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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과-자유의지, 사랑, 하나님의 섭리-(핵심Q&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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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이봉주 작성일25-02-18 07:34 조회568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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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과 자유의지(自由意志), 사랑, 하나님의 섭리(攝理)

                      (02월 22일 (안) / 일몰: 오후 6시 18분)


<기억절(記憶節)>

 “이것을 너희에게 이르는 것은 너희로 내 안에서 평안을 누리게 하려 함이라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요 16:33). 


<개요(槪要)>

이번 주 제8과는 세 가지 주요 사상(思想)을 강조(强調)합니다.


⑴.하나님의 주권(主權)은 충족(充足)되지 않은 욕망(欲望)을 배제(排除)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일어나는(발생(發生) 모든 일을 결정(決定)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전능(全能)하시지만, 도덕적(道德的)으로 인간의 자유의지(自由意志)에 자신(自身)을 맡깁니다. 


⑵.하나님의 전능(全能)함은 그분의 섭리적(攝理的) 행동에 한계가 없다는 것을 의미(意味)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전능(全能)함은 하나님의 피조물(被造物)의 자유의지(自由意志)를 무시(無視)하거나 묵살(默殺)하지 않습니다.


⑶.하나님의 섭리(攝理)는 이상적행위(理想的行爲)와 보완적(補完的, 是正的) 행위를 포함한다. 

하나님의 섭리적행위(攝理的行爲)는 단순히 하나님이 원(願)하시는 이상적(理想的)인 뜻만을 기초(基礎)로 정의(正義)되지 않으며, 보완적(補完的,是正的) 행위(行爲)도 포함한다. 


⑷.하나님은 전능(全能)하고 주권적(主權的)이시지만, 발생(發生)하는 모든 일을 결정하지는 않습니다. 더욱이, 하나님께서는 그분의 도덕적 특성(道德的特性)의 관점(觀點)에서 하지 않으시고 할 수 없는 일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신성(神性)한 섭리(攝理)는 실제로 끔찍한 상황(狀況)을 축복(祝福)으로 바꿀 수 있습니다.


⑸.하나님은 전능하시지만, 도덕적(道德的)으로 인간의 자유의지(自由意志)에 본인 자신을 맡깁니다. 결과적(結果的)으로, 도덕적(道德的)으로 자유로운 피조물(被造物) 각자(各自)의 결정(決定)을 고려(考慮)할 때, 발생하는 모든 일이 하나님의 욕망(欲望)에 따른 것은 절대로 아닙니다.


⑹.하나님은 그분의 섭리적 목적(攝理的目的)(이상적 의지)을 성취(成就)하고, 하나님께서 선호(選好)하는 것과 상반(相反)될 수 있는 그분의 피조물의 자유로운 결정을 고려한다는 의미에서 주권적(主權的) 입니다(시정적의지).


⑺.하나님의 섭리적행동(攝理的行動)은 그분의 사랑과 일치(一致)하며 결정되거나 강요(强要)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섭리적 행동은 자유로운 인간의 선택(選擇)을 무시(無視)하지 않습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전능함은 그분의 피조물의 자유의지(自由意志)를 배제(排除)하지 않습니다.


⑻.하나님의 섭리적행동(攝理的行動)은 하나님이 원(願)하시는 것에 정확히 근거한 이상적의지(理想的意志)에 따라서만 정의(正義)되는 것이 아니라 시정적행동(是正的行動)을 포함(包含)합니다. 


⑼.보완적(시정적) 행위는 하나님이 그분의 피조물(被造物)들에 바라시는 것과는 다소 다른 방향(方向)으로 나아갈 수도 있다. 


