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과 사랑과 자비의 하나님(질문, 대답, 설명) 01/25/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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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김명호 작성일25-01-17 11:24 조회232회 댓글0건본문
제4과 사랑과 자비의 하나님
(1월 25일 안식일 / 일몰: 오후 5시 48분)
연구 범위: 시 103:13, 사 49:15, 호 11:1-9, 마 23:37, 고후 11:2, 고전 13:4-8
기억절: “여인이 어찌 그 젖 먹는 자식을 잊겠으며 자기 태에서 난 아들을 긍휼히 여기지 않겠느냐 그들은 혹시 잊을지라도 나는 너를 잊지 아니할 것이라"(사 49:15).
감정은 흔히 바람직하지 않으며 피해야 할 것으로 여겨진다. 일부 사람들은 감정이 본질적으로 비이성적이기 때문에, 훌륭한 인격을 갖춘 사람은 감정적일 수 없다고 주장한다. 고대 그리스 철학은 이성적인 사람, 즉 격정에 휘둘리지 않고, 이성으로 감정을 다스리는 사람을 이상적인 존재로 보기도 했다.
물론 절제되지 않은 감정은 문제가 될 수 있다. 하지만 하나님은 감정을 느낄 수 있는 존재로 사람을 창조하셨고, 하나님 자신도 성경 전반에서 깊은 감정을 가지시는 것으로 나타난다. 만약 성경이 일관되게 묘사하는 것처럼 하나님이 깊은 감정을 가지신다면, 감정은 본질적으로 나쁘거나 비합리적인 것일 수 없다. 성경의 하나님은 온전히 선하시고 완전한 지혜를 가지신 분이기 때문이다.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이 깊은 감정을 동반하는 사랑임을 알 때 우리가 얻을 수 있는 아름다운 진리가 있다. 그러나 거기에는 감정적이든 아니든 하나님의 사랑은 완전하며, 인간이 경험하는 감정과 동일한 것으로 생각해서는 안 된다는 단서가 항상 함께 있다.
학습 목표
깨닫기: 하나님은 감정을 보이며 뜨겁게 사랑하고 불쌍히 여기며 긍휼을 베푸신다.
느끼기: 하나님의 감정은 온전하며 그 질투도 인간의 유익을 위한 의로운 열정이다.
행하기: 하나님의 사랑에 반응하고 그분의 열정을 본받아 그 사랑을 세상에 나타낸다.
TMI 위로
2.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은 그 깊이가 얼마나 깊습니까?(렘 31:20)
*답: 사랑하고 기뻐하는 아들이 행복하도록 대하는 깊은 사랑이다.
3. 호세아는 우리에 대한 하나님의 감정의 깊이를 어떻게 묘사합니까?(호 11:8)
*답: 내가 너를 놓을 수 없다고 묘사했다,
4. 우리를 돌보는 하나님 사랑을 예수님은 어떻게 생생하게 가르치셨습니까?(신 32:11)
*답: 독수리가 새끼를 보호하고 기르는 것으로 비유하셨다.
5. 시기하지 말라고 하신 하나님이 질투하시는 것은 어떤 것을 의미합니까?(고후 11:2)
*답: 진정한 사랑을 불륜하는 아내에게 나타내는 심정을 표현한 것이다.
6. 어떻게 감정과 이성 사이에서 온전한 균형을 잡을 수 있습니까?(살전 3:12, 13)
*답: 주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그 사랑을 따를 때 가능하다.
결론: 하나님은 깊은 감정을 보이시며 인간을 감정을 느낄 수 있는 존재로 창조하셨다. 절제되지 않은 감정은 문제지만 하나님은 그렇지 않으며 그분의 사랑은 인간의 어떤 사랑보다 크고 깊다. 하나님은 불붙는 듯한 마음으로 인간을 사랑하며 긍휼히 여기시고 필요를 채우신다. 그런 마음은 인간의 질투와 다른 그분의 백성과의 배타적 관계와 유익을 위하는 의로운 열정이다. 우리는 이 사랑에 반응하고 그것을 세상에 나타내어야 한다.
