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과 언약적 사랑(질문, 대답, 설명) 01/11/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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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김명호 작성일25-01-03 11:10 조회2,597회 댓글0건본문
제2과 언약적 사랑
(1월 11일 안식일 / 일몰: 오후 5시 33분)
연구 범위: 벧후 3:9, 신 7:6-9, 롬 11:22, 요일 4:7-20, 요 15:12, 요일 3:16
기억절: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사람이 나를 사랑하면 내 말을 지키리니 내 아버지께서 그를 사랑하실 것이요 우리가 그에게 가서 거처를 그와 함께 하리라"(요한복음 14:23).
많은 사람이 헬라어 아가페(agape)는 하나님의 특별한 사랑을 가리키지만, 필레오(phileo)와 같은 사랑에 대한 다른 단어는 아가페보다는 부족한 다른 종류의 사랑을 가리킨다고 배웠다. 어떤 사람들은 아가페가 일방적인 사랑, 즉 주기만 하고 받지 않는, 인간의 반응과는 전혀 관계없는 사랑을 의미한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그러나 성경 전체에 걸친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주의 깊은 연구는 이러한 생각이 일반적이기는 하지만 잘못된 것임을 보여준다. 첫째, 헬라어 아가페는 하나님의 사랑만 아니라 인간의 사랑, 심지어 때로는 잘못된 인간의 사랑을 가리키는 경우도 있다(딤후 4:10). 둘째, 성경 전체에서 아가페 외에도 많은 단어가 하나님의 사랑을 가리킨다. 예를 들어, 예수님은 “너희가 나를 사랑(필레오)했기에… 아버지께서 친히 너희를 사랑(필레오)하”(요 16:27)신다라고 가르치셨다. 여기서 헬라어 필레오는 인간의 사랑만 아니라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에도 사용되었다. 따라서 필레오는 상대적으로 덜하거나 부족한 사랑이 아니라 바로 하나님의 사랑을 말한다.
성경은 또한 하나님의 사랑은 일방적인 것이 아니라 매우 관계적이며, 그것은 인간이 하나님의 사랑을 당신에게 돌리고 다른 사람에게 반영하는 여부에 따라 하나님 앞에 매우 다르게 여겨진다고 가르친다.
학습 목표
깨닫기: 하나님의 사랑은 무한하며 그분은 우리와 사랑의 언약을 맺으신다.
느끼기: 하나님의 사랑은 철회되지 않으나 사람의 불충성 때문에 단절이 발생한다.
행하기: 세상에 사랑을 보여줌으로 하나님께 어떤 사랑을 받은 것을 나타낸다.
TMI 위로
2. 영생을 주신다는 약속에 담겨 있는 의미는 무엇이라고 생각합니까?(요 3:16)
*답: 하나님의 사랑이 담겨있다.
3. 하나님의 언약적 사랑에는 어떤 기대가 담겨 있다고 생각합니까?(신 7:9)
*답: 언약을 지키는 기대가 있다.
4. 하나님이 사랑하지 않겠다고 하시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입니까?(호 9:15)
*답: 사랑의 자리로 돌아오라는 간절한 소원이 있다는 의미다.
5. 그분의 사랑을 삶에서 실천하지 않을 때 어떤 결과를 낳습니까?(요일 4:20)
*답: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는 것이 된다.
6.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것은 우리에게 어떤 자세를 요구합니까?(눅 7:47)
*답: 더 큰 용서를 경험하며 하나님을 더 사랑하는 봉사를 하게 될 것이다.
7. 주는 가장 자비하시고 긍휼히 여기는 분이라는 것은 어떤 의미입니까?(약 5:11)
*답: 용서와 사랑으로 사람을 대하시는 분이심을 나타낸다.
결론: 하나님의 사랑은 영원하다. 그 사랑은 아낌없고 무한히 주시는 사랑이지만 일방적이지 않으며 관계적인 사랑이다. 하나님은 인간과 사랑의 언약을 맺으신다. 이 특별한 관계에서 하나님이 사랑하지 않는다 하시는 것은 사랑의 언약적 측면을 강조하는 것으로 이것은 인간의 신실함에 달린 것이다. 하나님은 사랑을 실천할 것을 요구하시며 우리는 세상에 사랑을 나타냄으로 어떤 사랑을 받은 자임을 드러낼 수 있다.
1월 5일(일) 하나님의 영원한 사랑
하나님은 모든 사람을 사랑하신다. 성경에서 가장 유명한 구절인 요한복음 3:16은 이 진리를 분명하게 선포한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시편 33:5과 시편 145:9을 읽어 보라. 이 구절은 하나님의 인자하심과 사랑, 자비가 어디까지 미치는지에 대해 무엇이라고 가르치고 있는가?
