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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년 제1기 제1과-넘치는 하나님의 사랑-(핵심Q&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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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이봉주 작성일25-01-01 21:26 조회733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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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과 넘치는 하나님의 사랑

       (2025년 1월 4일 (안) / 일몰: 오후 5시 26분) 


<기억절(記憶節)>

 “내가 그들의 반역(叛逆)을 고치고 기쁘게 그들을 사랑하리니 나의 진노(震怒)가 그에게서 떠났음이니라"(호 14:4). 


◎."진정(眞正)한 교사(敎師)는 둔(鈍)한 생각, 게으른 정신(精神), 느슨한 기억(記憶)에 만족(滿足)하지 않습니다. 그는 끊임없이 더 높은 성취(成就)와 더 나은 방법을 추구(追求)합니다. 그의 삶은 지속적(持續的)인 성장(成長)의 삶입니다. 그러한 교사(敎師)의 일에는 그의 [반(斑)]을 깨우고 영감(靈感)을 주는 신선함, 활력(活力)이 있습니다." -(안식일 학교 활동에 대한 권면, 103쪽).


<개요(槪要)>

이번 주 수업(授業)의 세 가지 주요 주제(主要主題).

1. 하나님의 사랑은 필연성(必然性)에 의해 정의(定義)되지 않습니다. 

2. 하나님의 사랑의 범위(範圍)는 계산(計算)할 수 없습니다.

3. 하나님의 사랑은 저항(抵抗)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모든 인간의 기대(期待)를 뛰어넘습니다. 그는 가장 합당하지 않은 사람에게도 은혜(恩惠), 자비(慈悲), 연민(憐愍)을 기꺼이 베푸십니다.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이러한 개념은 우리 인간들의 정서(情緖) 내에서 상상(想像)을 초월한 것으로 하나님의 사랑에 대하여 우리의 이웃들에게 적용할 때 우리 자신과 이웃들의 변화에 성공할 것이다.


⑴.2025년 제1기는 ”사랑과 공의(正義)의 하나님“에(요일 4:8, 16절) 대해서 공부(工夫)합니다.


⑵.성경전체(聖經全體)가 하나님의 사랑에 대하여 이 사실을 증명(證據)합니다. 기독교신앙(基督敎信仰)은 하나님의 사랑의 성격(性格)을 중심으로 합니다.


⑶.사랑은 하나님의 본질(本質)의 핵심(核心)이며, 우리가 믿는 모든 것의 핵심이며, 우리가 하는 모든 일의 핵심이어야 합니다.


⑷.우리가 사랑을 이해(理解)하는 방식(方式)은 우리의 신앙(信仰)과 실천전체(實踐全體)에 영향(影響)을 미칩니다.


⑸.우리가 하나님의 사랑을 이해(理解)하는 방식(方式)은 우리의 신앙(信仰)과 실천(實踐)에 엄청난 영향(影響)을 미칩니다. 


⑹.하나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에 이 세상의 불의(不義)와 고통(苦痛)에 대해 깊이 염려하시고, 억압(抑壓)받고 고통받는 사람들과 자신을 동일시하시며, 창조물(創造物)에서 악(惡)이 초래(招來)한 고통과 슬픔에 기꺼이 들어가십니다. 그분 자신이 가장 큰 고통을 겪으시고, 그래서 하나님 자신이 악(惡)의 가장 큰 희생자(犧牲者)가 되십니다.


⑺.성경전반(聖經全般)에 걸쳐 하나님은 악(惡)과 고통(苦痛)으로 인(因)해 반복적(反復的)으로 슬퍼하시고 고통받으십니다. 그분은 우리가 상상(想像)할 수 있는 것보다 더 각 사람을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⑻.성경의 하나님은 사랑이시며, 성경(聖經) 전반(全般)에 걸쳐 거부(拒否)된 사랑과 잃어버린 사랑으로 인(因)해 마음이 상(傷)하고 슬퍼하시는 분으로 묘사(描寫)됩니다.


⑼.하나님은 아무런 자격(資格)이 없는 자를 사랑하시며 은혜를 베푸신다. 세상을 창조하기 전부터 시작된 하나님의 사랑은 십자가(十字架)에 달리신 예수님을 통해 우리에게 아낌없이 주어졌다.


