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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과 주의 인자는 하늘에 이르고 (질문, 대답, 설명) 02/17/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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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김명호 작성일24-02-08 22:56 조회3,821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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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과 주의 인자는 하늘에 이르고 

(2월 17일 안식일 / 일몰: 오후 6시 12분)

 

연구 범위: 시편 136편, 51편, 130편, 113편, 123편

 

기억절: "주여 내가 만민 중에서 주께 감사하오며 뭇 나라 중에서 주를 찬송하리이다 무릇 주의 인자는 커서 하늘에 미치고 주의 진리는 궁창에 이르나이다"(시편 57:9, 10).

 

시편 기자들은 자신들이 영적으로 가난하고 하나님께 드릴 만한 좋은 것이 아무  것도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들 자신에게는 하나님의 거룩한 보좌 앞에 내놓을 만한 것이 아무 것도 없다(시 40:17). 그래서 은혜, 하나님의 은혜가 필요하다는 것을 느낀다. 우리도 그렇다. 사람에게는 복음이 필요하다.

시편은 사람이 하나님의 자비에 전적으로 의존하고 있다는 사실을 강조한다. 다행히도 하나님의 창조와 그분의 백성의 역사에서 알 수 있듯이 하나님의 인자하심은 영원하다(시편 136편). 영원하신 하나님 앞에서 인간의 삶은 풀처럼 덧없지만, 하나님은 인간을 불쌍히 여기시고 새 힘을 주시며(시 103:3, 5, 15), 우리는 하나님 안에서 영원의 약속을 받는다.

하나님의 백성은 주님께서 언약에 신실하시다는 사실에 위로받는다. 아무리 힘겨운 상황이라도 백성들의 간구가 자주 희망으로 가득 찬 것은 자비로우신 하늘 아버지께 기도하기 때문이다(시 103:13, 68:5, 89:26).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에 대한 생생한 경험은 그 누구도, 그 어떤 것도 아닌 오직 하나님을 예배하고 섬기겠다는 그들의 결심을 더욱 굳게 한다.

 

*학습 목표

깨닫기: 지존하신 하나님께서 낮은 우리에게 영원토록 은혜를 베푸신다. 

느끼기: 하나님의 영원한 은혜 때문에 죄인도 용서받고 하나님 앞에 나갈 수 있다. 

행하기: 우리에게 주시는 은혜를 날마다 경험하고 그 사랑을 찬양하며 널리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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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우리가 회개하고 기뻐하며 주님을 경배할 수 있는 이유는 무엇 때문입니까?(시 136:1)

*답: 하나님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영원하기 때문이다. 

3. 하나님의 용서는 무엇이 특별하며 어떤 결과를 가져옵니까?(시 51:10) 

*답: 새로운 피조물이 되게 하신다. 

4. 우리에게 용서를 주고 경외심을 가지게 하는 하나님의 놀라운 특성은 무엇입니까?(롬 2:4)

*답: 우리를 회개하게 하시는 사랑이다. 

5. 시편 기자가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은 그분의 어떠하심 때문입니까?(시 113:5)

*답: 높이 계셔도 낮추셔서 낮은 인생을 살피사 선과 인자를 베푸신다.

6. 하나님이 베푸신 모든 은혜 앞에 우리는 어떻게 반응하는 것이 합당합니까?(시 103:2) 

*답: 은택을 잊지 않고 기억하여 찬양하는 것이다. 

7. 기자가 경험한 하나님의 은혜에 반응하여 부르는 찬양은 어떤 의미를 담고 있습니까?(시 103:6) 

*답: 의로운 일을 행하시고 압박당하는 자들을 위하여 신원하시는 판단을 하신다. 

 

결론: 하나님은 하늘 높은 보좌에 계시지만 낮은 우리와 함께하시며 유한한 우리가 하나님께 나갈 수 있는 은혜를 주신다. 그의 인자하심은 영원하기 때문에 우리는 죄가 많고 연약한 중에서도 여전히 기도할 수 있고 소망이 있다. 어려운 가운데서도 희망이 샘솟는 것은 그분의 사랑과 인자하심 때문이며 그 은혜를 우리는 찬양한다. 찬양으로 하나님의 자비를 나타낼 때 우리는 그분의 은총을 기억하고 다른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인애하심을 전파한다. 

