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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2과 하나님은 신실하시다(질문, 대답, 설명) 12/2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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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김명호 작성일25-12-12 11:50 조회370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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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2과 하나님은 신실하시다

(12월 20일 안식일 / 일몰: 오후 5시 16분)

   

연구 범위: 수 21:43–45; 딤후 2:11–13; 수 23; 계 14:10, 19; 신 6:5

 

기억절: “여호와께서 이스라엘 족속에게 말씀하신 선한 말씀이 하나도 남음이 없이 다 응하였더라”(수 21:45).

 

1961년 1월 20일, 미국 35대 대통령으로 취임한 존 F. 케네디 대통령의 취임 연설은 1,366 단어에 불과했지만 미국인들의 마음에 지울 수 없는 인상을 남겼다. 그는 국민에게 자신의 특권보다 책임을 중요하게 여기도록 격려하며 다음과 같이 말했다. “선한 양심을 우리의 유일하고 확실한 보상으로 삼고, 역사를 우리 행위의 최종 심판자로 하여, 우리가 사랑하는 이 땅을 함께 이끌어 갑시다. 하나님의 축복과 도우심을 구하되, 이 땅을 향한 하나님의 일이야말로 진정 우리에게 맡겨진 일임을 알아야 합니다." 

이스라엘을 이끄는 고령의 지도자 여호수아는 자신의 생명이 얼마 남지 않았음을 느끼며, 이스라엘의 지도자들과 백성들에게 연설하기로 결심했다(수 23, 24). 여호수아 23장은 미래에 더욱 초점을 맞추며 어떻게 오직 하나님만을 경배할 것인지를 말한다. 24장은 과거에 행하신 하나님의 신실하신 행사를 돌아보며, 경배받기에 합당한 분이 누구신지를 결정하도록 촉구한다. 오직 여호와만이 합당하시다. 

이번 주는 이스라엘의 승리를 되돌아보는 동시에 이스라엘의 이후의 성공을 위한 길을 제시하는 여호수아의 첫 번째 연설을 함께 공부할 것이다. 

 

학습 목표

깨닫기: 하나님은 모든 약속을 이루시기에 공의로 심판하시며 사랑의 나라를 회복하실 것이다.  

느끼기: 우리에게 주어진 일들은 본질적으로 영적인 과제이기에 순결을 지키며 충성해야 한다.  

행하기: 그분에게 충성하는 것은 무거운 짐이 아니라 항상 주님과 동행하며 사랑의 관계에 들어가는 것이다. 

 

TMI 위로

2. 여호수아는 마지막 연설에서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어떤 방법으로 강조하고 있습니까?(수 21:45) 

*답: “여호와께서 이스라엘 족속에게 말씀하신 선한 일이 하나도 남음이 없이 다 응하였더라”(21:45)

3. 이미 땅을 차지하고 승리를 얻었음에도 잊지 말아야 할 사실은 무엇이라고 생각합니까?(수 23:11)  

*답: 하나님을 사랑하고 충성하는 것이다.

4. 가나안 땅을 정복하는 전쟁에서 영적인 순결을 지키라고 강조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수 23:7)

*답: 그래야 하나님께서 그들 중에 계시며 하나님의 싸움을 하신다.

5. 주께서 가나안에게처럼 이스라엘에게 진노할 수 있다는 말은 진노의 성격에 대해 무엇을 말해줍니까?(수 23:16) 

*답: 하나님의 진노는 사망의 세력을 없애는 것인데, 가나안인처럼 사망에 빠지면 진노에 노출 된다.

6. 하나님을 사랑하라는 계명이 사랑을 강요하는 명령이 아닌 이유는 무엇입니까?(수 23:11) 

*답: 그들은 하나님의 구원받은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기 때문이다. 

7. 죄의 무거운 결과 가운데 있는 우리에게 하나님께서 약속을 지키신다는 사실은 어떤 의미를 가집니까? 

*답: 용서와 구원의 보증이다.

 

결론: 여호수아는 하나님만 경배하며 그분만이 경배에 합당하신 분임을 강조한다. 그분은 모든 약속을 지키시고 언약을 이루시되 은혜로 주셨다. 우리는 아무 공로도 없으며 승리를 주시는 분을 항상 기억하고 대장되시는 그분을 의지하며 순종해야 한다. 이스라엘에 주신 과제는 군사적인 것이 아니며 본질적으로 영적인 것이기에 영적인 순결을 지켜야 한다. 하나님은 죄에 대해 전쟁을 선포하시며 정의를 옹호하신다. 그분은 언약을 어기는 이에게 진노하시며, 우리가 무거운 짐이 아닌 사랑으로 그분과의 관계에 들어가기를 바라신다.  

