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2과 여호와의 영광을 내게 보이소서(질문, 대답, 설명) 09/2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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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김명호 작성일25-09-12 04:50 조회342회 댓글0건본문
제12과 여호와의 영광을 내게 보이소서
(9월 20일 안식일 / 일몰: 오후 6시 32분)
연구 범위: 출 33:7-34:35; 신 18:15, 18; 요 17:3; 롬 2:4; 요 3:16; 고후 3:18
기억절: “여호와께서 그의 앞으로 지나시며 선포하시되 여호와라 여호와라 자비롭고 은혜롭고 노하기를 더디하고 인자와 진실이 많은 하나님이라 인자를 천대까지 베풀며 악과 과실과 죄를 용서하리라 그러나 벌을 면제하지는 아니하고 아버지의 악행을 자손 삼사 대까지 보응하리라”(출 34:6, 7).
우리 모두는 하나님과 동행하는 가운데 자라가야 한다. 자라지 않는다면 죽은 것이다. 사도 베드로는 이렇게 선언했다. "오직 우리 주 곧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그를 아는 지식에서 자라 가라 영광이 이제와 영원한 날까지 그에게 있을지어다"(벧후 3:18). 우리는 자라가기를 기꺼이 원해야 한다. 우리는 하나님의 학교에 다니고 있으며 그 학교는 졸업이 없고, 영원히 배우는 곳이다.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부르시는 대로 자신을 내어 맡긴다면, 성장의 각 단계마다 우리는 완전할 수 있다.
학교를 생각해 보라. 초등학교 1학년이 글을 읽고 100까지 수를 세는 법을 익혔다면, 그의 성취도와 성장 단계의 지식이 완전하기에 과정을 통과할 수 있다. 하지만 고등학생이 이 정도 수준의 지식에 머물며 더 이상 발전하지 않는다면 그 학생은 교육과정에서 엄청나게 실패한 것을 의미한다. 하나님에 대한 은혜와 지식 안에서 우리의 성장도 이와 비슷하다. 그리스도께서 당신의 영역에서 완전하셨던 것처럼 우리도 각자의 성장 단계에서 그러할 수 있다.
이번 주는 모세가 하나님의 지시를 알고 따르는 것을 통해 하나님과 동행하면서 어떻게 성장해 갔는지를 살펴볼 것이다.
학습 목표
깨닫기: 하나님을 더 알기 원한 모세에게 주님은 영광을 보이셨고 모세는 지식과 관계의 모든 면에서 성장하며 변화했다.
느끼기: 하나님의 영광은 사랑하시며 인자하신 당신의 속성이며 우리의 영광은 그분의 영광을 세상에 알리는 것이다.
행하기: 하나님의 더 깊이 알고 그 안에서 자라므로 하나님의 빛을 세상에 비춘다.
TMI 위로
2. 만남의 회막에서 모세는 어떤 일을 경험하였습니까?(출 33:11)
*답: 하나님께서 모세를 친구처럼 만나시고 대화했다.
3. 모세가 하나님을 더 알게 해달라고 간구하게 된 이유는 무엇입니까?(출 33:13)
*답: 자신과 백성들이 하나님을 올바르게 알 수 있기를 원하는 마음이다.
4. 모세에게 보인 하나님의 영광은 무엇이며 그것은 어떤 역할을 합니까?(롬 2:4)
*답: 하나님은 사랑이시라 백성들을 위하여 사유하시고 생명을 주시는 분임을 나타낸다.
5. 하나님의 자기 계시를 구약의 요한복음 3:16이라고 부르는 이유는 무엇이라고 생각합니까?
*답: 백성의 허물을 용서하시고 그들을 사랑으로 이끄시는 분임을 드러냈음으로.
6. 모세의 빛난 얼굴은 당신과 하나님과의 관계에 대해서 무엇을 말해주고 있습니까?(히 3:1)
*답: 하늘에 부르심을 입은 거룩한 형제들의 상태를 상징한다.
7. 그리스도인에게서 빛이 난다는 것은 어떤 의미라고 생각합니까?(마 5:16)
*답: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착한 행실의 삶을 사는 것이다.
결론: 모세는 하나님의 지시를 따르고 동행하면서 하나님과의 관계와 그분에 대한 이해가 자라갔다. 그러나 하나님을 더 알수록 자신이 그분을 알지 못한다는 생각에 그는 하나님을 알게 해 달라고 구했다. 하나님은 당신의 영광을 보이시며 자신을 계시하셨다. 하나님의 성품을 알 때 우리는 당신의 나라와 하시는 일을 더 잘 알게 된다. 우리는 하나님을 아는 지식 가운데 자라야 하며, 그분의 영광을 알게 될 때 점점 더 그분의 영광을 반사하며 그 영광을 나타내는 것이 우리의 기쁨이 될 것이다.
9월 14일(일) 만남의 회막
출애굽기 33:7-11을 읽어 보라.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만남의 회막을 지으라고 하신 이유는 무엇인가?
