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과-거룩한 사랑의 진노(震怒)-(핵심Q&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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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이봉주 작성일25-01-27 06:52 조회1,002회 댓글0건첨부파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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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과 거룩한 사랑의 진노-이봉주 장로.hwp (95.5K) 25회 다운로드 DATE : 2025-01-27 06:52:50
본문
<제5과 거룩한 사랑의 진노(震怒)>
(2024년 02월 01일 (안) / 일몰: 오후 5시 55분)
<기억절(記憶節)>
“오직 하나님은 긍휼하시므로 죄악을 덮어 주시어 멸망시키지 아니하시고 그의 진노를 여러 번 돌이키시며 그의 모든 분을 다 쏟아 내지 아니하셨으니”(시 78:38).
<개요(槪要)>
⑴.하나님의 진노(震怒)는 죄(罪)에 대해 거룩하고 인내심(忍耐心) 있는 반응(反應)입니다.
⑵.하나님의 진노(震怒)는 사랑스럽고 의(義)로운 분노(憤怒)입니다.
⑶.하나님의 진노(震怒)는 악(惡)과 죄(罪)를 벌(罰)하는 그분의 사랑 표현(表現)이다.
⑷.하나님은 더 많은 사람을 구원(救援)하기 위(爲)해 고통(苦痛)스럽지만 심판(審判)하시며 공의(公義)를 세우신다.
⑸.악(惡)이 사랑하는 사람을 해치기에 하나님은 진노(震怒)하신다. 그분의 진노(震怒)는 사랑의 다른 표현(表現)이며 피조물(被造物)의 복락(福樂)을 위(爲)하시는 사랑의 합당(合當)한 반응(反應)이다.
⑹.성경(聖經)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진노(震怒)가 그분의 백성 억압(抑壓)과 고통(苦痛)에 대해 사랑스럽고 의(義)로운 분노(憤怒)로 생생하게 묘사(描寫)되어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⑺.하나님께서는 완전(完全)한 선(善)함과 사랑에서 동기(動機)를 얻은 의(義)로운 분노(憤怒)로 악(惡)을 처벌(處罰)하기 위(爲)해 적극적(積極的)으로 개입(介入)하십니다
⑻.하나님의 진노(震怒)는 악(惡)에 대한 사랑의 적절(適切)한 반응(反應)이며, 악(惡)은 그분의 사랑하는 피조물(被造物)에 해(害)를 끼칩니다.
⑼.성전(聖殿)에서 매매(賣買)하는 자(者)들에게 대한 예수님의 진노(震怒)는 성전거래(聖殿去來)로 "촉발(觸發)된" "가난한 자들에 대한 그리스도의 동정심(同情心)"에 대한 강조 없이는 제대로 이해(理解)할 수 없다는 점은 주목(注目)할 만하다. (소망 162). "눈물을 흘리시며 그분 주변(周邊)에 떨고 있는 사람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내가 너희를 구원(救援)할 것이요, 너희는 나를 영광(榮光)스럽게 여길 것이다." (소망 163).
⑽.성경적(聖經的) 이야기는 하나님의 진노(震怒)가 그분의 백성(百姓) 억압(抑壓)과 고통(苦痛)에 대해 사랑스럽고 의(義)로운 분노(憤怒)임을 그리스도론적으로 보여줍니다. 결국(結局) 이 신성(神性)한 분노(憤怒)는 압제자(壓制者)들의 심판(審判) 결과(結果)로 백성의 강력(强力)한 구원(救援)을 촉발(觸發)합니다.
(01월 26일) (일) <죄악(罪惡)으로 슬퍼하심>
(Q)~하나님께서 죄악(罪惡)에 대하여 분노(憤怒)하시며 슬퍼하시는 이유(理由)는 무엇 때문이라고 생각합니까? (마 21:12)
(A)~<하나님의 백성은 반복(反復)해서 그분을 버리고 배반(背叛)했지만, 하나님은 그 오랜 시간 동안 모든 마땅한 응보(應報)를 뛰어넘는 긍휼(矜恤)을 베풀어 주심으로(느 9:7-33) 하나님의 오래 참으시는 자비(慈悲)와 인애(仁愛) 하심의 헤아릴 수 없는 깊이를 보여주셨다. 실제로 시편 78:38에 따르면, “하나님은 긍휼(矜恤)하시므로 죄악(罪惡)을 덮어 주시어 멸망(滅亡)시키지 아니하시고 그의 진노(震怒)를 여러 번 돌이키시며 그의 모든 분(忿)을 다 쏟아 내지 아니하셨”다.>
⑴.하나님의 진노(震怒)는 악(惡)과 죄(罪)를 벌(罰)하는 그분의 사랑 표현(表現)이다.
