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3과 맺음말: 예수님과 하나님의 말씀을 아는 것(질문, 대답, 설명) 12/28/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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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김명호 작성일24-12-20 14:14 조회325회 댓글0건본문
제13과 맺음말: 예수님과 하나님의 말씀을 아는 것
(12월 28일 안식일 / 일몰: 오후 5시 21분)
연구 범위: 요 21; 요 11:9, 10; 요 8:42-44; 요 4:46-54; 딤후 2. 3:16; 요 15:1-11
기억절: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줄 생각하고 성경을 연구하거니와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언하는 것이니라"(요 5:39).
요한복음은 마가복음과 마찬가지로 갈릴리에서의 만남으로 마쳐진다. 이번 과는 그 만남을 다루면서 요한복음을 관통하는 개념인 우리가 ‘예수님과 하나님의 말씀을 어떻게 아는가’라는 주제를 함께 다룰 것이다.
제자들은 예수님과 3년 이상 함께 있으면서 어떤 일이 있을 것인지 예수께서 거듭 말씀하시는 것을 들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십자가와 부활에 대해 전혀 준비되지 않았다.
불행하게도 그들은 그분의 말씀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오늘날 우리도 그와 같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거나 읽으면서도 그 말씀을 듣지 않고, 말씀 안에 거하지 않고, 순종하지 않는 위험에 처할 수 있다. 즉 말씀을 우리의 생각과 행동을 인도하는 빛으로 받아들이지 않는 것이다. 안타깝게도 많은 그리스도인이 자신도 모르게 이런 상태에 놓여 있다.
요한복음을 연구하는 마지막 주에는 예수님에 대해 단순한 머리로만 이해하는 것을 넘어 그분을 더 잘 알고 그분과 그의 말씀 안에 더 가까이 거하는 데 도움이 될, 이 복음서의 핵심을 살펴볼 것이다.
*학습 목표
깨닫기: 우리는 다른 어떤 것보다 예수님과 그분의 말씀을 따르는 데 초점을 맞추어야 한다.
느끼기: 하나님의 빛은 무엇보다 성경 말씀을 믿을 때에 바르게 이해할 수 있다.
행하기: 사람의 견해를 따르지 않고 하나님의 빛을 따라 자신을 순복하기로 선택한다.
TMI 위로
2. 예수님의 질문에 대한 베드로의 대답은 그의 어떤 모습을 나타내 보였습니까?(요 21:17)
*답: 그가 참으로 회개하고 예수님 중심으로 생각하는 겸손한 사람이 된 것을 나타내 보였다.
3. 주께서 베드로에게 “무슨 상관이냐 너는 나를 따르라” 말씀하신 것은 어떤 뜻입니까?(요 21:22)
*답: 다른 사람을 보지 말고 예수님만 보고 따르라는 말씀이다.
4. 그리스도의 빛을 따르지 않을 때 우리는 어떤 오류에 빠지기 쉽습니까?(요 8:44)
*답: 마귀처럼 자기 것을 주장하게 된다.
5. 성경을 어떻게 믿고 이해하는 것이 올바른 것입니까?(딤후 3:16)
*답: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계시의 말씀으로 믿고 이해해야 한다.
6. 잘못된 신학이 미혹하는 때에 어떻게 하면 영적으로 바르게 성장할 수 있겠습니까?(요 15:4)
*답: 예수님께 꼭 붙어서 오직 말씀으로 말씀을 설명해주는 성령의 지도를 받아야 한다.
7.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사랑과 도우심에 대해서 우리에게 무엇을 보여주십니까?
*답: 말과 생활로 본을 보여주셨다.
결론: 사람의 생각은 하나님의 말씀을 받지 못하게 한다. 베드로는 자신이나 다른 사람보다 예수님과 그의 말씀을 따르는 데 더 초점을 맞추어야 하는 것을 배웠다. 하나님의 지혜는 사람의 지혜나 어떤 기준이 아닌 예수님을 통해 알 수 있다. 인간의 견해는 하나님 말씀에 종속되어야 하며 우리가 성경의 말씀을 믿을 때 성경을 바르게 이해할 수 있다. 하나님이 주시는 빛을 따라 자신을 순복하는 것은 우리의 선택에 달려있다.
12월 22일(일) 갈릴리에서의 재회
요한복음 21:1-19을 읽어 보라. 이 구절에는 특히 하나님의 은혜와 인간의 겸비에 관한 어떤 중요한 진리가 나타나 있는가?
