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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과 - 희생제사의 이해-(핵심 Q&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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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이봉주 작성일25-05-07 03:29 조회488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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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과 희생제사(犧牲祭祀)의 이해(理解)

        (05월 10일 (안) / 일몰: 오후 7시 30분)

   

<기억절(記憶節)>

 “그들이 새 노래를 불러 이르되 두루마리를 가지시고 그 인봉을 떼기에 합당하시도다. 일찍이 죽임을 당하사 각 족속과 방언과 백성과 나라 가운데에서 사람들을 피로 사서 하나님께 드리시고”(계5:9).


<개요(槪要)>


(Q)-희생제사(犧牲祭祀)란 무엇을 의미(意味)하며 희생제사를 드리는 목적(目的)은 무엇일까?


(A)-<①.고대근동(古代近東)에서 희생제사(犧牲祭祀)는 인간적(人間的) 상태(常態)에서 신적(神的) 상태(常態)로 상향이동(上向移動)하는 것을 의미(意味)했다. 즉 고대근동(古代近東)에서 신(神)은 자신(自身)을 섬기고 음식(飮食)을 제공(提供)할 노예(奴隸)를 갖기 위해 인간을 창조(創造)했다.

       ②.성경(聖經)에서 희생제사(犧牲祭祀)는 하나님에서 인간(人間)으로 하향이동(下向移動)하는 것을 의미(意味)했다. 즉 고대근동(古代近東)의 희생제사(犧牲祭祀)와 전혀 다른 대조적(對照的)으로, 성경(聖經)의 하나님은 인간을 창조(創造)하시고 그들에게 음식(飮食)을 주십니다.>


⑴.희생제사(犧牲祭祀)란 고대근동(古代近東)에서 행(行)하던 희생제사(犧牲祭祀)는 인간이 신(神)에게 바치는 제도(制度)였지만, 성경의 희생제도(犧牲制度)는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베풀어 주심을 의미(意味)하므로 의미(意味)는 전혀 다르다.


⑵.영어(英語)는 희생제사(犧牲祭祀)를 'Sacrifice'로 표현한다. 이는 가치(價値) 있는 어떤 것을 위해 자신이 가지고 있는 것을 불태운다는 의미(意味)이다. 


⑶.즉 Sacrifice는 완전한 포기(抛棄)와 단념(斷念), 그리고 내려놓음을 내포하고 있다. 반면 히브리어에서는 희생제사(犧牲祭祀)를 의미(意味)하는 단어(單語)로 '코르반' (קָ רְ בַּן)을 사용한다. 코르반은 '가까이 간다.' '친밀(親密)한 관계(關係)를 회복(回復)한다.'를 의미(意味)하는 '미트카레브'에서 온 단어(單語)이다.


⑷.613개의 율법(律法) 가운데 무려 150개가 성전(聖殿)에서 드리던 희생제사와 관련된 것이었다. 유대인들에게 희생제사란 서양(西洋)의 그리스도인들, 그리고 한국의 그리스도인들이 생각하는 의미와는 사뭇 달랐다. 이는 희생제사를 의미하는 단어(單語)에서도 분명한 차이를 엿볼 수 있습니다.


⑸.유대인들은 희생제사(犧牲祭祀)를 통해 하나님께 가까이 갈 수 있고, 하나님과 친밀(親密)한 관계(關係)를 회복(回復)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⑹.히브리어의 '희생제사(犧牲祭祀)'란 단어 속에는 ‘버리고 포기하고 불태운다.’라는 의미가 전혀 없습니다. 오히려 '코르반'은 유대인들에게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가는 친밀한 교제(交際)를 떠올리며 그 입가에 잔잔한 미소(微笑)를 머금게 하는 기쁨의 단어(單語)인 것이다.


⑺.하나님께 예배(禮拜)하는 영적(靈的)인 우리의 삶은 세상의 모든 것을 포기(抛棄)하고 십자가(十字架)에 못 받는 비장함에 앞서서, 하나님 보좌(寶座) 앞에 가까이 나아가 그분과의 친밀감(親密感)속에서 영적(靈的)인 복(福)과 은혜(恩惠)를 누리는 것이다.


