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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과 창세기의 기초(질문, 대답, 설명) 04/12/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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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김명호 작성일25-04-04 10:42 조회136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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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과 창세기의 기초

(4월 12일 안식일 / 일몰: 오후 7시 4분)

  

연구 범위: 사 40:7, 8; 창 22:1-13; 요 3:16; 계 5:5-10; 고전 15:15-19; 계 12:1-9

 

기억절: “이튿날 요한이 예수께서 자기에게 나아오심을 보고 이르되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요 1:29).

 

현대 성경 예언 해석의 주요 문제, 특히 요한계시록 해석의 문제는 이 책의 아주 오래된 뿌리에 대한 이해 없이 요한계시록을 해석하려 한다는 것이다. 요한은 구약성경에 대한 지식을 전제로 당대 청중들에게 익숙한 개념들을 사용한다. 성경 전체에서 요한계시록에서 연구하려는 본문과 유사한 구절을 찾는 것은 유용한데, 그중 다른 어떤 구절보다 요한계시록을 더 잘 이해할 수 있게 하는 핵심 구절이 있다. 창세기는 특별히 중요한데 이는 세상이 어떻게 죄악의 혼돈 가운데 빠지게 되었는지를 보여주기 때문이다. 요한계시록에 언급된 거의 모든 핵심 개념은 어떤 형태로든 성경의 첫 장들에 나타난다. 

이번 주는 요한계시록의 핵심에 있는 몇 가지 큰 개념을 연구할 것이다. 많은 개념이 있지만 그중 몇 개를 선택해 살펴볼 것이다. 이를 통해서 우리는 요한계시록의 뒤에 숨겨진 오래된 기초를 이해하면 본문에서 수많은 미묘한 의미를 볼 수 있다는 가장 중요한 요점을 이해하게 될 것이다. 각각의 개념들은 인간의 본성과 하나님의 속성, 그리고 우리 우주 가운데 벌어지고 있으며, 우리의 삶에서도 일어나고 있는 싸움의 본질에 대한 중요한 교훈을 제공할 것이다. 

 

학습 목표

깨닫기: 창세기의 개념들은 계시와 예언을 이해하는 중요한 토대를 제공한다. 

느끼기: 예언의 본질은 인류의 문제와 죽음을 해결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이다. 

행하기: 예언이 말하는 끝을 헤아릴 수 없이 깊은 사랑을 신뢰하며 그 위에 굳게 선다. 

 

TMI 위로

2. 모든 것이 변하는 시대 가운데 하나님의 진리는 어떤 속성을 보입니까?(말 3:6) 

*답: 변함이 없다. 

3. 성경의 예언을 이해하는 데 있어서 가장 중요한 열쇠는 무엇입니까?(창 22:2)

*답: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는 것이다.

4. 이삭의 어린 양에 대한 질문에 성경은 어떻게 대답하고 있습니까?(창 22:7)

*답: 하나님께서 자기를 위하여 준비하신다.

5. 우리가 생각하는 죽음과 성경이 말하는 죽음은 어떤 차이가 있습니까?(고전 15:15-19)

*답: 성경의 본질적인 죽음은 존재를 영원히 상실하는 것이다. 

6. 성경이 사탄을 뱀으로 묘사한 것은 어떤 의미가 담겨 있습니까?(계 12:9)

*답: 옛 뱀, 곧 에덴동산에서 여자를 유혹한 그 뱀을 나타낸다. 

 

결론: 요한계시록의 몇 가지 큰 개념은 창세기에 기초한다. 그것은 이후의 성경에서 확대하여 설명되며 더 많은 빛을 준다. 예언을 이해하는 열쇠는 사랑의 본질을 아는 것이며 하나님의 자기희생의 사랑이 예언과 대쟁투의 핵심이다. 하나님이 우리의 대속자인 어린 양이며 이것은 인류의 죽음의 문제에 대해 답을 준다. 이 개념들은 인간의 본성과 하나님의 속성 그리고 대쟁투의 본질에 대한 중요한 교훈을 준다. 

 

4월 6일(일) “첫 번째 언급”의 원칙 

 

대부분의 전공 과정은 일반 개론 수업으로 시작하는데, 이 과정은 해당 주제에 대한 심화 학습의 기초가 되는 광범위하고 기본적인 원칙을 다룬다. 마찬가지로 성경을 연구하다 보면 하나님께서 창세기에 일반 개론 과정을 두시고, 성경 전체를 통해 더 자세히 살펴볼 개념을 창세기에서 소개하신다는 것을 이내 알게 된다. 

일반적으로 성경에서 어떤 개념이나 상징이 처음 언급될 때, 특히 창세기의 첫 장들에서 언급되면 그 개념에 대한 기본적인 이해를 형성하며, 이는 이후에 해당 개념이 어떻게 사용되는지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된다. 

일부 성경학자들은 이것을 '첫 번째 언급의 법칙'이라고 부르지만, 이것은 엄격한 법칙이 아니며 이러한 방식으로 적용되지 않는 것도 많기 때문에 법칙보다는 원칙이라고 부르는 것이 더 적절할 것이다. 일반적인 성경 연구와 성경 예언 모두에서 나타나는 원칙은 하나님께서 기본적인 개념에서 시작하여 시간이 지나면서 점진적으로 그 개념을 확장시키시는 것이다. 이러한 과정은 수년, 심지어 수세기에 걸쳐 진행될 수도 있다.

 

이사야 40:7, 8, 말라기 3:6, 히브리서 13:8을 읽어 보라. 이 구절에서 예언을 바르게 연구하는 데 기초가 되는 어떤 원칙을 이끌어 낼 수 있는가?