[요21:1~19] 그 후에 예수께서 디베랴 호수에서 또 제자들에게 자기를 나타내셨으니 나타내신 일은 이러하니라 2 시몬 베드로와 디두모라 하는 도마와 갈릴리 가나 사람 나다나엘과 세베대의 아들들과 또 다른 제자 둘이 함께 있더니 3 시몬 베드로가 나는 물고기 잡으러 가노라 하니 그들이 우리도 함께 가겠다 하고 나가서 배에 올랐으나 그 날 밤에 아무 것도 잡지 못하였더니 4 날이 새어갈 때에 예수께서 바닷가에 서셨으나 제자들이 예수이신 줄 알지 못하는지라 5 예수께서 이르시되 얘들아 너희에게 고기가 있느냐 대답하되 없나이다 6 이르시되 그물을 배 오른편에 던지라 그리하면 잡으리라 하시니 이에 던졌더니 물고기가 많아 그물을 들 수 없더라 7 예수께서 사랑하시는 그 제자가 베드로에게 이르되 주님이시라 하니 시몬 베드로가 벗고 있다가 주님이라 하는 말을 듣고 겉옷을 두른 후에 바다로 뛰어 내리더라 8 다른 제자들은 육지에서 거리가 불과 한 오십 칸쯤 되므로 작은 배를 타고 물고기 든 그물을 끌고 와서 9 육지에 올라보니 숯불이 있는데 그 위에 생선이 놓였고 떡도 있더라 10 예수께서 이르시되 지금 잡은 생선을 좀 가져오라 하시니 11 시몬 베드로가 올라가서 그물을 육지에 끌어 올리니 가득히 찬 큰 물고기가 백쉰세 마리라 이같이 많으나 그물이 찢어지지 아니하였더라 12 예수께서 이르시되 와서 조반을 먹으라 하시니 제자들이 주님이신 줄 아는 고로 당신이 누구냐 감히 묻는 자가 없더라 13 예수께서 가셔서 떡을 가져다가 그들에게 주시고 생선도 그와 같이 하시니라 14 이것은 예수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신 후에 세 번째로 제자들에게 나타나신 것이라 15 그들이 조반 먹은 후에 예수께서 시몬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하시니 이르되 주님 그러하나이다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 주님께서 아시나이다 이르시되 내 어린 양을 먹이라 하시고 16 또 두 번째 이르시되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니 이르되 주님 그러하나이다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 주님께서 아시나이다 이르시되 내 양을 치라 하시고 17 세 번째 이르시되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니 주께서 세 번째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므로 베드로가 근심하여 이르되 주님 모든 것을 아시오매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을 주님께서 아시나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 양을 먹이라 18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네가 젊어서는 스스로 띠 띠고 원하는 곳으로 다녔거니와 늙어서는 네 팔을 벌리리니 남이 네게 띠 띠우고 원하지 아니하는 곳으로 데려가리라 19 이 말씀을 하심은 베드로가 어떠한 죽음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것을 가리키심이러라 이 말씀을 하시고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나를 따르라 하시니,
*답: 예수께서 베드로를 다시 찾으시고 그의 확신을 드러내주셨다. 베드로는 거기서 자기의 상태를 예수께서 아신다고 고백했다. 이것이 하나님 앞에 인간의 겸비이다. 그전에는 베드로가 자신을 스스로 잘 안다고 생각했었다.
요한복음 20장은 책의 목적을 서술하며 마치기 때문에 복음서가 거기서 끝나도 논리적으로 이상할 것이 없다. 그러나 요한복음은 한 장을 더 기록하고 있다. 21장은 갈릴리로 돌아온 몇몇 제자들에게 베드로가 호수에서 하룻밤을 보내자고 제안하면서 시작된다. 마치 옛날로 돌아간 듯 보였고 제자들은 다시 고기를 잡는다. 하지만 그날 밤 아무것도 잡지 못한다.
아침이 되자 호숫가에 있던 낯선 사람이 제자들에게 배 오른쪽으로 그물을 던지라고 말한다. 그들은 그물을 끌어 올릴 수 없을 정도로 많은 물고기를 잡는다. 마치 예수님과 사역을 시작하던 그때 같았다(눅 5:1-11). 요한은 즉시 예수님을 알아보고 베드로에게 말한다. 베드로는 곧 물로 뛰어들어 물가로 헤엄친다.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세 번 질문하시는데, 모두 주님을 사랑하는지 물으신다. 십자가에 달리시기 전에 베드로는 예수님을 위해 목숨을 바칠 것이라고 장담했다(요 13:37). 그러자 예수님은 그가 세 번 부인할 것을 예언하셨다(요 13:38). 이번 갈릴리의 만남에서 베드로는 더 이상 자신을 기준점으로 삼지 않고 예수님께 초점을 맞춘다. "주님 모든 것을 아시오매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을 주님께서 아시나이다"(요 21:17).
어떤 사람들은 예수께서 베드로에게 질문할 때 동사 아가파오(agapaō, 헬라어)를 사용해서(마지막을 제외하고) 사랑하느냐고 물었고, 베드로는 친구로서 사랑한다는 필레오(phileō)로 대답하였다는 점을 주목한다. 이는 베드로가 더 높은 종류의 사랑에 도달하지 못한 것을 암시한다는 주장이다.