⑽.하나님은 자신의 도덕적(道德的)인 뜻에 반하는 상황(狀況)을 그분의 도덕적이고 이상적(理想的)인 뜻에 부합하는 것으로 변화(變化)시킬 수도 있으시다.  즉(卽) 

①.하나님은 세상의 일을 미리 결정(決定)하시지 않으며 사랑의 본성(本性)을 따라 이끄시며, 

②.자유의지(自由意志)의 남용으로 세상이 무너졌지만, 하나님에게는 이것을 바로잡을 계획이 있다. 

③.세상을 이기신 예수님을 통해 우리도 악(惡)과 어려움 가운데서 승리(勝利)할 수 있다.


(02월 16일) (일) <주권자(主權者) 하나님> 


(Q)~하나님은 전능(全能)하기에 모든 일이 그분 뜻대로만 성취(成就) 시키시며 피조물(被造物)들을 미리 예정(豫定)해서 하나님 마음대로 모든 것을 주관(主管)하시며 일방적(一方的)으로 세상의 모든 일을 결정(決定)하시어 집행(執行)하시는 분이신가? (시편 81:11~14, 이사야 30:15, 18, 이사야 66:4, 누가복음 13:34)


(A)~<전능(全能)하신 하나님으로서 주님은 무엇이든 할 수 있습니다. 그에게는 불가능(不可能)한 것이 없습니다. (창세기 18:14, 마가복음 14:36, 누가복음 18:27). 그러므로 권능과 자유의 관점에서 하나님은 무엇이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의 도덕적 성격의 본질과 창조된 세계의 존재와 현실에 대한 그의 자유로운 결정의 관점에서 볼 때, 하나님이 하지 않으실 일들이 있고, 이런 의미에서 할 수 없는 일들이 있습니다. 


⑴.하나님이 항상 원(願)하는 것을 얻는 것은 아니지만(그의 이상적(理想的)인 뜻) 하나님은 확실(確實)히 모든 것을 포괄(包括)하고 전능(全能)한 섭리적 목적(攝理的 目的)(그의 효과적(效果的)인 뜻)을 성취(成就)하실 것이다.


⑵.하나님께서는 당신의 피조물(被造物)들이 저들을 둘러싼 혼란(混亂)과 난국(亂國)에서 저희의 관심을 돌려 하나님의 제작품(製作品)들을 찬양(讚揚)하기를 바라신다. 우리가 하나님의 피조물들을 연구할 때에 하늘 천사들은 우리 곁에 서서 우리 정신을 깨우쳐 줄 것이며 사단의 기만에서 우리를 보호해 줄 것이다. 


⑶.그대들이 하나님의 손으로 만드신 기이(奇異)한 것들을 바라볼 때 그대들의 교만(驕慢)하고 어리석은 마음은 자신의 의존성(依存性)과 열등감(劣等感)을 느끼게 될 것이다. 마땅히 하나님을 인정(認定)해야 할 때 인정하지 않는다는 것은 얼마나 두려운 일인가! 때가 다 지난 후에 사람이 자기 자신(自身)을 겸비(謙卑)하게 함은 얼마나 슬픈 일인가! (CT 457) 


⑷.그래서 나는 그들을 그들의 완악(頑惡)한 마음에 맡겨서 그들의 꾀대로 행하게 하였노라. 오, 내 백성이 내 말을 듣고 이스라엘이 내 길을 행하기를! 나는 곧 그들의 원수들을 정복하고, 그들의 적대자들을 향해 내 손을 돌릴 것이다'


⑸.성경(聖經)에서 우리는 심지어(甚至於) 하나님의 백성들조차도 하나님이 원(願)하시는 것과 다르게 행동(行動)하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시편 81:11~14)에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의 회개(悔改)를 호소(呼訴)하시는 시편(詩篇)에서, 주님은 그의 백성이 그의 " "음성(音聲)을 "듣지 아니하고" 이스라엘이 나를 원(願)치 아니한다고 불평(不平)하십니다.


