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과-언약적 사랑-(핵심Q&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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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이봉주 작성일25-01-06 00:23 조회878회 댓글0건첨부파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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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과 언약적(言約的) 사랑
(01월 11일 (안) / 일몰: 오후 5시 33분)
<기억절(記憶節)>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사람이 나를 사랑하면 내 말을 지키리니 내 아버지께서 그를 사랑하실 것이요 우리가 그에게 가서 거처를 그와 함께하리라"(요한복음 14:23).
<개요(槪要)>
⑴.하나님의 사랑은 근본적(根本的)으로 관계적(關係的)입니다. 하나님과 사랑스럽고 친밀(親密)한 관계(關係)는 하나님의 사랑의 자비(慈悲)에 대한 인간의 호혜(互惠) 없이는 존재(存在)할 수 없습니다.
⑵.하나님의 사랑은 영원(永遠)하다. 그 사랑은 아낌없고 무한(無限)히 주시는 사랑이지만 일방적(一方的)이지 않으며 관계적(關係的)인 사랑이다.
⑶.하나님은 모든 사람을 사랑하시고 상호 구속력(相互救贖力) 있는 관계(關係)를 수립(樹立)하고자 하십니다
⑷.하나님의 사랑 표현(表現)은 인간의 행동(行動)에 의존(依存)하거나 특정 유형(特定類型)의 사람에게만 국한(局限)되지 않습니다. 그는 각 사람에게 가치(價値)를 보고 그 사람을 자비(慈悲)로운 축복(祝福)의 대상(對象)으로 여깁니다.
⑸.하나님의 사랑은 조건부 관계(條件附關係)를 시작하려고 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의 자비(慈悲)는 보편적(普遍的)이고 무조건적(無條件的)이지만, 그는 인간과 구체적(具體的)이고 친밀한 관계를 맺기를 원(願)하며, 이는 조건성(條件性)을 의미(意味)합니다.
⑹.하나님의 사랑은 인간관계(人間關係)에 반영(反映)되도록 의도(意圖)되었습니다. 하나님은 보편적(普遍的)으로 상호 사랑의 관계를 추구(追求)합니다. 친밀한 관계의 지속(持續)은 적절한 인간의 반응(反應)을 의미합니다.
⑺.언약(言約)을 유지(維持)하는 사랑의 인간적 측면에는 하나님의 계명(誡命)을 지키고 서로를 사랑하는 것이 포함되며, 이는 하나님의 사랑에 의해 힘을 얻은 인간 활동(活動)입니다.
⑻.하나님은 인간(人間)과 사랑의 언약(言約)을 맺으신다. 이 특별한 관계(關係)에서 하나님이 사랑하지 않는다고 하시는 것은 사랑의 언약적 측면(言約的側面)을 강조(强調)하는 것으로 이것은 인간(人間)의 신실(信實)함에 달린 것이다.
⑼.하나님은 사랑을 실천(實踐)할 것을 요구(要求)하시며 우리는 세상에 사랑을 나타냄으로 어떤 사랑을 받은 자(者)임을 드러낼 수 있다.
⑽.하나님은 인간과 사랑의 관계를 맺기를 원하지만, 이 관계(關係)에는 우리 쪽에서 진정(眞正)한 응답(應答)과 순종(順從)이 필요(必要)합니다.
(01월 05일) (일) <하나님의 영원(永遠)한 사랑>
(Q)~하나님의 영원(永遠)한 사랑에 대한 올바른 정의(正義)와 하나님의 인자(仁慈)하심과 사랑과 자비(慈悲)가 어디까지 미치는지에 대해 성경에서 무엇이라고 가르치고 있습니까? (요한복음 3:16, 시편 33:5, 시편 145:9, 벧후 3:9, 디모데전서 2:4, 에스겔 33:11)
(A)~만약 우리의 사랑하는 하나님과의 관계(關係)(영원한 하나님 자체의 사랑이 아니라(렘 31:3)는 것이 조건부(條件附)라면, 관계의 인간적인 부분을 고려할 때 상실(喪失)될 수 있다. 예(例)를 들어, (호세아 9:15)는 이스라엘의 사악(邪惡)함과 악(惡)함 때문에 하나님과의 사랑의 관계(關係)가 더 이상 존재(存在)하지 않는다고 강조합니다. 비슷한 생각이 (예레미야 16:5)에도 나타난다. (로마서 11:22)는 하나님과의 사랑의 관계가 지속(持續)되는 것이 인간에게 달려있다는 관념(觀念)을 강조하는데, 인간은 "그분의 선(善)하심 안에 계속 머물러야 한다."라고 한다. (유다서 21절)은 이러한 전반적(全般的)인 관점(觀點)에서 신자(信者)들에게 "하나님의 사랑 안에 자신을 지키라"라고 호소(呼訴)한다.
