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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과-시편에 나타난 계시-(1)-(핵심 Q&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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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이봉주 작성일25-05-21 00:10 조회60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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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과 시편(詩篇)에 나타난 계시(啓示) -1

    (05월 24일 (안) / 일몰: 오후 7시 41분)


<기억절(記憶節)>

 “또 내가 보니 보라 어린 양(羊)이 시온 산(山)에 섰고 그와 함께 십사만 사천이 서 있는데 그들의 이마에는 어린 양(羊)의 이름과 그 아버지의 이름을 쓴 것이 있더라”(계14:1). 


<개요(槪要)>

(Q)~(요한계시록 14장)의 계시(啓示)를 생생하게 느낄 수 있는 구약성경(舊約聖經)의 어디에서 상징(象徵)과 형상(形狀)과 암시(暗示)를 발견(發見)하고 찾을 수 있습니까?


(A)~<시편(詩篇)은 인간의 다양(多樣)한 경험(經驗)과 하나님과의 상호작용(相互作用)을 말하며 특히 시편(詩篇) 속에는 (계시록 14장)의 상징(象徵)과 형상(形像)과 암시(暗示)를 기록하고 있다.

그러므로 어린 양(羊)의 피 때문에 우리는 시온에 설 수 있으며 영원(永遠)한 복음(福音)을 받은 우리에게 사명(使命)이 주어졌다. 우리의 삶과 행동(行動)에 하나님의 사랑의 법(法)을 새기고 영원(永遠)한 복음(福音)을 세상(世上)에 나누어야 하는 사면(使命)을 받았음을 깨닫고 감사해야 한다.> 


⑴.시편(詩篇)은 인간의 다양(多樣)한 경험(經驗)과 하나님과의 상호작용(相互作用)을 말하며 마지막 때에 우리의 역할(役割)을 이해(理解)하게 한다. 


⑵.“봉사(奉仕)가 지상(地上)에서 하늘의 성전(聖殿)으로 옮겨지고, 성소(聖所)와 우리의 크신 대제사장(大祭司長)이 인간(人間)의 눈에 보이지 않을지라도 제자(弟子)들은 그것으로 말미암아 조금도 손실(損失)을 당하지 않을 것이었다.


⑶.그들은 구주(救主)의 부재(不在)로 말미암아 그들의 교통(交通)이 단절(斷切) 되거나 능력이 감퇴(減退)되는 일이 없음을 깨닫게 될 것이었다. 예수께서는 하늘 성소에서 봉사(奉仕)하시는 한편 그의 성령(聖靈)으로 여전히 지상(地上)의 교회(敎會)를 섬기는 자가 되신다.”. (소망, 166). 


⑷.구약성소(舊約聖所)에 대한 이해(理解)가 없다면 요한이 묘사(描寫)하는 내용을 이해(理解)하는 것은 불가능(不可能)해진다.


⑸.성전(聖殿)의 세부 사항(細部事項)을 연구(硏究)함으로써 우리는 많은 것을 배울 수 있다. 시편(詩篇)에서 우리는 이러한 세부 사항들을 이해(理解)하는 데 중요한 요소(要素), 즉 하나님의 백성이 성전(聖殿)과 개인적(個人的)으로 어떤 관계(關係)를 맺었는지를 발견(發見)한다.


⑹.우리는 다윗이 성소(聖所)와 그 예배(禮拜)에 어떻게 관계(關係)했는지를 엿볼 수 있으며, 메시아께서 자신들을 위해 행(行)하실 일에 대한 하나님의 백성의 진심(眞心) 어린 반응(反應)을 볼 수 있다.


⑺.예수님을 이해(理解)하는 데 도움이 되는 것은 단지 그러한 패턴만이 아닙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성소(聖所)를 통해 우리에게 가르치신 것을 이해(理解)한 사람들의 개인적(個人的)인 경험(經驗)을 탐구(探究)하고, 우리 자신과 하나님과의 경험(經驗)에 대한 교훈(敎訓)을 얻을 수 있다.


