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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과 모든 전쟁의 배후에 있는 전쟁(질문, 대답, 설명) 10/25/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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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김명호 작성일25-10-16 20:31 조회782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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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과 모든 전쟁의 배후에 있는 전쟁

(10월 25일 안식일 / 일몰: 오후 5시 42분)

  

연구 범위: 수 5:13–15; 사 37:16; 계 12:7–9; 신 32:17; 출 14:13, 14; 수 6:15–20

 

기억절: “여호와께서 사람의 목소리를 들으신 이같은 날은 전에도 없었고 후에도 없었나니 이는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을 위하여 싸우셨음이니라”(수 10:14).

여호수아서를 읽으면서 우리는 하나님의 명령에 따라, 하나님의 이름으로, 하나님의 도움에 의해 수행된 공격적인 군사 작전들을 발견하게 된다. 가나안 정복에 하나님이 관여하셨다는 생각은 여호수아서 전체에서 나타나며, 이는 서술자의 주장(수 10:10, 11), 하나님의 말씀(수 6:2, 수 8:1), 여호수아의 연설(수 4:23, 24; 수 8:7), 라합(수 2:10), 정탐꾼들(수 2:24), 그리고 백성들(수 24:18)의 발언 가운데 나타난다. 곧 하나님께서 이러한 격렬한 전쟁을 시작하셨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이런 사실은 곤란한 질문들을 야기한다. 구약 시대에 하나님의 택하신 백성이 그러한 행동을 취했다는 사실을 어떻게 이해할 수 있겠는가? 어떻게 구약의 신뢰성, 권위, 그리고 역사성을 훼손하지 않으면서 "호전적"으로 보이는 하나님의 모습을 하나님의 사랑의 성품(예: 출 34:6, 시 86:15, 시 103:8, 시 108:4)과 조화시킬 수 있는가? 

이번 주와 다음 주는 여호수아서와 다른 곳에서 말하는 하나님이 명령하신 전쟁이라는 어려운 문제를 살펴볼 것이다. 

 

학습 목표

깨닫기: 이 땅의 싸움의 배후에는 사랑과 공의를 회복해 주시는 선악의 대쟁투가 있다. 

느끼기: 주께서 이 싸움에 앞장서시며 이 땅의 전쟁에서도 우리에게 승리를 주신다. 

행하기: 승리를 약속하신 주님을 신뢰하며 그분을 따라 우리에게 주어진 선악의 싸움을 싸운다. 

 

TMI 위로

2. 여호수아 앞에 나타난 군대 장관은 이 전쟁의 성격에 대해서 무엇을 말해줍니까?(수 5:14)

*답: 하나님께서 친히 싸우시는 선악의 대쟁투를 말해준다.

3. 이 땅에서 일어나는 전투가 그보다 더 큰 전쟁의 일부인 것을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계 12:7-9)

*답: 하늘에서 전쟁이 있었고 패배한 용이 세상에 와서 계속 하나님께 도전하는 전쟁임을 알 수 있다.

4. 하나님께서 가나안인들을 완전히 멸망시킨다는 사실을 우리는 어떻게 이해해야 합니까?(계 19:11)

*답: 그들은 이미 사망이 확정된 자들로서 생명을 기호를 조롱으로 보내버린 것을 이해해야 한ㄷ. 

5. 여호와께서 우리를 위해 싸우신다는 것은 어떤 의미입니까?(출 14:14) 

*답: 사탄의 세력을 하나님께서 친히 멸하실 것을 나타낸다.

6. 이스라엘이 싸우는 전쟁의 승패는 무엇에 달려 있었습니까?(수 10:8) 

*답: 하나님의 말씀에 전적으로 굴복하는데 달렸다.

7. 여호와는 용사라는 표현에는 어떤 주제와 뜻이 담겨 있다고 생각합니까?(계 20:8-10) 

*답: 역사의 종말에 사탄과 그의 세력이 완전히 멸해진다는 뜻이 담겼다.

 

결론: 전쟁에 나서시는 하나님의 모습은 우리 눈에 보이지 않지만 세상에 사랑과 공의를 회복하는 선악의 대쟁투라는 큰 전쟁을 치르심을 나타낸다. 이 땅의 전쟁도 하늘의 전쟁과 연결된 모습으로 나타나며, 가나안인을 정복하라는 명령은 악을 멸하시는 대쟁투의 관점에서 볼 때 이해할 수 있다. 이스라엘은 이 전쟁에서 직접 싸울 필요가 없었지만 그들의 불신으로 직접 참여하게 되었다. 하지만 그것도 충성심을 시험하며 주님을 온전히 의지하는 가운데 승리하여 다가올 참된 승리를 바라도록 계획되었다.   

 

10월 19일(일) 여호와의 군대 사령관

 

여호수아 5:13-15을 읽어 보라. 이 구절은 가나안 정복의 배경에 대해 무엇을 말하고 있는가?

[수5:13~15] 여호수아가 여리고에 가까이 이르렀을 때에 눈을 들어 본즉 한 사람이 칼을 빼어 손에 들고 마주 서 있는지라 여호수아가 나아가서 그에게 묻되 너는 우리를 위하느냐 우리의 적들을 위하느냐 하니 14 그가 이르되 아니라 나는 여호와의 군대 대장으로 지금 왔느니라 하는지라 여호수아가 얼굴을 땅에 대고 엎드려 절하고 그에게 이르되 내 주여 종에게 무슨 말씀을 하려 하시나이까 15 여호와의 군대 대장이 여호수아에게 이르되 네 발에서 신을 벗으라 네가 선 곳은 거룩하니라 하니 여호수아가 그대로 행하니라.

*답: 여호와의 군대 대장이 그 정복 전쟁을 총지휘하신다는 것이다.

