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2과-영광의 때 :십자가와 부활 -(핵심Q&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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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이봉주 작성일24-12-16 13:32 조회527회 댓글0건첨부파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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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2과 영광(榮光)의 때: 십자가(十字架)와 부활(復活)
(12월 21일 (안) / 일몰: 오후 5시 17분)
<(記憶節)>
"빌라도가 이르되 그러면 네가 왕이 아니냐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네 말과 같이 내가 왕이니라 내가 이를 위하여 태어났으며 이를 위하여 세상에 왔나니 곧 진리에 대하여 증언하려 함이로라 무릇 진리에 속한 자는 내 음성을 듣느니라"(요 18:37).
<개요(槪要)>
⑴.요한복음을 통하여 우리는 이 세상적(世上的)인 세계관(世界觀)과 예수님의 세계관(世界觀)에서 아주 대조적(對照的)인 면을 발견하게 된다.
⑵.세상적인 세계관은(빌라도) 일시적(一時的)인 통치자(統治者)와 일시적인 왕국(王國)에 기초(基礎)를 두지만, 예수님께서는 영적(靈的)이고 영원(永遠)한 왕국(王國)에 기초를 두신다는 점이다.
⑶.세상적 인(빌라도)에게 에수님은 진리(眞理)에 대해서 증거(證據)하기 오셨다는 말씀을 듣는지도 이해(理解)하지도 못했다. 오히려 진리(眞理)가 무엇이냐고 반문(反問)을 하고 있다.
⑷.우리 그리스도인이라는 사람들도 안타깝게도 빌라도처럼 자주 자기중심적(自己中心的)이고 예수 그리스도 중심적(中心的)이지 않다. 이를 깨달으라는 것이 요한이 전(傳)하고자 하는 기별이다.
⑸.세상은(빌라도) 십자가(十字架)는 가장 부끄럽고 굴욕적(屈辱的)인 죽음인 십자가형(十字架刑)이 요한에 의해 가장 영광(榮光)스러운 사건(事件)으로 조망(眺望)하고 있다.
⑹.예수님은 두 번째 아담으로서 죽음을 통해 사탄을 물리치시고 죄 많은 인류를 구원(救援)하는 사명(使命)을 이루셨다.
⑺.예수님의 구원사명(救援使命)이 성취(成就)되자, 그의 아버지는 그의 희생(犧牲)을 받아들이셨고 그의 아들을 믿는 모든 사람이 구원(救援)받을 수 있게 하셨다.
⑻.예수님은 진리를 증거하러 오셨으며 “진리에 속한” 사람은 그 음성(音聲)을 듣는다고 하셨다. 빌라도는 진리(眞理)에 가까이 갔음에도 편견(偏見)과 압박(壓迫)과 이해(利害) 때문에 기회를 놓쳤다.
⑼.(마태복음)은 성경(聖經)의 성취(成就)를 강조(强調)하고, (마가복음)은 예수님의 침례(浸禮)와 십자가(十字架)의 유사점(類似點)을 강조하며, (누가복음)은 치유(治癒)와 구원(救援)(십자가에 달린 도둑의 이야기)으로서의 십자가(十字架)에 초점(焦點)을 맞춥니다.
하지만 (요한)은 십자가(十字架)를 예수님의 즉위(卽位)로 제시(提示)하는데, 특히 요한복음 전체에서 여러 번 언급되는 시간의 개념과 관련이 있다. (요 7:30, 요 8:20, 요 12:27). 이러한 즉위 개념(卽位槪念)은 아이러니한 그림입니다.
⑽.십자가형(十字架刑)은 로마인들이 사용한 가장 수치(羞恥)스럽고 부끄러운 죽음의 방법이었기 때문이다. 이 대조(對照)는 요한이 제시(提示)하는 깊이 아이러니한 묘사(描寫)를 가리킨다. 즉 예수님은 수치심(羞恥心) 속에서 죽으시지만, 동시에 구세주(救世主)로서 영광(榮光)스럽게 즉위(卽位)하신다.