사실 베드로의 반응은 겸비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자신의 실패의 기억이 너무나 생생했기에 그는 겸손하게 '낮은 개념'의 표현을 사용하며 자신에 대해 너무 강하게 주장하지 않았던 것처럼 보인다.
예수님께서 이러한 겸손을 인정하셨으며 이는 베드로를 다시 사역의 길로 회복시키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겸비는 분명 그리스인이 감당할 사역의 가장 큰 자질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모든 판단의 초점을 자기가 아닌 예수 그리스도에게 맞추기 때문이다.
베드로의 회복과 초기교회의 지도자로서의 역할은 예수님이 죽음에서 부활하셨다는 가장 강력한 증거 중 하나이다. 예수께서 다른 제자들 앞에서 베드로를 다시 부르지 않으셨다면 그가 감당한 두드러진 역할을 설명하기 어려울 것이다.
<교훈> 예수께서 갈릴리에서 베드로를 다시 부르시고 사역으로 회복시키실 수 있었던 것은 그가 자신보다 예수께 초점을 맞추고 겸손하게 행하였기 때문이다.
<부가설명> 성경이 가르치는 겸손은 전적으로 예수님을 인정하고 그분의 말씀을 진실하게 따르는 상태이다. 스바냐 선지자는 이것을 “여호와의 규례를 지키는 세상의 모든 겸손한 자들아”(습2:3)라고 말했다. 하나님의 규례를 지킨다는 말은 자기 생각을 따라 살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사는 것을 나타낸다. 베드로는 예수님을 따르면서도 자기를 강하게 드러냈다. 예수께서 죽으실 것을 처음 발표하신 때는 베드로가 예수님이 그리스도시며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을 고백한 후이다. 그때 그는 화난 음성으로 거의 꾸짖다시피 예수님을 말렸다. 자기 생각을 중심에 두고 예수님을 말린 것이다. 그것이 큰 실패로 그에게 닥아왔다. 그는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는 질문에 주께서 아신다고 대답했다. 자기 사고방식이 완전히 바뀐 것을 드러낸 것이다. 그는 모든 생각을 사로잡아 예수님께 복종시켰다. 이제는 예수님의사고방식과 그분의 말씀이 그의 생각과 삶이 된 것이다. 이것이 겸손이다. 진정한 그리스도인은 예수님의 생각으로 살아가는 사람이다.
12월 23일(월) 오직 예수를 바라보라
요한복음 21:20-22을 읽어 보라. 어떤 궁금함이 베드로를 잘못된 길로 이끌었는가? 예수님은 그것을 어떻게 바로잡으셨는가?
[요21:20~22] 베드로가 돌이켜 예수께서 사랑하시는 그 제자가 따르는 것을 보니 그는 만찬석에서 예수의 품에 의지하여 주님 주님을 파는 자가 누구오니이까 묻던 자더라 21 이에 베드로가 그를 보고 예수께 여짜오되 주님 이 사람은 어떻게 되겠사옵나이까 22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올 때까지 그를 머물게 하고자 할지라도 네게 무슨 상관이냐 너는 나를 따르라 하시더라.
*답: 다른 사람의 거취에 대한 관심을 버리고 예수님만 따르도록 하셨다.
예수님은 베드로를 사역에 복귀시키신 후 "나를 따르라"(요 21:19)고 말씀하셨다. 아마도 베드로는 실제로 해변에서 예수님을 뒤따라 걷고 있었을 것이다. 뒤를 본 베드로는 요한도 예수님을 따르고 있는 것을 보고 예수께 요한에 대해 물었다. "주님 이 사람은 어떻게 되겠사옵나이까"(요 21:21).
예수님은 베드로를 사역에 복귀시키시면서 그가 어떻게 죽을 것인지도 예언하셨다(요 21:18). 그렇기에 베드로는 요한은 어떻게 죽을 것인지 궁금했던 것 같다. 예수님은 베드로의 관심을 돌리셔서 다른 제자에게 일어날 일을 생각하는 대신 주님을 따르는 것에 초점을 맞추게 하셨다.
요한복음 21:23-25을 읽어 보라. 예수님의 말씀은 어떻게 오해되었는가? 이에 대해 요한은 그것을 어떻게 바로잡았는가?
[요21:23~25] 이 말씀이 형제들에게 나가서 그 제자는 죽지 아니하겠다 하였으나 예수의 말씀은 그가 죽지 않겠다 하신 것이 아니라 내가 올 때까지 그를 머물게 하고자 할지라도 네게 무슨 상관이냐 하신 것이러라 24 이 일들을 증언하고 이 일들을 기록한 제자가 이 사람이라 우리는 그의 증언이 참된 줄 아노라 25 예수께서 행하신 일이 이 외에도 많으니 만일 낱낱이 기록된다면 이 세상이라도 이 기록된 책을 두기에 부족할 줄 아노라.