⑵.하나님의 진노(震怒)는 죄(罪)에 대해 거룩하고 인내심(忍耐心) 있는 반응(反應)입니다.
⑶.하나님의 진노(震怒)는 임의적(任意的)이고 통제(統制)할 수 없거나 복수심(復讐心)에 찬 주도권(主導權)에 근거(根據)하지 않으신다
⑷.하나님의 분노(憤怒)는 그의 창조물(創造物)을 해치는 지속적(持續的)이고 반항적(反抗的)인 죄(罪)에 대한 반응(反應)입니다.
⑸.하나님의 신성(神性)한 진노(震怒)는 그의 사랑의 또 다른 표현(表現)으로, 악(惡)한 사람들의 죄(罪)를 벌(罰)하거나 그의 백성을 그들의 손아귀에서 구출(救出)하기 위(爲)한 것이다.
⑹.하나님의 진노(震怒)는 악(惡)과 불의(不義)에 대한 그분의 의(義)와 사랑에서 비롯된 반응(反應)이다
⑺.악(惡)이 사랑하는 사람을 해치기에 하나님은 진노(震怒)하신다. 그분의 진노(震怒)는 사랑의 다른 표현(表現)이며 피조물(被造物)의 복락(福樂)을 위(爲)하시는 사랑의 합당(合當)한 반응(反應)이다.
⑻.하나님은 자비(慈悲)하시지만, 죄(罪)를 정당화(正當化)하지 않으며 십자가(十字架)를 통해 죄를 대속(代贖)함으로 공의(公義)를 보이시며 용서(容恕)하신다.
⑼.하나님께서 행하신 모든 표적(表迹)과 기사(奇事)에도 불구하고, 그분의 백성은 그분을 잊고 완고(頑固)하고 반항적(反抗的)이 되었으며 회개(悔改)하지 않는 마음을 가졌다. 그러므로 사랑의 하나님께서는 악(惡)에 대해 분노(憤怒)하고 슬퍼하십니다
⑽.그들이 자신(自身)의 죄(罪)를 깨닫고, 회개(悔改)와 겸비(謙卑)로 그분께 돌아갈 때, 그분께서 가장 흉악(凶惡)한 범죄자(犯罪者)들까지도 기꺼이 용서(容恕)하신다는 증거(證據)로서 분명히 기록(記錄)되어 있다”(증언 3권, 355).
(01월 27일) (월) <노(怒)하기를 더디 하시는 하나님>
(Q)~‘니느웨’ 사람들을 자비(慈悲)하게 용서(容恕)하신 하나님에 대한 요나의 이야기와 반응(反應)을 생각(生覺)해보고, 이 성경구절(聖經句節)에서 ‘요나’와 ‘하나님’에 대해 무엇을 말해 주십니까?. (요나 4:1~4. 마태복음 10:8)
(A)~<영혼의 무한한 가치를 알지 못한 요나> 요나는 그 성읍(城邑)의 악(惡)함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그들을 아끼셔서 베옷을 입고 재 가운데 앉아 회개(悔改)하게 하신 그분의 목적(目的)을 알았을 때 먼저 하나님의 놀라우신 은혜(恩惠)를 기뻐했어야 하였으나, 그 대신 자신이 거짓 선지자(先知者)로 여김을 받을 가능성(可能性)에 대하여 깊이 생각하였다. 자신의 평판(評判)에 눈멀어 그는 그 불쌍한 성읍(城邑) 중에 있는 영혼(靈魂)의 무한(無限)히 큰 가치(價値)를 보지 못하였다.>
⑴.요나의 마음은 완악(頑惡)했다. 그는 앗수르 사람들이 이스라엘에 한 짓 때문에 그들을 너무 미워해서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자비(慈悲) 베푸는 것을 원(願)하지 않았다.