 

12월 14일(일) 모두 이루어졌다

 

여호수아 21:43–45은 하나님을 어떤 모습으로 그리고 있는가? 이 말씀은 역사적인 약속의 땅뿐 아니라 우리 구원의 현실에는 또 어떻게 적용되는가?(딤후 2:11–13)

[수21:43~45]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의 조상들에게 맹세하사 주리라 하신 온 땅을 이와 같이 이스라엘에게 다 주셨으므로 그들이 그것을 차지하여 거기에 거주하였으니 44 여호와께서 그들의 주위에 안식을 주셨으되 그 조상들에게 맹세하신 대로 하셨으므로 그들의 모든 원수들 중에 그들과 맞선 자가 하나도 없었으니 이는 여호와께서 그들의 모든 원수들을 그들의 손에 넘겨 주셨음이니라 45 여호와께서 이스라엘 족속에게 말씀하신 선한 말씀이 하나도 남음이 없이 다 응하였더라.

[딤후2:11~13] 미쁘다 이 말이여 우리가 주와 함께 죽었으면 또한 함께 살 것이요 12 참으면 또한 함께 왕 노릇 할 것이요 우리가 주를 부인하면 주도 우리를 부인하실 것이라 13 우리는 미쁨이 없을지라도 주는 항상 미쁘시니 자기를 부인하실 수 없으시리라.

*답: 약속하신 것을 온전히 다 이루시는 하나님으로 그린다. 영원한 나라를 약속하신 것도 어김없이 다 이루실 것이다.

 

이 구절들은 여호수아서의 절정과 신학적 요약을 담고 있다. 이 구절들은 약속을 지키시고 맹세를 이루시는 여호와의 언약적 신실함이라는 책 전체의 주요 주제를 강조한다. 이 짧은 부분은 이 책의 지금까지의 전체 내용을 요약하기도 한다. 여호수아 21:43은 땅의 분배와 정착(수 13–21장)에 대해 말하고, 여호수아 21:44은 적들에게서 거둔 승리(수 1–12장)와 땅에 대한 지배권을 얻은 것을 이야기한다. 이 모든 회고는 하나님의 신실하심이라는 주제를 통해 보여진다. 이스라엘 백성은 결코 적들을 이긴 승리와 그 땅을 유업으로 받은 것을 자신의 공로로 주장할 수 없으며 오직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말씀에 대한 당신의 신실하심을 통해 가능케 된 것을 항상 기억해야 한다. 

그분께서 “온 땅”(수 21:43)을 주셨고, “모든 원수들을 그들의 손에 넘겨주셨”으며(수 21:44), 그분께서 “맹세하신 대로”(수 21:44) “남음이 없이 다 응하였”다(수 21:45). 세 구절(수 21:43–45)에 “모든”을 의미하는 kol(콜)이라는 단어가 여섯 번 반복되어 사용된 것은, 그 땅이 여호와의 선물이며 그것을 얻은 것에 대해 이스라엘이 어떤 공로도 주장할 수 없다는 진리를 다시 한 번 강조한다. 그 땅을 “주겠다”고 맹세하신 분도, 원수들을 그들의 손에 붙이신 분도 바로 주님이셨다. 

이스라엘의 모든 성공은 오직 하나님의 거룩한 계획과 신실하심 때문에 주어진 것이다. 이것은 우리의 구원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이다. “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하지 못하게 함이라”(엡 2:8, 9). 실제로 바울은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강조하며 이렇게 썼다. “미쁘다 이 말이여 우리가 주와 함께 죽었으면 또한 함께 살 것이요 참으면 또한 함께 왕 노릇 할 것이요 우리가 주를 부인하면 주도 우리를 부인하실 것이라 우리는 미쁨이 없을지라도 주는 항상 미쁘시니 자기를 부인하실 수 없으시리라”(딤후 2:11–13). 

 

<교훈> 하나님은 약속, 언약을 지키시는 신실한 분이시다. 그가 땅을 주시고 원수를 이기게 하셨기에 모든 것은 그분의 선물이며 우리는 어떤 공로도 주장할 수 없다.  

 

<부가설명> 성경의 하나님은 그 이름이 여호와이시다. 이 이름은 여호와가 어떤 분이신지를 드러내는 가장 중요한 칭호다. 스스로 있다는 뜻은 모든 것을 그분이 있게 하시고 주관하게 하신다는 뜻이다. 그래서 그분께서 심지 않은 것은 뽑아버린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심은 것마다 내 천부께서 심으시지 않은 것은 뽑힐 것이니”(마15:13). 하나님께서 심었으나 그 심은 것을 인정하지 않을 때는 뽑히게 된다. 하나님을 대적하는 가장 큰 반역은 창조를 인정하지 않는 것이다. 가장 큰 불효는 부모가 자기를 낳아주신 것을 인정하지 않는 것이다. 그래서 효경에 삼천가지 죄 중에 가장 큰 죄가 불효라고 한 것이다. 율곡도 이 말을 인용했다고 생각하지만 같은 말을 했다. 그처럼 피조물이 피조물이기를 거절하는 것이 근본적인 죄다. 이것은 뽑힐 것이고 없어질 것이다. 그렇지 않고 하나님을 창조주로 신뢰하면 그 이름대로 약속하신 모든 것을 이루실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이 이름을 기억하고 충성하는 신자들로 매일 살아야 할 것이다.