[사40:7,8] 풀은 마르고 꽃이 시듦은 여호와의 기운이 그 위에 붊이라 이 백성은 실로 풀이로다 8 풀은 마르고 꽃은 시드나 우리 하나님의 말씀은 영원히 서리라 하라.

[말3:6] 나 여호와는 변하지 아니하나니 그러므로 야곱의 자손들아 너희가 소멸되지 아니하느니라.

[히13:8] 예수 그리스도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시니라.

*답: 하나님의 말씀은 변하지 않는다는 원칙이다.

 

현대사회에서 '진리'는 시간이 지나면서 변할 수 있는 가변적인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대부분의 현대사회는 '진리'라고 말하기 보다는 '진리라고 여기는 것‘이라고 많이 이야기한다. 또는 어떤 경우에는 '진리'라는 개념 자체를 의심스러운 것으로 간주하기도 한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세우시는 진리는 변함이 없다. 

일단 하나님이 당신의 백성에게 진리를 가르치기 시작하면, 동일한 성경 원리나 주제를 반복한다고 해서 그 의미가 바뀌지 않으며 오히려 그 의미에 더 많은 빛이 주어진다는 사실을 믿을 수 있다. 이것은 예언서를 연구하는 데 큰 의미가 있으며 예언을 연구할 때는 많은 핵심 개념이 처음 설명되어 있는 창세기를 잘 이해한 다음, 그 이해의 기초를 토대로 성경 전체를 연구해 나가는 것이 매우 적절하다. 

 

<교훈> 성경이 어떤 개념을 말할 때 기본 개념을 말한 후 그것을 점차 확대하여 설명하는 양상이 나타난다. 이 과정을 통해 우리는 더 많은 빛을 발견할 수 있다. 

 

<부가설명> 성경은 성령의 감동을 받은 사람이 하나님께 받아서 기록한 것이다(벧1:20,21). 그러므로 성경 말씀은 하나님께서 생기를 불어넣은 생명의 말씀이다(딤후3:1). 이런 사실을 하나님의 말씀은 살았다고 계시했다(히4:12). 생명이 있는 것은 그 생명의 생리대로 생활하는 기능이 있다. 성경은 살아있는 하나님의 말씀이다. 그래서 성경은 스스로 살아가는 기능이 있다. 그런데 모든 사람은 아담 안에서 죽은 자다. 여자의 후손으로 오신 예수님 외에는 아담 자손으로는 생명 있는 자가 없다. 성경은 그런 사람들에게 생명을 주기 위하여 주신 하나님의 생명의 말씀이다. 스스로 살아가는 기능이 있는 성경 말씀을 죽은 사람이 자기 의식과 방법으로 연구하려고 하니 살아있는 말씀을 죽이고 있다. 오늘날 신학계나 교회의 현상이 이렇지 않은가? 성경을 올바르게 깨닫기를 진정으로 원하면 성경이 성경을 해석하는 그 원리를 깨달아서 연구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성경을 들고도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못하게 될 것이다. “주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보라 날이 이를지라 내가 기근을 땅에 보내리니 양식이 없어 주림이 아니며 물이 없어 갈함이 아니요 여호와의 말씀을 듣지 못한 기갈이라 사람이 이 바다에서 저 바다까지, 북에서 동까지 비틀거리며 여호와의 말씀을 구하려고 달려 왕래하되 얻지 못하리니 그 날에 아름다운 처녀와 젊은 남자가 다 갈하여 피곤하리라”(암8:11~13).

 

4월 7일(월) 하나님의 사랑을 아는 것 

 

죄의 본성을 물려받았다는 것은 세계에 대한 우리의 인식이 우리의 이기심과 교만으로 오염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는 분명히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의 관점이 아닌 우리 자신의 제한된 관점으로 세상을 바라본다. 그중에서 아마도 “사랑”이라는 개념만큼 죄 많은 인간에 의해 왜곡된 개념은 없을 것이다. 대중문화는 사랑을 다른 사람보다는 자기실현에 초점을 맞춘 것으로 이해하도록 조장하는 경향이 있다. 사랑에 대한 이러한 자기중심적인 접근 방식은 하나님께서 사랑을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이해하기 어렵게 만든다. 

성경 예언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열쇠는 사랑의 본질을 이해하는 것이다. 대쟁투의  핵심 주제는 세상에 존재하는 하나님의 성품에 대한 크나큰 오해에 관한 것이다. 

그래서 엘렌 화잇은 대쟁투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요약하며 대쟁투 총서를 마무리 한다. “온 우주는 깨끗해졌다. 오직 조화와 기쁨의 맥박만이 온 우주의 만물을 통하여 고동친다. 생명과 빛과 환희가 만물을 창조하신 분에게서 끝없이 넓은 우주로 퍼져나간다. 가장 작은 원자로부터 가장 큰 세계에 이르기까지, 만물은 생물계와 무생물계를 막론하고 조금도 흠이 없는 아름다움과 완전한 기쁨으로 하나님은 사랑이시라고 선포한다"(각 시대의 대쟁투, 678). 

 

창세기 22:1-13을 읽어 보라. 성경에서 “사랑”에 대한 첫 번째 언급인 창세기 22:2은 하나님의 사랑의 본질에 대해 우리에게 무엇을 가르쳐 주는가?

