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0과 참 여호수아(질문, 대답, 설명) 12/06/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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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김명호 작성일25-11-27 18:43 조회104회 댓글0건본문
제10과 참 여호수아
(12월 6일 안식일 / 일몰: 오후 5시 13분)
연구 범위: 고전 10:1–13; 마 2:15; 수 1:1–3; 행 3:22–26; 히 3:7–4:11; 고후 10:3–5
기억절: “그들에게 일어난 이런 일은 본보기가 되고 또한 말세를 만난 우리를 깨우치기 위하여 기록되었느니라”(고전 10:11).
여호수아서는 주인공의 삶이 그 한 사람의 삶을 넘어선 더 위대한 실체를 가리키고 있다는 인상을 준다. 가나안 땅이 새 땅에서의 우리의 영원한 소망을 상징하는 것처럼 이러한 원리는 성경 전반에서 볼 수 있다. 지상 성소 제사가 더 큰 실체를 가리킨 것은 두말할 나위 없다. “그리스도께서는 다가올 좋은 일들의 대제사장으로 오시되 손으로 만들지 아니한 성막 곧 이 건물에 속하지 아니한 더 크고 더 완전한 성막을 통해 오”셨다(히 9:11, 흠정역).
그렇다면 여호수아서는 어떤 방식으로 미래의 성취를 가리키는가? 그러한 해석이 타당하다고 확신할 수 있는 근거는 무엇인가? 여호수아의 이야기를 신약의 실체와 종말 시대의 사건에 적용하게 하는 성경적 원칙은 무엇인가?
이번 주에는 표상학을 통한 성경 해석의 원칙을 살펴볼 것이다. 성경은 어떻게 표상학의 지표를 포함하고 있는지, 그리고 여호수아의 삶이 어떻게 메시아의 사역을 예표하면서 교회와 인류 역사 완성의 때에 이루어질 상징을 말하고 있는지를 살펴볼 것이다.
학습 목표
깨닫기: 여호수아의 삶은 더 위대한 실체를 가리키며 그 궁극적인 성취는 예수님을 통해 이루어진다.
느끼기: 참 여호수아이신 예수님은 하나님의 전사로서 우리에게 구원의 유업을 주신다.
행하기: 유업을 받은 우리는 영적인 전쟁 중에서도 예수님을 바라봄으로 그분의 삶과 성품을 나타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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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성경의 표상은 어떤 것을 나타내기 위해서 사용되었습니까?(롬 5:14)
*답: 예수 그리스도와 그분의 일을 나타내 위한 것이다.
3. 표상이 의미하는 것을 바르게 이해하기 위한 중요한 원칙은 무엇이라고 생각합니까?
*답: 성경이 계시한 방법을 따라 이해해야 한다.
4. 여호수아의 삶이 모세의 예언의 부분적 성취라는 말은 궁극적으로 무엇을 의미합니까?(신 18:15)
*답: 궁극적으로는 예수 그리스도를 의미한다.
5. 여호수아의 표상은 하늘의 전사, 참 여호수아이신 예수님에게서 어떻게 이루어 집니까?(히 9:15)
*답: 예수님의 재림으로 영원한 기업의 약속, 곧 새 하늘과 새 땅을 받는 것으로 이루어진다.
6. 메시아의 사역과 인격을 예표하는 여호수아의 삶은 오늘날 우리와 어떤 관계가 있습니까?(고후 3:18)
*답: 우리도 성령님 역사로 영광으로 영광에 이르는 것을 표상한다.
결론: 표상은 자의적으로 정할 수 없고 성경을 통해 기준과 원칙이 제시된다. 여호수아의 삶은 메시아의 사역과 교회와 인류 역사 완성의 때와 같은 더 위대한 실체를 가리키고 있다. 여호수아는 새 모세로 등장하지만 모세와 같은 선지자에 대한 예언의 궁극적 성취는 메시아에 의해서 이루어진다. 예수님의 삶은 여호수아의 표상과 깊이 연결되며 그분은 하나님의 전사로서 우리에게 구원의 유업을 주신다. 구원의 유업을 받은 오늘날 우리는 영적인 전쟁 가운데 있지만 여호수아처럼 예수님의 삶과 성품을 나타낼 수 있다.
11월 30일(일) 성경적 표상학
표상에 관한 다음 구절들을 연구하고 성경적 표상학이 무엇인지 정의해 보라(롬 5:14, 고전 10:1–13, 히 8:5, 히 9:23).
[롬5:14] 그러나 아담으로부터 모세까지 아담의 범죄와 같은 죄를 짓지 아니한 자들까지도 사망이 왕 노릇 하였나니 아담은 오실 자의 모형이라.
[고전10:1~13] 형제들아 나는 너희가 알지 못하기를 원하지 아니하노니 우리 조상들이 다 구름 아래에 있고 바다 가운데로 지나며 2 모세에게 속하여 다 구름과 바다에서 침례를 받고 3 다 같은 신령한 음식을 먹으며 4 다 같은 신령한 음료를 마셨으니 이는 그들을 따르는 신령한 반석으로부터 마셨으매 그 반석은 곧 그리스도시라 5 그러나 그들의 다수를 하나님이 기뻐하지 아니하셨으므로 그들이 광야에서 멸망을 받았느니라 6 이러한 일은 우리의 본보기가 되어 우리로 하여금 그들이 악을 즐겨 한 것 같이 즐겨 하는 자가 되지 않게 하려 함이니 7 그들 가운데 어떤 사람들과 같이 너희는 우상 숭배하는 자가 되지 말라 기록된 바 백성이 앉아서 먹고 마시며 일어나서 뛰논다 함과 같으니라 8 그들 중의 어떤 사람들이 음행하다가 하루에 이만 삼천 명이 죽었나니 우리는 그들과 같이 음행하지 말자 9 그들 가운데 어떤 사람들이 주를 시험하다가 뱀에게 멸망하였나니 우리는 그들과 같이 시험하지 말자 10 그들 가운데 어떤 사람들이 원망하다가 멸망시키는 자에게 멸망하였나니 너희는 그들과 같이 원망하지 말라 11 그들에게 일어난 이런 일은 본보기가 되고 또한 말세를 만난 우리를 깨우치기 위하여 기록되었느니라 12 그런즉 선 줄로 생각하는 자는 넘어질까 조심하라 13 사람이 감당할 시험 밖에는 너희가 당한 것이 없나니 오직 하나님은 미쁘사 너희가 감당하지 못할 시험 당함을 허락하지 아니하시고 시험 당할 즈음에 또한 피할 길을 내사 너희로 능히 감당하게 하시느니라.