*답: 요한은 죽지 않을 것이라고 오해한 것을 요한은 바로잡는 말을 썼다. 예수님의 말씀은 그분의 주권적인 말씀임을 알게 하였다.
사람들은 예수께서 "내가 올 때까지 그를 머물게 하고자 할지라도 네게 무슨 상관이냐 너는 나를 따르라"(요 21:22)라고 말씀하신 것을 오해했다. 제자들은 예수께서 요한이 죽기 전에 다시 오실 것이라고 말씀하셨다고 생각했다. 시간이 흐르고 요한이 늙어가면서 그가 죽고(물론 실제로 그랬지만) 예수께서 다시 오시지 않는다면 잘못된 오해 때문에 위기가 올 수 있었다. 요한은 그 말씀이 앞으로 일어날 일을 예언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주권에 관한 문제라고 설명함으로 오해를 바로잡는다.
다른 사람이 아닌 예수께 초점을 맞추어야 한다는 생각은 이번 주 교과 내내 살펴볼 중요한 주제이다. 예수님, 오직 예수님만이 우리의 구주이시다. 사람을 바라보는 것은 분명히 우리를 실망시키고 심지어 상처를 줄 수도 있다.
다른 사람들이 주는 도움, 조언, 인도와 상관없이 오직 예수님만이 우리의 스승, 그리고 인도자가 되셔야 한다. 화요일부터 목요일까지 다룰 교훈은 이것을 알고 따르기 위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이해하는 것을 주제로 다룰 것이다.
<교훈> 사람을 바라보는 것은 우리를 실망시키고 상처를 줄 수 있다. 다른 사람이 주는 도움, 조언, 인도가 아닌 오직 예수님이 우리의 스승, 인도자가 되셔야 한다.
<부가설명> 아무리 훌륭한 사람이라도, 보기에 대단한 믿음의 사람이라도 사람은 약점이 있고 실망시킬 수 있다는 것을 피차가 인정하고 인식해야 한다. 아무리 훌륭한들 예수님만 하겠는가? 그도 나와 다를 것이 없는 사람으로 함께 예수님을 바라보는 사람일 뿐이다. 사람은 완벽한 모본이 안 된다. 바울이 ‘내가 예수를 본받는 자 된 것 같이 나를 본받는 자 되라’(고전11:1)라고 한 것은 바울이 예수님을 본받듯이 우리도 예수님을 본받는 자 되라는 권고라고 이해하는 것이 바른 이해다. 바울을 본받는 자가 되는 것은 예수님을 본받는 자가 될 것이라는 암시가 있는 표현이다. 본받을 만한 사람이 있겠지만, 예수님을 본받는 것이 가장 바른 길이다. 말씀 안에서 예수님을 바라보면 예수님을 닮을 것이다.
12월 24일(화) 빛과 어둠
요한복음 1:4-10, 요한복음 3:19-21, 요한복음 5:35, 요한복음 8:12, 요한복음 9:5; 요한복음 11:9, 10; 요한복음 12:35을 읽어 보라. 여기에는 어떤 큰 대조가 나타나며, 이 대조가 진리를 이해하는데 중요한 기초가 되는 이유는 무엇인가?
[요1:4~10]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 5 빛이 어둠에 비치되 어둠이 깨닫지 못하더라 6 하나님께로부터 보내심을 받은 사람이 있으니 그의 이름은 요한이라 7 그가 증언하러 왔으니 곧 빛에 대하여 증언하고 모든 사람이 자기로 말미암아 믿게 하려 함이라 8 그는 이 빛이 아니요 이 빛에 대하여 증언하러 온 자라 9 참 빛 곧 세상에 와서 각 사람에게 비추는 빛이 있었나니 10 그가 세상에 계셨으며 세상은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되 세상이 그를 알지 못하였고,
[요3:19~21] 그 정죄는 이것이니 곧 빛이 세상에 왔으되 사람들이 자기 행위가 악하므로 빛보다 어둠을 더 사랑한 것이니라 20 악을 행하는 자마다 빛을 미워하여 빛으로 오지 아니하나니 이는 그 행위가 드러날까 함이요 21 진리를 따르는 자는 빛으로 오나니 이는 그 행위가 하나님 안에서 행한 것임을 나타내려 함이라 하시니라.
[요5:35] 요한은 켜서 비추이는 등불이라 너희가 한때 그 빛에 즐거이 있기를 원하였거니와,
[요8:12] 예수께서 또 말씀하여 이르시되 나는 세상의 빛이니 나를 따르는 자는 어둠에 다니지 아니하고 생명의 빛을 얻으리라.
[요9:5] 내가 세상에 있는 동안에는 세상의 빛이로라.
[요11:9,10]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낮이 열두 시간이 아니냐 사람이 낮에 다니면 이 세상의 빛을 보므로 실족하지 아니하고 10 밤에 다니면 빛이 그 사람 안에 없는 고로 실족하느니라.