[창22:1~13] 그 일 후에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시험하시려고 그를 부르시되 아브라함아 하시니 그가 이르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2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네 아들 네 사랑하는 독자 이삭을 데리고 모리아 땅으로 가서 내가 네게 일러 준 한 산 거기서 그를 번제로 드리라 3 아브라함이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 나귀에 안장을 지우고 두 종과 그의 아들 이삭을 데리고 번제에 쓸 나무를 쪼개어 가지고 떠나 하나님이 자기에게 일러 주신 곳으로 가더니 4 제삼일에 아브라함이 눈을 들어 그 곳을 멀리 바라본지라 5 이에 아브라함이 종들에게 이르되 너희는 나귀와 함께 여기서 기다리라 내가 아이와 함께 저기 가서 예배하고 우리가 너희에게로 돌아오리라 하고 6 아브라함이 이에 번제 나무를 가져다가 그의 아들 이삭에게 지우고 자기는 불과 칼을 손에 들고 두 사람이 동행하더니 7 이삭이 그 아버지 아브라함에게 말하여 이르되 내 아버지여 하니 그가 이르되 내 아들아 내가 여기 있노라 이삭이 이르되 불과 나무는 있거니와 번제할 어린 양은 어디 있나이까 8 아브라함이 이르되 내 아들아 번제할 어린 양은 하나님이 자기를 위하여 친히 준비하시리라 하고 두 사람이 함께 나아가서 9 하나님이 그에게 일러 주신 곳에 이른지라 이에 아브라함이 그 곳에 제단을 쌓고 나무를 벌여 놓고 그의 아들 이삭을 결박하여 제단 나무 위에 놓고 10 손을 내밀어 칼을 잡고 그 아들을 잡으려 하니 11 여호와의 사자가 하늘에서부터 그를 불러 이르시되 아브라함아 아브라함아 하시는지라 아브라함이 이르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하매 12 사자가 이르시되 그 아이에게 네 손을 대지 말라 그에게 아무 일도 하지 말라 네가 네 아들 네 독자까지도 내게 아끼지 아니하였으니 내가 이제야 네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줄을 아노라 13 아브라함이 눈을 들어 살펴본즉 한 숫양이 뒤에 있는데 뿔이 수풀에 걸려 있는지라 아브라함이 가서 그 숫양을 가져다가 아들을 대신하여 번제로 드렸더라.

*답: 하나님의 사랑은 자아 희생적 사랑이라는 것을 드러낸다.

 

때로는 성경에서 개념이 처음 등장하는 곳을 찾는 것 외에도 성경의 각각의 책, 특히 복음서에서 같은 개념이 처음 언급된 곳을 찾는 것이 유용할 수 있다. 마태복음 3:17, 마가복음 1:11, 누가복음 3:22, 요한복음 3:16에서 '사랑'에 대한 첫 번째 언급을 찾을 수 있다. 

예를 들어, 요한복음에서 '사랑'이 처음 언급된 요한복음 3:16은 특히 많은 빛을 비춰준다. 이 구절은 제단 위의 이삭 이야기를 암시하는 것으로 보인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을 향한 믿음이 있었기 때문에 제사로 드릴지라도 하나님께서 아들을 살리실 수 있다는 것을 믿기로 하였다(히 11:19). 그것은 인류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을 미리 보여주는 것이었다. 그분은 “독생자도 아끼지 아니”(창 22:2, 12, 16 참조)하실 만큼 우리를 사랑하셨고, 이후 그분을 죽음에서 다시 살리셨다. 이로서 우리는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이 자기희생의 사랑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교훈> 예언을 이해하는 중요한 열쇠는 사랑의 본질을 이해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사랑은 자기희생의 사랑이며 이것을 밝히는 것이 예언과 대쟁투의 핵심이다. 

 

<부가설명> 세상은 사랑을 달콤한 것이라고 강조하는 것 같다. 물론 모성애는 달리 생각하는 것 같지만. 우정이나 형제우애 같은 사랑은 사랑한다는 일반적 표현에 포함되지 않고 특수 범주로 여기는 것이 아닌지 모르겠다. 사랑하면 일반적으로 남녀간의 사랑을 말하는 경향이 아닌가? 그런 사랑은 달콤할 것이다. 때때로는 짜릿할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랑은 하나님의 희생과 고통이다.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롬5:8). 독생자를 죽게 하는 것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신 하나님의 사랑이다. 고전13:1~3은 “내가 사람의 방언과 천사의 말을 할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소리나는 구리와 울리는 꽹과리가 되고 내가 예언하는 능이 있어 모든 비밀과 모든 지식을 알고 또 산을 옮길 만한 모든 믿음이 있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가 아무것도 아니요 내가 내게 있는 모든 것으로 구제하고 또 내 몸을 불사르게 내어 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게 아무 유익이 없느니라.”라고 계시했다. 가진 모든 것을 구제하고 자기 몸까지 불사르는 희생으로 사랑했는 데도 “사랑이 없으면 아무 유익이 없”다고 했으니 “친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면 이에서 더 큰 사랑이 없다”(요15:13)라고 하신 예수님의 말씀고 충돌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면 예수님의 말씀과 고전13:3의 말씀은 충돌하는 것인가 조화가 되는 것인가? 예수께서 우리를 사랑한 것처럼 서로 사랑하라고 12절에 말씀하셨다. 그것이 예수님의 계명이라고 하셨다(요15:12, 13:34). 예수께서 어떻게 우리를 사랑하셨는가?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시기 위하여 자기 목숨을 주셨다. 그것이 하나님의 사랑이다. 우리도 다른 사람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려는 진정한 뜻으로 사랑을 베풀지 않으면 자기 목숨을 불사르게 내어줘도 생명을 얻는 유익이 없다.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을 올바르게 깨달아야 한다.