1월 19일(일) 어머니의 사랑보다 더한 사랑
인간이 경험하는 가장 큰 사랑은 아마 자식에 대한 부모의 사랑일 것이다. 성경은 종종 부모와 자식 관계를 예를 들어 인류를 향한 하나님의 놀라운 자비를 묘사하며, 그와 같은 인간이 나타내는 그 어떤 깊고 아름다운 감정보다 하나님의 사랑이 비할 수 없이 크다는 것을 강조한다.
시편 103:13, 이사야 49:15, 예레미야 31:20을 읽어 보라. 이러한 묘사는 하나님의 사랑의 본질과 깊이에 대해 무엇을 보여주는가?
[시103:13] 아버지가 자식을 긍휼히 여김 같이 여호와께서는 자기를 경외하는 자를 긍휼히 여기시나니,
[사49:15] 여인이 어찌 그 젖 먹는 자식을 잊겠으며 자기 태에서 난 아들을 긍휼히 여기지 않겠느냐 그들은 혹시 잊을지라도 나는 너를 잊지 아니할 것이라.
[렘31:20] 에브라임은 나의 사랑하는 아들 기뻐하는 자식이 아니냐 내가 그를 책망하여 말할 때마다 깊이 생각하노라 그러므로 그를 위하여 내 창자가 들끓으니 내가 반드시 그를 불쌍히 여기리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답: 인간적 표현으로 기록했는데, 아버지, 어머니가 자녀를 사랑하는 사랑의 모든 사랑을 다 합한 것 이상의 사랑으로 사랑을 나타냈다.
이 구절에 따르면,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는 자녀로 여기시고, 선한 부모가 자녀를 사랑하는 것처럼 우리를 사랑하신다. 그러나 이사야 49:15이 말한 것처럼, 육신의 어머니도 “젖 먹는 자식을 잊”으며 “자기 태에서 난 아들을 긍휼히 여기지 않”을 수 있다. 하지만 하나님은 결코 그분의 자녀를 잊지 않으시며 그분의 자비는 끝이 없다(애 3:22).
주목할 만한 점은 하나님의 풍성한 인애를 묘사하는 많은 본문에서 사용된 히브리어 라함(raḥam)이 태를 의미하는 용어 ‘라함’에서 유래한 것으로 추정된다는 것이다. 학자들이 말한 것처럼 하나님의 사랑은 “어머니의 태와 같은 사랑”이다. 하나님의 인애하심은 인간의 어떤 사랑, 심지어 갓난아기에 대한 어머니의 사랑과도 비교할 수 없을 만큼 크다.
예레미야 31:20에 의하면 하나님은 당신의 언약 백성이 자주 당신을 반역하고 근심하게 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을 “사랑하는 아들”과 “기뻐하는 자식”으로 여기신다. 그렇지만 하나님은 “내가 그로 인하여 애를 태우나니 내가 반드시 그에게 긍휼을 베풀리라”(흠정역)라고 선언하신다. 여기서 “긍휼”로 번역된 용어는 위에서 신적 인애의 의미로 사용한 단어 라함(raḥam)이다. 또한 “애를 태”운다는 구절은 문자 그대로 직역하면 “내 창자가 들끓으니”로 번역할 수 있다.
이것은 하나님의 마음을 표현하는 직관적인 언어로, 백성을 향한 하나님의 자비로운 사랑의 깊이를 나타낸다. 그들의 부정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모든 합리적인 기대를 넘어 당신의 백성에게 풍성한 자비와 긍휼을 한없이 베푸신다.
<교훈> 하나님의 사랑은 인간의 어떤 사랑도 비교할 수 없을 만큼 크기에 인간의 부정함에도 불구하고 당신의 백성에게 풍성한 사랑과 자비를 한없이 베푸신다.