[요12:35] 예수께서 이르시되 아직 잠시 동안 빛이 너희 중에 있으니 빛이 있을 동안에 다녀 어둠에 붙잡히지 않게 하라 어둠에 다니는 자는 그 가는 곳을 알지 못하느니라.
*답: 빛과 어둠을 대조했다. 빛이 없으면 보이는 것이 없다. 빛이 있을 때 진리를 깨달을 수 있다.
세상은 어둠 가운데 있으며 빛을 피한다. 세상 스스로는 창조하시고, 계시하시며, 구속하시는 인격적이신 참 하나님께로 가는 길을 찾을 수 없다.
“인간은 결코 스스로 하늘의 지식을 찾을 수 없다. ‘하늘보다 높으시니 네가 어찌 하겠으며 음부보다 깊으시니 네가 어찌 알겠느냐’(욥 11:8). 오직 성령께서만 ‘눈으로 보지 못하고 귀로도 듣지 못하고 사람의 마음으로 생각지 못하’는 하나님의 깊은 것을 우리에게 계시하실 수 있으시다. ‘오직 하나님이 성령으로 이것을 우리에게 보이셨으니’(고전 2:9, 10)”(시대의 소망, 412).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이 아버지 하나님을 "나타내셨"다(요 1:18). 요한복음 1:18에 사용된 헬라어 동사 엑세게오마이(exēgeomai)는 ‘뜻을 풀어 이해할 수 있게 해석하다, 설명하다, 논지를 밝히다’라는 뜻이다. 요한은 예수님을 하늘의 사자, 즉 하나님을 아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려주시는 분으로 소개한다. 오직 예수님을 통해서만 하나님을 참으로 알 수 있다.
요한복음 8:42-44을 읽어 보라. 이스라엘의 종교 지도자들이 믿음의 근거로 삼았던 거짓된 기초에 대해 예수님은 어떻게 묘사하시는가?
[요8:42~44] 예수께서 이르시되 하나님이 너희 아버지였으면 너희가 나를 사랑하였으리니 이는 내가 하나님께로부터 나와서 왔음이라 나는 스스로 온 것이 아니요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이니라 43 어찌하여 내 말을 깨닫지 못하느냐 이는 내 말을 들을 줄 알지 못함이로다 44 너희는 너희 아비 마귀에게서 났으니 너희 아비의 욕심대로 너희도 행하고자 하느니라 그는 처음부터 살인한 자요 진리가 그 속에 없으므로 진리에 서지 못하고 거짓을 말할 때마다 제 것으로 말하나니 이는 그가 거짓말쟁이요 거짓의 아비가 되었음이라.
*답: 그들은 거짓의 아비 마귀에게서 배운 것이라고 하셨다. 마귀는 제 것으로 말한다. 유대 지도자들도 제 것으로 주장했다.
진리 안에 서 있지 않은 사람들은 자신의 가진 것에서 말한다. 그들은 말씀의 의미를 인간의 관점에서만 "본다".
반면에 우리는 그리스도가 세상의 빛이심을 받아들이고 하나님의 말씀을 해석할 때 그분을 따라야 한다. 반대로 마귀는 "제 것으로 말"한다(요 8:44). 우리가 조심하지 않고 하나님께 대한 믿음과 순종으로 굴복하지 않으면, 우리도 어느새 자신의 욕망, 필요, 관점에만 근거하여 본문을 읽는 똑같은 위험한 일을 할 수 있다.
<교훈> 진리 안에 있지 않은 사람은 자기 관점에 근거해서 말한다. 오직 예수님을 통해서만 하나님을 아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바르게 알 수 있다.
<부가설명> 빛은 생명이다(요1:4). 예수님이 세상의 빛이신 것은 그분이 생명이라는 말과 같다. 빛이 있는 사람은 생명이 있는 사람이다. 생명이 없으면 아무것도 없다. 존재를 상실하는 것이다. 그래서 어둠에 있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줄 모른다. 들으면 생명을 얻는다. 나사로는 죽은 지 나흘이나 되었어도 생명이신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일어나 나왔다. 어둠에 있는 사람, 즉 사망에 속한 사람은 자기 외에 인식되는 것이 없다. 그러므로 자기 것으로 말할 수밖에 없다. 자기 안에는 진리가 없다. 그래서 그는 거짓을 말하게 된다. 오늘날 재림성도인 우리도 예수님이 나의 생명인지 자세히 시험하고 확인할 필요가 있다(고후13:5).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다(롬8:9). 마지막이 가까운 때에 진리의 백성으로 자처하는 우리는 정직하게 자신을 살피고 빛으로 살아야 하겠다.
12월 25일(수) "위로부터"의 신학인가 "아래로부터"의 신학인가
요한복음 4:46-54을 읽어 보라. 그 관원은 어떤 문제 때문에 예수님을 찾아왔으며, 그에게 있는 근본적인 문제는 무엇이었는가?