⑹.성경(聖經)은 이러한 관점(觀點)에서 하나님이 특정(特定)한 일을 할 수 없다고 분명히 말씀하십니다. 예(例)를 들어, 그는 "거짓말을 할 수 없습니다"(딛 1:2; 또한 히 6:18 참조), 그는 "악(惡)에 유혹(誘惑)을 받을 수 없습니다"(야고보서1:13) 와 "그분은 자신을 부인(否認)할 수 없습니다"(뎀 후 2:13).


⑺.하나님은 모든 일의 주권자(主權者)라는 의미(意味)는 하나님은 인간(人間)에게 주어진 자유의지(自由意志)의 선택(選擇)에 따라 사랑으로 판단(判斷)하고 결정(決定)하신다는 뜻이다.


⑻.세상에서의 하나님의 행동(行動)을 이해(理解)하는 데 중요합니다. 그분은 자신의 섭리(攝理)에서 무엇이든 할 수 있는 능력(能力)과 자유(自由)를 가지고 있지만, 그의 섭리적 행동(攝理的行動)은 그의 성격(性格)과 결정(決定)의 도덕적 본질(道德的本質)에 의해 제한(制限)됩니다.


⑼.”하나님은 결코 그의 피조물(被造物)에 그들의 의지(意志)나 양심(良心)을 강요(强要)하지 않으신다"고 강조(强調)합니다(GC, 591).


⑽.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죄(罪)에서 자유롭게 하실 준비(準備)가 되어 있지만, 하나님께서는 의지(意志)를 강요(强要)하지 않습니다. 즉 하나님은 전능(全能)하기에 모든 일이 그분 뜻대로 성취(成就)된다는 이들이 있다. 그러나 성경은 인간들에게 주신 자유의지(自由意志) 때문에 그분의 뜻대로 일이 성취(成就)되지 않는 경우(境遇)를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자유의지(自由意志)의 소유자(所有者)인 인간(人間)

하나님은 아담이 금단(禁斷)의 나무에 손을 대지 못하게 붙드실 힘을 갖고 계셨지만 그렇게 하지 않았다. 만약 그렇게 하셨더라면 하나님의 율법(律法)은 독재적율법(獨裁的律法)이라는 사단의 비난(非難)이 인정(認定)을 받게 되었을 것이며, 인간은 자유의지(自由意志)를 가진 도덕적 존재(道德的存在)가 아니라 하나의 기계(器械)에 불과했을 것이다. (R&H 1901. 6. 4). (1 BC 1084) 


(02월 17일) (월) <전능(全能)하신 하나님(Pantokrator)> 


(Q)~전능(全能)하신 하나님에 대하여 성경에서는 어떠한 의미(意味)로 가르쳐 주십니까? (요한계시록 11:17, 예레미야 32:17~20, 누가복음 1:37, 마태복음 19:26. 히브리서 1:3)


(A)~<전능자(全能者)> <H7706 : שַׁדַּי  샷다이 saday / 전능자 almighty>

샷다이(명남)는 하나님의 칭호(稱號)이며, '전능자 almighty'를 의미한다. 구약성경(舊約聖經)에서 이 단어(單語)는 48회 나오며, 하나님의 칭호(稱號) 중 하나로 사용되었다. 이 단어는 욥기에서 가장 많이 출현(出現)하며(31회) 이 드라마의 거의 모든 인물의 입술을 통해 등장하고 있다: 엘리바스, (욥 5:17, 욥 6:4, 빌닷, 욥 8:3, 소발, 욥 11:7, 엘리후, 욥 32:8, 여호와, 욥 40:2) 셔터이의 48회 용례 중 7회가 엘(하나님)로 시작된다: (창 17:1, 창 28:3, 창 35:11, 창 43:14, 출 6:3, 겔 10:5) 나머지 41회는 샷다이 홀로 나타난다.