[출33:7~11] 모세가 항상 장막을 취하여 진 밖에 쳐서 진과 멀리 떠나게 하고 회막이라 이름하니 여호와를 앙모하는 자는 다 진 바깥 회막으로 나아가며 8 모세가 회막으로 나아갈 때에는 백성이 다 일어나 자기 장막 문에 서서 모세가 회막에 들어가기까지 바라보며 9 모세가 회막에 들어갈 때에 구름 기둥이 내려 회막 문에 서며 여호와께서 모세와 말씀하시니 10 모든 백성이 회막 문에 구름 기둥이 서 있는 것을 보고 다 일어나 각기 장막 문에 서서 예배하며 11 사람이 자기의 친구와 이야기함 같이 여호와께서는 모세와 대면하여 말씀하시며 모세는 진으로 돌아오나 눈의 아들 젊은 수종자 여호수아는 회막을 떠나지 아니하니라.
*답: 하나님과 모세가 만나서 대화하기 위한 배려였다. 사람과 친구가 되기를 바라시는 하나님의 사랑이었다.
이스라엘 진영 밖에 세워진 “만남의 회막”과 이후에 지어져 진영의 중앙에 위치했던 성막을 혼동해서는 안 된다. 모세가 회막에서 얼마나 자주 하나님과 만났는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한 가지 확실한 것은 모세가 하나님과 만남을 거듭할수록 하나님과 모세 사이에 깊은 우정이 형성되었다는 것이다. “사람이 자기의 친구와 이야기함같이 여호와께서는 모세와 대면하여 말씀하시며”(출 33:11). 친구란 거의 모든 것을 의논하고 터놓고 이야기할 수 있으며 이것을 다른 이에게 절대 누설하지 않을 것이라고 믿을 수 있는 사람이다. 친구는 사람의 인생에서 가질 수 있는 가장 멋진 선물이며 사람이 형성할 수 있는 가장 좋은 관계이다.
출애굽기 19-34장에 기록된 모세의 이야기는 하나님께서 우리의 삶을 어떻게 변화시키는지를 매우 잘 보여준다. 하나님은 이 탁월한 지도자와 어떻게 관계를 만들어 가셨는가? 모세의 삶을 살펴보면 그가 하나님의 능력뿐만 아니라 그분의 사랑과 성품에 대한 지식에서도 점점 자랐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것은 하나님과의 관계를 맺는 데 있어 핵심적인 요소이다.
시내산에 도착하기 이전, 모세가 특별한 지도자로 부름을 위해 준비하던 중에도 하나님께서는 그를 크게 사용하셨다. 미디안 땅에서 양을 돌보던 모세에게 하나님은 욥기와 창세기 두 권을 쓰도록 영감을 주셨다. 그 후 불붙은 떨기나무의 극적인 사건을 통해 그는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이끌어 내라는 부르심을 받았다. 그는 홍해에서 애굽의 신들과 강력한 애굽 군대가 패배하는 것을 보았다. 이후 수 주 동안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시내산으로 어떻게 인도하시는지를 지켜보았다.
하나님의 영광을 봄으로 얼굴이 빛났던 경험 이후에도 그는 다시 39년 동안 약속의 땅의 입구까지 이스라엘을 인도하였다. 성경은 모세를 하나님의 신실한 종(신 34:5, 수 1:1), 어둠 속에서 꺼지지 않는 빛, 다른 선지자들의 기준이 되는 탁월한 선지자(신 18:15, 18)로 기록한다. 비록 백성들이 그의 지시와 말을 언제나 따른 것은 아니지만 그는 변화를 이끄는 하나님의 도구였다. 그의 말에 순종했을 때 그들은 번성했다.
<교훈> 만남의 회막에서 하나님을 얼마나 만났는지 알 수 없지만, 모세는 하나님을 만날수록 깊은 우정을 형성하고 그분에 대한 사랑과 지식이 자랐다.
<부가설명> 하나님은 아브라함은 벗이라고 하셨다(약2:23). 하나님께서는 자기 형상대로 창조한 사람들과 친구와 같은 우정과 사랑의 친교를 원하시는 것을 깨닫게 한다. 모세와도 “사람이 자기의 친구와 이야기함 같이 여호와께서는 모세와 대면하여 말씀하시며” 친교하셨다. 이 여호와 하나님은 제자들에게 나의 친구라고 하신 예수님이신 것이 확실하다. “14 너희가 나의 명하는 대로 행하면 곧 나의 친구라
15 이제부터는 너희를 종이라 하지 아니하리니 종은 주인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라 너희를 친구라 하였노니 내가 내 아버지께 들은 것을 다 너희에게 알게 하였음이니라”(요15:14,15). 구약시대에도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친구로 만나셨다. 그분이 사람이 되어 정말 이웃 친구로 세상에 오셨다. 우리가 예수님의 말씀을 지키면 예수님의 친구가 된다. 친교하는 사람의 신분이 높으면 덩달아 존귀한 대접을 받는 것이 세상이다. 성도들은 예수님의 친구가. 성경은 예수님과 합하면 한 영이라고 약속했다(고전6:17). 우리가 진정으로 예수님과 합하여 그분이 영이신 것과 같이 영적존재가 되도록 삼위일명 여호와께서 우리를 도우신다. 감사합니다. 할렐루야!