<부가설명> 사랑이라고 하면 일반적으로 남녀의 사랑을 먼저 생각하는지도 모르겠다. 다음으로 흔히 말하는 모성애가 아닌가? 남녀의 사랑은 달콤하다고 표현할 수 있을는지? 어머님의 사랑은 모유맛일는지 모르겠다. 우정도 구수하다. 그런데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은 그 자체가 고통이다. 그 사랑이 고통인 것은 롬5:8이 잘 표현한다. 우리가 죄인 되었을 때 독생자를 보내사 우리 대신 죽게 하셔서 사랑을 증명하셨으니 고통이 아니고 무엇인가? 불효하는 자식에 대한 부모의 사랑도 고통일 것이다. 겟세마네의 피땀과 십자가 상에서 엘리엘리라마사박다니를 외치신 것은 하나님 사랑의 고통의 중량을 나타낸다. 얼마나 고통스러웠으면 땀이 핏방울 같아졌을까? 얼마나 처절했으면 그렇게 엘리엘리라마사박다니를 외쳤겠는가? 이런 사랑으로 탄생한 것이 거듭난 신자들이다. 참으로 거듭난 신자는 하나님의 사랑의 열매다. 신자들의 맛이 하나님의 사랑과 같은 맛이어야 하지 않겠는가!
1월 20일(월) 애끓는 사랑
인류를 향한 하나님의 측량할 수 없는 깊고 자비로운 사랑이 호세아서에 나타난다. 하나님은 선지자 호세아에게 “너는 가서 음란한 여자를 맞이하여 음란한 자식들을 낳으라 이 나라가 여호와를 떠나 크게 음란함이니라”(호 1:2)라고 말씀하셨다. 이후에 호세아 11장은 사랑하는 아버지가 자녀를 돌보는 모습으로 하나님과 당신의 백성의 관계를 묘사한다.
호세아 11:1-9을 읽어 보라. 이 구절이 표현하는 모습은 하나님이 당신의 백성을 사랑하고 돌보시는 방식을 어떻게 생생하게 보여주는가?
[호11:1~9] 이스라엘이 어렸을 때에 내가 사랑하여 내 아들을 애굽에서 불러냈거늘
2 선지자들이 그들을 부를수록 그들은 점점 멀리하고 바알들에게 제사하며 아로새긴 우상 앞에서 분향하였느니라 3 그러나 내가 에브라임에게 걸음을 가르치고 내 팔로 안았음에도 내가 그들을 고치는 줄을 그들은 알지 못하였도다 4 내가 사람의 줄 곧 사랑의 줄로 그들을 이끌었고 그들에게 대하여 그 목에서 멍에를 벗기는 자 같이 되었으며 그들 앞에 먹을 것을 두었노라 5 그들은 애굽 땅으로 되돌아 가지 못하겠거늘 내게 돌아 오기를 싫어하니 앗수르 사람이 그 임금이 될 것이라 6 칼이 그들의 성읍들을 치며 빗장을 깨뜨려 없이하리니 이는 그들의 계책으로 말미암음이니라 7 내 백성이 끝끝내 내게서 물러가나니 비록 그들을 불러 위에 계신 이에게로 돌아오라 할지라도 일어나는 자가 하나도 없도다 8 에브라임이여 내가 어찌 너를 놓겠느냐 이스라엘이여 내가 어찌 너를 버리겠느냐 내가 어찌 너를 아드마 같이 놓겠느냐 어찌 너를 스보임 같이 두겠느냐 내 마음이 내 속에서 돌이키어 나의 긍휼이 온전히 불붙듯 하도다 9 내가 나의 맹렬한 진노를 나타내지 아니하며 내가 다시는 에브라임을 멸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내가 하나님이요 사람이 아님이라 네 가운데 있는 거룩한 이니 진노함으로 네게 임하지 아니하리라.
*답: 에브라임을 놓을 수 없다는 간절함으로 불붙듯하는 긍휼을 나타내신다. 어린아기를 돌보듯하는 마음으로 돌보신다.
당신의 백성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은 자녀를 향한 부모의 친밀한 애정으로 비유된다. 성경은 어린아이에게 걷는 법을 가르치고, 사랑하는 자녀를 품에 안고, 아픈 것을 고쳐주고, 양식을 제공하는 등의 모습을 통해 하나님이 당신의 백성을 지극히 돌보심을 나타낸다. 하나님께서 당신의 백성을 “사람이 자기의 아들을 안는 것 같이”(신 1:31) 돌보셨고 “자비로 그들을 구원하시고 옛적 모든 날에 그들을 드시며 안으셨"(사 63:9)다.