 

12월 15일(월) 끊임없이 의지하는 삶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이루셨음을 말하는(수 21:43–45) 영광스러운 결론은 순종이라는 조건을 통해 이루어졌음을 말한다. 결코 성공을 당연히 주어진 것으로 여겨서는 안된다. 그것은 언제나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순종에 따르는 것이다. 따라서 땅의 분배는 이스라엘에 대한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나타내는 증표일 뿐만 아니라(느 9:8) 이스라엘의 태도에 따라 미래에 바뀔 수 있는 것임을 내포하고 있다. 과연 이스라엘은 이미 이루어진 것을 지켜낼 수 있을 것인가? 

 

여호수아 23:1–5을 읽어 보라. 여호수아의 고별사 서론의 주요 초점은 무엇인가? 

[수23:1~5] 여호와께서 주위의 모든 원수들로부터 이스라엘을 쉬게 하신 지 오랜 후에 여호수아가 나이 많아 늙은지라 2 여호수아가 온 이스라엘 곧 그들의 장로들과 수령들과 재판장들과 관리들을 불러다가 그들에게 이르되 나는 나이가 많아 늙었도다 3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를 위하여 이 모든 나라에 행하신 일을 너희가 다 보았거니와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 그는 너희를 위하여 싸우신 이시니라 4 보라 내가 요단에서부터 해 지는 쪽 대해까지의 남아 있는 나라들과 이미 멸한 모든 나라를 내가 너희를 위하여 제비 뽑아 너희의 지파에게 기업이 되게 하였느니라 5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 그가 너희 앞에서 그들을 쫓아내사 너희 목전에서 그들을 떠나게 하시리니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말씀하신 대로 너희가 그 땅을 차지할 것이라.

*답: 가나안 땅 정복은 여호와 하나님께서 하신 것을 강조했다.

 

여호수아의 연설의 초점은 나이 많아 늙은(두 번 강조됨) 자신에게서, 하나님께서 맡기신 사명을 이어가야 할 청중에게로 옮겨진다. 그는 땅의 정복이 가능했던 것은 주님께서 그들을 위해 싸우셨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이스라엘 백성의 불성실과 불신으로 인해 출애굽 이후 전쟁을 치를 수밖에 없었지만, 그들이 그 땅을 차지할 수 있었던 것은 군사력이 아니라 하나님이 개입하셨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이 원수들을 정복하고 승리하게 하셨지만, 아직도 정복해야 할 민족들이 남아 있다. 이스라엘에게 승리는 이미 성취된, 불변하는 현실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도우실 것을 신실하게 끊임없이 의지할 때 언제나 얻을 수 있는 가능성이다. 

 

여호수아의 지도하에 이스라엘 백성이 가나안을 정복한 방식과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이 승리하는 영적 삶을 사는 방식 사이에 어떤 유사점이 있는가?(수 23:10, 골 2:15, 고후 10:3–5, 엡 6:11–18 참조)

[수23:10] 너희 중 한 사람이 천 명을 쫓으리니 이는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 그가 너희에게 말씀하신 것 같이 너희를 위하여 싸우심이라.

[골2:15] 통치자들과 권세들을 무력화하여 드러내어 구경거리로 삼으시고 십자가로 그들을 이기셨느니라.

[고후10:3~5] 우리가 육신으로 행하나 육신에 따라 싸우지 아니하노니 4 우리의 싸우는 무기는 육신에 속한 것이 아니요 오직 어떤 견고한 진도 무너뜨리는 하나님의 능력이라 모든 이론을 무너뜨리며 5 하나님 아는 것을 대적하여 높아진 것을 다 무너뜨리고 모든 생각을 사로잡아 그리스도에게 복종하게 하니,

[엡6:11~18] 마귀의 간계를 능히 대적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전신 갑주를 입으라 12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을 상대하는 것이 아니요 통치자들과 권세들과 이 어둠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을 상대함이라 13 그러므로 하나님의 전신 갑주를 취하라 이는 악한 날에 너희가 능히 대적하고 모든 일을 행한 후에 서기 위함이라 14 그런즉 서서 진리로 너희 허리 띠를 띠고 의의 호심경을 붙이고 15 평안의 복음이 준비한 것으로 신을 신고 16 모든 것 위에 믿음의 방패를 가지고 이로써 능히 악한 자의 모든 불화살을 소멸하고 17 구원의 투구와 성령의 검 곧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라 18 모든 기도와 간구를 하되 항상 성령 안에서 기도하고 이를 위하여 깨어 구하기를 항상 힘쓰며 여러 성도를 위하여 구하라.

