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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2과 사랑과 공의(公義): 가장 큰 두 계명(誡命) -(핵심 Q&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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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이봉주 작성일25-03-17 00:55 조회688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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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2과 사랑과 공의(公義): 가장 큰 두 계명(誡命) 

       (03월 22일 (안) / 일몰: 오후 6시 45분)   

 

<기억절(記憶節)>

 “누구든지 하나님을 사랑하노라 하고 그 형제를 미워하면 이는 거짓말하는 자니 보는바 그 형제를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보지 못하는바 하나님을 사랑할 수 없느니라”(요일 4:20). 

 

<개요(槪要)>

◎.가장 큰 두 계명(誡命)은 (①.하나님 사랑. ②.이웃 사랑.)

  하나님과 이웃에 대한 사랑은 모든 나머지 계명(誡命)들의 셈과 근원(根源)이 되며, 그 밖의 것들은 자연(自然)히 이에 뒤따르게 된다. 즉 십계명(十誡命) 그 자체는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주시는 “사랑과 공의(公義)가 농축(濃縮)된 즉(卽) 핵심(核心)으로 요약(要約)된 것이다.

 

⑴.그 질문은(마태 22:34~36), "선생님이여, 율법중(律法中)에 어느 계명(誡命)이 크니이까?"였다. 

  이것은 말할 필요도 없는 질문(質問)으로써, 하나님의 율법(律法)의 모든 일은 큰 것들이며(호 8:12), 또한 위로부터 오는 지혜(智慧)는 율법(律法)에서 편파적(偏頗的)이 아니며(말 2:9) 모두가 서로 관련성(關聯性)을 맺고 있다. 

 

⑵.그 의도(意圖)는 그를(예수님을) 시험(試驗)하거나 그를 미혹(迷惑)케 하려는 것이었다. 

다시 말하면 그의(예수님) 지식(知識)보다는 그의 판단력(判斷力)을 시험(試驗)하기 위(爲)함이었다. 

 

⑶.명백(明白)한 질문에 대해 답(答)하는 것은 위대(偉大)한 사람의 명예(名譽)를 손상(損傷)시키는 일은 아니다. 이제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에게 다른 사람에 대해 배타적(排他的)인 것이 가장 큰 계명(誡命)이 아니라 다른 사람에 대해 포괄적(包括的)인 것이 가장 큰 계명(誡命)임을 일깨워 주고 있다.

 

⑷.모든 율법(律法)은 "사랑"이란 한 단어(單語)로 완성(完成)되었다. 

  (로마서 13:10 절) 모든 순종(順從)은 애정(愛情)에서 비롯되며, 사랑이 맨 처음으로 행(行)해지지 않는다면 종교적(宗敎的)으로 어떤 것도 올바르게 행(行)해질 수 없다. 사랑은 주요(主要)한 애정(愛情)으로써, 나머지 것에 대해 법(法)을 제시(提示)하며 근거(根據)를 제시(提示)한다.

 

⑸.사랑은 주요한 요새(fort)로써 하나님을 위해 맨 먼저 굳게 지켜져야 하며 수비(守備)되어야만 한다. 사람은 사랑은 위해 준비된 피조물(被造物)이다. 그러므로 "사랑의 법"은 마음에 기록된 법(法)이다. 사랑은 짧으면서도 달콤한 단어(單語)이다. 만일 사랑이 "율법의 완성"이라면 정녕 계명(誡命)의 멍에는 매우 쉬운 것이다. 사랑은 영혼(靈魂)의 휴식(休息)이며 만족(滿足)이다. 만일 우리가 이 좋은 옛길로 걸어간다면 우리는 휴식(休息)을 찾게 될 것이다.

 

⑹."하나님의 사랑"은 모든 계명(誡命) 중에서 크고 첫째 되는 계명(誡命)이며, 첫 돌비의 모든 계명의 총합(總合)이다. 

 

⑺.사랑의 적절(適切)한 행동은 만족(滿足)을 주기 때문에 선(善)은 그것의 적절한 대상(對象)이 된다. 무한(無限)히, 근원적(根源的)으로, 영원히 선(善)하신 하나님은 맨 처음으로 사랑을 받으셔야만 하며, 오직 하나님 이외에는 누구도 사랑을 받을 수 없고 오직 그만을 사랑하여야만 한다. "사랑"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요구(要求)하시는 크고 첫째 되는 일이다. 따라서 사랑은 우리가 그에게 드려야 할 크고 첫째 되는 일이 되는 것이다. 