⑵.하나님의 은혜(恩惠)가 회개(悔改)하는 니느웨 사람들을 용서(容恕)해 주었음을 기뻐하는 대신, 요나는 자기의 이기적(利己的)이고 죄(罪) 된 자존심(自尊心) 때문에 분개(憤慨)함을 나타냈다.
⑶.인간(人間)의 마음의 조급(躁急)함과 하나님의 오래 참으심을 현저(顯著)하게 대비(對比)하여 나타내 준다. 요나는 싫어했을 뿐 아니라, “하나님이…뜻을 돌이키”신 것에 대해 몹시 분개(憤慨)했다(3:10).
⑷.요나는 자기가 예언(豫言)한 일이 일어나지 않았기 때문에 그는 자기가 거짓 선지자(先知者)로 간주(看做)될 것이라고 느꼈다.
⑸.요나는 앗수르 수도(首都)에 사는 모든 영혼(靈魂)들보다도 자기의 명성(名聲)이 더욱 소중(所重)했다. 그는 성취(成就)되지 않은 그 예언(豫言) 때문에 이방인(異邦人)들 가운데서 미래(未來)를 아시는 여호와의 능력(能力)이 불신(不信)을 받게 될 것이라고 추론(追論)했을지도 모른다.
⑹.하나님은 자비(慈悲)와 은혜(恩惠)를 풍성(豊盛)하게 베풀면서도 죄(罪)를 정당화(正當化)하거나 불의(不義)에 눈 감지 않으신다. 대신(代身) 십자가(十字架)를 통해 죄(罪)를 속(贖)함으로 공의(公義)를 보이시며 용서(容恕)하신다.
⑺.니느웨 사람들을 향(向)한 하나님의 자비(慈悲) 는(요나 3:10) 요나를 격분(激奮)하게 했다. 하나님의 자비(慈悲)는 그가 불순종(不順從)했을 때 그의 목숨을 살려주었건만, 하나님께서 동일(同一)한 자비(慈悲)를 다른 이들에게 베푸셨을 때 그는 그것을 질투(嫉妬)했다.
⑻.요나가 요나서 2장의 기도(祈禱)와 비교(比較)할 때 이 기도(祈禱)를 드릴 때의 상황(狀況)은 얼마나 다르며, 이 기도(祈禱)를 하게 만든 그 정신(精神)은 얼마나 다른가! 그때 그는 생명(生命)을 달라고 기도(祈禱)했지만, (요나 4:3) 여기서는 죽음을 달라고 기도(祈禱)한다. 그때 그는 겸손(謙遜)했지만, 지금은 화(禍)를 낸다.
⑼.하나님께 드리는 요나의 간청(懇請)은 모세의 그것과 얼마나 다른가! 모세는 죄(罪)를 범(犯)한 자기 백성을 살리기 위해 진정(眞正)한 자기희생정신(自己犧牲精神)으로 기꺼이 자기의 이름을 지워버려 달라고 호소(呼訴)했다(참조: 출 32:31~32). 요나는 완전히 낙담(落膽)에 빠졌다.
