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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과 시편에 나타난 계시 -1(질문, 대답, 설명) 05/24/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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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김명호 작성일25-05-16 11:15 조회845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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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과 시편에 나타난 계시 -1

(5월 24일 안식일 / 일몰: 오후 7시 41분)

 

연구 범위: 히 9:11-15, 시 122:, 시 15:, 시 24:, 출 33:18-23, 시 5:, 시 51:7-15

 

기억절: “또 내가 보니 보라 어린 양이 시온 산에 섰고 그와 함께 십사만 사천이 서 있는데 그들의 이마에는 어린 양의 이름과 그 아버지의 이름을 쓴 것이 있더라”(계 14:1).

 

재림교인으로서 우리는 요한계시록의 상징을 이해하기 위해 구약성경에서 그것을 찾는데 익숙하다. 그것이 계시록의 상징을 이해하기에 좋은 유일한 방법은 아닐 수 있지만 관련 구절은 구약성서 전체에서 찾아볼 수 있다. 

특별히 풍부한 정보의 원천은 시편이다. 시편은 거룩한 시의 모음으로, 죄와 고통으로 인한 낙담에서부터 하나님의 임재 안에 누리는 감출 수 없는 기쁨, 하나님의 용서와 구원에 대한 반복적인 약속에 이르기까지 인간의 다양한 경험과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나타날 수 있는 상호작용을 살피고 있다. 

시편을 주의 깊게 읽다 보면 요한계시록, 특히 이 땅에서 하나님의 남은 교회의 마지막 사역을 묘사하는 요한계시록 14장을 생생하게 느낄 수 있는 부분을 발견할 수 있다. 마지막 때의 하나님의 백성은 옛 이스라엘과 같은 사명을 받았는데, 바로 열방의 빛이 되어 모든 사람이 창조주를 경배하고 순종하도록 부르는 마지막 자비로운 초청을 따르게 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노래책에 제시된 몇 가지 구체적 내용은 지구 역사의 마지막 순간에 우리의 역할을 이해하고 감사할 수 있는 새로운 방식을 제공한다. 

 

학습 목표

깨닫기: 시편은 인간의 다양한 경험과 하나님과의 상호작용을 말하며 마지막 때에 우리의 역할을 이해하게 한다. 

느끼기: 어린 양의 피 때문에 우리는 시온에 설 수 있으며 영원한 복음을 받은 우리에게 사명이 주어졌다. 

행하기: 우리의 삶과 행동에 하나님의 사랑의 법을 새기고 영원한 복음을 세상에 나눈다. 

 

TMI 위로

2. 성소의 세부 사항들은 무엇을 나타내며, 나에게 어떤 의미가 있습니까?(시 122:1)

*답: 예수님의 구원봉사의 면면을 나타내며 내 구원의 확실성을 깨닫게 하는 도구가 된다.

3. 하나님의 거룩한 시온산에 설 수 있는 사람은 어떤 사람입니까?(히 10:19) 

*답: 어린양이 어디로 인도하든지 따라가며 어린양의 안에 있어서 그의 피를 힘입는 사람이다.

4. 남은 자의 이마에 아버지의 이름이 새겨진다는 것은 무엇을 말하는 것입니까?(계 14:1)

*답: 그분의 성품을 품었고 드러낸다는 뜻이다.

5. 주께 피하며 주의 이름을 사랑하는 자가 즐거워할 수 있는 이유는 무엇입니까?(시 5:11)

*답: 주님의 보호하심 속에 있기 때문이다.

6. 다윗은 어떤 일이 있을 때에 자신이 하나님을 위해 일하겠다고 말하고 있습니까?(시 51:13)

*답: “주의 구원의 즐거움을 내게 회복시키시고 자원하는 심령을 주사 나를 붙드소서 13 그러하면 내가 범죄자에게 주의 도를 가르치리니 죄인들이 주께 돌아오리이다”

7. 다윗의 시는 하나님의 사랑과 자비의 어떤 속성을 말해주고 있습니까?

*답: 대속의 희생과 용서와 보호를 나타낸다.

 

결론: 시편은 인간의 다양한 경험과 하나님과의 상호작용을 말한다. 성소와 모든 제도는 예수님을 예표한다. 하나님은 우리를 만나 주시며 어린 양의 피 때문에 우리는 시온에 설 수 있다. 하나님의 사랑의 법은 남은 자의 마음에 새겨지고, 구속받은 자는 하나님을 경배하는 자로 영원한 복음을 알고 이를 세상에 나눌 것이다. 하나님의 사랑과 자비는 가장 깊은 바닥까지 미치며, 믿음으로 회개하는 영혼을 높여 하나님의 자녀가 되게 하신다. 이러한 시편의 내용은 마지막 때에 우리의 역할을 이해할 수 있게 도와준다. 

 

5월 18일(일) 우리의 대제사장

 

모세는 성막 건축을 감독하면서 자신이 원하는 대로 지을 수 없었다. 하나님께서는 그가 따라야 할 청사진을 주셨다. “너는 삼가 이 산에서 네게 보인 양식대로 할지니라"(출 25:40). 우리는 히브리서를 통해 광야 성막의 형태는 더 높은 실체인, 하늘 성소를 따른 것임을 알 수 있다.

 

하늘 성소의 대제사장이신 그리스도에 관한 히브리서 9:11-15을 읽어 보라. 이 구절은 그분이 우리를 위해서 하고 계신 일에 대해 무엇을 알려주는가?