⑻."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慈悲)하심으로 너희를 권(勸)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祭物)로 드리라 이는 너희가 드릴 영적예배(靈的禮拜)니라. 너희는 이 세대(世代)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變化)를 받아 하나님의 선(善)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分別)하도록 하라" (롬 12:1~2절)


⑼.<희생제사(犧牲祭祀)의 종교적(宗敎的), 윤리적(倫理的) 의미(意味)>

   처음으로 명시적(明示的)으로 나타난 희생제사(犧牲祭祀) 사건(事件)은 가인과 아벨 사이의 극명(克明)한 대립(對立)을 강조(强調)합니다.


⑽.가인은 "땅의 소산(所産)"(창세기 4:3)에서만 제물(祭物)을 바쳤지만, 아벨은 동물이 아닌 제물(祭物)인 "양(羊) 떼의 첫 새끼"(창세기 4:4)에 "또한" 또는 "더하여" 바쳤습니다. 따라서 아벨의 제사(祭祀)는 성경의 가르침에 부합(符合)하는데, 성경은 채소제물(菜蔬祭物)" 외(外)에도" 번제물(燔祭物)을 위한 희생동물(犧牲動物)을 바치라고 요구(要求)했다.


(05월 04일) (일) <헛된 제사(祭祀)>


(Q)-아벨의 제사(祭祀)는 하나님이 기뻐하지 않는 가인의 제사(祭祀)와 어떤 차이(差異)가 있습니까? (히 11:4)


(A)-.<무엇 때문에 가인의 예물(禮物)은 하나님에게 가납(嘉納)될 수 없었는가?> 

       그(가인)는 자신에게 부과(賦課)된 하나님의 요구(要求)를 부분적(部分的)으로 마지못해 인정(認定)하였다. 그러나 분개(憤慨)와 반역(叛逆)의 은밀(隱密)한 정신(精神)이 하나님이 정(定)한 계획을 정확하게 따르기보다는 그 자신이 선택한 방법으로 하나님의 요구를 충족시키도록 자극(刺戟)하였다. 


        가인은 표면상(表面上)으로 응(應)하기는 했으나, 그의 응낙태도(應諾態度)는 도전적(挑戰的)인 정신을 나타냈다. 가인은 자신의 행위(行爲)에 의하여 그 자신을 정당화(正當化)시키려고, 곧 자신의 공로(功勞)로 말미암아 구원(救援)을 얻으려고 시도(試圖)하였다. 자신은 구주(救主)가 필요한 죄인(罪人)임을 인정(認定)하기를 거부(拒否)함으로써, 그는 죄에 대해 아무런 회개(悔改)도 표현되지 않은 선물(膳物), 곧 피가 없는 예물(禮物)을 드렸다. “피 흘림이 없은즉 사(赦)함이 없느니라” (히 9:22; 레 17:11; 부조(PP) 71~72).


⑴.(헛된 제물(祭物))-뉘우침과 참된 회개(悔改)의 마음이 없이 드리는 제사(祭祀)는 헛된 제사(祭祀)였다. (삼상 15:22; 마 5:24; 막 12:33). 그 같은 제사(祭祀)는 아무런 가치(價値)도 없는 것이었다.


⑵.여호와는 그에게 드리는 향기(香氣)로운 향(香)의 제사(祭祀)를 기뻐하기는커녕 오히려 그것을 매우 불쾌(不快)히 여기셨다. 종교(宗敎)의 형식(形式)이 참된 정신(精神)을 상실(喪失)하면 무의미(無意味)한 것이 되어 버린다. 하나님은 순종(順從)이 따르지 않는다면 기도(祈禱)까지라도 가능(可憎)한 것이 된다고 분명(分明)히 말씀하셨다. (잠 28:9).