⑴.사랑은 피조물(被造物)에 대해 지닌 창조주(創造主)의 두드러진 속성(屬性)이다. 그것은 하나님의 정부(政府)의 통치력(統治力)이다. “하나님은 사랑이심이라”(요일 4:8).
⑵.하나님의 사랑의 최고(最高)의 표현은 아버지가 선물(膳物)로 주신 아들이며(요 3:16), 그를 통(通)하여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子女)라 일컬음을” 얻을 수 있게 되었다. (요일 3:1)
⑶.성경(聖經)이 영생(永生)을 주시겠다는 약속(約束)으로 가득한 것은 어떤 이는 그 사랑을 거부(拒否)할지라도 하나님은 사랑을 멈추지 않으시고 그들을 영원(永遠)히 사랑하시기 때문이다.
⑷.하나님의 사랑은 전 인류(全人類)를 감싸주지만, 그것에 반응(反應)하는 자들에게만 직접적(直接的)인 유익(有益)이 있다(참조: 요한복음 1:12). 사랑이 충분(充分)한 효과(效果)를 내기 위해서는 상호작용(相互作用)이 필요하다.
⑸. 하나님의 사랑에는 한계(限界)가 없다. 하나님은 자신의 구원(救援)하는 은혜(恩惠)의 혜택(惠澤)을 임의(任意)로 베풀지 않은 대상(對象)이 없다. 오직 한 가지 조건(條件)이 있을 뿐인데, 그리스도를 믿고, 그와 기꺼이 협력(協力)하는 것이다.
⑹.사람들을 회개(悔改)하도록 이끄는 것은 하나님의 인자(仁慈)하심이다. (롬 2:4). 그분의 사랑의 햇빛이 굳은 마음을 녹이고, 잃어버린 자를 돌아오게 하고, 죄인(罪人)들을 성도(聖徒)로 만든다.
⑺.사랑은 행동(行動)으로 옮겨질 때만 참된 것이다. 죄인들을 위한 하나님의 사랑은 그분으로 하여금 그들을 구원(救援)하는 데 그분이 가진 모든 것을 내어주게 했다. (참조 롬 5:8). 사랑의 본질(本質)은 남들을 위하여 자신을 희생(犧牲)하는 것이나, 이기심(利己心)은 사랑과 상반(相反)되는 속성(屬性)이다.
⑻.어떤 사람은 자신이 사랑받을 자격(資格)이 없다고 생각하거나 하나님께서 다른 사람은 사랑하시지만, 자신은 사랑하시지 않는다고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성경(聖經)은 한 사람도 빠짐없이 모두 하나님의 사랑의 대상(對象)이라고 일관(一貫)되게 선포(宣布)한다.
⑼.구원(救援)이 오직 하나님의 편(片)에만 달려있다면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救援)받게 하실 것이다. 그러나 주님은 누구에게도 당신의 사랑을 강요(强要)하지 않으신다. 사람에게는 그 사랑을 받거나 거부(拒否)할 자유(自由)가 있다.
⑽.사람이 하나님의 사랑을 거부(拒否)할지라도 하나님은 그들을 향한 사랑을 멈추지 않으신다.
(예레미야 31:3절)에서 주님은 당신의 백성을 향해 이렇게 선포(宣布)하신다. “내가 영원(永遠)한 사랑으로 너를 사랑하기에 인자(仁慈)함으로 너를 이끌었다.”