(12월 15일) (일) <진리(眞理)가 무엇이냐>
(Q)~빌라도와 예수님은 어떤 대화(對話)를 하셨으며, 이 대화의 내용이 요한복음의 중요한 주제(主題)인 것은 어떤 말씀들을 통해 알 수 있습니까? (요한복음 18:33~38, 요 14:6)
(A)~<빌라도 총독(總督)은 “네가 유대인의 왕이냐”(요 18:33)라고 묻는다. 총독(總督)의 질문에서 예수님은 빌라도에게 그가 스스로 묻는 것인지 아니면 다른 사람들이 그렇게 말하는 것을 반복(反復)한 것인지 물으신다. 그분의 질문(質問)은 총독에게 자신이 심문(審問)하고 있는 대상(對象)이 누구인지를 이해하는지 되물으심으로 상황(狀況)을 뒤집으셨다.>
⑴.빌라도는 "진리(眞理)란 무엇인가?"라는 질문(質問)을 한 후(後) 답(答)을 기다리지 않고 돌아서면서, 진리(眞理) 그 자체로부터 진리에 대한 말씀을 듣지 못했다.
⑵.진리(眞理)에 대한 그의 질문은 오늘날 특히 중요하다. 왜냐하면, 세상은 버려지거나 버림받은 진리(眞理)로 가득 차 있기 때문이다.
⑶.인간 세상은 거짓의 어둠과 그에 따른 혼란(混亂)이 도처(到處)에 만연(蔓延)한다. 오늘날에는 진리(眞理)를 피(避)하고, 진리를 피해 다니며, 이중 언어(言語)가 용납(容納)되고 정상화(正常化)되었고, 진리에 대한 이러한 저하(低下)가 늘 반복발생하고 있다.
⑷.예수님은 진리(眞理)를 증거(證據)하러 오셨으며 “진리(眞理)에 속한” 사람은 예수님의 음성을 듣는다고 하셨다. 빌라도는 진리(眞理)에 가까이 갔음에도 편견(偏見)과 압박(壓迫)과 이해타산(利害打算) 때문에 기회(機會)를 놓쳤다. 즉 예수님은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는 말씀”이다.
⑸.우리가 예수님의 발자취를 따를 때, 그분은 우리가 진실을 말하는 사람이 되도록 도와주신다.
⑹.예수님은 단순히 진실(眞實)을 말씀하시는 것이 아니라, 그분 자신이 진실(眞實)이시다. 결국, 그분은 "나는 길이요 진리(眞理)요 생명(生命)이니라"(요한복음 14:6)라고 증거(證據)하셨다.
⑺.우리의 증거(證據)가 다른 사람들을 악(惡)의 어둠에서 끌어올려 예수 그리스도의 진리(眞理)의 밝은 빛으로 인도(引導)하기를 그분은 바라신다.
⑻.우리가 다른 사람들에게 진리(眞理)가 여전히 예수 그리스도와 그분의 추종자(追從者)들 안에서 발견(發見)될 수 있음을 알리기를 바랍니다.
⑼.예수님은 은혜(恩惠)와 진리(眞理)가 충만(充滿)하신 분이시며(요 1:14), 은혜와 진리(眞理)는 그분으로 말미암아 왔고(요 1:17), 침례(浸禮) 요한은 진리에 대해 증거(證據)했다. (요 5:33).
⑽.진리(眞理)는 요한복음의 주제(主題)이다. 영원한 말씀(logos, 요 1:1~5)이신 예수님은 빛이시며 진리(眞理)이시다. 이것은 어둠과 오류(誤謬)와 대조(對照)되는 것이다.
※(진리(眞理)란=영멸(永滅)에서 영생(永生)으로 가는 복음(福音)으로 Logos, 요 빛이요 은혜(恩惠)요 길이요 생명(生命)이 되는 것이 진리(眞理)이다.
