하는 표현이다.
여호수아의 호소는 이스라엘 백성이 창조주께 대한 충성을 다함으로 자신들의 독특한 정체성을 지키고 그 땅에서 살 것인지, 아니면 우상을 숭배하는 수많은 민족 중 하나가 되어 명확한 정체성, 목적, 사명 없이 다시 사라질 것인지 선택해야 한다는 사실을 분명히 보여준다. 선택은 그들의 몫이다.
여호수아는 두 가지를 호소한다. 이스라엘은 주님을 경외하며 “성실함과 진실함으로” 그분을 섬겨야 한다. 주님을 경외한다는 것은 끊임없는 두려움과 감정적인 불안 속에 사는 삶을 의미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것은 하나님의 측량할 수 없는 위대함, 거룩함, 무한함을, 다른 한편으로는 우리의 작음, 죄악됨, 유한함을 깨닫는 데서 비롯된 경탄과 경외심을 의미한다. 하나님을 경외한다는 것은 그분이 우리에게 바라시는 일의 위대함을 끊임없이 인식하는 것이며, 그분이 우리의 하늘 아버지일 뿐만 아니라 우리의 거룩하신 왕이심을 인정하는 것이다. 이러한 깨달음은 하나님께 순종하는 삶으로 이어진다(레 19:14, 레 25:17, 신 17:19, 왕상 17:34). “두려움”은 하나님을 향해 이스라엘 백성이 나타내야 할 내적 태도를 묘사하지만, 경외심의 실질적 결과는 섬김이다.
이스라엘에게 요구되는 섬김은 성실함과 진실함이라는 두 개의 용어로 특징지어진다. 첫 번째 용어 타밈(tamim)은 주로 희생 제물의 완전함을 묘사하는 형용사로 사용된다. 이스라엘의 섬김을 묘사하는 두 번째 용어 에메트(’emet)는 ‘충성스러움’ 또는 “진실함”을 뜻한다. 이 용어는 일반적으로 불변성과 확고함을 의미한다. 이는 주로 본질적으로 신실하심으로 특징지어지는 하나님을 가리키며 이런 하나님의 신실하심은 이스라엘을 향하여 나타난다.
신실한 사람은 신뢰할 수 있고 믿을 수 있는 사람이다. 여호수아는 이스라엘이 역사 가운데 하나님께서 당신의 백성에게 보여주신 것과 같은 신실함을 그들 역시 하나님께 보일 것을 요구하고 있다. 이는 단순히 그분의 요구에 대한 외적인 순종이 아니라, 마음의 흔들림 없는 내적 일관성에서 우러나는 것이다. 그들의 삶은 하나님께서 자신들을 위해 행하신 일에 대한 감사를 나타내야 한다. 이것은 오늘날 우리도 예수님과 이런 관계를 맺어야 하는 것을 말한다.
<교훈> 하나님은 당신이 보여주신 것과 같은 신실함을 백성들 역시 보일 것을 요구한다. 이는 외적인 순종, 내적인 일관성을 포함하는 관계를 맺어야 함을 말한다.
<부가설명> 예수를 믿는다는 것, 하나님을 경배한다는 것, 이것은 효성스러운 자녀 노릇을 하는 것으로 비유할 수 있다. 하나님은 우리를 자녀로 삼으신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창조하셨을 때 그를 하나님의 아들이 되게 하신 것이다. 누가복음 3:23~38에 기록된 예수님의 족보는 아담의 이상은 하나님이라는 말로 끝낸다. 아담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뜻이다. 또 신명기 32:6은 “우매무지한 백성아 여호와께 이같이 보답하느냐 그는 너를 얻으신 너의 아버지가 아니시냐 너를 지으시고 세우셨도다”라고 하여 창조주여호와 하나님의 우리의 아버지라는 것을 분명히 기록했다. 자녀들은 당연하 자기를 존재하게 하고 길러주신 부모님께 효도해야 한다. 이유는 자기 존재 근원이며 양육의 손길이고 생명을 주신 분이기 때문이다. 그뿐만 아니다. 자녀는 출생하면 부모님의 집이 자기 집이 된다. 부모님의 재산이 자기 재산이 된다.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를 부모와 자녀의 관계로 이해하면 분명해진다. 바울은 에베소 5:21이하에서 가정을 신앙의 표상으로 설명하고 있다. 성실과 진실함으로 하나님을 섬기라는 말은 효도하는 자녀가 되라는 말과 같다. 오늘날도 그리스도인들은 창조주 여호와 하나님을 아버지로 모시고 효도하는 자녀가 되어서 아버지의 기쁨이 되어야 할 것이다. 여호수아는 백성들에게 이것을 가르쳤다.
