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6과 희생 제사의 이해(질문, 대답, 설명) 05/1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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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김명호 작성일25-05-02 09:15 조회2,056회 댓글0건본문
제6과 희생 제사의 이해
(5월 10일 안식일 / 일몰: 오후 7시 30분)
연구 범위: 사 1:2-15, 히 10:3-10, 출 12:1-11, 고전 5:7, 학 2:7-9. 사 6:1-5, 계 4:7-11
기억절: “그들이 새 노래를 불러 이르되 두루마리를 가지시고 그 인봉을 떼기에 합당하시도다 일찍이 죽임을 당하사 각 족속과 방언과 백성과 나라 가운데에서 사람들을 피로 사서 하나님께 드리시고”(계 5:9).
예수께서 다가오셨을 때 침례 요한은 이렇게 선포했다.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요 1:29). 이것은 틀림없이 동물을 희생 제사로 드린 것과 연결되며, 이 모든 것은 인류를 대신하시는 그리스도의 대속적 죽음을 가리킨다.
성경 모든 곳에서 희생 제사는 빠질 수 없는 주제이다. 희생 제사의 붉은 피는 성경의 장들을 적시며 흐르고 요한이 하나님의 보좌실로 인도되는 요한계시록의 장엄한 장면(계 4:, 5:)에서도 중심적인 역할을 한다. 이 중요한 장면에서 예수께서 죽임당한 어린 양의 모습으로 등장하시는 것은(계 5:6)은 이 예언의 장면 전체를 이해하는 중요한 열쇠가 된다.
이번 주에는 보좌실 장면의 분명한 주인공, 죽임당하신 어린 양이신 예수에 대한 우리의 이해를 돕는 몇 가지 희생 제사의 주제를 살펴볼 것이다. 그분은 누구도 마땅하지 않았던 상황에서 홀로 합당하신 분으로 인정받으셨다. 그분만이 유일하게 합당하시다는 것은 주님께서 희생 제사를 통해 무엇을 이루셨는지를 강력하게 말해준다. 그것은 그분이 궁극적인 희생을 치르신 무한한 사랑의 하나님이심을 보여주며, 온 우주의 다른 지적 존재들도 영원토록 감탄하게 한다.
학습 목표
깨닫기: 희생 제사의 피는 죄인을 구하시는 어린 양 예수님의 희생을 가리킨다.
느끼기: 죄 때문에 함께 할 수 없는 우리에게 하늘 보좌의 영광을 버린 인자가 가까이 오셨다.
행하기: 낙망과 울음을 멈추고 하나님의 뜻을 따라 어린 양의 보혈에 의지하여 하나님을 경배한다.
TMI 위로
2. 아벨의 제사는 하나님이 기뻐하지 않는 제사와 어떤 차이가 있습니까?(히 11:4)
*답: 아벨은 믿음으로 제사를 드렸다.
3. 잔인한 것처럼 보이는 황소와 염소의 피가 말하는 의미는 어떤 것입니까?(히 10:4)
*답: 우리 주님이 죄로 말미암아 그렇게 잔인하게 죽임을 당하신다는 것을 드러낸다.
4. 예수님이 하나님의 어린 양이라는 사실은 우리에게 무엇을 말해주고 있습니까?(요 14:9)
*답: 하나님 아버지가 어떤 분이신지 분명히 드러내 보여주신다.
5.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하기 위해 여기 오셨다는 것은 어떤 의미를 담고 있습니까?(마 1:23)
*답: 그분이 바로 성소이시면 속죄를 완성하고 함께 거하신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6. 주께서 만물을 지으셨다는 말에는 어떤 깊은 의미가 담겨 있다고 생각합니까?(계 4:11)
*답: 우주의 통치자시며 관리자이시고 풍성히 베푸시는 분이며 피조물의 경배와 찬양을 받으실 분임을 드러낸다.
7. 예수께서 죄 문제를 해결하시기에 합당하다는 선언에 어떤 일들이 내포되어 있다고 생각합니까?(계5:9)
*답: 아담 후손을 피로 사서 속죄하시고 하나님께 드리신다는 일들이 내포됐다.
결론: 희생 제사의 붉은 피는 성경의 장들을 적시며 흐른다. 희생 제사는 하나님의 약속을 가리키기에 짐승의 피가 동반되었다. 그것은 불공정한 하나님의 사랑, 곧 죄인을 구원하며 이를 위해 흘리는 어린 양 예수의 희생을 의미한다. 죄로 가까이 할 수 없는 우리와 함께 하기 위해 하나님은 인간의 모습으로 오셨다. 예수님은 우리를 지으신 분이시며 타락한 사람을 율법의 정죄에서 구원하시기에 합당하신 유일한 분이시다. 그가 우리에게 소망을 주시며 울음을 멈추라고 말씀하신다.
5월 4일(일) 헛된 제사
때로는 두 가지 생각을 대조해 보는 것이 매우 유익할 수 있다. 하나님께서 당신의 백성의 제사를 실제로 거부하신 일을 살펴볼 때 우리는 성경적 관점의 제사의 본질이 어떤 것인지에 대해 많은 것을 알 수 있다.
이사야 1:2-15와 이사야 56:6, 7 그리고 시편 51:17을 비교해 보라. 이 구절은 희생 제사에 대한 어떤 중요한 교훈을 말하고 있는가?