[요4:46~54] 예수께서 다시 갈릴리 가나에 이르시니 전에 물로 포도주를 만드신 곳이라 왕의 신하가 있어 그의 아들이 가버나움에서 병들었더니 47 그가 예수께서 유대로부터 갈릴리로 오셨다는 것을 듣고 가서 청하되 내려오셔서 내 아들의 병을 고쳐 주소서 하니 그가 거의 죽게 되었음이라 48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는 표적과 기사를 보지 못하면 도무지 믿지 아니하리라 49 신하가 이르되 주여 내 아이가 죽기 전에 내려오소서 50 예수께서 이르시되 가라 네 아들이 살아 있다 하시니 그 사람이 예수께서 하신 말씀을 믿고 가더니 51 내려가는 길에서 그 종들이 오다가 만나서 아이가 살아 있다 하거늘 52 그 낫기 시작한 때를 물은즉 어제 일곱 시에 열기가 떨어졌나이다 하는지라 53 그의 아버지가 예수께서 네 아들이 살아 있다 말씀하신 그 때인 줄 알고 자기와 그 온 집안이 다 믿으니라 54 이것은 예수께서 유대에서 갈릴리로 오신 후에 행하신 두 번째 표적이니라.
*답: 왕의 신하가 아들을 낫게 해달라고 예수님을 찾아왔다. 그의 신앙은 고쳐준다면 믿겠다는 것이었다.
이 사람은 세상의 빛이신 예수님을 찾아왔지만, 예수님이 자신의 아이를 고쳐주신다면 믿기로 마음먹었다. 이 사람의 신학은 ‘아래로부터의 신학’이라고 말할 수 있다. 아래로부터의 신학은 하나님과 그분의 말씀에 대한 사람의 규칙과 기준을 설정한다. 이것은 결함이 있고, 제한적이며, 주관적인 인간의 생각을 하나님의 말씀을 해석하는 최종적인 권위로 삼는 것이다. 얼마나 위험한 함정인가!
그와 달리 '위로부터'의 신학은 먼저 하나님과 그분의 말씀을 먼저 신뢰하고 믿음으로 반응하는 것이다(요 4:48, 요 6:14, 15, 딤후 3:16). 성경을 믿음으로 받아들일 때 성경은 그 자체의 해석자가 된다. 각 시대의 사상이 아니라 성경의 세계관이 성경을 이해하고 해석하는 지침이 되는 것이다. 인간의 견해는 하나님의 말씀에 종속되는 부차적인 것이 되어야지, 그 반대여서는 안 된다.
예수님의 말씀을 믿으려면 성경의 말씀을 믿어야 한다(요 5:46, 47). "너희가 내 말에 거하면 참으로 내 제자가 되"(요 8:31)지만 하나님의 말씀을 의심하면 그분의 말씀이 우리 안에 거할 수 없다(요 5:38). "나를 저버리고 내 말을 받지 아니하는 자를 심판할 이가 있으니 곧 내가 한 그 말이 마지막 날에 그를 심판하리라 내가 내 자의로 말한 것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내가 말할 것과 이를 것을 친히 명령하여 주셨으니"(요 12:48, 49).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다는 것은 수동적으로 정보를 받아들이는 것 이상이다. 그것은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것이다.
이것이 말씀을 들을 때 나타나는 능동적인 반응이다. "사람이 하나님의 뜻을 행하려 하면 이 교훈이 하나님께로부터 왔는지 내가 스스로 말함인지 알리라"(요 7:17).
또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행하는 것은 그분에 대한 사랑의 표현이다. "사람이 나를 사랑하면 내 말을 지키리니 내 아버지께서 그를 사랑하실 것이요 우리가 그에게 가서 거처를 그와 함께 하리라"(요 14:23).
<교훈> 인간의 견해는 하나님 말씀에 종속되어야 하며 성경 말씀을 믿어야 한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은 행하는 것이며, 이것은 그분에 대한 사랑의 표현이다.
<부기설명> “아래로부터의 신학은 하나님과 그분의 말씀에 대한 사람의 규칙과 기준을 설정한다. 이것은 결함이 있고, 제한적이며, 주관적인 인간의 생각을 하나님의 말씀을 해석하는 최종적인 권위로 삼는 것이다. 얼마나 위험한 함정인가!
그와 달리 '위로부터'의 신학은 먼저 하나님과 그분의 말씀을 먼저 신뢰하고 믿음으로 반응하는 것이다.” 교과 저자의 이 말은 성경을 연구하는 사람들이 명심해야 할 말이다. 하나님께서는 “여호와의 말씀에 내 생각은 너희 생각과 다르며 내 길은 너희 길과 달라서 하늘이 땅보다 높음같이 내 길은 너희 길보다 높으며 내 생각은 너희 생각보다 높으니라”(사55:8,9)라고 말씀하셨다. 우리는 땅에 속한 사람이다. 어떻게 하늘같이 높은 하나님의 생각이 담긴 하나님의 말씀을 사람의 기준으로 해석하려고 해서 되겠는가? 학자들의 견해를 참고할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이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과 일치하는 사상이 아니면 버려야 한다. 바울이 그랬다. 그것은 다 해로운 것이기 때문에 배설물로 버렸다고 했다(빌3:6~9). 바울이 해롭다고 버린 그것을 주워담는 도로(徒勞)를 버려야 하지 않겠는가?