[히9:11~15] 그리스도께서는 장래 좋은 일의 대제사장으로 오사 손으로 짓지 아니한 것 곧 이 창조에 속하지 아니한 더 크고 온전한 장막으로 말미암아 12 염소와 송아지의 피로 하지 아니하고 오직 자기의 피로 영원한 속죄를 이루사 단번에 성소에 들어가셨느니라 13 염소와 황소의 피와 및 암송아지의 재를 부정한 자에게 뿌려 그 육체를 정결하게 하여 거룩하게 하거든 14 하물며 영원하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흠 없는 자기를 하나님께 드린 그리스도의 피가 어찌 너희 양심을 죽은 행실에서 깨끗하게 하고 살아 계신 하나님을 섬기게 하지 못하겠느냐.

*답: 예수님은 이 창조에 속하지 않은 온전한 장막에서 자기 피로 속죄 봉사하셔서 예수님께 나아오는 자들을 깨끗하게 하신다.

 

지상 성소는 제사장과 제물부터 기구와 다른 세부적인 모양에 이르기까지 놀랍도록 구체적으로 예수님을 예표하고 있다. 지상 성소의 모든 것이 예수님에 대해 말하고 있다.

요한계시록도 성소에 관한 형상으로 가득하다. 서두에 나타난 촛대, 4장에 분명히 언급된 언약궤, 그리고 성전에 대한 수많은 다른 암시를 찾을 수 있다. 구약의 성소에 대한 이해가 없다면 요한이 본 것을 어떻게 설명하고 있는지 이해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바울은 이스라엘의 경험에 대해 “그들에게 일어난 이런 일은 본보기가 되고 또한 말세를 만난 우리를 깨우치기 위”(고전 10:11)한 것이라고 기록했다.

성소의 세부 사항을 연구할 때 우리가 배울 수 있는 많은 것이 있다. 시편에서 이러한 세부 사항들을 이해하는 중요한 단서를 찾을 수 있으며, 이를 통해 하나님의 백성이 성전과 개인적으로 어떻게 관계를 맺고 있는지를 알 수 있다. 시편에서 우리는 다윗이 성소와 그 봉사에 어떻게 임했는지 엿볼 수 있으며, 메시아가 그들을 위해 하실 일에 대한 하나님의 백성의 마음에서 나온 반응을 볼 수 있다. 

예수님을 볼 수 있도록 돕는 것은 성소의 모양과 예식만이 아니며, 성소를 통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가르치신 것을 이해한 사람의 개인적인 경험을 통해 우리는 자신과 하나님과의 만남의 경험을 위한 교훈을 얻을 수 있다.

 

<교훈> 성소 제도와 모든 세부적인 모양은 놀랍도록 구체적으로 예수님을 예표하고 있다. 또 성소에서 하나님을 만난 개인의 경험을 우리에게도 적용할 수 있다. 

 

<부가설명> 성경은 성소의 목적을 “내가 그들 중에 거할 성소를 그들을 시켜 나를 위하여 짓되”(출25:8)라고 하셨다. 간단히 쓰면 하나님께 그의 백성들과 함께 거하시기 위한 것이다. 그것은 “놀랍도록 구체적으로 예수님을 예표”한다고 했다. 왜냐하면 그것은 예수님이 하시는 구원사업을 아주 자세히 표상적으로 나타내기 때문이다. 독자들이 이 문장을 읽으면 ‘아, 성소는 예수님 자신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지 않는가? 예수님이 성소 자체시다. 성경은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 이름은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하셨으니 이를 번역한즉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 함이라”(마1:23)라고 해석해 주셨다. ‘임마누엘’은 출25:8 내용을 단어로 기록한 것이고 그 구절을 설명한 성경 구절이다. 예수께서 친히 말씀하셨고 요한은 또 해석했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너희가 이 성전을 헐라 내가 사흘 동안에 일으키리라 유대인들이 가로되 이 성전은 사십육 년 동안에 지었거늘 네가 삼 일 동안에 일으키겠느뇨 하더라 그러나 예수는 성전된 자기 육체를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라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신 후에야 제자들이 이 말씀하신 것을 기억하고 성경과 및 예수의 하신 말씀을 믿었더라”(요1:19~22). 그런데 오늘날 재림교인들은 이 말씀을 읽어도 참 성소 하늘 성소의 실상을 하늘에 있는건물이라고 믿고 있다. 화잇 분이이 보고 왔다는 것을 강조한다. 모세도 봤고, 다윗에게는 성령께서 직접 도면을 그려서 짓도록 했다(대상28:12,19). 에스겔도 봤다(겔40장~42장). 그 세 곳 성소가 각각 다르다. 같은 것은 하나뿐이다. 뜰, 첫 칸, 둘째 칸이 구분되어 있는 것이다. 이것은 예수님의 구원 봉사가 이 세 부분의 봉사로 표상되는 것을 나타낸다. 예수님이 성소의 원형이라고 가르친다는 말이다. “성 안에 성전을 내가 보지 못하였으니 이는 주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와 및 어린 양이 그 성전이심이라”(계21:22). 우리는 계시적 형상과 실제적 형상을 혼동하지 않는 성경적 지혜가 필요하다. 예수님은 친히 성소가 되시기 때문에 하늘에 친히 봉사하신다. 오해하지 않도록 히브시서는 “그리스도께서는 참 것의 그림자인 손으로 만든 성소에 들어가지 아니하시고 오직 참 하늘에 들어가사 이제 우리를 위하여 하나님 앞에 나타나시고”(히9:24)라고 기록해서 하늘 그 자체가 하늘 성소라는 것을 분명히 기록해 주신 것이다. 그렇지 않은가? 참고가 되었으면 좋겠다.