[히8:5] 그들이 섬기는 것은 하늘에 있는 것의 모형과 그림자라 모세가 장막을 지으려 할 때에 지시하심을 얻음과 같으니 이르시되 삼가 모든 것을 산에서 네게 보이던 본을 따라 지으라 하셨느니라.
[히9:23] 그러므로 하늘에 있는 것들의 모형은 이런 것들로써 정결하게 할 필요가 있었으나 하늘에 있는 그것들은 이런 것들보다 더 좋은 제물로 할지니라.
*답: 역사적 사건이나 사람이 볼 수 있는 모형적 실물을 통하여 사람이 볼 수 없는 진리를 깨닫도록 하는 것이다.
이 성경 구절에서 신약성경 기자는 구약성경의 본문이나 사건이 그 당시나 미래에 어떤 의미가 있는지를 정의한 방식을 설명하기 위해 “표상”(typos, 헬라어) 또는 “실체”(antitypos)라는 용어를 사용한다.
표상학은 예수님이나 복음에 담긴 실체를 예시하는 인물, 사건, 또는 제도에 대한 특정한 해석이다. 표상(type)은 실체를 나타내는 형태 또는 모양 틀로서 실체(antitype)와 대응하며, 실체는 표상이 의도한 바를 더 충만하게 성취하기도 한다. 즉 성경의 표상은 하나님의 마음속에 구체적으로 또는 개념적으로 존재했던 그분의 계획을 따라 형성된 것이며, 미래에 나타날 실체를 보여주는 역할을 한다.
특별히 주의할 점은 신약성경 기자들이 자신의 주장을 펼치기 위해서 구약성경 본문에 임의로 표상적 의미를 부여한 것이 아니라는 점을 이해하는 것이다. 구약의 표상은 신약에서 실체로서의 성취가 증명되기 전에 항상 예언서에서 그 타당성이 먼저 확인된다.
다윗이 구약에서 어떻게 나타나고 신약에서 어떻게 예시되는지를 살펴보라. 이 예를 통해 표상학이 어떻게 성립되는지에 대해 무엇을 알 수 있는가?
a. 다윗(시 22:1, 14–18): 내 하나님이여 내 하나님이여 어찌 나를 버리셨나이까 어찌 나를 멀리 하여 돕지 아니하시오며 내 신음 소리를 듣지 아니하시나이까/ 14 나는 물 같이 쏟아졌으며 내 모든 뼈는 어그러졌으며 내 마음은 밀랍 같아서 내 속에서 녹았으며 15 내 힘이 말라 질그릇 조각 같고 내 혀가 입천장에 붙었나이다 주께서 또 나를 죽음의 진토 속에 두셨나이다 16 개들이 나를 에워쌌으며 악한 무리가 나를 둘러 내 수족을 찔렀나이다 17 내가 내 모든 뼈를 셀 수 있나이다 그들이 나를 주목하여 보고 18 내 겉옷을 나누며 속옷을 제비 뽑나이다.
*답: 예수께서 십자가에 달리셨을 때 일어난 고난의 사건의 표상이다.
b. 표상인 다윗(렘 23:5; 사 9:5, 6; 사 11:1–5):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보라 때가 이르리니 내가 다윗에게 한 의로운 가지를 일으킬 것이라 그가 왕이 되어 지혜롭게 다스리며 세상에서 정의와 공의를 행할 것이며/ 사9:5 어지러이 싸우는 군인들의 신과 피 묻은 겉옷이 불에 섶 같이 살라지리니 6 이는 한 아기가 우리에게 났고 한 아들을 우리에게 주신 바 되었는데 그의 어깨에는 정사를 메었고 그의 이름은 기묘자라, 모사라, 전능하신 하나님이라, 영존하시는 아버지라, 평강의 왕이라 할 것임이라. 사11:1~5 이새의 줄기에서 한 싹이 나며 그 뿌리에서 한 가지가 나서 결실할 것이요 2 그의 위에 여호와의 영 곧 지혜와 총명의 영이요 모략과 재능의 영이요 지식과 여호와를 경외하는 영이 강림하시리니 3 그가 여호와를 경외함으로 즐거움을 삼을 것이며 그의 눈에 보이는 대로 심판하지 아니하며 그의 귀에 들리는 대로 판단하지 아니하며 4 공의로 가난한 자를 심판하며 정직으로 세상의 겸손한 자를 판단할 것이며 그의 입의 막대기로 세상을 치며 그의 입술의 기운으로 악인을 죽일 것이며 5 공의로 그의 허리띠를 삼으며 성실로 그의 몸의 띠를 삼으리라.