(01월 06일) (월) <언약적(言約的) 사랑>
(Q)~언약(言約)을 맺으시는 하나님과 그분의 인자(仁慈)하심 사이의 관계(關係)에 대해 무엇을 말하고 있으며, 하나님의 언약적(言約的) 사랑에는 어떤 기대(期待)가 담겨 있다고 생각합니까? (신명기 7:6~9)
(A)~<모세는 (신명기 7장)에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너희는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이요, 하나님께서 선택하신 보배로운 민족이라고 선언(宣言)했습니다. 그런데 모세는 그 이유가 이스라엘 민족(民族)이 다른 나라 민족보다 인구(人口)가 많은 강(强)한 나라이기 때문이 아니라고 말했다. 이스라엘 민족이 다른 민족(民族)보다 더 거룩한 삶을 살았기 때문도 아니다. 그렇다면 도대체 무엇 때문에 하나님은 그들을 거룩한 백성이요, 하나님의 보배(寶貝)로운 민족이라고 선언하니까?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으로, 하나님의 보배로운 민족으로 선택하신 이유는 한마디로 ‘사랑’입니다. (신 7:8)>
⑴.모세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택(擇)하여 보배(寶貝) 삼으신 까닭에 대해 부연합니다. 이스라엘이 수가 많거나 우월해서가 아니라는 점을 힘주어 강조하여, 이스라엘이 근거 없는 영적 우월감이나 교만에 빠지지 않도록 경계합니다.
⑵.이스라엘 백성에게 하나님의 사랑을 받을 어떤 이유가 있습니까? 그들이 어떤 조건(條件)을 갖추었기에 하나님의 사랑을 받을 수 있습니까?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들은 주변민족(周邊民族)들이 보기에도 하찮은 존재(存在)입니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보실 때 거룩한 삶을 살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과연 그들의 어떠한 조건(條件)이 하나님으로 하여금 그들을 사랑하게 하였던 것입니까? 아무런 조건(條件)도, 아무런 이유(理由)도 없습니다. 그저 하나님께서 그들을 사랑하여 주셨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그들을 아무런 이유(理由)도 없이 사랑하여 주셨기 때문이다.
⑶.‘너희는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이요, 너희는 하나님의 보배로운 민족이다’ 이제 하나님의 크신 사랑, 하나님의 그 이유(理由) 없는 사랑을 받은 이스라엘 백성을 향(向)하여 모세는 이렇게 권면(勸勉)합니다. (신명기 7:11 절) “그런즉.” 너희가 하나님께 그 이유 없는 사랑을 받았으니, 그 크신 사랑으로 거룩한 백성이 되었으니, 하나님의 사랑이 너희를 보배(寶貝)로운 민족(民族)으로 여겨 주셨으니 이제부터는 마땅히 “하나님의 명령(命令)과 규례(規例)와 법도(法道)를 지켜 행할지니라”
⑷.하나님의 성민(聖民)이란, 거룩한 백성이기 때문입니다. 거룩하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다른 민족과 구별(區別)하여 특별한 관계를 맺었다는 것이 뜻이다. 마치 남편이 아내에게, 아내는 남편에게 서로를 구별하여 특별한 관계를 맺듯이 하나님과 이스라엘과의 관계도 이와 비슷하다는 말이다. 이런 특별한 관계를 맺기 위해 하나님은 지상(地上) 만민(萬民) 중에서 이스라엘을 선택하셨다.
⑸.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택하여 보배(寶貝)로 삼으셨다는 말이다. 기업으로 번역된 히브리어 세굴라는 기업이라는 뜻 외에도 보배라는 뜻도 있다. 이 보배는 매우 특별한 의미이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보배(寶貝)처럼, 스스로가 평생 일구어 모은 금과옥조(金科玉條)처럼 여기시므로, 그에 걸맞은 삶을 살아야 한다고 모세가 강조(强調)하는 것이다.
⑹.우리가 정말 보석(寶石) 같은 아름답고 빛나는 삶을 살아서, 보배로 여겨 주시는 것이 아니다. 우리의 실상(實狀)은 (아가 1:5절) 말씀처럼, 게달의 장막(帳幕)처럼 검고 보잘것없는 존재이지만 우리와 특별한 관계를 맺으신 하나님께서 우리를 솔로몬의 휘장(揮帳)처럼 여겨 주시는 것이다.