 

2월 11일(일) 그의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라

 

시편 136편을 읽어 보라. 이 시편을 관통하는 생각은 무엇인가? 시편 기자는 그 주장의 증거를 어디에서 찾는가?

[시136:1~26] 직접 찾아 읽기 바란다.

*답: 하나님은 선하시며 그 인자하심이 영원하시다는 것이다. 그것을 창조와 이스라엘 역사에서 찾았다.

 

시편 136편은 창조(시 136:4~9)와 이스라엘 역사(시 136:10~22)에 나타난 주님의 인자하심을 찬양하도록 하나님의 백성을 부른다. 히브리어 "자비"(헤세드, khesed 한결같은 사랑)는 창조세계 그리고 이스라엘과의 언약에 대한 하나님의 선하심과 신실하심을 나타낸다. 이 시편은 하나님의 놀라운 능력과 위엄이 그분의 변함없는 사랑에 기초를 두고 있음을 보여 준다. 주님이 "신들 중에 뛰어난 하나님", "주들 중에 뛰어난 주"시라는 표현은 히브리 관용어로 다른 신들이 있다는 의미가 아니라 그분만이 유일한 신이며 "가장 위대한 하나님"이심을 의미한다(시 136:1~3). 

누구도 따라 할 수 없는 하나님의 위대한 창조는 부인할 수 없는 주님의 통치하심의 증거이다(시 136:4). 이교도들이 숭배하는 하늘과 땅 그리고 천체까지 그 모두를 창조하신 분이 하나님이시다(신 4:19). 그러므로 시편은 이교 신들은 물론, 인간이 만들고 신뢰하는 모든 신들이 주장하는 권위를 박탈한다. 우상과 그 신들은 창조의 산물에 불과하다. 그들은 창조주가 아니라 피조물일 뿐이며, 이것이 분명한 차이점이다. 

주님의 강한 손과 편 팔의 형상(시 136:12)은 주님의 권능과 그분의 자비의 광범위한 영역을 강조한다. 창조와 역사에 나타난 하나님의 자비는 주님의 백성들이 그분을 신뢰하고 그 언약에 충실하도록 영감을 준다.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라는 후렴구가 26번 반복된 것은 주님은 변하지 않으시고 새로운 세대에게도 과거의 은혜를 반복하실 것이라는 확신을 예배자들에게 심어준다. 하나님은 당신의 백성을 기억하시며(시 136:23) 은혜의 언약에 신실하시다. 주님의 변함없는 자비에 대한 믿음은 성경적 신앙의 핵심이며 이는 기쁨으로 예배하며 확신을 가지게 하고 근신과 회개로 우리를 인도한다. 

시편 136편은 세상을 향한 하나님의 전 우주적인 보살핌을 찬양하며 마무리한다(시 136:23~25). 하나님의 자비는 이스라엘뿐만 아니라 모든 피조물에게 미친다. 따라서 이 시편은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가 온 세계에 미침을 증거하며 세상이 이스라엘과 함께 주님을 찬양하도록 권면한다(눅 2:10, 요 3:16, 행 15:17).

 

<교훈> 주님의 변함없는 자비에 대한 믿음은 성경적 신앙의 핵심이며 이는 기쁨으로 예배하고 확신을 가지는 것, 그리고 근신과 회개를 포함한다. 

 

<부가설명> 요즘 유행하는 복음 성가에 당연한 것은 없다 모두가 주님의 은혜라는 뜻을 담은 가사가 은혜롭게 마음을 적신다. 사람은 자신이 어떻게 존재했는지 스스로는 모른다. 부모님이 낳았다는 것을 가르치기 때문에 안다. 부모님은 자녀들에게는 선재(先在)하시는 존재다. 자녀들이 생명으로 존재하고 생활하는 것은 부모님의 은혜다. 옛시조에 정철이나 주세붕의 시조에 그런 표현이 있다. 바울은 이것을 사도행전 17:28에 “우리가 그를 힘입어 살며 기동하며 있느니라”라고 고백한다. 24절부터 읽으면 ‘그’가 창조주 하나님이심을 확인할 수 있다. 우리가 디디고 사는 땅, 푸른 하늘 밝은 태양 지구를 두르고 있는 대기 그 어느 것하나 창조주께서 베푸신 은혜아닌 것 없다. 사람들은 그것을 공짜로 누리며 생활한다. 창조주 여호와 하나님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호흡마다 걸음마다 우리에게 넘친다. 그래서 범사에 감사하고 항상 기뻐하며 쉬지 않고 기도하며 생활하는 것이다. 게다가 사망이 되어버린 아담과 그의 후손을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길 수 있도록 말씀 하나님이신 창조주께서 사람이 되어 십자가에 죽으시기까지 했으니 어찌 감읍하지 않겠는가? 시136편의 시인은 이것을 시적으로 잘 표현했다. 우리도 생활로 이것을 감사하고 영광 돌리며 우리 존재가 예수님의 영광의 찬송이 되어서(엡1:12) 세상에 드러내어야 하지 않겠는가?