⑻.성소(聖所)는 하나님이 나타나시는 장소(場所)이다)-“하나님이 이르시되 이리로 가까이 오지 말라. 네가 선 곳은 거룩한 땅이니 네 발에서 신을 벗어라.”(출 3:5). “여호와의 군대대장(軍隊大將)이 여호수아에게 이르되 네 발에서 신을 벗어라. 네가 선 곳은 거룩하니라.”(수 5:15). 


⑼.하나님은 우리를 만나 주시며 어린 양(羊)의 피 때문에 우리는 시온에 설 수 있다. 하나님의 사랑의 법(法)은 남은 자(者)의 마음에 새겨지고, 구속(救贖)받은 자(者)는 하나님을 경배(敬拜)하는 자(者)로 영원(永遠)한 복음(福音)을 알고 이를 세상(世上)에 나눌 것이다. 


⑽.하나님의 사랑과 자비(慈悲)는 가장 깊은 바닥까지 미치며, 믿음으로 회개(悔改)하는 영혼(靈魂)을 높여 하나님의 자녀가 되게 하신다. 이러한 시편(詩篇)의 내용(內容)은 마지막 때에 우리의 역할(役割)을 이해(理解)할 수 있게 도와준다.


(05월 18일) (일) <우리의 대제사장(大祭司長)> 


(Q)~성소제도(聖所制度)와 성소(聖所)의 세부 사항(細部事項)들은 무엇을 나타내며 대제사장(大祭司長)의 역할(役割)은 어떤 의미(意味)가 있습니까? (시 122:1)


(A)~<⑴.성경(聖經)이 말하는 성소(聖所)는 ①.하나님께서 인간(人間)을 만나시기 위하여 거(居)하시는 곳, ②.인간이 죄로 말미암아 죽게 되었을 때 하나님께서 그를 만나 죄를 용서(容恕)하시는 곳, 그리고 ③.사람이 삶의 모든 간구(懇求)와 염원(念願)을 가지고 하나님을 뵙기 위하여 찾아가는 곳. ⑤.하나님께서 좌정(坐定)하여 계신 곳, 곧 ⑥.하나님의 집(the house of the LORD)이요, ⑦.보좌(throne)로서 지극히 거룩한 곳인 성소(聖所, the Holy Place)이다. 

즉 성소(聖所)는 우리가 단순히 생각하는 피 흘리는 제사(祭祀)드리는 장소(場所)로서의 공간(空間) 이상의 깊은 의미(意味)가 있음을 깨닫게 됩니다.>


⑵.①.성소(聖所)는 '거룩한 장소(場所) holy place, 성소(聖所) sanctuary' 성막(聖幕), 성전(聖殿)을 의미(意味)한다. ②.구약성경(舊約聖經)에서 이 단어(單語)는 74회 나온다. ③.이 단어(單語)가 성소(聖所)를 가리킬 때 그것은 하나님께 대한 예배(禮拜)를 위해 드려진 물리적 장소(物理的場所)를 의미한다. 이곳은 거룩하였다.


⑶.하늘 성소(聖所)의 원형(原形)을 지상(地上) 성소(聖所)에 만들게 하셨다. 지상성소(地上聖所)의 대제사장(大祭司長)은 하늘 촛대 사이에 거니신 대제사장(大祭祀長) 예수 님께서 실체(實體)의 역할(役割)을 담당하시어 지상성소(地上聖所)와 하늘 聖所의 만남을 통해서 죄악(罪惡) 세상(世上)의 빛이 되라는 가르치심의 교훈(敎訓)을 주신다. (히브리서 9:11~15)


⑴.지상성소(地上聖所)는 제사장(祭司長)과 제물(祭物)부터 가구(家具)와 다른 세부적(細部的)인 디자인에 이르기까지 놀라울 정도로 자세(仔細)하게 예수님을 예표(豫表)했다. 이 모든 것이 예수님에 대해 말하고 있다.


⑵.평범(平凡)했던 장소(場所)라 할지라도 그곳에 하나님이 나타나시면 거룩한 곳이 됩니다. 평범(平凡)한 사람도 그 마음에 하나님을 영접하여 그곳에 하나님이 거하시면 성도(聖徒)가 되는 원리와 같은 것입니다.