⑶.악(惡)한 삶을 살면서 성회(聖會)에만 참석하는 것은 여호와께서 불쾌(不快)히 여기시는 일이라는 의미(意味)이다. 이사야 시대에 히브리 사람들은 종교(宗敎)의 형식(形式)은 “길게” 행하고 의(義)는 “짧게” 행하였다. 많은 사람이 의문(儀文)의 율법(律法)이 말하는 의식(儀式)에 관한 요구(要求)들은 철저히 따르면서 하나님의 율법에 관한 그의 명령(命令)들은 공공연하게 범(犯)하였다. 하나님이 보시기에 그들의 행위(行爲)는 종교(宗敎)에 대한 조롱(嘲弄)이요 치욕(恥辱)이었다.


⑷.가인은 하나님의 존재(存在)와 세상적(世上的)인 복(福)을 줄 수도 있고 거둘 수도 있는 그분의 능력을 인정(認定)하였다. 하나님과 좋은 관계를 유지(維持)하며 사는 것이 유익하다고 느낀 가인은, 비록 마지못해 바칠지라도 예물(禮物)로써 하나님의 진노(震怒)를 가라앉히거나 돌리는 것이 편리하다고 여겼다. 


⑸.참된 순종(順從)과 마음의 회개(悔改) 대용(代用)으로서, 하나님의 명백한 요구에 대한 부분적(部分的)이고 형식적(形式的)인 응낙(應諾)은 그분의 은총(恩寵)을 얻을 수 없다는 것을 그는 깨닫지 못했다. 오늘날 우리는 가인처럼 하나님께 드린 예물(禮物)이 가치(價値) 없고 가납(嘉納)될 수 없는 것이 되지 않도록 자신의 마음을 잘 살펴야 한다.


⑹.아벨은 구속(救贖)의 대원칙(大原則) 의미(意味)를 이해(理解)했다. 그는 자신이 죄인(罪人)인 것과 죄(罪)와 그 죄의 형벌(刑罰)인 죽음이 그 자신과 하나님과의 교통(交通)을 가로막고 있는 것을 보았다.


⑺.아벨은 죽임을 당한 제물(祭物) 즉 희생(犧牲)된 생명을 드림으로 범(犯)해진 바 된 율법의 요구를 인정(認定)하였다. 그는 흘려진 피를 통하여 미래의 희생(犧牲)즉 그리스도께서 갈보리의 십자가에서 돌아가시는 것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그곳에서 이루어질 속죄(贖罪)를 의지(依支)함으로 그는 의(義)로워졌으며 그의 제물(祭物)이 받으신 바 되었다는 증거를 얻었다.”(부조 72).


⑻.그(가인)는 하나님 아들의 피가 그의 죄를 속(贖)할 것이라는 가르침을 받았다. 그의 죄를 위해 어린양을 희생(犧牲)시키는, 하나님이 정한 규칙을 따름으로 그는 희생제도(犧牲制度)를 제정(制定)한 하나님에게 충성(忠誠)을 나타내 보이며 구속(救贖)의 계획에 대한 믿음(히 11:4)을 표현(表現)할 것이었다. 

 

⑼.아벨은 하나님께서 요구(要求)하신 제사(祭祀), 오실 메시아에 대한 하나님의 약속(約束)을 나타내는 제사(祭祀)(창 3:15), 곧 갈보리에서의 그리스도의 구원(救援) 역사를 가리키는 어린 양의 제사(祭祀)를 지냈다. 


⑽.이사야 시대(時代)에 이스라엘은 자기 마음대로 살면서 마치 하나님을 달래듯이 최소한의 행위로 종교적(宗敎的) 의무(義務)를 다한 것처럼 여겼다. 그들의 제사(祭祀)는 가인의 제사(祭祀)와 같이 자신에 기초(基礎)한 것일 뿐이며 하나님께 굴복(屈伏)하며 자신을 드리는 자세(姿勢)가 결여(缺如)되어 있었다. 