[시33:5] 그는 공의와 정의를 사랑하심이여 세상에는 여호와의 인자하심이 충만하도다.
[시145:9] 여호와께서는 모든 것을 선대하시며 그 지으신 모든 것에 긍휼을 베푸시는도다.
*답: 세상에 충만하고 모든 것에 긍휼을 베푸시고 선대하신다.
어떤 사람은 자신이 사랑받을 자격이 없다고 생각하거나 하나님께서 다른 사람은 사랑하시지만 자신은 사랑하시지 않는다고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성경은 한 사람도 빠짐없이 모두 하나님의 사랑의 대상이라고 일관되게 선포한다. 하나님이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없다. 그리고 하나님은 모두를 사랑하시기 때문에 모든 사람이 구원받기를 원하신다.
베드로후서 3:9, 디모데전서 2:4, 에스겔 33:11을 읽어 보라. 이 구절은 모든 사람을 구원하시려는 하나님의 열망에 대해 무엇을 가르치고 있는가?
[벧후3:9] 주의 약속은 어떤 이들이 더디다고 생각하는 것 같이 더딘 것이 아니라 오직 주께서는 너희를 대하여 오래 참으사 아무도 멸망하지 아니하고 다 회개하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
[딤전2:4]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으며 진리를 아는 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
[겔33:11] 너는 그들에게 말하라 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나의 삶을 두고 맹세하노니 나는 악인이 죽는 것을 기뻐하지 아니하고 악인이 그의 길에서 돌이켜 떠나 사는 것을 기뻐하노라 이스라엘 족속아 돌이키고 돌이키라 너희 악한 길에서 떠나라 어찌 죽고자 하느냐 하셨다 하라.
*답: 하나님은 자신의 생명을 두고 맹세하면서 모든 사람이 구원받기를 원하신다.
요한복음 3:16은 다음과 같은 말씀으로 이어진다. “하나님이 그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려 하심이 아니요 그로 말미암아 세상이 구원을 받게 하려 하심이라”(요 3:17). 구원이 오직 하나님의 편에만 달려있다면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받게 하실 것이다. 그러나 주님은 누구에게도 당신의 사랑을 강요하지 않으신다. 사람에게는 그 사랑을 받거나 거부할 자유가 있다.
사람이 하나님의 사랑을 거부할지라도 하나님은 그들을 향한 사랑을 멈추지 않으신다. 예레미야 31:3에서 주님은 당신의 백성을 향해 이렇게 선포하신다. “내가 영원한 사랑으로 너를 사랑하기에 인자함으로 너를 이끌었다.”
성경의 다른 곳에서도 하나님의 사랑은 영원하다고 반복해서 가르친다(시편 136 참조). 하나님의 사랑은 결코 다함이 없으며 그 사랑은 영원하다. 다른 사람을 사랑하지 않는 것이 너무 쉬운 우리가 하나님의 영원한 사랑을 이해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하지만 우리 각자가 그 사랑의 실체를 경험하는 법을 배우고,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게 된다면 우리 각자의 삶은 어떻게 변하며 다른 사람을 대하는 것은 얼마나 달라지겠는가.
<교훈> 성경이 영생을 주시겠다는 약속으로 가득한 것은 어떤 이는 그 사랑을 거부할지라도 하나님은 사랑을 멈추지 않으시고 그들을 영원히 사랑하시기 때문이다.