⑽.성경의 전체(全體)이야기는 하나님께서 우주(宇宙)의 모든 구석구석에 사랑을 회복(回復)하기 위해 행(行)하셨고 행(行)하고 계신 일에 관한 것이다. 이처럼 그 외 많은 것들이 이번 2025년 1분기 수업의 주제(主題)이다.


(12월 29일) (일) <합리적(合理的) 기대(期待)를 넘어선 사랑>  


(Q)~하나님께 반역(叛逆)함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이 은혜(恩惠) 베풀 자에게 은혜를 베푸신다는 말은” 어떤 뜻입니까? (출 33:19)


(A)~소돔과 고모라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審判)이 선포(宣布)된 맥락(脈絡)에서 아브라함이 중재(仲裁)한 그것과(창세기 18:23~33) 모세가 시내산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의 우상숭배를 한 후에 모세가 십계명의 돌비를 깨트리는 상황에서 즉 하나님께로부터 사랑받을만한 자격이 없지만,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합리적(合理的)으로 기대하거나 추정적(推定的)으로 계산할 수 있는 것보다 더 높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으로 모든 사람에게 은혜(恩惠)를 베푸신다는 표현이다.


⑴.반역(叛逆)에도 불구하고 은혜(恩惠)를 베푸신다는 말씀을 선포(宣布)하시는 것은 합리적(合理的) 기대(期待)를 넘어선 것은 하나님의 사랑의 본질(本質)이다.


⑵.하나님께서는 참회(懺悔)하는 기도(祈禱)에 응답하신다. 패역(悖逆)은 질병(疾病)으로 간주(看做)된다. 오직 거룩하신 의원(醫員)만이 영혼(靈魂)의 질병(疾病)을 치료(治療)하실 수 있다. (참조 렘 8:22; 마 9:12).


⑶.사단이 존재(存在)하는 한 반역(叛逆)의 정신(精神)은 없어지지 않을 것이다. 사단의 정신으로 자극(刺戟)을 받은 자들은 하나님의 영(靈)을 분별(分別)하지 못할 것이며, (계 22:11)의 명령의 말씀이 선포(宣布)될 때까지 성령의 음성(音聲)을 듣지 않을 것이다. (1 SM 72.2)


⑷.예수의 구원(救援)하는 능력을 가르치라. 십자가에 달리신 주님을 우리 가운데서 제시(提示)함으로 사람들에게 그것을 사사(師司)한 주제로 전달(傳達)하게 하라. 그리스도의 생애는 무한히 완전한 품성(稟性)을 드러낸다는 것을 보이라. 


⑸.구주(救主)로부터 그들은 그들의 죄 사(罪赦)함을 받았다. 그들은 그리스도의 은혜(恩惠)를 받고 그분과 그분의 관심사(關心事)와 그분의 명예(名譽)를 위해 살기로 하였다


⑹.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그의 은혜(恩惠)의 풍성함을 따라 그의 피로 말미암아 구속(救贖) 곧 죄 사(罪赦)함을 받았으니” (엡 1:7). “나의 하나님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영광 가운데 그 풍성한 대로 너희 모든 쓸 것을 채우시리라” (빌 4:19).  (WM 282)


⑺.용서받음과 의(義)롭다 하심은 하나요, 같은 것이다. 믿음으로 그 신자(信者)는 죄와 반역(叛逆)의 자리를 떠나서 그리스도 예수의 충성스러운 신하(臣下)의 자리로 나아가는데 이는 그가 착한 마음을 타고났기 때문이 아니라 그리스도가 그를 양자(養子)로 받으셨기 때문이다. 죄인이 죄 사함을 받는 것은 그의 대치물(代置物)이 되시고 담보물(擔保物)이 되시는 주님께서 그의 죄를 지고 가셨기 때문이다. (RC 74)  


⑻.매일 매(每)시간 믿음을 행사하면서 사랑으로 역사하고 영혼을 정결케 하는 믿음을 가진 자들은 그들의 죄 사(罪赦)함을 받고 영생에 이르도록 성화(聖化)된다. 원고 12a, 1901. (RC 77) 