*답: 하나님이 주신 싸움은 하나님께서 친히 싸우시는 것이 같다.

 

이스라엘의 승리는 그들의 힘과 전략 때문에 승리한 것이 아니었다. 마찬가지로 죄와 유혹에 대한 영적 승리도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과 부활을 통해 이루어졌다. 이처럼 오늘날 하나님의 백성은 승리하는 삶을 살기 위해서 성령께서 주시는 영적인 도움을 끊임없이 의지해야 한다. 

 

<교훈> 이스라엘에게 승리는 이미 성취된, 불변하는 현실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도우실 것을 신실하게 끊임없이 의지할 때 언제나 얻을 수 있는 가능성이다. 

 

<부가설명> 출애굽한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다. 그들의 싸움은 여호와 하나님의 싸움이었다. 그들은 싸워서 출애굽한 것이 아니다. 모세를 통하여 전한 하나님의 말씀을 믿어서 출애굽한 것이다. 전적으로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행하신 일이다. 그들은 이제 애굽의 노예가 아니라 하나님의 백성이 된 자유민이었다. 그런데도 400년 이상을 애굽에 살면서 익힌 생활습관과 사고방식이 싹 바뀌지 않았다. 그래서 그들은 모든 생각을 사로잡아 그리스도께 복종시키도록 호흡마다 굴복해야 했다. 그들이 어떤 백성인지 깨달은 확고한 의식과 믿음이 있어야 했다. 사탄은 이것을 흔들었다. 그들은 싸우는 백성인데, 그들의 하나님께서 먼저 싸우셨다. 아말렉을 이긴 것도 그렇고 발람은 불러들인 모압과 싸운 것도 그렇다. 그런데 그들은 자시 생각과 싸우는 것을 제대로 하지 않았다. 지금도 그리스도인은 싸우는 존재라는 것을 잊어버리고 아직도 죄인인 것으로 생각하고 있다면 이것부터 회개해야 하지 않을까? 참된 그리스도인은 죄를 짓는 사람이 아니고 죄와 싸우는 사람이다(히12:4). 싸우는 중에 상처를 입게 되는 것을 내가 죄를 지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상처를 입으면 속히 치료하시는 주님께 가서 치료받아야 한다. 이것이 발 씻는 회개다. “딸 내 백성이 상하였으므로 나도 상하여 슬퍼하며 놀라움에 잡혔도다 길르앗에는 유향이 있지 아니한가 그 곳에는 의사가 있지 아니한가 딸 내 백성이 치료를 받지 못함은 어찜인고”(렘8:21,22).

 

12월 16일(화) 명확한 경계

  

여호수아는 서두에서 자신에게 주어졌던 말씀을(수 1:7, 8) 반복해서 사용하며, 이스라엘 앞에 놓인 과제가 본질적으로 군사적인 것이 아니라, 율법에 계시된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영적 싸움임을 밝힌다.  

 

여호수아가 주변 국가들과의 관계에 대해 그토록 강경한 입장을 취한 이유는 무엇 때문이라고 생각하는가?(수 23:6–8, 12, 13) 

[수23:6~8,12,13] 그러므로 너희는 크게 힘써 모세의 율법 책에 기록된 것을 다 지켜 행하라 그것을 떠나 우로나 좌로나 치우치지 말라 7 너희 중에 남아 있는 이 민족들 중에 들어 가지 말라 그들의 신들의 이름을 부르지 말라 그것들을 가리켜 맹세하지 말라 또 그것을 섬겨서 그것들에게 절하지 말라 8 오직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께 가까이 하기를 오늘까지 행한 것 같이 하라/ 12 너희가 만일 돌아서서 너희 중에 남아 있는 이 민족들을 가까이 하여 더불어 혼인하며 서로 왕래하면 13 확실히 알라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 민족들을 너희 목전에서 다시는 쫓아내지 아니하시리니 그들이 너희에게 올무가 되며 덫이 되며 너희의 옆구리에 채찍이 되며 너희의 눈에 가시가 되어서 너희가 마침내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주신 이 아름다운 땅에서 멸하리라.

*답: 그들이 이방 풍속에 젖어들지 않도록 방벽을 쳐주는 것이다. 