12월 23일(화) 섬김의 자유
진실하고 충성된 지도자로서 여호수아는 백성의 자유의지를 존중하며 이스라엘이 강요가 아닌 자유로운 선택으로 주님을 섬기기를 바란다. 이것은 바로 “선택하”라는 동사를 의도적으로 사용한 이유이다(수 24:22 참조). 다른 구절들에서 바하르(baḥar, 선택하다)는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을 선택하신 것을 묘사한다(신 7:6, 7; 신 10:15; 신 14:2). 하나님의 선택 이후에도 이스라엘은 하나님께 “예”라고 말하고 삶을 누릴 수도 있고, 그분께 등을 돌리고 존재를 멈출 수도 있다.
여호수아의 호소에 대한 이스라엘의 응답은 무엇이었는가?(수 24:16–18) 그들의 답변에 여호수아의 반응은 어떠했으며 그 이유는 무엇인가 생각해보라(수 24:19–21).
[수24:16~21] 백성이 대답하여 이르되 우리가 결단코 여호와를 버리고 다른 신들을 섬기기를 하지 아니하오리니 17 이는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서 친히 우리와 우리 조상들을 인도하여 애굽 땅 종 되었던 집에서 올라오게 하시고 우리 목전에서 그 큰 이적들을 행하시고 우리가 행한 모든 길과 우리가 지나온 모든 백성들 중에서 우리를 보호하셨음이며 18 여호와께서 또 모든 백성들과 이 땅에 거주하던 아모리 족속을 우리 앞에서 쫓아내셨음이라 그러므로 우리도 여호와를 섬기리니 그는 우리 하나님이심이니이다 하니라 19 여호수아가 백성에게 이르되 너희가 여호와를 능히 섬기지 못할 것은 그는 거룩하신 하나님이시요 질투하시는 하나님이시니 너희의 잘못과 죄들을 사하지 아니하실 것임이라 20 만일 너희가 여호와를 버리고 이방 신들을 섬기면 너희에게 복을 내리신 후에라도 돌이켜 너희에게 재앙을 내리시고 너희를 멸하시리라 하니 21 백성이 여호수아에게 말하되 아니니이다 우리가 여호와를 섬기겠나이다 하는지라.
*답: 백성들은 신실히 섬기겠다고 힘주어 대답했다. 그러나 여호수아는 그것을 시인하기 보다는 그들이 말한 대로 하나님을 섬기지 못할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1세대들의 행보를 잘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경고의 말을 한 것이다. 그것이 바른 격려가 될 것이었다.
이스라엘 백성은 단호하고 긍정적인 응답을 통해 조상들의 하나님이 이제 우리의 하나님(수 24:17, 18)이시라고 인정하며 전적인 충성으로 그분을 섬기겠다고 한다. 그들이 충성을 다짐했기에, 우리는 여호수아로부터 격려와 확신의 말이 이어질 것이라고 기대한다. 그러나 실제는 그렇게 않으며 대화는 급격한 전환을 보인다. 여호수아는 마치 악마의 대변인 역할이라도 하는 듯 말한다. 그는 과거의 하나님의 은혜로운 섭리에 대해 말하던 것에서 전환하여 섬기기 어려운 하나님의 모습을 묘사하며 이스라엘 백성을 경고한다. 여호수아는 첫 세대의 불충성을 알고 있다. 그들은 지금 세대와 비슷하게 하나님께 순종하겠다고 약속했지만(출 19:8, 출 24:3, 신 5:27), 그 말이 아직 그들의 입술에 남아 있을 때 이미 그 약속을 잊어버렸다(출 32). 그래서 여호수아는 수사학적 방법을 통해 이스라엘 백성이 몇 가지 사실을 깨닫게 하고자 한다. 첫째, 하나님을 섬기겠다는 결정은 중요한 결정이다. 이것은 하나님의 계시에 따라 전체 민족을 꼴 지어야 하는 것이다. 하나님께 충성하기 위해 노력할 때 분명 축복을 받을 것이지만 불순종에 따르는 결과 또한 충분히 이해되어야 한다. 죄의 용서는 양도할 수 없는 인간의 당연한 권리가 아니며 하나님의 은혜로 주어지는 기적이다.