*답: 다윗의 행적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실상을 표상함.
c. 다윗의 실체(요 19:24): 군인들이 서로 말하되 이것을 찢지 말고 누가 얻나 제비 뽑자 하니 이는 성경에 그들이 내 옷을 나누고 내 옷을 제비 뽑나이다 한 것을 응하게 하려 함이러라 군인들은 이런 일을 하고,
*답: 다윗이 경험한 사건이 예수님이 당하실 사건의 표상이고 예수님이 당하신 것은 실상이다.
이 본문들을 살펴보면, 구약성경 자체가 성경 속의 표상을 분별하고 적용하는 열쇠를 제공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즉, 구약을 성경으로 사용했던 신약성경 기자들은 성령의 감동으로 구약의 표상을 사용하여 “현대 진리”(벧후 1:12), 특히 예수님과 그분의 사역에 대한 진리를 드러내도록 영감을 받았다.
<교훈> 성경의 표상은 하나님의 마음속에 구체적으로 또는 개념적으로 존재했던 그분의 계획을 따라 형성된 것이며, 미래에 나타날 실체를 보여주는 역할을 한다.
<부가설명> 예수님은 “내가 땅의 일을 말하여도 너희가 믿지 아니하거든 하물며 하늘 일을 말하면 어떻게 믿겠느냐”(요3:12)라고 말씀하셨다. 표상이나 비유나 상징등은 따의 것으로 하늘을 깨닫게 하는 성경의 한 방법이다. 예수님은 하늘 존재시다. 사람은 땅에 산다. 하나님은 친히 말씀하셨다. “여호와의 말씀에 내 생각은 너희 생각과 다르며 내 길은 너희 길과 달라서 하늘이 땅보다 높음같이 내 길은 너희 길보다 높으며 내 생각은 너희 생각보다 높으니라”(사55:8,9). 그래서 땅의 것으로 하늘을 볼 수 있도록 예수께서 친히 사람이 되셔서 우리에게 하늘을 열어주셨다. 예수님 자신이 그런 역할을 하셨지만, 성경의 많은 기록은 땅의 것으로 하늘을 가르쳐준다. 성소나 성전이 그렇다. 비유와 상징이 그렇다. 떠 이스라엘과 그들의 역사가 그렇다. 그래서 그리스도인들은 이스라엘의 역사가 중심인 구약성경을 열심히 탐구한다. 그것은 이스라엘의 역사를 연구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으로 인류 구원의 역사를 보고 배우기 때문이다. 표상학이 이 일을 담당하는 한 방법이다.
12월 1일(월) 표상과 실체
성경의 무엇이 표상을 결정하는지, 또는 그 특정한 표상이 신약과 그 이후에 어떻게 성취되는지는 성경을 해석하는 사람이 자의적으로 결정할 수 없다. 성경은 스스로 성경적 표상학의 적용에 대한 몇 가지 기준과 원칙을 제공한다.
신약성경 역시 표상이 실체로 성취되는 것을 세 가지 뚜렷한 단계인 (1) 그리스도의 생애(기독론적 성취), (2) 교회의 경험(교회론적 성취), (3) 마지막 때(종말론적 성취)로 나누어 설명한다.
우리는 성경 전반에서 이러한 표상과 실체를 발견할 수 있으며, 이는 독자들이 성경을 이해하고, 하나님의 말씀이 예수님과 구원, 그리고 우리가 가진 궁극적인 소망에 대해 가르치고 있는 진리를 이해하는 데 매우 도움이 된다.
다음의 구약의 표상들을 살펴보라. 이스라엘, 출애굽, 성소의 표상이 세 가지 실체의 단계(기독론적, 교회론적, 종말론적)에서 각각 어떻게 성취되는가?
1. 이스라엘
a. 기독론적 단계(마태복음 2:15): “헤롯이 죽기까지 거기 있었으니 이는 주께서 선지자로 말씀하신 바 애굽에서 내 아들을 불렀다 함을 이루려 하심이니라” 출애굽 사건은 예수님이 어릴 때 애굽 들어갔다가 나오는 것의 표상
b. 교회론적 단계(갈라디아서 6:16): “무릇 이 규례를 행하는 자에게와 하나님의 이스라엘에게 평강과 긍휼이 있을지어다.” 이스라엘은 교회의 표상이다.
c. 종말론적 단계(계시록 7:4–8, 14) “각 지파마다 12000명씩 14400명” “14 내가 가로되 내 주여 당신이 알리이다 하니 그가 나더러 이르되 이는 큰 환난에서 나오는 자들인데 어린 양의 피에 그 옷을 씻어 희게 하였느니라” 역사의 종말에 형성되는 영적 이스라엘.
2. 출애굽
a. 기독론적 단계(마태복음 2:19–21) 이것은 이스라엘 기독론적 단계와 같다.
b. 교회론적 단계(고린도후서 6:17) “그러므로 너희는 그들 중에서 나와서 따로 있고 부정한 것을 만지지 말라 내가 너희를 영접하여” 애굽에서 나오는 것이다.
c. 종말론적 단계(계시록 18:4) “또 내가 들으니 하늘로부터 다른 음성이 나서 이르되 내 백성아, 거기서 나와 그의 죄에 참여하지 말고 그가 받을 재앙들을 받지 말라” 역사의 종말에 애굽과 바벨론에서 나와야 한다.
3. 성소
a. 기독론적 단계(요한복음 1:14, 요한복음 2:21, 마태복음 26:61) 말씀 하나님께사 사람이 되어 속죄를 이루셨다. 성소는 그리스도의 몸을 표상했다. 부활하셔서 새 생명의 성전을 보이셨다.
b. 교회론적 단계(고린도전서 3:16, 17; 고린도후서 6:16) 몸이 성전이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이다.
c. 종말론적 단계(계시록 3:12, 계시록 11:19, 계시록 21:3, 계시록 21:22) 새 예루살렘이 성전이다.