하나님의 변함없는 신실하심에도 불구하고 그분의 백성은 반복적으로 불충했고, 결국 하나님을 밀어내고 스스로 심판을 자초하여 그분을 깊이 슬프게 했다. 하나님은 자비로우시지만 결코 공의를 배제하지 않으신다(다음 과에서 살펴보겠지만 사랑과 공의는 언제나 함께한다).
당신은 어떤 일로 속이 뒤틀릴 정도로 마음이 상했던 경험이 있는가? 바로 그 모습이 하나님께서 당신의 백성을 향해 가지신 감정의 깊이를 표현하는 데 사용된다. 속이 뒤집히고 마음이 불붙는 것 같다는 표현은 강렬한 감정을 나타내는 관용적인 표현으로 하나님과 인간 모두에게 적용된다.
마음에 불이 붙는다(카마르, kamar)는 표현는 솔로몬 앞에 나온 두 여인이 한 아기를 두고 각각 자신의 아이라고 주장하는 심판에서 나타난다. 아이를 해칠 의도는 없었지만 솔로몬이 아기를 둘로 나누라고 명령했을 때, 이런 감정이 아이의 생모의 격렬한 반응에서 나타났다(왕상 3:26, 창 43:30 비교).
<교훈> 아이에게 필요를 제공하고 양육하는 부모의 사랑, 그들을 향해 느끼는 불붙는 것 같은 마음을 통해 하나님은 당신의 백성에 대한 사랑의 강도를 나타내신다.
<부가설명> 부모의 사랑의 돌봄을 받아 자란 아이는 그 사랑으로 기억하지 못한다. 부모가 그들에게 하는 것은 당연한 것으로 여긴다. 오늘날 인간들이 창조주에 대하여 가지는 태도가 바로 그렇다. 이 글을 쓰고 있는 필자의 마음이 무겁다. 나도 하나님의 이 사랑의 고통을 바르게 알지 못하고 살고 있기 때문이다. 내 삶의 모습이 하나님 사랑의 맛을 내지 못하는 것을 너무나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성령의 열매가 아름답게 맺힐 때 이 사랑의 맛이 날 것이다. 철든 자녀가 부모님의 사랑을 어렴풋이 느끼듯이 이제는 말씀을 먹고 깨달아서 이 사랑을 깊이 느끼고 우리도 사랑의 맛을 느끼도록 살게 성령님의 돌보심을 간구하자. 성령께서 나를 살아주시면 내 삶의 열매는 사랑의 맛을 낼 것이다.
1월 21일(화) 예수님의 긍휼
신약 성경도 하나님의 긍휼을 묘사하는 데 구약과 같은 심상을 사용한다. 바울은 아버지 하나님을 “자비의 아버지시요 모든 위로의 하나님”(고후 1:3)이라고 말한다. 나아가 바울은 에베소서 2:4에서 하나님께서 “긍휼이 풍성하신” 분이시며 “우리를 사랑하신 그 큰 사랑을 인하여” 인류를 구속하신다고 설명한다.
많은 비유에서 그리스도는 아버지의 연민을 묘사하기 위해 반복적으로 직관적이고 애끓는 감정을 말씀하셨다(마 18:27, 눅 10:33, 눅 15:20). 그리고 구약과 신약에서 하나님의 긍휼을 묘사하는 동일한 표현이 복음서에서도 고통받는 사람에 대한 예수님의 자비로운 마음을 묘사하는 데 사용된다.
마태복음 9:36, 마태복음 14:14, 마가복음 1:41, 마가복음 6:34, 누가복음 7:13을 읽어 보라. 마태복음 23:37도 살펴 보라. 이 구절은 그리스도께서 사람들의 곤경을 어떻게 느끼셨다고 말하고 있는가?
[마9:36] 무리를 보시고 불쌍히 여기시니 이는 그들이 목자 없는 양과 같이 고생하며 기진함이라.
[마14:14] 예수께서 나오사 큰 무리를 보시고 불쌍히 여기사 그 중에 있는 병자를 고쳐 주시니라.
[막1:41] 예수께서 불쌍히 여기사 손을 내밀어 그에게 대시며 이르시되 내가 원하노니 깨끗함을 받으라 하시니,
[막6:34] 예수께서 나오사 큰 무리를 보시고 그 목자 없는 양 같음으로 인하여 불쌍히 여기사 이에 여러 가지로 가르치시더라.