 

이스라엘이 직면한 진짜 위험은 남아 있는 민족들의 적대감이 아니라 그들의 우호적인 접근에서 오는 위험이다. 그들의 무기는 이스라엘에게 어떤 위협이 되지 않을 수 있지만, 그들의 사상과 가치관은 어떤 군사력보다 더 해로울 수 있다. 여호수아는 지도자들에게 그들이 진행해 온 싸움이 다른 것이 아닌 궁극적으로 영적인 싸움이라는 중요한 사실을 일깨워 준다. 그렇기 때문에 이스라엘은 고유한 정체성을 유지해야 한다. 

신의 이름을 부르거나, 그 이름으로 맹세하거나, 그들을 섬기고 절하는 것을 금지하는 것은 우상 숭배를 금하는 것이다. 고대 근동 지역에서 신의 이름은 그 신의 존재와 능력을 상징했다. 일상적인 인사나 사업에서 이방 신들의 이름을 부르거나 언급하는 것은 그 권위를 인정하는 것을 의미했고, 이는 이스라엘 백성이 필요할 때 그들의 능력을 구하는 배교의 길로 이어졌다(삿 2:1–3, 11–13 참조). 

남아 있는 가나안 사람들과의 통혼의 위험은 이스라엘의 영적 순결을 잃는 것이었다. 여호수아의 경고의 목적은 인종적, 민족적 순수성을 장려하는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의 영적 붕괴로 이어질 수 있는 우상 숭배를 피하는 것이었다. 솔로몬의 사례는 이방 여인과 혼인에서 오는 슬픈 영적 결과를 보여주는 극적인 사례이다(왕상 3:1, 왕상 11:1–8). 

신약성경도 그리스도인들은 믿지 않는 자와 혼인을 피하라고 분명히 경고한다(고후 6:14). 그러나 이미 결혼한 경우, 바울은 믿지 않는 배우자와 이혼을 권하지 않고, 배우자를 주님께로 이끌고자 하는 소망을 가지고 모범적인 그리스도인의 삶을 살라고 권고한다(고전 7:12–16). 

 

<교훈> 이스라엘에 주신 과제는 본질적으로 군사적인 것이 아닌, 하나님 뜻에 순종하는 영적 싸움이기에 그들은 고유한 정체성을 유지하며 영적 순결을 지켜야 했다. 

 

<부가설명> 하나님은 레위기 18장에서 “너희는 그 거하던 애굽 땅의 풍속을 좇지 말며 내가 너희를 인도할 가나안 땅의 풍속과 규례도 행하지 말고 너희는 나의 법도를 좇으며 나의 규례를 지켜 그대로 행하라 나는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니라”(레18:3,4)라고 분명하게 명령하셨다. 사탄의 공격 무기 중에 가장 위험한 무기가 풍속과 문화 공세다. 풍속은 그들의 문화를 만든다. 풍속과 문화는 민족 공동체의 습관을 만들고 사상을 만든다. 그 속에 살면 의도적으로 배우지 않아도 그렇게 살아지게 된다. 아직도 한국에서는 유교적 문화가 남아있다. 교회도 예수 이름으로 불교적 사고방식이나 유교적 사고방식을 따르는 경향이 없다고 할 수 있을까? 사탄은 역사의 종말에 입으로 물을 강같이 통하여 여자(교회)를 떠내려 가게 할 것이라고 예고했다(계12:15). 입에서 나오는 물은 언어의 물이다. 언어의 물은 곧 사상과 라엘이 주위 민족의 문화에 물들어 망한 것처럼 지금 재림교회도 문화 홍수에 휩싸이고 있지 않은가? 교인들의 사고방식이 성경적인지 세상 문화적인지 정직하게 물어보고 모든 생각을 사로잡아 예수님께 굴복해야 할 것이다. 여호수아는 이 위험을 경고한 것이다.

 

12월 17일(수) 여호와의 진노

  

여호수아 23:15, 16과 성경의 다른 곳에서 묘사된 하나님의 진노와 응보적 정의를 어떻게 해석해야 하는가?(민 11:33; 대하 36:16; 계 14:10, 19; 계 15:1 참조)

[수23:15,16]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말씀하신 모든 선한 말씀이 너희에게 임한 것 같이 여호와께서 모든 불길한 말씀도 너희에게 임하게 하사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주신 이 아름다운 땅에서 너희를 멸절하기까지 하실 것이라 16 만일 너희가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명령하신 언약을 범하고 가서 다른 신들을 섬겨 그들에게 절하면 여호와의 진노가 너희에게 미치리니 너희에게 주신 아름다운 땅에서 너희가 속히 멸망하리라 하니라.

