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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3과 스트레스(교훈과 예화로 푸는 과정공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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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조춘호 작성일11-01-06 09:56 조회5,568회 댓글2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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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3과 스트레스(교훈과 예화로 푸는 과정공부)
1월 15일 안식일 일몰: 오후 5시 37분

도입)
미국 캘리포니아 대학 “학습 및 기억 신경생물학센터” 연구진은 쥐를 물이 채워진 미로에서 헤엄쳐 빠져나오는 훈련을 시킨 후, 실험 30분 전 물에 약한 전기 충격을 가했다. 그러자 쥐는 미로에서 빠져나오는데 어려움을 겪었다. 그러나 실험 2분전과 4시간 전 똑같은 충격을 줬을 때 쥐는 아무 어려움 없이 길을 찾아냈다. 흥미롭게도 글루코코르티코이드 호르몬은 스트레스를 받은지 30분 후 최고로 많이 분비되는 물질이다. 또 이 호르몬을 정상 쥐에 주입할 경우 스트레스를 받은 쥐와 유사하게 길을 헤매는 현상이 관찰됐다. 이로써 스트레스가 기억을 되살리는데 나쁜 영향을 미친다는 점이 밝혀졌다. 이 실험 결과로 평소 아무리 열심히 공부해도 시험에서 스트레스 때문에 몽땅 잊어버리는 현상을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게 됐다. 스트레스가 발생했을 때 뇌에서 급격히 양이 늘어나는 호르몬(글루코코르티코이드)이 기억의 회복을 방해한다는 사실이 쥐 실험을 통해 밝혀졌다. 원래 이 호르몬은 단기기억이 장기기억으로 저장되는 과정을 방해하는 물질로만 알려져 왔다. 스트레스 가운데 살아가는 현대인들. 스트레스를 주는 환경과 사람을 떠나 살 수만 있다면 좋으련만 그러하지 못하기에 우리는 어쩔 수 없이 스트레스와 더불어 살아야 한다. 스트레스가 힘든 이유 중에 하나는 나는 왜 이렇게 살 수밖에 없는가 하는 환경에 대한 무력감과 피해의식이다. 그렇다면 정말 내가 그 스트레스를 막기 위해 아무것도 할 수 없는 것일까? 그리고 그 스트레스가 환경에서만 온 것일까? 물론 많은 부분이 환경에서 시작된 것은 사실이지만 스트레스가 스트레스로 느껴지는 것은 나의 잠재된 상함이 큰 역할을 한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그 환경이 자신 속의 상처를 건드림으로 인해 어떤 심리적인 압박감을 갖기에 스트레스로 느끼는 것이지 단지 그 환경 자체가 스트레스가 될 수는 없는 것이다. 우리는 자신의 숨겨진 문제를 인정하기 싫어 모두 환경 탓으로 원망하고 있지만 많은 경우 잠재된 상함이 치유되고 나면 환경이 스트레스로 느껴지지 않는 경우가 많다. 하나님은 그 환경을 통해 나의 잠재된 상함을 드러내셔서 더욱 깊이 치유되길 원하신다는 것을 알 필요가 있다. 그리고 나 자신이 환경으로부터 더 이상 스트레스를 받지 않게 될 때 그 환경도 결국 변하고 만다. 스트레스는 환경이 아닌 내 속에 그 원인이 있다는 것을 기억하면 어떤 스트레스도 해결될 수 있다.

기억절: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마 11:28).

모든 사람이 스트레스에 시달리고 있다. 업무부담, 가정의 위기, 죄책감, 미래에 대한 불확실성, 과거에 대한 불만족 등 벅찬 문제들이 한두 가지가 아니다. 일상적인 일들과 함께 발생하는 이런 문제들 때문에 받는 중압감은 우리의 정신과 신체적 건강에 심각한 영향을 미치고 있다. 토머스 H. 홈즈(Thomas H. Holmes)와 리처드 H. 라이(Richard H. Rahe)는 일생의 사건들에 상응하는 사회 재조정 측정치를 스트레스의 정도에 따라 다음과 같이 정리하였다. 배우자의 죽음 100, 본인의 부상이나 질병 53, 거처의 변화 20 등. 누적 값이 200 이상인 사람은 질병에 걸릴 확률이 50%에 달하며, 300 이상인 사람은 곧 위기상황에 처할 가능성이 높다. 적당한 스트레스는 능률을 높이는 데 필요하지만, 그 이상일 경우에는 건강에 해를 끼친다.
스트레스를 해소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은밀한 곳에서 조용히 하나님과 만나는 것이다. 예수께서는 교훈과 모본을 통해 이를 보여 주셨다(막 6:31). 우리가 그분께 삶을 맡긴다면, 주님은 우리가 중압감을 해결할 수 있도록 도우실 것이다.

결론 그리스도는 섬김의 삶을 사셨지만, 생활의 균형과 건강한 방식으로 스트레스를 해소하기 위하여 하나님과 교통할 수 있는 시간과 휴식이 필요함을 인정하셨습니다.