[눅7:13] 주께서 과부를 보시고 불쌍히 여기사 울지 말라 하시고,
[마23:37]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선지자들을 죽이고 네게 파송된 자들을 돌로 치는 자여 암탉이 그 새끼를 날개 아래에 모음 같이 내가 네 자녀를 모으려 한 일이 몇 번이더냐 그러나 너희가 원하지 아니하였도다.
*답: 불쌍히 여기셨다.
복음서는 곤경에 처하거나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을 그리스도께서 불쌍히 여기셨다고 몇 번이고 반복해서 말한다. 그분은 긍휼히 여기셨을 뿐만 아니라 사람들의 필요를 채워주셨다.
또한, 예수님은 자신의 백성들로 인해 애통해하셨다. 도성을 바라보시며 눈물을 흘리시던 그리스도를 생각해 보라. “암탉이 그 새끼를 날개 아래에 모음 같이 내가 네 자녀를 모으려 한 일이 몇 번이더냐 그러나 너희가 원하지 아니하였도다”(마 23:37). 여기서 우리는 그리스도의 애통하심이 구약성경 전체에 묘사된 하나님의 애통하심과 밀접하게 일치하는 것을 알 수 있다. 실제로 많은 성경학자는 고대 근동 지역에서만 신을 묘사하는 데 새끼를 돌보는 어미 새의 모습을 사용하였다고 말한다.
많은 이들이 예수께서 사용하신 새끼를 감싸 보호하려는 은유는 신명기 32:11에 기록된 독수리가 새끼 위에 너풀거리며 보호하고 돌보는 모습을 암시하신 것이라고 여긴다.
<교훈> 신구약에서 하나님의 긍휼을 묘사하는 표현이 고통받는 자를 대하는 예수의 마음을 묘사하는 데 사용된다. 그분은 우리를 긍휼히 여기시고 필요를 채워주셨다.
<부가설명> 불쌍히 여긴다는 말은 원어로 ‘스플랑크니조마이’인데 ‘내심으로 감동하다, 동정심을 가지다, 동정하다, 자비를 베풀다, 불쌍히 여기다’라는 뜻이다. 이 말은 공관목음에만 12회 나온다. 예수님의 동정하시는 모습을 묘사하였다. 사랑에는 동정하는 성질이 포함되어 있다. 불쌍하다고 할 때 많이 아프거나, 가난하거나, 곤경에 처한 사람들을 대할 때 나타나는 마음이다. 하나님은 사망으로 달려가는 인생을 볼 때 이런 마음이 된다. 그래서 동정을 베푸신다. 그것은 은혜라는 말로 표현한다. 사망으로 종신하는 사람들을 불쌍히여겨 이런 인생을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겨주시려고 말씀 하나님께서 사람이 되어 예수라는 이름으로 세상에 오셨다. 그분이 오신 그 자체가 하나님의 불쌍히 여기심이 나타난 것이다. 예수님은 그 자체가 하나님의 사랑이다. 그 자체가 하나님의 동정심이다. 하나님이 사랑과 동정의 하나님이 아니라면 왜 독생자를 보내서 사람을 대신하여 죽으셨겠는가? 아이가 부모가 양육할 때 사랑을 올바르게 모르는 것 이상으로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을 모른다. 성령님, 이 사랑을 맛보아 하나님의 선하심을 알게 해주소서(시34:8).
1월 22일(수) 하나님이 질투하시다니
성경의 하나님은 “자비하신 하나님”으로 히브리어로 엘 라훔(el raḥum, 신 4:31)이다. “엘"은 ‘하나님’을 의미하며, 라훔은 자비(raḥum)를 뜻하는 어근의 다른 형태이다. 하지만 하나님은 자비로운 하나님이실 뿐만 아니라 질투하는 하나님, 엘 카나(el qana’)이시다. “네 하나님 여호와는 소멸하는 불이시요 질투하시는 하나님”이시다(신 4:24, 신 6:15, 수 24:19, 나 1:2 참조).
고린도전서 13:4은 사랑은 “시기하지 아니”한다고 선포한다. 그렇다면 어떻게 하나님이 “질투하시는 하나님”이 될 수 있는가? 고린도후서 11:2을 읽고 성경에서 하나님의 백성이 하나님께 불충실했던 모습을 생각해 보라(시 78:58 참조). 이 구절은 하나님의 “질투”를 이해하는 데 어떤 도움을 주는가?