 

4월 8일(화) 이삭의 질문: 어린 양은 어디에 있나이까 

 

성경에서 사랑에 대해 처음 말하는 창세기 22장에서 ‘세’(seh, 어린 양, 히브리어)가 처음 언급된다. 어린 양은 요한계시록에서도 가장 자주 나타나는 상징으로, 요한계시록은 예수님을 가리켜 20번 이상 “어린 양”이라고 부른다. 요한계시록의 가장 압도적인 장면 중 하나인 4장과 5장에서 요한이 하나님의 보좌실에 이르는 장면의 중심은 바로 ‘어린 양’이다. 

 

창세기 22:7, 8, 출애굽기 12:3-13, 요한계시록 5:5-10을 읽어 보라. 거의 희생 제물로 드려질 뻔했던 이삭의 이야기는 양이 어떻게 상징적으로 사용되는지를 이해하는데 어떻게 도움이 되는가? 이 이야기는 요한계시록 5장에서 요한이 본 장면과 어떻게 연결되는가? 

[창22:7,8] 이삭이 그 아버지 아브라함에게 말하여 이르되 내 아버지여 하니 그가 이르되 내 아들아 내가 여기 있노라 이삭이 이르되 불과 나무는 있거니와 번제할 어린 양은 어디 있나이까 8 아브라함이 이르되 내 아들아 번제할 어린 양은 하나님이 자기를 위하여 친히 준비하시리라 하고 두 사람이 함께 나아가서,

[출12:3~13] 너희는 이스라엘 온 회중에게 말하여 이르라 이 달 열흘에 너희 각자가 어린 양을 취할지니 각 가족대로 그 식구를 위하여 어린 양을 취하되 4 그 어린 양에 대하여 식구가 너무 적으면 그 집의 이웃과 함께 사람 수를 따라서 하나를 취하며 각 사람이 먹을 수 있는 분량에 따라서 너희 어린 양을 계산할 것이며 5 너희 어린 양은 흠 없고 일 년 된 수컷으로 하되 양이나 염소 중에서 취하고 6 이 달 열나흗날까지 간직하였다가 해 질 때에 이스라엘 회중이 그 양을 잡고 7 그 피를 양을 먹을 집 좌우 문설주와 인방에 바르고 8 그 밤에 그 고기를 불에 구워 무교병과 쓴 나물과 아울러 먹되 9 날것으로나 물에 삶아서 먹지 말고 머리와 다리와 내장을 다 불에 구워 먹고 10 아침까지 남겨두지 말며 아침까지 남은 것은 곧 불사르라 11 너희는 그것을 이렇게 먹을지니 허리에 띠를 띠고 발에 신을 신고 손에 지팡이를 잡고 급히 먹으라 이것이 여호와의 유월절이니라 12 내가 그 밤에 애굽 땅에 두루 다니며 사람이나 짐승을 막론하고 애굽 땅에 있는 모든 처음 난 것을 다 치고 애굽의 모든 신을 내가 심판하리라 나는 여호와라 13 내가 애굽 땅을 칠 때에 그 피가 너희가 사는 집에 있어서 너희를 위하여 표적이 될지라 내가 피를 볼 때에 너희를 넘어가리니 재앙이 너희에게 내려 멸하지 아니하리라.

[5:5~10] 장로 중의 한 사람이 내게 말하되 울지 말라 유대 지파의 사자 다윗의 뿌리가 이겼으니 그 두루마리와 그 일곱 인을 떼시리라 하더라 6 내가 또 보니 보좌와 네 생물과 장로들 사이에 한 어린 양이 서 있는데 일찍이 죽임을 당한 것 같더라 그에게 일곱 뿔과 일곱 눈이 있으니 이 눈들은 온 땅에 보내심을 받은 하나님의 일곱 영이더라 7 그 어린 양이 나아와서 보좌에 앉으신 이의 오른손에서 두루마리를 취하시니라 8 그 두루마리를 취하시매 네 생물과 이십사 장로들이 그 어린 양 앞에 엎드려 각각 거문고와 향이 가득한 금 대접을 가졌으니 이 향은 성도의 기도들이라 9 그들이 새 노래를 불러 이르되 두루마리를 가지시고 그 인봉을 떼기에 합당하시도다 일찍이 죽임을 당하사 각 족속과 방언과 백성과 나라 가운데에서 사람들을 피로 사서 하나님께 드리시고 10 그들로 우리 하나님 앞에서 나라와 제사장들을 삼으셨으니 그들이 땅에서 왕 노릇 하리로다 하더라.

*답: 이삭 대신 숫양이 드려졌고 유월절에 어린양이 드려졌다. 그 희생 제물들은 다 하나님의 어린양이신 예수님의 희생을 표상한다.

 

성경에서 어린 양에 대한 첫 번째 언급은 “어린 양은 어디에 있나이까?"(창 22:7)라고 이삭이 질문하는 장면에서다. 아주 흥미롭게도 성경의 이후 기록은 이 질문에 대해 매우 자세하게 답한다. 구약성경의 나머지 38권은 점점 더 구체적인 내용으로 점진적으로 이삭의 질문의 답을 찾아가는 과정으로 이어진다. 유월절 의식부터 양치기였던 다윗의 초기 직업과 그 이후로 이어지는 일을 통해 전체 내용은 이삭의 질문에 대한 대답으로 볼 수 있는 수많은 메시아 예언으로 가득 차 있다. 이윽고 신약성경에서는 예수께서 육신을 입고 나타나셔서 당신의 백성들 가운데서 사역하시고 마침내 십자가에서 목숨을 희생하심으로 그 질문에 대한 답이 주어진다. 