[민11:33] 고기가 아직 이 사이에 있어 십히기 전에 여호와께서 백성에게 대하여 진노하사 심히 큰 재앙으로 치셨으므로,

[대하36:16]그의 백성이 하나님의 사신들을 비웃고 그의 말씀을 멸시하며 그의 선지자를 욕하여 여호와의 진노를 그의 백성에게 미치게 하여 회복할 수 없게 하였으므로,

[계14:10,19] 그도 하나님의 진노의 포도주를 마시리니 그 진노의 잔에 섞인 것이 없이 부은 포도주라 거룩한 천사들 앞과 어린 양 앞에서 불과 유황으로 고난을 받으리니/ 19 천사가 낫을 땅에 휘둘러 땅의 포도를 거두어 하나님의 진노의 큰 포도주 틀에 던지매,

[계15:1] 또 하늘에 크고 이상한 다른 이적을 보매 일곱 천사가 일곱 재앙을 가졌으니 곧 마지막 재앙이라 하나님의 진노가 이것으로 마치리로다.

*답: 하나님의 진노는 하나님의 사랑과 생명을 거절한 자들에게 당신의 사랑과 생명을 거두시는 것이다. 그러면 진노의 대상은 존재를 상실하게 된다. 존재는 창조주를 의지할 때만 유지되기 때문이다.

 

이스라엘은 광야 유랑 기간(민 11:33, 민 12:9)만 아니라 약속의 땅(수 7:1)에서도 이미 여호와의 진노를 경험했으며, 노골적으로 언약을 어김으로 여호와의 진노가 일어날 때 결과가 어떤지를 충분히 알고 있었다. 이 구절들은 여호수아의 권면 중에서 가장 엄중하다. 이전에 가나안인의 멸망을 가리키는 데 사용했던 동일한 용어를 사용하며 주님께서 이스라엘을 멸망시키실 것이라고 말하는 것은 충격적이다. 이스라엘의 복을 약속하시고 그것을 신실하게 이루신 것처럼, 그들이 언약을 거부한다면 언약의 저주(레 26:, 신 28:) 역시 반드시 실현될 것이다. 가나안인의 축출과 멸망을 통해서 이 구절은 다시 한 번 여호와께서 궁극적으로 온 땅의 심판자이심을 보여준다. 죄가 어디에서 발견되든지 그분은 죄에 대해 전쟁을 선포하신다. 이스라엘이 거룩한 전쟁에 참여하였다고 해서 거룩하게 되었거나 특별한 공로를 얻은 것이 아니다. 그들이 심판에 동참한 것은 훗날 이방 민족이 택하신 이스라엘을 향한 여호와의 심판의 도구가 된 것과 다를 바가 없다. 

과거의 영광스러운 확신을 미래를 맞이하는 토대로 삼는 것은 이스라엘의 선택에 달려있다. 

언뜻 보기에는 하나님의 진노라는 성경의 가르침은 하나님은 사랑이시라는 선언(요 3:16, 요일 4:8)과는 양립할 수 없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오히려 하나님의 진노의 관점에서 볼 때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성경의 가르침을 훨씬 더 실제적으로 이해하게 된다. 먼저, 성경은 하나님을 사랑하시고, 인자하시며, 오래 참으시고, 기꺼이 용서하시는 분으로 묘사한다(출 34:6, 미 7:18). 그러나 죄로 물든 세상에서 주님의 진노는, 죄와 악을 마주할 때 그분의 거룩하심과 의로우심을 보이시는 것이다. 그분의 진노는 결코 감정적이거나 복수심에 가득 차거나 예측할 수 없는 과잉 반응이 아니다. 신약은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대신해 죄가 되셨고(고후 5:21), 그분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었다(롬 5:10)라고 가르친다. 그분을 믿는 자는 누구든지 하나님의 진노를 받지 않을 것이다(요 3:36, 엡 2:3, 살전 1:10). 하나님의 진노라는 개념은 하나님께서 우주 만물의 의로우신 심판자이며 정의의 대원칙을 옹호하시는 분이심을 드러낸다(시 7:11, 시 50:6, 딤후 4:8). 

 

 <교훈> 죄가 어디에서 발견되던지 그분은 죄에 대해 전쟁을 선포하신다. 하나님의 진노는 그분이 우주 만물의 의로운 심판자이며 정의를 옹호하는 분이심을 드러낸다. 

 