[사1:2~15] 하늘이여 들으라 땅이여 귀를 기울이라 여호와께서 말씀하시기를 내가 자식을 양육하였거늘 그들이 나를 거역하였도다 3 소는 그 임자를 알고 나귀는 그 주인의 구유를 알건마는 이스라엘은 알지 못하고 나의 백성은 깨닫지 못하는도다 하셨도다
4 슬프다 범죄한 나라요 허물 진 백성이요 행악의 종자요 행위가 부패한 자식이로다 그들이 여호와를 버리며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이를 만홀히 여겨 멀리하고 물러갔도다 5 너희가 어찌하여 매를 더 맞으려고 패역을 거듭하느냐 온 머리는 병들었고 온 마음은 피곤하였으며 6 발바닥에서 머리까지 성한 곳이 없이 상한 것과 터진 것과 새로 맞은 흔적뿐이거늘 그것을 짜며 싸매며 기름으로 부드럽게 함을 받지 못하였도다 7 너희의 땅은 황폐하였고 너희의 성읍들은 불에 탔고 너희의 토지는 너희 목전에서 이방인에게 삼켜졌으며 이방인에게 파괴됨 같이 황폐하였고 8 딸 시온은 포도원의 망대 같이, 참외밭의 원두막 같이, 에워 싸인 성읍 같이 겨우 남았도다 9 만군의 여호와께서 우리를 위하여 생존자를 조금 남겨 두지 아니하셨더면 우리가 소돔 같고 고모라 같았으리로다 10 너희 소돔의 관원들아 여호와의 말씀을 들을지어다 너희 고모라의 백성아 우리 하나님의 법에 귀를 기울일지어다 11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너희의 무수한 제물이 내게 무엇이 유익하뇨 나는 숫양의 번제와 살진 짐승의 기름에 배불렀고 나는 수송아지나 어린 양이나 숫염소의 피를 기뻐하지 아니하노라 12 너희가 내 앞에 보이러 오니 이것을 누가 너희에게 요구하였느냐 내 마당만 밟을 뿐이니라 13 헛된 제물을 다시 가져오지 말라 분향은 내가 가증히 여기는 바요 월삭과 안식일과 대회로 모이는 것도 그러하니 성회와 아울러 악을 행하는 것을 내가 견디지 못하겠노라 14 내 마음이 너희의 월삭과 정한 절기를 싫어하나니 그것이 내게 무거운 짐이라 내가 지기에 곤비하였느니라 15 너희가 손을 펼 때에 내가 내 눈을 너희에게서 가리고 너희가 많이 기도할지라도 내가 듣지 아니하리니 이는 너희의 손에 피가 가득함이라.
[사56:6,7] 또 여호와와 연합하여 그를 섬기며 여호와의 이름을 사랑하며 그의 종이 되며 안식일을 지켜 더럽히지 아니하며 나의 언약을 굳게 지키는 이방인마다 7 내가 곧 그들을 나의 성산으로 인도하여 기도하는 내 집에서 그들을 기쁘게 할 것이며 그들의 번제와 희생을 나의 제단에서 기꺼이 받게 되리니 이는 내 집은 만민이 기도하는 집이라 일컬음이 될 것임이라.
[시51:17] 하나님께서 구하시는 제사는 상한 심령이라 하나님이여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을 주께서 멸시하지 아니하시리이다.
*답: 진정한 회개로(상한 심령) 안식일을 지키고 언약을 지키는 사람들의 제사를 기쁘게 받으신다.
이스라엘 역사의 이 비극적인 장면이 하나님께서 제사를 거부하신 첫 번째 사건은 아니다. 그와 비슷한 일이 구속사가 시작될 무렵 일어났다. 하나님께서 아벨의 제사는 받으시고 인정하셨지만 가인의 제사는 받지 않으셨다. 이 초기 역사는 우리에게 하나님께서 받으실 만한 제사와 그렇지 않은 제사를 대조할 수 있는 또 다른 기회를 제공한다(창 4:3-7, 히 11:4 참조).
이사야 시대에 이스라엘은 자기 마음대로 살면서 마치 하나님을 달래듯이 최소한의 행위로 종교적 의무를 다한 것처럼 여겼다. 그들의 제사는 가인의 제사와 같이 자신에 기초한 것일 뿐이며 하나님께 굴복하며 자신을 드리는 자세가 결여되어 있었다.
이것은 이 세상의 나라들을 움직이는 것과 동일한 자기만족의 정신이다. 가인은 자신이 원하는 대로 살면서 자기 마음대로 그저 형식뿐인 제사를 하나님께 드렸다. 그는 하나님을 불편한 존재, 자신의 길을 가는 데 걸림돌이 되는 분으로 여겼을 뿐 아니라 하나님을 두려워하여 마지못해 하는 행위를 반복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아벨은 하나님께서 요구하신 제사, 오실 메시아에 대한 하나님의 약속을 나타내는 제사(창 3:15), 곧 갈보리에서의 그리스도의 구원의 역사를 가리키는 어린 양의 제사를 드렸다.
“아벨은 구속의 대원칙의 의미를 이해했다. 그는 자신이 죄인인 것과 죄와 그 죄의 형벌인 죽음이 그 자신과 하나님과의 교통을 가로막고 있는 것을 보았다.