“성경의 저자는 거룩하신 한 분이시기에, 성경의 다양한 부분은 서로 일관성을 보인다. …성경의 모든 교리는 서로 협력하며, 각 구절에 대한 해석은 주어진 주제에 대한 성경 전체의 가르침과 조화를 이룰 것이다”(라울 데데렌 편, Raoul Dederen, ‘SDA 신학 핸드북,’ 메릴랜드 헤거스타운, 2000, 65).
<교훈> 표상이 신약과 그 이후에 어떻게 성취되는지는 자의적으로 결정할 수 없다. 성경은 스스로 성경적 표상학의 적용에 대한 기준과 원칙을 제공한다.
<부가설명>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다. 이것은 사람이 듣지도, 보지도, 마음으로 생각하지도 못한 내용이다(고전2:9). 그것은 하늘이 땅에서 높은 것 같이 하나님의 생각과 길은 우리 생각과 길보다 땅과 하늘만큼 차이나게 높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어줍짢은 사람의 사고방식과 신학이나 문학이나 철학적 시각을 해석하면 안 된다. 오직 성경이 성경을 해석하는 그 원칙에 의하여 해석해야 한다. “해석은 하나님께 있다”(창40:8). 표상학적 내용뿐만 아니라 성경의 모든 진리는 사람에게 해석을 맡기지 않으셨다. 그래서 성령 하나님을 보혜사로 보내셨다. 우리는 성령의 감동으로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그대로 성경을 해석하고 깨달아야 한다. 오늘날 인터넷 AI 등의 도움을 받을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이 성경의 전체 사상과 일치하는지 정직하게 검토해야 한다. 그것이 베레아 사람들의 모본으로 가르쳐주신 것이다. 바울은 성경이 무엇을 말하느냐고 물었다(롬4:3). 우리도 그렇게 물어야 한다. “누가 철학과 헛된 속임수로 너희를 사로잡을까 주의하라 이것은 사람의 전통과 세상의 초등학문을 따름이요 그리스도를 따름이 아니니라”(골2:8), 요즘 신학은 더욱 이런 데로 기울어지는 것 같다. 말씀에 전적으로 굴복하자.
12월 2일(화) 표상인 여호수아
성경적 표상학의 관점에서 모세와 여호수아의 삶 사이에 나타나는 여러 개의 평행구조는 어떤 의미를 가지는가?(출 3:1, 2; 수 1:1–3; 민 13:1, 2; 수 2:1; 출 3:5; 수 5:15 참조)
[출3:1,2] 모세가 그의 장인 미디안 제사장 이드로의 양 떼를 치더니 그 떼를 광야 서쪽으로 인도하여 하나님의 산 호렙에 이르매 2 여호와의 사자가 떨기나무 가운데로부터 나오는 불꽃 안에서 그에게 나타나시니라 그가 보니 떨기나무에 불이 붙었으나 그 떨기나무가 사라지지 아니하는지라.
[수1:1~3] 여호와의 종 모세가 죽은 후에 여호와께서 모세의 수종자 눈의 아들 여호수아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2 내 종 모세가 죽었으니 이제 너는 이 모든 백성과 더불어 일어나 이 요단을 건너 내가 그들 곧 이스라엘 자손에게 주는 그 땅으로 가라 3 내가 모세에게 말한 바와 같이 너희 발바닥으로 밟는 곳은 모두 내가 너희에게 주었노니,
[민13:1,2]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2 사람을 보내어 내가 이스라엘 자손에게 주는 가나안 땅을 정탐하게 하되 그들의 조상의 가문 각 지파 중에서 지휘관 된 자 한 사람씩 보내라.
[수2:1] 눈의 아들 여호수아가 싯딤에서 두 사람을 정탐꾼으로 보내며 이르되 가서 그 땅과 여리고를 엿보라 하매 그들이 가서 라합이라 하는 기생의 집에 들어가 거기서 유숙하더니,
[출3:5] 하나님이 이르시되 이리로 가까이 오지 말라 네가 선 곳은 거룩한 땅이니 네 발에서 신을 벗으라.
[수5:15] 여호와의 군대 대장이 여호수아에게 이르되 네 발에서 신을 벗으라 네가 선 곳은 거룩하니라 하니 여호수아가 그대로 행하니라.
*답: 이스라엘을 가나안 땅에 이르도록 하는 하나님께 사명을 동일하게 받아서 수행했다. 여호수아가 모세의 직접적인 후계자임을 확증한다. 표상학적으로 둘 다 그리스도의 표상이 된다.
첫째 주에 살펴본 것처럼, 여호수아는 출애굽의 가장 중요한 과정들을 두 번째 세대의 삶에서 재현하는 새로운 모세로 제시되었다. 모세가 그랬던 것처럼, 여호수아도 주님과의 개인적인 만남을 통해 사명을 받았다. 모세와 여호수아의 지도 아래, 이스라엘은 열국 가운데 두려움을 갖게 하는 이름이 되었다. 모세는 이스라엘이 홍해를 건너도록 이끌었고, 여호수아는 이스라엘이 요단강을 기적적으로 건너게 했다. 두 지도자 모두 할례의 필요성과 유월절의 중요성을 다시 깨달았다. 만나는 모세 시대에 내리기 시작해서, 여호수아 시대에 그쳤다. 두 사람 모두 신발을 벗으라는 명령을 받았고, 두 사람의 펼친 손은 이스라엘의 승리를 상징했다. 모세는 땅을 분배하고 도피성을 세우도록 지시했고, 여호수아는 그 지시를 이행했다. 두 사람 모두 사역을 마칠 무렵 백성에게 고별 연설을 했고 백성들이 언약을 새롭게 하게 했다.