⑺.우리의 실존(實存)은 그렇지 못하지만, 아들의 옷을 입은 우리를 보배처럼 여겨 주시는 것이다. (롬 13:14). 그렇게 특별히 여겨 주시기 때문에, 우리를 위해 하나님의 아들을 내어주셨다. 그 말씀을 따라 보배답게 살아가는 길이, 오직 하나님만 바라보고 내 삶을 오염(汚染)시킬 여지가 있는 가나안의 우상 숭배(偶像崇拜)의 문화(文化)를 뿌리 뽑는 길이다.
⑻.현대(現代)를 사는 우리들에게 가나안의 우상문화(偶像文化)가 남아있을 리 만무하다. 그러나 가나안 사람들이 여호와 하나님이 아닌 자신들의 관념(觀念)으로 신(神)을 만들어냈듯이, 오늘날에도 여전히 하나님이 아닌 다른 것을 신(神)으로 여기는 것들이 무엇인지 살펴, 그 풍조(風潮)에 영향(影響)을 받지 않도록 우리 주변(周邊)을 갈음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이것이 주님이라는 반석(磐石) 위에 기초(基礎)를 세우고 집을 짓는 행위(行爲)입니다.
⑼.세속적(世俗的) 가치관(價値觀)으로 통칭(統稱)할 수 있는 눈에 보이는 것들만 최우선으로 여기는 유물론적(唯物論的) 생각들, 주님께서 말씀하시고 걷지 않으셨던 권력(權力)과 힘과 패도를 의지하는 풍조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개인적으로는 하나님보다 자기를 앞세우는 나르시시즘(narcissism)부터, 타인(他人)을 자기 이익의 도구로 활용하는 부패(腐敗)한 인격(人格)까지,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면서도 실제로는 하나님이 없다고 여기는 실천적 무신론자들까지 우리가 배격하고 영향받지 않아야 할 것들을 이 세상에 무궁무진합니다
⑽.하나님께서 언약백성(言約百姓)과 맺은 특별한 사랑의 관계(關係)는 부분적(部分的)으로 그들의 신실(信實)함에 달려있다. 그것은 순종(順從)하고 끝까지 관계를 유지(維持)하려는 의지(意志)에 달려있다.
(01월 07일) (화) <조건적(條件的) 관계(關係)>
(Q)~ 하나님이 사랑하지 않겠다고 하시는 것은 무엇을 의미(意味)하는 것입니까? (호 9:15)
(A)~“내가…저희를 미워하였노라.”(호세아 9:15)- 우리의 죄악(罪惡)이 하나님의 미움을 일으킬 때 그것은 무서운 일이며, 그런 미움의 결과로 내리는 심판(審判)은 가혹(苛酷)할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죄(罪)를 미워하시지만, 죄인(罪人)은 사랑하시기 때문에 우리는 안심(安心)하고 쉴 수 있다. (정로 54).
⑴.(호세아 9:15 절)에 “다시는 사랑하지 아니하리라” 이 말은 북방(北方) 왕국(王國)의 영적(靈的)인 상태(常態)가 얼마나 철저(徹底)하게 가망성(可望性)이 없는지를 보여주는데, 그 이유는 그 왕들 가운데 단 한 사람도 여호와 보시기에 의(義)를 행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방인(異邦人)들에게 빛이 되어야만 했던 이 나라가(참조: 이사야 49:6) 영적(靈的)인 어둠의 땅이 된 것은 얼마나 비참(悲慘)한 일인가!
⑵.죄인이 자신의 죄악(罪惡)으로부터 자신을 분리(分離)시키지 않을 경우, 그는 언젠가 결국 죄를 멸망(滅亡)시킬, 악(惡)에 대한 하나님의 미움을 받게 될 것이다. 에브라임의 죄는 일반적인 죄 혹은 무지(無知)함의 죄가 아니었다. 그것은 하나님의 뜻을 모두 알면서 거역(拒逆)한 죄였으므로 더 큰 단죄(斷罪)를 받아 마땅했다. (참조: 누가복음 12:47~48).
⑶. 말씀 속에 명시된 구원의 조건은 “모든 사람을 온전히 구원하실 수 있고 또 구원하신다는 위대한 진리는 우리의 정신과 마음에 산 원칙, 곧 우리를 위하여 행해진 희생 제사의 효력으로 확립되어야 한다.