(05월 05일) (월) <황소와 염소의 피>


(Q)-잔인(殘忍)한 것처럼 보이는 황소와 염소의 피가 말하는 의미(意味)는 어떤 것입니까? (히 10:4) 


(A)-(제사와 예물(禮物)-황소와 염소의 피는 죄(罪)를 없앨 수 없다. 이것 때문에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에 오셔서 말씀하시기를 “하나님이 제사(祭祀)와 예물(禮物)을 원(願)치 아니하시고 오직 나를 위하여 한 몸을 예비(豫備)하셨도다”라고 했다.


⑴.제사제도(祭祀制度)를 제정(制定)한 이는 그리스도였다. 제사제도(祭祀制度)를 올바르게 사용하였다면, 그것은 양심적(良心的)인 예배자(禮拜者)에게 축복을 가져다주었을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진실(眞實)하지 못한 예배자(禮拜者)의 제사(祭祀)에서 아무런 기쁨도 발견하지 못하였다(참조 삼상 15:22; 호 6:6).


⑵.유대인들은 하나님께 드리는 예물(禮物)로서 동물(動物)들을 제단(祭壇)으로 가져왔다. 그러나 그들은 이러한 예물(禮物)들 자체가 결코 영혼(靈魂)을 정결(淨潔)케 할 수 없음을 알았거나, 알아야만 했다. 


⑶.하나님께서는 죄(罪)의 값은 사망(死亡)이며 가장 작은 죄(罪)일지라도 형벌(刑罰)을 받아야 함을 인간들에게 가르치는 실물 교훈(實物敎訓)으로 이것들을 의도(意圖)하셨다. 


⑷.이 대신에 이스라엘은 예물(禮物)을 일종(一種)의 죄(罪)를 갚아 주는 것으로 믿게 되었으며 지정(指定)된 제물(祭物)을 가져오면 자기들의 죄(罪)가 지워진다고 생각했다.


⑸.어떠한 짐승도 인간의 영혼과 그 가치를 비교할 수 없다. 인간을 대속하기 위하여 하나님께 황소나 염소를 드리는 것은 모욕이다. 이것은 인간을 짐승과 같은 수준에 놓기 때문에 속죄를 웃음거리로 만든다. 


⑹.어떤 짐승도 대속물(代贖物)로서 죽겠다고 승락(承落)할 수 없다. 그들의 죽음은 억지(抑止)로 강요(强要)되어야만 한다. 이러한 죽음이 속죄(贖罪)할 수 있다고 믿는 것은 사색적(思索的)인 존재(存在)에게 가치(價値) 없는 일이 될 것이었다. 이 모든 것이 황소와 염소의 피가 능히 죄를 없이 하지 못한다는 말 속에 요약(要約)되어 있다. 


⑺.이것들은 더욱 고차원적인 어떤 것에 대한 상징이었다. 그러나 그 자체 안에는 속죄의 가치를 전혀 가질 수 없었다


⑻.그리스도가 오셨을 때 그를 위하여 한 몸이 예비(豫備)되었다. 하나님이셨던 분이 인간이 되셨다. 두 본성(本性)이 신비(神祕)하게 하나로 결합(結合)되어 신인(神人)이 되었다. 그를 위하여 예비된 몸은 죽어야만 하였다. 이것은 혈(血)과 육(肉)으로 이루어진 인간의 몸으로서 최대의 고난(苦難)까지 감수하도록 준비된 것이다. 그렇지 않았다면 그분은 광야(廣野)에서의 시험(試驗)이나 겟세마네에서의 고뇌(苦惱)에서 살아남지 못하였을 것이다. 


⑼.인간이 견딜 수 있는 곳까지 견딘 후 땅에 죽은 듯 쓰러졌을 때 한 천사가 보냄을 받았다. 이는 잔을 거두기 위함이 아니라 잔을 마시도록 그분을 강하게 하기 위함이었다. 겟세마네에서 그리스도는 고난을 위하여 힘을 얻으셨다. 그곳에서 그는 죽음을 맛보셨고 십자가 위에서 그는 죽으셨다.