일요일 1월 9일
흥미로운 일생의 사건들

도입)
하나님께서는 까마귀를 보내어 엘리야에게 먹을 것을 공급하셨다. 왜? 하나님께서는 까마귀를 사용하셨을까? 까마귀는 부정한 짐승이며(레1:15, 신14:14) 노아 방주 돌아오지 않은 새이며(창8:7) 식욕이 왕성하여 모든 것을 먹는 짐승인데도 까마귀를 사용하신 것은 엘리야에게 이 일을 하신 분은 전적으로 하나님임을 믿게 하기 위함이다. 도저히 가까이 할 수도 없는 것을 사용하여 일어날 수 없는 일을 하시는 분은 하나님뿐이구나 하고 분명히 믿고 하나님만 의지하는 훈련이었다. 까마귀가 그 가뭄 속에서도 그 자신이 먹을 것을 자기가 먹어 치우지 않고 엘리야에게 가져다주었던 것은 하나님께서 행하신 기적임을 인정할 수밖에 없다. 우리의 사명의 길에서 우리가 믿고 의지할 분은 세상도, 사람도 아니고 오직 하나님 한 분 뿐이심을 까마귀 사건은 보여준다. 또한 까마귀는 본래 게걸스런 조류로서 시체와 썩은 것들을 즐겨 먹는다. 처음에 엘리야의 눈에는 움직임도 호흡도 생명도 없는 우상을 숭배하는 백성들의 모습이 마치 부패한 시체를 탐하는 까마귀와 같이 가망이 없어 보였을 것이다. 그러나 엘리야는 그런 까마귀도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여 음식을 날라다 주었는데, 비록 아무리 불경과 불순종을 일삼는 이스라엘 백성이라 할지라도 하나님의 백성이라 한다면 기필코 변할 수 있지 않을까란 소망의 씨앗을 결국에는 붙들었을 것 같다. 하나님께서는 오늘도 우리와 함께하시며 우리를 도울 또 다른 인간 까마귀를 통해 일하신다. 사명의 길은 외롭고 힘든 혼자의 길이지만 하나님이 함께하시고 하나님이 먹이시고 하나님이 일하실 것이다. 세상 끝 날까지 예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실 것이다(마28:20)

“너는 여기서 떠나 동쪽으로 가서 요단 앞 그릿 시냇가에 숨고 그 시냇물을 마시라 내가 까마귀들에게 명령하여 거기서 너를 먹이게 하리라”(왕상 17:3~4).

교훈: 신앙적으로 아무리 많은 경험이 있다고 해도 스트레스에서 자유로운 것은 아니다.

부가적용)
통계에 따르면 1년에 320만 명이 우울증을 겪는다고 한다. 인기 있던 연예인들이 우울증으로 인한 자살로 인해 지난해는 많이 안타까워했다. 그런데 성경을 보니 위대한 선지자 엘리야도 우울증에 걸렸었다. 엘리야는 정말 훌륭한 하나님의 사람이었다. 850명의 거짓 선지자들과 담판을 벌여서 승리하기도 했고 하나님께 기도해서 하늘에서 불이 내려오도록 하여 거짓 선지자들을 완전히 무력화시켰다. 그 후 3년 동안 오지 않던 비가 다시 오게 하는 일도 했다. 그런 위대한 하나님의 선지자가 왕후 이세벨이 죽이려 한다는 소식을 듣고는 겁먹고 도망쳤다. 엘리야는 죽고 싶다면서 자기는 조상들보다 못하다는 열등감에 시달렸다. 이런 모습이 전형적인 우울증의 증상인 것 같다. 이렇게 나약해진 그에게 까마귀를 통해 떡과 고기를 보내심으로 그가 결코 혼자가 아니며 하나님의 보호 아래 있음을 나타내셨다. 외로운 그에게 까마귀가 친구가 되었다. 사람의 마음을 치료하고 기쁘게 하는 것이 까마귀라는 조류도 사용될 수 있음을 본다. 그런데 왜 하나님께서 까마귀를 통해 보내신 음식이 떡과 고기였을까? 한 번은 어떤 분이 "우울증 환자가 자살 미수로 응급실에 불려올 때 그들을 위해 하는 일이 무엇이냐" 의사에게 물은 적이 있었단다. 그 의사는 말하기기를 다음과 같은 놀랄만한 말을 했다. "때에 따라서 우리가 제일 먼저 하는 것은 그들에게 스테이크 고기음식을 먹게 하는 것이지요. 그들은 대개 단백질 결핍증에 걸려 있거든요. 그들은 2일 내지 3일 동안 제대로 먹지 못한 상태에 있었다는 점을 우리는 종종 발견했지요. 그들의 단백질 필수치가 매우 낮기 때문에 에너지 수치는 낮아진 반면에 우울증 수치는 매우 높거든요." 그리스도인들 중에는 항상 자신의 육체적 생활면을 소홀히 하면서 자기 자신이 우울증에 빠지는 이유를 찾아내지 못하고  방황하는 사람들이 종종 있다.

• 영감의 교훈 •

▶ 감정의 함정
“그처럼 대담한 용기를 나타내고 왕과 사제들과 백성들에 대해 그처럼 완전하게 승리를 거둔 후에 엘리야는 결코 낙담하거나 겁에 질려 두려워하지 않을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그처럼 많은 하나님의 사랑스러운 돌보심의 증거로 축복을 받았던 그도 연약한 인간에 지나지 않았으므로 이 같은 암담한 때에 신앙과 용기를 잃고 말았다”(선지자와 왕, 159).