"전능자" Almighty라는 번역(飜譯)은 고대(古代)로까지, 적어도 70인 역본(譯本)까지 그 연원(連原)이 거슬러 올라간다. 70인 역본(譯本)은 샷다이를 판토크라토르(전능한 allpowerful)로 번역하였다. 엘 샷다이는 영어로 번역할 때 'God/ El of the mountain' 산의 하나님/ 엘 즉 하나님의 거처 God's abode와 같은 그 어떤 것이 될 것이다.> 


⑴.성경(聖經)은 하나님은 전능(全能)하시며 권능(權能)으로 세상을 돌보신다고 가르친다. 실제로 요한계시록은 하나님을 “전능(全能)하신” 하나님이라고 반복(反復)해서 언급(言及)한다(계 11:17, 고후 6:18, 계1:8, 계 16:14, 계 19:15, 계 21:22). “전능자(全能者)”(히)판토크라토, Pantokrator)로 번역(飜譯)된 단어는 문자 그대로 못할 일이 없고, 능력이 무한(無限)하시다는 뜻이다.


⑵. 하나님이 전능(全能)하시다는 것은 문자(文字)로만 표현(表現)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그분의 능력으로 자기 백성을 구원(救援)하시거나 세상에 기적적(奇蹟的)으로 개입(介入)하는 많은 놀라운 사례(事例)에서도 드러난다.


⑶.우리 구세주(救世主)께서 우리를 위한 속전(贖錢)을 지불(支拂)하셨다. 아무도 사단의 노예(奴隸)가 될 필요가 없다.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위한 전능하신 조력자(助力者)로서 우리 앞에서 계시다. (1 SM 309)


⑷.전능하신 성령의 능력은 모든 회개(悔改)한 영혼의 방비(防備)가 된다. 그리스도께서는 회개(悔改)와 믿음으로 하나님의 보호(保護)를 간구(懇求)한 사람은 한 사람도 사단의 세력(勢力) 아래 버려두지 않으실 것이다. 사단이 강(强)한 존재인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우리는 악(惡)한 자를 하늘에서 내어쫓으신 전능하신 주 하나님이 계심을 감사하자. 사단은 우리가 그의 힘을 과장(誇張)하여 나타낼 때 기뻐한다. (YHH 301) 


⑸.사람들은 하나님께서 재창조(再創造)하실 수 있도록 품성형성(稟性形成)을 그분께 맡길 수도 있고, 잔혹(殘酷)한 사단의 지배(支配)하에 두어 품성형성(稟性形成)을 그에게 맡길 수도 있는데 어느 편(便)이든 그 자신의 자유의지(自由意志)에 의해 행동하는 것이다. (R&H 1900.11.13. (FLB 155)


⑹.전능(全能)하신 하나님의 의미(意味)는 부족하거나 하자가 전혀 없이 합리적(合理的)이며 도덕적(道德的)인 하나님의 본성(本性)에 합당한 모든 일을 하실 수 있다는 뜻이다. (렘 32:17~20)


⑺.하나님 아버지는 그리스도를 십자가(十字架)의 고난(苦難)에서 구(救)하실 절대적(絶對的)인 능력을 소유(所有)하신 것이 분명하지만, 죄인을 구원(救援)하기 위해서 그렇게 하실 수 없었다. 그리스도를 구(救)하거나 죄인을 구원(救援)하는 중의 하나만 가능하지 둘 다 하실 수는 없었다.


⑻.하나님이 전능(全能)하시다는 것은 그분이 무엇이든 하실 수 있다는 것이 아니라 합리적(合理的)이며 모순(矛盾)이 없고 그분의 본성(本性)에 합(合)하는 모든 것을 할 수 있다는 의미이다.


⑼.대부분(大部分)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이 전능(全能)하시다는 것에 동의(同意)한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모순(矛盾)되지 않는 일, 즉 논리적(論理的)으로 가능(可能)하고 그분의 본성(本性)에 일치하는 어떤 일도 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추고 계신다는 뜻이다.