 

2월 12일(월) 내 속에 정한 마음을 창조하소서 

  

시편 51:1~5을 읽어 보라. 시편 기자는 왜 하나님의 자비에 호소하고 있는가?

[시51:1~5] 하나님이여 주의 인자를 따라 내게 은혜를 베푸시며 주의 많은 긍휼을 따라 내 죄악을 지워 주소서 2 나의 죄악을 말갛게 씻으시며 나의 죄를 깨끗이 제하소서 3 무릇 나는 내 죄과를 아오니 내 죄가 항상 내 앞에 있나이다 4 내가 주께만 범죄하여 주의 목전에 악을 행하였사오니 주께서 말씀하실 때에 의로우시다 하고 주께서 심판하실 때에 순전하시다 하리이다 5 내가 죄악 중에서 출생하였음이여 어머니가 죄 중에서 나를 잉태하였나이다.

*답: 시인은 죄악 중에 출생한 죄인임을 깨달아서 하나님의 자비에 용서를 베푸시는 은혜를 간구하였다.

 

다윗 왕은 그의 생애에서 가장 영적으로 어두웠던 순간의 죄에 대해 용서를 구하며 주님 앞에 자신의 마음을 쏟아놓는다(삼하 12:). 용서는 하나님의 특별한 은혜의 선물이며, "주의 많은 긍휼"(시 51:1)의 결과이다. 다윗 왕은 하나님께 자신의 죄를 따라 처벌하지 마시고(시 103:10) 당신의 인자하고 신실하시며 긍휼하신(시 51:1, 출 34:6, 7) 거룩한 품성에 따라 살펴 달라고 호소한다.

 

시편 51:6~19을 읽어 보라. 죄의 용서가 어떻게 묘사되어 있는가? 하나님의 용서는 무엇을 위한 것인가?

[시51:6~19] 보소서 주께서는 중심이 진실함을 원하시오니 내게 지혜를 은밀히 가르치시리이다 7 우슬초로 나를 정결하게 하소서 내가 정하리이다 나의 죄를 씻어 주소서 내가 눈보다 희리이다 8 내게 즐겁고 기쁜 소리를 들려 주시사 주께서 꺾으신 뼈들도 즐거워하게 하소서 9 주의 얼굴을 내 죄에서 돌이키시고 내 모든 죄악을 지워 주소서 10 하나님이여 내 속에 정한 마음을 창조하시고 내 안에 정직한 영을 새롭게 하소서 11 나를 주 앞에서 쫓아내지 마시며 주의 성령을 내게서 거두지 마소서 12 주의 구원의 즐거움을 내게 회복시켜 주시고 자원하는 심령을 주사 나를 붙드소서 13 그리하면 내가 범죄자에게 주의 도를 가르치리니 죄인들이 주께 돌아오리이다 14 하나님이여 나의 구원의 하나님이여 피 흘린 죄에서 나를 건지소서 내 혀가 주의 의를 높이 노래하리이다 15 주여 내 입술을 열어 주소서 내 입이 주를 찬송하여 전파하리이다 16 주께서는 제사를 기뻐하지 아니하시나니 그렇지 아니하면 내가 드렸을 것이라 주는 번제를 기뻐하지 아니하시나이다 17 하나님께서 구하시는 제사는 상한 심령이라 하나님이여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을 주께서 멸시하지 아니하시리이다 18 주의 은택으로 시온에 선을 행하시고 예루살렘 성을 쌓으소서 19 그 때에 주께서 의로운 제사와 번제와 온전한 번제를 기뻐하시리니 그 때에 그들이 수소를 주의 제단에 드리리이다.

*답: 상한 심령으로 죄를 고백할 때 정한 마음을 창조해주시고 하나님을 찬양하게 한다.