그는 죽임을 당한 제물 즉 희생된 생명을 드림으로 범해진바 된 율법의 요구를 인정하였다. 그는 흘려진 피를 통하여 미래의 희생 즉 그리스도께서 갈보리의 십자가에서 죽으시는 것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그곳에서 이루어질 속죄를 의지함으로 그는 의로워졌으며 그의 제물이 받으신바 되었다는 증거를 얻었다”(부조와 선지자, 72).
<교훈> 하나님은 헛된 제사를 거부하신다. 가인은 자기 마음대로 살면서 그저 형식적인 제사를 드렸지만 아벨은 하나님께 순종하며 약속을 가리키는 제사를 드렸다.
<부가설명> 예수님은 예배하는 자가 영과 진리로 예배해야 한다고 가르치셨다. 어떤 것이 영과 진리로 하는 예배인가? 이 말은 거듭난 상태에서 예배해야 한다는 뜻으로 해석할 수 있다. 사람은 다 육에 속해있다. 범죄했기 때문에 육체가 된 것이다(창6:3, 구역 난하 주). 아담의 모든 후손은 다 육이다. 이 육이 영이 되는 길이 바로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는 것이다.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 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 영으로 난 것은 영이니”(요3:5,6). 거듭나지 않은 육으로 예배하는 것을 하나님께 상달하지 않는다. 가인은 피 흘리는 제사를 드리지 않았다. 그는 악한 자에게 속했기 때문에 구주가 피 흘려 사망을 처리하고 육이 영이 되는 길을 이루시는 것을 믿지 않았다. 그는 사망의 존재이기 때문에 죽은 자를 산 자의 하나님께서 받으실 수가 없었다. 영이 된 사람들은 진리대로 살아간다. “우리는 진리를 거스려 아무것도 할 수 없고 오직 진리를 위할 뿐이니”(고후13:8). 하나님은 가인의 제사를 받지 않으신 것이 아니다. 가인을 받을 수가 없었다. 성경은 이렇게 기록했다. “가인과 그 제물은 열납하지 아니하신지라 가인이 심히 분하여 안색이 변하니”(창3:5). 왜냐하면 가인은 죽은 자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요 산 자의 하나님이시라 너희가 크게 오해하였도다”(막12:27). 우리는 산 자인가? 죽은 자인가? 진리를 거슬러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사람이라면 산 자이다.
5월 5일(월) 황소와 염소의 피
어떤 사람들은 희생 제사라는 개념 자체가 잔인하고 가혹하며 한편으로는 불공정한 것이라고 주장하며 비판한다. 하지만 바로 그것이 정확한 핵심이다. 그리스도의 죽음은 잔인하고 가혹하며 죄 없는 분이 죄인을 위해 죽는 불공정한 것이었다. 그것이 바로 죄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필요한 것이었다. 바로 이 모든 가혹하고 잔인하며 불공정한 희생 제사가 가리키는 것이 그리스도의 희생이다.
히브리서 10:3-10을 읽어 보라. 이 구절은 구약에서 하나님의 백성이 드린 제사에 대해 무엇을 가르쳐 주는가? 죄인이 그 제물로 실제로 구원받을 수 없다면 그것을 드려야 했던 이유는 무엇인가?
[히10:3~10] 그러나 이 제사들에는 해마다 죄를 기억하게 하는 것이 있나니 4 이는 황소와 염소의 피가 능히 죄를 없이 하지 못함이라 5 그러므로 주께서 세상에 임하실 때에 이르시되 하나님이 제사와 예물을 원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나를 위하여 한 몸을 예비하셨도다 6 번제와 속죄제는 기뻐하지 아니하시나니 7 이에 내가 말하기를 하나님이여 보시옵소서 두루마리 책에 나를 가리켜 기록된 것과 같이 하나님의 뜻을 행하러 왔나이다 하셨느니라 8 위에 말씀하시기를 주께서는 제사와 예물과 번제와 속죄제는 원하지도 아니하고 기뻐하지도 아니하신다 하셨고 (이는 다 율법을 따라 드리는 것이라) 9 그 후에 말씀하시기를 보시옵소서 내가 하나님의 뜻을 행하러 왔나이다 하셨으니 그 첫째 것을 폐하심은 둘째 것을 세우려 하심이라 10 이 뜻을 따라 예수 그리스도의 몸을 단번에 드리심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거룩함을 얻었노라.
*답: 성소 봉사의 제사와 제물로는 죄 사함을 받지 못하다. 그것은 오히려 죄를 생각나게 한다. 그것은 장차 오셔서 죄가 되셔셔 대속하실 구주를 믿는 믿음을 고백하는 제사였다. 예수께서 이루실 속죄를 가리키는 것을 믿는 믿음이었다.
양과 다른 희생 제물은 하나님의 어린 양의 속죄 희생을 가리키는 상징에 불과했다. 그것은 믿음의 행위이며, 죄인에게 오시는 메시아의 사역에 대한 믿음을 표현할 수 있는 손에 잡히는 방식을 제공한 것이었다. 우리는 이러한 종류의 상징을 예표라고 부르는데, 이는 예표에 의해 성취되거나, 그것이 예고한 사물이나 사건이 이루어질 것을 말한다. 어떤 이들은 희생을 십자가에서의 예수의 죽음에 대한 '작은 예언'이라고 묘사하기도 한다.
희생의 행위는 여행비용을 미리 지불하는 것과 비슷하다고 할 수 있다. 기차, 버스 또는 비행기 표를 샀다고 해서 지불한 그 여행이 바로 시작되는 것은 아니다. 대신 다가올 여행에 대한 상징 또는 약속인 표나 탑승권을 받게 된다.