1월 10일 월요일
쓰라린 일생의 사건들

도입) 루터의 우울증 극복기
마틴루터가 우울증에 관해 많은 글을 썼다는 것을 안다면 아마  당신은 놀라게 될 것이다. 그는 불행한 어린 시절을 경험했고 매우  엄격한 종교적인 환경 가운데서 자라났기 때문에 마틴 루터는 자신의 낮은 자존감과 우울증으로 인하여 끊임없이 투쟁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그는 이러한 문제들의 해결책에 대한 여러지 훌륭한 묘안들을 그때  그때마다 새롭게 제시했다. 루터가 제한했던 것들을 소개해보자.      
1. 홀로 있지 말라.  
우울증에 빠져 있을 때에 당신은 주위에 다른 사람이 있는 것을 꺼려하게 된다. 당신은 다른 사람으로부터 회피하고 싶어 한다. 다른 사람을 피한다는 것은 다른 사람으로부터 격리된다는 것을 의미하고, 또한 우울증이 있을 때 경험하는 격리감으로 인해  소외감을 느끼게 된다. 사람들과 함께 있을 수 있도록 자신을 강제로 채찍질하라. 이러한 결정을 의지적으로 내리는 것이 당신이 우울증을 처리하는데 있어서 해야 할 가장 큰 부분 중에 하나이다.
2. 다른 사람에게 도움을 구하라.  
우울증이 찾아올 때 당신의  감지력은 변하게 된다. 조그마한 언덕이 큰 산처럼 보인다. 그러나 그 때에 진실한 친구들이 당신을 도와줌으로써 올바른 각도에서 실제의  높이를 볼 수 있도록 해 준다. 우울증으로부터 스스로 빠져 나오려는 것은 마치 몸이 마구 빠져 들어가는 늪에서 자신의 머리자락을 스스로 잡아당기려는 처사와 마찬가지이다.  당신에게 기쁨을 가져다주는 환경과 친구들을 찾으라.  이 점에서도 당신은 스스로 선택해야 할 절대적인 책임을 가지고 있다.
3. 노래하라!
음악을 즐기라. 사울 왕이 우울증에 빠졌을 때 이 방법으로만 고침을 얻었다. 다윗이 연주했던 음악의 하모니와 아름다움이 우울증으로 억눌렸던 사울왕의 마음을 유쾌하게  해 주었다.(삼상16:14-23)
4. 하나님께 찬양하고 감사하라.  
수세기에 걸쳐 많은 성도들이 이 점에 동의했다. 브랜글도 이 방법을 사용하여 그의 어려움을 극복했다. 그가 하나님의 임재하심을 느낄 수 없고 진정으로 기도할 수 없었을 때 그는 나뭇가지 위에 달려있는 잎사귀를 만드신 하나님께 감사하거나 또는 새의 아름다운 날개를 만드신 분께 감사하곤 했다. 일상  생활에서 볼 수 있는 단순한 것들에 대해 감사한다. 바울이 디모데에게 요점적으로 부탁한 것도 "기억하라, 그리고 감사하라"(딤후1)이었다. 바울이 데살로니가 교인들에게 말한 것도 모두 "모든 것에 대해 감사한 느낌을 가지라"고 하지 않고 "모든 일에 실제로 감사하라"(살전 5:18)였다.
5. 하나님의 말씀의 능력에 깊이 의존하라.  
우리가 우울증으로 고민할 때 하나님께서는 성경에 기록된 어떤 부분의 말씀이든지  사용하시어 우리에게 역사해 주신다. 수 세기를 걸쳐서 하나님의 백성들은 시편 말   씀이 가장 유익하게 그들에게 도움이 된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그 이유는 시편 기자야말로 우울증으로부터 오는 감정의 하나 하나 모두를 가장 잘 알고 이해했던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시편 모두 150편 중에서 48편이나 되는 부분들이 우리의 어려운 상태를 말해주고 있다. 가장 유익한 방법은 그것들을 크게 소리 내어 읽는 것이다. 그것은  시편 기자가 표현한 포기와 절망과 고독의 감정들을 자신이 현재 겸험 하는 감정으로 받아들이고, 또한 그것을 하나님께 대한 당신의 믿음과 소망으로서 표현하는 것이다.   6. 성령님의 임재하심 가운데서 확신 있는 태도로 휴식을 취하라.
시편 기자는 거듭 반복해서 우울증으로 부터 해방되는 비결을 선언하고 있다. 그는 스스로 자신을 이렇게 격려하고 있다. "너는  하나님을 바라라 나는 나를 도우시는 그의 얼굴을 인하여 하나님을 오히려 찬송하리로다"(시 42:5). 여기에 하나님의 "얼굴"에 대한 확신이란 하나님의 임재를 누린다는 증거를 표시하는 말이다. 예수님이 제자들과 마지막 밤을 보내면서 깊은 우울증 가운데  빠진 제자들을 위로할 때도 앞에서 말한 것과 기본적으로 꼭 같은 개념을 사용하셨다.  "내가 아버지께 구하여 너희 옆에 있어 줄 다른 이를 보내 달라고 하겠다.  그가 너희와 항상 같이 있게 되리라....내가  너희를  이 세상에 홀로 내버려 두지 않겠다 - 내가 다시 너희에게 오리라...  너희는 나를 보게 될 것이다.  그 이유는 내가 진정 살아있기 때문이다."(요14:16,18-19, 필립스역).