한편, 요한복음 1:29-34절에서 나타난 어린 양에 대한 첫 번째 언급을 보라. 이보다 더 그 모든 상황이 마치 침례 요한이 이삭의 질문에 직접 대답하는 것처럼 보일 수 없다. 죄인이 회개하고 침례를 받음으로 물속으로 들어가는 것은 죄인의 죽음과 새로운 삶의 시작을 상징한다. 이러한 맥락에서 마태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신 예수님이 갑자기 나타나시고 그분을 알리기 위해 하늘이 열리는 장면을 기록했다.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마 3:17). 하늘에서부터 주어진 여호와의 천사의 소리도 아브라함과 이삭의 문제에 대한 해결책을 어떻게 말하는지 생각해 보라(창 22:11-14). 

모든 실마리를 함께 엮어보면 하나님의 어린 양이신 예수께서 우리의 대속자라는 사실이 분명해진다. 이는 우리가 요한의 계시에 기록된 “죽임당한 어린 양”을 이해하는 데 많은 빛을 비춰준다. 

 

<교훈> 창세기에 주어진 어린 양에 대한 질문에 성경은 어린 양이 우리의 대속자임을 밝힌다. 이 사실은 요한의 계시에 나타난 어린 양을 더 잘 이해하게 해준다. 

 

<부가설명> 죽임당하신 어린양은 이삭 사건 이전에 에덴동산에서 이미 드러났고(창3:21), 아벨이 양의 첫 새끼로 제사드린 데서도 나타났다. 그러나 이삭 사건은 좀 더 분명하고 극적으로 이 표상을 드러냈다. 그것은 다시 유월절 어린양으로 구체화 되었고 성소 봉사의 제물들로 누구든지 알 수 있을만큼 확실하게 드러냈었다. 대속이라는 말은 대신 속한다고 하는 뜻인데, 예수께서 우리를 대신하여 죽으신 것을 뜻하는 말이다. 왜 죽으셔야 하는가? 죄의 삯은 사망이기 때문인가? 그렇다. 교과 저자는 2과 월요일 서론에서 “죄의 본성을 물려받았다는 것은 세계에 대한 우리의 인식이 우리의 이기심과 교만으로 오염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라고 말한다. 이런 이해는 성경이 말하는 죄의 본질을 올바르게 이해하지 못한 표현이다. 고후5:21은 “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하신 자로 우리를 대신하여 죄를 삼으신 것은”이라고 계시했다. 이것은 우리가 죄 자체라는 것을 계시한 것이다. 사람은 죄의 본성을 물려받은 것이 아니라 죄가 된 것이다. “소경의 눈을 뜨게 하시고 죽은 자를 살리셨던 그분이 자기 자신을 제물로 십자가 위에 바치셨다. 이렇게 하신 것은 다 그대를 사랑하기 때문이다. 죄를 짊어지신 그분은 거룩한 공의의 진노를 견디시고 그대를 위하여 죄 그 자체가 되셨다”(DA 755.1). “첫째 아담과의 관계에서 인류가 그에게서 받은 것이란 죄와 사형 선고밖엔 없다”(자녀, 475). 예수님이 죄 자제가 된 것은 그분이 대속해야 할 인류가 죄 자체기 때문이다. 죄는 사망이고 사망은 썩는다. 그래서 모든 사람은 썩어짐의 종이 되어 세상은 썩는 냄새가 진동하는 것이다. 이기심과 교만 등등 이것은 다 썩는 현상일 뿐이다. 이것이 다 불에 타서 재가 되면 새 하늘 새 땅에서 영생할 것이다. 이것이 예수님이 하신 일이고 하시는 일이다. 

 

4월 9일(수) 죽음의 문제 

  

창조주로부터 분리된 세상에서 살아가는 것의 가장 참혹한 점은 모든 삶의 뒷면에 도사리고 있는 죽음이 어느 순간이든지 치고 들어올 준비가 되어 있다는 점이다. 죽음은 우주의 유일한 생명의 근원인 창조주로부터 단절된 우리가 지불해야 하는 형벌, '죄의 삯'이다. 따라서 그 죽음의 현실과 그보다 더 중요한 해결책을 찾는 것은 성경 예언에서 중요한 부분이다. 그 해결책은 오직 예수님과 그분의 죽음과 부활에서만 찾을 수 있다.  

성경에 나타난 죽음에 대한 첫 번째 언급과 그 첫 번째 사건은 죄 문제의 심각성을 이해하도록 돕고 하나님의 해결책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도구를 제공하며 예언의 주요 주제인 죽음에 대해 잘 말해준다. 

 

창세기 2:15-17, 창세기 4:8-15, 고린도전서 15:15-19, 요한계시록 1:18을 읽어 보라. 이 구절은 죽음에 대해 처음 언급한 죽음의 사건을 포함하여 사람이 왜 죽는지, 하나님께서 죽음을 어떻게 보시는지, 그리고 우리의 문제에 대한 그분의 해결책이 무엇인지에 대해 무엇을 말해 주는가? 

[창2:15~17] 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을 이끌어 에덴 동산에 두어 그것을 경작하며 지키게 하시고 16 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에게 명하여 이르시되 동산 각종 나무의 열매는 네가 임의로 먹되 17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으리라 하시니라.