12월 26일(목) 예수 안에 거함
요한복음 12:32을 읽어 보라. 이 놀라운 진술은 예수 그리스도의 권위를 어떤 방식으로 묘사하는가?
[요12:32] 내가 땅에서 들리면 모든 사람을 내게로 이끌겠노라 하시니,
*답: 예수님은 모든 사람을 이끌 권위가 있는데, 그분이 들림으로 그렇게 된다.
이번 기 교과를 통해 살펴보았듯이, 요한복음은 우리를 예수께로 이끈다. 하지만 그것은 우리가 하나님을 알기 원하고 그분의 뜻을 행하고자 하는 경우에만 가능하다. 요한복음에 기록된 예수님을 만난 사람들은 모두 각각 빛을 받아들이고 성장하거나, 빛을 거부하고 소경이 된다.
니고데모, 우물가의 여인, 왕의 신하, 베데스다 못가의 사람, 떡과 물고기를 먹은 5천 명, 예수님의 형제들, 종교 지도자들, 소경으로 태어난 사람, 마리아와 마르다, 빌라도 등 이 사람들은 모두 예수님을 만나고 그분이 주시는 진리와 빛에 어떻게 반응할지 선택한다.
아래로부터의 신학은 하나님의 존재와 본성을 판단하고 조사하기 위한 인간의 논증에서 시작한다. 결함 있고, 타락하고, 편견이 있는 인간의 관점을 신성하고 거룩하며 완전하고 전지하신 하나님보다 우선으로 여기는 것이다. 과거에도 그랬던 것처럼 앞으로도 그럴 것이며(계 14:1-12), 신성을 대체하고자 하는 인간의 지혜가 세상에 거짓 예배를 강요하려 할 때 아래로부터의 신학은 사람들을 그릇된 길로 이끌 것이다.
요한복음 15:1-11을 읽어 보라. 영적 성장과 건강의 비결은 무엇인가?
[요15:1~11] 나는 참포도나무요 내 아버지는 농부라 2 무릇 내게 붙어 있어 열매를 맺지 아니하는 가지는 아버지께서 그것을 제거해 버리시고 무릇 열매를 맺는 가지는 더 열매를 맺게 하려 하여 그것을 깨끗하게 하시느니라 3 너희는 내가 일러준 말로 이미 깨끗하여졌으니 4 내 안에 거하라 나도 너희 안에 거하리라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지 아니하면 스스로 열매를 맺을 수 없음 같이 너희도 내 안에 있지 아니하면 그러하리라 5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라 그가 내 안에, 내가 그 안에 거하면 사람이 열매를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이라 6 사람이 내 안에 거하지 아니하면 가지처럼 밖에 버려져 마르나니 사람들이 그것을 모아다가 불에 던져 사르느니라 7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 8 너희가 열매를 많이 맺으면 내 아버지께서 영광을 받으실 것이요 너희는 내 제자가 되리라 9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사랑하였으니 나의 사랑 안에 거하라 10 내가 아버지의 계명을 지켜 그의 사랑 안에 거하는 것 같이 너희도 내 계명을 지키면 내 사랑 안에 거하리라 11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내 기쁨이 너희 안에 있어 너희 기쁨을 충만하게 하려 함이라.
*답: 오직 예수님께 꼭 붙어있어야 한다.
비결은 예수님과 계속 연결되어 있는 것이다. 그분은 하나님의 말씀, 생명의 떡, 세상의 빛, 양들의 문, 선한 목자, 부활과 생명, 길, 진리, 생명, 참 포도나무이시다.
신격의 모든 분과 그분의 말씀인 성경은 자석과 같다. 저항하지 않는다면 우리를 그들에게로 끌어당길 것이다.
"하나님의 음성은 그분의 말씀을 통해 우리에게 들려지고 있으며 우리는 많은 음성을 듣게 될 것이다. 하지만 그리스도께서는 그리스도가 여기 있다, 저기 있다 하는 자들을 조심하라고 말씀하셨다. 그렇다면 우리가 모든 것을 성경으로 가져가지 않는 한, 그들이 진리를 말하고 있지 않다는 것을 어떻게 알 수 있겠는가?"(리뷰 앤드 헤럴드, 1888. 4. 3.) 그러므로 우리는 자신의 견해를 말씀에 제시된 하나님의 뜻 아래에 굴복시켜야 한다.