 

⑻.하나님을 우리의 하나님으로 사랑할 것. "네 주 하나님"을 너 자신의 하나님으로 "사랑하라." 제 일 계명(誡命)은 "다른 신(神)을 두지 말라"이다. 이것은 우리가 그를 우리의 하나님으로 삼아야 하며 우리의 사랑을 그에게 드려야 할 것을 의미(意味)하고 있다.

 

⑼.해와 달을 자신들의 신(神)으로 삼은 자들은 그들을 사랑하였다(렘 8:2; 삿 18:24). 하나님을 우리의 하나님으로 사랑하는 것은 그가 우리의 하나님, 우리의 창조자(創造者), 소유자(所有者), 지배자(支配者)가 되시기 때문에 사랑하는 것이며, 우리의 하나님이신 그에게 순종(順從)하고 신뢰(信賴)하는 것이다. 우리는 우리와 화목(和睦)하시고 우리와 더불어 계약(契約)을 맺으신 하나님을 사랑해야만 한다. 그것이 곧 "네 하나님"이시라는 사실(寫實)의 근거(根據)이다.

 

⑽."우리 이웃을 우리의 몸과 같이 사랑하는 것"은 "둘째 되는" 가장 큰 계명(誡命)이다(마태 22:39 절). "둘째는 그(첫째)와 같으니라." 그것은 첫째 계명(誡命)과 같이 둘째 돌비에 새긴 모든 계명을 총괄(總括)한 것이다. 둘째가 그와 같은 첫째 것에 근거(根據)되어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보이는 형제(兄弟)를 올바르게 사랑하는 것은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본보기와 증거(證據)가 된다. (요일 4:20).

 

(03월 16일) (일) 가장 큰 두 계명(誡命) 

 

(Q)~가장 큰 두 계명(誡命)을 성경(聖經)에서는 무엇이라고 말씀하고 계시며, 하나님은 우리가 무엇에 초점(焦點)을 맞추고 살기를 원(願)하십니까? (마태복음 22:34~40)

 

(A)~<어느 계명(誡命)이 크니이까. (마태 22:36)이 질문 자체(質問自體)는 근본적(根本的)인 원칙(原則)을 다루고 있지만, 여기에서는 모든 율법(律法)의 계명(誡命)들을 중요(重要)도에 따라 순서대로 배열(配列·排列)하려는 랍비들의 시도(試圖) 때문에 제기(提起)되었을 것이다. 

 

두 계명(誡命)이 요구(要求)하는 것이 상충(相衝)되는 것처럼 보이는 경우, “더 큰” 계명(誡命)으로 여겨지는 것이 우선(于先)하고 그래서 “더 작은” 계명(誡命)을 위반(違反)한 책임을 면제(免除)해 주었다. (마태 5:19 참조). 여기서 “크다”라는 말은 실제로는 “가장 크다”를 의미(意味)한다. 바리새인들은 십계명(十誡命)중에서 처음 네 계명(誡命)을 나중의 여섯 계명보다 더 중요(重要)하다고 높였고, 결과적(結果的)으로 그들은 그것이 실제적인 신앙 문제(信仰問題)로 대두(擡頭)되었을 때에는 실패(失敗)했다.>

 

⑴.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것은 세상 사물(世上事物)을 더 귀(貴)하게 여길 위험(危險)에서 건지고, 인간의 성품(性稟)을 완성(完成)하기 위해 사랑으로 말씀하신 온 율법(律法)과 선지자(先知者)의 강령(綱領)이다. 

 

⑵.(하나님을 사랑하라). 사람이 그리스도의 능력(能力)과 은혜(恩惠)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율법의 계율(戒律)들을 지키기 시작하고자 한다면 그 이전에 반드시 마음속에 사랑이 있어야 한다. (참조 롬 8:3~4). 사랑 없는 순종(順從)은 아무 소용이 없을뿐더러 불가능(不可能)한 것이다. 그러나 사랑이 현존(現存)하는 곳에서 사람은 하나님의 계명(誡命)들에 표현(表現)된 하나님의 뜻에 조화(調和)되도록 삶을 바로잡기 시작(始作)할 것이다. (참조 요 14:15; 15:10). 

 

⑶.(네 이웃을…사랑하라). 예수는 여기에서 동료(同僚) 이스라엘 사람들을 “이웃”으로 언급(言及)하고 있는 (레 19:18 절)을 인용(引用)한다. 그러나 예수는 “이웃”의 정의(正義)를 확장(擴張)하여 도움이 필요한 모든 이들을 포함(包含)시켰다. (참조 눅 10:29~37). 하나님과 사람을 향(向)한 사랑의 법(法)은 결코 새로운 것이 아니었다. 예수가 최초로 “사람의 온전한 의무(義務)”를 요약(要約)하면서 (신 6:4~5절) (레 19:18 절)의 사상(思想)을 하나로 묶었지만, ‘미가’도 그런 사상(思想)에 아주 근접(近接)해 있었다. (참조 미가 6:8). 