 

하나님의 용서는 법적으로 무죄를 선언하는 것 이상의 것을 포함한다. 그것은 인간 자아의 가장 깊은 부분까지 역사하는 심오한 변화를 가져온다(시 51:6, 히 4:12). 새로운 창조가 이루어지는 것이다(시 51:10, 요 3:3~8). "창조하다"에 사용된 히브리어 동사 바라(bara)는 하나님의 창조의 능력을 의미한다(창 1:1). 창조하시는 하나님만이 회개하는 사람의 마음에 전적이고 지속적인 변화를 만드실 수 있다(고후 4:6). 

다윗은 우슬초로 정결케 해달라고 간구한다(레 14:2~8, 시 51:7). 문둥병자가 부정함 때문에 공동체에서 격리되는 것같이(시 51:11) 그는 자신의 죄로 인해 주님의 임재에서 분리되었다고 느낀다. 다윗은 자신이 계획적으로 저지른 간음과 살인의 죄를 속죄할 수 있는 희생 제사가 없기 때문에 어떤 것도 자신을 온전히 회복시키지 못한다는 사실에 두려워한다(출 21:14, 레 20:10).

오직 조건 없는 하나님의 은혜만이 다윗의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을 제물로 받으시고 그를 다시 하나님과 화목하게 회복시킬 수 있다(시 51:16, 17). 그는 우슬초로 정결하게 해달라고 구함으로 하나님의 임재 앞으로 돌아가기를 원한다.

 

<교훈> 하나님의 용서는 법적으로 무죄를 선언하는 것 이상의 것이다. 그분의 창조의 능력은 회개하는 죄인의 마음에 역사하여 전적이고 지속적인 변화를 만드신다. 

 

<부가설명> 다윗은 동물 희생 제사가 진정한 용서가 되지 않는다는 것을 잘 알고 고백한다. 만일 동물 희생 제사가 용서를 이룬다면 다윗은 동물 제사를 드렸을 것이라고 말한다. 우리는 희생 동물로 죄인의 죄가 용서 받는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성경은 동물 등으로 드리는 제사는 죄를 생각나게 하는 것이라고 설명한다. “그러나 이 제사들은 해마다 죄를 생각하게 하는 것이 있나니 이는 황소와 염소의 피가 능히 죄를 없이 하지 못함이라”(히10:3,4). 이 제사들은 자기는 죄인이라는 것을 깨닫게 하고 죄를 사하실 수 있는 유일하신 하나님께 나아가게 하는 도구일 뿐이다. 히브리서 기록대로 “그러므로 세상에 임하실 때에 가라사대 하나님이 제사와 예물을 원치 아니하시고 오직 나를 위하여 한 몸을 예비하셨도다 전체로 번제함과 속죄제는 기뻐하지 아니하시나니 이에 내가 말하기를 하나님이여 보시옵소서 두루마리 책에 나를 가리켜 기록한 것과 같이 하나님의 뜻을 행하러 왔나이다 하시니라”(히10:5~7). 이 제사들은 다 예수께서 오셔서 속죄를 확실하게 이루신다는 것을 가리키는 것일 뿐이다. 그래서 진정한 회개와 용서는 죄에 대하여 죽고 의에 대하여 살아나는 경험에 있다. 그것을 거듭나는 것이라 하고 새로운 피조물이라고 했다. 새로운 피조물이 되기 전에는 여전히 죄요 죄인일 뿐이다. 그래서 다윗은 정한 마음을 창조해주시기를 간구하였다.

 

2월 13일(화) 여호와여 주께서 죄악을 지켜보실진대

 

시편 130편을 읽어 보라. 죄의 심각성과 죄인의 희망이 이 시편에 어떻게 묘사되어 있는가?

[시130:1~8] 여호와여 내가 깊은 곳에서 주께 부르짖었나이다 2 주여 내 소리를 들으시며 나의 부르짖는 소리에 귀를 기울이소서 3 여호와여 주께서 죄악을 지켜보실진대 주여 누가 서리이까 4 그러나 사유하심이 주께 있음은 주를 경외하게 하심이니이다 5 나 곧 내 영혼은 여호와를 기다리며 나는 주의 말씀을 바라는도다 6 파수꾼이 아침을 기다림보다 내 영혼이 주를 더 기다리나니 참으로 파수꾼이 아침을 기다림보다 더하도다 7 이스라엘아 여호와를 바랄지어다 여호와께서는 인자하심과 풍성한 속량이 있음이라 8 그가 이스라엘을 그의 모든 죄악에서 속량하시리로다.