 

이스라엘 백성은 요르단을 건너자 바로 적의 영토에 들어서게 되었다. 여리고 성벽이 그들 앞에 서 있었고, 성문은 굳게 닫혀 있었다(수 6:1). 이때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는 어떤 전략도 없었다. 더 우려스러운 것은 이스라엘이 오랜 포위 공격을 견딜 수 있도록 요새화된 도성을 공격하기 위한 무기로 겨우 돌팔매, 창, 화살만 가지고 있다는 것이었다. 

여호수아가 여리고에서 마주친 낯선 방문자에게 정체를 물었을 때 그는 다소 모호하게 대답했다. “아니라”라는 방문자의 대답은 그가 여호수아가 정의한 범주에 들어가지 않으려 한다는 것을 보여준다. 다시 말해, 가장 중요한 질문은 그가 여호수아의 편에 서 있는지가 아니라, 여호수아가 그분의 편에 있는지 여부이다. 

 

여호수아 5:14, 15을 열왕기상 6:8–17, 느헤미야 9:6, 이사야 37:16과 비교해 보라. 여호와의 군대 사령관의 정체에 대해 무엇을 알 수 있는가?

[수5:14,15] 그가 이르되 아니라 나는 여호와의 군대 대장으로 지금 왔느니라 하는지라 여호수아가 얼굴을 땅에 대고 엎드려 절하고 그에게 이르되 내 주여 종에게 무슨 말씀을 하려 하시나이까 15 여호와의 군대 대장이 여호수아에게 이르되 네 발에서 신을 벗으라 네가 선 곳은 거룩하니라 하니 여호수아가 그대로 행하니라.

[왕하6:8~17] 그 때에 아람 왕이 이스라엘과 더불어 싸우며 그의 신복들과 의논하여 이르기를 우리가 아무데 아무데 진을 치리라 하였더니 9 하나님의 사람이 이스라엘 왕에게 보내 이르되 왕은 삼가 아무 곳으로 지나가지 마소서 아람 사람이 그 곳으로 나오나이다 하는지라 10 이스라엘 왕이 하나님의 사람이 자기에게 말하여 경계한 곳으로 사람을 보내 방비하기가 한두 번이 아닌지라 11 이러므로 아람 왕의 마음이 불안하여 그 신복들을 불러 이르되 우리 중에 누가 이스라엘 왕과 내통하는 것을 내게 말하지 아니하느냐 하니 12 그 신복 중의 한 사람이 이르되 우리 주 왕이여 아니로소이다 오직 이스라엘 선지자 엘리사가 왕이 침실에서 하신 말씀을 이스라엘의 왕에게 고하나이다 하는지라 13 왕이 이르되 너희는 가서 엘리사가 어디 있나 보라 내가 사람을 보내어 그를 잡으리라 왕에게 아뢰어 이르되 보라 그가 도단에 있도다 하나이다 14 왕이 이에 말과 병거와 많은 군사를 보내매 그들이 밤에 가서 그 성읍을 에워쌌더라 15 하나님의 사람의 사환이 일찍이 일어나서 나가보니 군사와 말과 병거가 성읍을 에워쌌는지라 그의 사환이 엘리사에게 말하되 아아, 내 주여 우리가 어찌하리이까 하니 16 대답하되 두려워하지 말라 우리와 함께 한 자가 그들과 함께 한 자보다 많으니라 하고 17 기도하여 이르되 여호와여 원하건대 그의 눈을 열어서 보게 하옵소서 하니 여호와께서 그 청년의 눈을 여시매 그가 보니 불말과 불병거가 산에 가득하여 엘리사를 둘렀더라.

[느9:6] 오직 주는 여호와시라 하늘과 하늘들의 하늘과 일월 성신과 땅과 땅 위의 만물과 바다와 그 가운데 모든 것을 지으시고 다 보존하시오니 모든 천군이 주께 경배하나이다.

[사37:16] 그룹 사이에 계신 이스라엘 하나님 만군의 여호와여 주는 천하 만국에 유일하신 하나님이시라 주께서 천지를 만드셨나이다. (36절 참고)

*답: 여호와의 군대 대장은 말씀 하나님 여호와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여호와의 군대 대장”이라는 표현은 히브리 성경에서 독특한 표현이지만, “대장”과 “군대”라는 용어의 조합은 항상 군사 지도자를 가리킨다. 성경에서 “군대”라는 단어는 군사 부대, 천사, 또는 천체 등을 의미할 수 있다.

성육신 이전의 그리스도는 여호수아에게 단순히 동맹이나 이스라엘 군대의 진짜 지휘관으로 나타나신 것이 아니라, 여호수아가 가나안 사람들을 대상으로 벌이고 있는 전쟁보다 훨씬 더 큰 전쟁에 참여하는 보이지 않지만 실재하는 천사들의 군대 사령관으로 나타나셨다. 

여호수아의 답변은 그가 대장의 정체성을 이해하고 있음을 분명히 보여준다. 그분은 하나님과 동등이시며, 여호수아는 깊은 존경과 경배의 표시로 그분 앞에 엎드려 경배한다(수 5:14, 창 17:3, 삼하 9:6, 대하 20:18). 여호수아는 만군의 하나님께서 직접 관여하시는 훨씬 더 큰 전쟁의 일부인 군사 작전을 진행할 전략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었다. 

 

<교훈> 하나님은 보이지 않는 큰 전쟁의 사령관으로 나타나셨고 여호수아는 작전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었다. 중요한 문제는 우리가 그분의 편에 서는가이다.  