⑽.어떤 일은 하나님의 본성(本性)과 모순(矛盾)되기 때문에 그분에게도 하실 수 없는 일이다. 겟세마네에서 드리신 그리스도의 기도(祈禱)는 한 예(例)가 된다.

 

(02월 18일) (화)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 


(Q)~성경(聖經)은 하나님에 대해 무엇을 가르치고 있으며, 자유의지(自由意志)의 실제(實際)에 대해 무엇을 가르치고 있습니까? (마태 22:37. 신명기 6:4~5. 히브리서 6:17~18. 디도서 1:2)


(A)~<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에 대한 (마 22:37. 신 6:4~5)의 인용(引用)은. 이것은 가정(家庭)이나 성전(聖殿)에서 매일(每日)의 예배(禮拜)에 사용한 신앙고백문(信仰告白文)인 ‘쉐마’의 한 부분으로 매일 두 번씩 소리 높여 암송(暗誦)함으로 유대인에게는 가장 익숙한 것이었다. 특히 이것은 십계명(十誡命)의 전반부(前半部)로 하나님께 대한 계명(誡命)의 포괄적(包括的)인 요약(要約)이다. 그러나 사랑이 진정(眞正)한 사랑이 되려면 자유로운 뜻에 따른 사랑이어야 하기 때문이다> 


⑴.하나님을 사랑하라는 가장 큰 계명은 하나님께서 모든 사람이 그분을 사랑하기를 원하신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그러나 모든 사람이 실제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아니다. 


⑵.이 원리는 하나님의 사랑의 성격(性格) 때문에, 하나님의 전능함이 그의 피조물(被造物)의 자유의지(自由意志)를 배제(排除)하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意味)합니다. 그의 섭리적 행동(攝理的行動)은 양심(良心)을 강요(强要)하지 않습니다. 


⑶.어떤 행동(行動)을 자유롭게 하는 것이 어떻게 할 것인지를 결정(決定)하는 과정(過程) 없이 이루어진다면, 그것을 자유롭게 한다는 의미(意味)와 모순(矛盾)된다. 


⑷.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외식(外飾)이 아닌 진정(眞正)한 의지(意志)를 강조(强調)한 말로써 지적 능력(知的能力)을 뜻하는 말로써, 맹목적(盲目的)인 것이 아니라 분명(分明)한 이해(理解)와 통찰력(洞察力)을 가졌음을 강조(强調)한 것이다.


⑸.(신 6:5)의 원문(原文)은 ‘뜻’ 대신에 ‘힘’이고, ‘마가’와 ‘누가’에는 ‘힘’이 첨가(添加)되어 있다. 그런데 인간론(人間論)의 관점(觀點)에서 보면 이것들은 서로 분리(分離)되는 개념(槪念)이 아니라 중복(重複)되는 개념(槪念)들로서 강조(强調)하는 것이지 의미(意味)상의 별 차이(差異)는 없다. 결국 전인격(全人格)을 기울여, ‘존재(存在)의 전기능(全機能)을 다하여’(Tasker), 전생애(全生涯)에서 하나님을 사랑하라는 뜻이다.


⑹.하나님을 ‘사랑하라’라는 말씀의 의미(意味)를 살펴보면 원어(原語)(아가 폐 세이스) 는 미래(未來) 시상(詩想)인데, 이것은 명령어(命令語)의 대용어(代用語)로서 법조문(法條文)에 쓰이는 방식이다(Lenski). 이것은 단순(單純)한 애정(愛情)이나 사랑을 나타내는 ‘필레오’와는 엄격(嚴格)하게 다르다. 자기이해(自己理解)를 초월(超越)한 순수(純粹)하고 무목적(無目的), 무조건적(無條件的)인 사랑이다. 이런 사랑은 우리 자신(自身)에게는 없는 것이다. 