여정이 기록된 종이 탑승권 위에 아무리 오래 앉아있어도 그것은 당신을 목적지까지 데려다주지 않는다. 그러나 일단 탑승하고 여정이 시작되면 탑승권의 효력이 실행되었기에 종이 표는 더 이상 필요 없다.
짐승의 희생도 마찬가지였다. 그것은 중요한 역할을 했지만, 참 제사가 드려진 이후에는 무의미해졌으며, 예수님의 죽음으로 성소와 지성소 사이의 휘장이 찢어지는 것으로 그 실체가 선명하게 드러났다.
“이에 성소 휘장이 위로부터 아래까지 찢어져 둘이 되니라”(막 15:38). 성소와 그 모든 제사 제도는 십자가에서의 예수님의 죽으심을 가리켰다.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약속을 성취하시고 죽음을 이기시고 부활하신 후, 예표는 필요 없게 되었다.
<교훈> 희생 제사는 잔인하며 불공정하다고 하지만 그것이 바로 죄인을 위해 대신 죽으시는 십자가를 가리킨다. 모든 희생은 어린 양의 희생을 가리키는 상징이었다.
<부가설명> 왜 예수님만 속죄할 수 있는 자격이 있는가? 성경이 계시한 이 진리를 올바르게 이해하는 것은 대단히 중요하다. 예수님은 마지막 아담이시다(고전15:45, 롬5:14). 예수께서는 새로운 아담으로 오셨다. 지구상에 사는 사람, 살았던 사람, 앞으로 출생할 모든 사람은 다 첫 아담의 씨로 출생한다. 첫 아담은 에덴동산에서 땅에 충만하게 될 그의 모든 후손의 씨를 가진채로 선악과를 먹어서 죽었다(창2:16,17, 3:11). 그래서 첫 아담의 씨로 출생하는 사람은 생명이 없는 존재가 되었다. 육체가 된 것이다(창6:3). 창조되었을 때는 “생령”이었다. 그러나 선악과를 먹은 후에는 영이 육체가 되었다. 그래서 아담 후손은 육체뿐인 존재다(시78:39). 그래서 아담의 후손은 한 사람의 예외도 없아 아담 안에서 다 죽은 자이다(고전15:22). 그러므로 아담의 씨, 곧 남자의 씨로 태어나는 사람은 이미 생명의 씨가 없기 때문에 다른 사람의 사망을 대신 처리할 자격이 없다. 그가 이미 아담 안에서 생명 없는 존재, 곧 죽은 존재로 출생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말씀 하나님께서 당신 자신이 생명의 씨가 되어 처녀(동정녀)에게 임신 되신 것이다. 구주는 처녀에게서 탕생하셨다. 그래서 남자의 후손이 아니고 여자의 후손이라고 계시하였다. 그는 새로운 생명의 창시자로 오셨다. 그래서 첫 아담이 죽은 그 죽음을 대신하여 죽을 자격이 있다.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신 것은 아담에게 선고된 그 죽음을 죽었다. 증언은 그것을 둘째 사망이라고 설명했다(가려 뽑은 기별 1권 297). 그래서 예수님을 믿고 거듭나는 사람은 마지막 아담 예수님의 생명으로 출생한다. 이것이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기는 구원의 실상이다. 오직 예수님만이 이 일을 이루신 구주이시다(행4:12).
5월 6일(화) 유월절 어린 양
요한계시록은 30회 정도 예수님을 “어린 양”이라고 언급한다. 구속의 계획 초기부터 하나님의 백성은 어린 양을 오실 메시아의 상징으로 사용해 왔다. 아벨은 “양의 첫 새끼”(창 4:4)를 드렸고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집트를 떠나 약속의 땅으로 향하기 전에 모든 장자와 짐승의 처음 난 것을 1년 된 어린 양으로 구속하라는 지시를 받았다(출 12:5).
출애굽기 12:1-11, 이사야 53:7, 8, 고린도전서 5:7, 요한계시록 5:6을 읽어 보라. 이 구절은 유월절 희생 제물로서의 예수님에 대해 우리에게 무엇을 가르쳐 주는가? 그것은 우리 각자에게 어떤 의미가 있는가?
[출12:1~11] 여호와께서 애굽 땅에서 모세와 아론에게 일러 말씀하시되 2 이 달을 너희에게 달의 시작 곧 해의 첫 달이 되게 하고 3 너희는 이스라엘 온 회중에게 말하여 이르라 이 달 열흘에 너희 각자가 어린 양을 취할지니 각 가족대로 그 식구를 위하여 어린 양을 취하되 4 그 어린 양에 대하여 식구가 너무 적으면 그 집의 이웃과 함께 사람 수를 따라서 하나를 취하며 각 사람이 먹을 수 있는 분량에 따라서 너희 어린 양을 계산할 것이며 5 너희 어린 양은 흠 없고 일 년 된 수컷으로 하되 양이나 염소 중에서 취하고 6 이 달 열나흗날까지 간직하였다가 해 질 때에 이스라엘 회중이 그 양을 잡고 7 그 피를 양을 먹을 집 좌우 문설주와 인방에 바르고 8 그 밤에 그 고기를 불에 구워 무교병과 쓴 나물과 아울러 먹되 9 날것으로나 물에 삶아서 먹지 말고 머리와 다리와 내장을 다 불에 구워 먹고 10 아침까지 남겨두지 말며 아침까지 남은 것은 곧 불사르라 11 너희는 그것을 이렇게 먹을지니 허리에 띠를 띠고 발에 신을 신고 손에 지팡이를 잡고 급히 먹으라 이것이 여호와의 유월절이니라.