⑶.하나님께 예배(禮拜)드리는 장소(場所)로서의 성소(聖所)는 성경에 “성소(聖所)”는 제사(祭祀)의 형태(形態)로 예배(禮拜)가 이루어지는 장소(場所)로 가장 많이 언급(言及)됩니다. 이 성소(聖所)는 백성들이 바라던, 이 땅에 세워진 하나님의 집이다.


⑷.성소(聖所)는 어떤 의미가 있는가? 예수께서 십자가(十字架)에 못 박히심으로 성소제도(聖所制度)가 폐지(廢止)되고, 성전자체(聖殿自體)가 무너진 지 2,000여 년이 되어갑니다. 지상성소(地上聖所)의 봉사자(奉仕者)였던 백성들도 더 이상 성소제도(聖所制度)에 머물러 있지 않습니다. 구약(舊約)의 완성(完成), 제사제도법(祭祀制度法)의 마침이 되신 그리스도, 이제 그의 백성들에게 성소제도(聖所制度)는 위로부터 찢어진 성소(聖所)의 휘장(揮帳)처럼 아무런 효험(效驗)이 없다. 


⑸.그러나 지금도 여전히 성소(聖所)를 공부해야 하는 이유(理由)가 있다. 그것은 성소제도(聖所制度)가 하나님의 구속(救贖)의 길을 보여주기 때문이며, 또 하나의 성소(聖所)를 바라보기 위(爲)함이고, 영원(永遠)히 사라지지 않을 또 다른 성소(聖所)를 깊이 생각해야 하기 때문이다.


⑹.오직 예수그리스도에 의해서만이 구원(救援)할 수 (可能) 있다는 것을 배우고 체험(體驗)하는 곳이 성소(聖所)이다. 성소(聖所)는 인간(人間)의 속죄(贖罪)와 구속(救贖)이 이루어지는 방법과 과정(過程)을 가르치는 교실(敎室)이기 때문에, 죄(罪)와 구속(救贖)과 종말(終末)을 이야기합니다. 


⑺.성소(聖所)는 하나님의 통치(統治)와 하나님 정권(政權)(시 103:19)의 컨트롤 타워(Control Tower)이다. 성소(聖所)는 따로 떨어져 한적(閑寂)한 곳이나 산속에 머무를 수가 없었다. 그 이유(理由)는 죄가 땅의 사람들과 함께 있고 그들 안에 있기 때문에 구원(救援)의 원리(原理)도 그들 곁에 항상(恒常) 머물러 있어야 했던 것이다.


⑻.하나님께서 성소(聖所)에 머무시면서 인간들과 만나셨다. 그분께서는 죄인이 자발적(自發的)으로 하나님께 다가와 죄를 해결(解決)하기를 원하셨다. 그분은 겉으로 나타나는 행위(行爲)보다 마음의 동기(動機)를 살피시는 분이시다. 


⑼.그래서 죄가 해결(解決)된 사람을 구원(救援)하시는 하나님의 입장에서는 죄가 제대로 해결이 되었는지를 가려내는 심판(審判)이 불가피(不可避)한 것이다. 심판(審判)의 참 목적은 죄를 샅샅이 가려내서 멸망(滅亡)시키려는 것이 아니고, 죄를 정당(正當)하게 처리(處理)하여 구원(救援)하시려고 하는 것이다. 그래서 성소(聖所)는 곧 심판(審判)의 장소(場所)로서 법정(法廷)이 되었다. “나 외에 다른 신이 없나니 나는 공의를 행하며 구원을 베푸는 하나님이라 나 외에 다른 이가 없느니라.”(사 45:21)


⑽.성소(聖所)에서는 심판(審判)은 곧 구원(救援)이었다. 죄 용서(容恕)와 심판(審判)과 구원(救援)이 모두 한꺼번에 이루어지는 장소(場所)가 바로 성소(聖所)라는 사실을 생각하면, 우리의 죄를 용서(容恕)하시고 심판(審判)하셔서 구원(救援)하시는 하나님께 감사(感謝)할 뿐이다.