⑼.“그 아들 안에서 우리가 구속(救贖) 곧 죄 사(罪赦)함을 얻었도다”(골 1:14). 이것은 우리의 심령(心靈)에 인(印)이 찍혀져야 할 실제적(實際的)인 위대(偉大)한 진리이다. 진리(眞理)를 받아들이는 모든 자가 그 진리의 위대(偉大)함과 능력을 이해(理解)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원고, 153, 1898)


⑽.죄 사(罪赦)함을 받고 아름다운 그리스도의 의(義)의 옷을 입은 사람은 하나님 앞에 흠(欠) 없이 선다. (OHC 51.2) 


(출애굽기 33:19)의 “내가 은혜(恩惠)를 베풀 자에게 은혜를 베풀고 내가 긍휼(矜恤)을 베풀 자에게 긍휼을 베풀리라”라는 말씀은 하나님께서 어떤 사람에게는 긍휼(矜恤)과 은혜(恩惠)를 베풀고 어떤 사람에게는 그렇지 않기로 임의(任意)로 선택(選擇)하신다는 뜻으로 종종 오해(誤解)된다. 그러나 본질적(本質的)으로 하나님은 만물(萬物)의 창조주(創造主)이시며 가장 합당(合當)하지 않은 사람에게도 은혜와 긍휼을 기꺼이 베풀 수 있는 권리(權利)와 권위(權威)가 있으시다. 


(12월 30일) (월) <짝사랑>


(Q)~사랑받을 자격(資格)도 없고, 권리(權利)를 거부(拒否)하고 상실(喪失)했지만, 하나님께서는 자유 의지(自由意志)로 인류(人類)의 상태(常態)와 형편과 관계(關係)없이, 계속해서 일관(一貫)되게 사랑을 베푸시는 하나님의 백성에 대한 하나님의 변함없는 사랑에 대해 무엇을 보여주는가? (호세아 14:1~4)


(A)~<하나님의 사랑은 필연성(必然性)에 의해 정의(正義)되지 않는다. 자유(自由)는 하나님의 사랑의 중요한 특징(特徵)입니다. 그의 사랑은 다른 어떤 것에 의해 야기(惹起)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결과논리(結果論理)에 의해 정의(正義)되는 대신, 하나님의 사랑은 놀라울 정도로 자발적(自發的)입니다. 이 아이디어는 호세아와 그의 불충실(不忠實)한 아내의 경험(經驗)에서 자세히 설명(說明)됩니다>


⑴.짝사랑이란 한쪽만이 상대(相對)를 사랑하는 일이다. 즉 자격(資格) 없는 사람에게 기꺼이 주는 호의(好意)로 공의(公義)에 기초(基礎)한 사랑의 행위(行爲)가 짝사랑이라 한다.


⑵.타락(墮落)한 인류를 향(向)한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의 예(例)는 호세아서에서 찾을 수 있다. 하나님은 호세아 선지자(先知者)에게 “너는 가서 음란(淫亂)한 여자를 맞이하여 음란(淫亂)한 자식(子息)들을 낳으라 이 나라가 여호와를 떠나 크게 음란(淫亂)함이니라”(호 1:2)라고 명령하셨다.


⑶.(호세아 14:4절)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의 불충실(不忠實)함을 치유(治癒)하시겠다고 약속(約束)하신 것을 그분의 백성을 기꺼이 사랑하시겠다는 약속(約束)과 연결(連結)합니다.

호세아의 전기적(傳奇的) 경험(經驗)과 비교하면 하나님의 사랑이 전적(全的)으로 관대(寬待)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⑷.하나님의 이 약속(約束)은 (호세아 2:14~23절)에서 예견(豫見)되고 호세아가 불충실(不忠實)한 아내와 자비(慈悲)로운 관계(關係)를 맺은 것(호세아 3:1~5)에서 예시(豫示)된 것처럼 하나님의 배교(背敎)한 백성을 자비(慈悲)롭게 회복(回復)시키겠다는 것을 반복(反復)합니다


⑸.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기꺼이 사랑하실 것이라는 것을 강조(强調)하는 히브리어 “네다바쉬는” "자발적(自發的)인 제물(祭物)" 또는 "관대(寬待)함으로 바쳐진 제물(祭物)""이라는 개념(槪念)을 전달(傳達)한다.