⑷.우리의 어떤 행위(行爲)도 하나님의 영원(永遠)한 사랑을 멈추게 할 수는 없지만, 우리가 하나님과의 관계(關係)를 거부(拒否)하면 결국에는 그 관계에서 얻을 수 있는 영생의 약속(約束)에서 단절(斷切)된다는 것이다.
⑸.하나님은 모든 사람을 부르시고 그분과의 친밀(親密)한 사랑의 관계(關係)로 초대(招待)하신다(마 22:1~14 참조). 이 부르심에 합당(合當)하게 응답(應答)하는 것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라는 하나님의 계명(誡命)에 순종하는 것을 포함한다. (마태 22:37~39 참조).
⑹.하나님과의 관계(關係)에서 오는 유익(有益)을 누리는 것은 하나님의 사랑을 받아들이거나 거절(拒絶)할지에 대한 개인(個人)의 자유의지(自由意志)에 달려있다.
⑺.성경(聖經)은 하나님과의 구원관계(救援關係)의 혜택(惠澤)을 유지(維持)하는 것은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을 받아들이는 여부(與否)(그 사랑의 매개체(媒介體)가 되려는 의지(意志)를 포함하여)에 달려있다고 가르친다.
⑻.하나님의 인자(仁慈) 혹은 그의 은혜(恩惠)에 지속적(持續的)으로 거(居)하는(행 13:43) 방법은 베풀어진 자비(慈悲) 가운데서 불신(不信)으로 돌아서지 않고 “믿음에 거(居)하”(골 1:23)는 것이다. 이 구절(句節)은 은혜로부터 떨어질 가능성(可能性)을 명백하게 가르친다. 인간이 하나님의 인자(仁慈)를 멸시(蔑視)하고 거절(拒絶)함으로 잘려나갈 수 있다
⑼.이방인(異邦人)에 대한 하나님의 취급(取扱)은 그가 인간에게 친절(親切)이 가득하고 오래 참는 분(참조: 로마서 2:4)임을 보여준다. 하나님의 인자(仁慈)하심은 스스로의 공로(功勞)나 특권적지위(特權的地位)보다 그분을 신뢰(信賴)하는 자들에게 항상 나타날 것이다. 한편 유대인에 대한 하나님의 취급은 자기 자신들을 의지(意志)하는 자들에게 그가 행사해야만 하는 엄위(嚴威)를 드러낸다..
⑽.하나님이 사랑하지 않는다는 것은 그분과 사랑의 관계의 특정(特定)한 면이나 혜택(惠澤)의 조건성(條件性)을 말하며 그분이 우리를 전적(全的)으로 사랑하지 않는다는 의미(意味)가 아니다.
인간은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의 자녀(子女)가 되고, 하나님이 당신의 아들을 사랑하신 것처럼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보증(保證)을 갖게 된다.”(증언 5권, 741).
(01월 08일) (수) <철회(撤回)된 자비(慈悲)>
(Q)~어떻게 살면 하나님의 자비(慈悲)가 철회(撤回)된다는 말씀입니까? (마태복음 18:23~35, 요일 4:7~20)
(A)~<다른 이들을 용서(容恕)하기를 거절(拒絶)한 자들은 그것 때문에 용서(容恕)받고자 하는 자신의 희망(希望)도 버리는 자들이다. 여기에 이 비유(譬喩)의 위대(偉大)한 교훈(敎訓)이 있다(동료 인간들을 향한 인간의 냉혹함과 무자비함과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오래 참으심과 자비의 극명한 대조. 다른 이들을 책망하거나 우리의 “정당한 요구”를 그들에게 강요하기에 앞서, 먼저 하나님께서 유사한 상황에서 우리를 어떻게 대하셨으며 만약 상황이 반전된다면 다른 이들이 우리를 어떻게 대하기를 원하는지 심사숙고해야만 한다).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무한(無限)하신 자비(慈悲)의 관점(觀點)에서 볼 때, 우리는 다른 이들에게 이처럼 자비(慈悲)를 나타내야만 한다..