[사53:7,8] 그가 곤욕을 당하여 괴로울 때에도 그의 입을 열지 아니하였음이여 마치 도수장으로 끌려 가는 어린 양과 털 깎는 자 앞에서 잠잠한 양 같이 그의 입을 열지 아니하였도다 8 그는 곤욕과 심문을 당하고 끌려 갔으나 그 세대 중에 누가 생각하기를 그가 살아 있는 자들의 땅에서 끊어짐은 마땅히 형벌 받을 내 백성의 허물 때문이라 하였으리요.
[고전5:7] 너희는 누룩 없는 자인데 새 덩어리가 되기 위하여 묵은 누룩을 내버리라 우리의 유월절 양 곧 그리스도께서 희생되셨느니라.
[계5:6] 내가 또 보니 보좌와 네 생물과 장로들 사이에 한 어린 양이 서 있는데 일찍이 죽임을 당한 것 같더라 그에게 일곱 뿔과 일곱 눈이 있으니 이 눈들은 온 땅에 보내심을 받은 하나님의 일곱 영이더라.
*답: 그분이 피를 흘려 죽으셔서 속죄해 주실 것을 가리킨다.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 승천이 있고서 수년 후 베드로는 일어난 일을 되돌아보며 이렇게 기록했다. “너희가 알거니와 너희 조상이 물려 준 헛된 행실에서 대속함을 받은 것은 은이나 금 같이 없어질 것으로 된 것이 아니요 오직 흠 없고 점 없는 어린 양 같은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로 된 것이니라”(벧전 1:18, 19).
예수님은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충족하는 유일한 인간의 삶을 사셨다. 반면에 우리 모두는 죄를 지었고, 우리가 죄악된 삶을 사는 모습은 말 그대로 우리를 만드신 창조주의 속성과는 완전히 동떨어진 모습이다.
그러나 예수께서 “마지막 아담”이 되셨다(고전 15:45). 우리가 실패했던 그곳에서 그분이 완벽한 삶을 사셨다. 예수님은 인성을 통해 인류가 이루어야 했던 모든 것을 이루셨다. 그분은 하나님의 영광을 온전히 나타내셨다. 예수님은 빌립에게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요 14:9)다고 말씀하셨다.
예수님은 유월절에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심으로 자신이 예표된 어린 양이심을 더 분명하게 보여주셨다. 요한복음 18:19, 20은 예수께서 당신의 교훈을 “드러내 놓고” 말씀하셨다고 한다.
이와 유사하게 유월절 어린 양에 관하여 출애굽기 12:5, 6은 이스라엘 자손에게 유월절에 어린 양을 택하여 간직하였다가 희생 제사 때 회중 앞에 드러내라고 기록한다. 대제사장이 예수님의 가르침에 대해 질문했을 때, 예수님은 모든 사람이 볼 수 있도록 성전에 자신을 드러내놓고 말하셨다는 사실을 언급하셨다. 그분의 삶, 행적, 가르침은 모두 그분이 실제로 누구이신지 드러냈다. 그분은 하나님의 의와 영광을 가장 강력하게 나타내신 흠 없는 어린 양이시다.
<교훈> 구속사 초기부터 어린 양은 오실 메시아의 상징이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의와 영광을 충족하시며 그것을 가장 강력하게 나타내신 흠 없는 유월절 어린 양이다.
<부가설명> 예수님을 어린양이라고 표현한 것은 그분이 인류를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겨주시기 위하여 사망이 되어 희생될 것을 나타낸다. 구약성경에서 속죄를 위한 희생 짐승으로 양, 영소, 소, 비둘기 등등이 사용되었는데 어린양이 대표격이다. 침례요한은 예수님이 40일 금식 후 광야에서 요한이 침례 주는 곳으로 오는 것을 보고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이라고 외쳤다(요1;29). 이 선포는 예수님이 성소에서 매일 속죄를 위해 희생되는 생축(牲畜)일 뿐만 아니라, 유월절 어린양, 또 대속죄일에 드려지는 희생 짐승을 다 포괄하는 선포다. 예수님은 유월절 양만이 아니라 성소 봉사에서 희생된 모든 생축을 뜻한다. 그래서 십자가와 부활 후에 지상 성소 봉사는 의미가 없어졌다. 예수님은 당신의 피를 가지고 승천하셔서 대제사장으로 친히 속죄 봉사를 하시기 때문이다. 예수님을 흠없는 어린양이라고 표현한(벧전1:19) 것은 그분이 아담의 생명과 상관없는 자신의 생명으로 오신 것과 세상에서 사람으로 생활하는 동안 전혀 죄를 짓지 않으신 것을 다 포함하는 표현이다. 그래서 아담과 그의 모든 후손의 죄와 사망을 친히 담당하시고 대속하실 수 있으신 것이다.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은 그분 안에서 함께 죽었고 함께 부활했다. 그래서 죽음과 상관없는 생명, 곧 영생을 얻어서 생활할 수 있게 되었다. 이 생명을 잘 지켜야 한다.