[고후11:2] 내가 하나님의 열심으로 너희를 위하여 열심을 내노니 내가 너희를 정결한 처녀로 한 남편인 그리스도께 드리려고 중매함이로다 그러나 나는,
*답: 남편이 아내가 불륜할 때 질투를 느끼지 않을 자 있을까? 그렇다면 남편은 아내를 사랑하지 않은 것이다.
하나님의 “질투”는 종종 오해받는다. 누군가에 대해 “질투심이 있다”라고 말한다면 그것은 그 사람에 대한 칭찬은 아닐 것이다. 질투는 많은 언어에서 부정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다. 그러나 성경이 말하는 하나님의 질투에는 부정적인 의미가 없다. 그것은 아내와의 온전하고 배타적인 사랑의 관계를 바라는 남편의 간절하고 진실한 열정을 뜻한다.
사랑과 반대되는 질투가 있지만(고전 13:4), 고린도후서 11:2에 따르면 선하고 정당한 “질투”도 있다. 바울은 이를 “하나님의 열심(질투)”이라고 말한다(고후 11:2). 하나님의 질투는 오직 그리고 언제나 의로운 것이며, 이는 당신의 백성을 향한 하나님의 열렬한 사랑이라고 설명할 수 있다.
당신의 백성을 향한 하나님의 열심(qana’)은 그들에 대한 깊은 사랑에서 비롯된다. 하나님은 당신의 백성과 온전한 관계를 원하시며, 오직 당신만이 그들의 하나님이 되기 원하신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랑은 종종 거절당하는, 일방적인 사랑으로 묘사된다(호 1-3, 렘 2:2, 렘 3:1-12 참조).
따라서 하나님의 “질투”와 “열심”은 결코 이유 없이 일어나지 않으며 언제나 불충하고 악한 사람을 향한다. 그것은 인간의 질투와 같은 부정적인 의미가 없는 하나님의 열심(질투)이다. 하나님의 질투는 결코 시기심이 아니며 항상 당신의 백성과의 온전한 관계와 그들의 유익을 위하는 정당하고, 진실한 열정이다.
<교훈> 하나님의 질투는 언제나 불충하고 악한 사람을 향한다. 그것은 부정적인 의미가 없는 당신의 백성과의 배타적 관계와 유익을 위하는 의로운 열정이다.
<부가설명> 하나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에 질투하신다. 그가 사랑하는 대상이 다른데 눈을 돌리기 때문이다. 다른데는 사망하는 곳이고 망하는 데다. 사랑하는 대상이 사망으로 망하려고 달려가는데 열불이 나서 달려와 말리지 않을 사람이 있겠는가? 그것은 자신을 위한 것이기 전에 사랑하는 상대를 위한 열정이다. 하나님의 질투는 생명을 주시려는 열정이다. 생명을 거절하고 도망가는 사람을 향하여 부디 생명을 받아 살아나라고 안달하는 사랑이다. 얼마나 안달했으면 하나님께서 사람이 되어 이 지구로 오셨겠는가? 그뿐인가? 대신 죽어주셨다. 그가 더는 죽음으로 달려가지 않도록 조치하신 것이다. 그래서 아담 안에서 죽은 모든 사람이 그리스도 안에서 살게 된 것이다(고전15:22). 그런데도 이것을 거절하면 이혼할 수밖에 없다. 이제는 남남이 되었고 그는 사망이 되었다. 남은 일을 사랑하셨기 때문에 장례해주신다. 우리는 사랑의 장례로 무덤에 갈 것인지 사랑의 신부가 되어 하늘나라에 갈 것인지 깊이 생각해야 할 것이다. 부디 하늘에 오라고 지금도 손내밀고 계신다.
1월 23일(목) 사랑과 자비의 하나님
하나님은 동정하시고 사랑하시는 분이며, 이러한 하나님의 감정은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가장 잘 나타난다. 하나님은 동정심이 많으시고(사 63:9, 히 4:15 비교), 당신의 백성의 슬픔을 깊이 공감하시며(삿 10:16, 눅 19:41), 기꺼이 들으시고, 응답하시며 위로하신다(사 49:10, 15; 마 9:36; 마 14:14).