⑴.하나님의 긍휼(矜恤)과 자비(慈悲)는 결코 다함이 없지만, 사람은 끝내 하나님의 사랑과 긍휼(矜恤)의 혜택(惠澤)을 거부(拒否)하고 심지어 상실(喪失)할 수도 있다.
⑵.(마태복음 18:23~35절)에 나오는 용서(容恕)하지 않는 종의 비유(譬喩)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먼저 베푸신 사랑이 다른 사람과의 관계(關係)에 반영(反映)되지 않으면 우리와 맺으신 하나님의 사랑 관계(關係)가 상실(喪失)될 수 있음을 보여준다.
⑶.이 비유(譬喩)는 주인(主人)이 하인(下人)에게 베푼 자비(慈悲)로운 용서(容恕)의 행위(行爲)를 이 하인(下人)이 동료 하인(同僚下人)에게 베푼 훨씬 더 작은 규모(規模)의 놀라운 자비(慈悲)와 용서(容恕)의 부족(不足)과 비교(比較)한다.
⑷.이 비교(比較)의 불일치(不一致)에 비추어 예수님은 먼저 오는 하나님 사랑의 용서(容恕)가 다른 사람에 대한 우리의 용서(容恕)하는 태도(態度)에 달려있다고 가르친다.
⑸.하나님과의 사랑의 관계(關係)는 조건부(條件附)로 인간관계(人間關係)에 반영(反映)되어야 한다. (요한복음 15:12, 요한1서 3:16, 요한복음 4:7-12 참조). 그렇지 않으면 하나님과의 사랑의 관계(關係)는 상실(喪失)될 것이다.
⑹.하나님과의 사랑의 관계상실(關係喪失)이 될 경우 이 불행(不幸)한 가능성(可能性)은 하나님의 냉정(冷情)한 조건(條件)으로 받아들여서는 안 되며, 인간이 하나님의 사랑의 자비(慈悲)의 깊이를 심각하게 이해(理解)하지 못하는 것으로 받아들여야 한다.
⑺.(누가복음 7:47 절)에서 지적(指摘)하듯이, 하나님께서 우리를 얼마나 용서(容恕)하셨는가에 대한 감각(感覺)은 우리의 사랑의 표현에서 관찰(觀察)됩니다. 따라서 우리가 다른 사람에게 사랑을 표현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향한 사랑의 깊이를 진정(眞正)으로 이해하지 못했거나 충분히 인식(認識)하지 못한 것이다.
⑻.언제나 하나님이 먼저 사랑하신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먼저 사랑하지 않으셨다면 우리는 그분을 사랑할 수 없다.
⑼.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할 수 있고 사랑받을 수 있는 존재(存在)로 창조(創造)하셨지만, 모든 사랑의 근거(根據)와 원천(源泉)은 바로 하나님이시다. 그러나 그 사랑을 받아들이고 삶에서 실천(實踐)하는 것은 우리의 선택(選擇)에 달려있다.
⑽.하나님은 모든 사람을 무조건적(無條件的)으로 사랑하신다. 우리가 그분과 사랑의 관계(關係)를 허락(許諾)한다는 의미에서 그분의 사랑을 받아들이고 응답(應答)할 때, 우리는 또한 하나님과의 사랑 관계의 실제적효과(實際的效果)로서 다른 사람들과 사랑의 관계(關係)를 맺고자 하는 소망(所望)을 느낀다.
(마태복음 18:23~35절)에 왕 자신에게 저지른 잘못에 대하여 나타낸 동정심(同情心)과는 얼마나 대조적(對照的)인지를 주목하여 보라. 그 왕은 재산(財産)의 막대한 손실(損失)은 참을 수 있었다. 사실 그에게 재산의 손실(損失)은 중요한 문제가 아니었지만, 그의 종에게 행한 불의(不義)에 대해서는 의분(義憤)을 참지 못하였다.