5월 7일(수) 성전에 오신 예수님
모든 구원의 이야기 가운데 긴장감이 존재한다. 하나님은 우리가 그분과 누렸던 이전의 교제를 회복하기 원하시며 우리에게 가까이 다가오기를 갈망하신다. 그러나 죄인이 그분의 면전에 나온다면 그들은 멸망하고 말 것이다. 다윗은 “주는 죄악을 기뻐하는 신이 아니시니 악이 주와 함께 머물지 못”(시 5:4)한다 기록했다. 하지만, 동시에 “오직 나는 주의 풍성한 사랑을 힘입어 주의 집에 들어가 주를 경외함으로 성전을 향하여 예배하리이다”(시 5:7)라고도 말했다.
학개 2:7-9을 읽어 보라. 두 번째 성전이 건축되고 있을 때, 학개 선지자는 둘째 성전은 이전 성전보다 더 영광스러울 것이라는 놀라운 약속을 했다. 그 예언은 무엇을 의미했는가?
[학2:7~9] 또한 모든 나라를 진동시킬 것이며 모든 나라의 보배가 이르리니 내가 이 성전에 영광이 충만하게 하리라 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니라 8 은도 내 것이요 금도 내 것이니라 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니라 9 이 성전의 나중 영광이 이전 영광보다 크리라 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니라 내가 이 곳에 평강을 주리라 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니라.
*답: 예수께서 성전에 임하실 것을 예언한 것이다.
솔로몬이 첫 번째 성전을 봉헌했을 때, 이스라엘 자손이 가나안으로 가는 길에 함께하셨던 하나님의 임재인 셰키나의 영광이 성전을 가득 채웠기 때문에 제사장들이 선채로 그들의 봉사를 계속할 수 없었다(왕상 8:10, 11). 두 번째 성전이 봉헌되었을 때는 예레미야가 말한 대로(렘 3:16) 하나님의 보좌를 상징하는 언약궤는 더 이상 그곳에 없었다. 하나님의 실재적인 임재가 성전을 가득 채우는 일도 없었다. 이것은 가슴 아픈 일이었다. 그렇다면 학개의 약속은 과연 어떻게 이루어질 수 있겠는가?
성육신하신 하나님인 예수께서 육신을 입고 직접 임재하신 것은 둘째 성전이었다. 하나님께서 휘장 뒤에서 나오셔서 친히 우리 중 한 사람이 되시고 이 깨어진 세상에서 우리와 함께 하셨다. 하나님의 아들이 인자가 되셨기에 우리는 그분의 얼굴을 보고, 음성을 들으며 그분께서 부정한 나병 환자를 만지시고 그를 온전케 하신 것(마 8:3)과 같은 일들을 볼 수 있었다. 하나님은 우리를 당신께로 이끄시는 대신, 우리가 있는 곳으로 오심으로 우리가 당신과 더 가까이 있게 하셨다. 그분이 친히 우리에게 내려오셨다.
성경이 예수님에 대해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의 이름은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하셨으니 이를 번역한즉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 함이라”(마 1:23)라고 말한 것은 당연하다. 이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생각해 보라. 우주의 창조주께서 우리 가운데 거하실 뿐만 아니라 우리를 위해서 죽기까지 자신을 낮추셨다.
<교훈> 솔로몬 성전에 임재하셨던 주님은 육신이 되어 둘째 성전에 직접 오셨고, 우리를 당신께 이끄는 대신 이곳에 오심으로 우리가 주님과 더 가까이 있게 하셨다.
<부가설명> 지상의 성소는 비유라고 계시하였다(히9:9). 예수님을 표상하고 그분이 이루실 구속 사업을 확실히 가르쳐주시려는 하나님의 계획을 구상화(具象化)한 건물이었다. 그것은 사람들이 보고 실습해서 하나님의 구속사업을 배우고 깨닫도록 하려는 구원사업의 시청각교재였다. 예수께서 오셔서 이 비유가 가르친 모든 것을 실체가 성취했기 때문에 시청각교재는 더는 필요가 없다. 그래서 그것의 휘장이 찢어졌고 종내는 파괴되어 없어졌다. 대신 하늘 성소에서 예수께서 친히 대제사장이 되시고 희생 제물의 피가 되셔서 봉사하신다. 예수님을 믿는 모든 사람들은 예수님의 봉사로 피뿌림을 받아야 한다. “곧 하나님 아버지의 미리 아심을 따라 성령의 거룩하게 하심으로 순종함과 예수 그리스도의 피 뿌림을 얻기 위하여 택하심을 입은 자들에게 편지하노니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더욱 많을지어다”(벧전1:2). 성도들이 이 피 뿌림을 받지 않으면 속죄가 되지 않는다. 이 봉사에 의하여 하나님께서 믿는 자들을 의롭다고 선포하신다(롬8:33,34). 주님은 세상에 오셔서 친히 성전에 들어가심으로 학개의 예언이 성취 되었다. 그분은 모든 믿어 거듭난 사람 성전에도 들어오셔서 함께 하신다. 그래서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신다는 말씀이 모든 믿는 개인에게도 이루어지는 것이다. 우리는 과연 성전인가? 성령께서 함께 계시는가? 스스로 시험하고 확증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5월 8일(목) 주께서 만물을 창조하셨으니
선지자가 환상을 통해 하나님의 보좌를 볼 수 있도록 하나님께 가까이 이끌려갔던 경우가 간혹 있었다. 에스겔은 궁창 위의 보좌를 보았고(겔 1:26), 이사야는 하늘의 성전을 방문했다(사 6:1). 요한계시록 4장과 5장이 말하는 요한이 환상 중에 그곳으로 인도된 장면은 우리가 가진 가장 분명한 기록이다. 구약 성소 봉사의 표상은 인류가 하나님 앞에 나갈 수 있는 길은 오직 하나, 그리스도의 피뿐이라고 말한다(레 16:2, 14 참조).