 

<부가설명> 성경에는 ‘네 발의 신을 벗어라’는 말씀이 두 번 있다. 하나는 출3:5에 모세에게 하신 말씀이고 다른 하나가 바로 오늘의 말씀이다. 모세에게는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이끌어내어 가나안으로 인도하라는 사명을 주실 때 하신 말씀이다. 여호수에게는 가나안 정복 전쟁을 앞두고 심사숙고하는 여호수아에게 하신 말씀이다. 이 두 경우는 같은 의미가 있다.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이끌어내는데 인간의 지혜와 방법을 사용하지 말라는 것이고, 또 가나안을 정복하는데 인간의 전략 전술을 사용하지 말라는 지시다. 두 경우 하나님께서 친히 지도하는 대로 순복하라는 것이다. 출애굽이나 가나안 정복은 인간이 하는 것이 아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구원하시는 것을 표상하는 일이다. 그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고 계획과 실행이 다 하나님의 것이다. 그러므로 지도자로 선택된 사람은 여호와 군대의 사령관의 지시를 따라 맡긴 일을 수행해야 한다. 여호와는 전쟁에 능하신 분이시다(시24:8). 인생 길도 여호와의 군대 대장이신 예수님의 지시를 따라서 지시하는 대로 걸어갈 때 안전하게 목적지에 이를 것이다. “사람의 걸음은 여호와께로서 말미암나니 사람이 어찌 자기의 길을 알 수 있으랴”(잠20:24). 아멘.

 

10월 20일(월) 하늘의 전쟁

 

여호수아는 그 전투가 더 큰 전쟁의 한 부분인 것을 이해했다. 하나님께서 직접 개입하신 그 전쟁에 대해 우리는 무엇을 알고 있는가?

계 12:7–9, 사 14:12–14, 겔 28:11–19, 단 10:12–14을 읽어 보라. 

[계12:7~9] 하늘에 전쟁이 있으니 미가엘과 그의 사자들이 용과 더불어 싸울새 용과 그의 사자들도 싸우나 8 이기지 못하여 다시 하늘에서 그들이 있을 곳을 얻지 못한지라 9 큰 용이 내쫓기니 옛 뱀 곧 마귀라고도 하고 사탄이라고도 하며 온 천하를 꾀는 자라 그가 땅으로 내쫓기니 그의 사자들도 그와 함께 내쫓기니라.

[사14:12~14] 너 아침의 아들 계명성이여 어찌 그리 하늘에서 떨어졌으며 너 열국을 엎은 자여 어찌 그리 땅에 찍혔는고 13 네가 네 마음에 이르기를 내가 하늘에 올라 하나님의 뭇 별 위에 내 자리를 높이리라 내가 북극 집회의 산 위에 앉으리라 14 가장 높은 구름에 올라가 지극히 높은 이와 같아지리라 하는도다.

[겔28:11~19] 여호와의 말씀이 또 내게 임하여 이르시되 12 인자야 두로 왕을 위하여 슬픈 노래를 지어 그에게 이르기를 주 여호와의 말씀에 너는 완전한 도장이었고 지혜가 충족하며 온전히 아름다웠도다 13 네가 옛적에 하나님의 동산 에덴에 있어서 각종 보석 곧 홍보석과 황보석과 금강석과 황옥과 홍마노와 창옥과 청보석과 남보석과 홍옥과 황금으로 단장하였음이여 네가 지음을 받던 날에 너를 위하여 소고와 비파가 준비되었도다 14 너는 기름 부음을 받고 지키는 그룹임이여 내가 너를 세우매 네가 하나님의 성산에 있어서 불타는 돌들 사이에 왕래하였도다 15 네가 지음을 받던 날로부터 네 모든 길에 완전하더니 마침내 네게서 불의가 드러났도다 16 네 무역이 많으므로 네 가운데에 강포가 가득하여 네가 범죄하였도다 너 지키는 그룹아 그러므로 내가 너를 더럽게 여겨 하나님의 산에서 쫓아냈고 불타는 돌들 사이에서 멸하였도다 17 네가 아름다우므로 마음이 교만하였으며 네가 영화로우므로 네 지혜를 더럽혔음이여 내가 너를 땅에 던져 왕들 앞에 두어 그들의 구경 거리가 되게 하였도다 18 네가 죄악이 많고 무역이 불의하므로 네 모든 성소를 더럽혔음이여 내가 네 가운데에서 불을 내어 너를 사르게 하고 너를 보고 있는 모든 자 앞에서 너를 땅 위에 재가 되게 하였도다 19 만민 중에 너를 아는 자가 너로 말미암아 다 놀랄 것임이여 네가 공포의 대상이 되고 네가 영원히 다시 있지 못하리로다 하셨다 하라.

[단10:12~14] 그가 내게 이르되 다니엘아 두려워하지 말라 네가 깨달으려 하여 네 하나님 앞에 스스로 겸비하게 하기로 결심하던 첫날부터 네 말이 응답 받았으므로 내가 네 말로 말미암아 왔느니라 13 그런데 바사 왕국의 군주가 이십일 일 동안 나를 막았으므로 내가 거기 바사 왕국의 왕들과 함께 머물러 있더니 가장 높은 군주 중 하나인 미가엘이 와서 나를 도와 주므로 14 이제 내가 마지막 날에 네 백성이 당할 일을 네게 깨닫게 하러 왔노라 이는 이 환상이 오랜 후의 일임이라 하더라.

*답: 이 전쟁은 하늘에서 시작되었다. 역사적으로 계속해서 사탄의 농간에 놀아나는 세상이 하나님을 대적했다.

 

하나님께서는 우주를 책임 있는 피조물들로 채우시고, 그들에게 자유 의지를 주셨다. 이는 그들이 사랑할 수 있는 존재가 되기 위한 필수 조건이었다. 그들은 하나님의 뜻에 따라 행하거나 그에 반하여 행동할 수 있었다. 가장 강력한 천사였던 루시퍼는 하나님께 반역하였고, 많은 천사들이 그를 따랐다. 