둘째,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을 섬기기로 한 결정은 지도자나 심지어 여호수아일지라도 강요할 수 없는 자신들의 자발적인 것이어야 한다.
셋째, 이스라엘은 사람이 자신의 힘만으로 하나님을 섬길 수 없음을 깨달아야 한다. 하나님을 섬기는 것은 언약의 조항을 기계적으로 준수함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구원하시는 주님과 맺는 인격적인 관계를 통해 이루어진다(출 20:1, 2; 신 5:6, 7 참조).
<교훈> 이스라엘이 단호하게 전적인 충성으로 하나님을 섬기겠다고 할 때에 여호수아는 이 결정의 중요성과 그에 따르는 축복과 형벌을 충분히 이해하도록 돕는다.
<부가설명> 자신의 힘만으로 하나님을 섬길 수 없다는 말의 뜻을 우리는 깊이 생각해서 답을 얻어야 한다. 사람은 활동하고 생각하고 생활을 위하여 일해야 한다. 이렇게 하려면 생명이 있어야 한다. 즉 살아있어야 한단는 말이다. 모든 활동의 기본은 그가 살아 있는 사람이라는 것이다. 이 살아 있는 생명은 어디서 오는가? 생명의 원천이신 하나님께로부터 온다(시36:9). 자신의 힘만으로 하나님을 섬길 수 없다는 말의 기본이 이 진실이다. 다음은 아담의 씨로 출생한 자들은 다 아담 안에서 생명을 잃어버린 자들이다. 하나님께서 수명을 주셔서 은혜의 때와 구원의 날을 마련해 주지 않았으면 하나님을 섬길 수 없다. 자비로 메시아를 통하여 구원의 날을 주시고 수명이 있을 때 하나님께 나올 수 있도록 해 주셨다. 그 다음은 이렇게 하나님 앞에 나왔어도 그 길에서 생활할 수 있도록 조치해 주지 않으면 섬기는 삶을 이룰 수 없다. 그래서 성령님을 보내셔서 보혜사가 되게 하셔서 하나님을 올바르게 섬기도록 해주셨다. 이 조건들이 사람이 하나님을 섬길 수 있는 힘이 된다. 이 조건을 떠난 상태에서 자기 힘으로 하나님을 섬기려는 것은 가능하지 않다. 그렇게 섬기려는 것은 죽은 자가 자기 노력으로 생명을 얻으려는 것과 다를 것이 없다(롬8:7~9 참고).
<영감의 교훈> 섬길 자를 택하라 - “노령의 지도자는 그들에게 한 모든 말의 참뜻을 심사숙고하여 만일 그들이 참으로 주위의 민족들처럼 참 비열한 우상 숭배의 생애를 살고자 원하든지 결정하도록 백성에게 강권하였다. 만일 능력의 근원이요 축복의 근원이신 여호와를 섬기는 것이 좋지 않게 보이거든 저희로 저희가 섬길 자 곧 ‘너희 열조가 … 섬기던 신’ 즉 거기서 아브라함이 불러냄을 받은 그곳 신이나 ‘너희의 거하는 땅 아모리 사람의 신이든지’ 그날에 택하도록 명하였다”(부조와 선지자, 523).
12월 24일(수) 우상 숭배의 위험
여호수아 24:22–24을 읽어 보라. 여호수아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우상을 버리라고 거듭 호소해야 했던 이유는 무엇인가?
[수24:22~24] 여호수아가 백성에게 이르되 너희가 여호와를 택하고 그를 섬기리라 하였으니 스스로 증인이 되었느니라 하니 그들이 이르되 우리가 증인이 되었나이다 하더라 23 여호수아가 이르되 그러면 이제 너희 중에 있는 이방 신들을 치워 버리고 너희의 마음을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로 향하라 하니 24 백성이 여호수아에게 말하되 우리 하나님 여호와를 우리가 섬기고 그의 목소리를 우리가 청종하리이다 하는지라.