이사야 6:1-5과 요한계시록 4:7-11을 읽어 보라. 이 두 환상의 어떤 요소가 비슷한가? 사건의 순서에 주의를 기울여 보라. 어떤 주제가 먼저 제시되며 그다음에 무엇이 나타나는가? 이 이상에서 하나님에 대한 어떤 진리가 강조되고 있는가?
[사6:1~5] 웃시야 왕이 죽던 해에 내가 본즉 주께서 높이 들린 보좌에 앉으셨는데 그의 옷자락은 성전에 가득하였고 2 스랍들이 모시고 섰는데 각기 여섯 날개가 있어 그 둘로는 자기의 얼굴을 가리었고 그 둘로는 자기의 발을 가리었고 그 둘로는 날며 3 서로 불러 이르되 거룩하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만군의 여호와여 그의 영광이 온 땅에 충만하도다 하더라 4 이같이 화답하는 자의 소리로 말미암아 문지방의 터가 요동하며 성전에 연기가 충만한지라 5 그 때에 내가 말하되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 나는 입술이 부정한 사람이요 나는 입술이 부정한 백성 중에 거주하면서 만군의 여호와이신 왕을 뵈었음이로다 하였더라.
[계4:7~11] 그 첫째 생물은 사자 같고 그 둘째 생물은 송아지 같고 그 셋째 생물은 얼굴이 사람 같고 그 넷째 생물은 날아가는 독수리 같은데 8 네 생물은 각각 여섯 날개를 가졌고 그 안과 주위에는 눈들이 가득하더라 그들이 밤낮 쉬지 않고 이르기를 거룩하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주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여 전에도 계셨고 이제도 계시고 장차 오실 이시라 하고 9 그 생물들이 보좌에 앉으사 세세토록 살아 계시는 이에게 영광과 존귀와 감사를 돌릴 때에 10 이십사 장로들이 보좌에 앉으신 이 앞에 엎드려 세세토록 살아 계시는 이에게 경배하고 자기의 관을 보좌 앞에 드리며 이르되 11 우리 주 하나님이여 영광과 존귀와 권능을 받으시는 것이 합당하오니 주께서 만물을 지으신지라 만물이 주의 뜻대로 있었고 또 지으심을 받았나이다 하더라.
*답: 하나님의 거룩함을 찬양한다. 계시를 보는 사람의 반응이 기록되었다. 그들은 모두 하나님의 임재앞에 사람으로서는 설 수 없다는 것을 드러낸다.
각각의 보좌실 환상에서 가장 먼저 일어나는 일은 천상의 존재들이 하나님의 거룩함을 강조하는 것이다. 이사야의 환상에서 그 장면은 인상적이다. 성전이 연기로 가득 차고 스랍들이 하나님의 거룩함을 선포하는 가운데 '문 기둥'(흠정역)이 흔들린다. 요한의 환상에서도 그룹들이 동일하게 “거룩하다, 거룩하다, 거룩하다”라고 외친다(겔 10:14, 15 참조). 각 선지자는 하나님의 영광이 찬란하게 펼쳐진 장면을 보았다.
그리고 그 장면에 대한 선지자의 반응이 따른다. 이사야는 자신이 입술이 부정한 사람이라고 외치고(사 6:5), 요한은 합당한 자를 찾을 수 없다는 비극적인 진실 앞에 울었다(계 5:4). 하나님의 존귀하신 영광을 직접 대할 때, 우리는 마침내 인간의 형편을 이해하기 시작한다. 우리는 전적으로 무가치하고 합당하지 않으며, 우리에게는 구속자이신 그리스도가 필요하다.
사탄은 하나님이 독선적이고 이기적이며 가혹하다고 주장하며 하나님을 향해 많은 비난을 쏟아냈지만, 하나님의 보좌실을 잠시만 보더라도 사탄의 거짓말은 실체가 드러난다. 그리스도를 참된 모습 그대로 곧 “죽임을 당하신 어린 양”(계 5:12)으로바라볼 때 우리는 아버지의 참된 모습을 그대로 볼 수 있다.
예수님을 봄으로써 아버지가 어떤 분인지 알 수 있다는 것은 얼마나 큰 위로가 되는가(요 14:9). 아버지가 어떤 분이신지에 대한 가장 큰 계시는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서 돌아가신 예수님에게서 볼 수 있다.
그러므로 십자가에서 우리는 두 가지, 곧 우리를 위해 자신을 희생하실만큼 하나님께서 우리를 얼마나 사랑하시는지, 그리고 우리가 십자가를 통해서만 구원받을 수 있는 얼마나 죄 많고 타락한 존재인지를 볼 수 있다.
<교훈> 거룩한 하나님의 보좌실을 볼 때 우리의 악함과 무가치함을 발견하지만 죽임 당하신 어린 양은 아버지의 본모습과 죄인을 어떻게 구하시는지를 알려준다.