<교훈> 사람은 예수를 만나고 진리와 빛에 어떻게 반응할지 선택해야 한다. 인간의 지혜는 그릇된 길로 이끌지만 우리는 하나님의 뜻 아래 자신을 굴복시켜야 한다.
<부가설명> 우리는 아래서 난 사람이다(요8:23). 그러므로 사고방식이 아래적이다.
성경은 “누가 철학과 헛된 속임수로 너희를 노략할까 주의하라 이것이 사람의 유전과 세상의 초등 학문을 좇음이요 그리스도를 좇음이 아니니라”(골2:8)라고 경고했다. 세상의 학문도 세상을 살아가는데 유용하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세상적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공부하는 자이다. 성경의 해석을 사람에게 맡기지 않았다고 나는 믿는다. 해석은 하나님께 있다(창40:8). 그러므로 우리는 말씀을 연구할 때 진리로 인도하기 위하여 오신 성령님의 지도를 전적으로 따라야 한다(요16:13~15). 바울도 고전2:9~14에서 분명히 기록했다. 스스로 지혜롭다는 의식이 있으면 이것을 잘 받아들이지 못한다. 생각으로는 그렇게 해야지 할 수 있지만 막상 말씀을 대면하고 문제를 깨달으려고 할 때 배운 학문과 지식과 경험이 머리를 쳐들고 나온다. 그럴 때마다 신발 벗는 굴복이 필요할 것이다. “너의 선 곳은 거룩한 땅이니 네 발에서 신을 벗으라”(출3:5)라는 말씀을 명심해야 할 것이다.
12월 27일(금) 더 깊은 연구를 위하여
하나님의 관점은 인간의 관점과 크게 다르다. 하나님은 성령의 능력으로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통해 당신의 관점을 우리와 공유하신다. 우리가 어둠 속에서 행할 것인지 아니면 말씀에 계시된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오는 빛을 받아들일 것인지는 우리의 선택에 달려있다.
이 선택에 필수적인 것은 하나님의 아들이자 인류의 구세주이신 예수 그리스도께 우리가 개인적으로 순복하는 것이다. 아버지 하나님께서는 성령의 능력을 통해 예수님의 삶과 죽음, 부활에 나타난 당신의 사랑의 깊이를 우리에게 계시하셨다. 그리고 우리는 예수님의 삶과 죽음, 부활이 하나님의 말씀에 기록되어 있기에 예수님에 대해 알고 있다.
"하나님의 천사들은 땅에서 하늘로, 하늘에서 땅으로 항상 왕래하고 있다. 곤고한 자와 고통당하는 자들을 위한 그리스도의 기적은 천사들의 봉사를 통하여 하나님의 능력에 의해 이루어졌다. 온갖 축복이 하나님께로부터 우리에게 오는 것은 하늘의 사자들의 봉사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통하여 이른다. 우리 구주께서는 친히 인성을 취하심으로 당신의 관심을 타락한 아담의 아들 딸들의 관심과 연합시키시는 한편, 신성을 통하여 하나님의 보좌를 붙잡고 계신다. 이와 같이 그리스도께서는 사람과 하나님,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교통의 중개자이시다"(시대의 소망, 143).
함께하는 토의를 위하여
1. 요한복음의 모든 이야기 중에서 당신에게 하나님의 사랑과 성품에 대해 가장 잘 말해주는 것은 무엇인가? 그 이야기가 왜 그렇게 설득력 있다고 생각하는지 반원들과 나누어 보라.
*답: 요1:14, 3:16, 요8:1~11 각각 생각하고 이야기하자.
2. 개인이 진리를 찾기 위해 실제적인 측면에서 어떻게 해야 하는가?
*답: 말씀 앞에 자기를 비우고 연구할 것이다.
3. 진리를 판단할 때 언제나 자신을 내려놓는 것이 어려운 이유는 무엇인가? 우리는 완전히 자신을 배제할 수 있는가, 아니면 우리의 인간성이 여전히 성경을 보는 방식에 어느 정도 영향을 미치는가? 우리는 이 사실을 아는 것은 왜 중요한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우리의 편견을 내려놓는데 이러한 겸손함은 어떻게 도움이 되는가?
*답: 자신을 비우는 것은 쉽지 않다. 우리가 예수님 안에서 죽어야 한다.
4. 서구 기독교의 역사에서 하나님의 말씀보다 인간의 정치적 견해와 편견을 높일 때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 보여주는 끔찍한 사례는 어떤 것이 있는가? 그런 사례들을 통해 인간의 관점을 통해 성경을 '해석'하는 것이 얼마나 위험한지에 대해 어떤 교훈을 얻을 수 있는가?
*답: 교황권의 행사를 통하여 드러났다.
5. 요한복음이 보여주는 큰 그림을 자신의 말로 요약해 보라. 요한복음이 주는 핵심 기별은 무엇인가?
*답: 예수님을 믿고 영원한 생명을 얻으라고 요약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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