⑽.그리스도의 몸은 인간의 몸이었다. 하나님께서는 속죄(贖罪)와 구속(救贖)이란 특정 목적을 위하여 준비하셨다. 그 몸 안에서 예수께서는 구원(救援)의 계획(計劃)을 성취(成就)하시고 아담의 불명예(不名譽)스러운 실패(失敗)를 보상(報償)하셨다. 그 몸을 향(向)하여 모든 인간에게 닥치는 모든 유혹(誘惑)이 닥쳤으며 그 몸 안에서 모든 유혹(誘惑)이 정복(征服)되었다.


☞. 희생제사(犧牲祭祀)는 잔인(殘忍)하며 불공정(不公正)하다고 하지만 그것이 바로 죄인을 위해 대신 죽으시는 십자가(十字架)를 가리킨다. 모든 희생(犧牲)은 어린 양(羊)의 희생(犧牲)을 가리키는 상징(象徵)이었다. 


(05월 06일) (화) <유월절(踰越節) 어린 양(羊)>


(Q)-예수님이 하나님의 어린 양(羊)이라는 사실은 우리에게 무엇을 말해주고 있습니까?

(마 26:17~30. 요 14:9)


(A)-<유월절(踰越節) 어린 양(羊)은 유월절축제(踰越節祝祭)에서 중요한 역할(役割)을 하는 상징물(象徵物)로, 흠(欠) 없는 어린 양(羊)을 희생(犧牲)하고 그 피를 문설주(門楔柱)에 칠하여 죽음의 자객(刺客)을 피(避)한다는 의미(意味)를 담고 있다.>


⑴.유월(逾越)'이란 말은 "담을 넘어가다"라는 말로, 영어로는 Passover이라고 합니다. 이 절기(節氣)는 아빕월 10일에 흠(欠) 없고 1년 된 수컷 중에서 어린 양(羊) 또는 염소를 택하여 두었다가 14일 해질 때에 잡아 그 피는 좌우 문설주(門楔柱)와 문인 방(引枋)에 바르고 고기는 구워 먹는 날입니다.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출애굽 하기 전 마지막 재앙(災殃)인 장자(長子)의 재앙(災殃) 때에 문설주(門楔柱)에 어린 양의 피를 바른 집은 여호와께서 넘어가고 장자(長子)를 죽이지 않으셨던 것을 기억(記憶)하여 지키는 날이다


⑵.내가 피를 볼 때 너희를 넘어가리니 재앙이 너희에게 내려 멸하지 아니하리라"(출 12:13). 따라서 유월절은, 죽어야 할 그 자리에서 죽을 사람 대신 어린양을 죽여 그 살코기를 먹고 그 피를 문설주(門楔柱)와 인방(引枋)에 바르므로 죽음과 재앙(災殃)을 면(免)하고 삶과 구원(救援)을 얻게 된 것을 기념하는 날입니다.


⑶.①.<흠 없는 것 (출 12:5)> 세상에서 흠이 없는 것은 없습니다. 그러나 여기에서 말씀하는 것은 하나님께 바치기에 적절한 온전한 상태의 것을 말합니다. 인간적(人間的)인 측면에서 볼 때 건강(健康)에 아무 문제가 없고, 외상(外傷)이 없는 깨끗한 상태를 말합니다. 이는 앞으로 인류(人類)를 위해 제물(祭物)이 되실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象徵)하는 것으로, 흠(欠)이 없다는 말은 죄가 전혀 없는 상태를 말한다. 따라서 죄가 없으신 거룩한 예수 그리스도의 완전(完全)함을 상징(象徵)하는 것이다. (히 7:26, 벧전 1:19).


⑷.②.<1년 된 것(출 12:15)>-1년 동안 성숙(成熟)했지만, 아직 순결(純潔)한 것이며, 가장 살찌고 맛이 좋을 때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늙어서 십자가(十字架)를 지신 것이 아니라, 가장 건강(健康)하고 활동을 많이 할 수 있는 왕성(旺盛)한 나이에 십자가(十字架)를 지셨다.