이사야와 에스겔이 이 전쟁을 언급하지만, 일부 주석가들은 이사야 14장과 에스겔 28장의 의미를 바벨론 왕과 두로의 통치자에 대한 것으로 제한하려 한다. 그러나 성경 본문에는 초월적인 현실을 말하는 분명한 지표들이 있다. 바벨론 왕은 하늘의 하나님의 보좌에 있었다고 묘사되며(사 14:12, 13), 두로 왕은 하나님의 동산 에덴의 지키는 그룹이었다고 말한다(겔 28:12–15). 이 중 어떠한 것도 이 땅의 바벨론과 두로 왕에게 해당되지 않는다. 

또한 이 땅의 왕들에 대해 흠이 없고 “완전한 인”이었다고 말할 수 없다. 따라서 성경이 말하는 이 존재들은 문자적인 바벨론과 두로 그 이상의 의미를 가리키고 있다. 

이사야는 당대의 역사적 맥락을 넘어서는 의미를 전달하는 “비유”(mashal, 히브리어)를 제시한다. 비유에서 바벨론 왕은 반역, 자만, 교만의 전형으로 나타난다. 에스겔은 두로의 왕자(겔 28:2)와 두로의 왕(겔 28:11, 12)을 구분하며, 두로의 왕자는 지상에서 활동하지만, 하늘에서 활동하는 왕의 상징이 된다. 

다니엘 10:12–14에 따르면, 이러한 반역한 하늘의 존재들은 이 땅에서 하나님의 목적이 성취되는 것을 방해한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이스라엘의 전쟁을 이같이 하늘과 땅의 연결고리 속에서 이해해야 한다. 우리는 이 전쟁이 하나님과 사탄, 선과 악 사이의 대쟁투가 이 땅에서 나타난 것으로 바라보아야 하며, 이 모든 것은 결국 타락한 세상에 하나님의 정의와 사랑을 회복하는 목적을 가지고 있다. 

 

<교훈>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전쟁은 하늘과 땅의 연결고리를 고려하면서, 세상에 공의와 사랑을 회복하기 위한 선악의 대쟁투가 이 땅에 나타난 것으로 보아야 한다. 

 

<부가설명> 하나님께서는 천사를 사람보다 조금 낫게 창조하셨다. 시8:5에는 사람을 천사보다 조금 못하게 하셨다고 계시했다. 사람을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하셨는데 천사를 사람보다 조금 낫게 창조하셨다면 어떤 형상일까? 하나님보다도 나은 형상이라는 말인가? 그럴 수는 없다. 이것을 성경적으로 설명하려면 긴 지면(紙面)이 피요하고 시간도 필요하다. 각설하고 천사가 사람보다는 더 나은 존재로 창조되었다는 것은 성경이 계시했다. 천사나 사람이나 다 지성적이고 인격적으로 창조된 것이다. 동시에 그들은 하나님의 창조를 수용하든지 거절하든지 할 수 있었다. 아담은 뱀의 말을 들어서 하나님의 창조를 거절했다. 그러면 그는 창조되지 않은 존재가 된다. 그런데 루시퍼가 먼저 그렇게 하나님의 창조를 거절했다. 그것은 자신이 피조물이 아니라고 생각한 것이다. 그렇다면 그도 스스로 존재한 자라고 주장하는 것이 된다. 사14:12~14이 이 사실을 드러낸다. 겔28장은 그가 피조물인데 가장 영화롭게 창조된 피조물이었다고 계시한다. 그래서 그의 지혜와 영화로움으로 말씀 하나님을 대적하고 그와 동등하다고 주장한 것이다. 그것이 시험의 광야에서 예수님을 시험한 내용이다. 하늘에서 하나님께 싸움을 건 존재가 사람을 자기처럼 하나님의 창조를 거절하고 피조물이기를 거부하도록 한 것이다. 피조물은 자유 선택이 아니라 하나님의 창조를 수용하거나 거절하는 두 가지 경우 뿐이다. 이것을 철학이나 신학이 자유 선택이라는 말로 표현하기를 좋아한다. 그 표현이 적절한지 나는 항상 의문이다. 지금도 우리는 그들과 같은 상태에 있다. 여호와 하나님의 피조물인 것을 시인하고 굴복하든지 여호와와 상관없는 존재라고 주장하든지 뿐이다. 그러나 피조물이기를 거절할 때는 그 존재를 반납하는 날에 그들은 존재를 완전히 상실할 것이다. 그렇게 되는 때를 불 못 곧 둘째 사망이라고 계시했다(계20:14).

 

10월 21일(화) 여호와는 용사시니

 

출애굽기 2:23–25; 출애굽기 12:12, 13; 출애굽기 15:3–11을 읽어 보라. 여호와는 용사라는 말의 의미는 무엇인가? 

[출2:23~25] 여러 해 후에 애굽 왕은 죽었고 이스라엘 자손은 고역으로 인하여 탄식하며 부르짖으니 그 고역으로 인하여 부르짖는 소리가 하나님께 상달한지라 24 하나님이 그 고통 소리를 들으시고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세운 그 언약을 기억하사 25 이스라엘 자손을 권념하셨더라.

[출12:12,13] 내가 그 밤에 애굽 땅에 두루 다니며 사람이나 짐승을 막론하고 애굽 땅에 있는 모든 처음 난 것을 다 치고 애굽의 모든 신을 내가 심판하리라 나는 여호와라 13 내가 애굽 땅을 칠 때에 그 피가 너희가 사는 집에 있어서 너희를 위하여 표적이 될지라 내가 피를 볼 때에 너희를 넘어가리니 재앙이 너희에게 내려 멸하지 아니하리라.