⑽.요나의 성냄은 예수께서 성전(聖殿)에서 돈 바꾸는 사람들을 쫓아내실 때 나타내신 것과 같은 고결(高潔)한 분노(憤怒)(참조: 요 2:13~17) 가 아니라 전적(全的)으로 이기심(利己心)에서 생겨난 것이었다. 그 선지자(先知者)는 자기의 성급(性急)한 정신(精神)으로 인(因)해 스스로 큰 축복을 빼앗겼다. (참조: 잠 14:29; 16:32). (욘 4:1~4, 재림교주석)
(01월 28일) (화) <의(義)로운 분노(憤怒)>
(Q)~성전(聖殿)을 잘못된 방식(方式)으로 사용(使用)하는 데 대한 예수님의 반응(反應)은 악(惡)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震怒)에 관해 무엇을 말해 줍니까? (마태복음 21:12~13과 요한복음 2:14~15)
(A)~<예수께서 성전(聖殿)을 정화(淨化)하신 것에 대한 복음서(福音書)의 서사(序詞)(마태복음 21:12~13; 마가복음 11:15~17; 누가복음 19:45~48; 요한복음 2:14~15) 는 하나님의 진노(震怒)가 하나님의 변덕(變德)스럽고 충동적(衝動的)인 태도(態度)가 아닌 의(義)롭고 책임감(責任感) 있는 분노(憤怒)로 이해(理解)되어야 한다는 것을 보여주는 귀중한 예(例)를 제공(提供)한다.>
⑴.악(惡)이 사랑의 대상(對象)을 해(害)칠 때 사랑이 악(惡)에 대해 노(怒)하지 않을 수 없는 것처럼 하나님은 사람의 완악(頑惡)함에 슬퍼하며 사랑으로서 죄(罪)에 대해 공의(公義)롭게 진노(震怒)하신다.
⑵."성전정화(聖殿淨化)는 인간(人間) 이상(以上)의 힘의 표현(表現)이었습니다."(소망, 164), 또한 사람들이 "그리스도를 바라보면서, 그들은 신성(神性)이 인간(人間)의 옷을 통해 번쩍이는 것을 봅니다."(소망 158, 162)
⑶.성전지역(聖殿地域)의 상인(商人)들이 "팔리는 동물(動物)에 대해 엄청난 가격(價格)을 요구(要求)했고, 그들은 이익(利益)을 제사장(祭司長)들과 통치자(統治者)들과 나누었고, 그들은 이렇게 사람들을 희생(犧牲)하여 자신들을 부유(富裕)하게 했다."(소망 154~155)라고 설명합니다
⑷.제사장(祭司長)들과 관원(官員)들은 "성전(聖殿) 뜰의 오용(誤用)"을 바로잡음으로써 백성 앞에서 하나님의 대표자(代表者)로서 참으로 봉사(奉仕)하기보다는 "자신들의 이익(利益)을 연구(硏究)"하고 있었다. (소망 156~157).
⑸.제사장(祭司長)들과 관원(官員)들은 "그들은 백성에게 성실성(誠實性)과 연민(憐愍)의 모범(模範)을 보여야 했고", "예배자(禮拜者)들의 필요(必要)"에 주의(注意)를 기울이고 "필요(必要)한 제물(祭物)을 살 수 없는 사람들을 도울 준비(準備)가 되어 있어야 했다."(소망 157). 그러나 그들은 탐욕(貪慾)이 마음을 완고하게 만들었다.
⑹.성전(聖殿)에 있는 사람들을 "고통(苦痛)받는 사람들, 궁핍(窮乏)하고 곤경(困境)에 처(處)한 사람들"이라고 묘사(描寫)합니다. "눈먼 사람들, 절름발이들, 청각장애인들이 거기에 있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침대에 누워 있었습니다.
⑺.하나님을 위한 가장 낮은 제물(祭物)도 살 수 없을 만큼 가난한 사람들이 많이 왔고, 자신의 배고픔을 달래기 위한 음식(飮食)조차 살 수 없을 만큼 가난한 사람들이 왔습니다." (소망, 157).
⑻.그러나 사제(司祭)들은 그들에게 "동정심(同情心)이나 연민(憐愍)"을 갖지 않았습니다. "그들의 고통(苦痛)은 사제(司祭)들의 마음에 연민(憐愍)을 불러일으키지 못했습니다." (소망 157)
⑼.제사장(祭司長)들과는 대조적(對照的)으로, 예수께서는 성전(聖殿)에 오셔서 "불공정(不公正)한 거래(去來)"와 "가난한 자들의 고통(苦痛)"을 보셨습니다. 그런 다음, 엘렌 G. 화잇은 분노(憤怒)라는 언어(言語)를 사용하여 예수님의 반응(反應)을 강조(强調)합니다. "그가 그 광경(光景)을 바라보시자, 분노(憤怒), 권위(權威), 능력(能力)이 그분의 얼굴에 나타났습니다."(소망 157).