고린도전서 13:4-8을 읽어 보라. 이 구절은 어떤 면에서 하나님의 자비롭고 놀라운 사랑을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에 반영하도록 우리를 부르고 있는가?
[고전13:4~8] 사랑은 오래 참고 사랑은 온유하며 시기하지 아니하며 사랑은 자랑하지 아니하며 교만하지 아니하며 5 무례히 행하지 아니하며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아니하며 성내지 아니하며 악한 것을 생각하지 아니하며 6 불의를 기뻐하지 아니하며 진리와 함께 기뻐하고 7 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디느니라 8 사랑은 언제까지나 떨어지지 아니하되 예언도 폐하고 방언도 그치고 지식도 폐하리라.
*답: 오래 참고, 온유, 시기하지 않음, 자랑하지 않음, 성내지 않음, 악한 것 생각하지 않음, 불의 안 기뻐한, 진리를 기뻐함, 모든 것을 참고 믿고 바라고 견딘다.
우리가 인간 관계에서 이럴 수 있다면 성령의 열매가 나타나는 것이다.
우리는 고린도전서 13:4-8에 묘사된 사랑을 나타내는 사람과 관계를 맺고 싶어한다. 하지만 우리 자신은 다른 이에게 이런 사랑을 보이는 사람이 되려고 얼마나 노력하는가? 우리 스스로는 오래 참고, 온유하며, 시기하지 않고, 자랑하지 않으며, 무례하지 않거나,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않으며 “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디”며 결코 “없어지지” 않는(고전 13:7, 8, 흠정역) 그런 사랑을 나타낼 수 없다. 이러한 사랑은 오직 성령의 열매를 통해서만 우리 삶에서 실현될 수 있다. 그렇기에 믿음으로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들의 마음에 성령을 통해 하나님의 사랑을 부어 주시는 하나님을 찬양한다(롬 5:5).
우리는 어떻게 매우 감정적이시면서도 언제나 온전히 의롭고 합당한 하나님의 사랑에 실질적으로 반응할 수 있는가? 어떻게 그 사랑을 하나님의 은혜와 성령의 능력을 통해 각자의 삶 속에서 반영할 수 있는가? 첫째, 우리가 할 수 있는 유일하게 적절한 반응은 사랑이신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이다. 둘째, 동정심과 자애로운 사랑을 다른 이들에게 적극적으로 베풂으로써 하나님의 사랑에 응답해야 한다. 기독교 신앙 안에서 만족하고 위로받는 것에 그치지 않고, 다른 사람들을 위로하려는 마음을 가져야 한다. 마지막으로, 우리의 마음을 스스로 변화시킬 수 없음을, 오직 하나님만이 그것을 변화시킬 수 있음을 인식해야 한다.
그러므로 하나님과 다른 사람을 위한 새로운 마음, 즉 선한 것을 높이고 내면의 쭉정이를 제거하는 순수하고 정결하게 하는 사랑을 주시도록 하나님께 간구하자.
그리고 우리도 이렇게 기도하자. “주께서 우리가 너희를 사랑함과 같이 너희도 피차간과 모든 사람에 대한 사랑이 더욱 많아 넘치게 하사 … 우리 주 예수께서 그의 모든 성도와 함께 강림하실 때에 하나님 우리 아버지 앞에서 거룩함에 흠이 없게 하시기를 원하노라”(살전 3:12, 13).
<교훈> 우리는 하나님의 자비롭고 놀라운 사랑을 다른 사람과의 관계에 반영하도록 부름 받았지만, 이는 자신이 아닌 하나님만이 성령을 통해 가능하게 하신다.