<부가설명> 하나님의 보좌실을 선지자들에게 계시로 보여주셨는데, 우리가 하늘에 가서 아버지를 알현할 때도 그럴는지는 모른다. 한가지 분명한 것을 그분 앞에 설 때 우리는 거룩하다는 찬양을 드릴 수밖에 없다는 사실이다. 계시로 보여주시는 것은 계시를 보는 사람이 감당할 수 있을 만큼만 보여주신다. 또 많은 경우 실상보다는 상징적 형상이다. 다니엘서와 계시록에 나타나는 많은 형상들은 다 계시적 상징적 형상이다. 그러므로 성경에 계시로 보고 기록한 모든 형상이 하늘에 실제 모습을 보였는지는 그날에 확인할 수 있지 않을까하는 생각이 든다. 에스겔서의 네 생물이나, 이사야 6장의 스랍이나, 계시록 4장의 네 생물의 모습이 실제로 그렇게 생겼는지 모른다. 계시록 1장에 묘사된 예수님의 형상은 분명히 상직적 계시적 형상이다. 그런 형상을 보여주셔서 그 상징적 의미를 알도록 하신 것이다. 우리가 이사야나 사도요한이 본 하나님의 보좌실의 모습을 그날 우리 눈으로 확인할 때 얼마나 감격스럽겠는가? 핵심은 하나님은 거룩하시고 경배받으시기 합당한 분이시라는 것이다. 그분은 만물을 창조하신 분이시다. 모든 피조물에 경배하는 것은 마땅한 일이다. 우리도 정성을 다하여 찬양하고 경배해야 할 것이다.
5월 9일(금) 더 깊은 연구를 위해
성경은 그리스도만이 우리의 구원을 보장하시기에 합당하신 유일한 분임을 분명히 밝힌다. 그분은 유일하게 죄 없는 인간으로 사셨으며, 아버지의 영광에 온전히 합당한 삶의 유일한 본보기였다. 그분은 흠 없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시며, 이제 우리의 영원한 보호자로서 인류를 대표하여 서 계신다. 동시에 그분은 우리의 죄를 친히 짊어지시고 악에 대한 하나님의 징벌인 심판을 감당하셨다. 요한은 하나님의 보좌 곁에 모인 천상의 존재들의 놀라운 장면을 증언하는 중에 “유대 지파의 사자 다윗의 뿌리가 이겼으니”(계 5:5) 울음을 멈추라는 말을 듣는다.
하나님 자신이신 예수님의 죽음만이 죄의 문제를 해결하기에 합당하다는 사실을 통해 죄가 얼마나 나쁜지, 인류가 얼마나 타락했는지를 생각해 보라. 하나님께서 당신의 신성한 정부의 원칙을 어기지 않고 우리를 구원하실 수 있는 다른 방법이 있었다면 하나님은 분명히 그렇게 하셨을 것이다.
“깨어진 하나님의 율법은 죄인의 생명을 요구하였다. 온 우주에서 사람을 위하여 이 요구를 만족시킬 수 있는 이는 한 분밖에 없었다. 하나님의 율법은 하나님 자신처럼 거룩하므로 하나님과 동등하신 분만이 범법을 속죄할 수 있었다. 그리스도밖에는 아무도 타락한 사람을 율법의 저주에서 속량하여 하늘과 조화시킬 수 없었다. 그리스도께서는 죄책, 그리고 거룩하신 하나님께 매우 가증하므로 아버지와 아들을 틀림없이 분리시킬 죄의 수치를 자진해서 떠맡으실 것이었다. 그리스도께서는 타락한 인류를 구원하시기 위하여 비참의 심연(深淵)에까지 내려가실 것이었다"(부조와 선지자, 63).
함께하는 토의를 위해
1. 요한은 어린 양이 “죽임을 당하신” 것 같은 모습으로 보좌실로 나오시는 것을 보았다. 요한계시록 13:8은 예수님이 창세 이래로 “죽임을 당”하셨다고(흠정역) 알려준다. 우리가 필요로 하기 전에 이미 구원의 계획이 세워져 있었다는 사실을 통해 우리는 하나님에 대해 무엇을 알 수 있는가?
*답: 하나님의 사랑과 자비와 전지하심을 알 수 있다.
2. 많은 무신론자들은 우리가 차갑고 무관심한 우주에 홀로 존재한다고 믿는다. 반면 성경은 하나님이 세상을 너무나 사랑하셔서 이 땅에 오시고 심지어 사람을 위해 죽으셨다고 말한다. 그렇다면 무신론자와 달리 우리는 세상과 그 안에서 우리의 위상을 얼마나 다르게 보아야 하는가? 다시 말해, 십자가의 실재는 우리가 하는 모든 일에 어떤 영향을 미쳐야 하겠는가?
*답: 우리의 존재와 생명으로 하나님께서 계심을 증거하는 삶을 살아야 하지 않겠는가?
3. 그리스도의 삶과 죽음, 부활만이 인류가 구원을 얻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인 이유는 무엇인가? 하나님의 지불하신 대가는 죄가 얼마나 나쁜지에 대해 우리에게 무엇을 말해 주는가?
*답: 그분만이 완전하신 사람으로 오셨기 때문이다. 그분만이 인류를 대속하실 수 있는 생명으로 오셨기 때문이다. 그분이 바로 창조주이신 말씀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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