“엘리야가 그들에게 이르되 바알의 선지자를 잡되 그들 중 하나도 도망하지 못하게 하라 하매 곧 잡은지라 엘리야가 그들을 기손 시내로 내려다가 거기서 죽이니라”(왕상 18:40).

여러 차례 놀라운 기적을 목격한 하나님의 사람이 어떻게 이와 같은 절망에 빠질 수 있단 말인가? “이와 같이 사탄은 인간의 연약성을 이용해 왔다. 그리고 장래에도 이와 같은 수법으로 활동할 것이다. 사탄은 사람이 근심에 둘러싸여 있을 때와 어려운 사정에 어찌할 바를 모를 때와 빈곤과 애통함으로 괴로움을 당할 때마다 시험하여 괴롭게 하려고 대기하고 있다. 그는 우리의 품성의 약점을 공격한다. 그는 이러한 일들이 존재하도록 용납하시는 하나님께 대한 우리의 확신을 흔들어 놓으려고 애쓴다”(시대의 소망, 120).

교훈: 사탄은 가장 큰 승리를 경험한 선지자라 할지라도 그의 품성의 약점을 공격하여 절망에 빠지게 만든다.

부가적용)
엘리야의 우울증의 원인은 무엇일까?

1. 승리가 우울증의 원인이다.
엘리야의 우울증은 갈멜산 대승리 후에 왔다. 바알 선지자들을 한 명도 남지 않고 모조리 죽이고 났을 때 이세벨이 죽이려고 하니까 견딜 수 없는 우울증에 광야 로뎀나무밑으로 도망하였다. 인기 연예인들이 가장 고독한 순간은 무대에서 화려하게 박수갈채를 받고 집으로 돌아와 혼자 있을 때라고 한다. 그래서 심리학자들은 실패하였을 때보다도 성공하였을 때가 더 위험한 때라고 진단하고 있다. 그래서 로버트 슐러는 목사는 <정상에서 머무르지 말라>라는 책을 썼다. 성공 관리가 실패관리보다 훨씬 위험하다는 것이다.
2. 공포심이 우울증의 원인이다.
엘리야는 하나님은 믿으며 당당하게 싸울 때에는 창공을 나르는 비행사처럼 통쾌하였다. 그러나 이세벨이 죽이려 하자 그는 공포에 휘말리게 되었다. 그래서 우울증에 빠졌다. 공포심이 들어오면 우울증이 따라 방문하게 된다. 병에 대한 공포심에서 벗어나야 한다. 모든 병은 치유될 수 있다. 모든 병에는 기적이 있다. 우리 몸속에서는 건강한 사람도 하루에 5-6개의 암세포가 생긴다. 그러나 건강한 마음으로 가지고 살면 경찰 세포가 나와서 그것을 잡아먹는 데 불안하게 살면 경찰세포가 생기지 못 하여 암세포가 뭉치기 시작하면 그것이 암이 되는 것이다. 그런데 또 건강한 정신과 믿음으로 살면 2cm 정도 되는 암세포도 죽여 갈 수 있다는 것이다. 공포심을 믿음으로 몰아내어야 한다.
3.피곤이 우울증의 원인이다.
엘리야는 혼자서 450명과 연일 싸우느라고 쉴 틈이 없었다. 승리 후 모든 것이 끝나고 났을 때 그에게 엄습한 극단적인 피곤은 그를 우울증 환자로 만들었다. 스트레스가 쌓이고 피곤이 누적되면 짜증이 나고 우울증이 찾아오게 된다. 어느 동물학자가 두 무리의 말을 대상으로 실험하였다. 한 무리에게는 휴식 없이 일만 시켰다. 얼마 후 그 말들은 신경질 적이 되고 찌증을 부렸다. 일도 능률이 나지 않았다. 그리고 일찍 죽었다. 그런데 다른 한 무리의 말들에게는 일주일에 하루를 쉬게 하였더니 일도 잘 하고 말도 잘 들어서 부리기가 편하였으며 오래 살더라는 것이었다. 어느 제분회사에서 있었던 일이다. 수년간 주인은 일꾼들에게 하루도 쉬지 않고 일을 시켰다. 그들은 극심한 피곤과 스트레스에 쌓여 짜증만 부렸다. 회사는 점점 어려워 갔다. 드디어 그 회사는 쓰러지고 주인이 바뀌게 되었다. 새 주인은 성실한 기독교인이었다. 그는 철저히 일주일에 하루는 쉬게 하였다. 작업의 질이 좋아지고 작업량이 늘어나게 되었다. 사람은 철저히 하나님의 창조 법칙에 따라 살아야 한다.
4. 오해가 우울증의 원인이다.
오해는 우울증의 원인이 됩니다. 엘리야는 3년 6개월 동안 가뭄을 끝나게 하고 온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다시 축복을 준 공로자 선지자였다. 그런데 이세벨은 상을 주지는 못 할 지언정 바알 선지자들을 죽이고 바알 종교를 망치게 하였으니 바알신이 노하여 이스라엘에게 벌을 줄 것이라고 오해하여 엘리야를 죽이려고 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엘리야는 이런 오해가 너무나 억울하고 분하여 광야로 가서 로뎀나무 밑에 누워서 차라리 죽여 달라고 하나님께 떼를 쓰고 있는 것이다. 진정으로 하려고 하는 마음을 몰라주고 오해하고 엉뚱한 말을 할 때에 얼마나 허탈하여 지며 따라서 세상을 비관하며 우울증에 빠지게 된다. 일을 할 수 없고 안 할 수도 없는 진퇴양란으 어려움에 빠질 때 우울증이 나타나는 것이다. 그러나 큰 사람은 <그래도 하자..마지막 웃음이 참 웃음이다>라고 외치며 끝까지 일을 한다. 그러나 속이 좁은 사람은 오해받을 때 <그 사람이 그럴 줄 몰랐다. 일 안 하면 될 것 아니냐?>라고 말하며 주저앉게 된다. 하나님도 손해도 본인도 손실이요 교회도 피해를 보게 된다.