<부가설명> 비교가 안 되지만 어머니가 자녀를 사랑하는 것은 어머니이기 때문이다. 자식이 불효막심해도 사랑한다. 그렇다면 사랑 자체인 여호와 하나님의 사랑이 어떻겠는가? 우리가 부모의 사랑도 다 이해할 수 없다. 그렇거든 하물며 하나님의 사랑을 얼마나 이해하겠는가? 요한일서 3:14에 의하면 생명이 있는 자는 형제를 사랑한다고 했다. 형제를 사랑하는 것으로 그가 부활의 생명을 얻은 것이 증명된다고 했다. 하나님이 사랑인 것은 그가 세상을 사랑하사, 우리가 죄인 되었을 때 아들을 보내어 우리 대신 죽게 하시는 것으로 증명했다고 했다(롬5:8). 엄마가 자식이 죽을병에서 살아나기를 간절히 바라는 것 이상으로 사람들이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기기를 간절히 바라신다. 하나님은 생명 자체이므로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겨주는 것을 하실 수 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사랑이 나타나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가 죄인 되었을 때 생명을 주러 생명이신 예수께서 오신 것이다. 그의 말씀을 생명의 말씀이라고 한다. 이 말씀은 죽은 자들에게 주신 말씀이다.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죽은 자들이 하나님의 아들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듣는 자는 살아나리라”(요5:25). 여기 ‘죽은 자들이 하나님의 아들의 음성을 들 때’라고 했다. 생명을 얻어야 할 사람은 죽은 자들이다. 자기가 죽은 것을 깨닫지 못하는 자는 이 말씀을 듣지 않는다. 그것이 하나님의 사랑을 받지 않는 것이다. 하나님은 죽는 자의 죽는 것을 원하지 않으신다(겔18:32). 살기를 바라신다. 그래서 자신이 죽어주시기까지 사랑하셨다. 그리고 부활하셔서 사망을 이긴 생명을 보여주셨다.
1월 6일(월) 언약적 사랑
성경은 종종 가족이나 친족 관계의 비유, 특히 남편과 아내의 사랑이나 자녀를 돌보는 사랑 가득한 어머니의 비유를 사용하여 우리와 하나님 사이의 특별한 사랑의 관계를 묘사한다. 이러한 비유는 특히 하나님과 그분의 언약 백성 사이의 특별한 관계를 나타내는 데 사용된다. 이것은 언약적 사랑의 관계로, 당신의 백성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뿐만 아니라 사람이 이 사랑을 받아들이고 그분께 사랑을 돌리며 하나님과 서로를 사랑할 것이라는 기대를 포함한다.
신명기 7:6-9을 읽어 보라. 이 구절은 언약을 맺으시는 하나님과 그분의 인자하심 사이의 관계에 대해 무엇을 말하고 있는가?
[신7:6~9] 너는 여호와 네 하나님의 성민이라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지상 만민 중에서 너를 자기 기업의 백성으로 택하셨나니 7 여호와께서 너희를 기뻐하시고 너희를 택하심은 너희가 다른 민족보다 수효가 많기 때문이 아니니라 너희는 오히려 모든 민족 중에 가장 적으니라 8 여호와께서 다만 너희를 사랑하심으로 말미암아, 또는 너희의 조상들에게 하신 맹세를 지키려 하심으로 말미암아 자기의 권능의 손으로 너희를 인도하여 내시되 너희를 그 종 되었던 집에서 애굽 왕 바로의 손에서 속량하셨나니 9 그런즉 너는 알라 오직 네 하나님 여호와는 하나님이시요 신실하신 하나님이시라 그를 사랑하고 그의 계명을 지키는 자에게는 천 대까지 그의 언약을 이행하시며 인애를 베푸시되,
*답: 조상들과 맺은 언약을 지키시는 것이 하나님의 인자하심이다. 언약을 지키시는 것이 그의 백성을 사랑하는 것으로 나타난다.
신명기 7:9은 하나님께서 언약 백성과 맺은 특별한 사랑을 묘사하는데, 그 관계는 일부분, 백성이 신실하게 그분을 따르는지에 달려있다. 하나님의 사랑은 조건이 없지만, 그분의 백성과의 언약 관계에는 조건이 있다.
신명기 7:9에서 “인애” 또는 “긍휼”로 번역된 히브리어 헤세드(ḥesed)는 하나님 사랑의 언약적 측면과 그보다 많은 것을 잘 나타낸다. 헤세드는 하나님의 자비, 선하심, 사랑의 위대함을 묘사할 때 자주 사용한다. 그중에서도 헤세드는 이미 존재하는 상호 사랑의 관계 안에서 상대에게 베푸는 변함없는 인애, 변함없는 사랑을 의미한다. 또한 그 관계 속에서 상대방도 그와 같은 사랑과 자비를 보여줄 것이라는 기대를 담고 있다.
하나님의 헤세드는 그분의 인애하심이 철저하게 신뢰할 수 있고, 변함없으며 영원하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러나 그와 함께 헤세드의 혜택을 받는 것은 조건적이며, 그것은 당신의 백성이 순종하며 언약에 충성을 다하려는 의지가 있는지에 달려있다(삼하 22:26, 왕상 8:23, 시 25:10, 시 32:10, 대하 6:14).