⑺.이러한 (6) 항에 있는 사랑을 하려고 하면 우리에게 정말 하나님의 근원적(根源的)인 사랑이 절대적(絶對的)으로 필요(必要)한 것을 알 수 있다(요일 4:10). 그러므로 우리는 복음(福音)과 율법(律法)이 서로 상반(相反)되는 것이 아님을 볼 수 있다.


⑻.이러한 사랑의 온전한 모습은 예수에게서만 발견할 수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먼저 예수의 사랑을 풍족(豐足)하게 누리고, 그 사랑의 능력으로 하나님을 알고 사랑할 수 있고, 이웃에 대하여도 (고전 13장)의 수준(水準)으로 나아갈 수 있다. (요 13:43).


⑼.사랑은 강요(强要)될 수 없고 진정(眞正)한 사랑은 자유(自由)를 전제(前提)로 한다. 자유를 주셨기에 인간은 하나님의 이상(理想)과 다르게 행동하며 그분이 원(願)하지 않는 일들이 일어난다.


⑽.사람이 그리스도의 능력과 은혜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율법의 계율(戒律)들을 지키기 시작하고자 한다면 그 이전에 반드시 마음속에 사랑이 있어야 한다. (참조 롬 8:3~4). 사랑 없는 순종은 아무 소용이 없을뿐더러 불가능(不可能)한 것이다. 그러나 사랑이 현존(現存)하는 곳에서 사람은 하나님의 계명(誡命)들에 표현된 하나님의 뜻에 조화(調和)되도록 삶을 바로잡기 시작할 것이다(참조 요 14:15; 15:10 주석). 


◎.그리스도 안에서의 완전(막 12:30, 31; 눅 10:27; 골 2:10)-하나님의 율법(律法) 요구(要求)는 하나님을 최고(最高)로 사랑하고 그 이웃을 자기의 몸같이 사랑하라는 것이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恩惠)로 이를 온전히 행할 때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완전(完全)해질 것이다. (편지 11, 1892). (마 22:37, 화잇주석)


(02월 19일) (수) <하나님 의지(意志)의 이상적(理想的) 의미(意味)와 보완적(補完的) 의미(意味)>  


(Q)~성경에서 말하는 예지(叡智)& 예지(豫知)나 예정(豫定)은 어떤 의미(意味)인지 분명히 이해(理解)하지 못하면 하나님의 일방적(一方的)인 뜻의 결정대로 일하시는 것은 예정(豫定)해놓은 대로 행하는 것으로 오해(誤解)할 수 있다. 올바른 의미(意味)를 서술(敍述)해보세요. (에배소서 1:9~11) 


(A)~<우리가 하나님의 의지(意志)의 “이상적(理想的)인 의미(意味)”와 “보완적(補完的)인 의미(意味)”라고 부를 수 있는 두 가지의 차이(差異)를 인식(認識)할 때 우리는 이 구절(句節)을 온전하게 이해할 수 있다. 이상적(理想的)인 하나님의 뜻은 하나님이 실제로 일어나기를 원(願)하시는 일이며, 모든 사람이 항상(恒常) 하나님이 바라는 대로 행할 때 일어날 수 있는 일이다.>


⑴.“예정(豫定)”으로 번역(飜譯) 된(롬 8:29, 30 참조) 헬라어 프로오리조(prohorizo) 자체(自體)는 하나님이 역사(歷史)를 정(定)해놓고 그대로 행(行)한다는 의미(意味)가 아니다. 오히려 이것은 단순히 “미리 정(定)하다”라는 의미(意味)이다. 


⑵.“미리 정(定)하”셨다고 번역(飜譯)된 용어(用語)는 하나님께서 피조물(被造物)의 자유로운 결정(決定)에 대해 미리 아시고, 그것을 고려(考慮)하여 미래(未來)에 대해 계획(計劃)하셨음을 의미(意味)한다.