 

⑷.사람은 하나님과 동료(同僚) 사람들과의 관계(關係)에서 자기에게 부과(賦課)된 의무(義務)와는 상관(相關)없이 자신을 먼저 챙기려는 타고난 성향(性向)이 있다. 동료(同僚)를 대할 때 완전히 이타적(利他的)으로 되기 위해서는 반드시 먼저 하나님을 최고(最高)로 사랑해야 한다. 바로 이것이 올바른 모든 행실(行實)의 근원(根源)이다.

 

⑸.예수님은 여기에 선언(宣言)된 위대(偉大)한 두 원칙(原則) 즉 “하나님을 사랑하고” “사람을 사랑하는” 것에 대한 설명(說明)보다 덜하지도 더하지도 않은 것이 구약(舊約)이라는 점을 단언(斷言)하고 있다. 예수님의 선언(宣言)에 대한 “율법사(律法司)”의 대꾸에 관해서는 (막 12:32)을 참조). 

 

⑹.하나님 율법(律法)의 요구(要求)는 하나님을 최고(最高)로 사랑하고 그 이웃을 자기의 몸같이 사랑하라는 것이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恩惠)로 이를 온전히 행(行)할 때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완전(完全)해질 것이다. (편지 11, 1892).

 

⑺.(하나님 사랑 & 이웃 사랑)이 두 계명(誡命)에 도덕적 존재(道德的存在)의 모든 관심(關心)과 의무(義務)가 달려 있다. 남들이 자기에게 해주기를 바라는 대로 남들에 대한 의무(義務)를 다하는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자신을 그들에게 나타내실 수 있는 처지(立場)에까지 이르렀다. 그들은 그분께 인정(認定)을 받게 될 것이다. 그들은 사랑 안에 완전(完全)하여졌으며, 그들의 수고(受苦)와 기도(祈禱)는 헛되지 아니할 것이다”

 

⑻.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사랑과 공의(公義)”를 증진(增進)시키기 위해 개인적(個人的)으로나 공동체(共同體)로서 무엇을 할 수 있을지 생각(生覺)해 보려면 먼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명령(命令)하신 것에 초점(焦點)을 맞추는 것에서부터 시작(始作)하는 것이 적절(適切)하다. 

 

⑼.“그리스도께서는 그 관원으로 하여금 그가 그리스도인의 성품을 완성할 수 있는 곳에 도달할 수 있는 유일한 조건을 말씀하셨다. (마태 19:21~22) 예수의 말씀은 엄격(嚴格)하고 가혹(苛酷)한 것처럼 보였지만 그것은 지혜(智慧)의 말씀이었다. 이 말씀을 받아들이고 순종(順從)하는 것만이 관원(官員)에게 있어서 유일(唯一)한 구원(救援)의 희망(希望)이었다.

 

⑽.하나님께서 요구(要求)하시는 것에서 조금이라도 물러가는 것은 도덕적(道德的)인 능력(能力)과 효능(效能)들을 감소(減少)시키는 것을 의미(意味)한다. 그것은 이 세상 사물(事物)을 귀중(貴重)히 여기게 되면, 그것들이 아무리 불확실(不確實)하고 사소(些少)할지라도 결국(結局)에는 마음을 모두 빼앗고 말 것이기 때문이다". (DA, 520). 

 

(03월 17일) (월) <가장 큰 죄(罪) 두 가지>    

 

(Q)~구약(舊約)이 강조(强調)하는 두 가지 큰 죄(罪)는 어떤 것이며, 그 죄(罪)가 미치는 영향(影響)과 잘못은 어떤 것입니까? (신명기 6:5, 시편 135:13~19, 스가랴 7:9~12, 요일 4:20~21) 

 

(A)~<예수께서 말씀하신 가장 큰 두 계명(誡命)은 하나님에 대한 사랑과 서로에 대한 사랑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사랑하고 서로 사랑하라는 두 가지 큰 계명을 저버리는 것이 가장 큰 죄(罪) 두 가지인 것이다.>

 

⑴.(시편 135:115~18절)은 우상(偶像)에 대하여 설명(說明)하고 있다. 즉 우상 숭배(偶像崇拜)란 하나님이 있을 자리에 두는 것이 우상 숭배(偶像崇拜)인 것이다. 하나님을 사랑하지 못하는 자(者)는 이웃을 사랑할 수가 없으며 거꾸로 이웃을 사랑하지 않는 자(者)는 하나님을 사랑할 수가 없다. 이 두 가지를 하지 않고 저버리는 것이 두 가지 큰 죄(罪)인 것이다.