9월 15일(월) 주님을 알게 하소서
출애굽기 33:12-17을 읽어 보라. 모세는 주님께 무엇을 가르쳐 달라고 간구했는가? 그는 왜 하나님이 임재하셔서 그들을 인도해 주실 것을 요청했는가?
[출33:12~17] 모세가 여호와께 아뢰되 보시옵소서 주께서 내게 이 백성을 인도하여 올라가라 하시면서 나와 함께 보낼 자를 내게 지시하지 아니하시나이다 주께서 전에 말씀하시기를 나는 이름으로도 너를 알고 너도 내 앞에 은총을 입었다 하셨사온즉 13 내가 참으로 주의 목전에 은총을 입었사오면 원하건대 주의 길을 내게 보이사 내게 주를 알리시고 나로 주의 목전에 은총을 입게 하시며 이 족속을 주의 백성으로 여기소서 14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내가 친히 가리라 내가 너를 쉬게 하리라 15 모세가 여호와께 아뢰되 주께서 친히 가지 아니하시려거든 우리를 이 곳에서 올려 보내지 마옵소서 16 나와 주의 백성이 주의 목전에 은총 입은 줄을 무엇으로 알리이까 주께서 우리와 함께 행하심으로 나와 주의 백성을 천하 만민 중에 구별하심이 아니니이까 17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네가 말하는 이 일도 내가 하리니 너는 내 목전에 은총을 입었고 내가 이름으로도 너를 앎이니라.
*답: 주님의 길을 보여주시고 하나님을 알게 해주시고 은총 입은 것 알려주기를 간청했다. 그리고 친히 이스라엘과 동행하기를 요청했다. 이유는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이끌어내신 것을 확인하고 확신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모세는 주님 안에서 꾸준히 성장했다. 그는 주님께 점점 더 가까이 다가갔고, 하나님의 형상을 본받기 위해 노력했다. 어느 날 만남의 장막에서 하나님과 대화하던 중 모세는 갑자기 자신이 하나님을 알지 못한다는 사실을 깨닫고 “주의 길을 내게 보여 주사 내가 주를 알게 하시”(출 33:13, 흠정역)기를 기도했다. 모세는 하나님을 새로운 차원에서 이해해야 한다는 절실한 필요성을 느꼈다. 그는 주님을 더 알면 알수록 자신이 그분을 오히려 알지 못한다는 사실을 더 깊이 깨달았다. 모세는 자신의 필요를 인식하고 온 마음을 다해 그분을 더 잘 알기를 간구했다. 하나님은 그의 소원을 기꺼이 들어주셨다.
지금까지의 모세의 경험을 살펴보면 모세가 어떻게 주님과 더 깊고 친밀한 관계로 이끌려 갔으며 어떻게 영적으로 성장했는지 알 수 있다.
먼저, 모세는 산으로 올라갔고 “하나님께 올라”(출 19:3, 흠정역)갔다. 그런 다음 그는 “산 꼭대기”(출 19:20)로 올라갔고, 그 후 “하나님이 계신 흑암”(출 20:21)인 구름으로 가까이 갔다.
다른 경우에는, “모세는 구름 속으로 들어가서” 40일 밤낮을 주님과 함께 지냈다(출 24:18). 이 40일 동안 하나님께서는 모세에게 (1) 하나님께서 다듬은 두 돌판에 친히 기록하신 십계명(출 24:12)과 (2) 성막을 짓고 꾸미는 방법에 대한 지침(출 25-31 참조)이라는 두 가지 귀한 선물을 주셨다.
그 후, 모세는 또 다른 40일 밤낮을 하나님과 함께 보내며 죄인들을 위해 중보기도를 드렸다(출 32:30-32, 신 9:18).
그러나 이 모든 일이 있었음에도 모세는 하나님의 성품을 더 분명하게 알기 원했고, 하나님은 곧 모세에게 당신이 어떤 분인지 이해할 수 있는 특별한 통찰력을 주셨다. 모세가 원했던 것은 단순한 지적인 이해가 아니라 하나님의 어떠하심에 대한 경험적 지식이었다.
오랜 시간 후 예수께서 이렇게 말씀하신 것은 당연한 일이다.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가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요 17:3).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당신을 알리시는 데 직접 인간이 되는 것보다 더 좋은 방법이 있었겠는가?
<교훈> 모세는 주님을 더 알수록 그분을 알지 못함을 깊이 깨닫고 온 마음을 다해 그분을 더 잘 알기를 간구했다. 하나님은 그의 소원을 기꺼이 들어주셨다.