신명기 18:15–19, 신명기 34:10–12, 요한복음 1:21, 사도행전 3:22–26, 사도행전 7:37을 연구해 보라. “나와 같은 선지자”에 대한 모세의 예언을 누가 성취했는가? 여호수아는 이 구도를 어떻게 충족하는가?
[신18:15~19]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 가운데 네 형제 중에서 너를 위하여 나와 같은 선지자 하나를 일으키시리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을지니라 16 이것이 곧 네가 총회의 날에 호렙 산에서 네 하나님 여호와께 구한 것이라 곧 네가 말하기를 내가 다시는 내 하나님 여호와의 음성을 듣지 않게 하시고 다시는 이 큰 불을 보지 않게 하소서 두렵건대 내가 죽을까 하나이다 하매 17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그들의 말이 옳도다 18 내가 그들의 형제 중에서 너와 같은 선지자 하나를 그들을 위하여 일으키고 내 말을 그 입에 두리니 내가 그에게 명령하는 것을 그가 무리에게 다 말하리라 19 누구든지 내 이름으로 전하는 내 말을 듣지 아니하는 자는 내게 벌을 받을 것이요.
[신34:10~12] 그 후에는 이스라엘에 모세와 같은 선지자가 일어나지 못하였나니 모세는 여호와께서 대면하여 아시던 자요 11 여호와께서 그를 애굽 땅에 보내사 바로와 그의 모든 신하와 그의 온 땅에 모든 이적과 기사와 12 모든 큰 권능과 위엄을 행하게 하시매 온 이스라엘의 목전에서 그것을 행한 자이더라.
[요1:21] 또 묻되 그러면 누구냐 네가 엘리야냐 이르되 나는 아니라 또 묻되 네가 그 선지자냐 대답하되 아니라.
[행3:22~26] 모세가 말하되 주 하나님이 너희를 위하여 너희 형제 가운데서 나 같은 선지자 하나를 세울 것이니 너희가 무엇이든지 그의 모든 말을 들을 것이라 23 누구든지 그 선지자의 말을 듣지 아니하는 자는 백성 중에서 멸망 받으리라 하였고 24 또한 사무엘 때부터 이어 말한 모든 선지자도 이 때를 가리켜 말하였느니라 25 너희는 선지자들의 자손이요 또 하나님이 너희 조상과 더불어 세우신 언약의 자손이라 아브라함에게 이르시기를 땅 위의 모든 족속이 너의 씨로 말미암아 복을 받으리라 하셨으니 26 하나님이 그 종을 세워 복 주시려고 너희에게 먼저 보내사 너희로 하여금 돌이켜 각각 그 악함을 버리게 하셨느니라.
[행7:37] 이스라엘 자손에 대하여 하나님이 너희 형제 가운데서 나와 같은 선지자를 세우리라 하던 자가 곧 이 모세라.
*답: 여호수아는 일부 모세의 예언을 이루었으나 오직 예수 그리스도에 의하여 이 예언은 성취되었다.
여호수아의 삶은 모세의 예언(신 18:15, 18)의 부분적 성취였다. 그러나 모세의 예언은 아직 완전히 성취되지 않았다.
이 예언이 궁극적으로 성취되는 것은 오직 메시아에 의해서만 가능했다. 메시아는 아버지를 친밀하게 아셨고(요 1:14, 18), 그분은 참되시며 하나님을 진실하게 나타내셨다(눅 10:22, 요 14:6, 마 22:16). 진실로 하나님은 그분의 입에 당신의 말씀을 두셨다(요 14:24). 그러므로 모세와 여호수아의 삶은 모두 오실 메시아, 곧 예수 그리스도의 예표가 된다.
<교훈> 여호수아는 출애굽의 중요한 과정을 재현하는 새 모세였지만 궁극적 성취는 오직 메시아에 의해서 가능하다. 두 지도자의 삶은 오실 메시아의 예표가 된다.
<부가설명> 하나님은 사람들이 혼동할 수 없도록 모든 면에서 구주를 바르게 알아보도록 조치하셨다. 그러나 말씀을 올바르게 알려는 생각보다 현실적 필요에 초점을 맞춘 눈이 말씀을 올바르게 깨닫지 못했다. 이스라엘 지도자들은 안식일마다 말씀을 외웠다. “예루살렘에 사는 자들과 저희 관원들이 예수와 및 안식일마다 외우는 바 선지자들의 말을 알지 못하므로 예수를 정죄하여 선지자들의 말을 응하게 하였도다”(행13:27). 여호수아는 모세 바로 다음에 모세가 수행한 일을 계승하여 같은 일을 수행했다. 그러나 성경은 “만일 여호수아가 저희에게 안식을 주었더면 그 후에 다른 날을 말씀하지 아니하셨으리라”(히4:8)라고 말씀하셨다. 여호수아서에 “여호와께서 그들의 사방에 안식을 주셨으되 그 열조에게 맹세하신 대로 하셨으므로 그 모든 대적이 그들을 당한 자가 하나도 없었으니 이는 여호와께서 그들의 모든 대적을 그들의 손에 붙이셨음이라”(수21:44).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의 사방 대적을 다 멸하시고 안식을 이스라엘에게 주신 지 오랜 후에 여호수아가 나이 많아 늙은지라”(수23:1)라고 기록했으나 히브리서는 여호수아가 그들에게 안식을 주지 못했다고 한다. 이 안식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어진다. 지금은 예수께서 이 영원한 생명의 안식을 받도록 모든 일을 이루셨다. 우리는 그분 안에서 참 안식을 누리도록 믿음으로 살아야 할 것이다(마11:28~30).