⑸.③.<수컷(출 12:5)>-종자(種子)를 말합니다. 수컷이 있어야 새끼를 낳을 수 있으므로 생명(生命) 또는 소득(所得)의 근원(根源)이 되는 수컷을 바치라는 것이다. 특히 10번째 재앙(災殃)이 '장자(長子)'와 '처음 난 것'이었기 때문에 '장자(長子)(처음 난 남자, 수컷)'는 하나님의 것임을 상징(象徵)하기도 한다.


⑹."너의 우양(牛羊)의 처음 난 수컷은 구별(區別)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께 드릴 것이니"(신 15:19)-"처음 난 자는 다 내 것임은 내가 애굽 땅에서 그 처음 난 자를 다 죽이던 날에 이스라엘의 처음 난 자는 사람이나 짐승을 다 거룩히 구별하였음이니 그들은 내 것이 될 것이니라. 나는 여호와니라"(민 3:13)


⑺.④.<양(羊)이나 염소>- 양(羊)이 있는 사람은 보편적(普遍的)으로 양(羊)으로 했지만, 양이 없는 사람은 염소로 하라는 말이다. 그러나 대부분 어린양으로 했다.


⑻."때가 제6시쯤 되어 해가 빛을 잃고 온 땅에 어두움이 임하여 제9시까지 계속하며 성소의 휘장이 한가운데가 찢어지더라. 예수께서 큰 소리로 불러 가라사대 "아버지여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나이다" 하고 이 말씀을 하신 후 운명(殞命)하시다.". (눅 23:44~46)


⑼.요한계시록은 30회 정도 예수님을 “어린 양(羊)”이라고 언급(言及)한다. 구속(救贖)의 계획초기(計劃初期)부터 하나님의 백성은 어린 양(羊)을 오실 메시아의 상징(象徵)으로 사용해 왔다. 


⑽.구속사(救贖史) 초기부터 어린 양(羊)은 오실 메시아의 상징(象徵)이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의(義)와 영광(榮光)을 충족(充足)하시며 그것을 가장 강력하게 나타내신 흠(欠) 없는 유월절(踰越節) 어린 양(羊)이다. 


(05월 07일) (수) <성전(聖殿)에 오신 예수님>


(Q)-(학개 2:7~9)에 “이 성전(聖殿)의 나중 영광(榮光)이 이전(以前) 영광(榮光)보다 크리라”의 말씀의 의미(意味)와 “성전(聖殿)에 오신 예수님”이란 말씀은 어떤 의미(意味)를 담고 있습니까?


(A).<이 말은 그리스도께서 성전(聖殿)에 오셨을 때 성취(成就) 되었다(참조 말 3:1; 요 2:13~16). 그리스도께서 오셨던 성전(聖殿)은 흔히 헤롯 성전(聖殿)이라 불렸다(참조 눅 3:1; 요 2:20 대쟁투 23~24,). 그 후 오늘날까지도 유대인들은 대개 솔로몬의 성전(聖殿)을 첫째 성전(聖殿)이라 부르고, 스룹바벨의 지도 아래 재건된 뒤에 AD 70년에 폐허(廢墟)가 된 성전(聖殿)을 둘째 성전(聖殿)이라고 부른다.>


⑴.성육신(成肉身)하신 하나님인 예수께서 육신(肉身)을 입고 직접(直接) 임재(臨在)하신 것은 둘째 성전(聖殿)이었다. 하나님께서 휘장(揮帳) 뒤에서 나오셔서 친(親)히 우리 중 한 사람이 되시고 이 깨어진 세상에서 우리와 함께하셨다.


⑵.하나님의 아들이 인자(人子)가 되셨기에 우리는 그분의 얼굴을 보고, 음성(音聲)을 들으며 그분께서 부정(不淨)한 나병환자(癩病患者)를 만지시고 그를 온전케 하신 것(마 8:3)과 같은 일들을 볼 수 있었다. 


⑶.하나님은 우리를 하나님께로 이끄시는 대신, 우리가 있는 곳으로 오심으로 우리가 하나님과 더 가까이 있게 하셨다. 그분이 친히 우리에게 내려오셨다. 