<부가설명> 바울은 고린도교회에 이런 말을 했다. “깨어 의를 행하고 죄를 짓지 말라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자가 있기로 내가 너희를 부끄럽게 하기 위하여 말하노라.” 교회에 다녀도 예수님을 믿어도 하나님을 모르고 예수님을 모를 수 있다는 것을 지적했다. 나는 예수님을 알고 진정한 믿음으로 살고 일한다고 믿는데 예수님이 나를 도무지 알지 못한다고 하시면 얼마나 큰 낭패겠는가?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다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22 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 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치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 23 그 때에 내가 저희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마7:21~23). 이 말씀이 바로 그런 경우다. 우리는 예수님을 더 알려고 해야 한다. 여호와를 힘써 알려고 해야 한다. 예수님은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가 복이 있다고 했다. 그들이 배부르게 될 것이라고 약속했다. 다니엘은 8장의 계시를 보고 깨닫지 못하자 수일을 앓도록 그것을 알기를 원했다. 우리가 말씀 깨달아 알기를 그렇게 원해야 하지 않을까?
9월 16일(화) 원하오니 주의 영광을 보여주소서
금송아지 배도 사건 이후, 모세는 하나님의 백성을 위해 중보하며 주님께서 계속해서 그들을 약속의 땅으로 인도하실 것이라는 확신을 원했다. 또한 마음 깊은 곳에서는 주님을 더 잘 알고 싶어 했다.
출애굽기 33:18-23을 읽어 보라. 주님의 영광을 보여 달라는 모세의 요청에 하나님은 어떻게 응답하셨는가?
[출33:18~23] 모세가 이르되 원하건대 주의 영광을 내게 보이소서 19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내가 내 모든 선한 것을 네 앞으로 지나가게 하고 여호와의 이름을 네 앞에 선포하리라 나는 은혜 베풀 자에게 은혜를 베풀고 긍휼히 여길 자에게 긍휼을 베푸느니라 20 또 이르시되 네가 내 얼굴을 보지 못하리니 나를 보고 살 자가 없음이니라 21 여호와께서 또 이르시기를 보라 내 곁에 한 장소가 있으니 너는 그 반석 위에 서라 22 내 영광이 지나갈 때에 내가 너를 반석 틈에 두고 내가 지나도록 내 손으로 너를 덮었다가 23 손을 거두리니 네가 내 등을 볼 것이요 얼굴은 보지 못하리라.
*답: 보여주시겠다고 말씀하시면서 모든 선한 형상과 여호와의 이름을 선포하시겠다고 하셨다.
모세는 주님께 간구했다. “원하건대 주의 영광을 내게 보이소서.” 주님은 자비하심으로 모세에게 당신의 영광을 보여주셨다. 그렇지만 모세의 요청에 응답하실 때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선하심”을 보여주겠다고 약속하셨다. 우리는 하나님의 영광은 그분의 선하심, 즉 그분의 성품이라고 추론할 수 있다(사도행적, 576; 실물 교훈, 414, 415; 선지자와 왕, 313 참조).
"하나님의 영광은 당신의 선하심을 자녀들에게 나누어 주시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남녀들이 최고의 수준에 도달하는 것을 보기 원하신다"(사도행적, 530). 하나님의 영광은 회개한 인간들을 당신의 사랑의 팔로 안으시고(선지자와 왕, 668) 그들을 변화시키는 데 필요한 모든 것을 공급하시는 것이다. 그와 함께 우리의 영광은 우리 자신의 삶에서 그분의 성품을 드러내고 그것을 다른 사람들에게 알리는 것이다.
하나님의 성품, 곧 그분의 선하심과 인자하심, 부드러운 사랑이 우리의 행동에 반영되어야 한다. 그렇게 함으로써 우리는 세상에 축복이 될 뿐만 아니라 지구를 바라보는 우주를 비추는 빛이 될 수 있다. 바울은 이렇게 말한다. "내가 생각하건대 하나님이 사도인 우리를 죽이기로 작정된 자 같이 끄트머리에 두셨으매 우리는 세계 곧 천사와 사람에게 구경거리가 되었노라"(고전 4:9). 나의 하루에 담긴 이러한 우주적 차원은 우리의 삶과 봉사에 우리가 상상조차 할 수 없었던 의미와 목적을 준다. 로마서 2:4에서 바울은 “하나님의 인자하심이 너를 인도하여 회개하게 하”신다고 말한다. 즉, 사람으로 자신의 죄악과 구원의 필요성을 깨닫게 하는 것은 성령에 의해 일깨워진 하나님의 선하심과 성품이라는 것이다. 실제로 우리가 십자가를 바라보며 그곳에 계셨던 분이 누구인지 그리고 왜 그곳에 계셨는지, 즉 그분이 우리를 사랑하셨으며 그것이 우리를 구원할 유일한 방법이었음을 알 때, 우리는 하나님의 선하심과 성품에 대한 가장 위대한 계시를 발견한 것이다.
<교훈> 하나님의 영광은 당신의 선하심을 자녀들에게 나누어 주시는 것이다. 그와 함께 우리의 영광은 삶에서 그분의 성품을 드러내고 다른 사람들에게 알리는 것이다.