 

⑵.하나님의 백성들이 우상 숭배(偶像崇拜)와 모든 거짓된 예배 행위(禮拜行爲)에 대해서 무장(武裝)하도록 하는 것이다.

 

⑶.(우상 숭배(偶像崇拜)는 저희가 만든 신(神)들이었다. 그러므로 그들은 아무런 힘도 가질 수 없으며 수공자(手工者)들이 만드는 것뿐이다. 수공자(手工者)들이 우상(偶像)에게서 무슨 능력을 받을 수 있겠는가? 우상(偶像)은 사람의 수공물(手工物)이라. 우상(偶像)에게 주어졌다고 상상(想像)되는 신성(神性)도 인간의 공상(空想)과 생각(生覺)의 피조물(被造物)에 지나지 않는다.

 

⑷.우상(偶像)들은 동물(動物)의 형체(形體)를 가졌지만 작은 행동(行動)도 할 수 없고 동물적(動物的)인 생활중(生活中)에 가장 적은 행위(行爲)도 할 수 없다. 그들은 "보지 못하며, 듣지 못하며, 말하지 못하며, 아무 기식(氣息)도 할 수 없다.' 우상에게 "눈과 귀와 입과 목구멍"을 만들어 넣은 것은 하나의 조롱(嘲弄)거리였다. 사람들은 거짓 신상(神像)에서 어떤 선(善)한 것을 기대(期待)하기 위해 합리적(合理的)인 피조물(被造物)로 투명(透明)해 놓고 어떻게 하는가를 보려고 했다.

 

⑸.우상숭배자(偶像崇拜者)들은 우상(偶像)과 같이 미련(未練)하고 무감각(無感覺)하다. 섬기기 위해서 만드는 자(者)들이나 우상(偶像)을 신뢰(信賴)하는 자(者)들이나 모두 그와 같을 것이다(시 135:18절). 감정(感情)과 무감각(無感覺)의 대상(對象)인 그러한 신(神)들을 예배(禮拜)하는 것은 예배자(禮拜者)들을 감정적(感情的)이며 미련(未練)하게 만들었다. 영(靈)이신 하나님을 예배(禮拜)하는 것은 우리를 영적(靈的)이며 지혜(智慧)롭게 되게 한다.

 

⑹.모든 영광(榮光)을 하나님께 돌려야 할 것이다. "여호와는 찬송(讚頌)을 받을지어다." 찬사(讚辭)는 "시온에서" 일어나는 것이다. 하나님이 지은 모든 것이 그를 찬송(讚頌)하며 그의 성도(聖徒)들은 그를 송축(頌祝)한다. 그들은 찬사(讚辭)를 표하기 위하여 멀리 갈 필요가 없다. 

 

⑺.그리스도교(敎)는 사람의 존재자체(存在自體)와 마음, 애정(愛情), 능력(能力) 등 그가 가진 모든 것을 요구(要求)한다. (살전 5:23). 여기서 “마음”으로 번역(飜譯)된 단어(單語)는 일반적(一般的)으로 동기(動機), 애정(愛情), 감정(感情), 욕구(慾求), 의지(意志) 등을 일컫는 용어(用語)이다. 

 

⑻.마음은 행동(行動)의 원천(源泉)이며 생각(生覺)과 감정(感情)의 중심(中心)이다. (출 31:6; 36:2; 대하 9:23; 전도서 2:23). “성품(性稟)”(soul)으로 번역된 단어는 근본적(根本的)으로 사람 안에 있는, 생명을 불어넣는 원리(原理)를 나타내지만, 신체적 욕구(身體的慾求)와 갈망(渴望)까지도 포함(包含)한다. (참조 민 21:5). (잠언 23:2과, 전도서 6:7절)에서는 이 단어(單語)를 “탐식(貪食)”으로 번역(飜譯)하였다.

 

⑼.<사랑하라(마태복음 22:37~39)>~여기서 “사랑하다”로 번역(飜譯)된 히브리어는 “갈망(渴望)”, “애정(愛情)”, “경향(傾向)” 등, 영혼(靈魂)과 영혼(靈魂) 사이의 더욱 친밀한 결합(結合)을 의미(意味)하는 일반적(一般的)인 용어(用語)이다. 