• 영감의 교훈 •

▶ 하나님은 아시고 이해하신다
“투쟁의 최선봉에 서서 성령으로 말미암아 특별한 사업을 하도록 재촉을 받고 있는 자들도 압력이 제거될 때 흔히 반작용을 느끼게 될 것이다. 낙담은 가장 영웅적인 믿음도 흔들 수 있고 가장 확고한 의지도 약하게 할 수 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 모든 것을 이해하시고 여전히 동정하시고 사랑하신다. 하나님께서는 동기와 마음의 의도를 훤히 아신다”(선지자와 왕, 174).

• 기도 •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에도 불구하고 저는 종종 나약한 생각에 빠져 있었습니다. 하나님, 제가 시험에 들지 않도록 제 마음과 생각을 지켜 주옵소서.

1월 11일 화요일
하나님의 치유책

도입)
하나님은 우울증에 빠진 엘리야에게 천사를 보내주셨다. 그리고 로뎀나무 밑에서 자고 있는 엘리야를 어루만졌다. 그리고 숯불에 구운 떡과 물 한 병을 날라다 먹여 주셨다. 엘리야는 이 양식을 먹고 40주 40야를 걸을 수가 있었다. 요즈음에는 우주 양식이 개발되어서 우주선속에서 콩알만큼 작은 음식을 한 개만 먹어도 오래 동안 견딜 수가 있다고 한다. 엘리야는 천사의 양식을 먹고 40일을 걸을 수가 있었다. 하나님은 엘리야를 사랑하고 계셨다. 하나님은 언제나 변함없이 성도들을 사랑하고 계신다. 하나님이 사랑하고 계심을 믿기만 하면 우울증에서 벗어 날 수가 있다.

교훈: 하나님은 심한 우울증에 빠진 엘리야를 휴식과 음식 그리고 운동으로 치유하셨다.

부가적용)
어떤 여인이 병든 남편을 두고 도망하다가 피곤하여 길가에 앉았다. 도마뱀이 먹이를 물고 가는 것을 발견하였다. 그는 도마뱀을 심심하여 잡았다. 꼬리를 떼어 버리고 도망하였습니다. 쫓아갔다. 그런데 그 도마뱀이 바위틈에 몸이 아파 벌렁 누워있는 자기 숫컷에게 먹이를 먹이는 것이었다. <아! 나는 병든 남편을 버리고 도망가는 중인데 이 미물은 자기 짝을 이렇게 사랑하는 구나!> 이렇게 깨닫고 다시 집으로 돌아 왔단다. 깨닫게 하는 나무 밑에서 깨닫지 못 하는 엘리야의 모습을 우리는 불쌍하게 그려보게 된다. 우울증이 우리를 괴롭힐 때 교훈을 받을 로뎀나무가 얼마든지 우리 곁에 있음을 깨달으라. 역사상 위대한 일을 하였던 사람들은 하나같이 모두가 극심한 우울증에서 자기를 극복한 사람들이다. 모세는 40세에 민족혁명을 일으키려고 하다가 실패로 인하여 극심한 우울증속에 40년간을 미디안광야에서 지냈다. 그러나 가시떨기에서 하나님이 자기를 사랑하시는 것을 확인하고 역사상 가장 위대한 지도자가 되었다. 우리는 미국의 카터 대통령을 기억하고 있다. 그는 미국 역사상 가장 무능한 대통령으로 낙인이 찍힌 채 임기를 마쳤다. 그러나 그는 자기가 인정받지 못 하는 우울증에 시달리다가 이제는 망치를 들고 흑인 마을에 들어가서 집을 고쳐주고 여기저기 분쟁이 있는 곳을 다니며 평화의 사도로 일하고 있다. 그래서 대통령 퇴임 후 가장 존경받는 대통령으로 알려져 있다. 베드로도 우울증에 빠진 적이 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박혀 돌아가시자 그는 예수님을 3년간 헛되이 따라다녔다는 허탈감에 우울증에 빠져 버리고 말았다. 그러나 부활의 주님을 만나고 나서 베드로는 주님을 사랑하게 되었다.

• 영감의 교훈 •
▶ 신체의 건강이 정신 건강에 도움을 줌
“대개 정신의 힘은 육체의 힘에 달려 있다. 충분히 잠을 자고 휴식을 취하며 운동을 많이 하는 것은 육체와 정신의 건강에 매우 요긴하다”(복음교역자, 422).