(01월 09일) (목)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어라>
(Q)~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것은 우리에게 어떤 자세(姿勢)를 요구(要求)합니까?. (눅 7:47)
(A)~<비유(譬喩) 속의 종이 주인에게 진 빚을 결코 갚을 수 없듯이, 우리도 하나님이 주신 사랑을 돌려 드릴 수 없고 사랑을 받기 위해 할 수 있는 일도 없다. 우리는 결코 하나님의 사랑을 받을 자격(資格)도, 공로(功勞)도 없다. 그러나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確證)하셔”(롬 5:8)다. 이 얼마나 놀라운 사랑인가! “보라 아버지께서 어떠한 사랑을 우리에게 베푸사 하나님의 자녀라 일컬음을 받게 하셨는가?”(요일 3:1)>
⑴.우리가 할 수 있고 또 해야 하는 일은 하나님에게 받은 사랑을 다른 사람들에게 보여주는 것이다. 그토록 큰 자비(慈悲)와 용서(容恕)를 받았다면 다른 이에게 얼마나 더 많은 자비(慈悲)와 용서(容恕)를 베풀어야 하겠는가?
⑵.인간 속에는 하나님의 사랑을 받을 만한 것이 전혀 없다.(롬 5:7절)의 가상적(假想的)인 “선인(善人)”은 자비(慈悲)롭고 사랑스럽고 고무적(鼓舞的)인 애정(愛情)을 가리키는 말이다. 그러나 하나님이 우리를 향(向)해 나타내신 사랑은 우리가 그분에 대해 가지고 있었던 어떤 사랑에 대한 반응(反應)이 아니었는데, 우리는 그분의 원수(怨讐)였기 때문이다.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요일 4:10).
⑶.아버지 하나님의 사랑은 그리스도의 죽음으로 드러났다. 이 중요한 사실은 속죄(贖罪)를 올바로 이해(理解)하기 위해 반드시 인식(認識)되어야 한다(참조 로마서 3:25). 그리스도는 당신의 아버지를 달래기 위하여 또는 그분으로 하여금 우리를 사랑하도록 유도(誘導)하기 위하여 죽으신 것이 아니다.
⑷.태초(太初)에 하나님의 사랑으로 속죄(贖罪)와 구원(救援)의 경륜(經綸)이 고안(考案)되었고, 그 일을 이루기 위하여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聖靈)께서는 완벽한 조화(調和) 가운데 모두 함께 일하셨다. (참조 요 3:16; 10:30; 14:16, 26; 15:26; 17:11, 22, 23; 롬 3:24; 8:32; 엡 2:4~7; 살후 2:16; 요일 4:10).
⑸.그리스도의 희생(犧牲)은 그분의 사랑에 대한 최대의 증거(證據)로 남아있다. 예수는 단번에 죽으셨지만, 그 죽음의 영속적(永續的)인 결과로 말미암아 우리에게는 각자(各自)를 위한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상존(常存)하는 증거(證據)가 있다.
⑹.”시몬 마구스“는 하나님의 능력(能力)을 돈으로 사려고 했지만(행 8:18~24), 하나님의 은사(恩賜)는 돈으로 살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⑺.”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어라“. 이 말의 원뜻은 ‘선물(膳物)로 받았으니 값을 받지 말고 사랑의 마음으로 주어라’는 의미(意味)이다. 이것은 복음(福音)을 전파(傳播)하는 사역자(使役者)가 지켜야 할 대단히 주요(主要)한 원칙(原則)이다.
⑻.복음사역자(福音使役者)들이 받은 복음(福音)과 권능(權能)은 모두 하나님의 것이었다. 따라서 그들은 받은 것을 전(傳)하는 것으로 최상(最上)의 만족(滿足)으로 삼아야 했다.
⑼.사역자(使役者)는 재산(財産)을 모으거나 큰돈을 벌기 위해 복음(福音)을 전파(傳播)해서는 안 되며 또한 하나님의 일을 위해 타인(他人)에게 봉사(奉仕)하고서 그 대가(對價)를 요구(要求)해서도 안 된다. 그렇다고 해서 복음사역자(福音使役者)가 굶주려야 한다는 것은 더욱 아니다.
⑽.우리는 하나님께 합당한 사랑을 돌려드릴 수 없고 사랑을 받기 위해 할 수 있는 일도 없다. 하지만 우리는 받은 사랑을 가능한 다른 사람들에게 돌려줄 수 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곧 다른 사람을 사랑하는 것이라면, 우리는 자신의 말과 행동(行動)으로 하나님 사랑의 기별(奇別)을 시급(時急)히 전(傳)해야 한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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