⑷.그러나 이 둘째 성전(聖殿)은 그 웅장하고 화려한 점에 있어서 처음 성전(聖殿)과 비교가 안 되었다. 그리고 그 처음 성전(聖殿)에서 하나님의 임재(臨在)를 나타내던 신성(神聖)한 표적들로 말미암아 거룩하게 되지도 못했다. 그 성전(聖殿)을 하나님께서 받으셨다는 어떤 초자연적(超自然的) 권능(權能)의 표시(表示)도 없었다. 


⑸.새로 건축된 성소(聖所)를 가득 채울 영광(榮光)의 구름도 없었다. 그 제단(祭壇) 위에 있는 제물(祭物)을 사를 불도 내려오지 않았다. 지성소(至聖所)의 그룹들 사이에 있었던 하나님의 영광(榮光) 빛 (쉐키나)도 더 이상 볼 수 없었다. 그곳에서 법궤(法櫃)와 속죄소(贖罪所)와 증거(證據)의 두 돌판도 볼 수 없었다. 제사장(祭司長)들에게 여호와의 뜻을 알리는 음성(音聲)이 하늘로부터 들려오지도 않았다. (GC 24)


⑹.여러 세기 동안에, 유대인들은 하나님께서 학개를 통하여 주신 허락(許諾)이 어느 곳에서 성취(成就)되었는지 보이기 위하여 헛된 노력을 해왔다. 교만(驕慢)과 불신(不信)으로 말미암아 그들의 마음은 선지자(先知者)의 말씀의 참뜻을 깨닫지 못하였다. 


⑺.둘째 성전(聖殿)은 여호와의 영광(榮光) 구름으로가 아니라, 신성(神聖)의 모든 충만(充滿)이 육체(肉體)로 거(居)하시는 분, 육신(肉身)으로 나타나신 하나님께서 직접 임재(臨在)하심으로 존귀(尊貴)하게 되었다. (GC 24)


⑻.나사렛 예수님께서 성전(聖殿) 뜰에서 가르치시고 병(病)을 고치시던 때는 참으로 “만국의 사모(思慕)하는” 분께서 당신의 성전에 오신 때였다. 다름 아닌 오직 그리스도의 임재하심으로 둘째 성전의 영광은 첫 성전의 영광(榮光)을 능가(凌駕)하였다. 


⑼.그러나 이스라엘은 하늘이 주신 선물(膳物)이신 그분을 배척(排斥)하였다. 그 겸손(謙遜)한 선생이 그날 황금(黃金) 문(門)을 통하여 나오심으로 그 영광은 성전(聖殿)에서 영원히 떠나 버리고 말았다. “너희 집이 황폐(荒廢)하여 버린 바 되리라” (마 23:38) 고 하신 구주(救主)의 말씀은 이미 성취(成就)되었다. (GC 24) 


⑽.솔로몬 성전(聖殿)에 임재(臨在)하셨던 주님은 육신(肉身)이 되어 둘째 성전(聖殿)에 직접 오셨고, 우리를 당신께 이끄는 대신 이곳에 오심으로 우리가 주님과 더 가까이 있게 하셨다. 


(05월 08일) (목) <주께서 만물(萬物)을 창조(創造)하셨으니>


(Q)-주께서 만물(萬物)을 지으셨다는 말에는 어떤 깊은 의미(意味)가 담겨 있다고 생각합니까?. (계 4:11)


(A)-본문상(本文上)의 증거(證據)는 “그것들이 있었고, 또 그것들이 지으심을 받았나이다”라는 독법(讀法)을 지지(支持)한다. “그것들이 있었다”라는 표현(表現)으로 요한은 분명히 하나님이 우주를 존재케 한 이후(以後)의 우주(宇宙) 존재(存在)를 언급(言及)한다. 하나님은 만물(萬物)을 창조하셨고 지금은 그것들을 유지(維持)하신다. (참조 골 1:17 주석).