 

하나님과 믿는 자(者)들과의 관계(關係)는 사랑에 기초(基礎)되어 있다. (요일 4:19). 또한, 사랑은 그분의 율법의 근본적(根本的)인 원칙(原則)이다. (막 12:9, 30). 온전히 사랑하는 것은 곧 전심(全心)으로 순종(順從)하는 것을 의미한다. (요 14:15; 15:10)

 

⑽.하나님께서 사랑으로 진노(震怒)하시는 일은 우상 숭배(偶像崇拜)만 아니라 그것이 개인적(個人的)이든 집단적(集團的)이든 하나님의 백성을 부당(不當)하게 대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에 불의(不義)에 분노(憤怒)하신다.

 

(03월 18일) (화) <정의(正義)를 사랑하시는 하나님>  

 

(Q)~(시편 82편). 이 시편(詩篇)은 이 세상(世上)의 정의(正義)에 대한 하나님의 관심(關心)을 어떻게 표현하고 있으며, 이것은 오늘날 우리에게 어떤 의미가 있습니까? (시편 82:1~8)

 

(A)~<정의(正義)는 성경(聖經)의 부수적(附隨的)인 관심사(關心事)가 아니라 구약성경 전체(舊約聖經全體)에서 나타나는 선지자(先知者)들의 기별(奇別)이며, 예수님께서 육신(肉身)을 입고 이 땅에 오셨을 때 하신 말씀의 핵심(核心)이다.> 

 

⑴.하나님은 공의(公義)와 자비(慈悲)와 사랑을 존중(尊重)하지만(시 11:7; 미 6:8), 형식적(形式的)인 예배(禮拜)는 단호히 거절(拒絶)하신다. (참조 1:11; 딤후 3:5; 요 4:23~24). 오직 “손이 깨끗하며 마음이 청결(淸潔)하며”, 올곧게 행(行)하며, 의(義)를 행하며, 마음속에 있는 진실을 말하는 자(者)들만이 하나님의 “성산(聖山)”에 “거(居)하”게 될 것이다. (시 24:3~5; 15:1~5; 참조 마 7:21~27). 

 

⑵.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섭리로 되는 일을 통하여 또는 사람의 마음에 미치는 성신의 감화를 통하여 우리에게 말씀하신다. 우리는 우리의 사정과 환경 가운데서 또는 날마다 우리의 주위에서 일어나는 변환(變換) 가운데서 그것을 깨달으려고 우리의 마음을 열기만 하면 귀중한 교훈을 찾을 수 있는 것이다. 하나님의 섭리하시는 바를 살핀 시편 기자는 말하기를 “세상에 여호와의 인자하심이 충만하도다”(시 33:5). “지혜 있는 자들은 이 일에 주의하고 여호와의 인자하심을 깨달으리로다”(시 107:43)라고 하였다. (SC 87)

 

⑶.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말씀(성경)으로 우리에게 이르신다. 우리는 성경에서 하나님의 품성과 하나님이 인류를 상대하시는 방법과 구속 사업들이 분명히 드러나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또 이 성경 가운데는 부조(父祖)들과 선지자들과 다른 성인들의 역사가 우리 앞에 밝히 드러나 있다. 저들도 “우리와 성정이 같은 사람”(약 5:17)이었다. 

 

☞. 우리는 저들이 우리가 당한 낙담 가운데서 어떻게 분투(奮鬪)한 것과 또 어떻게 우리처럼 시험에 패(敗)하였으나 다시 용기를 얻어 하나님의 은혜를 힘입어 승리한 것을 본다. 이것을 봄으로 의를 얻으려고 애쓰는 우리는 용기를 얻게 되는 것이다. 

 

☞. 우리가 성경에서 저들이 당한 귀한 경험과 저들이 누린 빛과 사랑과 축복에 대하여 또한 저들이 받은 은혜로 이룬 사적에 대하여 읽을 때 저들을 감동하게 한 그와 같은 정신이 우리의 마음 가운데 저들에게 지지 않겠다는 거룩한 경쟁심(競爭心)을 일으키고 또 저들과 같은 품성을 가지고자 하는 욕망(저들과 같이 하나님과 동행하고자 하는 욕망(欲望))을 일으킬 것이다. (SC 87) 

 

⑷.백성들은 참된 경건(敬虔)함이 없는 표면상(表面上)의 의식 준수(儀式遵守)는 무가치(無價値)하다는 사실을 잊었던 것으로 보인다. 선지자(先知者)들의 주요(主要)한 직무(職務)들 가운데 하나는 내적(內的)인 품성(稟性)과 순종(順從)을 단지 표면상(表面上)의 종교적(宗敎的)인 행위(行爲)로 대치(代置)할 수 없다는 점을 백성에게 가르치는 일이었다. (삼상 15:22; 시 51:16, 17; 사 1:11~17; 호 6:6; 렘 6:20; 7:3~7; 요 4:23~24). 