<부가설명> 모세는 주의 영광을 보여달라고 요청했다. 하나님의 영광이 무엇일까? 이 요구에 하나님의 대답을 들어보면 하나님께서 보여주실 영광의 실체를 깨달을 수 있지 않겠는가? 우리는 영광이라고 하면 광채를 생각한다. 미켈란젤로는 모세의 얼굴에 광채가 난 것을 표현하려고 머리에 뿔을 조각했다. 중세에 성화를 그리는 사람들은 예수님이나 성인들의 영광을 표현하려고 머리 뒤쪽에 후광을 그렸다.
그러나 모세에게 대답하신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과 전혀 다르다.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내가 나의 모든 선한 형상을 네 앞으로 지나게 하고 여호와의 이름을 네 앞에 반포하리라 나는 은혜 줄 자에게 은혜를 주고 긍휼히 여길 자에게 긍휼을 베푸느니라”(출33:19). 이 대답을 보면 영광은 선한 형상과 여호와 이름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선한 형상은 또 무엇일까? 사람들은 선하다고 하면 곧장 도덕적 사실로 달려간다. 그러나 성경이 가르치는 선한 것은 도덕적 성품보다 더 근본적인 것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것은 하나님의 생명을 얻는 것이다. “저희에게 이르시되 안식일에 선을 행하는 것과 악을 행하는 것, 생명을 구하는 것과 죽이는 것, 어느 것이 옳으냐 하시니 저희가 잠잠하거늘”(막3:4).
예수님은 이 말씀으로 선과 생명, 악과 사망을 동격으로 말씀하셨다. 선한 형상은 하나님의 생명의 형상이다. 그리고 여호와 이름인 ‘여호와’는 ‘존재하는 자’, ‘스스로 있는자’라는 뜻이다. 스스로 존재하신다는 것은 그분이 생명 자체라는 것을 드러낸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보여주실 하나님의 영광이다. 내가 깨달은 하나님의 영광은 그분의 존재성 여호와라는 진리와 그분이 생명 자체라는 진리이다. 이것이 여호와께서 하나님이신 이유다.
9월 17일(수) 하나님의 자기 계시
출애굽기 34:1-28을 읽어 보라. 하나님은 모세에게 당신의 영광을 어떻게 나타내셨는가?
[출34:1~28]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너는 돌판 둘을 처음 것과 같이 다듬어 만들라 네가 깨뜨린 처음 판에 있던 말을 내가 그 판에 쓰리니 2 아침까지 준비하고 아침에 시내 산에 올라와 산 꼭대기에서 내게 보이되 3 아무도 너와 함께 오르지 말며 온 산에 아무도 나타나지 못하게 하고 양과 소도 산 앞에서 먹지 못하게 하라 4 모세가 돌판 둘을 처음 것과 같이 깎아 만들고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 그 두 돌판을 손에 들고 여호와의 명령대로 시내 산에 올라가니 5 여호와께서 구름 가운데에 강림하사 그와 함께 거기 서서 여호와의 이름을 선포하실새 6 여호와께서 그의 앞으로 지나시며 선포하시되 여호와라 여호와라 자비롭고 은혜롭고 노하기를 더디하고 인자와 진실이 많은 하나님이라 7 인자를 천대까지 베풀며 악과 과실과 죄를 용서하리라 그러나 벌을 면제하지는 아니하고 아버지의 악행을 자손 삼사 대까지 보응하리라 8 모세가 급히 땅에 엎드려 경배하며 9 이르되 주여 내가 주께 은총을 입었거든 원하건대 주는 우리와 동행하옵소서 이는 목이 뻣뻣한 백성이니이다 우리의 악과 죄를 사하시고 우리를 주의 기업으로 삼으소서 10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보라 내가 언약을 세우나니 곧 내가 아직 온 땅 아무 국민에게도 행하지 아니한 이적을 너희 전체 백성 앞에 행할 것이라 네가 머무는 나라 백성이 다 여호와의 행하심을 보리니 내가 너를 위하여 행할 일이 두려운 것임이니라 11 너는 내가 오늘 네게 명령하는 것을 삼가 지키라 보라 내가 네 앞에서 아모리 사람과 가나안 사람과 헷 사람과 브리스 사람과 히위 사람과 여부스 사람을 쫓아내리니 12 너는 스스로 삼가 네가 들어가는 땅의 주민과 언약을 세우지 말라 그것이 너희에게 올무가 될까 하노라 13 너희는 도리어 그들의 제단들을 헐고 그들의 주상을 깨뜨리고 그들의 아세라 상을 찍을지어다 14 너는 다른 신에게 절하지 말라 여호와는 질투라 이름하는 질투의 하나님임이니라 15 너는 삼가 그 땅의 주민과 언약을 세우지 말지니 이는 그들이 모든 신을 음란하게 섬기며 그들의 신들에게 제물을 드리고 너를 청하면 네가 