(12월 16일) (월) <이 사람을 보라>
(Q)~빌라도는 사람들이 예수의 석방(釋放)을 요구(要求)하도록 설득(說得)하기 위해 어떻게 했는가? (요한복음 18:38~19:5)
(A)~<1). 예수님의 사명(使命)은 유월절(踰越節) 어린 양(羊)으로 희생(犧牲)되어 세상의 기초(基礎)부터 죽임을 당하는 것이었다. 그는 죽기 위해 태어났지만, 그의 죽음은 빌라도의 손에 있을 필요(必要)가 없었다. 빌라도가 군중(群衆)에게 한 마지막 말은 "이 사람을 보라!"였습니다. (요한복음 19:5).>
<2). 빌라도는 이 겉보기에 단순한 말로 구원(救援)의 넓이와 깊이와 높이와 그리고 본질적(本質的)으로 그것이 무엇인지를 요약(要約)했다. 예수를 바라봄으로써 우리는 변화(變化)됩니다. 그리고 침례자(浸禮者) 요한의 언어(言語)로 "보라! 세상 죄를 없애는 하나님의 어린 양(羊)이로다!"(요한복음 1:29)라고 했다. 인자(人子)를 바라보고 구원(救援)을 받읍시다. 그분을 바라보고 삽시다.>
⑴.본디오 빌라도는 자신이 진실(眞實)이라고 알고 있는 것에 대한 그의 주저(躊躇)함과 타협(妥協) 때문에 불쌍히 여겨야 한다. 그는 모든 사람을 기쁘게 하려고 노력했지만, 그 결과(結果) 아무도 기쁘게 하지 못했다.
⑵.총독(總督) 빌라도는 유대인과 로마 권력 모두에게 미움을 받았다. 황제(皇帝)는 그를 갈리아로 추방(追放)하고 모든 명예(名譽)를 박탈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는 유배(流配) 중에 자살(自殺)했다.
⑶.빌라도는 유대인 지도자(指導者)들의 정의감(正義感)과 동정심(同情心)에 호소(呼訴)하려 했지만, 그들은 예수가 십자가(十字架)에서 죽는 것을 보고 싶어 했다.
⑷.빌라도는 예수에게 채찍질을 명령(命令)함으로써 그의 백성의 동정심(同情心)을 이끌어내고자 했다. 그러나 빌라도는 실패(失敗)했다.
⑸.빌라도는 예수를 구(求)하기 위한 마지막 시도(試圖)로 종교 지도자(宗敎指導者)들에게 관습(慣習)대로 두 명의 죄수(罪囚) 중 하나를 선택하도록 했다. 빌라도는 누구를 풀어야 할까요? 그리스도인가, 바라바인가? 유대인들은 가장 사악(肆惡)한 범죄자(犯罪者)이자 사탄의 진정한 대표자(代表者)인 바라바를 선택했다.
⑹.그들 군중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항상 주장하시는 높은 의(義)의 표준(標準)을 미워하였다. 그들은 그리스도의 교훈(敎訓)이 결국(結局)에는 저희의 이기심(利己心)을 폭로(暴露)하는 것임을 알고 그를 죽이기로 결심하였다.
⑺.슬프게도 빌라도는 마침내 지도자(指導者)들이 예수를 십자가(十字架)에 못 받는 데 완강(頑强)하다는 것을 깨달았을 때, 마지못해 그들의 바람에 굴복(屈伏)했다. 약간의 타협(妥協)이 그를 더 큰 타협으로 이끌었고, 결국 그는 돌이킬 수 없는 문턱을 넘었다.
⑻.그러나 이러한 과정에서 빌라도는 예수가 실제로 무죄(無罪)하다고 세 번이나 선언(宣言)한 다음 그에게 사형(死刑)을 선고(宣告)함으로써 자신과 법정 절차(法廷節次)의 불의(不義)를 비난했다.
⑼.빌라도는 얼마나 비극적(悲劇的)인 인물(人物)이었습니까! 그러나 이교도(異敎徒)로서 그는 유대인을 그의 백성에게서 구(求)하려고 했지만, 그들은 그의 죽음을 요구(要求)했다. 이 모든 일은 유월절(踰越節)에 일어났다.