 

5월 19일(월) 시온산에서

 

요한계시록 14장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백성이 시온산에 서 있는 것을 본다. 원래의 시온산은 오늘날 예루살렘 구시가지 서쪽에 있었으며 하나님의 보좌, 곧 하나님이 당신의 백성들 가운데 계신 곳으로 여겨졌다. 시간이 지나면서 모리아산에 위치한 성전산도 시온산과 동일시되었다. 

하나님의 마지막 때 남은 자에 대한 이 중요한 묘사는 요한계시록의 대부분의 주요 장면과 마찬가지로 성소 언어로 표현되어 있다. 어린 양 덕분에 하나님의 백성은 그분의 거룩한 산에 서 있다!

 

다윗이 “그의 거룩한 산에 설 자가 누구인가”라는 가장 중요한 질문을 하는 시편 15편과 시편 24편을 읽어 보라. 다윗의 대답을 요한계시록 14:1-5에 기록된 시온에 서 있는 사람들에 대한 묘사와 비교해 보라. 어떤 유사점을 찾을 수 있는가? 이 무리에 어떻게 들어갈 수 있는가? 아버지의 이름이 그들의 이마에 새겨져 있다는 말의 의미는 무엇인가?(계 14:1)

[시15:1~5] 여호와여 주의 장막에 머무를 자 누구오며 주의 성산에 사는 자 누구오니이까 2 정직하게 행하며 공의를 실천하며 그의 마음에 진실을 말하며 3 그의 혀로 남을 허물하지 아니하고 그의 이웃에게 악을 행하지 아니하며 그의 이웃을 비방하지 아니하며 4 그의 눈은 망령된 자를 멸시하며 여호와를 두려워하는 자들을 존대하며 그의 마음에 서원한 것은 해로울지라도 변하지 아니하며 5 이자를 받으려고 돈을 꾸어 주지 아니하며 뇌물을 받고 무죄한 자를 해하지 아니하는 자이니 이런 일을 행하는 자는 영원히 흔들리지 아니하리이다.

[시24:1~10] 땅과 거기에 충만한 것과 세계와 그 가운데에 사는 자들은 다 여호와의 것이로다 2 여호와께서 그 터를 바다 위에 세우심이여 강들 위에 건설하셨도다 3 여호와의 산에 오를 자가 누구며 그의 거룩한 곳에 설 자가 누구인가 4 곧 손이 깨끗하며 마음이 청결하며 뜻을 허탄한 데에 두지 아니하며 거짓 맹세하지 아니하는 자로다 5 그는 여호와께 복을 받고 구원의 하나님께 의를 얻으리니 6 이는 여호와를 찾는 족속이요 야곱의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는 자로다 (셀라) 7 문들아 너희 머리를 들지어다 영원한 문들아 들릴지어다 영광의 왕이 들어가시리로다 8 영광의 왕이 누구시냐 강하고 능한 여호와시요 전쟁에 능한 여호와시로다 9 문들아 너희 머리를 들지어다 영원한 문들아 들릴지어다 영광의 왕이 들어가시리로다 10 영광의 왕이 누구시냐 만군의 여호와께서 곧 영광의 왕이시로다.

[계14:1~5] 또 내가 보니 보라 어린 양이 시온 산에 섰고 그와 함께 십사만 사천이 서 있는데 그들의 이마에는 어린 양의 이름과 그 아버지의 이름을 쓴 것이 있더라 2 내가 하늘에서 나는 소리를 들으니 많은 물 소리와도 같고 큰 우렛소리와도 같은데 내가 들은 소리는 거문고 타는 자들이 그 거문고를 타는 것 같더라 3 그들이 보좌 앞과 네 생물과 장로들 앞에서 새 노래를 부르니 땅에서 속량함을 받은 십사만 사천 밖에는 능히 이 노래를 배울 자가 없더라 4 이 사람들은 여자와 더불어 더럽히지 아니하고 순결한 자라 어린 양이 어디로 인도하든지 따라가는 자며 사람 가운데에서 속량함을 받아 처음 익은 열매로 하나님과 어린 양에게 속한 자들이니 5 그 입에 거짓말이 없고 흠이 없는 자들이더라.

*답: 거짓이 없고 흠이 없다는 말은 시편과 같은 말을 간단히 기록한 것이다. 그들은 어린양과 함께 있을 때만 어린양 안에서 시온 산에 설 수 있다. 

 

다윗의 시편에 나오는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 있는 사람에 대한 묘사는 죄인에 불과한 사람이 성취하기에는 매우 어려운 요구이다. 우리 중 누가 항상 올바른 길을 걸어왔고, 항상 마음의 진실만을 말했다고(시 15:2) 자신있게 고백할 수 있겠는가? 우리 중 누구도 “결코 흔들리지 아니하”(시 15:5, 흠정역)였다고 말할 수 없다. 우리가 죄를 지은 적이 없다고 말한다면, 우리 안에 진리가 없다고 성경은 말한다(요일 1:8). 

우리로 시온에 설 수 있게 하는 것은 오직 어린 양뿐이며 다른 방법은 없다. 다윗의 시편에는 어린 양이 언급되지 않았지만, 마치 다윗의 질문에 답하는 것처럼 어린 양이 요한계시록 14장에서 갑자기 등장한다. 

이제 하나님의 어린 양이 시온산, 성소에 서셨으므로 우리도 믿음으로 우리에게 주신 그분의 완전한 의로 말미암아 그곳에 설 수 있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예수의 피를 힘입어 성소에 들어갈 담력을 얻었나니 그 길은 우리를 위하여 휘장 가운데로 열어 놓으신 새로운 살 길이요 휘장은 곧 그의 육체니라”(히 10:19, 20). 그분의 피가 없었다면 우리에게 무슨 소망이 있겠는가? 어린 양만이 유일한 소망이다. 