⑽.E.G 화잇은 이러한 분노(憤怒)의 맥락(脈絡)에서 그리스도의 신성(神性)이 그분의 인성(人性)을 통해 번쩍였다고 강조합니다. "불경(不敬)한 거래(去來)에 관여(關與)한 자(者)들"이 그분을 바라보았을 때, 그들은 "하나님의 심판대(審判臺) 앞에 서서 자신의 행위(行爲)에 대해 대답하는 것"처럼 느꼈습니다. 그녀는 예수가 "돈 바꾸는 자들의 상(床)"을 무너뜨린 것을 "그가 전(前)에 절대 나타내지 않았던 열심(熱心)과 엄격(嚴格)함"으로 규정(規定)합니다. (소망 157~158).
(01월 29일) (수) <고난(苦難)은 하나님이 의도(意圖)하신 것이 아니다>
(Q)~하나님께서 왜 택(擇)하신 백성에게 고난(苦難)이나 심판(審判)을 내리셨다고 생각(生覺)합니까? (대하 36:16, 에스라 5:12을 읽고 예레미야 51:24~25, 44절)
(A)~<성경에서 하나님은 억눌린 자(者)와 억압(抑壓)받는 자(者)를 위(爲)한 격정(激情)과 괴롭히는 자(者)와 압제자(壓制者)에 대한 의분(義憤)을 반복(反復)해서 보이신다. 악(惡)이 없다면 하나님이 진노(震怒)하지 않으실 것이다. 그분의 진노(震怒)는 언제나 그리고 오직 당신의 피조물(被造物)을 해치는 악(惡)을 향(向)하신다.>
⑴.(합당한 형벌을 받아야 함) “그분께서 무한(無限)히 자비(慈悲)하시므로 죄인(罪人)에게 심판(審判)을 집행(執行)하지 않으신다고 스스로 안심(安心)하는 자들은 갈보리의 십자가(十字架)를 쳐다보아야 한다.
⑵.흠(欠) 없는 하나님의 아들이 돌아가신 것은 죄(罪)의 삯이 사망(死亡)이라는 것과 하나님의 율법(律法)을 범(犯)하는 것은 모두 합당(合當)한 벌(罰)을 받아야 한다는 것을 입증(立證)해 준다. 무죄(無罪)하신 그리스도께서 인류(人類)를 위(爲)하여 죄인(罪人)과 같이 되셨다. 그분께서는 죄의 형벌(刑罰)을 담당(擔當)하시고 아버지의 얼굴에서 외면(外面)당하셨다.”(대쟁투, 539).
⑶.(예레미야애가 3:32~33)에 따르면, 하나님은 일부러 우리를 근심(謹審)하게 하시는 것이 아니다. 문자(文字) 그대로, 하나님의 “본심(本心)”은 우리를 괴롭히지 않는다. 그분은 악인(惡人)에게 심판(審判) 내리기를 원(願)하지 않지만 사랑은 결국(結局) 정의(正義)와 별개(別個)일 수 없다.
⑷.하나님은 우리에게 그분께서 우리를 사랑하신 것처럼 서로 사랑하라고 분부(分付)하셨다. 종교(宗敎)는 하나님에 대한 사랑에 기초(基礎)되어 있으며, 그것은 서로 사랑하도록 우리를 이끈다. 그것은 감사(感謝)와 겸비(謙卑)와 오래 참음이 가득하다. 그것은 자아(自我)를 희생(犧牲)하고 오래 참고, 자비(慈悲)롭고 용서성(容恕性)이 많다. 그것은 전 생애(生涯)를 성화(聖化)시키고 그 영향(影響)을 다른 사람에게까지 뻗친다. (4T 223)
⑸.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들은 적개심(敵愾心)이나 시기심(猜忌心)을 품을 수 없다. 영원한 사랑의 하늘 원칙(原則)이 마음을 채울 때 그것은 다른 사람에게 흘러갈 것이다. 그저 그들로부터 호의(好意)를 받았기 때문이 아니라 사랑이 행동의 원칙(原則)이며, 품성(稟性)을 변화(變化)시키고, 충동(衝動)을 제어(制御)하며, 정욕(情欲)을 통제(統制)하고 적의(敵意)를 굴복(屈伏)시키고 애정(愛情)을 향상(向上)시키고 고귀(高貴)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4T 223)
⑹.자기 자신의 헛된 행위(行爲)를 기뻐하고 자신의 탁월(卓越)한 자질(資質)을 자랑하면서 자아(自我)를 높이기 위하여 다른 사람들이 열등(劣等)한 것처럼 보이게 하려고 애쓰며, 무정(無情)한 자가 하나님께 드리고자 하는 것보다 더 큰 영광(榮光)을 주장(主張)하는 것은 사악(邪惡)한 교만(驕慢)이다. 그리스도의 제자(弟子)들은 주님의 교훈(敎訓)에 유의(留意)할 것이다.