*답: 죄는 여호와 하나님 앞에 죄인을 서지 못하게 한다. 그러나 용서하심이 하나님께 있기 때문에 그분을 바라고 간구할 때 속량이 이루어진다. 

 

시편 기자의 큰 고통은 자신과 백성의 죄 때문이다(시 130:3, 8). 백성들의 죄의 기록은 너무나 심각하여 하나님과 그들은 영원히 분리될 위기에 놓였다(시 130:3). 성경은 심판의 날까지 죄의 기록이 계속되고(단 7:10, 계 20:12), 죄인의 이름은 생명책에서 지워진다고 말한다(출 32:32, 시 69:28, 계 13:8).

그래서 시편 기자는 죄의 기록을 지워 주시도록 하나님의 용서를 간구한다(시 51:1, 9; 렘 31:34; 미 7:19). 시편 기자는 알고 있다. "하나님은 본성적으로 노하지 않으시고 그분의 사랑은 영원하며 그분의 '노하심'은 인간이 그분의 놀라운 사랑에 감사하지 않을 때만 일어난다… 하나님의 노하심은 우리를 치시기 위함이 아니요 낫게 하시기 위함이며, 멸망시키려는 것이 아니라 그의 언약 백성을 구원하시려는 것(호 6:1, 2)이다"(한스 K. 라론델, Hans K. LaRondelle, 시편에 나타난 구원, 1983, 180). 경이롭게도 죄를 기꺼이 용서하시고 벌하지 않으시는 하나님의 성품이 그분을 향한 경외심을 불러 일으킨다(시 130:4, 롬 2:4). 진정한 예배는 형벌에 대한 두려움이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의 성품에 대한 감격에 기초한다.

하나님의 자녀는 주님을 의지하고 기다리도록 부름 받았다(시 27:14, 시 37:34). “기다리다”로 번역된 히브리어 카와(qawah)의 문자적 의미는 "뻗다"이며 "소망"을 뜻하는 히브리어 단어의 어근이다. 따라서 주님을 기다린다는 것은 비참한 상황에 수동적으로 굴복하는 것이 아니라 소망의 "뻗어감," 주님의 개입에 대한 간절한 기대이다. 시편 기자의 소망은 개인적인 낙관이 아닌 하나님의 말씀에 근거를 두고 있다(시 130:5). 어두운 밤이 지나면 하나님의 구원의 아침이 오기 때문에 주님을 향한 신실한 기다림은 헛된 것이 아니다. 

시편 기자의 개인적인 간구가 어떻게 공동체 전체의 신원이 되는지 살펴보라(시 130:7, 8). 개인의 평안은 전체 백성의 평안과 분리될 수 없다. 따라서 그는 자기 자신뿐만 아니라 공동체를 위해 기도한다. 신자로서 우리는 공동체에 속해 있으며, 공동체의 한 부분에 영향을 미치는 것은 모두에게 영향을 미친다. 

 

<교훈> 하나님은 죄악을 기록하시지만 그것을 기꺼이 용서하신다. 이런 하나님의 성품을 이해하는 것이 우리가 그분을 경외하고 바르게 예배하는 기초가 된다. 

 

<부가설명> 만일 하나님께서 아담과 그의 후손들을 용서하시고 구원하시려는 자비와 사랑의 섭리가 없었다면 지구 창조를 취소하면 됐을 것이다. 그러나 창조주는 자비하신 분이시고 당신이 심히 좋도록 만드신 지구를 없애는 것을 차마 하실 수가 없으셨다. 그래서 그들을 구원하기로 하신 것이다. 이런 은혜는 여호와라는 하나님의 이름에 포함되어 있다. 그 이름을 버리지 않는 한 구원을 하실 수밖에 없다. 이름은 ‘스스로 존재하는 자’라는 뜻이니 창조주 하나님의 실체가 이름이 되었으니 어떻게 그 이름을 버릴 수 있겠는가? 그래서 영원 전에 여호와 회의에서(렘23:18) 의논한 구원의 경륜을 실천하신 것이다. 다윗은 하나님의 이런 은혜와 자비를 깨닫고 있었다. 엄청난 죄를 지었으나 그것은 죄악 중에 출생한 자기의 본성이 그렇게 한 것을 깊이 회개하면 새롭게 창조해 주시도록 기도한 것이다. 구원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이 되는 것이다. 그냥 도덕적으로 율법적으로 저지른 허물들을 용서받는 것으로 구원 되는 것이 아니다. 구원은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기는 것인데 그것은 창조주께서 그를 사망에서 건져서 새로운 피조물로 재창조하실 때 확정된다(고후5:17, 엡4:22~24). 다윗은 이 경험을 한 것이다. 우리도 이 경험을 해야 한다.