[출15:3~11] 여호와는 용사시니 여호와는 그의 이름이시로다 4 그가 바로의 병거와 그의 군대를 바다에 던지시니 최고의 지휘관들이 홍해에 잠겼고 5 깊은 물이 그들을 덮으니 그들이 돌처럼 깊음 속에 가라앉았도다 6 여호와여 주의 오른손이 권능으로 영광을 나타내시니이다 여호와여 주의 오른손이 원수를 부수시니이다 7 주께서 주의 큰 위엄으로 주를 거스르는 자를 엎으시니이다 주께서 진노를 발하시니 그 진노가 그들을 지푸라기 같이 사르니이다 8 주의 콧김에 물이 쌓이되 파도가 언덕 같이 일어서고 큰 물이 바다 가운데 엉기니이다 9 원수가 말하기를 내가 뒤쫓아 따라잡아 탈취물을 나누리라, 내가 그들로 말미암아 내 욕망을 채우리라, 내가 내 칼을 빼리니 내 손이 그들을 멸하리라 하였으나 10 주께서 바람을 일으키시매 바다가 그들을 덮으니 그들이 거센 물에 납 같이 잠겼나이다 11 여호와여 신 중에 주와 같은 자가 누구니이까 주와 같이 거룩함으로 영광스러우며 찬송할 만한 위엄이 있으며 기이한 일을 행하는 자가 누구니이까.

 

애굽에서의 오랜 체류 기간 동안 이스라엘 백성은 조상들의 참된 하나님을 잊어버렸다. 광야의 여정에서 여러 사건이 보여주듯이, 아브라함, 이삭, 야곱의 하나님에 대한 그들의 지식은 희미해졌고, 이교적인 요소들이 그들의 종교 생활 가운데 섞여 들어갔다(출 32:1–4 참조). 애굽인들의 압제 아래에서 그들은 여호와께 부르짖었고(출 2:23–25), 때가 이르자 여호와께서 그들을 위해 개입하셨다. 

출애굽기의 처음 12장에 묘사된 갈등은 모세와 바로 사이의 단순한 권력 다툼 너머의 더 큰 갈등을 묘사한다. 고대 근동의 전쟁 사상에 의하면, 민족 간의 전쟁은 궁극적으로 각 민족의 신들 사이의 전쟁으로 여겨졌다. 출애굽기 12:12은 주님께서 바로뿐 아니라 애굽의 신들, 즉 애굽의 압제적인 권력과 불의한 사회 체제의 배후에 있는 강한 마귀들(레 17:7, 신 32:17)에게도 심판을 내리셨다고 선언한다. 

궁극적으로 하나님은 죄와 전쟁중이며, 이 싸움이 계속되도록 그대로 두지 않으실 것이다(시 24:8; 계 19:11; 계 20:1–4, 14). 모든 타락한 천사들 그리고 결정적이고 회복 불가능할 만큼 죄에 빠진 인간들은 멸망할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가나안 땅의 거민들과의 전투는 이 쟁투의 일부이고 한 부분으로 이해되어야 하며, 십자가에서 대쟁투는 절정에 달하고 최후의 심판의 때에 마쳐질 것이다. 그 때 하나님의 사랑과 공의의 성품이 입증될 것이다. 

가나안인들의 완전한 멸망이라는 개념은 하나님께서 우주의 악의 주창자들과 우주적 쟁투 가운데 있다는 성경적 세계관 속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궁극적으로 하나님의 명예와 그분의 성품은 공격당하고 있다(롬 3:4, 계 15:3).

인간 존재 가운데 죄가 들어온 이후로, 누구도 중립적인 위치에 서 있을 수 없으며 하나님 편에 서던지 아니면 악의 편에 서게 된다. 이러한 배경을 염두에 둔다면 가나안인의 멸망은 최종 심판을 미리 보는 것으로 이해될 것이다. 

*답: 전쟁에 능력자라는 뜻이다.

 

<교훈> 가나안인들의 완전한 멸망이라는 개념은 하나님께서 우주의 악의 주창자들과 우주적 쟁투 가운데 있다는 성경적 세계관 속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부가설명> 월요일 부가설명에서 하나님의 창조를 수용하든지 거절하든지 하는 것 외에는 피조물이 할 수 있는 것이 없다고 말했다. 여호와 하나님의 창조를 거절하는 것은 하나님이 여호와가 아니라는 주장과 같다. 그도 피조물이라는 말이 된다. 이 주장을 소위 과학이라는 이름으로 세상 지성인들에게 깊이 각인 시킨 것이 진화론이다. 진화론은 여호와 하나님의 창조를 절대적으로 부인하는 것인데 루시퍼가 시작한 것이다. 그래서 시험의 광야에서 예수님께 그가 피조물이 아니라는 증명을 하로고 시험한 것이다. 광야에서 예수님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이 시험을 물리쳤다. 하나님의 말씀은 창조의 능력이요 수단이다(시33:6,9). 즉 창조적 능력으로 그것을 부인하려는 존재를 쫓아버린 것이다. 그리고 그분은 죽으시고 부활하심으로 자존자이심을 증명하셨다.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시는 것은 내가 다시 목숨을 얻기 위하여 목숨을 버림이라 18 이를 내게서 빼앗는 자가 있는 것이 아니라 내가 스스로 버리노라 나는 버릴 권세도 있고 다시 얻을 권세도 있으니 이 계명은 내 아버지에게서 받았노라 하시니라”(요10:17,18). 이 말씀은 예수님이 여호와이심을 선포한 말씀이다. 그분은 스스로 존재를 버릴 권세도 있고 다시 얻을 권세도 있으시다고 선언한 것이다. 이것은 영원 전 구원에 관한 여호와 회의에서 그렇게 하도록 결정된 것이다(롐23:18, 롬16:25,26). 그래서 이 계명은 아버지께 받았다고 말씀하신 것이다. 여호와 회의의 결정을 따른다는 뜻이다. 참으로 놀라운 말씀이 아닌가!