⑽.빌라도가 이 사람을 보라 한 것은 침례(浸禮) 요한이 어린양을 보라 한 것을 상기(想起)시킨다. 그런데도 지도자(指導者)들은 민족적(民族的) 열망(熱望)까지 버리면서 그분을 십자가(十字架)에 못 박았다.
(12월 17일) (화) <"다 이루었다“>
(Q)~<예수께서 “다 이루었다”고 하신 것은 무엇을 이루셨음을 말씀하신 것이며, 예수님의 ‘다 이루었다’는 외침의 말씀의 의미(意味)는 무엇입니까? (요한복음 19:28~30)
(A)~<그리스도의 완벽(完璧)한 희생(犧牲)은 우리가 그분의 사역(使役)에 더하거나 빼지 말고 그저 그것을 받아들여야 함을 의미(意味)합니다. 구원(救援)은 은혜(恩惠)의 선물(膳物)입니다. 우리는 믿음으로 이 선물(膳物)을 받고, 그리스도의 의(義)로움에 대한 믿음을 통해 순종(順從)하고 승리(勝利)하는 삶을 살 수 있는 힘을 얻습니다.>
⑴.‘예수는 아버지가 그에게 하라고 준 일을 완수(完遂)했다(요 4:34). 세계의 기초(基礎)가 놓이기 전부터 준비된 구속(救贖) 경륜(經綸)의 매(每) 단계(段階)가 예정(豫定)에 따라 완성되었다. 사단은 그 계획을 뒤엎으려는 일에 실패(失敗)했다. 그리스도의 승리(勝利)는 인간의 구원(救援)을 확실하게 하였다. (소망, 758~764).
⑵.“다 이루었다”는 예수님의 말씀은 기독교가 무엇인가를 말해주는 아주 중요한 말씀입니다. 다 이루었다는 것은 일의 완성을 뜻합니다. 완전한 성취를 의미합니다. 일의 완성이고 완전한 성취이기 때문에 다른 무엇인가를 더할 필요가 없습니다. 예수님의 사역으로 말미암아 구속 사업(救贖事業)을 완벽하게 완성되었기 때문입니다.
⑶.(첫째)는 ‘사역(使役)을 끝마쳤다’라는 의미(意味)입니다. (둘째)는 ‘값을 지불(支拂)했다’라는 의미입니다. (셋째), ‘조건(條件)을 충족(充足)했다’라는 의미입니다. (넷째), ‘목적(目的)을 성취(成就)했다’라는 의미(意味)입니다. 이는 성육신(成肉身)으로 이 땅에 오셔서 우리의 죄를 위해 고난(苦難)을 받아 죽으심으로 목적을 이루셨다는 것입니다
⑷.이는 예수님이 죄인인 우리의 죄를 대속하여 십자가에 피 흘려 죽으심으로 우리를 거룩한 백성 되게 하신 것을 의미합니다
이는 예수님이 십자가 대속의 죽음으로 우리가 잘못한 죗값을 완전히 갚아 주셨다는 뜻입니다.
우리의 죗값을 조금이라도 부족하게 지불하면 율법은 우리를 향해 사망을 선언합니다.
⑸.우리를 위하여 얼마나 엄청난 값이 지불되었는가! 십자가(十字架)를 보라! 그곳에 놀라우신 희생자(犧牲者)를 보라! 그리스도께서 그분 자신의 몸에 우리의 죄를 지셨다. 그 고통(苦痛), 그 번민(煩悶)이 그대의 구속(救贖) 값이다. (놀라운 은혜 172).
⑹.왜 주님은 하필이면 그렇게 저주스럽고 잔혹한 죽임을 당하셔야 했을까요? 아무리 우리의 죗값이 크다 해도 어떻게 이런 끔찍한 죽임을 당하도록 하나님이 허락하셨을까요? 우리의 상식과 논리로는 도저히 이해가 안 됩니다.