 

<교훈> 그의 거룩한 시온산에 설 자가 누구인가를 묻는 다윗의 중요한 질문에 요한계시록은 어린 양을 보여준다. 어린 양의 피 때문에 우리는 시온에 설 수 있다. 

 

<부가설명> 성소 구조로 표상한 어린양 예수님의 구원 봉사를 받아들이는 사람은 예수님 안에서 예수님의 정결로 시온산에 설 수 있다. 예수님은 성도들에게 내 안에 거하라고 하셨다(요15:4,5). 이 지구 상에는 두 사람이 있는데 한 분은 첫 아담이고 다른 한 분은 마지막 아담이다(고전15:45). 이 지구에 존재하는 사람은 다 이 두 아담 안에서 존재한다. 첫 아담 안에 있는 사람은 다 사망에 속한 사람들이다. 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이 죽었기 때문이다(고전15:22). 마지막 아담 안에 있는 사람은 다 생명에 속한 사람이다. 마지막 아담은 살려주는 영이시며 모든 사람이 그리스도 안에서 삶을 얻기 때문이다(고전15:45, 22,). 지구에 출생하고 죽 자나, 현재 생존한 자나 미래에 출생할 자나 예외 없이 오직 이 두 아담 안에 있다. 마지막 아담이신 예수님은 첫 아담 안에서 죽은 사람을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겨주기 위하여 십자가에서 사망을 처리하셨다. 그리고 부활하셔서 생명과 썩지 않는 것을 드러내셨다(골 2:14,15, 딤후1:10). 그래서 누구든지 그를 믿으면 멸망하지 않고 영생한다고 보증하셨다. 성소 구조와 봉사는 이것을 미리 계시해 주신 것이다. 예수께서 이루실 구원 사업이 본체고 성소는 그림자(히9:24)이고 비유다(히9:9). 비유와 그림자를 통하여 실체 성소이신 예수님을 만나고 그분 안에 꼭꼭 숨어 있어야 한다. 그러면 어린양이 어디로 인도하든지 갈 수밖에 없고 시온산에 서게 될 것이다.

 

5월 20일(화) 우리 마음속의 법

 

시온에 모인 남은 자의 이마에는 아버지와 어린 양의 이름이 새겨져 있다(예수님이 바로 아버지의 형상이기에 두 이름이 서로 다른 이름인지는 확실치 않다). 성경에서 '이름'은 사람들이 서로를 부르는 단순한 호칭 이상으로 존재 자체, 성품을 의미한다. 오늘날까지도 많은 문화권에서 누군가의 인격을 높이 평가할 때 그가 “좋은 이름”을 가진 사람이라고 말한다. 

 

출애굽기 33:18-23, 출애굽기 34:1-7, 시편 119:55을 읽어 보라. 모세가 하나님의 영광을 보여 달라고 했을 때, 하나님은 그에게 무엇을 보여주시겠다고 약속하셨는가?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당신의 이름을 선포하셨을 때(출 34:5), 어떤 일이 뒤따랐는가?

[출33:18~23] 모세가 이르되 원하건대 주의 영광을 내게 보이소서 19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내가 내 모든 선한 것을 네 앞으로 지나가게 하고 여호와의 이름을 네 앞에 선포하리라 나는 은혜 베풀 자에게 은혜를 베풀고 긍휼히 여길 자에게 긍휼을 베푸느니라 20 또 이르시되 네가 내 얼굴을 보지 못하리니 나를 보고 살 자가 없음이니라 21 여호와께서 또 이르시기를 보라 내 곁에 한 장소가 있으니 너는 그 반석 위에 서라 22 내 영광이 지나갈 때에 내가 너를 반석 틈에 두고 내가 지나도록 내 손으로 너를 덮었다가 23 손을 거두리니 네가 내 등을 볼 것이요 얼굴은 보지 못하리라.

[출34:1~7]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너는 돌판 둘을 처음 것과 같이 다듬어 만들라 네가 깨뜨린 처음 판에 있던 말을 내가 그 판에 쓰리니 2 아침까지 준비하고 아침에 시내 산에 올라와 산 꼭대기에서 내게 보이되 3 아무도 너와 함께 오르지 말며 온 산에 아무도 나타나지 못하게 하고 양과 소도 산 앞에서 먹지 못하게 하라 4 모세가 돌판 둘을 처음 것과 같이 깎아 만들고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 그 두 돌판을 손에 들고 여호와의 명령대로 시내 산에 올라가니 5 여호와께서 구름 가운데에 강림하사 그와 함께 거기 서서 여호와의 이름을 선포하실새 6 여호와께서 그의 앞으로 지나시며 선포하시되 여호와라 여호와라 자비롭고 은혜롭고 노하기를 더디하고 인자와 진실이 많은 하나님이라 7 인자를 천대까지 베풀며 악과 과실과 죄를 용서하리라 그러나 벌을 면제하지는 아니하고 아버지의 악행을 자손 삼사 대까지 보응하리라.

[시119:55] 여호와여 내가 밤에 주의 이름을 기억하고 주의 법을 지켰나이다.

*답: 하나님의 모든 선한 형상을 보여주시겠다고 했다. 그리고 여호와의 이름을 선포하셨고 성품을 드러내셨다. 우리가 여호와 이름이 그분의 영광인 것을 잊지 않야 한다. 하나님의 영광은 그분의 이름과 성품이다.

 

어떤 이들은 하나님의 영광을 범접할 수 없는 밝은 빛으로 그리는데, 이는 분명히 적절한 묘사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영광은 단순히 시각적으로 보이는 것 이상이며 하나님의 영광은 그분의 성품이다. 하나님의 이름도 마찬가지다. 