(05월 19일) (월) <시온 산에서> 


(Q)~(요한계시록 14:1~5절)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백성이 시온 산에 서 있는 것을 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거룩한 시온 산에 설 수 있는 사람은 어떤 사람입니까? (시편 15:1~5, 시편 24:1~10절, 히브리 10:19) 


(A)~<시온 산은 지금의 이스라엘과 요르단 사이의 예루살렘에 있는 언덕으로 솔로몬이 여호와의 신전(神殿)을 건립한 이래 “성(聖)스러운 산(山)”이라고 하여 유대민족의 신앙 중심지(信仰中心地)가 되었다. 이는 죄인(罪人)을 거룩한 시온 산에 설 수 있게 하실 분은 어린 양(羊) 되시는 예수그리스도의 대속(代贖)과 속죄(贖罪)로 시온에 설 수 있게 될 것인데 그 최종(最終) 주자(走者)가 144,000人이 될 것이다.>


◉.(요한계시록 14장)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백성이 시온 산에 서 있는 것을 본다. 원래의 시온 산은 오늘날 예루살렘 구시가지(舊市街地) 서(西)쪽에 있었으며 하나님의 보좌(寶座), 곧 하나님이 당신의 백성들 가운데 계신 곳으로 여겨졌다. 시간이 지나면서 모리아산에 위치한 성전산(聖殿山)도 시온 산과 동일(同一)시되었다. 


⑴.거룩한 시온 산에 설 자가 누구인가를 묻는 다윗의 중요한 질문(質問)에 요한계시록(啓示錄)은 어린 양(羊)을 보여준다. 어린 양(羊)의 피 때문에 우리는 시온에 설 수 있다.


◉.굴복(屈伏)하는 것은 무엇이든 더럽혀지는 행동이 될 것이다. 이제 시온산 위에 승리(勝利)하여 서서, 성도(聖徒)들은 그들의 충성(忠誠)에 대해 칭찬(稱讚)을 받았다.


⑵."정직(正直)하게"라는 뜻의 타밈(tamim)은 완전(完全)함을 의미(意味)하며, 순진(純眞)함을 함축(含蓄)하고 있으며, 거짓이나 이중성(二重星)이 없는 진실(眞實)한 종교(宗敎)를 암시(暗示)한다. 하나님 백성의 종교(宗敎)는 시편(詩篇) 중간 부분에 나오는 주님을 경외(敬畏)하는 것에 기초(基礎)합니다. (시 15:4 참조). 


⑶.시온에서 구원(救援)을 기다리는 하나님 백성의 종교적(宗敎的) 이상은 수직적(垂直的)이면서도 수평적(水平的)입니다. 이 이상은 보이지 않는 하나님에 대한 개인적(個人的)인 믿음과 다가올 하나님 나라에 대한 소망(所望)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따라서 분별력(分別力)(지혜(智慧)를 전하는 것)과 묵시적(黙示的) 의미(意味)를 동시에 지닙니다.


⑷.(시편 24편)은 (시편 15편)을 보완(補完)합니다. (시편 15편)이 실존적(實存的) 관점(觀點)을 가지고 있는 반면, (시편 24편)은 세 부분으로 나뉜 우주적관점(宇宙的觀點)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 시편(詩篇)은 우주를 다스리시는 창조주 하나님에 대한 확언으로 시작합니다(시 24:1, 2). 


⑸.이전에 요한은 그들이 가장 혹독한 시련(試鍊)을 경험하는 것을 보았다. 그는 그들이 거절(拒絶)을 당하고 죽음의 정죄(定罪)를 당하는 것을 보았다. 그러나 가장 어두운 때에 그들은 구출(救出)을 받아서 이제는 영원히 지구의 투쟁(鬪爭)에서 안전하게 되어 어린 양과 함께 있다.


⑹.144,000인은 짐승과 그의 우상(偶像)과의 대쟁투(大爭鬪)에서 승리(勝利)한 자(者) 들이다(참조 계14:1). 그들은 이 투쟁(鬪爭)에서 놓여남을 입고 이제는 하나님의 보좌(寶座) 앞에서 안전(安全)하다. “그들은…살아 있는 자(者)들 가운데 땅에서 끌어 올림을 받은 사람들이다. 그들은 ‘처음 익은 열매로 하나님과 어린 양(羊)에게 속한 자(者)들이다’”(대쟁투, 649).