⑺.바벨론 사람들의 약탈 행위(掠奪行爲)가 하나님께서 당신 백성의 죄악(罪惡)을 처벌(處罰)하고 그들을 회개(悔改)하도록 이끌기 위하여 사용(使用)되었다는 사실이 결코 바벨론 사람들의 악한 행위(行爲)들에 대한 책임을 경감(輕減)시켜 준 것은 아니었다(참조: 사도행적, 581. 소망, 471).
⑻.각 사람은 자기 자신의 악(惡)한 선택(選擇)에 책임(責任)을 져야 한다. 비록 하나님이 어떤 악행(惡行)을 유익(有益)한 목적(目的)을 위해 사용하시더라도(시 76:10), 그것은 결코 그 죄에 대한 책임(責任)을 그분이 지시는 것은 아니다. 하나님께서는 때때로 원수(怨讐)의 계략(計略)이 자비(慈悲)로운 목적(目的)을 이루도록 섭리(攝理)하신다.
⑼.성경(聖經)은 하나님이 내리신 것으로 묘사(描寫)하는 다른 많은 심판(審判)도 백성들이 여호와를 버리고 이방(異邦)의 “신(神)들”을 섬기기로 한 결정(決定)에 따라(삿 2:13~14, 시 106:41~42) 하나님께서 그들을 적들에게 “넘기”(삿 10:6~16, 신 29:24~26)신 것으로 설명(說明)한다.
⑽.하나님이 심판(審判)을 원(願)치 않으시기에 계속 용서(繼續容恕)하시고 뉘우칠 기회(機會)를 주시지만 뉘우치지 않는 죄(罪)와 반역(叛逆)과 악(惡)은 우주(宇宙)의 영구적(永久的) 평화(平和)를 위(爲)해 심판(審判)하실 것이다.
(01월 30일) (목) <긍휼(矜恤)을 보이심>
(Q)~진노(震怒)에서 우리를 건지는 것은 하나님의 속성(屬性)에 대해 무엇을 말합니까? (살전 1:10)
(A)~<하나님의 진노(震怒)는 '무서운' 것이지만, 결코 부당(不當)하거나 사랑이 없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구약(舊約)과 신약(新約)에서 하나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에 악(惡)에 대해 진노(震怒)하신다. 하나님의 진노(震怒)가 무서운 것은 하나님의 순전(純全)한 선(善)하심, 영광(榮光)과 대조(對照)되는 악(惡)의 교활(狡猾)한 본질(本質) 때문이다.>
⑴.악(惡)이나 불의(不義)가 없으면 하나님의 진노(震怒)도 없다. 결국 우주(宇宙)에서 악(惡)을 뿌리 뽑는 것으로 나타나는 궁극적(窮極的)인 하나님의 사랑 행동(行動)은 더 이상의 노(怒)하심과 진노(震怒)도 없게 만들 것이다. 이는 불의(不義)나 악(惡)이 다시 존재(存在)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완전(完全)한 사랑의 관계(關係) 속에서 행복(幸福)과 정의(正義)만이 영원(永遠)히 지속(持續)될 것이다.
⑵.구원(救援)의 결정적(決定的)인 역사는 갈바리에서 이루어졌지만, 구원(救援)의 과정(過程)은 계속(繼續)되고 있고, 그리스도가 재림(再臨)하실 때에야 마쳐질 것이며, 그때 구주(救主)의 봉사(奉仕)를 받아들인 자들은 죄(罪)의 마수(魔手)에서 영원(永遠)히 건져냄을 받을 것이다.