성경에서 남은 자의 이마에 하나님의 이름이 새겨진 것을 말할 때, 그것은 문자 그대로 글자가 적혀 있다기보다는 우리의 생각과 마음에 하나님의 성품이 새겨져 있어서 우리의 삶이 그분의 사랑과 성품을 나타낸다는 것을 의미한다. 당신이 하나님께 가까이 거하는 것과, 그분이 어떤 분이시며, 그분이 당신을 위해 행하신 일로 인해 그분을 사랑하는 것이 나타난다.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당신을 알려주실 때 모세에게 하나님의 성품이 담겨 있는 십계명을 새겨서 함께 주셨다는 점도 매우 의미심장하다. 마찬가지로 요한계시록 14장은 하나님의 “이름”을 가진 사람을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는” 사람이라고 말한다. 히브리서가 “주께서 이르시되 그 날 후로는 그들과 맺을 언약이 이것이라 하시고 내 법을 그들의 마음에 두고 그들의 생각에 기록하리라 하신 후에 또 그들의 죄와 그들의 불법을 내가 다시 기억하지 아니하리라 하셨으니"(히 10:16, 17)라고 한 말씀을 유념하라. 

하나님의 율법이 우리 삶 속에 나타나고 있을지라도, 우리는 여전히 죄가 “더 이상” 기억되지 않는 것이 필요한 죄인이다. 복음은 얼마나 놀라운 것을 약속하는가!

하나님의 이름은 그분의 성품이다. 그분의 도덕법은 그분의 성품의 기록이다. 그리고 마지막 날에 하나님의 거룩한 산에 모인 사람은 그분의 율법에 순종함으로써 나타나는 하나님에 대한 사랑으로 충만한 사람이다. 

 

<교훈> 남은 자의 이마에 새겨진 하나님의 이름은 생각과 마음에 하나님의 성품이 새겨져 있어서 우리의 삶이 그분의 사랑과 성품을 나타낸다는 것을 의미한다. 

 

<부가설명> 하나님의 이름 여호와 안에는 창조와 구원과 심판과 존재의 모든 것이 내포되어 있다. 그러므로 그 이름이 그분의 영광이다. 그분은 스스로 계시는 분이기 때문에 생명이시며 존재 자체시다. 우주 삼라만상이 다 그분 안에 있는데, 그것을 나타내는 이름이 여호와이다. 스스로 계시는 분만이 이 이름을 사용할 수 있다. 그래서 그 이름이 홀로 하나라고 계시했다(슥14:9). 하나님이 홀로 하나라고 한 말씀은 성경 안에 없다. 혹 그런 표현을 읽게 되면 그 때 홀로 하나라는 말은 ‘바드’라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바드’는 ‘나만이’ 또는 ‘나밖에는’이라는 말이다. 여호와를 홀로 하나라고 했을 때는 ‘엑하드’를 사용한다. 신6:4과 슥14:9에 기록되었다. 우주에 진짜 존재는 여호와라 이름하신 하나님 뿐이시다. 이 이름은 스스로 존재하시는 분만(이때 바드를 쓸 수 있다.)이 사용할 수 있는 이름이다. 이 이름을 쓰시는 분이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이시다. 그래서 마28:19에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이라고 했을 때 이름이 단수 ‘오노마’이다. 외냐하면, 이 세 분이 같은 한 이름 여호와이시기 때문이다. 이 이름에는 우주가 들어있고 이 이름에는 최고 최상의 도덕적 성품이 들어있다. 그래서 모세 앞을 지나시면서 먼저 그 이름을 선포하신 것이다. 그러므로 그분 이름을 함부로 의미없이 입에 올리지 말라고 셋째 계명에 결계하신 것이다. 거룩한 이름이다.  

 

5월 21일(수) 시편 5편

 

시편 5편을 읽어 보라. 여기서 다윗은 잃어버린바 된 자와 구속받은 자를 선명하게 대조하고 있다. 이 시편을 요한계시록 14:1-12의 표현들과 비교해 보라. 어떤 유사점을 발견할 수 있으며, 이것이 하나님의 마지막 때 남은 무리 운동에 동참한다는 의미를 이해하는 데 어떤 영향을 미치는가?

[시5:1~12] 여호와여 나의 말에 귀를 기울이사 나의 심정을 헤아려 주소서 2 나의 왕, 나의 하나님이여 내가 부르짖는 소리를 들으소서 내가 주께 기도하나이다 3 여호와여 아침에 주께서 나의 소리를 들으시리니 아침에 내가 주께 기도하고 바라리이다 4 주는 죄악을 기뻐하는 신이 아니시니 악이 주와 함께 머물지 못하며 5 오만한 자들이 주의 목전에 서지 못하리이다 주는 모든 행악자를 미워하시며 6 거짓말하는 자들을 멸망시키시리이다 여호와께서는 피 흘리기를 즐기는 자와 속이는 자를 싫어하시나이다 7 오직 나는 주의 풍성한 사랑을 힘입어 주의 집에 들어가 주를 경외함으로 성전을 향하여 예배하리이다 8 여호와여 나의 원수들로 말미암아 주의 의로 나를 인도하시고 주의 길을 내 목전에 곧게 하소서 9 그들의 입에 신실함이 없고 그들의 심중이 심히 악하며 그들의 목구멍은 열린 무덤 같고 그들의 혀로는 아첨하나이다 10 하나님이여 그들을 정죄하사 자기 꾀에 빠지게 하시고 그 많은 허물로 말미암아 그들을 쫓아내소서 그들이 주를 배역함이니이다 11 그러나 주께 피하는 모든 사람은 다 기뻐하며 주의 보호로 말미암아 영원히 기뻐 외치고 주의 이름을 사랑하는 자들은 주를 즐거워하리이다 12 여호와여 주는 의인에게 복을 주시고 방패로 함 같이 은혜로 그를 호위하시리이다.