*답: 이스라엘 백성이 아직도 우상들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장신구도 우상들이 새겨진 것들이었다. 또 마음의 생각이 가장 처치 곤란한 우상이 될 수 있다,
우상 숭배의 위협은 단지 이론적인 문제가 아니다. 이전에 모압 평원에서 이와 비슷한 상황에서 모세도 같은 선택을 요구했다(신 30:19, 20). 지금 여호수아가 경계하는 우상들은 애굽이나, 강 건너편의 신들이 아니라 “너희 중에” 있는 신들이다. 따라서 여호수아는 백성들에게 마음을 주님께 향하도록 간절히 권면한다. 여기서 사용된 용어 ‘나타’(natah)는 ‘뻗다, 기울이다, 굽히다’라는 뜻이다. 이 용어는 몸을 굽히고 우리 기도에 귀를 기울이시는 하나님을 묘사하는 데 사용된다(왕하 19:16; 시 31:2, 3; 단 9:18), 또한 이것은 나중에 선지자들이 이스라엘에게 요구한 태도이기도 하다(사 55:3, 렘 7:24). 솔로몬의 마음이 이방 신들에게로 향했을 때 그의 배교를 나타내는데도 이것이 사용되었다(왕상 11:2, 4, 9). 죄로 물든 인간의 마음은 본성적으로 하나님 음성에 귀를 기울이지 않는다.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방향으로 마음을 기울이기 위해서는 우리의 의식적인 결단이 필요하다.
이스라엘 백성의 답변은 문자 그대로 “그의 목소리를 우리가 청종하리이다”였다.
이 표현은 순종의 관계적 측면을 강조한다. 이스라엘에게 요구하신 것은 생명 없는 규칙을 기계적으로 따르는 것이 아니다. 언약은 주님과 맺는 살아있는 관계에 관한 것이며, 규정만으로 그것을 온전히 나타낼 수 없다. 이스라엘의 종교는 결코 율법주의적인 것이 아니었으며 오히려 믿음과 사랑 안에서 거룩하고 자비로우신 구주와 나누는 끊임없는 교류였다.
비록 백성이 여호와를 섬기겠다고 세 번이나 약속했고 그것은 여호수아의 명령대로 이방 신들을 제거하는 것을 의미하지만 실제로 그것이 이루어졌다는 보고는 없다.
이 책은 전체에 걸쳐 여호수아나 모세의 명령이 성취된 것을 순종의 본보기로 기록하는 것이 관례처럼 되어 있다. 그런데 책의 마지막 부분에 그러한 내용이 생략되어 여호수아의 호소는 열린 결말로 남아있다. 여호와를 섬기라는 여호수아서의 중심 호소는 여호수아의 세대뿐만 아니라 이 기별을 새롭게 읽거나 듣는 각 세대의 하나님의 백성을 위한 것이다.
<교훈> 죄로 물든 마음은 하나님 음성에 귀 기울이지 않기에 우리는 의식적 결단이 필요하며, 율법주의, 규정이 아닌 구주와 나누는 끊임없는 교류가 필수적이다.
<부가설명> 주님은 언제나 신실하시다. 약속하신 것을 버리거나 어기지 않으신다. 약속을 받은 사람이 배반하지 않은 한 하나님은 약속을 지키신다. 오늘날 인류가 이렇게 된 것은 사람이 언약을 어겼기 때문이다(호6:7). 그래도 하나님으 언약을 지키고 이루기 위하여 말씀 하나님 여호와께서 친히 사람이 되어 인류를 대신하여 언약을 지키고 이루심으로 우리가 그분 안에서 다시 언약에 들어갈 수 있게 되었다. 그래서 이 언약을 어기게 한 장본인인 사탄이 통치하는(눅4:5,6, 요14:30 참고) 죄와 사망에서 아직도 죄의 몸을(롬6:6, 7:24) 가지고 살아가는 우리가 양자가 현실이 되는 날까지(롬8:23) 자주 언약에 머물러지 않고 자리를 떠난다. 그러나 성령께서 우리를 깨우쳐주시고 주님이 용서하시며 일으켜 주시기 때문에 염치불구하고 다시 주님의 이름을 부르고 굴복할 수 있다. 감사합니다.
12월 25일(목) 성공적인 마지막
영감받은 기자에 의해 기록된 여호수아서의 결론을 읽어 보라(수 24:29–33). 이 말씀들은 어떻게 여호수아의 삶을 되돌아볼 뿐만 아니라 미래를 내다보고 있는가?