<부가설명> 우리가 성경을 연구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때 결단코 잊지 말아야할 중요한 기초가 있다. 그것은 하나님의 관점은 사람의 관점과 항상 일치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성경은 아담의 후손들을 다 아담 안에서 죽은 자라고 단언한다(고전15:22). 예수님은 아버지를 장례하고 따르겠다는 제자에게 죽은 자들이 저희 죽은 자를 장사하게 하라고 하셨다(마8:21,22). 이런 말씀들은 아담 자손인 이 지구 인류가 생명 없는 존재라는 것을 분명히 가르친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사망이되어 썩어가는 인류에게 다시 생명을 주시려고 넘치는 사랑과 은혜를 베푸신다. 그래서 부디 살아라, 살아라고 하신다(겔16:6, 18:32, 33:11). “나 주 여호와가 말하노라 죽는 자의 죽는 것은 내가 기뻐하지 아니하노니 너희는 스스로 돌이키고 살지니라”(겔18:32). 지구 인류는 죽는 자들이다. 그런데 여호와 하나님은 이 죽는 자의 죽는 것을 기뻐하지 않으시고 살기를 원하신다. 그런데 이런 사람이 살려주시려는 하나님의 노력을 완강히 거절할 때 그분은 얼굴을 돌리시고 그들을 보지 않으신다. 그러면 그들에게는 생명과 존재가 없어지게 된다. 이것이 하나님의 진노다. “16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너는 너의 열조와 함께 자려니와 이 백성은 들어가 거할 그 땅에서 일어나서 이방 신들을 음란히 좇아 나를 버리며 내가 그들과 세운 언약을 어길 것이라 17 그 때에 내가 그들에게 진노하여 그들을 버리며 내 얼굴을 숨겨 그들에게 보이지 않게 할 것인즉 그들이 삼킴을 당하여 허다한 재앙과 환난이 그들에게 임할 그 때에 그들이 말하기를 이 재앙이 우리에게 임함은 우리 하나님이 우리 중에 계시지 않은 까닭이 아니뇨 할 것이라

18 그들이 돌이켜 다른 신을 좇는 모든 악행을 인하여 내가 그 때에 반드시 내 얼굴을 숨기리라”(신31:16~18). 우리는 하나님의 진노의 성질을 성경적으로 바르게 깨달아야 한다(애3:43, 호9:12 참고).

 

12월 18일(목) 하나님께 붙으라

 

이스라엘이 우상 숭배의 유혹과 하나님의 진노를 피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언약의 ‘하지 말라’는 명령을 계속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의식적이고 일관되게 주님께 대한 충성을 기르는 것이다. 주님께 “달라붙다, 밀착하다”(신 4:4 참조)에 사용된 동사 다바크(dabaq)는 남편과 아내 사이의 결혼 약속(창 2:24)이나 나오미에게 보인 룻의 충성(룻 1:14)을 묘사할 때 사용되었다. 이스라엘은 한 민족으로서 이런 신실함을 “오늘날까지” 나타냈다고 여호수아가 평가한 것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사사기(삿 2:2, 7, 11; 삿 3:7, 12; 삿 4:1)가 슬프게 기록한 것처럼 이 같은 주장은 이후 이스라엘 역사에서 더 이상 사실이 아니었다. 

 

여호수아는 이스라엘에게 “너희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고 권고한다(수 23:11; 신 6:5 비교). 사랑은 강요될 수 없으며, 강요한다면 본질적으로 사랑이 아니게 된다. 그렇다면 어떤 의미에서 사랑을 명령할 수 있는 것인가?

 

이스라엘 백성이 언약의 축복을 계속 누리기 위해서는 하나님께 충성해야 한다. 여호수아는 “너희는 스스로 매우 조심하”(수 23:11, 흠정역)라고 하며 이것을 특별히 강조하고 있다. ‘아하바’(ahabah, 사랑)라는 단어는 우정의 결속, 성적 친밀감, 모성애, 낭만적 사랑, 하나님에 대한 충성 등의 다양한 인간 감정을 의미할 수 있다. 우리가 만약 하나님에 대한 사랑을 그분께 대한 의식적인 충성과 헌신으로 이해한다면, 사랑의 진정한 본질을 훼손하지 않고 명령할 수 있다(요 13:34 비교). 하나님은 항상 당신의 계명에 대한 순종이 당신이 그들에게 베푸신 놀라운 자비와 사랑에 근거한 그분과의 개인적인 관계(“내가 너희를 내게로 이끌었다,” 출 19:4; 신 6:5; 마 22:37 비교)에서 비롯되기를 바라셨다. 

하나님을 사랑하라는 명령은 상호적이지만 대칭적이지 않은 하나님 사랑의 본질을 보여준다. 하나님은 당신의 사랑에 화답하는 모든 사람과 친밀하고 인격적인 관계를 맺기 원하신다. 모든 사람을 향한 그분의 보편적인 사랑은 우리의 자발적이고 상호적인 사랑을 나타낼 수 있는 장을 만들어 준다. 

 

<교훈> 하나님은 계명에 대한 순종이 당신이 그들에게 베푸신 놀라운 자비와 사랑에 근거한 그분과의 개인적인 관계에서 비롯되기를 바라셨다. 