[계14:1~12] 또 내가 보니 보라 어린 양이 시온 산에 섰고 그와 함께 십사만 사천이 서 있는데 그들의 이마에는 어린 양의 이름과 그 아버지의 이름을 쓴 것이 있더라 2 내가 하늘에서 나는 소리를 들으니 많은 물 소리와도 같고 큰 우렛소리와도 같은데 내가 들은 소리는 거문고 타는 자들이 그 거문고를 타는 것 같더라 3 그들이 보좌 앞과 네 생물과 장로들 앞에서 새 노래를 부르니 땅에서 속량함을 받은 십사만 사천 밖에는 능히 이 노래를 배울 자가 없더라 4 이 사람들은 여자와 더불어 더럽히지 아니하고 순결한 자라 어린 양이 어디로 인도하든지 따라가는 자며 사람 가운데에서 속량함을 받아 처음 익은 열매로 하나님과 어린 양에게 속한 자들이니 5 그 입에 거짓말이 없고 흠이 없는 자들이더라 6 또 보니 다른 천사가 공중에 날아가는데 땅에 거주하는 자들 곧 모든 민족과 종족과 방언과 백성에게 전할 영원한 복음을 가졌더라 7 그가 큰 음성으로 이르되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그에게 영광을 돌리라 이는 그의 심판의 시간이 이르렀음이니 하늘과 땅과 바다와 물들의 근원을 만드신 이를 경배하라 하더라 8 또 다른 천사 곧 둘째가 그 뒤를 따라 말하되 무너졌도다 무너졌도다 큰 성 바벨론이여 모든 나라에게 그의 음행으로 말미암아 진노의 포도주를 먹이던 자로다 하더라 9 또 다른 천사 곧 셋째가 그 뒤를 따라 큰 음성으로 이르되 만일 누구든지 짐승과 그의 우상에게 경배하고 이마에나 손에 표를 받으면 10 그도 하나님의 진노의 포도주를 마시리니 그 진노의 잔에 섞인 것이 없이 부은 포도주라 거룩한 천사들 앞과 어린 양 앞에서 불과 유황으로 고난을 받으리니 11 그 고난의 연기가 세세토록 올라가리로다 짐승과 그의 우상에게 경배하고 그의 이름 표를 받는 자는 누구든지 밤낮 쉼을 얻지 못하리라 하더라 12 성도들의 인내가 여기 있나니 그들은 하나님의 계명과 예수에 대한 믿음을 지키는 자니라.

*답: 하나님의 계명과 예수 믿음을 지키는 자와 그렇지 못한 자를 비교하여 그 결과를 나타내는 것이 유사하다. 

 

다윗이 악이 하나님과 함께 “머물지 못”(시 5:4)한다고 주장한 것을 기억하라. 성소의 목적은 하나님께서 그분의 백성 가운데 거하시는 것이었고, 이는 그리스도의 나라에서도 마찬가지일 것이다(계 21:3 참조). 하나님의 보좌에 나아가고자 하는 자는 반드시 구속받은 자여야 한다. 

다윗이 시편 5:7에서 예배하는 것을 묘사하고 있는 것도 주목할 만한데, 이는 대쟁투의 핵심 쟁점 중 하나이기 때문이다. 요한계시록 13장에는 “예배”가 여섯 번 언급되어 있으며, 세 천사의 기별은 세상을 향해 만물을 “만드신 이를 경배하라”고 부른다. 다윗은 하나님을 “경외”한다고 말하고, 남은 자는 세상을 향해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그에게 영광을 돌리라 이는 그의 심판의 시간이 이르렀음이”라고 기별을 선포한다(계 14:7).

또한 요한계시록 14장의 구속받은 자들의 입에 “거짓말이 없”(계 14:5)다 라고 말하는 것을 유념하라. 그들은 말과 행동으로 하나님의 의로운 성품을 나타내는 진리를 말하는 자들이다. 다윗은 악인의 “말은 한 마디도 믿을 수가 없”(시 5:9, 쉬운)다고 말한다. 

요한은 요한계시록의 이 핵심 부분에서 죄인에 불과한 자가 사망에서 벗어나 하나님의 임재 앞에 설 수 있는 특권을 누리는 놀라운 장면을 보여 준다. 이 특권은 그들의 힘으로 획득한 것이 아니며 하나님의 어린 양, 곧 의로우신 인자가 그곳에 그들과 함께 서 계시기 때문에 주어지는 것이다. 그들이 용서받고 구속받으며 더 이상 자신의 죄책을 짊어질 필요가 없는 것은(시 5:10 비교) 하나님의 어린 양이 그들의 죄를 대신 지셨기 때문이다(사 53:12, 고후 5:21 비교). 

하나님의 이름이 마음에 새겨지면 우리는 더 이상 잠잠히 있을 수 없다. 하나님의 백성은 “큰 소리로”(계 14:7) 마지막 자비의 초청을 전할 것이다. “그러나 주께 피하는 모든 사람은 다 기뻐하며 주의 보호로 말미암아 영원히 기뻐 외치고 주의 이름을 사랑하는 자들은 주를 즐거워하리이다"(시 5:11).

 

<교훈> 다윗의 시는 잃은 자와 구속받은 자를 선명하게 대조한다. 시편 기자의 성품과 하나님을 경배하는 특성은 요한계시록의 남은 무리에게서 동일하게 나타난다. 