 

10월 22일(수)

여호와께서 너희를 위해 싸우시리니

  

출애굽기 14:13, 14, 25을 읽어 보라. 이스라엘 백성이 전쟁에 참여하는 것에 대한 하나님의 원래의 이상적인 계획은 어떤 것이었는가? 

[출14:13,14,25] 모세가 백성에게 이르되 너희는 두려워하지 말고 가만히 서서 여호와께서 오늘 너희를 위하여 행하시는 구원을 보라 너희가 오늘 본 애굽 사람을 영원히 다시 보지 아니하리라 14 여호와께서 너희를 위하여 싸우시리니 너희는 가만히 있을지니라/ 25 그들의 병거 바퀴를 벗겨서 달리기가 어렵게 하시니 애굽 사람들이 이르되 이스라엘 앞에서 우리가 도망하자 여호와가 그들을 위하여 싸워 애굽 사람들을 치는도다.

*답: 사람이 싸우는 것이 아니라 여호와께서 친히 싸워 정복하는 것이었다. 

 

이스라엘 백성이 물리적으로 완전히 막다른 길에 몰린 위기의 순간에 모세가 백성에게 말했다. “너희는 두려워하지 말고 가만히 서서 여호와께서 오늘 너희를 위하여 행하시는 구원을 보라 너희가 오늘 본 애굽 사람을 영원히 다시 보지 아니하리라 여호와께서 너희를 위하여 싸우시리니 너희는 가만히 있을지니라”(출 14:13, 14). 

애굽인들조차 그 사실을 알고 있었다고 성경은 기록한다. “이스라엘 앞에서 우리가 도망하자 여호와가 그들을 위하여 싸워 애굽 사람들을 치는도다”(출 14:25). 

군사 훈련을 받지 못한 무력한 이스라엘 백성을 위한 하나님의 기적적인 개입은 하나의 전형이 된다. 출애굽은 이스라엘을 위해서 하나님께서 개입하시는 예시, 전형이 되었다. 이 전쟁은 여호와께서 싸우시는 전쟁일 뿐만 아니라, 이스라엘은 싸우지 않고 가만히 있어야 했다(출 14:14). 하나님께서 전사이시며, 주도권은 그분에게 있다. 하나님께서 전략을 세우시고, 방법을 정하시며, 전쟁을 지휘하신다.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을 위해 싸우시지 않는다면, 그들은 결코 승리할 수 없다. 

엘렌 화잇은 이것을 하나님께서 “그들이 약속의 땅을 전쟁을 통해 얻도록 의도하지 않으시고, 당신의 명령에 대한 복종과 무조건적인 순종을 통해 얻도록 하셨다”(영문 시조, 1880. 9. 2)는 사실을 보여주신 것으로 해석한다. 애굽에서 그들을 구원하신 것과 같이 하나님은 그들의 전쟁을 대신 싸우실 것이며, 그들이 할 일은 그저 가만히 서서 하나님의 강력한 개입을 지켜보기만 하면 되었다. 

역사는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온전히 신뢰하는 한, 그들이 직접 전쟁할 필요가 없었음을 보여준다(왕하 19:, 대하 32:, 사 37: 참조). 

하나님의 이상적인 계획에서는 이스라엘 백성이 결코 직접 싸울 필요가 전혀 없었다. 출애굽 후 그들의 불신으로 인해 하나님께서는 그들이 가나안 사람들과의 전쟁에 참여하도록 허락하셨다. 출애굽 당시 애굽인들을 상대로 단 한 자루의 칼도 들 필요가 없었던 것처럼 그들이 온전히 하나님을 신뢰했다면 가나안을 정복하는 일에도 그들이 싸울 필요는 없었을 것이다(신 7:17–19). 

 

<교훈> 하나님의 이상에서 이스라엘은 전쟁에서 직접 싸울 필요가 없었다. 출애굽 후 불신으로 하나님은 그들이 가나안 사람들과의 전쟁에 참여하게 허락하셨다. 

 

<부가설명> 사실 생명 있는 사람이 생명 없는 사람과 싸울 일이 없다. 싸움은 생명을 지키는 방법이 아닌가? 생명 없는 사람을 우리는 죽은 자라고 부르고 시체라고 말한다. 그것과 싸운다는 것은 우스운 일이다. 그것을 치우면 된다. 에스겔 39장에는 일곱달 동안 죽은 자를 장사하는 묘한 계시가 기록되었다. 아담의 모든 자손은 죽은 자들이다. 매장이나 화장해야 하는 존재들이다. 예수님 안에서 생명을 얻은 사람들은 그들을 매장하는 일을 한다고 예언했는데, 최후에는 화장하기 때문에 생명이 있는 사람들은 그것을 가만히 보는 것 외에 할 일이 없다. 하나님께서 멸절하라고 하신 것은 그들이 이미 생명이 없고 생명을 얻을 가능성도 완전히 없어진 자들이기 때문에 장사하라는 것이다. 생명의 하나님 사랑의 하나님은 그들이 생명을 얻을 수 있는 기회를 430년을 주셨고, 또 40년을 주셨다. 그러나 그들은 여리고가 굳게 잠기들이 마음을 굳게 닫아 잠그고 대적하는 자의 편에 있었다. 그들은 장사되어야 할 존재로 확정된 것이다. 가나안 정복 전쟁은 죽은 자를 장사하는 전쟁에 불과했다. 이스라엘이 불순종해서 생명을 지키지 못할 때 그들도 장사되어야 했다. 구약에 기록된 이런 전쟁은 이렇게 생명과 사망(나는 비생명, 비존재라고 표현한다.)을 구분하는 전쟁이다. 사망을 처리하지 않으면 생명이 있는 자에게 사망의 독소를 뿌려 그들도 사망이 되는 위험이 크기 때문에 그들을 멸절하라고 하신 것이다. 이것은 사랑이 나타나는 다른 측면이지 형벌이 아니다. 그들은 이미 스스로 사망의 형벌을 받았기 때문이다. 사랑으로 장례하는 것과 다를 것이 없다. 