12월 3일(수) 실체인 참 여호수아
여호수아의 이야기는 표상학의 관점에서 보아야 한다. 여호수아가 수행한 전쟁은 이스라엘 역사의 중요한 부분을 구성하는 역사적 사건이다. 이 전쟁의 목적은 이스라엘 백성이 그들에게 주어진 유업을 평화롭게 누리고 하나님의 율법의 원칙에 기초한 새로운 사회를 세울 수 있는 약속의 땅에 정착하게 하는 것이다.
후대의 구약의 저자들, 특히 이사야는 메시아의 사역을 “그들에게 황무하였던 땅을 기업으로 상속하게”(사 49:8) 하는 것으로 묘사하며, 여호수아서에 자주 등장하는 동일한 용어를 사용한다. 여호수아의 임무가 이스라엘 백성에게 땅을 분배하는 것이었듯이, 새로운 여호수아로 묘사된 메시아는 새 이스라엘에게 영적인 유업을 나누어 주신다.
히브리서 3:7–4:11을 읽어 보라. 신약성경은 새로운 모세인 여호수아가 예수 그리스도의 예표임을 어떻게 확증하는가?
[히3:7~4:11] 그러므로 성령이 이르신 바와 같이 오늘 너희가 그의 음성을 듣거든
8 광야에서 시험하던 날에 거역하던 것 같이 너희 마음을 완고하게 하지 말라 9 거기서 너희 열조가 나를 시험하여 증험하고 사십 년 동안 나의 행사를 보았느니라 10 그러므로 내가 이 세대에게 노하여 이르기를 그들이 항상 마음이 미혹되어 내 길을 알지 못하는도다 하였고 11 내가 노하여 맹세한 바와 같이 그들은 내 안식에 들어오지 못하리라 하였다 하였느니라 12 형제들아 너희는 삼가 혹 너희 중에 누가 믿지 아니하는 악한 마음을 품고 살아 계신 하나님에게서 떨어질까 조심할 것이요 13 오직 오늘이라 일컫는 동안에 매일 피차 권면하여 너희 중에 누구든지 죄의 유혹으로 완고하게 되지 않도록 하라 14 우리가 시작할 때에 확신한 것을 끝까지 견고히 잡고 있으면 그리스도와 함께 참여한 자가 되리라 15 성경에 일렀으되 오늘 너희가 그의 음성을 듣거든 격노하시게 하던 것 같이 너희 마음을 완고하게 하지 말라 하였으니 16 듣고 격노하시게 하던 자가 누구냐 모세를 따라 애굽에서 나온 모든 사람이 아니냐 17 또 하나님이 사십 년 동안 누구에게 노하셨느냐 그들의 시체가 광야에 엎드러진 범죄한 자들에게가 아니냐 18 또 하나님이 누구에게 맹세하사 그의 안식에 들어오지 못하리라 하셨느냐 곧 순종하지 아니하던 자들에게가 아니냐 19 이로 보건대 그들이 믿지 아니하므로 능히 들어가지 못한 것이라./ 4:1 그러므로 우리는 두려워할지니 그의 안식에 들어갈 약속이 남아 있을지라도 너희 중에는 혹 이르지 못할 자가 있을까 함이라 2 그들과 같이 우리도 복음 전함을 받은 자이나 들은 바 그 말씀이 그들에게 유익하지 못한 것은 듣는 자가 믿음과 결부시키지 아니함이라 3 이미 믿는 우리들은 저 안식에 들어가는도다 그가 말씀하신 바와 같으니 내가 노하여 맹세한 바와 같이 그들이 내 안식에 들어오지 못하리라 하셨다 하였으나 세상을 창조할 때부터 그 일이 이루어졌느니라 4 제칠일에 관하여는 어딘가에 이렇게 일렀으되 하나님은 제칠일에 그의 모든 일을 쉬셨다 하였으며 5 또 다시 거기에 그들이 내 안식에 들어오지 못하리라 하였으니 6 그러면 거기에 들어갈 자들이 남아 있거니와 복음 전함을 먼저 받은 자들은 순종하지 아니함으로 말미암아 들어가지 못하였으므로 7 오랜 후에 다윗의 글에 다시 어느 날을 정하여 오늘이라고 미리 이같이 일렀으되 오늘 너희가 그의 음성을 듣거든 너희 마음을 완고하게 하지 말라 하였나니 8 만일 여호수아가 그들에게 안식을 주었더라면 그 후에 다른 날을 말씀하지 아니하셨으리라 9 그런즉 안식할 때가 하나님의 백성에게 남아 있도다 10 이미 그의 안식에 들어간 자는 하나님이 자기의 일을 쉬심과 같이 그도 자기의 일을 쉬느니라 11 그러므로 우리가 저 안식에 들어가기를 힘쓸지니 이는 누구든지 저 순종하지 아니하는 본에 빠지지 않게 하려 함이라.
*답: 특히 히브리서는 여호수아가 예수 그리스도의 표상이라고 기록했다.
신약성경의 기자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의 여러 측면을 여호수아의 사역과 연결해서 제시했다. 여호수아가 광야에서 40년을 보낸 후 가나안에 들어갔듯이, ‘실체의 여호수아’이신 예수님은 광야에서 40일을 보내신 후 지상 사역을 시작하셨고(마 4:1–11, 눅 4:1–13), 부활 후에도 광야 같은 이 땅에서 40일을 보내신 후 하늘 사역에 들어가셨다(행 1:3, 9–11; 히 1:2).
예수께서 요단강에서 침례를 받으신 후(그분의 ‘요단강 건너기,’ 마 3:13–17, 막 1:9–11), 복음서 기자들은 메시아 시편인 시편 2:7과 고난받는 여호와의 종에 관한 노래인 이사야 42:1을 인용(마 3:17, 막 1:11, 눅 3:22)한다.