 

<부가설명> 성경은 악과 죄를 사망과 사망을 도모하는 것이라고 계시한다. 선과 의는 생명과 생명을 도모하는 것이라고 계시한다(막3:4을 잘 읽어보라). 사랑은 이웃에게 악을 행하지 않는다고 계시한다(롬13:10). 이웃에게 악을 행하는 것은 이웃을 사망에 들어가게 하는 모든 것이다. 이웃에게 선을 행하는 것은 이웃이 생명에 이르게 하려는 모든 것이다. 그것이 사랑으로 나타난다. 하나님의 생명의 본질이 사랑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사랑하지 않을 수 없으신 분이다. 그 사랑은 인류를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기기 위하여 말씀 하나님 여호와께서 죄 자체가 되어 십자가에 죽으시는 것으로 우주에 드러났다(롬5:8,10). 그것으로 사탄은 우주 앞에서 정죄 되었고 그는 존재를 영원히 상실해야 한다는 선고를 받았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고 그분에게 부활의 생명 곧 죽지 않는 생명을 받았으면 이 죄의 세상에서도 사랑이 드러난다. 그 생명의 성질이 사랑이기 때문이다. 그 사랑은 사람을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겨주려는 모습을 나타난다. 그것이 빛이요 착한 행실이다. 거기에는 최상의 도덕이 포함되어 있다. 이 생명을 받은 자만이 하나님 앞에 설 수 있다. 하나님은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고 산 자의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막12:27).

 

5월 22일(목) 죄인에게 주의 길을 가르치소서

 

이사야 6:1-8의 보좌실 장면에서 이사야는 “네 악이 제하여졌고 네 죄가 사하여졌느니라”라는 말을 들은 후,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보내소서”(사 6:8)라고 대답했다. 즉 그가 하나님과 바른 관계에 있는 것을 알게 된 후에는 자신의 잘못을 알았음에도 불구하고 주님을 위해 일할 준비가 된 것이다. 

우리도 마찬가지 아닌가? 우리 자신이 구원을 얻지 못했다면 어떻게 다른 사람에게 구원을 선포할 수 있겠는가? 우리는 예수님을 믿고 그분이 우리를 위해 하신 일을 믿음으로써 구원의 확신을 가질 수 있다. 

 

시편 51:7-15을 읽어 보라. 용서받고 죄에서 씻음 받은 후 다윗은 무엇을 하겠다고 약속했는가?  

[시51:7~15] 우슬초로 나를 정결하게 하소서 내가 정하리이다 나의 죄를 씻어 주소서 내가 눈보다 희리이다 8 내게 즐겁고 기쁜 소리를 들려 주시사 주께서 꺾으신 뼈들도 즐거워하게 하소서 9 주의 얼굴을 내 죄에서 돌이키시고 내 모든 죄악을 지워 주소서 10 하나님이여 내 속에 정한 마음을 창조하시고 내 안에 정직한 영을 새롭게 하소서 11 나를 주 앞에서 쫓아내지 마시며 주의 성령을 내게서 거두지 마소서 12 주의 구원의 즐거움을 내게 회복시켜 주시고 자원하는 심령을 주사 나를 붙드소서 13 그리하면 내가 범죄자에게 주의 도를 가르치리니 죄인들이 주께 돌아오리이다 14 하나님이여 나의 구원의 하나님이여 피 흘린 죄에서 나를 건지소서 내 혀가 주의 의를 높이 노래하리이다 15 주여 내 입술을 열어 주소서 내 입이 주를 찬송하여 전파하리이다.

*답: “내 혀가 주의 의를 높이 노래하리이다. 주여 내 입술을 열어 주소서 내 입이 주를 찬송하여 전파하리이다”(14,15절).

 

하나님의 임재 앞으로 부름받는 것은 결국 다시 보내심을 받는 것이다. 당신의 무한한 지혜 가운데, 하나님은 구속받은 자들에게 타락한 세상을 향한 그분의 소리를 담당하여 봉사하도록 사명을 주셨다. 장차 때가 이르면 그분의 백성이 외치는 목소리가 온 땅을 진동하게 할 것이다. 요한계시록 18:1은 타락한 지구를 향한 그분의 마지막 호소가 온 세상을 비출 것이라고 말한다. 

“누구든지 그리스도께 나아간다면, 자신이 예수 안에서 얼마나 좋은 친구를 만났는지를 다른 사람들에게 알리고자 하는 마음이 일어나며 구원하고 성결하게 하는 진리를 마음속에만 가두어 둘 수 없다. 만일 우리가 그리스도의 의로 옷 입고, 그분의 내주하는 성령의 기쁨으로 충만하다면 우리는 잠잠할 수 없을 것이다. 우리가 주의 선하심을 맛보아 알았다면 무언가 할 말이 있을 것이다. 빌립이 구주를 만났을 때와 같이 우리도 다른 사람을 구주 앞으로 인도할 것이다"(정로의 계단, 78). 

요한계시록 14장에서 세 천사의 기별은 “영원한 복음”(계 14:6)에 기초하고 있다. 

즉, "하늘과 땅과 바다와 물들의 근원을 만드신"(계 14:7) 분을 경배하라는 기별이나 바벨론의 멸망에 관한 선포(계 14:8), 그리고 "짐승과 그의 우상"(계 14:9)을 경배하지 말라는 경고가 전파되기 전에 복음의 기초 곧, 예수 안에 있는 구원이 먼저 선포된다. 왜냐하면, 이 기별을 전하는 사람 스스로가 예수님과 그분께서 자신을 위해 하신 일에 대한 소망과 약속을 확신하지 않으면 경고와 세 천사의 기별은 아무 의미가 없기 때문이다. '영원한 복음'을 제외하고는 우리가 세상에 전할 가치가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교훈> 이사야는 정결케 하심을 경험한 후 보냄 받았다. 죄인을 구원하는 영원한 복음을 먼저 경험할 때 세상에 세 천사의 기별을 전하는 부름을 감당할 수 있다.  