⑹.하나님의 사랑은 이스라엘이 행(行)한 어떤 행동(行動) 때문(依)에 발생하거나 필요하게 되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것은 그분의 자유(自由) 표현(表現)이며, 따라서 완전히 자발적(自發的)입니다.


⑺.(호세아 14:4절)의 신성(神性)한 치유(治癒)에 대한 언어(言語)(호세아 5:13, 호세아 6:1, 호세아 7:1, 호세아 11:3 참조) 는 하나님의 사랑의 자발적(自發的)인 본질(本質)을 강조(强調)하는 듯합니다. 왜냐하면, 이스라엘은 자신의 힘으로 충실(忠實)해질 수 없기 때문이다


⑻.이 사랑의 자발적(自發的)인 본질(本質)은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사람들이 진정(眞正)으로 그것을 받을 자격(資格)이 없다는 것을 암시(暗示)하고 있다.


⑼.세상의 창조(創造)는 하나님의 사랑이 존재(存在)하는 데 필수적(必須的)이지 않았다. 오히려 창조(創造)는 그의 영원(永遠)한 넘치는 사랑의 자유(自由)에서 비롯된 신성(神性)한 자발적활동(自發的活動)이었다.


⑽.은혜(恩惠)란 받을 자격(資格)이 없는 자와 버림받은 자에게 베푸는 진정한 호의(好意)를 뜻한다. 우리가 죄인(罪人)이어서 하나님의 자비(慈悲)와 사랑에서 우리를 끊어버리는 대신에 우리에게 하나님의 사랑을 행사(行事)하신다는 사실은 우리가 구원(救援)을 받음에 있어서 절대적(絶對的)으로 필요(必要)한 것이다


(12월 31일) (화) <거저 주시는 사랑>


(Q)~세상이 존재(存在)하기 전(前)의 하나님의 사랑에 대해 무엇을 말해 주고 있으며, 창조(創造)에 대한 관련된 하나님의 의지(意志)에 대해 무엇을 말해 주고 있습니까? (요한복음 17:24, 요한계시록 4:11과 시편 33:6)


(A)~이 세상이 타락(墮落)하고 악(惡)함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이 세상에 계속 사랑을 베푸신다는 사실은 하나님은 넉넉한 사랑의 선물(膳物)로 세상을 대가(代價) 없이 창조(創造)하셨고 에덴에서 범죄(犯罪)하고, 우리가 개인적(個人的)으로 죄를 지은 후(後)에도 변함없이 인간을 기꺼이 사랑하신다는 증거(證據)이다. 


⑴.신성한 사랑은 우주(宇宙)의 창조이전(創造以前)에 영원(永遠)히 존재(存在)했다. (요 17:24). 따라서 세상의 창조는 하나님의 사랑이 존재(存在)하는 데 필수적(必須的)이지 않았다. 오히려 창조(創造)는 그의 영원한 넘치는 사랑의 자유에서 비롯된 신성한 자발적활동(自發的活動)이었다.


⑵. 하나님의 사랑은 기꺼이 베푸신다, 십자가(十字架)에서의 예수님의 희생적(犧牲的) 죽음은 자발적(自發的)인 사랑의 제물(祭物)이었다. 그는 단순히 폭력적(暴力的)인 처형(處刑)의 희생자(犧牲者)가 아니었다.


⑶.예수님 자신(自身)이 강조하셨듯이 "나는 내 목숨을 버립니다. 아무도 그것을 내게서 빼앗지 아니하고 내가 스스로 내어놓습니다" (요한복음 10:17~18).


⑷.마찬가지로 바울은 그리스도께서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드리셨느니라"(갈라디아서 2:20)라고 설명(說明)한다.


⑸.그러므로 예수님의 십자가형(十字架刑)은 그의 처형자(處刑者)들의 사악(肆惡)한 행동에 의해 형성된 필연성(必然性)이 아니었다. 오히려 그는 신성한 사랑의 자유의 특별한 표현으로서 자발적(自發的)으로 자신을 바쳤다.