결과적으로 예수님은 침례를 통해, 죽임 당하시기까지 신실한 순종의 삶을 사시고 악의 세력에 맞서 여호와의 전쟁을 싸우시는 하나님의 전사로 나타나신다. 십자가를 지신 그분의 삶과 죽음은 사탄을 몰아내고, 우리의 영적 원수들을 정복하며, 당신의 백성에게 영적 안식을 주었으며, 구원받은 자들에게 유업을 나누어 주었다(엡 4:8, 히 1:4, 히 9:15).
<교훈> 신약은 예수의 사역을 여호수아의 사역과 연결해서 제시했다. 요단강에서 침례 받으신 예수님은 하나님의 전사로서 당신의 백성에게 구원의 유업을 주신다.
<부가설명> 여호수아서에는 여호수아가 이스라엘에게 안식을 주었다고 기록했다. 그러나 히브리서는 여호수아가 그들에게 안식을 주지 못했다고 기록한다(히4:8). 이것은 여호수아의 인도로 글어간 가나안 땅은 하나님께서 영원한 구원으로 그의 백성에게 주실 참 안식의 그림자에 불과하다는 것을 지적한 것이다. 여호수아서를 읽고 다음 책인 사사기를 읽으면 여호수아가 그들에게 참 안식을 주지 못한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여호수아에 기록된 사건은 가나안 땅에 정착하도록 기초를 놓은 것을 지적한다. 그러나 히브리서에 기록대로 그것은 참 안식이 되지 못했다. 다남 참 여호수아이신 예수님이 그것을 완전하게 이루실 것이다. 히브리서에 여호수아라고 번역한 헬라어는 예수라고 번역한 헬라어와 똑같은 단어 ‘이에수스=Ἰησοῦς’이다. 그것은 여호수아가 예수님을 표상한다는 것을 문자적으로도 나타낸 기록이다. 우리는 예수님 안에서 영원한 안식을 얻고 누릴 것이다. 아멘.
12월 4일(목) 여호수아와 우리
여호수아는 한 표상으로서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을 넘어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 가운데서 이루어질 성취를 가리킨다. 여호수아 시대에 이스라엘이 싸운 전쟁들은 어떤 의미에서 교회의 영적 투쟁을 예표하는가? 또 그 둘 사이에는 어떤 차이가 있는가?(딤전 1:18, 딤후 4:7, 엡 6:10–12, 고후 10:3–5, 행 20:32 참조).
[딤전1:18] 아들 디모데야 내가 네게 이 교훈으로써 명하노니 전에 너를 지도한 예언을 따라 그것으로 선한 싸움을 싸우며,
[딤후4:7] 나는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엡6:10~12] 끝으로 너희가 주 안에서와 그 힘의 능력으로 강건하여지고 11 마귀의 간계를 능히 대적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전신 갑주를 입으라 12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을 상대하는 것이 아니요 통치자들과 권세들과 이 어둠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을 상대함이라.
[고후10:3~5] 우리가 육신으로 행하나 육신에 따라 싸우지 아니하노니 4 우리의 싸우는 무기는 육신에 속한 것이 아니요 오직 어떤 견고한 진도 무너뜨리는 하나님의 능력이라 모든 이론을 무너뜨리며 5 하나님 아는 것을 대적하여 높아진 것을 다 무너뜨리고 모든 생각을 사로잡아 그리스도에게 복종하게 하니,
[행20:32] 지금 내가 여러분을 주와 및 그 은혜의 말씀에 부탁하노니 그 말씀이 여러분을 능히 든든히 세우사 거룩하게 하심을 입은 모든 자 가운데 기업이 있게 하시리라.
*답: 여호수아 개인보다는 여호수아서가 보여주는 것은 선한 싸움을 싸우는 교화의 표상이다. 동시에 성도들의 신앙적 싸움 곧 영적 싸움의 표상이다.
신약의 기자들은 여호수아의 표상의 교회론적 성취를 인지하고 있다.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의 구성원들은 악한 세력에 맞서는 영적 전쟁 가운데 있지만 동시에 하나님의 은혜로 누리는 안식(히 4:9–11)과 영적 유산의 축복을 경험한다.
이 구절들은 여호수아의 표상의 궁극적 성취에 대해 무엇을 말하고 있는가?(벧전 1:4, 골 3:24, 계 20:9, 계 21:3)
[벧전1:4] 썩지 않고 더럽지 않고 쇠하지 아니하는 유업을 잇게 하시나니 곧 너희를 위하여 하늘에 간직하신 것이라.
[골3:24] 이는 기업의 상을 주께 받을 줄 아나니 너희는 주 그리스도를 섬기느니라.
[계20:9] 그들이 지면에 널리 퍼져 성도들의 진과 사랑하시는 성을 두르매 하늘에서 불이 내려와 그들을 태워버리고,
[계21:3] 내가 들으니 보좌에서 큰 음성이 나서 이르되 보라 하나님의 장막이 사람들과 함께 있으매 하나님이 그들과 함께 계시리니 그들은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하나님은 친히 그들과 함께 계셔서,
*답: 영원한 세상 새 하늘과 새 땅을 유업으로 받을 것을 표상한다.
여호수아의 표상의 궁극적이고 완전한 성취는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 때에 이루어질 것이다(종말론적 국면).
여호수아의 삶은 하나님의 성품을 매우 뚜렷하게 반영하기 때문에, 그의 삶의 특정 측면은 메시아의 사역과 인격을 예표하는 예언적 성격을 띠고 있다.