<부가설명> 사람에게는 사랑이 없다. 사람은 유혹의 욕심을 따라 썩어져가는 구습을 따르는 옛사람(엡4:22)이기 때문이다. 여기 유혹의 욕심을 따랐다는 말은 오늘 우리가 유혹의 욕심을 따르는 것이 포함 되지만, 이 본문은 아담이 유혹에 빠져 사망이 되어서 썩어져가는 옛사람이 된 것과 그의 후손이 되어 썩는 옛사람의 삶을 따르는 것을 말한다. 그러므로 우리에게는 생명이 없고 썩는 것뿐이다. 거기에는 악취가 나지 향기가 나지 않는다. 생명에는 향기가 있다. 예수님은 생명으로 오려서 사망을 이기시고 생명과 썩지 않는 것을 드러내셨다(딤후1:10). 그 생명이 사랑이다. 요일3:14을 읽으면 생명이 사랑인 것을 알 수 있다. “우리는 형제를 사랑함으로 사망에서 옮겨 생명으로 들어간 줄을 알거니와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사망에 머물러 있느니라.” 우리가 예수님의 생명을 얻을 때 예수님의 사랑을 나타낼 수 있다. 우리가 사랑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이다(요일4:18). 우리는 이 생명을 과연 가지고 있는가?
1월 24일(금) 더 깊은 연구를 위해
산상보훈 8장 “팔복”을 읽어 보라.
“자기 심령의 처참한 빈곤을 느끼는 사람, 다시 말해 자기 자신에게 선한 것이 전혀 없다는 것을 깨닫는 모든 사람들은 예수님을 바라봄으로 의와 능력을 발견할 것이다. 그분께서는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마 11장 28절)고 말씀하신다. 그분은 그대의 궁핍을 당신의 은혜의 부요함과 바꾸라고 명령하신다.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을 받을 가치가 없다. 그러나 우리의 보증인이신 그리스도께서는 그 사랑을 받을 자격이 있으신 것은 물론 당신에게로 나오는 모든 사람을 넉넉히 구원할 수 있으시다. 과거의 경험이 어떠하든지, 그리고 현재의 환경이 아무리 절망적이라 할지라도 연약하고 속절없고 낙담한 현 상태 그대로 예수께 나가면, 우리의 자비하신 구주께서는 멀리서부터 우리를 맞아 당신의 사랑의 팔과 의의 두루마기로 감싸 주신다. 그분께서는 우리에게 당신의 성품을 그대로 나타내는 흰 두루마기를 입혀 아버지께 이끄신다. 그분은 우리를 위해 하나님 앞에서 이렇게 간구하신다. ‘내가 대신 저 죄인의 자리에 앉았습니다. 자기 고집대로 하는 이 자녀를 보지 마시고 나를 보아 주십시오.’ 사탄이 죄를 들추며 우리의 영혼을 크게 대적하고 우리를 자기의 것으로 주장한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보혈은 더욱 강력하게 호소한다"(산상보훈, 8).
함께하는 토의를 위해
1. “그분께서는 우리에게 당신의 성품을 그대로 나타내는 흰 두루마기를 입혀 아버지께 이끄신다.” 때때로 우리의 잘못과 부족이 자신을 심히 낙담하게 하거나,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사랑을 다른 사람에게 나타내지 못할지라도, 예수께서 우리에게 당신의 성품의 흰옷을 입히셔서 아버지 앞에 서게 하시기에 우리가 그 앞에 용납된다는 놀라운 소식을 항상 되새겨야 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답: 그것이 우리의 믿음의 삶을 지켜나가는 방법이다.
2. 한 아기를 동일하게 자기 자식이라고 주장한 두 여인 앞에서 솔로몬이 그 아기를 나누라고 했을 때 친모의 마음이 어땠을지 상상해 보라. 열왕기상 3:26에 묘사된 감정에 대한 표현을 다시 생각해 보라. 이것은 호세아 11:8에서 당신의 백성을 향한 하나님의 감정을 묘사하는 데 다시 사용된 같은 말을 이해하는데 어떻게 도움이 되는가?
*답: 자기 아들을 죽이려고 할 때 엄마의 심정이 어떻겠는가? 하나님의 마음이 우리에게 그렇다는 것을 조금이라도 나타낸다.
3. 우리는 복음서에서 자주 예수께서 사람들의 형편을 보시고 마음 아파하시며 사람들의 필요를 채워 주시는 것을 보았다. 당신이 개인으로서, 혹은 집단으로서 안위가 필요한 사람들의 필요를 충족시킬 수 있는 실제적인 방법은 무엇인가?
*답: 각각 생각해보자. 상대의 형편을 따라서 여러 방법이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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