 

10월 23일(목) 차선책

 

출애굽기 17:7–13과 여호수아 6:15–20을 읽어 보라. 이 두 전쟁은 어떤 점에서 비슷한가? 어떤 차이점이 있는가? 

[출17:7~13] 그가 그 곳 이름을 맛사 또는 므리바라 불렀으니 이는 이스라엘 자손이 다투었음이요 또는 그들이 여호와를 시험하여 이르기를 여호와께서 우리 중에 계신가 안 계신가 하였음이더라 8 그 때에 아말렉이 와서 이스라엘과 르비딤에서 싸우니라 9 모세가 여호수아에게 이르되 우리를 위하여 사람들을 택하여 나가서 아말렉과 싸우라 내일 내가 하나님의 지팡이를 손에 잡고 산 꼭대기에 서리라 10 여호수아가 모세의 말대로 행하여 아말렉과 싸우고 모세와 아론과 훌은 산 꼭대기에 올라가서 11 모세가 손을 들면 이스라엘이 이기고 손을 내리면 아말렉이 이기더니 12 모세의 팔이 피곤하매 그들이 돌을 가져다가 모세의 아래에 놓아 그가 그 위에 앉게 하고 아론과 훌이 한 사람은 이쪽에서, 한 사람은 저쪽에서 모세의 손을 붙들어 올렸더니 그 손이 해가 지도록 내려오지 아니한지라 13 여호수아가 칼날로 아말렉과 그 백성을 쳐서 무찌르니라.

[수6:15~20] 일곱째 날 새벽에 그들이 일찍이 일어나서 전과 같은 방식으로 그 성을 일곱 번 도니 그 성을 일곱 번 돌기는 그 날뿐이었더라 16 일곱 번째에 제사장들이 나팔을 불 때에 여호수아가 백성에게 이르되 외치라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이 성을 주셨느니라 17 이 성과 그 가운데에 있는 모든 것은 여호와께 온전히 바치되 기생 라합과 그 집에 동거하는 자는 모두 살려 주라 이는 우리가 보낸 사자들을 그가 숨겨 주었음이니라 18 너희는 온전히 바치고 그 바친 것 중에서 어떤 것이든지 취하여 너희가 이스라엘 진영으로 바치는 것이 되게 하여 고통을 당하게 되지 아니하도록 오직 너희는 그 바친 물건에 손대지 말라 19 은금과 동철 기구들은 다 여호와께 구별될 것이니 그것을 여호와의 곳간에 들일지니라 하니라 20 이에 백성은 외치고 제사장들은 나팔을 불매 백성이 나팔 소리를 들을 때에 크게 소리 질러 외치니 성벽이 무너져 내린지라 백성이 각기 앞으로 나아가 그 성에 들어가서 그 성을 점령하고,

*답: 하나님께서 친히 싸우셨다는 점이 비슷하다. 이스라엘의 불신과 아말렉의 침공이 연결되어 있다. 여리고는 이스라엘이 전적으로 순복해서 하나님께서 무너뜨렸다.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나온 후 처음으로 싸운 것은 이스라엘 백성이 아말렉인으로부터 자신을 방어한 사건으로 출애굽기 17장에 기록되어 있다. 이스라엘은 애굽인을 벌하시고 이스라엘 백성을 자유로 이끄시는 하나님의 전능하신 능력을 목격했다. 우리는 이스라엘을 위한 하나님의 처음 계획에는 다른 민족과의 전쟁이 포함되지 않았음을 보았다(출 23:28, 출 33:2). 그러나 애굽에서 구출된지 얼마 지나지 않아 이스라엘 백성은 도중에 불평하기 시작했으며(출 17:3), 심지어 하나님이 그들 가운데 계신지 의심하기까지 했다. 바로 이때 아말렉 사람들이 이스라엘을 공격해 오기 시작했다. 이것은 우연이 아니었다. 하나님은 아말렉이 이스라엘을 공격하도록 허락하심으로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을 신뢰하는 법을 다시 배우기를 원하셨다. 

당신의 원칙을 타협하지 않으시는 가운데 하나님은 당신의 백성들의 수준으로 내려오셔서 이상적인 계획, 곧 하나님의 개입하심을 완전하고 무조건적으로 신뢰하도록 그들을 계속해서 부르신다. 실제로 전쟁에 관한 지침(신 20:)은 이스라엘의 불신에서 비롯된 40년간의 광야의 경험 이후에야 비로소 주어졌다. 새로운 상황은 새로운 전략을 요구했고, 그제야 하나님은 이스라엘에게 가나안 사람들을 완전히 진멸하라고 명령하셨다(신명기 20:16–18). 

이제 전쟁은 이스라엘 자손에게 불가피한 현실이 되었을 뿐 아니라, 그것은 여호와에 대한 이스라엘의 충성심을 시험하는 계기가 되었음이 드러났다. 하나님은 그들을 포기하지 않으셨고, 그들이 그분께 온전히 의지하는 경험을 통해 당신의 능력을 목격하게 하셨다. 

이스라엘 백성이 가나안 정복에 참여했다는 사실은 이 책 마지막 부분에서 내려진 여호수아의 결론에서 분명하게 드러난다. 이 구절은 가나안 사람들이 이스라엘에 맞서 싸웠다고 기록한다(수 24:11). 

여리고 성벽의 붕괴는 하나님의 기적의 결과였지만, 이스라엘 백성은 전투에 나서서 참여해야 했고, 도성 주민들의 완강한 저항에 맞닥뜨려야 했다. 