[창4:8~15] 가인이 그의 아우 아벨에게 말하고 그들이 들에 있을 때에 가인이 그의 아우 아벨을 쳐죽이니라 9 여호와께서 가인에게 이르시되 네 아우 아벨이 어디 있느냐 그가 이르되 내가 알지 못하나이다 내가 내 아우를 지키는 자니이까 10 이르시되 네가 무엇을 하였느냐 네 아우의 핏소리가 땅에서부터 내게 호소하느니라 11 땅이 그 입을 벌려 네 손에서부터 네 아우의 피를 받았은즉 네가 땅에서 저주를 받으리니 12 네가 밭을 갈아도 땅이 다시는 그 효력을 네게 주지 아니할 것이요 너는 땅에서 피하며 유리하는 자가 되리라 13 가인이 여호와께 아뢰되 내 죄벌이 지기가 너무 무거우니이다 14 주께서 오늘 이 지면에서 나를 쫓아내시온즉 내가 주의 낯을 뵈옵지 못하리니 내가 땅에서 피하며 유리하는 자가 될지라 무릇 나를 만나는 자마다 나를 죽이겠나이다 15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그렇지 아니하다 가인을 죽이는 자는 벌을 칠 배나 받으리라 하시고 가인에게 표를 주사 그를 만나는 모든 사람에게서 죽임을 면하게 하시니라.

[고전15:15~19] 또 우리가 하나님의 거짓 증인으로 발견되리니 우리가 하나님이 그리스도를 다시 살리셨다고 증언하였음이라 만일 죽은 자가 다시 살아나는 일이 없으면 하나님이 그리스도를 다시 살리지 아니하셨으리라 16 만일 죽은 자가 다시 살아나는 일이 없으면 그리스도도 다시 살아나신 일이 없었을 터이요 17 그리스도께서 다시 살아나신 일이 없으면 너희의 믿음도 헛되고 너희가 여전히 죄 가운데 있을 것이요 18 또한 그리스도 안에서 잠자는 자도 망하였으리니 19 만일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가 바라는 것이 다만 이 세상의 삶뿐이면 모든 사람 가운데 우리가 더욱 불쌍한 자이리라.

*답: 아담이 범죄한 것 때문에 그의 모든 후손이 사망이 되었고 마지막 아담이신 예수께서 아담의 사망을 대신하시고 부활하셨기 때문에 그분 안에서 죄와 사망이 해결된다.

 

사람들은 종종 “죽음도 삶의 일부일 뿐”이라고 말하지만 그것은 거짓말이다. 죽음은 삶과 반대이며, 삶을 파괴하는 것이다. 죽음은 이 땅에서 우리가 경험할 필요가 없었던, 의도치 않은 외부의 침입자이다. 죽음이 우리에게 매우 익숙한 것임에도 불구하고, 인류는 여전히 죽음에는 근본적인 문제가 있다는 것을 집단적으로 깨닫고 있는 것처럼, 죽음에 직면할 때면 우리의 마음은 그것에 여전히 강하게 저항한다. 모든 죽음이 고통스럽지만, 아이의 죽음과 같이 다른 죽음보다 더 비극적으로 느껴지는 경우도 있다. 대부분의 경우에 우리는 부모가 자녀보다 먼저 죽음을 맞이할 것으로 여기며 이를 당연한 만물의 순리처럼 받아들인다. 

하지만 성경에 기록된 첫 번째 죽음은 이러한 예상을 깨뜨린다. 

아담과 하와는 자신의 죽음을 겪기 전에 의로운 아들이 불의한 형에게 살해당하는 죽음의 비극을 먼저 경험했다. 그것은 특히 불의한 죽음이었다. 아벨이 그러했던 것처럼 불의한 자에게 죽임 당하신 의로우신 예수님을 생각해 보라. 그리스도의 죽음보다 더 불공정한 죽음이 있을 수 있겠는가? 아벨의 죽음과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 사이에 또 어떤 유사점을 찾을 수 있겠는가? 아벨의 죽음의 본질은 예수님께서 왜 “사망과 음부[무덤]의 열쇠”를 가지고 계신지, 그리고 하나님께서 그분 안에서 우리에게 무엇을 주시는지 이해하는 데 어떻게 도움이 되는가?

 

<교훈> 죽음은 당연한 순리가 아니며 생명이신 창조주에게서 단절된 고통스런 대가이다. 죄에 빠진 인류가 당면한 죽음과 그 해결책은 예언의 중요한 초점이다. 

 

<부가설명> 죽음 문제는 아담이 지은 죄의 행위 때문에 그의 후손에게 죄의 본성이 유전되는 것이 아니다. 화요일 부가설명에 이미 설명했지만, 다시 성경의 계시를 살펴보자. 하나님께서 아담에게 약속하신 것은 영원한 생명이다(요일2:25). 그러나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 실과를 먹으면 죽는다. 즉 영원한 생명을 잃어버리는 것이다. 아담이 먹었다. 아담에게 준 영생 생명이 없어졌다. 여자도 먹었으므로 똑같이 영생이 없다. 그들은 자녀에게 영생을 줄 씨가 없다. 그날 아담 부부가 죽어야 하지만 생육하고 번성하라고 하신 약속 때문에 그것을 이루기 위하여 그들에게 육체의 생명을 허락하셨으나 한 번 죽는 것이 정해졌다(레17:11, 히9:27). 그래서 사람에게는 생명이 없다. 죽는 것은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생명이 아니다. 다만 사망할 때까지 이어가는 연명일 뿐이다. 그래서 사망이 종신할 때까지 인간은 썩어가는 존재다(엡4:22, 롬8:21). 사람들은 출생하면서 썩을 씨로 출생한다(벧전1:23). 이런 사실을 성경은 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이 죽었다고 선언했다(고전15:22). 선악과를 먹은 이후 세상은 썩는 현상으로 가득하다. 그것이 세상이 말하는 도덕적 악과 죄들이다. 그리고 호흡이 멈추면 흙으로 돌아간다. 예수께서 우리를 대신하여, 더 직접적으로 하면 아담을 대신하여 아담에게 선고한 그 죽음을 죽으셨다. 대속하신 것이다. 그래서 그분이 죄가 되셨다고 한 것이다(고후5:21). 그가 부활하여 새 생명을 드러내어 그분을 믿는 사람들은 그분 안에서 영생한다. 이것은 아담 안에 모든 사람이 죽은 것 같이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사람이 삶을 얻는다고 했다(고전15:22). 사망과 세상의 악 문제에 관하여 성경을 올바르게 알 때 구원과 영생의 생명도 바르게 알게 된다. 