하나님의 변함없는 사랑은 모든 사랑의 관계의 기초이며, 우리의 사랑은 결코 하나님의 사랑에 비할 수 없다. 하나님은 기쁨으로 우리를 창조하셨을 뿐만 아니라 우리를 위해 그리스도 안에서 기꺼이 자신을 내어주셨다. “사람이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면 이보다 더 큰 사랑이 없나니"(요 15:13). 하나님의 사랑의 가장 위대한 표현은 주님이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빌 2:8)신 모습 속에 분명히 나타났다.
<교훈> 하나님이 언약 백성과 맺은 특별한 사랑의 관계는 부분적으로 그들의 신실함에 달려있다. 그것은 순종하고 끝까지 관계를 유지하려는 의지에 달려 있다.
<부가설명> 하나님은 아담과 언약을 맺었다(호6:7). 이 언약은 혈연 언약이다. 하나님은 아버지고 아담은 아들이다(눅3:38). 그래서 창세기 2장에서 사람 창조하는 것을 자세히 기록하면서 4절에 ‘대략이 이러하니라’라고 했을 때 ‘톨레도트’를 썼다. 우리말로는 ‘대략’이라고 번역했는데 이것은 족보라는 말이기도 하다. 여호와 하나님은 생명의 기운을 불어넣으실 때 자신의 생명을 주신 것이다. 우리가 출생할 때 생명을 아버지께로 받는다. 하나님께서 창조하실 때 생기를 불어넣어 아담에게 생명을 주신 것은 아버지가 생명의 씨로 자녀를 생육하는 것에 비유할 수 있는 일이다. 그래서 ‘톨레도트’ 관계가 성립된다. 성경은 “그가 우리에게 약속하신 약속이 이것이니 곧 영원한 생명이니라”(요일2:25)라고 계시하여 그때 불어넣으신 생기가 영생의 생명을 주신 생기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아담과 언약을 맺으면서 하신 언약의 말씀이 창2:16,17이다. 아담이 선악과를 먹은 것은 언약을 어긴 것이다. 그래서 그에게 주시기로 언약한 영원한 생명을 받을 수 없게 되었고 반드시 죽으리라고 하신 대로 사망의 존재가 되었다. 그래서 수명이 생겼다. 여자의 후손의 약속으로 수명이 있는 동안 생육하고 번성하여 은혜 받을 때와 구원의 날을 맞도록 해서 여자의 후손으로 오신 구주를 믿을 때 생명을 회복하게 하셨다. 이 모든 것은 다 하나님께서 언약을 끝까지 지키시는 것을 보여주는 그분의 다함 없는 사랑이다.
1월 7일(화) 조건적 관계
하나님은 모든 사람을 부르시고 그분과의 친밀한 사랑의 관계로 초대하신다(마 22:1-14 참조). 이 부르심에 합당하게 응답하는 것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라는 하나님의 계명에 순종하는 것을 포함한다(마 22:37-39 참조).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오는 유익을 누리는 것은 하나님의 사랑을 받아들이거나 거절할지에 대한 개인의 자유의지에 달려있다.
호세아 9:15, 예레미야 16:5, 로마서 11:22, 유다서 1:21을 읽어 보라. 이 구절은 하나님의 사랑의 혜택에서 제해지거나, 심지어 그 사랑을 상실할 가능성에 대해 무엇이라고 가르치고 있는가?
[호9:15] 그들의 모든 악이 길갈에 있으므로 내가 거기에서 그들을 미워하였노라 그들의 행위가 악하므로 내 집에서 그들을 쫓아내고 다시는 사랑하지 아니하리라 그들의 지도자들은 다 반역한 자니라.
[렘16:5]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되 초상집에 들어가지 말라 가서 통곡하지 말며 그들을 위하여 애곡하지 말라 내가 이 백성에게서 나의 평강을 빼앗으며 인자와 사랑을 제함이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롬11:22] 그러므로 하나님의 인자하심과 준엄하심을 보라 넘어지는 자들에게는 준엄하심이 있으니 너희가 만일 하나님의 인자하심에 머물러 있으면 그 인자가 너희에게 있으리라 그렇지 않으면 너도 찍히는 바 되리라.
[유1:21]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자신을 지키며 영생에 이르도록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긍휼을 기다리라.
*답: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순복하지 않으면 제해진다.