그 제물을 먹을까 함이며 16 또 네가 그들의 딸들을 네 아들들의 아내로 삼음으로 그들의 딸들이 그들의 신들을 음란하게 섬기며 네 아들에게 그들의 신들을 음란하게 섬기게 할까 함이니라 17 너는 신상들을 부어 만들지 말지니라 18 너는 무교절을 지키되 내가 네게 명령한 대로 아빕월 그 절기에 이레 동안 무교병을 먹으라 이는 네가 아빕월에 애굽에서 나왔음이니라 19 모든 첫 태생은 다 내 것이며 네 가축의 모든 처음 난 수컷인 소와 양도 다 그러하며 20 나귀의 첫 새끼는 어린 양으로 대속할 것이요 그렇게 하지 아니하려면 그 목을 꺾을 것이며 네 아들 중 장자는 다 대속할지며 빈 손으로 내 얼굴을 보지 말지니라 21 너는 엿새 동안 일하고 일곱째 날에는 쉴지니 밭 갈 때에나 거둘 때에도 쉴지며 22 칠칠절 곧 맥추의 초실절을 지키고 세말에는 수장절을 지키라 23 너희의 모든 남자는 매년 세 번씩 주 여호와 이스라엘의 하나님 앞에 보일지라 24 내가 이방 나라들을 네 앞에서 쫓아내고 네 지경을 넓히리니 네가 매년 세 번씩 여호와 네 하나님을 뵈려고 올 때에 아무도 네 땅을 탐내지 못하리라 25 너는 내 제물의 피를 유교병과 함께 드리지 말며 유월절 제물을 아침까지 두지 말지며 26 네 토지 소산의 처음 익은 것을 가져다가 네 하나님 여호와의 전에 드릴지며 너는 염소 새끼를 그 어미의 젖으로 삶지 말지니라 27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너는 이 말들을 기록하라 내가 이 말들의 뜻대로 너와 이스라엘과 언약을 세웠음이니라 하시니라 28 모세가 여호와와 함께 사십 일 사십 야를 거기 있으면서 떡도 먹지 아니하였고 물도 마시지 아니하였으며 여호와께서는 언약의 말씀 곧 십계명을 그 판들에 기록하셨더라.
모세는 자신이 깨뜨렸던 첫 번째 돌판과 같은 두 개의 돌판을 만들어 가지고 가야 했다(출 32:19). 그는 일곱 번째 시내산으로 여호와를 만나러 가는 중이었다. 그가 이전에 시내산에 올랐던 일은 다음 구절에 기록되어 있다. (1) 출 19:3, 7; (2) 출 19:8, 14; (3) 출 19:20, 25; (4) 출 20:21, 출 24:3; (5) 출 24:9, 12-18; 출 32:15; (6) 출 32:30, 31. 모세는 이른 아침부터 산을 오르기 시작했다.
모세는 이제 하나님의 성품을 바라보는 영광스러운 이해에 참여할 준비가 되었다. 하나님의 성품의 아름다움은 하나님의 이 놀라운 자기 계시 속에서 가장 잘 나타나 있다. 이것은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에 대한 가장 중요한 묘사이며, 성경 전체를 관통하는 금실과도 같다(민 14:18, 느 9:17, 시 103:8, 요엘 2:13, 욘 4:2). 여기서 하신 주님의 선언은 구약성경의 요한복음 3:16이라고 할 수 있다. 성경 기자들은 하나님의 성품을 올바르게 이해하기 위해서 성경의 중요한 부분에서 살아계신 하나님께서 하신 자기 선언을 적용하고, 반복하며, 확장한다.
하나님의 이름에 대한 전례 없이 탁월하고 비할 데 없는 설명을 들었을 때 모세는 주님께 엎드려 경배했다. 하나님의 사랑, 은혜, 자비, 긍휼, 선하심, 신실하심, 용서, 거룩함, 공의를 조금이나마 맛볼 때 우리도 하나님께 이끌리게 된다. 그분의 탁월한 성품을 보고, 감탄하면서 우리는 그분을 사랑하기 시작하고, 그 사랑은 섬기고 순종하고자 하는 열망으로 이어진다.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에 우리도 그분을 사랑하게 되는 것이다(요일 4:19).
이 자기 계시에서 하나님은 모세에게 당신의 백성을 위해 놀라운 일을 행하시고 약속의 땅으로 인도하실 것이라고 확언하신다. 하나님은 그들과 맺은 언약을 갱신하시며 다른 나라들이 당신의 위엄과 놀라운 역사를 보게 될 것이라고 약속하신다.
"보라 내가 언약을 세우나니 곧 내가 아직 온 땅 아무 국민에게도 행하지 아니한 이적을 너희 전체 백성 앞에 행할 것이라 네가 머무는 나라 백성이 다 여호와의 행하심을 보리니 내가 너를 위하여 행할 일이 두려운 것임이니라"(출 34:10).
이스라엘 백성은 번영을 누리려면 하나님께 순종하고 열 가지 분명한 계명을 따라야 했다. 그러기 위해 하나님께서는 모세에게 이미 깨진 그 언약의 내용을 하나님께서 기록하도록 돌판을 만들어 오라고 명하셨다(출 34:27, 28).
<교훈> 하나님의 영광을 경험할 때 모세는 주님께 엎드려 경배했다. 그분의 탁월한 성품을 알게 될 때, 하나님이 사랑하시기에 우리도 그분을 사랑하게 된다.