• 기도 •
하나님, 제가 가장 힘들 때 저와 함께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이제 믿음과 용기를 회복시켜주시고, 시험과 시련을 극복할 수 있도록 힘을 주옵소서.

1월 12일 수요일
예수님의 스트레스 관리법

도입)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쉬지 않고 일하는 것을 바라지 않으신다. 왜 창조의 마지막 날에 하나님께서 안식하셨는가? 안식일은 그래서 사람을 위한 날이다. 사람을 위해서 하나님께서 마지막 날을 안식하게 하셨다는 것이다. 이 땅의 어떤 종교가 이런 종교가 있는가? 하루를 쉬라고 하는 종교가 어디 있는가? 일주일에 하루를 휴식하라고 하는 종교가 어디에 있는가? 오직 그리스도의 종교에만 있다. 피터슨 박사는 멜빌의 <백경>이라는 소설을 인용하면서 설명하면서 이렇게 말한다. 고래잡이배가 ‘모비딕’이라는 흰 고래를 쫓고 있습니다. 바다는 쉴 새 없이 출렁이고, 선원들은 혼신의 힘을 다해 노를 젓습니다. 그런데 그 배에는 아무 일도 하지 않고 조용히 그림처럼 앉아있는 사람이 한 명 있습니다. 누구냐 하면 작살을 쏘는 사람입니다. 그러면서 작가는 말하기를 "작살이 최고의 정확성을 갖기 위해서는.. 작살 던지는 사람이 수고 가운데서가 아니라, 한가로움 가운데서 지낼 수 있어야 한다." 그렇게 말하고 있다. 작살 던지는 사람은 아무 것도 하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꼭 필요한 때가 되고, 준비가 되면, 그는 작살을 정확하게 쏘아야 한다. 모든 선원들의 수고와 노동은, 바로 이것을 위한 것이다.  
그런 점에서 인생을 보다 깊이 있게 누리며 살기 위해서는 ‘분주함’이라는 적을 몰아내야 한다는 것이다. 노동은 필요하지만, 휴식이 있는 노동이어야 하고, 휴식을 위한 노동이어야 한다.

“이르시되 너희는 따로 한적한 곳에 가서 잠깐 쉬어라 하시니 이는 오고 가는 사람이 많아 음식 먹을 겨를도 없음이라”(막 6:31).

백성들은 예수님께 고민거리를 안겼다. 그러나 위로와 사랑을 가져다주는 친구들도 있었다. 주님은 베다니에 있는 나사로와 마르다와 마리아의 집에서 평화를 찾으셨다(마 21:17, 막 11:11). “그리스도께서는 베다니에 사는 한 가족과 두터운 정분으로 연결되어 있었으며 그 가족 중 한 사람을 위하여 가장 놀라운 일을 행하셨다. …가끔 피로하고 인간의 우정을 갈급하게 될 때에는 분노한 바리새인들의 의심과 질투에서 벗어나 이 평화스러운 가족에게로 피하기를 즐기셨다. …우리 구주께서는 조용한 가정과 흥미를 가지고 듣는 사람들을 높이 평가하셨다. 예수께서는 인간의 상냥한 마음, 예의와 애정을 사모하셨다”(시대의 소망, 524).

교훈: 예수님은 스트레스를 해소하기 위해 조용한 기도처와 천연계를 찾아가셨고, 경우에 따라 따뜻한 위로와 우정을 나눌 수 있는 친구들을 찾아가셨다.

부가적용)
영국의 왕실 아카데미에서는, 사람이 일을 하다가, 며칠 만에 한 번 쉬는 것이 좋은가를 여러 각도에서 조사하고 연구해서 데이터를 냈다. 그런데 연구의 결론은 "7일 중에 한 번 쉬는 것이 가장 이상적이다"라고 했다. 그러면 사람만이 아니라, 짐승은 어떨까 하여 연구했다. 1주일에 하루를 쉬게 하는 나귀는, 짐을 지고서 하루에 30마일 이상을 갈 수 있었다. 반면에 1주일 중에 하루도 쉬지 않고 일하는 나귀는 하루에 겨우 15마일밖에 가지 못한다는 것이다. 매일 일하는 나귀는, 일주일에 하루를 쉬는 나귀보다 그만큼 손해가 많고 쉽게 병든다는 것이다. 사람이든 짐승이든 쉬어야 한다. 프랑스의 어떤 의사가, 병원진료를 마치고, 오후에는 자기 집에서 화초도 키우고, 목공일도 하면서, 집안 여기 저기를 꾸미며 일했다. 이웃집 한국인이 보니까, 그가 의사로서 하는 병원진료보다, 집안 일이 훨씬 더 힘들게 보였다. 그래서 한국인이 말했다. '의사 선생님, 집에서는 좀 쉬셔야죠. 너무 무리하는 것 같습니다.' 그러자 의사의 대답이 이랬다. '저는 병원일 말고는, 모든 일이 제게는 쉬는 일입니다. 여러분은.. 쉰다는 개념이, 그저 누워서 아무 일도 안 하는 것이라고 생각하시는가?' 참된 쉼은, <영혼의 쉼>까지 도달해야 한다. 우리에게 육체의 쉼이 있다 하더라도 그것이 영혼의 휴식으로까지 이어지지 않는다면.. 그것은 참된 휴식이 아니다. 몸을 아무리 쉬어도.. 영혼은 여전히 피곤하다면.. 거기에는 문제가 있다는 것이다. 물론 몸과 영혼은 서로 뗄래야 뗄 수 없는 상관관계에 있다. 그러나 몸의 쉼은, 결국 영혼의 쉼으로 나아가야 하고, 영혼의 쉼을 갖기 위해서, 몸의 쉼(일상 탈출)도 필요한 것이다. 이제 우리는 주 안에서 누리는 참된 휴식을 찾아야 할 때가 왔다. 주님이 주시는 참 평안을 찾아야만 한다. 그래야만 우리는 몸과 영혼이 다 소생할 수 있기 때문이다.