위의 본문들은 하나님과의 사랑의 관계에서 오는 혜택을 누리는 것은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인간의 반응에 따라 달라진다는 사실을 거듭 말한다. 하지만 우리는 하나님이 사람을 사랑하는 것을 실제로 멈추신다고 오해하지 않아야 한다. 하나님의 사랑은 영원하다. 호세아 9:15에서 하나님은 당신의 백성에 대해 “그들을 쫓아내고 다시는 사랑하지 아니하”겠다고 말씀하시지만, 하나님이 같은 책 후반부에서 당신의 백성을 향해 “기쁘게 그들을 사랑하”(호 14:4)겠다고 선언하시는 것을 잊어버리면 안된다. 호세아 9:15은 하나님께서 당신의 백성을 더이상 사랑하지 않으신다는 뜻이 아니다. 대신 그것은 하나님과 사랑의 관계의 어떤 특정한 면이나 혜택의 조건성을 말하는 것이 분명하다. 그리고 우리가 그분의 사랑에 어떻게 반응하는지는 이 관계를 지속하는 데 있어서 매우 중요하다.
“나의 계명을 지키는 자라야 나를 사랑하는 자니 나를 사랑하는 자는 내 아버지께 사랑을 받을 것이요 나도 그를 사랑하여 그에게 나를 나타내리라"(요 14:21). 예수께서도 제자들에게 “너희가 나를 사랑하고 또 내가 하나님께로부터 온 줄 믿었으므로 아버지께서 친히 너희를 사랑하심이라”(요 16:27)라고 선포하신다.
성경은 하나님과의 구원 관계의 혜택을 유지하는 것은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을 받아들이는 여부(그 사랑의 매개체가 되려는 의지를 포함하여)에 달려있다고 가르친다. 다시 말하지만, 이것은 결코 하나님의 사랑이 멈춘다는 뜻이 아니다. 그보다는 태양이 비취는 것을 멈출 수 없어도 태양광으로부터 자신을 차단할 수는 있는 것처럼, 우리의 어떤 행위도 하나님의 영원한 사랑을 멈추게 할 수는 없지만 우리가 하나님과의 관계를 거부하면 결국에는 그 관계에서 얻을 수 있는 영생의 약속에서 단절된다는 것이다.
<교훈> 하나님이 사랑하지 않는다는 것은 그분과 사랑의 관계의 특정한 면이나 혜택의 조건성을 말하며 그분이 우리를 전적으로 사랑하지 않는다는 의미가 아니다.
<부가설명> 하나님은 자존하시는 생명 자체이시다. 이 생명은 그 본질이 사랑이다(요일3:14 참고). 그러므로 하나님은 사랑하지 않을 수 없다. 그분이 자존하신 생명 자체이신 한 사랑은 영원하다. 이 사랑이 우주와 만물을 창조하셨고 이 사랑이 십자가를 지시고 부활하여 인류를 구원에 이르게 하셨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지 않을까 염려할 이유가 없다. 문제는 현재 이 지구 인류의 상태를 정확하게 아는 것이다. 사람들은 자기가 생명이 있는 줄 생각한다. 성경은 아담의 후손은 죽은 자라고 계시한다(고전15:22). 그러니 하나님의 눈에는 지구 인류는 죽은 자들이다. 다만 종신할 때까지 활동하고 있을 뿐이다. 그 기간에 생명이신 예수님을 만나고 믿고 굴복해야 한다. 그러면 하나님의 자녀로서 언약 관계가 회복된다. 자신에게 하나님의 생명이 없다는 것을 인식하지 못하고 죽은 자가 호흡이 멈추는 지점으로 달려가면서 다른 사람도 생명을 얻지 못하도록 방해할 때 하나님은 그가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길 가능성이 완전히 없어진 것을 보시고 그들의 호흡을 취하신다. 이것이 하나님의 진노다. 즉 그들에게 베푸시던 생명으로 돌아오라고 허락하신 것을 거두시는 것이다. 성경은 이렇게 말한다.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너는 너의 열조와 함께 자려니와 이 백성은 들어가 거할 그 땅에서 일어나서 이방 신들을 음란히 좇아 나를 버리며 내가 그들과 세운 언약을 어길 것이라
17 그 때에 내가 그들에게 진노하여 그들을 버리며 내 얼굴을 숨겨 그들에게 보이지 않게 할 것인즉 그들이 삼킴을 당하여 허다한 재앙과 환난이 그들에게 임할 그 때에 그들이 말하기를 이 재앙이 우리에게 임함은 우리 하나님이 우리 중에 계시지 않은 까닭이 아니뇨 할 것이라”(신31:16,17, 애3:43). 우리의 근본 상태가 어떤 것인지 깨달을 때만 하나님의 사랑을 알게 된다.