 

4월 10일(목) 뱀 

 

예배를 둘러싼 논쟁은 요한계시록의 핵심 주제이다. 거짓 숭배 제도의 주범이자 선동자는 '용'으로(계 13:2-4), 이 타락한 그룹(cherub)을 뱀으로 묘사한 것은 우연이 아니다. 이것은 뱀이 낙원에 들어와 아담과 하와를 유혹하여 창조주에 대한 반역으로 이끌었던 에덴동산을 말하는 것이 분명하다. 

 

창세기 3:1-5과 요한계시록 12:1-9을 비교해 보라. 이 구절에서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주제는 무엇인가? 창세기의 뱀의 이야기에서 발견되는 세부 사항은, 요한계시록에 언급된 하늘의 전쟁으로 이어진 어떤 쟁점을 이해하는 데 어떻게 도움이 되는가? 

[창3:1~5] 그런데 뱀은 여호와 하나님이 지으신 들짐승 중에 가장 간교하니라 뱀이 여자에게 물어 이르되 하나님이 참으로 너희에게 동산 모든 나무의 열매를 먹지 말라 하시더냐 2 여자가 뱀에게 말하되 동산 나무의 열매를 우리가 먹을 수 있으나 3 동산 중앙에 있는 나무의 열매는 하나님의 말씀에 너희는 먹지도 말고 만지지도 말라 너희가 죽을까 하노라 하셨느니라 4 뱀이 여자에게 이르되 너희가 결코 죽지 아니하리라 5 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에는 너희 눈이 밝아져 하나님과 같이 되어 선악을 알 줄 하나님이 아심이니라.

[계12:1~9] 하늘에 큰 이적이 보이니 해를 옷 입은 한 여자가 있는데 그 발 아래에는 달이 있고 그 머리에는 열두 별의 관을 썼더라 2 이 여자가 아이를 배어 해산하게 되매 아파서 애를 쓰며 부르짖더라 3 하늘에 또 다른 이적이 보이니 보라 한 큰 붉은 용이 있어 머리가 일곱이요 뿔이 열이라 그 여러 머리에 일곱 왕관이 있는데 4 그 꼬리가 하늘의 별 삼분의 일을 끌어다가 땅에 던지더라 용이 해산하려는 여자 앞에서 그가 해산하면 그 아이를 삼키고자 하더니 5 여자가 아들을 낳으니 이는 장차 철장으로 만국을 다스릴 남자라 그 아이를 하나님 앞과 그 보좌 앞으로 올려가더라 6 그 여자가 광야로 도망하매 거기서 천이백육십 일 동안 그를 양육하기 위하여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곳이 있더라 7 하늘에 전쟁이 있으니 미가엘과 그의 사자들이 용과 더불어 싸울새 용과 그의 사자들도 싸우나 8 이기지 못하여 다시 하늘에서 그들이 있을 곳을 얻지 못한지라 9 큰 용이 내쫓기니 옛 뱀 곧 마귀라고도 하고 사탄이라고도 하며 온 천하를 꾀는 자라 그가 땅으로 내쫓기니 그의 사자들도 그와 함께 내쫓기니라.

*답: 뱀, 여자, 하나님과 같이 됨, 여자, 용, 아들, 고통 배역이 있다. 에덴동산 사건을 계시록의 전쟁의 실마리가 된다. 성경 전체는 이 실마리의 진행과 해석이다.

 

성경에는 사탄이 온 세상을 잘못된 길로 이끄는 두 개의 기록이 있다. 창세기에 나타난 오직 두 사람만 존재했던 때의 일과, 요한계시록 12장과 13장에서 사탄이 “온 천하를 꾀는 자”(계 12:9)로서 바다 짐승의 권세에 “온 땅”이 놀라며 따르도록 능력을 부여하는 자로 등장하는(계 13:2, 3) 때의 기록이다. 이러한 대쟁투의 변하지 않는 본질은 성경 예언에서 발견되는 주제 중 하나이다. 하나님의 성품과 말씀은 변하지 않으며, 마귀의 욕망도 마찬가지다. 

다행히도 대쟁투의 본질은 변하지 않고, 성경 예언에 기록된 분명한 참조점이 있기 때문에 그리스도인들은 세상의 추이를 분별하며 영적 함정이 어디에 숨어 있는지 알 수 있다. 하나님은 항상 하나님이시며, 마귀도 항상 마귀이다. 사탄은 수천 가지 다른 모습으로 나타날 수 있지만, 수천 년간 이어진 타락한 인류 역사와 요한계시록에 그려진 예언의 각본을 종합해 보면 사탄은 에덴에서 사용했던 전략에서 결코 벗어나지 않는다는 것을 볼 수 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지혜와 분별력을 약속하셨으며(약 1:5), 우리가 성경 말씀의 확신으로 무장한다면 마귀의 거짓말에 속을 필요가 없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많은 사람이 그런 거짓말에 속아 넘어갔고, 앞으로도 더 많은 사람들, 즉 대다수가 그렇게 속게 될 것이다. 