⑺.하나님께서 우리의 마음의 보고(寶庫)에 항상 간직하고 있어야 할 진리(眞理), 곧 웅장(雄壯)하고 고상(高尙)하게 하고 거룩하게 하는 진리를 주실 때, 교회(敎會) 안에는 미신(迷信)과 우화(寓話)를 말하는 사람들이 있을 것이라고 그리스도께서 말씀하신다.


⑻.사람들이 이런저런 이론(理論)들을 주워듣고 반드시 알아야 할 필요가 없는 것을 알고는 거기에 호기심(好奇心)을 가질 때 그들은 하나님의 인도(引導)를 받고 있는 것이 아니다.


⑼.하나님의 말씀이 가르치고 있지 않은 것, 상상력(想像力)을 동원(動員)해야 하는 것들을 제시(提示)하는 것은 하나님의 계획(計劃)이 아니다. 영적(靈的)으로 도움이 되지 않는 질문(質問)들, 이를테면 “누가 144,000인 이 될 것인가?”와 같은 질문(質問)들을 놓고 논쟁(論爭)을 벌이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 아니다. 조금 있으면 하나님의 택(擇)하신 이 사람들이 누구인가를 확실히 알게 될 것이다.


⑽.영적(靈的)으로 아무 도움이 되지 않는 것들을 알려고 그대의 시간(時間)을 허비(虛費)하지 말라. 영생(永生)을 얻기 위해서 내가 무엇을 할 것인가? 이것이야말로 참으로 중대(重大)한 질문이다. 이 질문(質問)은 분명(分明)하게 그 답이 주어져 있다. “율법(律法)에 무엇이라고 기록되어 있으며 어떻게 읽었느냐?”(원고 26, 1901).


(05월 20일) (화) <우리 마음속의 법(法)> 


(Q)~남은 자(者) 즉 구원(救援)받은 백성(百姓)의 이마에 새겨진 하나님 이름의 의미(意味)는 무엇을 말하는 것이며, 하나님의 성품(性稟)을 어떻게 마음에 새길 수 있겠습니까? (출애굽기 33:18~23, 출애굽기 34:1~7, 시편 119:55, 계시록 14:1)


(A)~<남은 자(者)의 이마에 새겨진 하나님의 이름은 생각(生覺)과 마음에 하나님의 성품(性稟)이 새겨져 있어서 우리의 삶이 그분의 사랑과 성품(性稟)을 나타낸다는 것을 의미(意味)한다. 즉 구원(救援)받은 백성(百姓)은 생각과 마음에 하나님의 성품(性品)이 새겨져 착한 삶으로 살아간다는 의미이며 또한 하나님의 성품을 품었고 드러낸다는 뜻이다>.


⑴.성경에서 남은 자의 이마에 하나님의 이름이 새겨진 것을 말할 때, 그것은 문자 그대로 글자가 적혀 있다기보다는 우리의 생각(生覺)과 마음에 하나님의 성품(性稟)이 새겨져 있어서 우리의 삶이 그분의 사랑과 성품(性稟)을 나타낸다는 것을 의미(意味)한다. 


⑵.성경에서 '이름'은 사람들이 서로를 부르는 단순(單純)한 호칭(呼稱) 이상으로 존재자체(存在自體)나 성품(性稟)을 의미(意味)한다. 오늘날까지도 많은 문화권(文化圈)에서 누군가의 인격(人格)을 높이 평가(評價)할 때 그가 “좋은 이름”을 가진 사람이라고 말한다.


⑶.하나님의 영광(榮光)은 단순히 시각적(視覺的)으로 보이는 것 이상(以上)이며 하나님의 영광(榮光)은 그분의 성품(性稟)이다. 하나님의 이름도 마찬가지다. 


⑷.우리가 하나님께 가까이 거(居)하는 것과 그분이 어떤 분이시며, 그분이 우리를 위해 행하신 일로 인해 그분을 사랑하는 것이 나타난다. 


⑸.하나님께서 모세에게 하나님을 알려주실 때 모세에게 하나님의 성품(性稟)이 담겨 있는 십계명(十誡命)을 새겨서 함께 주셨다는 점도 매우 의미심장(意味深長)하다. 


⑹.(요한계시록 14장)은 하나님의 “이름”을 가진 사람을 “하나님의 계명(誡命)을 지키는” 사람이라고 말한다.