 

⑸.하나님께서는 그들의 물질(物質)이 아니라 그들의 마음을, 그들의 경배(敬拜)뿐 아니라 그들의 의지(意志)도, 그들의 예배(禮拜)뿐 아니라 그들의 영혼(靈魂)도 원(願)하셨다. 

 

⑹.여호와께서는 그때에도 당신의 요구를 잘 잊어버리는 백성의 기억력에 당신의 교훈을 위탁하지 않으시고 그것을 돌비에 기록하셨다. 그분은 이방인(異邦人)의 전통(傳統)과 당신의 거룩한 교훈이 섞이거나 인간의 의식(儀式)이나 습관(習慣)과 그분의 요구가 혼동(混同)될 모든 가능성을 이스라엘 백성들로부터 제거(除去)해 버리려 하셨다. 그러나 그분은 그들에게 십계명(十誡命)을 주신 것으로 그치지 않으셨다. 

 

⑺.백성들은 저희가 그처럼 쉽게 타락(墮落)한다는 것을 스스로 나타내 보였으므로 여호와께서는 어떠한 유혹(誘惑)의 문호(文豪)도 경계(警戒)하지 않은 채 내버려 두지 않으실 것이었다.

 

⑻.모세는 하나님께서 그에게 명(命)하신 대로,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요구하시는 것이 무엇인지에 대하여 상세(詳細)한 교훈을 주는 율례(律例)와 법도(法道)를 기록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하나님께 대한 의무와 인간 상호간(相互間)의 의무(義務)와 이방인(異邦人)에 대한 의무(義務)에 관한 이 지시들은 십계명의 원칙이 확대된 것에 지나지 않았으며, 아무도 오해할 필요가 없을 만큼 구체적으로 자세하게 주어졌다. 그것들은 돌비에 새겨진 열 교훈(敎訓)들의 신성(神聖)함을 수호(守護)하기 위하여 계획된 것이다. (PP 364)

 

 

⑼.성경(聖經)은 하나님이 정의(正義)를 사랑하고 악(惡)을 미워한다고 선언(宣言)한다. (시 33:5, 사 61:8). 하나님은 불의(不義)에 대해 깊이 염려(念慮)하시며 불의(不義)의 피해(被害)자인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의(義)로운 분노(憤怒)를 일으키신다. 

 

⑽.“공의(公義)를 행하며 인자(人子)를 사랑하”는 것은 공정하고 친절하게 행동하는 것이다. 그런 일은 사람을 향한 미덕으로서 십계명의 두 번째 돌비의 내용을 요약한다(참조 마 22:39). “겸손히 네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은 십계명의 첫 번째 돌비의 원칙과 조화되게 사는 것이다(참조 마 22:37~38). 이것은 하나님을 향한 미덕이다. 하나님과 우리의 동료 인간들에 관련된 행위에 나타나는 사랑은 “선한 것”이며, 그것은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전부인데, 이는 “사랑은 율법의 완성”이기 때문이다(롬 13:10). 

 

(03월 19일) (수) <정의(正義)를 세우라고 부르심> 

 

(Q)~예수께서는 무엇이 가장 중요(重要)하다고 가르치시며,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더 중(重)한바”라는 무엇을 의미(意味)한다고 생각하며, 사람들이 하나님의 심판(審判)을 부르짖는 것은 무엇을 요청(要請)하는 것입니까? (마태복음 23:23~30, 이사야 1:17)

 

(A)~<구약(舊約)의 선지자(先知者)들은 끊임없이 정의(正義)에 대하여 부르짖으며 예수께서도 사역(使役)의 많은 부분에서 정의(正義)가 그리스도에게 최고의 관심사(關心事)였음을 분명히 보여주셨다.>

 

⑴.성경의 선지자(先知者)들은 사회(社會)의 정의(正義)를 향(向)한 하나님의 부르심을 끊임없이 강조(强調)한다. 성경은 주저(躊躇)함 없이 계속해서 불의(不義)와 압제(壓制)의 문제를 강조한다. 사실, 하나님께 심판(審判)을 촉구(促求)하는 것이야말로 하나님께 정의(正義)를 세워주실 것을 요청(要請)하는 것이었다.