⑶.“만물(萬物)이 우리를 상관(相關)하시는 자의 눈앞에 벌거벗은 것같이 드러나느니라”(히 4:13), “종말(終末)을 처음부터 고하며”(사 46:10), “예로부터 이것을 알게 하시는 주의 말씀이라”(행 15:18). 과거(過去), 현재(現在), 미래(未來)가 모두 똑같이 그분께 드러나 있다. 


⑷.절대적(絶對的)인 지식(知識)이 아니고는 어떤 것도 하나님의 완전하심에 대한 우리의 기본적(基本的)인 개념(槪念)을 충족(充足)시킬 수 없을 것이다. 그분은 미래(未來)를 알기 때문에 절대로 놀라지 않는다. 그분은 사단의 배도(背道)와 인간의 타락(墮落)을 모두 미리 알았기 때문에 그 비상사태(非常事態)를 위한 대책(對策)이 마련되어 있었다. (벧후 1:20; 계13:8; 소망, 22).


⑸.장래(將來)에 대한 예언(豫言)은 그분의 예지성(豫知性)에 대한 최고의 증거(證據)이다. 예언(豫言)이란, 하나님의 예지(豫知)로서 본 사실이 일어날 것이라고 미리 말하는 것이다. (참조 EGW RH, Nov. 13, 1900). 


⑹.예언(豫言)된 사건(事件)들은 그것들이 미리 보였기 때문에 일어나는 것이 아니고, 그것들이 발생(發生)할 것이기 때문에 미리 보여지는 것이다. 


⑺.<미리 정(定)하셨으니> 헬라어 프로오리조(proorizo-). “사전(事前)에 구분(區分)하다.” 이 단어는 (행 4:28)에서 “예정(豫定)하신”으로 번역(飜譯)되었고, (고전 2:7)에서는 “미리 정(定)하신”이라고 번역(飜譯)되었다. 하나님은 당신이 미리 안 자(者)들을 미리 정(定)한 것이다. 인간적(人間的)인 표현(表現)을 빌리자면, 하나님이 이 세상 역사(歷史)의 무대(舞臺)에 오를 각 세대(世代)의 사람들을 미리 보고 미리 알았을 때, 즉시 당신의 예지(豫知)와 구원(救援)받을 모든 사람을 미리 정(定)하실 결정(決定)을 결부(結付)시켜 생각했다. (행 4:28. SDA 주석.)


⑻.하나님의 미리 아심(예지, 豫知)과 미리 정(定)하심(예정, 豫定)은 결코 인간의 자유(自由)를 배제(排除)하지 않는다. 바울이나 다른 어떤 성경 기록자(聖經記錄者)도 자신의 선택(選擇)과 상관(相關)없이 하나님이 어떤 사람은 구원(救援)받도록, 다른 사람은 버림받도록 예정(豫定)했다고 주장하지 않는다. 


⑼.하나님의 뜻이 가진 보완적(補完的)인 의미(意味)는 때때로 하나님이 선호(選好)하는 것에서 벗어날 수 있는 피조물(被造物)의 자유로운 결정(決定)을 포함한 다른 모든 요소(要素)를 이미 고려(考慮)한 하나님의 뜻을 의미(意味)한다.


⑽.하나님께서는 소수의 구원자만 예정하시지 않으셨으며, 하나님은 진정(眞正)한 사랑에 필요한 피조물(被造物)의 자유(自由)를 존중(尊重)하면서 모든 사람을 위하는 그분이 바라시는 선(善)한 목적을 위해 역사(歷史)를 섭리적(攝理的)으로 인도하실 수 있다.