⑺.왜 하나님은 하필이면 그렇게 저주스럽고 잔혹(殘酷)한 죽임을 당하셔야 했을까요? 성경은 우리에게 그 이유를 분명하게 들려줍니다. (갈라디아서 3:13 절)을 보십시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詛呪)를 받은 바 되사 율법의 저주(詛呪)에서 우리를 속량(贖良)하셨으니, 기록된바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 아래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 여기서 '저주(詛呪)를 받았다.' 하는 말을 주목(注目)하시기 바랍니다. 왜 예수님이 저주를 받으셔야 했습니까?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贖良)하기 위해서입니다. 율법을 범(犯)하여 율법(律法)의 저주 아래 놓여 있는 우리를 구(求)해내기 위해 예수님으로 우리 대신 저주를 받게 하신 것이다.
⑻.하나님 나라는 이렇게 표현(表現)합니다. 하나님의 어린양으로 시작되는 나라(요 1:29)이며,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는 나라(마 16:26), 한 영혼이 천하보다 귀한 나라(마 16:26), 십자가를 통해서 완성(完成)되는 나라(요 19:30), 제자(弟子)와 교회로 이끄는 나라(행 8:14∼15)가 하나님 나라입니다.
⑼.“예수님이 십자가(十字架)에서 ‘다 이루었다’고 하신 것은 하나님의 구원사역(救援使役)이 전부 완성(完成)되었다는 뜻입니다. 우리는 이미 죄 사(罪赦)함을 받았고,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義)롭다 칭(稱)함. 받고 은혜(恩惠)로 구원(救援)받았습니다.
⑽.십자가(十字架) 위에서 ‘다 이루었다’고 부르짖으셨을 때 그분은 아버지께 그 사실을 말씀드렸던 것이다. 계약(契約)은 완전(完全)히 이행(履行)되었다. 이제 그분은 다음과 같이 아뢴다. 아버지여, 다 이루었나이다. 오 나의 하나님이시여! 내가 당신의 뜻을 이루었나이다”(소망, 834).
(12월 18일) (수) <빈 무덤>
(Q)~예수님의 시신(屍身) 위에 얼굴을 덮었던 천(布)이 개어져 있었던 것은 무엇을 의미하며, 이 구절(句節)(요 20:7절)이 기록된 내용이 우리에게 중요한 이유는 무엇입니까? (요한복음 20:1~10)
(A)~<예수님의 '빈 무덤'은 그분의 부활(復活)이 역사적(歷史的) 사실(事實)이라는 것을 입증(立證)할 수 있는 결정적(決定的)인 단서(증거(證據))가 된다.>
⑴.이 수의(壽衣)가 무덤에 단정(端整)하게 개켜 있었다는 사실은 무덤에 도둑이 들지 않았음을 입증(立證)한다. 도둑이라면 둘러싼 것을 푸는 수고(受苦)를 할 리가 없었을 것이다.
⑵.이는 예수의 부활(復活)을 말하고 있다. 그는 예수가 자신의 부활(復活)에 대해 예언(豫言)한 것을 기억(記憶)했다. 베드로는 아마도 더 회의적(懷疑的)이었을 것이다. '누가'는 베드로가 “그 된 일을 기이(奇異)히 여”(눅 24:12)겼다고 기록(記錄)한다.
⑶.만약(萬若) 제자들 가운데 누군가가 예수의 시신(屍身)을 가져가 놓고 예수께서 부활(復活)했다고 하려는 계획(計劃)을 진행했다면(마 27:63, 64) 베드로나 요한이 그것을 몰랐을 리가 없고 그들이 이렇게 서둘러 무덤으로 달려갈 이유가 없었을 것이다
⑷.(눅24:12절)에 의하면 무덤이 비어 있음을 확인한 제자는 베드로 한 사람이다. 그런데 본문(요 요 요 19:26~27, 요 20:2~3절)은 요한도 함께 갔다고 진술(陳述)하고 있다. 본서(本書)의 기록이 더 정확(正確)하다고 본다. 왜냐하면 사복음서(四福音書) 가운데 남자제자(男子弟子)로 예수의 십자가(十字架) 처형(處刑)을 목격(目擊)한 사람은 요한 혼자이기 때문에(요 19:26~27) 예수의 무덤을 알고 있던 요한이 베드로를 인도하여 무덤으로 함께 갔을 가능성(可能性)이 많은 것이다.