 

⑵.선(善)과 정의(正義)를 주의 깊이 돌봐 주지 않아 기운(氣運)을 잃어버리는 때는 악(惡)이 선(善)보다 더 쉽게 뿌리를 내리고 번성(繁盛)하게 된다. (1T 212) 

 

⑶.불의(不義)에 관한 관심이 구약시대(舊約時代)에만 국한(局限)된다고 여기지 말 것은, 예수님 사역의 많은 부분에서 불의(不義)가 그리스도에게 최고의 관심사(關心事)였음을 통해 분명히 알 수 있다. (마태복음 23:13,~16, 23:23, 25, 27, 29)

 

⑷.그분은 이렇게 말씀하셨다. “화(禍) 있을진저 외식(外飾)하는 서기관(書記官)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가 박하(薄荷)와 회향(蘹香)과 근채(根菜)의 십일조(十一條)는 드리되 율법(律法)이 더 중(重)한바 정의(正義)와 긍휼(矜恤)과 믿음은 버렸도다. (마태복음 23:13,~16, 23:23, 25, 27, 29)

 

⑸.대부분(境遇)은 하나님을 존경(尊敬)하고 정의(正義)를 존중(尊重)하는 자들은 세상이 죄의 상(傷)을 영혼(靈魂)에 찍기 전에 이 교훈을 배운 사실이 판명(判明)될 것이다. 성년(成年)이 된 남녀들은 일반적으로 새로운 감명(感銘)에 대하여 무감각(無感覺)하기가 마치 딱딱한 바위와 같다. 그러나 젊은이들은 감명(感銘)을 받는다. 그러므로 올바른 품성(稟性)이 그때 쉽게 이루어질 수 있다. (4T 574)

 

⑹.그대들이 신뢰(信賴)와 정직(正直)의 사람, 진실(眞實)로 유용(有用)한 사람이 되는 여부(與否)는 그대들 자신에게 달려 있다. 그대들은 어떤 환경에서도 정의(正義)를 위(爲)하여 서기 위해 준비하고 결심(決心)해야 한다. 

 

⑺.이 시대를 위한 진리를 믿노라고 주장하는 자들이 공의(公義)와 정의(正義)를 실천(實踐)하기 위하여 주님의 길에서 행하고 있는 한 그들은 주께서 그들에게 번영(繁榮)을 주실 것을 기대(期待)할 수 있다. 그러나 그들이 좁은 길에서 벗어나 방황(彷徨)하는 길을 택(擇)할 때 그들은 그들 자신과 지도(指導)를 받기 위해 그들을 바라보는 자들에게 파멸(破滅)을 가져온다. (7T 90)

 

⑻.성령(聖靈)의 교훈(敎訓) 아래 이루어지는 성경의 연구(硏究)를 통하여 얻는 그리스도에 관한 지식의 증가(增加)는 받아들이는 자가 생애(生涯)의 모든 업무에서 옳은 것과 그릇된 것을 구분(區分)할 수 있게 해준다. 이 지식(知識)을 얻어 진리 안에서 뿌리를 내리고 터가 굳어지면 그들은 공의(公義)와 정의(正義)를 실천(實踐)하기 위하여 주님의 길을 지키게 될 것이다. (7T 196)

 

⑼.하늘에게서 오는 사명을 받아들이는 데 완전히 만족하는 자는 공의와 정의를 이루고자 할 때 하나님의 약속 때문에 기뻐하게 될 것이다. 하나님을 확고하게 의지하는 것, 그분의 말씀의 실천자가 되는 것은 안전한 길을 좇는 것이다. (8T 141)

 

⑽.여호와께서는 정의(正義)를 위하여 짓밟힌 당신의 율법의 권위(權威)를 무섭게 옹호(擁護)하실 것이다. 여호와께서는 어쩔 수 없어서 형벌(刑罰)을 집행(執行)하실 수밖에 없다는 바로 그 사실이, 하나님의 형벌(刑罰)을 초래(招來)한 죄가 얼마나 크고, 범죄자(犯罪者)를 기다리고 있는 보응(報應)이 얼마나 엄중(嚴重)한 것인가를 증거(證據)한다. (PP 628)

 

(03월 20일) (목) <내 이웃이 누구니이까> 

 

(Q)~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내 이웃이 누구니이까?”라는 정의(正義)와 실천이 왜 그토록 중요합니까? (누가복음 10:25~37)

 

(A)~<하나님의 말씀은 도움이 필요하고 상처(傷處)받은 사람을 섬겨야 할 것을 명확(明確)하게 말씀하신다. 예수님께서 자신(自身)을 내어주신 것은 우리를 돕고 정의(正義)를 세우기 위함이다.>

 

⑴.”내 이웃“에 대한 성경적(聖經的) 개념(槪念)은 도움이 필요(必要)로 한 모든 사람이 나의 이웃이다.