• 영감의 교훈 •
▶ 과감하게 단절하라
“어떤 사람들은 과로 때문에 병에 걸린다. 그런 사람들에게는 휴식, 걱정에서의 해방, 식생활의 절제 등이 건강 회복에 필수적이다. 끊임없는 수고와 고립된 상태에서 정신적으로 피로하고 신경과민이 된 사람들은 단순하게, 또한 걱정 없이 생활할 수 있는 시골을 찾아가서 천연계의 사물과 밀접히 교제함으로 큰 도움을 얻을 것이다. 들판과 숲속을 배회하면서 꽃들을 꺾고, 새들의 노래 소리를 듣는 것이 다른 어떤 것보다 그들의 회복에 더 큰 역할을 해 줄 것이다”(치료봉사, 236).

• 기도 •
아버지, 그동안 제가 추구했던 무가치한 일들은 아버지와 연결되지 못한 허전함을 달래려는 어리석은 노력이었습니다. 이제 아버지께 나아갑니다. 아버지께 연결됨으로 얻는 힘과 위로를 경험하기 원합니다.

1월 13일 목요일
다른 이들의 고통을 덜어 줌

도입)
뉴욕 맨해튼에서 시내버스를 운전하던 한 버스 기사가 있었다. 이 기사는, 들은 이야기에 의하면, 벌써 10년이 넘도록 시내버스를 운전하고 있다. 그만큼 운전을 안전하게 하기도 하고 성실하게 일도 했다는 말이다. 시내버스는 늘 같은 길을 왕복하며 꼭 같은 생활을 반복한다. 그리고 시간도 정해져 있다. 어느 정거장에 몇 시 몇 분까지 정확하게 가야 한다. 그래서 시간을 맞추어 사람들이 버스를 타러온다. 그러니 똑같은 길을 똑같은 시간에 돌고 도는 일을 반복하면서 살아가는 게 시내버스 운전기사의 일상적인 일이다. 그런데 이 운전사가 하루는 버스를 몰고 그만 사라져버렸다. 행방불명이 된 것이다.  운전기사도 버스도 통째로 완전히 없어져버렸다. 경찰이 버스를 찾기 위해 애를 쓰던 중에 마침내 찾았는데, 플로리다 남쪽 마이애미 근처에서 버스와 기사를 발견했다. 참 뜻밖이다. 뉴욕에서 플로리다는 가는데 만 이틀이 걸린다. 그런데 Greyhound도 아니고 시내버스를 몰고 그 사람이 거기까지 내려간 것이다. 기자들이 왜 시내버스를 몰고는 플로리다까지 갔느냐고 물었더니 이 운전기사의 대답이, ‘피곤합니다. 쉬고 싶었습니다’.  이것 참 말이 안 된다. 피곤하다고 쉬고 싶었다는 것이다.  그러면 이 운전기사에게는 휴일이 없었나? 휴가가 없었나? 다 있었다. 매일 일 마치면 쉬고, 휴일이면 쉬고, 그리고 정기적으로 휴가도 있었다. 그런데도 피곤하다는 것이다.  쉬고 싶었다는 것이다. 날이면 날마다 복잡한 맨해튼에서 다람쥐 쳇바퀴 돌 듯 반복되는 그 생활에서 정말 쉬고 싶었다고 말했다. 피곤하다는 것이다. 쉬는 데도 쉬고 싶었다는 말이다. 참 아이러니한 이야기다. 여기에 문제가 있다. 문제는 잠을 잔다고 쉬는 것이 아니다. 몸은 쉬는지 몰라도 마음은 쉬지를 못한다. 꿈에서 마저 힘들고 피곤한 것이다. 헤어날 길이 없다. 다시 말하면, 휴식은 있는데 안식이 없다는 말이다. 휴식과 안식은 구별되는 것이다. 휴식은 열심히 일하다가 그 일하는 것을 잠시 멈추는 것이 휴식이다. 하지만, 안식은 내 마음까지 평안한 영적인 상태이다. 그런데 사람들은 이 휴식과 안식을 구별하지 못한다. 무조건 편하게 쉬면 그게 쉬는 것인 줄 안다. 여러분, 휴식은 몸이 쉬고, 유흥을 하고.. 이런 방법으로 얻을 수 있을지 모르지만, 안식을 그렇게는 얻을 수 없다. 그런 방법으로 여러분이 정말 편안하다... 내가 진짜로 쉬었다 생각하시는가? 아무리 쾌락에 빠져도, 아무리 멋진 휴가를 가더라도, 다녀오면 현실은 현실이다. 그래서 현대인들이 스트레스를 많이 말한다. 현대인들은 스트레스를 견디는 인성지수가 굉장히 낮다. 모든 일마다 조그만 신경 쓰게 되고 조금만 힘들면 스트레스 받는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 스트레스는 몸만 쉬면 없어지는 것이겠는가? 마음이 쉬어야 스트레스가 없어지는 것이다.  