⑺.이생에서 그들이 하나님께 충성(忠誠)할 것 같으면, 그들은 마침내 하나님의 ‘얼굴을 볼 터이요 그의 이름도 저희 이마에 있’(계시록 22:4)을 것이다. 


⑻.(영원(永遠)한 유익(有益)을 최고(最高)의 것으로 삼음) 그들의 이마에 무한(無限)하신 하나님의 인(印)을 받은 사람들은 세상과 세상이 주는 매력(魅力)을 영원한 이익(利益)보다 못한 것으로 생각했다. (리뷰 1897.7. 13).


⑼.(우리 속에 그리스도의 형상이 이루어짐)- 왜 그들이 특별히 뽑혀 나왔는가? 이는 그들이 온 세상 앞에 놀라운 진리(眞理)와 함께 서야 했으며, 반대(反對)를 받아야 했으며, 반대(反對)를 받고 있는 동안에도 그들이 하나님의 아들과 딸이라는 것을 기억(記憶)해야 했으며, 영광(榮光)의 소망(所望)이신 그리스도를 그들 속에 모셔야 한다는 것을 기억해야 했기 때문이었다(원고 13, 1888).


⑽.하나님의 이름은 그분의 성품(性稟)이다. 그분의 도덕법(道德法)은 그분의 성품의 기록이다. 그리고 마지막 날에 하나님의 거룩한 산(山)에 모인 사람은 그분의 율법(律法)에 순종(順從)함으로써 나타나는 하나님에 대한 사랑으로 충만(充滿)한 사람이다.


(05월 21일) (수) <시편 5편(篇)>

 

(Q)~다윗은 잃어버린 바 된 자(者)와 구속(救贖)받은 자(者)를 어떻게 대조(對照)하고 있으며, 주께 피(避)하며 주의 이름을 사랑하는 자가 즐거워할 수 있는 이유(理由)는 무엇입니까? (시편 5편, 계시록 14:1~12)


(A)~<다윗의 시(詩)는 잃은 자(者)와 구속(救贖)받은 자(者)를 선명(宣明)하게 대조(對照)한다. 시편기자(詩篇記者)의 성품(性稟)과 하나님을 경배(敬拜)하는 특성(特性)은 요한계시록의 남은 무리에게서 동일(同一)하게 나타난다.>


⑴.우리는 다윗의 기도(祈禱)를 배우도록 하자. 우리를 위해서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도 모든 선(善)한 사람들, 비록 매사(每事)에 우리의 마음에 들거나 우리의 이익(利益)이 되지 않는 자(者)들일지라도 하나님을 의지(依支)하고 그의 이름을 사랑하는 모든 사람을 위해서도 다윗의 기도(祈禱)를 배우도록 하자.


⑵.악(惡)한 자는 하나님의 집에서 환영(歡迎)을 받지 못하지만, 하나님의 자녀(子女)는 그곳에서 환영(歡迎)을 받는다. 그는 하나님이 자기를 환대(歡待)해 주실 것임을 확신(確信)한다. 이러한 확신은 진실(眞實)로 하늘 아버지에 대한 아이 같은 다윗의 신뢰심(信賴心)의 표출(表出)이다.


⑶.왕(王)인 다윗이 왕의 왕(王)이신 하나님께 자신이 종속(從屬)되어 있음을 인정(認定)하는 것은 주목(注目)할 만한 일이다. 여기서 “하나님”은 엘로힘(’Elohim)의 번역(飜譯)이다. 시인(詩人)은 하나님의 전능(全能)하심을 인정(認定)한다. 우가릿 문헌(文獻)들에서는 엘(’el)을 “왕”으로 칭(稱)한 예(例)들을 많이 찾아볼 수 있다. 


⑷.하나님은 너무나도 거룩하고 순결(純潔)하므로 악인(惡人)들의 계획(計劃)을 진전(進展)시키는 일에 그 어떤 역할(役割)도 할 수 없다. 만일 그가 그들에게 호의(好意)를 보인다면 이는 곧 그들이 그의 거처(居處)에 들어오도록 허락(許諾)하는 것과 동일(同一)한 일이 될 것이다. 