[수24:29~33] 이 일 후에 여호와의 종 눈의 아들 여호수아가 백십 세에 죽으매 30 그들이 그를 그의 기업의 경내 딤낫 세라에 장사하였으니 딤낫 세라는 에브라임 산지 가아스 산 북쪽이었더라 31 이스라엘이 여호수아가 사는 날 동안과 여호수아 뒤에 생존한 장로들 곧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을 위하여 행하신 모든 일을 아는 자들이 사는 날 동안 여호와를 섬겼더라 32 또 이스라엘 자손이 애굽에서 가져 온 요셉의 뼈를 세겜에 장사하였으니 이곳은 야곱이 백 크시타를 주고 세겜의 아버지 하몰의 자손들에게서 산 밭이라 그것이 요셉 자손의 기업이 되었더라 33 아론의 아들 엘르아살도 죽으매 그들이 그를 그의 아들 비느하스가 에브라임 산지에서 받은 산에 장사하였더라.
*답: 여호수아는 충성스러운 여호와 하나님의 종으로 임무를 다하고 잠들었다. 그가 잠들고 함께 한 장로들도 다 잠든 후에는 이스라엘이 여호와를 잘 섬기지 않을 상태를 암시했다. 그러나 이제 그들은 더는 유랑하지 않을 자리에 안착했다는 것을 장례하는 이야기로 마무리했다.
여호수아서의 결말은 여호수아와 대제사장 엘르아살의 죽음을 기록하며 엄숙하게 마무리한다. 저자는 여호수아의 장례, 엘르아살의 장례, 그리고 요셉의 유골을 묻는 것을 함께 기록함으로써 저자는 약속의 땅 밖에서의 삶과 그 땅에서 시작되는 삶을 대조한다. 이제 더 이상 유랑할 필요가 없으며 지도자들의 유해도 더는 함께 옮겨 다닐 필요가 없었다. 조상들은 가족들을 세겜에서 구입한 땅(창 33:19)의 막벨라 굴에 묻었다(창 23:13, 19; 창 25:9, 10). 이제 이스라엘 백성은 그들의 유업인 땅에 지도자들을 묻음으로 이 땅에 대한 영속성을 느낀다. 조상들에게 주셨던 약속은 성취되었다. 여호와의 신실하심은 이스라엘의 후손을 현재와 미래에 연결하는 역사적 연결고리이다.
이 책의 결론 부분은 전체 이야기를 과거의 더 큰 이야기와 연결시키고, 동시에 미래를 향한 길을 열어준다. 캔터베리의 대주교였던(1991-2002) 조지 캐리(George Cary) 경은 슈루즈버리의 성삼위일체 교회의 설교에서 영국 성공회는 “멸종까지 한 세대만 남았다”고 선언했다.
사실 교회는 항상 멸종 직전의 세대이었으며, 구약의 하나님의 백성도 마찬가지였다. 이스라엘 역사의 위대한 한 장이 막을 내리고 있다. 그들의 미래는 그들 스스로가 미래에 대한 많은 질문에 어떻게 대답할지에 달려 있다. 이스라엘은 주님께 충성할 것인가? 그들은 온 땅을 차지하는 미완의 과업을 계속할 수 있을 것인가? 그들은 여호와께만 매달리며 우상 숭배에 빠지지 않을 것인가?
여호수아의 세대는 주님께 충성했지만, 다음 세대는 그 위대한 지도자가 걸어온 것과 같은 영적인 길을 지속할 수 있을까? 하나님의 백성의 각 세대는 여호수아서를 읽으면서 동일한 질문을 던져 보아야 한다. 그들의 성공은 일상 속에서 어떤 성질의 답을 내놓는지, 그리고 자신들이 물려받은 진리를 어떻게 적용하는지에 달려 있다.
<교훈> 여호수아가 던졌던 동일한 질문을 자신에게 해보아야 한다. 성공은 그 질문에 일상 속에서 어떻게 답하며 물려받은 진리를 어떻게 적용하는지에 달려 있다.