1월 8일(수) 철회된 자비
하나님의 사랑은 영원하며 언제나 조건 없이 베풀어 주신다. 그러나 인간은 그 사랑을 거부할 수 있다. 우리는 그 사랑을 받아들이거나 거부할 수 있지만, 이것도 오직 우리가 그 어떤 일조차 하기 전에 먼저 하나님께서 당신의 완전하고 영원한 사랑으로 우리를 기꺼이 사랑하시기 때문이다(렘 31:3). 하나님에 대한 우리의 사랑은 우리가 구하기 전에 이미 우리에게 주신 사랑에 대한 우리의 반응이다.
요한일서 4:7-20을 읽으며 특별히 7절과 19절을 주의 깊게 읽어 보라. 이 구절은 먼저 주신 하나님의 사랑에 대해 무엇을 말해주는가?
[요일4:7,19]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서로 사랑하자 사랑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니 사랑하는 자마다 하나님으로부터 나서 하나님을 알고/ 19 우리가 사랑함은 그가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음이라.
*답: 우리가 사랑할 수 있는 것은 하나님께서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기 때문이다.
언제나 하나님이 먼저 사랑하신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먼저 사랑하지 않으셨다면 우리는 그분을 사랑할 수 없다.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할 수 있고 사랑받을 수 있는 존재로 창조하셨지만, 모든 사랑의 근거와 원천은 바로 하나님이시다. 그러나 그 사랑을 받아들이고 삶에서 실천하는 것은 우리의 선택에 달려있다. 용서하지 않는 종에 대한 그리스도의 비유는 이 진리를 잘 예증한다(마 18:23-35).
우리는 마태복음 18장의 비유에 등장하는 종이 주인에게 빚진 것을 결코 갚을 수 없음을 알 수 있다. 종은 주인에게 만 달란트를 빚졌다. 한 달란트는 6,000데나리온에 해당한다. 한 데나리온은 일반적인 노동자가 하루 일한 대가로 받는 금액이었다(마 20:2). 따라서 한 사람이 한 달란트를 벌기 위해서는 6,000일을 일해야 한다.
쉬는 날을 제외하고 다른 비용도 다 무시하고 보통의 노동자가 1년 동안 300일을 일해서 1년에 300데나리온을 벌 수 있다고 가정해 보자. 그렇게 보통의 노동자가 일을 해서 6,000데나리온인 한 달란트를 상환하기 위해서는 20년이 걸린다. 그렇다면 만 달란트는 평범한 노동자가 이십만 년을 일해야 벌 수 있는 돈이다. 다시 말해 이 종은 그 빚을 결코 갚을 수 없었다. 하지만 주인은 종을 불쌍히 여겨 그 엄청난 빚을 기꺼이 탕감해 주었다.
그런데 그렇게 큰 빚을 탕감받은 종이 동료 중 한 명이 진 훨씬 작은 금액인 백 데나리온을 용서하지 않고 동료를 감옥에 가두자, 주인은 분노하여 자비로운 용서를 거두었다. 그 종은 주인의 사랑과 용서를 상실했다. 하나님의 긍휼과 자비는 결코 다함이 없지만, 사람은 끝내 하나님의 사랑과 긍휼의 혜택을 거부하고 심지어 상실할 수도 있다.
<교훈> 하나님의 긍휼과 자비는 결코 마르지 않지만, 사람이 하나님의 긍휼과 자비의 혜택을 거부하고 사랑을 실천하지 않을 때 그것을 상실할 수도 있다.
<부가설명> 하나님의 용서와 우리의 회개, 어느 것이 먼저일까? 당연히 하나님의 요서가 먼저다. 용서할 자가 용서할 마음이 없으면 아무리 빌어도 용서가 되지 않는다. 그러나 용서할 자가 용서할 마음이 이미 있으면 용서를 구할 때 당장 용서가 된다. 용서할 마음이 먼저라는 말이다. 하나님은 인류를 용서하셨다는 것을 십자가에서 우주에 선포하셨다. 사람은 이 선포된 용서를 받으면 된다. 그것을 받는 방법이 회개다. 이 기간이 무한하지 않다는 것을 사람은 깨달아야 한다. 인간 수명이 끝나기 전에 이 용서를 받지 않으면 용서가 끝난다. 그처럼 역사적 시간도 용서를 거둘 때가 온다. 그것은 은혜 기간이 끝나는 때다. 그래서 성경은 ‘지금은 은혜받을 만한 때요 보라 지금은 구원의 날이로다’(고후6:2)라고 했다. 지금은 우리가 호흡하고 의식이 있는 기간이고 또 은혜의 시기가 끝나기 전이다. 언제 이 은혜 기간이 끝나는지는 오직 하나님만이 아신다. 우리는 지금 이 용서를 받자.