⑹.합리적(合理的)으로 기대(期待)하거나 추정적(推定的)으로 계산할 수 있는 것보다 더 높다는 것을 보여준다. 중재(仲裁)의 두 번째 사례(事例)는 모세가 시내산에서 이스라엘 백성을 대신하여 개입(介入)한 것이다. 확실히 첫인상은 그가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자비(慈悲)를 베푸시기를 설득(說得)하려고 했다는 것이다. (출 32:11~14, 31~33). 하지만 이것은 사실이 아니다.


⑺.“그리스도께서는 접촉(接觸)할 수 있는 범위(範圍)에 있는 모든 사람에게 구원(救援)을 주시고자 오셨다. 갈보리의 십자가(十字架)에서 그분은 잃어버린 세상을 위하여 무한(無限)한 구속(救贖)의 대가(代價)를 지불(支拂)하셨다. 


⑻.그분의 극기(克己)와 자아희생(自我犧牲), 그분의 이기심(利己心) 없는 활동(活動), 그분의 굴욕(屈辱), 무엇보다도 그분의 생명을 내어주신 것은 타락(墮落)한 인류를 위한 그분의 사랑의 깊이를 증거(證據)한다. 그분께서 세상에 오신 것은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救援)하기 위(爲)함이었다”


⑼.그분의 극기(克己)와 자아희생(自我犧牲), 그분의 이기심(利己心) 없는 활동(活動), 그분의 굴욕(屈辱), 무엇보다도 그분의 생명을 내어주신 것은 타락(墮落)한 인류를 위한 그분의 사랑의 깊이를 증거(證據)한다.


⑽.신성한 사랑의 자유(自由)는 또한 그것이 이 사랑에 대한 인간의 반응(反應)을 미리 결정(決定)하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意味)한다.


(1월 1일) (수) <부름 받은 자는 많으나 선택(選擇)된 자는 적음>  


(Q)~ 하나님은 모든 사람을 혼인(婚姻) 잔치에 초대(招待)하지만 택(擇)함을 입은 자는 초대(招待)를 받아들이는 사람이다. 잔치에 부름을 받았음에도 택(擇)함을 받지 못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마태복음 22:1~14)


(A)~<(마태 22:14)이 말씀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마지막에 ‘선택(選擇)받은,’ 즉 '택(擇)함. 받은 자'는 주님의 혼인 잔치로의 초대를 받아들인 사람들이다. 이 비유에서 ‘부르다’와 ‘초대하다’로 번역된 단어는 헬라어 칼레 오(kaleo, 부르다, 초대하다)이며, 최종적으로 누가 ‘택함을 받은(에클렉토스, eklektos) 자인지를 결정하는 것은 초대를 기꺼이 수락(受諾)했는지 여부(與否)이다. > 


◎. 그리스도의 의(義)의 옷을 입는다는 의미는 비유(譬喩) 가운데 예복(禮服)은 그리스도의 참된 제자(弟子)들이 가져야 할 순결(純潔)하고 흠(欠)이 없는 품성(稟性)을 표상(表象)한다. 교회에 “빛나고 깨끗한 세마포(細麻布)를 입”고, “티나 주름 잡힌 것이나 이런 것들이 없”는 품성(稟性)을 얻게 하도록 예복(禮服)은 준비(準備)되었다. 성경에는, 이 세마포(細麻布)는 “성도(聖徒)들의 옳은 행실(行實)”이라고 하였다. 이 세마포는 그리스도의 의, 즉 믿음으로 예수를 자기의 개인의 구주(救主)로 받아들이는 모든 사람에게 주시는 흠(欠)이 없는 품성을 표상하는 것이다.


⑴.예수님의 관점(觀點)은 택(擇)함을 받은 자입니다. 혼인 잔치에 하나님은 아무나 초청(招請)하셨다. 하지만 나중에 왕의 잔치라고 깨달은 사람은 예복(禮服)으로 갈아입어야 한다. 청(請)함을 받은 자는 많되 택(擇)함을 입은 자는 적으니라.