(02월 20일) (목) <그리스도께서 세상(世上)을 이기셨다> 


(Q)~악(惡)이 가득한 세상에서 우리에게 소망(所望)이 있는 이유는 무엇 때문입니까? (요 16:33)


(A)~<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예수는 암흑(暗黑)의 권세(權勢)들에게 승리(勝利)할 것을 온전히 확신하면서, 담대(膽大)한 마음으로 십자가(十字架)를 기다렸다. (참조 골 2:15). 이 세상 임금은 패배(敗北)할 것이며(참조 요 12:31; 14:30; 16:11 주석), 따라서 제자(弟子)들은 두려워할 것이 전혀 없다. (요 16:33, 재림교주석)


⑴.예수는 암흑(暗黑)의 권세(權勢)들에 승리(勝利)할 것을 온전히 확신하면서, 담대(膽大)한 마음으로 십자가(十字架)를 기다렸다(참조 골 2:15). 이 세상 임금은 패배(敗北)할 것이며(참조 12:31; 14:30; 16:11 주석), 따라서 제자들은 두려워할 것이 전혀 없다. 


⑵.모든 것이 하나님의 이상적(理想的)인 뜻대로 이루어졌다면 악(惡)은 존재(存在)하지 않았을 것이고 우주(宇宙)는 오직 완전한 사랑과 조화(調和)로 가득했을 것이다.


⑶.결국 우주(宇宙)는 하나님이 완벽(完璧)하고 이상적(理想的)인 뜻대로 회복(回復)될 것이지만 그때까지 하나님은 피조물(被造物)의 자유로운 결정(決定)을 고려하는 방식(方式)으로 하나님의 뜻을 이루고 계신다. 


⑷.고난(苦難)과 시련(試鍊)은 하나님께서 주신 것이 아니다. 하지만 예수께서는 제자(弟子)들이 세상에서 어려움을 겪을지라도 당신이 세상(世上)을 이기셨기에 소망(所望)이 있다고 하셨다.


⑸.시련(試鍊) 없이 주님 안에서 어떻게 강(强)해질 수 있겠는가? 힘을 얻기 위해 우리는 움직여야 한다. 강(强)한 믿음을 얻기 위해서는 믿음을 행사할 수 있는 환경(環境)에 처(處)해야 한다. 


⑹.사도 바울은 순교(殉敎) 직전에 디모데에게 ‘오직 하나님의 능력을 좇아 복음과 함께 고난(苦難)을 받으라’라고 권면(勸勉)하였다. 우리가 하나님의 왕국(王國)에 가려면 많은 환난(患難)을 통과(通過)해야 한다. 우리 구주(救主)는 가능한 한 모든 면에 시험을 받으셨으나 하나님 안에서 끊임없이 승리를 거두셨다.”. (3T, 67).


⑺.고난(苦難)과 시련(試鍊)은 하나님께서 주신 것이 아니다. 하지만 예수께서는 제자들이 세상에서 어려움을 겪을지라도 예수님이 세상을 이기셨기에 소망(所望)이 있다고 하셨다.


⑻.이 세상의 어떤 일들은 하나님에 의해 이루어졌지만 모든 악(惡)을 포함해 어떤 일들은 피조물(被造物)의 자유로운 결정(決定)의 결과이다. 하나님께서 원(願)치 않으시는 일도 많이 일어난다. 


⑼.특별히 고난(苦難)이나 시련(試鍊)을 겪을 때 하나님께서 그것으로부터 건져주실 것이고 그렇게 하셔야 한다는 잘못된 믿음을 가지고 있다면 믿음이 흔들릴 수 있다. 하지만 예수님은 전(全)혀 다른 이야기를 하신다. 그분은 제자들에게 이 세상에서 시련(試鍊)과 환난(患難)을 겪을 것이라고 경고(警告)하셨다. 하지만 소망(所望)이 있는 것은 그리스도께서 세상을 이기셨기 때문이다(요 16:33). 


⑽.제자들은 큰 기쁨으로 가득 찼다. 저들은 그분께서 저들에게 주신 마지막 교훈의 말씀을 몇 번이고 되뇌었다…. 다들, 이 교훈(敎訓)에 대해 한마디씩 했는데 요한복음 14장(1~3절)의 말씀에 대해선 더욱 그랬다. (UL 357.3)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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