“하나님이 나사렛 예수에게 성령과 능력을 기름 붓듯 하셨으매 그가 두루 다니시며 선한 일을 행하시고 마귀에게 눌린 모든 사람을 고치셨으니 이는 하나님이 함께하셨음이라”(행 10:38).

부가적용)
19세기 영국의 목회자였던 프레드릭 윌리엄 파라(Frederic William Farrar)는 모든 성도의 영혼을 가리켜 “보석으로 가득 찬 동굴”로 묘사했다. 어떤 구경꾼이 우연히 갈라진 틈으로 안을 들여다보았지만 보이는 모든 것은 어두컴컴하고 음침하고 헛된 것뿐이다. 하지만 그 안에 빛을 비추면, 오 놀랍게도 수정과 자석영이 빛을 발하면서 눈부신 자태를 드러낼 것이다. 당신의 눈앞에 영혼이 빛나지 않는다면 그 이유는 여기에 아무런 빛을 비추지 않았기 때문이다. 비참하게 들끓어 오르는 자만심과 증오심의 횃불을 내던져버리고, 사랑의 빛으로 밝게 비추어보라. 그러면 오, 그 영혼은 일어나 빛을 발할 것이며 꿈에도 생각지 못했던 영광으로 불타오를 것이다. 우리가 사람들 앞에 그저 무작정 율법을 제시하고는 이를 지키기 위해 훈련받지도 헌신하지도 않는다고 책망하는 것은 그에게서 활력과 기쁨, 희망을 빼앗는 것이 된다. 이는 옛 언약에서의 섬김이다. 그러나 새 언약에서의 섬김은 그리스도의 탁월하심과 아울러 그분께서 우리를 위해 베푸신 하늘의 신령한 양식들을 돋보이게 하는 가운데 성도들에게 활력을 불어 넣어준다. 하나님의 빛을 성도들의 감취어진 보석에 비추어 그들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불타오르도록 그들을 섬기라.

• 영감의 교훈 •
▶ 봉사는 손해가 아니라 유익임
“건강을 유지하고 회복하는 일에 있어서 인간의 의지력과 자제력의 중요성에 대하여 분노, 불만과 이기심, 또는 순결하지 않은 마음은 건강을 해치는 파괴적인 영향을 주는 반면, 즐거움, 남을 위하는 마음, 감사하는 마음 등은 놀라운 생명력을 가지고 건강을 증진시킨다는 것을 분명하게 가르쳐야 한다”(교육, 197).

1월 14일 금요일
더 깊은 연구를 위해

“그는 녹초가 되어서 로뎀나무 아래 쉬기 위해 주저앉았다. 그러고는 죽기를 간구하였다. …사람들의 거처에서 멀리 떨어진 망명자는 무서운 절망으로 인해 그의 정신이 꺾여서 다시는 사람의 얼굴을 보지 않게 되기를 바랐다. …모든 사람의 경험 가운데는 통렬한 실망과 철저한 낙담의 때 곧 슬픈 운명에 처하여 하나님께서 여전히 이 세상에 태어난 당신의 자녀들을 보호하신다는 사실을 믿기 어려운 날들, 고통이 영혼을 괴롭혀 마침내 죽는 것이 사는 것보다 나은 것처럼 보이는 날들이 이르러 온다. 이런 때에 많은 사람은 하나님께 대한 그들의 신앙을 잃어버리고 의심의 노예가 되고 불신의 속박에 얽매인다. 만일 우리가 이와 같은 때에 영적 통찰력을 가지고 하나님의 섭리가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분별할 수 있다면 그 같은 상태로부터 우리를 구원하셔서 우리의 발을 영원한 산보다 더 튼튼한 기초 위에 세우려고 노력하는 천사들을 보게 될 것이다. 그리고 새 신앙과 새생애가 싹트게 될 것이다”(선지자와 왕, 162).

핵심적인 토의를 위해
➊하나님의 손이 그대의 삶 속에 역사하여 그대의 믿음이 굳건했었지만, 직후에 닥친 시련으로 인하여 낙망하여 하나님을 의심한 적이 있었습니까? 그런 경험으로부터 우리는 어떤 교훈을 배워야 하며, 비슷한 처지에 있는 사람들을 어떻게 도와야 할까요?
➋어떻게 다른 사람을 돕는 것이 우리의 기분을 좋게 만들까요? 그런 사례가 많은 이유는 무엇일까요? 우리 자신을 다른 사람을 위해 주는 일이 어려운 이유는 무엇입니까? 우리 주위에 있는 사람들을 더욱 잘 섬기기 위해 기꺼이 자아를 죽이는 방법을 어떻게 배울 수 있습니까?


댓글목록

최용길님의 댓글

최용길 작성일

다운받아 프린트하여 원하는 교사에게 나누어 줍니다 건강하세요

조춘호님의 댓글

조춘호 댓글의 댓글 작성일

고마운 일입니다.
말씀을 함께 나눌 수 있도록 반생들에게 좋은 정보를 나누어 주십시오.
저 역시 열심히 준비해 오도록 하겠습니다. 행복한 하루 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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