⑵.우리는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심을 받았다. 그리스도는 우리들의 생명이 되신다. 우리는 주님의 은혜(恩惠)로운 사랑을 힘입어 택(擇)함을 입었으며 양자(養子)가 되었고 용서(容恕)를 받았을 뿐만 아니라 의(義)롭다 하심을 받았다. 그러므로 우리는 여호와를 존귀(尊貴)하게 받들자. (서신 7, 1892)


⑶.그분의 사업에 부름을 받은 모든 사람은 선량(善良)한 십자가(十字架)의 군사(軍士)가 되어야 한다. 그들은 세상에 대하여 죽고, 그들의 생애(生涯)가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감추어진 사실을 보여주어야 한다. (1T 507) 


⑷.청함을 받은 자는 많되 택함을 입은 자는 적으니라’(마 22:14). 많은 사람이 자비의 초청(招請)을 받고, 시험(試驗)을 받아 입증(立證)되고 있다. 그러나 살아 계신 하나님의 인(印)으로 안(印)침을 받는 자는 별로 없다.


⑸.우리는 십자가(十字架)의 은혜(恩惠)로 하나님의 보호(保護)하심과 인도(引導)하심을 받기 위해 부름을 받은 자(者)라는 사실을 알고 믿을 때, 모든 염려(念慮)와 두려움으로부터 자유(自由)할 수 있게 된다.


⑹.성경은 모든 장(章)을 통틀어 ‘하나님은 사랑이시며(요일 4:8), 그의 백성을 사랑하신다.’라고 말한다. 고대 이스라엘처럼 우리는 우리가 한 일 때문에 사랑받는 것이 아니라, 그분이 우리에게 사랑을 주시며, 우리에게 무조건적(無條件的)인 약속(約束)을 지키시기 때문이다. 


⑺.믿음에서 떠나는 배교자(背敎者)들과 달리, 참 신자(信者)들은 “하나님의 은사(恩賜)와 부르심에는 후회(後悔)하심이 없기”(로마서 11:29) 때문에 주님께서 지키신다.


⑻.(디모데후서 2:10) 그러므로 내가 택(擇)함. 받은 자들을 위하여 모든 것을 참음은 그들도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구원(救援)을 영원한 영광과 함께 받게 하려 함이라.


⑼.(택함을 입은 자는 적으니라). 이 진리(眞理)는 비유자체(譬喩自體)에 나타난 어떤 특정 사실에 근거(根據)한 것이 아니라 비유와 관련된 전체적(全體的)인 결론(結論)이다. 비유에서 잔치에 들어가기조차 거절(拒絶)한 손님들이 “많다”라는 것을 함축(含蓄)할 뿐이다. 예수는 여기서, 왕의 자비로운 초청(招請)을 받아들이고 잔치 자리에 들어가고자 하는 자의 수가 비교적 적다는 중요한 사실을 말씀하신 것이다. (마 22:14, 재림교주석)


⑽.임금이 처음에 손님들을 초청(招請)했지만, 그 초청을 받아들이고 예복(禮服)을 입어 ‘택(擇)함을 입은 자들’(에클레크토이)은 소수(小數)였다. 그러나 손(guest)이 가득했기 때문에(10절) 잔치를 맛본 사람이 소수였다고 말할 수는 없다. 다만 이스라엘 모두를 먼저 초청했는데, 그들 대부분이 거절(拒絶)하여 택함을 입지 못한 비극적(悲劇的)인 현실을 지적(指摘)하시는 것이다


(1월 2일) (목) <우리를 위해 십자가(十字架)에 못 박히심>


(Q)~예수께서 십자가(十字架)를 택(擇)하시는 것은 사랑의 어떤 속성(屬性)들을 말해 주며, 십자가(十字架)의 속성(屬性)은 누구를 위하여 치러진 대가(代價)인가? (요한복음 10:17~18, 갈라디아서 2:20)


(A)~<십자가(十字架)의 오묘(奧妙)는 모든 다른 오묘들을 설명해 준다. 우리를 두려움과 경이감(驚異感)으로 충만하게 해 주는 하나님의 속성은 갈바리에서 흘러나오는 빛을 통하여 아름답고 매력 있게 나타난다. 성결(聖潔)과 공의(公義)와 권능(權能)이 자비(慈悲)와 온유(溫柔)와 부모와 같은 사랑에 혼합(混合)되어 나타난다. 우리는 높고, 또한 높이 들린 하나님의 보좌(寶座) 위엄(威嚴)을 볼 때, 은혜롭게 나타난 그분의 품성(稟性)을 보고, “우리 아버지”라는 사랑스러운 그 칭호(稱號)의 진정한 의미(意味)를 이전 어느 때보다 새롭게 이해(理解)하게 된다. (GC 652) 

 

⑴.십자가(十字架)의 사자(使者)들은 복잡(複雜)하고 부자연(不自然)스러운 이론(理論)을 피(避)하고 우주의 최고의 통치자(統治者)이신 세계 창조주의 속성(屬性)을 강조(强調)하였다.