⑴.하나님은 그의 피조물(被造物)들에 생명과 그 밖에 그들이 가진 모든 것을 주셨기 때문에 그들에게서 찬양(讚揚)을 받는 것이 “합당(合當)하시다.” 그는 그들의 지금의 존재를 만들어 주셨다.


⑵.예수님을 봄으로써 아버지가 어떤 분인지 알 수 있다는 것은 얼마나 큰 위로(慰勞)가 되는가(요 14:9). 아버지가 어떤 분이신지에 대한 가장 큰 계시(啓示)는 우리를 위해 십자가(十字架)에서 돌아가신 예수님에게서 볼 수 있다.


⑶. 그러므로 십자가(十字架)에서 우리는 두 가지, 곧 우리를 위해 자신을 희생(犧牲)하실 만큼 하나님께서 우리를 얼마나 사랑하시는지, 그리고 우리가 십자가(十字架)를 통해서만 구원(救援)받을 수 있는 얼마나 죄(罪) 크고 타락(墮落)한 존재(存在)인지를 볼 수 있다.


⑷.<화(禍)로 다 나여>-이사야는 이전(以前)에 하나님의 백성 중에 있는 죄인들에게 화(禍)를 선포(宣布)한 적이 있었다. (사 5:8~30). 이제 그는 자신이 거룩하신 하나님의 두려운 임재(臨在) 가운데 있음을 알고는 자신의 품성(稟性)의 결함(缺陷)을 깊이 깨닫게 된다. 우리가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가게 되면 이와 동일한 경험(經驗)이 우리에게도 이르러 올 것이다. (사 6:5 본교주석)


⑸.(요한계시록 14장)은 창조주(創造主)를 경배(敬拜)하라고 인류에게 요구함과 동시에 그 예언은 삼중기별(參重奇別)의 결과로서 하나님의 계명(誡命)을 지키는 한 단체(團體)를 보여준다. 그 계명(誡命) 중의 하나는 하나님께서 창조주 되심을 직접적(直接的)으로 알려 준다.


⑹.하나님께서는 말씀하셨고, 그분의 말씀은 자연계(自然界) 가운데 있는 이런 일들을 창조하셨다. 하나님의 창조(創造)는 다만 당신께서 기뻐하시는 일을 즉각적(卽刻的)으로 하시려고 준비하신 방법(方法)들의 창고(倉庫)이다. 


⑺.거기에는 필요 없는 것이란 없었으나, 가라지가 원수(怨讐)들에 의하여 뿌려졌다. 이성적(理性的)인 존재(存在)만이 우리 세상에 혼란(混亂)을 야기시키는가 ? 우리는 그분을 영광(榮光)되게 할 수 없는가? 우리 하나님과 구주(救主)께서는 완전한 지혜(智慧)를 가지시고 모든 것을 충족(充足)시켜 주시는 분이시다. 그분은 당신의 완전하심을 우리에게 계시(啓示)하시기 위하여 이 세상에 오셨다. (LHU 66) (주님을 첫째로 높이자 66)


⑻.희생(犧牲)의 정신(精神)을 버리고 자신의 영광을 추구(追求)하도록 이끄는 요소들을 도입(導入)함으로써 이스라엘에 대한 하나님의 계획을 그르칠 또 다른 악(惡)이 따라 들어왔다.


⑼.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백성이 세상의 빛이 되도록 계획(計劃)하셨다. 그들은 실제생활(實際生活)에서 하나님의 율법의 영광(榮光)을 비춰야 했다. 이 계획(計劃)을 실행(實行)하시기 위하여 하나님께서는 그의 택(擇)한 나라를 세계 여러 나라 중에서 요충 지대(要衝地臺)에 두셨다. (PK 70)


⑽.거룩한 하나님의 보좌실(寶座室)을 볼 때 우리의 악(惡)함과 무가치(無價値)함을 발견하지만 죽임당하신 어린 양(羊)은 아버지의 본모습(本模襲)과 죄인(罪人)을 어떻게 구(求)하시는지를 알려준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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