1월 9일(목)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어라
비유 속의 종이 주인에게 진 빚을 결코 갚을 수 없듯이, 우리도 하나님이 주신 사랑을 돌려드릴 수 없고 사랑을 받기 위해 할 수 있는 일도 없다. 우리는 결코 하나님의 사랑을 받을 자격도, 공로도 없다. 그러나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롬 5:8)다. 이 얼마나 놀라운 사랑인가! “보라 아버지께서 어떠한 사랑을 우리에게 베푸사 하나님의 자녀라 일컬음을 받게 하셨는가”(요일 3:1).
우리가 할 수 있고 또 해야 하는 일은 하나님에게 받은 사랑을 다른 사람들에게 보여주는 것이다. 그토록 큰 자비와 용서를 받았다면 다른 이에게 얼마나 더 많은 자비와 용서를 베풀어야 하겠는가? 그 종은 주인의 자비와 용서를 동료에게 베풀지 않았기 때문에 주인의 긍휼과 용서를 상실했다는 사실을 기억하라. 우리가 진정으로 하나님을 사랑한다면 그분의 사랑을 다른 사람에게 베풀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요한복음 15:12, 요한일서 3:16, 4:7-12을 읽어 보라. 이 구절은 하나님의 사랑, 하나님을 향한 우리의 사랑, 타인에 대한 사랑 사이의 관계에 대해 무엇이라고 가르치고 있는가?
[요15:12] 내 계명은 곧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하는 이것이니라.
[요일3:16] 그가 우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셨으니 우리가 이로써 사랑을 알고 우리도 형제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것이 마땅하니라.
[요일4:7~12]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서로 사랑하자 사랑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니 사랑하는 자마다 하나님으로부터 나서 하나님을 알고 8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나니 이는 하나님은 사랑이심이라 9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이렇게 나타난 바 되었으니 하나님이 자기의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심은 그로 말미암아 우리를 살리려 하심이라 10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속하기 위하여 화목 제물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라 11 사랑하는 자들아 하나님이 이같이 우리를 사랑하셨은즉 우리도 서로 사랑하는 것이 마땅하도다 12 어느 때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만일 우리가 서로 사랑하면 하나님이 우리 안에 거하시고 그의 사랑이 우리 안에 온전히 이루어지느니라.
*답: 보이는 형제 사랑을 통하여 하나님 사랑을 확인하게 된다.
요한복음 15:12의 말씀 직후에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내가 명하는 대로 행하면 곧 나의 친구라”(요 15:14)라고 말씀하셨다. 무엇보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우리에게) 당신이 그들을 사랑한 것처럼 다른 사람을 사랑하라고 명령하셨다. 주님은 우리에게 하나님을 사랑하고 서로 사랑하라고 명령하신다.
요컨대, 우리는 결코 갚을 수 없는 무한한 빚을 용서받았으며 그 빚이 바로 십자가에서 우리를 대신하여 지불되었음을 깨달아야 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을 사랑하고 찬양하며 다른 사람들을 향해 사랑과 은혜를 베풀며 살아야 한다. 많이 용서받은 사람은 많이 사랑하지만 “적게 용서받은 사람은 적게 사랑한다”(눅 7:47, 쉬운).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곧 다른 사람을 사랑하는 것이라면, 우리는 자신의 말과 행동으로 하나님 사랑의 기별을 시급히 전해야 한다. 하나님의 사랑을 거부한 결과로 죄와 죽음으로 인해 무너지고 황폐해진 세상 속에서, 하나님은 사람들을 완전히 새사람으로 변화시키고 새 하늘과 새 땅에서 영원히 살게 하실 것을 약속하신다. 그러므로 우리는 지금 있는 곳에서 사람들의 매일의 삶을 돕고, 하나님의 사랑의 통로가 되어 그들을 하나님께로 인도하고자 노력해야 한다.
<교훈> 하나님께 합당한 사랑을 돌려드릴 수 없고 사랑을 받기 위해 할 수 있는 일도 없다. 하지만 우리는 받은 사랑을 가능한 다른 사람들에게 돌려줄 수 있다.