⑸.기도(祈禱)는 가장 힘있게 격려(激勵)하는 원리(原理)가 되며 기도의 가장 강력(强力)한 또는 효과적(效果的)인 계기(契機)가 되는 것은 우리가 특별한 은혜(恩惠)를 입고 있으며, 특별한 기대(期待)를 하고 있는 그를 "우리의" 왕(王), "우리의" 하나님으로 간주(看做)하는 것이다.


⑹.하나님의 이름이 마음에 새겨지면 우리는 더 이상 잠잠(潛潛)히 있을 수 없다. 하나님의 백성(百姓)은 “큰 소리로”(계14:7) 마지막 자비(慈悲)의 초청(招請)을 전(傳)할 것이다. 


⑺.다윗은 다음과 같은 것을 결심(決心)하고 있다. 하나님께 경배(敬拜)할 것을, 그에게 경의(敬意)를 표하고 그의 이름에 합당(合當)한 영광(榮光)을 돌릴 것을 결심(決心)하고 있다.


⑻.요한은 (요한계시록 14:7)의 이 핵심부분(核心部分)에서 죄인(罪人)에 불과한 자가 사망에서 벗어나 하나님의 임재(臨在) 앞에 설 수 있는 특권(特權)을 누리는 놀라운 장면을 보여 준다.


⑼.다윗은 하나님을 공개적(公開的)으로 경배(敬拜)할 것을 결심(決心)하고 있다. "주의 집에 들어가, 주의 전(殿)에 들어가 다른 성실(誠實)한 경배자(敬拜者)들과 함께 경배(敬拜)하겠나이다." 다윗은 매우 은밀(隱密)히 경배(敬拜)했고 때때로 혼자 기도(祈禱)했었으나(시편 5:2~3절). 그가 지성소(至聖所)를 섬기는 일은 매우 꾸준했고 헌신적(獻身的)이었다. 


⑽.다윗은 공손히 그리고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놓여진 무한(無限)한 거리(距離)에 대한 올바른 인식(認識)을 갖고 그를 섬길 것을 결심(決心)하고 있으며 하나님을 섬기는 데 있어서 오직 하나님에게서만 격려(激勵)를 얻고자 결심(決心)하고 있다.


(05월 22일) (목) <죄인(罪人)에게 주의 길을 가르치소서> 


(Q)~다윗과 이사야는 용서(容恕)받고 죄(罪)에서 씻음을 받은 후 무엇을 하겠다고 약속(約束)했는가? (시편 51:7~15, 이사야 6:1~8)


(A)~<입술이 정결(淨潔)케 됨으로써 죄에서 자유함을 입은 선지자(先知者)는 여호와의 음성(音聲)을 듣자마자 그 가슴의 뜨거움만큼이나 불타는 정열(情熱)로 이렇게 소리친다:’나를 보십시오. 나를 보내십시오.’ ‘나를 보내십시오’(* . 히네니)란 말은 헌신(獻身)할 준비가 되어 있음을 나타내는 관용적(慣用的) 표현이다. 따라서 ‘나는 준비되어 있습니다.’와 같은 말이다(Alexander, Michaelis). 죄 씻음을 받은 감격(感激)이 헌신(獻身)에 대한 열정(熱情)으로 이어지는 또 다른 경우(境遇)로는 (시편 51:12~15)에도 언급되어 있다. (이사야 6:1~8, 만나주석)>


⑴.다윗의 이 기쁨의 출처(出處)는 하나님께만 있을 수밖에 없는 것이다. ‘즐겁고 기쁜 소리’는 사죄(赦罪)가 됐다는 하나님의 선포(宣布)와 그가 바라던 구원(救援)의 약속(約束)을 가리킨다(Weiser). 그 당시 다윗은 죄책(罪責)에 사로잡혀 있었던 나머지 극심(極甚)한 고통(苦痛)과 슬픔 가운데 있었기 때문에 바로 이 같은 ‘즐겁고 기쁜 소리’가 절대적(絶對的)으로 필요했었다. (사 52:7, 롬 10:15).