⑵. 하나님과 그분의 아들에 대한 사랑으로 불타는 그들은 인류(人類)를 위하여 이루신 무한(無限)한 사랑을 바라보라고 이방인(異邦人)들에게 호소하였다. 


⑶.그들은 만일 이교(異敎)의 흑암 가운데서 오랫동안 암중모색(暗中摸索)해 온 자들이 갈바리의 십자가(十字架)에서 흘러나오는 빛을 볼 수 있게만 된다면 구주(救主)에게로 이끌리리라는 것을 알았다. 구주(救主)께서는 “내가 땅에서 들리면 모든 사람을 내게로 이끌겠노라”(요 12:32)라고 선언(宣言)하셨다. (AA 248)


⑷.십자가의 진리야말로 신비(神祕) 중에 신비이다. 그리스도의 존엄성(尊嚴性)을 깨닫기 힘든 그 이유로 말미암아 구원(救援)의 신비를 이해(理解)하기 어렵다. 수치(羞恥)스러운 십자가가 높이 세워지게 되고 주님의 두 손과 발에 못이 박히며 무자비(無慈悲)한 창이 주님의 가슴을 찔렀을 때 인류를 위한 구원(救援)의 대가(代價)가 지불(支拂)되었다. (AG 186)


⑸.구속(救贖)은 우리들의 가장 면밀(綿密)한 사색(思索)의 가치(價値)가 있는 영원한 주제(主題)이다. 따라서 구속(救贖)은 가장 발랄한 상상력(想像力)의 가장 깊은 생각과 범위가 미치지 못하는 인간의 이해력(理解力) 밖에 있다. (AG 186)


⑹.하나님께 돌아오기를 원(願)하지 않는 인류의 반역(叛逆)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독생자(獨生子)를 주시기로 하셨고 그리스도께서는 자원(自願)하여 우리를 위해 십자가(十字架)에 달리셨다. 


⑺.예수님께서는 그분의 몸으로 우리의 죄(罪)를 지셨다. 그 고통(苦痛)과 그 고뇌(苦惱)가 우리의 구속(救贖)의 대가(代價)이다. 명령(命令)의 말씀이 주어졌다. ‘영원히 멸망으로 내려가는 그들을 구원(救援)하라. 내가 대속물(代贖物)을 얻었다.’”(증언 6권, 479). 


⑻.인류(人類)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의 계시(啓示)는 십자가에 중심을 두고 있다. 십자가의 완전한 의미(意味)는 말로써 표현할 수 없고, 붓으로 묘사할 수 없고, 사람의 마음으로 깨달을 수 없다. 갈바리의 십자가를 바라볼 때, 우리는 다만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獨生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永生)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요 3:16)라고 말할 수 있다. (YHH 333)


⑼.하나님의 말씀 광산(光山)에서 부지런히 일하여 오고 여러 세기 동안 감추어진 거룩한 신비(神祕) 속에 있는 풍부(豐富)한 진리의 광맥(鑛脈)에서 값진 광석(鑛石)을 발견한 자들은 저들이 믿는 진리로 말미암아 저희 품성(稟性) 가운데 성화(聖化)시키는 능력을 나타냄으로써 모든 진리의 근원(根源)이신 주 예수를 높일 것이다. 


⑽.영혼(靈魂)의 깊은 성전(聖殿) 안에 예수님과 그의 은혜(恩惠)를 모셔야 할 것이다. 그렇게 할 때 주님께서는 말과 기도(祈禱)와 권면(勸勉)과 거룩한 진리를 증거(證據) 하는 가운데 나타나게 될 것이다. (기별 1, 405, AG 186) <아멘>


<새해 복 많이 받으십시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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