 

⑵.하나님을 지극히 사랑하고 자기 이웃을 자기 몸처럼 사랑하는 자는 자기 자신이 세상과 천사(天使)들과 사람들의 앞에 아름다운 광경(光景)이 되고 있다는 사실을 부단히 인식(認識)하면서 일할 것이다. 그는 하나님의 뜻을 자기 뜻으로 삼고 자신의 생애(生涯)를 통해서 그리스도의 은혜(恩惠)의 변화(變化)시키는 능력(能力)을 나타낼 것이다. 생애(生涯)에 따르는 모든 환경(環境) 속에서 그는 그리스도의 모본(模本)을 자신의 지침(指針)으로 삼을 것이다. (1 SM 86) 

 

⑶.거룩한 율법은 우리가 하나님을 가장 사랑하고 우리 이웃을 우리 몸과 같이 사랑하라고 요구(要求)하신다. 이러한 사랑의 실천(實踐)이 없이는 가장 고상(高尙)한 신앙(信仰)의 고백(告白)도 한갓 위선(僞善)이 되고 말 것이다. (마태복음 22:37~40)'이라고 하셨다. (1 SM 218)

 

⑷.하나님과 우리 이웃에 대한 사랑은 우리 신앙의 근본적(根本的)인 본질(本質)이 되어야 한다. 그리스도를 사랑할 수 없는 자는 그분의 자녀들을 사랑할 수 없다. 우리가 그리스도와 연합(聯合)하게 될 때 그리스도의 정신(精神)을 갖게 된다. (1 SM 337)

 

⑸.참된 그리스도인들은 땅을 하늘에 잇는 사랑의 줄로 묶이게 될 것이며 유한(有限)한 인간을 무한(無限)하신 하나님께 연결(連結)시키는 사랑의 줄로 결박(結縛)될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비취는 빛은 주님을 따르는 자들의 마음에도 비췰 것이며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낼 것이다.

 

⑹.사람이 하나님을 지극(至極)히 사랑하고 자기 이웃을 자기 몸처럼 사랑할 때에 그는 그가 할 수 있는 일이 많은 보상(報償)을 가져올 것인지 혹은 적은 보상(報償)을 가져올 것인지에 관하여 물으려 하지 않을 것이다. 그는 다만 일을 할 것이며 주는 보수(報酬)를 받을 것이다. 그는 자기가 꼭 받아야 하리라고 생각했던 많은 보수(報酬)를 기대(期待)할 수 없다는 구실(口實)로 직책(職責)을 거부(拒否)하는 사례(事例)를 남겨놓지 않을 것이다. (2 SM 181) 

 

⑺.이기적(利己的)인 부자(富者)는 가난한 이웃 사람들의 불리(不利)한 사정(事情)을 이용하여 그 자신이 유익(有益)을 얻을 수 있는 길을 연구(硏究)하는 것 외(外)에는 그들의 일에 관심(關心)을 두지 않는다. 

 

⑻.사람 속에 있는 고상(高尙)한 것과 거룩한 것은 이기적(利己的) 이익(利益)에 양보(讓步)되고 희생(犧牲)되었다.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惡)의 뿌리이다. 그것은 시력(視力)을 흐리게 하고, 하나님과 이웃 사람들에 대한 책임(責任)을 깨닫지 못하게 한다. (1T 478)

 

⑼.우리는 이웃에게 아무 일에서나 해 끼치는 일을 금(禁)해야 한다. 우리는 세상 사람들이 보는 식으로 사물(事物)을 보아서는 안 된다. 우리가 남들에게 바라는 대로 남들과 이웃을 대하는 것은 우리가 실제적(實際的)으로 살아가는 규칙(規則)이어야 한다. 하나님의 율법은 문자(文字) 그대로 준수(遵守)해야 한다. 이웃과의 접촉(接觸)과 거래(去來)에 있어서, 신자(信者)든 불신자(不信者)든 간에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마 19:19)라는 규칙(規則)을 적용(適用)해야 한다. (2T 43) 

 

⑽.예수님은 정의(正義)를 말씀만 하신 것이 아니라 정의(正義)를 실현(實現)하기 위(爲)해 오셨다. 그분은 정의(正義)를 향(向)한 예언적(豫言的) 외침과 갈망(渴望)을 이루어 주셨고 앞으로도 그러하실 것이다. (사 61:1~2; 눅 4:16~21 참조). 그분은 모든 민족(民族), 특별히 그들에게 구원(救援)이 필요한 것을 아는 만국백성(萬國百姓)의 소망(所望)이시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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