메시아는 오늘날 우리에게 이미 오셨다. 그렇기에 더 이상 그분의 사역이 예표될 필요가 없지만, 우리는 여전히 그분의 성품을 나타낼 수 있는 특권이 있다. 이것은 그리스도께서 제자들과 나누고자 했던 영광(요 17:22)이며, 우리도 그리스도의 성품을 묵상함으로써 그 특권에 동참할 수 있다(고후 3:18). 예수를 더 깊이 묵상할수록 우리는 그분의 성품의 아름다움을 더욱 반영하게 된다.
이는 매일 그리스도와의 동행을 통해 나타내야 할 본질적인 모습이다. 이것이 바로 매일 말씀과 함께하는 시간, 또 예수님의 삶과 성품, 가르침을 묵상하는 시간을 가져야 하는 중요한 이유이다. 우리는 그분을 바라봄으로 변화된 사람이 될 수 있다.
<교훈> 교회는 영적 전쟁 중이지만 은혜와 영적 유산의 축복을 경험한다. 우리도 예수를 묵상함으로 여호수아가 예표하는 예수님의 삶과 성품을 나타낼 수 있다.
<부가설명> 예수께서는 온유한 자가 땅을 기업을 받을 것이라고 하셨다(마5:5). 아담을 창조하시고 주신 것은 지구라는 땅이었다. 아브라함에 약속하신 것도 가나안이라는 땅이고 이삭 야곱에게 약속하신 것도 그 땅이다. 출애굽과 여호수아는 그 땅을 얻는 여정을 기록했다. 그땅은 하나님께서 주시겠다고 약속하셨기에 가서 차지하면 되었다. 그런데 그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그대로 순종하지 않아서 광야에서 죽고 둘째 세대가 들어갔다. 구약에서나 신약에서나 궁극적으로 약속하신 땅은 같다. 가나안이 아니라 새 하늘과 새 땅이다. 그것은 태초에 창조하신 상태를 그대로 간직한 땅이요 더 나아진 땅이다. 그래서 새 하늘과 새 땅이라고 하셨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그분의 부활의 생명을 얻었으면 거기 갈 것이다. 얻은 것을 잘 지켜야 한다. 지키는 방법이 말씀 안에 있는 것이다. 오늘날 교회가 말씀 안에 올바르게 거하지 않으면 출애굽 일 세대처럼 광야에서 망하고 말 것이다.
12월 5일(금) 더 깊은 연구를 위하여
“그 당시 사람들은 그리스도의 사명을 이해하지 못했다. …사람들의 전통과 격언은 참 종교를 이해하고 실천하는 데 장애물이 되었다. 그리스도의 인성 안에서 모든 의식의 실체가 나타났을 때 그들은 그분을 통해 성취된 모든 표상의 성취와 모든 그림자의 실체를 인식하지 못했다. 그들은 실체이신 분을 거절하고 자신들의 표상과 무의미한 예식을 고집하였다. 하나님의 아들이 오셨지만 그들은 계속하여 그분께 표적을 요구하고 있었다.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느니라’(마 3:2)는 기별에 그들은 기적을 보여 달라고 요구했다. 그리스도의 복음이 그들에게 걸림돌이 된 것은 그들이 구주가 아닌 기적을 요구했기 때문이다. 그들은 메시아가 오시면 강력한 정복으로 당신이 메시아라는 주장을 증명하고 세상의 왕국들을 무너뜨리고 당신의 왕국을 세우시기를 기대하였다. 그리스도께서는 이러한 기대에 씨뿌리는 비유로써 응답하셨다. 하나님의 나라는 무력이나 폭력적인 수단에 의하여 건설되는 것이 아니라 사람의 마음속에 새로운 원칙을 심음으로 건설된다는 것을 나타내 보이셨다”(실물교훈, 34).
“교회에는 하나님의 단순한 조건인 순종을 통해 영생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있는 신실한 갈렙과 여호수아 같은 이들이 필요하다. 우리의 교회는 일꾼들이 부족해 고통당하고 있다. 세상은 우리의 밭이다. 진리의 빛을 결코 본 적이 없는 동방의 이교도들보다 더 깊이 우상숭배에 빠져있는 도시와 마을에서 일할 선교사들이 필요하다. 그토록 고귀하게 신앙을 고백하는 교회에 진정한 선교 정신이 결여되어 있다. 그들의 마음은 더 이상 영혼들에 대한 사랑과, 그들을 그리스도의 품으로 인도하고자 하는 열망으로 타오르지 않는다. 우리는 열심 있는 일꾼이 필요하다. 도처에서 들려오는 ‘와서 우리를 도우라’는 외침에 응답할 사람이 없는가?”(교회증언 4권, 156)
함께하는 토의를 위하여
1. 성경적 표상학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를 위해 행하신 사역을 이해하는 데 어떤 도움을 주는가?*답: 역사적 실물교훈으로 가르쳐준다.
2. 우리의 영적 전쟁은 가나안 정복과 어떤 면에서 유사하며, 차이가 있는가?
*답: 가나안 정복은 물리적 싸움이었고 우리의 전쟁은 보이지 않는 적고 싸우는 전쟁이다.
3. 여호수아 표상의 궁극적인 성취에 대해 생각해 보라. 고통이나 죽음이 없는 세상의 모습은 일상적인 투쟁 중에 있는 우리에게 어떻게 참된 소망을 주는가?
*답: 인내로 그 때를 바라보고 투쟁의 고통을 견딜 수 있다.
4. 여호수아는 그리스도의 사역을 예표할 만큼 하나님의 성품을 반영하여 나타냈다. 예수께서 그대를 통해 당신의 성품을 더욱 온전히 나타낼 수 있게 하는 실질적인 방법은 어떤 것이 있겠는가?
*답: 진정으로 거듭나서 예수님이 나의 생명으로 내 안에 사시면 된다.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이 전적으로 나를 주장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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