 

<교훈> 사탄은 여러 모습으로 시험하지만, 역사, 예언을 종합해 보면 에덴에서 사용한 전략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말씀을 믿고 준비할 때 꾀임에 속지 않을 것이다. 

 

<부가설명> 사탄은 뱀의 탈을 쓰고 여자에게 접근했다. 부조와 선지자에 의하면 뱀은 들짐승 중에 가장 아름다운 동물이었다. 사탄은 그런 뱀을 매개로 삼았다. 이것은 사탄이 자신을 광명한 천사로 가장하는 수법과 다를 것이 없다(고후11:14). 에덴동산에서 뱀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 이야기는 입밖에도 내지 않았다. 사람들은 이런 교활한 꾀에 속아 마치 뱀이 선악과를 억으라고 직접 말한 줄 생각하는 것을 많이 보았다. 사탄은 하나님의 말씀을 부인하도록 한 것이다. 자세히 읽지 않아도 창세기 3장에서 뱀이 한 말은 하나님의 말씀을 부인하게 한 것임을 알 수 있다. 지금도 사탄은 아주 교활하게 사람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부인하도록 이끈다. 그것도 교회 안에서 그렇게 한다. 교회 밖의 세계는 하나님의 말씀과 상관없이 살기 때문에 굳이 그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부인하는 유혹을 할 필요가 없다. 계시록에 기록된 마지막 때 사건에도 결국 하나님의 말씀을 온전히 따르지 못하도록 하는 전략이다. 그렇다고 다 부인하게 하는 것이 아니다. 교묘하고 그럴듯하게 가장 핵심되는 진리를 바르게 보지 못하게 하고 왜곡되게 주장하게 한다. 철저히 말씀에 굳게 서서 기록한 말씀 밖으로 나가지 말고(고전4:6) 오직 말씀 안에서 사탄을 대적하고 주님께 충성하는 성도들이 되어야 할 것이다.

 

4월 11일(금) 더 깊은 연구를 위해

 

사도행적 57장 “계시”를 읽어 보라. 

많은 세계 종교가 관념을 다루는 정도인 것과 확연히 다르게 기독교가 말하는 사상은 확고한 역사적 사건에 기반을 두고 있다. 성경은 역사 가운데 하나님께서 인류와 상호작용한 이야기이며, 수천 년 동안의 그러한 상호작용을 연구함으로써 우리는 하나님의 변함없는 성품에 대해 많은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나 때때로 그리스도인들은 들었던 말을 또 듣는 것에 지쳤다고 불평한다. 우리의 독특한 예언 기별이 공개적으로 선포될 때, 우리는 때로 이미 들었기 때문에 새롭게 배울 것이 없다고 생각하기도 한다. 

그러나 우리의 기별이 변함없이 일관적이라는 사실이 그것이 단순하거나 도전적이지 않다는 의미는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로 무한한 하나님의 마음에서 우리에게 전해지는 지식을 공부하다 보면, 끝을 헤아릴 수 없을 만큼 그 주제가 깊다는 것을 곧 깨닫게 된다. 

엘렌 화잇은 요한계시록이 기록된 것은 그리스도교를 역사적 기별 위에 영원히 굳게 세우기 위한 것이라고 말했다. “젊은 일꾼들 가운데 일부는 반복된 진리에 싫증을 느끼게 되었다. 신기하고 놀라운 어떤 것들에 대한 갈망으로 그들은 새로운 형태의 교리를 도입하고자 하였다"(사도행적, 580). 그런 점에서 이 책은 단순히 미래에 대한 책일 뿐 아니라 과거에 관한 책이기도 하다. 요한계시록은 우리가 새로운 것을 추구하려는 욕망에 속아 길을 잃지 않고, 역사적 신앙 위에 굳게 서게 하기 위해 기록되었다. 

 

함께하는 토의를 위해 

1. 성경은 언제나 새로운 정보와 이해를 제공하는 마르지 않는 샘이다. 이미 주어진 진리 안에 굳게 서는 것의 중요성과 새로운 것을 배우려는 열망 사이에서 우리는 어떻게 균형을 잡을 수 있겠는가?

*답: 예언을 올바르게 연구할 때 가능하다. 성경 전체는 예언이다(벧후1:20,21).

2. 교회는 예언에 대한 새로운 해석에 어떻게 대응해야 하는가? 분명 우리에게 항상 배워야 할 새로운 것이 있다는 것을 알지만, 그 새로운 빛이 요긴한 것인지 아니면 단지 유행에 불과하거나, 심지어 오류인지 어떻게 분별할 수 있겠는가?

*답: 성경 예언의 진리를 올바르게 깨달을 때 분별할 수 있다. 

3. 제2차 세계대전 가운데 태평양에서 죽어가던 한 해군이 동료에게 “나는 고아인데, 내가 죽으면 누가 나를 기억이나 하겠는가?"라며 탄식했다. 친구는 “내가 항상 너를 기억할 거야.”라고 대답했다. 전우의 말이 아무리 따듯하고 좋은 뜻일지라도 조만간 그도 죽을 것이고, 그러면 더 이상 아무도 그에 대해 기억하는 사람이 없을 것이다. 이 이야기는 궁극적으로 우리의 결국이 죽음일 뿐이라면 우리의 삶이 얼마나 허무하고 무의미한지를 깨닫는 데 어떻게 도움이 되는가?

*답: 우리의 흔적은 기억에서 완전히 사라지는 서글픔을 느끼게 된다. 창조주 하나님은 사람을 그렇게 버려두지 않는 사랑의 하나님이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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