<부가설명> 화요일 부가설명에서 하나님께서 친히 말씀하신 하나님의 영광이 무엇인지 알아봤다. 그것은 하나님의 이름이 여호와인 것과 그분은 사랑 자체라는 것을 알았다. 그것이 하나님의 영광이다. 영광을 보여달라는 요청에 하나님께서는 선한 형상과 그 이름을 선포하셨다. 자비, 은혜, 노하기 더디 하고, 인자, 진실이 많은 여호와라고 선포하셨다. 성경에는 이 다섯 가지 묘사를 선지자들과 성경 기자들이 자주 언급했다. 그러나 구약성경에 가장 많이 언급된 것이 하나님의 이름 여호와이다. 그리고 ‘여호와를 알리라’ ‘여호와를 알자’ ‘힘써 여호와를 알자’ 같은 말씀이 약 70회 이상 쓰였다. 하나님은 자기 백성이 그들의 하나님이 여호와이심을 확실히 알기를 원하신다. 이 이름은 그분이 존재자. 존재 자체라는 것과 그렇기 때문에 창조주이심을 알게 하는 이름이다. 스스로 존재하시는 분이기 때문에 그분은 생명 그 자체이시다. 우리도 힘써 여호와를 아는 신자가 되어 그분께 영광을 돌리자. 첫째 천사의 기별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고 하면서 창조하신이를 경배하라고 한 이유가 이것이다.
9월 18일(목) 모세의 빛나는 얼굴
출애굽기 34:29-35을 읽어 보라. 모세의 얼굴이 빛났던 이유는 무엇이었는가?
[출34:29~35] 모세가 그 증거의 두 판을 모세의 손에 들고 시내 산에서 내려오니 그 산에서 내려올 때에 모세는 자기가 여호와와 말하였음으로 말미암아 얼굴 피부에 광채가 나나 깨닫지 못하였더라 30 아론과 온 이스라엘 자손이 모세를 볼 때에 모세의 얼굴 피부에 광채가 남을 보고 그에게 가까이 하기를 두려워하더니 31 모세가 그들을 부르매 아론과 회중의 모든 어른이 모세에게로 오고 모세가 그들과 말하니 32 그 후에야 온 이스라엘 자손이 가까이 오는지라 모세가 여호와께서 시내 산에서 자기에게 이르신 말씀을 다 그들에게 명령하고 33 모세가 그들에게 말하기를 마치고 수건으로 자기 얼굴을 가렸더라 34 그러나 모세가 여호와 앞에 들어가서 함께 말할 때에는 나오기까지 수건을 벗고 있다가 나와서는 그 명령하신 일을 이스라엘 자손에게 전하며 35 이스라엘 자손이 모세의 얼굴의 광채를 보므로 모세가 여호와께 말하러 들어가기까지 다시 수건으로 자기 얼굴을 가렸더라.
*답: 여호와와 말씀을 나누었기 때문이다. “모세는 자기가 여호와와 말하였음으로 말미암아 얼굴 피부에 광채가 나나 깨닫지 못하였더라.”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당신의 사랑의 성품을 나타내신 후, 모세는 빛나는 얼굴로 이스라엘 진영으로 내려왔다. 모세는 자신의 얼굴이 빛난다는 사실을 처음에는 전혀 몰랐다. 주님께 가까이 갈수록 사람은 하나님의 거룩하심에 비해 자신의 불완전함을 더 절실히 깨닫게 된다.
모세의 얼굴이 빛나게 된 변화의 원인은 무엇이겠는가? 단순히 그가 하나님의 임재 가운데 있었기 때문은 아니었다. 그는 이전에도 여러 번 주님과 함께 있었지만 그런 만남 이후에도 그의 얼굴이 빛나지 않았다. 하지만 주님의 임재 안에 있지 않았다면 결코 그의 얼굴은 빛나지 않았을 것이다. 하나님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을 깨닫고, 그분의 성품의 아름다움으로 인해 자신을 온전히 하나님께 열었을 때 모세는 비로소 변화되었고 그의 얼굴이 빛났다. 우리의 마음과 생각도 하나님께 굴복하고 그분을 우리 삶의 주님과 왕으로 모실 때에 변화를 경험할 수 있다.
고린도후서 3:18을 읽어 보라. 예수님은 어떻게 당신을 점차적으로 하나님의 형상과 같이 변하게 하실 수 있는가?
[고후3:18] 우리가 다 수건을 벗은 얼굴로 거울을 보는 것 같이 주의 영광을 보매 그와 같은 형상으로 변화하여 영광에서 영광에 이르니 곧 주의 영으로 말미암음이니라.
*답: 수건을 벗은 얼굴로 주님의 영광을 볼 때 성령의 역사로 그렇게 된다.
바울은 모세의 빛나는 얼굴과 예수 그리스도를 비교하며, 하나님의 율법과 은혜가 성육신한 예수님의 영광이 모세의 법의 영광을 능가한다고 말한다. 그리스도와 그분의 율법은 우리가 예수님께 시선을 고정할 때에(히 3:1, 히 12:2), 오직 하나님의 영의 능력으로(고후 3:12-18) 우리의 품성에 새겨질 수 있다.