⑵.다윗은 ‘우슬초(牛膝草)’는 문둥병에서 완쾌(完快)되어 부정(不淨)의 상태에서 벗어난 자(者)가 자신의 몸에 짐승의 피를 뿌리는 데(레 14:4) 혹은 시체(屍體)나 무덤을 만진 자에게 물을 찍어서 뿌렸던 정결의식(淨潔儀式)과(민 19:18) 관련하여 사용했던 식물(植物)이다. 


⑶.따라서 본 문구(文句)는, 다윗이 (1) 자신의 죄악(罪惡)이 매우 심각한 상태이며 (2)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도 사죄(赦罪)의 은총(恩寵)을 받을 수 있다는 사실(요일 1:9)을 깨닫고 있었음을 보여주는 증거(證據)이다.


⑷.다윗의 이 기쁨은 단순한 감정적(感情的) 차원(次元)의 즐거움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관계(關係)가 회복(回復)되어 하나님께 온전히 의뢰(依賴)함으로써 생기는 희락(喜樂)을 가리키며(롬 5:1) 그것은 곧 구원(救援)의 기쁨을 뜻한다. (시편 9:14, 13:5, 35:9).


⑸.다윗은 내 모든 죄악(罪惡)을 도말(塗抹)하소서. (시편 51:1절)의 ‘내 죄과(罪過)를 도말(塗抹)하소서’와 거의 유사(類似)한 문구(文句)이다. 다윗은 이러한 문구로서 지금까지의 자신의 사죄(赦罪)를 위한 기도(祈禱)를 마무리 짓게 되며, 이후(以後)로부터는 간구(懇求)의 초점(焦點)을 ‘구원(救援)’에다 맞춘다.


⑹.여기서 ‘정한 마음’은 범죄(犯罪)의 욕구(慾求)를 물리칠 정도의 능력이 있는, 성령(聖靈)에 의해서 변화(變化)된 심령(心靈)을 가리킨다. 한편 ‘창조(創造)하시고’( 바라)는 하나님께서 무(無)에서 유(有)를 산출(産出)해 내는 경우(境遇)에 사용된 동사(動詞)이다(창 1:1).


⑺.다윗은 바로 이 같은 동사(動詞)를 과감(過感)히 사용함으로써, (1) 하나님께서 원(願)하시는(시편 51:6절) 삶을 사는 데 있어서 자신의 타락(墮落)한 옛 성품(性稟)은 전혀 무의미(無意味)함을 강력(强力)히 시사(示唆)하며 (2) 아울러 그러한 삶은 하나님의 이적적(異蹟的)인 은혜(恩惠)로서만 가능(可能)함을 나타낸다..


⑻.(내가 범죄자(犯罪者)에게 주의 도(道)를 가르치리라). 이것은 죄 용서(容恕)를 받은 사람의 감사 행위 그 이상(以上)이자 사죄(赦罪)의 은총(恩寵)을 받은 사람에게서 표출(表出)될 수밖에 없는 자연스러운 결과(結果)이다. (행 4:20). 


⑼.새로운 삶이란 경건(敬虔) 그 자체를 즐기거나 혹은 하나님께로부터 말미암는 개인적(個人的)인 기쁨에 만족(滿足)하는 이기적(利己的) 태도(態度)가 아니다(Weiser). 오히려 자신처럼 하나님께 범죄(犯罪)하여 영적(靈的)으로 고통(苦痛)을 당하는 죄인들에게, 그러한 고통(苦痛)에서 벗어날 수 있는 방법과 앞으로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 새로운 삶의 방향(方向)을 제시(提示)해주는 것이어야 한다. (눅22:32).


⑽.이사야는 정결(淨潔)케 하심을 경험(經驗)한 후 보냄. 받았다. 죄인(罪人)을 구원(救援)하는 영원(永遠)한 복음(福音)을 먼저 경험(經驗)할 때 세상에 세 천사(天使)의 기별(奇別)을 전(傳)하는 부름을 감당(堪當)할 수 있다. 


◉.여기서 ‘주의 도(道)’(데라케이카)는 문자적(文字的)으로 ‘당신의 도(道)’로서 주님이 기뻐하시는 삶의 방식(시편 25:4) 혹은 그러한 삶의 지침이 되는 교훈(敎訓)(시편 25:8)을 가리킨다. 보다 구체적(具體的)으로는 하나님의 율법(律法)을 말한다. (시편 119:33).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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