 

<부가설명> 하나님과 그의 형상대로 창조되었으나 그 형상을 잃어버린 아담 자손들과 관계는 자녀를 잃어버린 부모의 심정으로 조금은 이해의 자리를 만들 수 있을 것이다. 하나님은 잃어버린 자식을 찾아서 다시 자녀의 신분과 지위를 회복시켜주려고 일하신다. 문제는 자녀였다가 실종된 사람들이 자신들의 이전 상태에 대하여 완전히 기억상실이 됐다는 것이다. 사탄은 아담 자손드레게 철저한 기억상실증을 주입했다. 그들이 다 사망이 되었기 때문이다. 사망한 자는 아무것도 모른다. 그러나 창조주께서 그들을 다시 생명으로 돌이킬 기간을 주셨는데 그것이 수명(壽命)이다. 이 기간을 은혜 받은 때와 구원의 날이라고 계시해주셨다(고후6:1,2). 이 기간 동안 육체의 생명을 유지하게 하셔서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길 수 있는 기회를 주셨다. 이것이 하나님의 사랑이다. 성경은 이것을 원수되었을 때에 사랑하신 것이라고 계시한다(롬5:8,10). 하나님의 사랑은 사망이 된 사람에게 영원한 생명을 얻도록 하는 사랑이다. 이것을 얻게 하려고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였다. 그래서 누구든지 예수님 안에서 이 생명을 얻도록 하셨다. 이것이 새계명으로서의 사랑이다. 이것을 끝까지 거절하면 하나님은 얼굴을 돌리신다. 숨기신다. 그러면 사망이 그를 완전히 장악하기 때문에 생명 얻는 기회가 없어지고 존재를 상실하게 된다. 이것을 사람들의 표현대로 형벌이나 재앙이라고 한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작위적(作爲的)인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생명을 거절한 존재들에게 당연히 임하는 사망의 잔인한 결과일 뿐이다. 하나님이 벌을 줬다고 생각하지 말라. 하나님은 얼굴을 돌이키시고 숨기신 것뿐이다. 그래서 하나님은 사랑이시다. 

 

12월 19일(금) 더 깊은 연구를 위하여

 

부조와 선지자 49장 “여호수아의 마지막 교훈” 521-522을 읽어 보라. 

“사탄은 당신의 백성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이 너무나 크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그들의 죄를 용서하실 것이라는 그럴듯한 이론으로 많은 사람을 기만한다. 사탄은 하나님의 말씀의 경고가 당신의 도덕적 통치에 있어서 특정한 목적을 이루기 위한 것이지 결코 문자 그대로 성취되지 않을 것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피조물을 대하시는 모든 일에서 죄의 참된 본질을 그대로 나타내심으로, 즉 죄의 분명한 결과는 비참함과 죽음이란 사실을 증거하심으로 의의 원칙을 유지해 오셨다. 죄에 대한 무조건적 용서는 존재한 적이 결코 없으며 앞으로도 결코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이와 같은 용서는 바로 하나님의 정부의 기초인 의의 원칙의 포기를 나타내게 된다. 이것은 타락하지 않은 우주를 큰 실망으로 채울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죄의 결과를 충실히 지적하셨는데 만일 이 경고가 참되지 않다면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의 약속이 성취되리라는 것을 확신할 수 있겠는가? 공의를 무시하는, 이름만의 자비심이란 것은 참된 자비심이 아니요 나약함이다. 

하나님은 생명을 주시는 분이시다. 태초부터 하나님의 모든 율법은 생명을 주시기 위한 것이다. 그러나 죄는 하나님께서 세우신 질서를 파괴하였고, 그리하여 불화가 그 뒤를 따랐다. 죄가 존재하는 한 고통과 사망은 불가피한 것이다. 오직 구세주께서 우리를 위하여 죄의 저주를 짊어지셨기 때문에 인류는 자신에게 닥칠 죄악의 무서운 결과를 피할 희망을 가질 수 있다”(부조와 선지자, 522).

 

함께하는 토의를 위하여 

1. 당신의 삶에서 하나님의 신실함을 보여주는 증거를 생각해 보라. 어떤 것을 찾을 수 있는가? 동시에, 일이 바라거나 기도한 대로 진행되지 않았을 때, 또는 약속된 것에 응답이 없을 때 당신은 어떻게 반응하는가?

*답: 각각 대답해 보자.

2. 하나님의 진노에 관한 성경의 가르침에 대해 토의해 보라. 여호와의 진노를 어떻게 복음의 일부로 제시하겠는가?

*답: 신31:16~18, 애3:43, 호9:12을 자세히 읽어보자.

3. 이번 주 교과에서 불신자와의 교제에 대한 어떤 원칙을 찾을 수 있는가? 사람들을 섬기고 안녕을 돌보기 위해 그들과 어울리면서, 원칙과 실천에서 명확한 경계를 세우는 일에 어떻게 균형을 맞출 수 있겠는가? 

*답: 새 계명의 정신으로 대하면 된다. 그들을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겨주려는 것이 진심으로 드러나게 해야 할 것이다. 고전 9장 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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