모세는 하나님께서 우리의 성품을 변화시키시고 하나님의 거룩한 형상으로 빚으시도록 그분에게 맡길 때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 무엇을 하실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모본이다. 바로 이것이 바울이 “새 생명 가운데서 행”(롬 6:4)하라고 한 말의 의미이다.
<교훈> 모세의 빛난 얼굴은 성품을 변화시키고 하나님의 거룩한 형상으로 빚으시도록 하나님께 자신을 맡길 때 그분이 무엇을 하실 수 있는지를 보여준다.
<부가설명> 성경은 예수님을 생명이라고 계시한다. 그 생명은 빛이라고 계시했다.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요1:4). 생명은 빛이다. 하나님은 생명이시기 때문에 빛이시다. “하나님은 빛이시라 그에게는 어두움이 조금도 없으시니라”(요일1:5 후반). 생명 자체기 때문에 빛이시다. 그래서 그분에게는 그림자가 없다. “각양 좋은 은사와 온전한 선물이 다 위로부터 빛들의 아버지께로서 내려오나니 그는 변함도 없으시고 회전하는 그림자도 없으시니라”(약1:17). 우리가 예수님을 믿고 진정으로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면 그는 세상의 빛이다. 어두움이 이기지 못하는 빛이다. “지혜자와 같은 자 누구며 사리의 해석을 아는 자 누구냐 사람의 지혜는 그 사람의 얼굴에 광채가 나게 하나니 그 얼굴의 사나운 것이 변하느니라”(전8:1). 모든 진정한 그리스도인은 빛이다. 광채가 나지는 않을지라도 그의 얼굴에는 자비의 모습이 드러날 것이고 그의 삶의 모습이 보는 사람에게 빛으로 보일 것이다. 이 빛을 예수님은 “이같이 너희 빛을 사람 앞에 비취게 하여 저희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마5:16). 빛을 비치는 것이 바로 착한 행실로 생활하는 것이라고 하셨다. 성령께서 역사하셔서 재림성도 모두가 빛이 되었으면 얼마나 좋읅까?
9월 19일(금) 더 깊은 연구를 위하여
부조와 선지자 28장 “시내에서의 우상 숭배” 327-330을 읽어 보라.
어느 흐리고 어두운 날, 아버지와 아들이 성당을 방문했다. 그들이 성경의 여러 이야기를 아름답게 묘사한 스테인드글라스(채색 유리) 창문을 바라보고 있는데, 갑자기 햇빛이 비추기 시작하면서 유리에 그려진 인물들의 모습이 환하게 드러나기 시작했다. 소년이 아버지에게 물었다. “아빠, 이 사람들은 누구예요?” 아버지는 기독교나 그리스도 또 그분의 제자들에 대해 잘 몰랐지만 재빨리 대답했다. “이 사람들은 그리스도인들이야.” 이 눈부신 모습은 아들의 마음속에 깊이 남아있었다. 어느 날 수업 시간에 선생님이 물었다. “얘들아, 너희는 그리스도인이 어떤 사람인지 아니?” 어린 소년은 성당의 빛나는 그림을 떠올리며 대답했다. “알아요, 그리스도인은 빛나는 사람들이에요.” 이와 같은 맥락에서 예수님도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너희 빛이 사람 앞에 비치게 하여 그들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마 5:16).
오직 빛나는 사람만이 변화의 도구가 될 수 있다.
함께하는 토의를 위하여
1. “만일 우리가 하나님 앞에 스스로를 낮추고 친절하고 예모 있고 부드러우며 동정심을 갖는다면 오늘날 단 한 사람밖에 없는 곳에 백 명의 사람이 진리로 돌아오게 될 것이다”(교회증언 9권, 189). 이 글은 우리의 성품과 행동, 태도가 우리의 증거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에 대해 우리 모두를 위한 어떤 강력한 기별을 담고 있는가?
*답: 성도의 빛이 되는 삶이 곧 전도가 된다는 말씀이다.
2. 출애굽기 34:6, 7은 구약성경의 요한복음 3:16이라고 부를만하다. 그 이유는 무엇인가?
*답: 여호와 하나님께서 친히 선포하신 하나님의 성품을 드러냈기 때문이다.
3. 출애굽기 34:6, 7에 보여주신 하나님의 자기 계시에 근거하여, 당신의 하나님은 어떤 분이냐고 묻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성품의 아름다움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겠는가?
*답: 그분은 자존자이시며 생명 자체시고 빛이심을 설명할 수 있을 것이다. 빛이 얼마나 아름다운가! 빛이 없으면 아무것도 없다
4. 그리스도를 믿노라고 고백하는 사람들의 성품과 행동이 당신의 삶에 어떤 변화를 가져왔는가? 특히, 친절하고 은혜로우며 겸손하고 용서하는 이들은 당신에게 어떤 긍정적인 영향을 주었는가? 반대로, 불친절하고 편협하며 오만한 “기독교인들”은 당신과 하나님과의 관계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가?
*답: 각각 대답하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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