 

<부가설명> 재림성도들의 소망이 예수님 재림이다. 재림 전에 성령님 늦은 비 능력의 역사가 교회를 통하여 일어나야 한다고 외친다.

글쎄? 이런 상태로 성령께서 교회와 교인들에게 능력으로 역사하실까?

1863년 5월 20~23일까지 대총회가 조직되고 하나님의 계명과 예수의 증거를 가진 교회가 공식적으로 출발했다. 이제 이 공동체는 다시 예언하라는 말씀을 실천해야 한다. 그러려면 실천할 수 있는 생명력과 인격이 되어야 한다. 모든 것을 아시는 하나님은 육과 영의 온갖 더러운 것에서 자신을 깨끗하게 하여 하나님의 성령께서 거하시는 성전이 되도록 권고하셨다. 이 기별이 대총회가 조직이 되고 열흘쯤 후에 엘렌 화잇에게 건강 기별, 음식물에 관한 계시를 주신 것이다.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거하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뇨 누구든지 하나님의 성전을 더럽히면 하나님이 그 사람을 멸하시리라 하나님의 성전은 거룩하니 너희도 그러하니라”(고전3:16,17). 남은 자손의 몸 성전이 거룩하고 정결하게 될 때 성령의 늦은 비 역사가 정결한 그들을 통하여 이루어질 것이다. 남은 자손된 사람들은 그 몸이 자기 것이 아니다. “너희 몸은 너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바 너희 가운데 계신 성령의 전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너희는 너희의 것이 아니라 값으로 산 것이 되었으니 그런즉 너희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고전6;19,20). 이런 몸을 정결하게 하지 않고 성령의 늦은 비 역사를 기대하는 것은 스스로 속이는 것이다. “아무도 자기를 속이지 말라”(고전3:18).

 

5월 23일(금) 더 깊은 연구를 위해

 

“다윗의 시편은 알고 지은 죄와 양심의 가책의 깊은 구렁에서부터, 최고의 믿음과 하나님과의 가장 고귀한 교제에 이르기까지의 모든 경험을 아우른다. 그의 생애의 기록은 죄는 수치와 괴로움만을 가져올 뿐이나 하나님의 사랑과 자비는 가장 깊은 바닥까지 도달할 수 있어서, 믿음으로 회개하는 영혼을 높여 하나님의 양자가 되게 하신다고 선언한다. 다윗의 시는 하나님의 말씀에 내포된 모든 보증 가운데 하나님의 신실함, 정의, 언약의 자비에 대한 가장 강한 증거들 가운데 하나이다. 

‘내 종 다윗에게 맹세하기를 … 내 손이 저와 함께하여 견고히 하고 내 팔이 그를 힘이 있게 하리로다 … 나의 성실함과 인자함이 저와 함께하리니 내 이름을 인하여 그 뿔이 높아지리로다 내가 또 그 손을 바다 위에 세우며 오른손을 강들 위에 세우리니 저가 내게 부르기를 주는 나의 아버지시요 나의 하나님이시요 나의 구원의 바위시라 하리로다 내가 또 저로 장자를 삼고 세계 열왕의 으뜸이 되게 하며 저를 위하여 나의 인자함을 영구히 지키고 저로 더불어 한 나의 언약을 굳게 세우’(시 89:3-28)리라”(부조와 선지자, 754). 

 

함께하는 토의를 위해 

1. 인류는 언약을 지키는 데 비참하게 실패했지만 몇 가지 큰 잘못에도 불구하고 “그의 마음에 맞는 사람”이었던 다윗은 여전히 우리에게 구원의 조건을 힘있게 전달하고 있다. 다윗은 어떤 의미에서 우리를 대신하여 하나님의 언약을 완전하게 지키신 예수님을 예표하는가? 예수께서 우리를 위해 하신 일이 우리의 유일한 소망인 이유는 무엇인가?*답: 그가 하나님의 뜻을 온전히 따르고자 하는 마음으로 생활한 것과 예수님이 우리의 허물을 지시고 사망을 처리하셨고 영원한 생명을 드러내신 유일한 분이기 때문이다.

2. 우리가 직접 겪은 것과 동일한 경험을 말하고 있다는 점에서 시편에서 우리에게 특별히 도움이 되거나 의미 있는 구절은 어떤 것인가?

*답: 많지만 시편 51편이 대표적인 것 같다.

3. 시편이 성전에 대해 자주 언급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다윗이 성전을 사모한 것에서 우리는 무엇을 배울 수 있는가? 이것은 “하나님 우편에 계신 자요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시는”(롬 8:34) 하늘의 대제사장이신 예수님 안에서 우리에게 주신 것을 감사하는 데 어떻게 도움이 되는가? 이미 구속받은 우리에게도 하늘에서 우리를 위해 중보하시는 그리스도가 필요한 이유는 무엇인가?

*답: 예수님의 중보로 날마다 죄의 공격에 상하는 우리가 하나님 앞에 정결한 자로 설 수 있기 때문이다.

4. 위 인용문에 근거하여 생각해 보라. 하나님께서 당신의 죄의 “수치와 괴로움”에도 불구하고 “회개하는 영혼을 높이사 하나님의 양자가 되”도록 들어 올리시는 것을 당신은 어떻게 경험해 보았는가? 

*답: 하나님은 우리의 허물을 기억하지 않으시고 예수님을 믿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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