<부가설명> 여호수아는 여호와의 군대 사령관의 말씀에 전적으로 순복하였다. 그는 그분 앞에서 신을 벗었다. 그리고 주신 땅을 다 차지할 때까지 자기의 신발을 신지 않았다. 그는 여호와의 군대 사령관의 지시에 따라 움직이고 생활했다. 그의 삶은 성공적으로 마무리했다. 오늘 우리도 우리 신발을 벗을 줄 알아야 한다. 오늘날 세상은 교회와 교인에게 덕지덕지 신발을 신긴다. 교회와 교인은 그 신발 신기를 좋아하는 것 같다. 차가운 세상에 발이 따뜻하게 느껴지나보다. 그러나 우리가 여호수아와 같이 모세와 같이 충성하는 성도가 되려면 신발을 벗어야 한다. 세상 지식의 신발, 세상적 명예의 신발, 재산의 신발, 모든 기득권적 신발을 벗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로 옷입고 복음의 신발만을 신고 걸아야 한다. 바울은 전에 자기에게 유익하다고 생각했던 것이 예수님을 따르는데 해로운 것을 깨닫고 과감히 벗어버렸다. 배설물처럼 버렸다. 우리는 바울이 버린 배설물을 주워담고 있지 않은지?
12월 26일(금) 더 깊은 연구를 위하여
부조와 선지자 49장 “여호수아의 마지막 교훈,” 522–524를 읽어 보라.
“애굽에서 나온 무리들 중에는 우상 숭배자였던 사람들이 많았다. 관습의 힘은 매우 강력해서 가나안에 정착한 후에도 그 행위는 비밀리에 계속되었다. 여호수아는 이스라엘 백성 가운데 있는 이 악을 감지했고, 그로 인해 발생할 위험을 분명히 인식했다. 그는 히브리 무리 가운데 철저한 개혁이 이루어지기를 간절히 바랐다. 그는 백성이 온 마음을 다해 주님을 섬기기로 단호히 결심하지 않는 한, 주님으로부터 점점 더 멀어지게 될 것을 알고 있었다. …히브리 무리 중 일부는 진심으로 하나님을 섬겼지만, 대다수는 형식적인 예배자일 뿐이었다. 그들의 예배에는 열심이나 간절함이 없었다. 어떤 사람들은 마음속으로는 우상 숭배자였지만, 스스로를 우상숭배자라고 인정하는 것을 부끄러워했다”(영문 시조, 1881.5.19).
“이 엄숙한 언약은 거룩하게 보존하기 위해 율법책에 기록되었다. 여호수아는 주님의 성소 옆에 있는 상수리나무 아래에 큰 돌을 세웠다. ‘모든 백성에게 이르되 보라 이 돌이 우리에게 증거가 되리니 이는 여호와께서 우리에게 하신 모든 말씀을 이 돌이 들었음이니라 그런즉 너희가 너희의 하나님을 부인하지 못하도록 이 돌이 증거가 되리라.’ 여기서 여호수아는 백성에게 한 교훈과 경고가 자신의 말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임을 분명히 선언한다. 이 큰 돌은 무엇을 기념하기 위해 세워졌는지를 후손들에게 증거하기 위해 서 있을 것이며, 백성들이 다시 우상 숭배에 빠질 때에 그들을 향한 증거가 될 것이다”(영문 시조, 1881.5.26.).
함께하는 토의를 위하여
1. “그는 거룩하신 하나님이시요 질투하시는 하나님이시니”(수 24:19)라는 말씀의 의미를 논의해 보라. 질투하시는 하나님이라는 말의 의미는 무엇인가?
*답: 하나님은 자기 백성이 망하는 것에 대단히 민감하시다. 그들 망하도록 하는 세력을 따를 때 그들이 망할까봐 노심초사하는 것을 표현한 것이다.
2. 하나님을 향한 우리의 사랑은 우리에게 주신 선택의 자유와 어떻게 연결되어 있는가? 진정한 자유가 없다면 우리는 진정으로 사랑할 수 있겠는가? 진정한 사랑은 강요될 수 있는가? 그렇지 않다면, 그 이유는 무엇인가?
*답: 우리는 하나님께서 선택해 놓은 것을 받든지 거절하든지 하는 선택만 할 수 있다. 사람은 자기 의지와 상관없이 아담 안에서 이미 사망이 되어 있다. 여기에 하나님께서 생명의 길을 주시고 그 길로 오라고 부르신다. 거절하면 사망이 되고 받아들이면 생명을 얻는다. 이것으 우리의 유일한 선택의 길이다.
3. 오늘의 교회 지도자들이 이 믿음의 횃불을 다음 세대에서 넘겨줄 수 있는 실제적인 방법은 어떤 것이 있겠는가?
*답: 가정이 진리 안에서 진리를 생활해야 한다. 그래서 자녀들에게 이 진리를 깊이 심어주는 역할을 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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