⑶.그들은 아브라함의 자손(子孫)임을 자랑하고 있었으나(마태 3:9) “아브라함의 행사(行事)를”(요 8:39) 행하는 데 실패(失敗)했으며, 따라서 그들의 “아비 마귀”(요 8:44)의 자식들이었다.
⑷.진리에 대한 지식을 가진 자들은 일어나 빛을 발하라. “크게 외치라 아끼지 말라 네 목소리를 나팔같이 날” (사 58:1) 려라. 이 이상 더 진리를 불완전하게 하지 말라. 살아 계신 하나님을 위하여 영혼으로 외치게 하라. 호흡이 코에 매달려 있는 인생을 너희는 의지하지 말라. 만약 그대들이 마음의 문을 연다면 보혜사께서 그대들에게 들어오실 것이다.
⑸.영적교만(靈的驕慢)은 하나님의 말씀과 조화(調和)되지 않으며 우리들의 신앙 고백(信仰告白)과도 일치(一致)하지 않는다. 여호와를 섬기는 그대들은 모두 여호와를 찾으라. 여호와를 만날 만한 때에 찾고 가까이 계실 때에 주님을 부르라. “악인(惡人)은 그 길을, 불의(不義)한 자는 그 생각을 버리고 여호와께로 돌아오라 그리하면 그가 긍휼(矜恤)히 여기시리라 우리 하나님께로 나아오라 그가 널리 용서(容恕)하시리라” (사 55:7). (1 SM 111)
⑹.우리들은 적나라(赤裸裸)한 허락(許諾)들을 믿어야 하며 감정(感情)을 믿음으로 잘못 받아들여서도 안 된다. 우리가 하나님을 완전히 신뢰(信賴)하고 죄(罪)를 용서해주시는 구세주(救世主)로서 예수님의 공로(功勞)를 의뢰(依賴)할 때 우리는 우리가 소망(所望)하는 모든 도움을 받게 될 것이다. (1 SM 351)
⑺.주님께서는 당신의 선지자(先知者)를 통하여 “악인(惡人)은 그 길을 불의(不義)한 자는 그 생각을 버리고 여호와께로 돌아오라 그리하면 그가 긍휼(矜恤)히 여기시리라 우리 하나님께로 나아오라 그가 널리 용서(容恕)하시리라” (사 55:7) 고 약속하셨다.
⑻.오직 위로부터 난 지혜(智慧)는 첫째 성결(聖潔)하고 다음에 화평(和平)하고 관용(寬容)하고 양순(良順)하며 긍휼(矜恤)과 선(善)한 열매가 가득하고 편벽(偏僻)과 거짓이 없나니 화평(和平)케 하는 자들은 화평(和平)으로 심어 의(義)의 열매를 거두느니라” (약 3:17~18) 고 말하였다. 이러한 지혜(智慧)야말로 구원(救援)의 잔(盞)을 받고 주님의 이름을 부르는 자에게서 나타나는 지혜(智慧)일 것이다.
⑼.죄(罪)를 범(犯)한 자에게 사유(赦宥)하심을 주는 이 구원(救援)은 그에게 전능(全能)하신 주님의 엄밀(嚴密)한 검사(檢査)를 받게 될 의(義)를 나타낼 것이며 하나님과 인간의 강(强)한 원수(怨讐)를 이기는 승리(勝利)를 안겨 주고 구원(救援)을 받는 자를 위하여 영원한 생명과 기쁨을 주며 따라서 이 구원(救援)은 기별(奇別)을 듣고 기뻐하는 겸손(謙遜)한 자에게 즐거움의 주제(主題)가 될 것이다. (1 SM 338.2)
⑽.사랑은 하나님의 본질(本質)이지만 진노(震怒)는 아니다. 악(惡)이 없으면 하나님의 진노(震怒)도 없다. 그분은 긍휼(矜恤)로 우리를 진노(震怒)에서 건지시며 심판(審判)을 자신에게 맡기라고 하신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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