이스라엘이 무력 전쟁에 참여하는 것은 여호와의 도우심에 대한 절대적인 신뢰를 키우는 계기가 되었다. 백성들은 모든 전투의 승패가 궁극적으로 주님의 손에 달려 있으며, 군사적 충돌의 결과를 좌우하는 유일한 요인은 주님의 약속을 믿느냐 아니면 불신하느냐 하는 그들의 태도임을 항상 기억해야(수 7:12, 13; 수 10:8) 했다. 그 선택은 전적으로 그들에게 달려 있었다. 

 

<교훈> 백성들의 불신으로 전쟁이 주어졌지만, 그것은 충성심을 시험하는 계기가 되며 주님을 온전히 의지하고 그분의 능력을 목격하며 다시 신뢰하게 했다. 

 

<부가설명>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하시는 일을 전적으로 신뢰하지 못해서 그들은 불가불 직접 전투하지 않으면 안 되는 자리에 들어갔다. 먼저 주어진 최고의 기회가 불신과 불순종으로 다음 방법 곧 차선이 실현되게 되었다. 이것은 하나님의 구원 섭리를 잘 드러내는 상태다. 하나님께서는 아담 부부에게 영생하는 최고의 기회를 주셨다. 그러나 그들이 뱀의 유혹에 빠져서 언약을 어기고 불순종에 떨어졌을 때 차선이 주어졌다. 하나님께서 차선책을 주시지 않았으면 지구는 멸망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창조주께서는 아름답게 창조한 세계를 보존하기를 원하셨기에 구주를 허락하시고 그분을 믿음으로 다시 원상 회복할 기회를 주셨다. 그러나 사망이 지배하는 세상에서 생명을 받아 유지하는 데는 투쟁하지 않으면 안 되게 되었다. 말씀 하나님께서 친히 오셔서 사람이 되어 사망의 세력과 싸우시고 부활하셔서 승리를 우주에 선포하셨다. 그러나 구원받은 인류는 한 번 죽을 수밖에 없는 육체가 되어 죄와 전쟁할 수밖에 없게 된 것이다. 그래서 성도들에게 싸우라는 말씀을 여러번 하신 것이다. “사랑하는 자들아 내가 우리의 일반으로 얻은 구원을 들어 너희에게 편지하려는 뜻이 간절하던 차에 성도에게 단번에 주신 믿음의 도를 위하여 힘써 싸우라는 편지로 너희를 권하여야 할 필요를 느꼈노니”(유1:3). 우리는 힘써 싸워 믿음을 지켜야 한다. 

 

10월 24일(금) 더 깊은 연구를 위하여

 

부조와 선지자 45장 “여리고의 함락” 487–493을 읽어 보라. 

우주에서 하나님의 권위에 대한 반란이 일어났을 때, 하나님은 세계를 유지하시고, 불변하시며, 영원하신 본성을 중단하고 우주의 통치권을 피조물에 불과한 반역자에게 넘겨주실 것인지, 아니면 거룩하시고 의로우시며 사랑하시며 인자하신 모든 생명의 아버지로서의 역할을 유지하실 것인지 선택하셔야 했다. 성경은 후자의 모습을 보여주며, 이 때문에 악의 세력과 하나님의 권능 사이의 충돌은 불가피했다.

혼란스럽고 반역적인 천상의 세력과 연합한 정치적 또는 사회 역사적 세력들이 여호와께 그와 같은 반역의 태도를 보일 때, 그분은 우주 만물의 주권자이신 여호와로서 개입하셨다. 용사이신 여호와 주제는 선과 악 사이에서 이어져 온 우주적 대쟁투에 종지부를 찍을 최후의 승리를 예표한다(계 20:8–10). 또한 하나님이 이끄시는 이스라엘의 전쟁은 우주적 대쟁투를 거울처럼 반영해 보이는 것뿐 아니라 현재 역사 속에서 진행되는 동일한 쟁투에 대한 하나님의 마지막 때의 심판을 예고한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이 정하신 때에, 그 땅에 들어가는 것을 그들의 특권이자, 의무로 삼으셨다. 그러나 그들의 고의적 태만으로 그 허락은 철회되었다. …그분의 의도는 그들이 전쟁이 아닌, 오직 당신의 명령에 철저하게 순종함으로 그 땅을 얻도록 하는 것이었다”(부조와 선지자, 392).

 

함께하는 토의를 위하여 

1. 우주적 대쟁투의 배경은 주님께서 이스라엘에게 전쟁을 명령하신 이유를 더 잘 이해하는데 어떻게 도움이 되는가? 

*답: 그것은 사탄과의 싸움을 표상하는 싸움이다. 사망을 없이하는 싸움이다.

2. 우리 주변에서 일어나는 선과 악의 대쟁투의 실체와 그것이 어떻게 전개되는지에 대해 논의해 보라. 이 쟁투에서 우리의 역할은 무엇이며, 우리는 그것을 어떻게 수행하고자 해야 하는가?

*답: “우리의 싸우는 병기는 육체에 속한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 앞에서 견고한 진을 파하는 강력이라 모든 이론을 파하며 하나님 아는 것을 대적하여 높아진 것을 다 파하고 모든 생각을 사로잡아 그리스도에게 복종케 하니”(고후10:4,5).

3. “주님께서 우리를 대신해서 싸우시기를 가만히 서서 기다리”는 원리를 우리의 영적인 삶에 어떻게 적용할 수 있겠는가?

*답: 우리는 하나님께서 시키는 대로 순복하면 된다. 자기 전략 전술은 필요없다.

4. 교회에서 토의하거나 의견의 차이가 있을 때 우리는 누가 우리 편에 서 있는지 알고 싶어하는 경우가 많다. 여호수아 5:13–15의 말씀을 생각할 때, 이런 태도를 어떻게 바꾸어야 하겠는가? 

*답: 우리는 누구를 막론하고 다 그리스도의 군사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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