<부가설명> 우리가 거듭나서 예수님의 부활로 보여주신 그 생명을 얻었다면 그 생명이 나타내는 삶이 드러나게 될 것이다. 그 생명의 삶은 사랑을 실천하는 것이다. 그것은 사람들을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기게 하려는 삶이다. 예수님이 사랑한 것 같이 사랑하라고 하셨다. 그것이 새 계명이라고 하셨다(요15:12, 13:34). 예수께서 우리를 사랑한 것은 우리를 죄에서 건져내어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겨주신 사랑이다. 이것은 사람들에게 생명의 복음을 증거하여 그들도 함께 영생이 생명을 얻도록 하는 삶이다. 그래서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복음을 증거하는 생활이 되도록 성령님의 도움을 구해야 한다. 물론 도움과 동정 베푸는 것 등등 많은 삶의 모습이 있겠으나 그들에게 영생의 생명을 얻게 하는 이 사랑이 없으면 아무 유익이 없다(고전13:1~3). 가정에서 직장에서 교회에서 우리는 상대방이 생명을 얻게 하는 믿음으로 살고 상대방의 이 생명이 손상을 입게 하는 것부터 하지 않아야 할 것이다. 나 때문에 교우가 교회를 떠나게 한다면 사랑을 잃어버린 삶이된다. 상대방을 살려주려는 정신으로 살아가는 것이 사랑을 실천하는 출발점이다.
1월 10일(금) 더 깊은 연구를 위해
정로의 계단 11장 “기도의 특권”을 읽어 보라.
“그대들의 소원과 기쁨과 슬픔과 염려와 두려움을 하나님 앞에 내어놓으라. 그대들은 그분을 괴롭게 하거나 피곤케 할 수 없다. 그대들의 머리털까지 세시는 그는 당신의 자녀들의 요구에 대해서 무관심하시지 않으신다. ‘주는 가장 자비하시고 긍휼히 여기시는 자시니라’(약 5:11). 그의 사랑의 마음은 우리의 슬픈 일을 보거나 그에 대한 말만 들어도 민망히 여기신다. 우리의 마음을 번뇌케 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그에게 내어놓으라. 그가 감당하시기에 너무 크거나 심각한 것이 없는 것은 하나님께서 세계를 붙드시고 우주의 모든 사건을 관리하시기 때문이다. 다소라도 우리의 평화에 관계되는 일은 그것이 아무리 사소할지라도 하나님께서 주목하지 않으시는 것은 없다. 우리의 경험 중에 어떠한 사건이 너무나 흉악하다고 하여 그것을 보시지 않으시는 것이 없고 아무리 복잡한 문제라도 그분이 풀기에 너무 어려운 것도 없다. 당신의 자녀 중에 지극히 작은 자가 당하는 어떤 재난이나 그들의 심령을 괴롭게 하는 어떤 근심이나 기분을 좋게 하는 어떤 기쁨이나 입술에서 새어 나오는 어떠한 진정한 기도라도 우리의 천부께서 그것들을 못본체 하시거나 거기에 직접으로 관심을 두시지 않으시는 것은 하나도 없다. 그는 ‘상심한 자를 고치시며 저희 상처를 싸매시는도다’(시 147:3). 하나님과 각 사람과의 관계는 마치 지상에 그분이 돌보실 다른 영혼이 단 한 사람도 없는 것처럼, 당신의 사랑하시는 아들을 나 외에 다른 사람을 위하여서는 주시지 않았을 것처럼 그렇게 분명하고 완전하다”(정로의 계단, 100).
함께하는 토의를 위해
1. 하나님께서 나와 가까이 계시고 돌보신다는 사실을 아는 것은 나에게 어떤 위로를 주며, 그 사실을 아는 나는 어떻게 살아야 하겠는가? 어떻게 하면 그 놀라운 약속의 실체를 경험하며 살아갈 수 있겠는가? 그 약속을 진정으로 믿고 산다면 어떻게 될 것인지 생각해 보라.
*답: 두려움없이 신앙 생활하며 봉사하는 삶을 이어갈 수 있을 것이다.
2. 이번 주 교과를 통해 시편 103:17, 18을 살펴 보라. 이 구절은 하나님의 사랑은 영원하지만, 하나님과의 관계의 혜택은 우리가 그분의 사랑을 받아들이는 여부에 달려있다는 것에 대해 무엇을 알려주는가?
*답: “여호와의 인자하심은 자기를 경외하는 자에게 영원부터 영원까지 이르며 그의 의는 자손의 자손에게 이르리니 18 곧 그의 언약을 지키고 그의 법도를 기억하여 행하는 자에게로다.”
3. 위 사실을 아는 것은 나와 하나님과의 관계에 어떤 차이를 가져오는가? 이것은 다른 사람의 슬픔을 대하는 방식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가?
*답: 성경이 가르치는 대로 하나님을 경외하고 사람들에게도 은혜롭게 대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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