⑸.두 제자는 그들이 막달라 마리아로부터 무덤이 비어 있고 누군가 예수의 시신(屍身)을 가지고 갔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 그녀의 추측(推測)에 동의(同意)했건 예수의 부활(復活)을 떠올렸건 간에 흥분(興奮)하지 않을 수 없었고 그런 심리상태(心理狀態)로 침착(沈着)하게 걸어간다는 것은 오히려 어색할 것이다.
⑹.베드로의 행동(行動)은 그의 성격(性格)대로 거침없이 단숨에 무덤 안으로 들어가는 양태(樣態)로 나타난다. 앞 절과 본 절에서는 무덤 안에 세마포(細麻布)가 있었다는 것이 거듭 확인되고 있다. 이와 같은 확인(確認)은 세마포의 존재(存在)가 시체(屍體) 도적설(盜賊說)을 반증(反證)하는 중요(重要)한 근거(根據)가 되기 때문에 거듭 언급(言及)되고 있는 듯하다.
⑺.요한이 세마포(細麻布)가 그 자리에 놓여 있고 수건(手巾)이 잘 정돈(整頓)되어 있었다는 사실을 기록한 목적은 시체도적설(屍體盜賊說)을 반박(反駁)하기 위(爲)함이라는 점이다.
만약 누군가가 시체(屍體)를 훔쳐 갔다면(마 27:64) 세마포(細麻布)를 벗겨내어 두고 간다거나 머리를 감쌌던 수건(手巾)을 벗겨내어 잘 정돈(整頓)해 놓았을 가능성은 희박(稀薄)하기 때문이다.
⑻.다른 제자를 따로 언급(言及)한 것은 저자(著者) 요한이 자신만의 특별한 체험(體驗)을 부각(浮刻)시키려는 의도(意圖)를 보여주며, 따라서 사도(使徒) 요한이 여러 제자 중 최초로 예수의 부활(復活)을 믿게 되었음을 본문(本文)은 밝히고 있다고 한다.
⑼.그들은 수의(壽衣)와 수건(手巾)을 보았을 뿐 저희 주님을 찾지 못했다. 그러나 여기에도 그분이 살아나셨다는 증거(證據)가 있었다. 수의(壽衣)는 아무렇게나 버려진 것이 아니요, 주의 깊게 개켜 있었고 각각 제자리에 있었다. 요한은 ‘보고 믿’었다. 그는 그리스도께서 반드시 죽음에서 살아나실 것이라는 말씀은 아직 깨닫지 못하였으나, 이제 부활(復活)을 예언(豫言)하신 구주(救主)의 말씀을 기억(記憶)할 수 있었다”(소망, 789).
⑽.안식일이 지난 일요일 아침에 무덤을 찾은 사람들은 그분의 무덤이 열려 있고, 비어 있는 것을 보았다. 베드로, 요한은 천(布)이 개어진 것을 보고 그분이 부활(復活)하신 것으로 믿었다.
(12월 19일) (목) <예수님과 마리아>
(Q)~큰 상실감(喪失感)으로 슬퍼하는 마리아를 예수님은 어떻게 대하셨습니까? (요 20:16)
(A)~<부활(復活)하신 주님께서는 단 한마디의 말로 자신의 정체(正體)를 나타내고 마리아의 가려진 눈을 띄어 주었다. 마리아는 주님께서 생전에 자신을 부르시던 음성(音聲)과 억양(抑揚)을 기억하고 지금 자신의 이름을 부르는 분이 바로 그분임을 알았던 것이다. 부드러운 음성으로 마리아를 부르시는 이 극적(劇的)인 장면은 매우 감동적(感動的)이다. 이 극적 장면은 목자가 자신의 양(羊)을 부르면 양(羊)들은 그 음성을 듣고 목자를 알아본다고 하는 (요 10:3, 27절) 말씀을 연상(聯想)시킨다.
⑴.마리아는 제자들보다 먼저 빈 무덤을 볼 수 있는 특별(特別)한 특권(特權)을 누렸습니다. 그녀는 또한 부활(復活)하신 예수를 보고 들은 첫 번째 사람이었다.
⑵.마리아 그녀는 떠나고 싶지 않아 빈 무덤 근처(近處)에 머물렀고, 안으로 들어갔더니 예상(豫想)치 못하게 그리스도의 부활(復活)하신 시신(屍身)이 있던 곳에 두 천사(天使)가 앉아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⑶.그들(두 천사(天使))은 그녀에게 왜 울고 있는지 물었습니다. 그녀가 돌아서자 그녀는 정원사(庭園師)라고 생각했던 남자와 마주쳤는데, 그가 부활(復活)하신 예수님이라는 것을 깨닫지 못했습니다. 예수께서 그녀가 울고 있는 것을 보시고 그녀에게 "여자(女子)여, 왜 울고 있느냐? 누구를 찾느냐?"(요 20:15)라고 물으셨습니다.
⑷.마리아의 주위(周圍)는 예수께서 그녀의 이름을 부르실 때까지 완전히 사라진 예수의 몸에 집중(集中)되어 있었습니다. 예수의 말씀을 듣고 그녀는 갑자기 그분이 누구인지 깨닫고 "랍보니"라고 불렀습니다.
⑸.마리아는 제자들에게 달려가서 주님을 보았다는 기쁜 소식을 전(傳)했습니다. 예수께서는 그녀에게 인간성(人間性)으로 나타나셨는데, 나중에 제자들에게 아침 식사를 준비하셨을 때와 도마가 자신의 흉터를 만지도록 허락하셨을 때와 똑같았습니다. 우리를 위해 예수께서는 영원히 인간성(人間性)을 유지(維持)하실 것이며, 절대 끊어지지 않을 유대감(紐帶感)으로 우리를 그분과 연결(連結)하실 것입니다.
⑹.마리아는 예수님을 잃은 상실감에 무덤까지 비어서 더 낙담하고 있었다. 예수께서 친근하게 마리아라고 부르시고 그녀에게 모든 사실을 말하라고 하셨다.
⑺.마리아는 부활(復活)의 소망(所望)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그녀의 유일(唯一)한 관심(關心)은 주님의 시체(屍體)를 되찾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마리아는 시신(屍身)을 자신의 오라버니가 묻혔다가 예수로 인(因)해 살아나 이제는 비어 있는 무덤에 장사(葬事)할 수 있을 것이었다. (요 11:1~ 45).
⑻.마리아야. 예수는 마리아에게 익숙한 어조(語調)로 말을 건넸다. 주님이 부활(復活)했다는 것을 깨닫는 순간 큰 전율(戰慄)이 그녀를 엄습(掩襲)했다.
⑼.예수께서는 당신의 특유한 하늘의 음성(音聲)으로 ‘마리아야!’라고 부르셨다. 그녀는 그 사랑스러운 목소리에 익숙해 있었으므로 ‘주여!’하고 부르짖으며 너무 기뻐서 그분을 껴안으려 하였으나 예수께서 막으시면서 ‘나를 만지지 말라 내가 아직 아버지께로 올라가지 못하였노라 너는 형제들에게 가서 이르되 내가 내 아버지 곧 너희 아버지 내 하나님 곧 너희 하나님께로 올라간다 하라’고 말씀하셨다”(초기 문집, 187).
⑽.마리아는 주님을 잃은 상실감(喪失感)에 무덤까지 비어서 더 낙담(落膽)하고 있었다. 예수께서 친근(親近)하게 마리아라고 부르시고 그녀에게 모든 사실을 말하라고 하셨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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