 

2월 14일(수) 엄위하시고 자비하신 하나님을 찬양

 

시편 113편과 123편을 읽어 보라. 이 시편에는 하나님 성품의 어떤 두 가지 서로 다른 측면이 묘사되어 있는가?

[시113:1~9] 할렐루야, 여호와의 종들아 찬양하라 여호와의 이름을 찬양하라 2 이제부터 영원까지 여호와의 이름을 찬송할지로다 3 해 돋는 데에서부터 해 지는 데에까지 여호와의 이름이 찬양을 받으시리로다 4 여호와는 모든 나라보다 높으시며 그의 영광은 하늘보다 높으시도다 5 여호와 우리 하나님과 같은 이가 누구리요 높은 곳에 앉으셨으나 6 스스로 낮추사 천지를 살피시고 7 가난한 자를 먼지 더미에서 일으키시며 궁핍한 자를 거름 더미에서 들어 세워 8 지도자들 곧 그의 백성의 지도자들과 함께 세우시며 9 또 임신하지 못하던 여자를 집에 살게 하사 자녀들을 즐겁게 하는 어머니가 되게 하시는도다 할렐루야.

[시123:1~4] 하늘에 계시는 주여 내가 눈을 들어 주께 향하나이다 2 상전의 손을 바라보는 종들의 눈 같이, 여주인의 손을 바라보는 여종의 눈 같이 우리의 눈이 여호와 우리 하나님을 바라보며 우리에게 은혜 베풀어 주시기를 기다리나이다 3 여호와여 우리에게 은혜를 베푸시고 또 은혜를 베푸소서 심한 멸시가 우리에게 넘치나이다 4 안일한 자의 조소와 교만한 자의 멸시가 우리 영혼에 넘치나이다.

*답: 지극히 높은 데 계시는 하나님이시지만 또 낮추사 세상을 살피시는 자비와 사랑의 하나님이시다. 

 

시편 113편과 123편은 주님의 위엄과 자비를 찬양한다. 주님의 위엄은 그 이름의 위대함과 모든 나라와 하늘보다 높으신 그분의 보좌에서 나타난다(시 113:4, 5, 123:1). "누가 여호와 우리 하나님과 같으며"(시 113:5, 쉬운). 이는 세상 안팎의 그 어떤 세력도 이스라엘의 하나님과 비교할 수 없다는 신앙고백이다.

누구도 올라갈 수 없는 높은 곳에 주님께서 거하신다는 것은 주님이 기꺼이 자신을 낮추심과 "몸을 굽혀 하늘과 땅을 내려다 보"(시 113:6, 쉬운)신다는 표현을 통해 알 수 있다. 하나님께서 높은 곳에 거하신다고 여기 아래에서 일어나는 일을 보지 못하는 것은 아니다. 주의 자비는 언제라도 세상과 함께하시고 궁핍하고 가난한 사람들을 환난에서 구원하시려는 그분의 자비하신 뜻을 통해 나타난다. 그분의 거처가 높은 하늘에 있을지라도 그의 관대하신 손길은 분명히 그분의 종들에게 가까이 있다. 

저 높은 곳에 계시고 엄위하신 하나님의 모습에서 온전하게 볼 수 없었던 하나님의 사랑과 돌보심은 하나님의 자비와 긍휼의 행동에서 분명하게 드러난다. 궁핍한 자, 가난한 자, 압제 받는 자들은 그들을 위해서 하나님이 행하신 경이로운 낮아지심과 높여주심 가운데 그분의 주권적인 능력을 체험할 수 있다. 높임 받으신 하나님은 그분의 권능으로 비천한 자들을 높이심으로써 당신의 위대함을 보여주신다. 백성들은 엄위하시고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께 자유롭게 나갈 수 있다. 그분의 주권적 위엄과 드높은 지위가 그분이 백성들의 은혜로운 창조주이자 유지자이며, 백성들은 그분의 종이며 그분의 사랑하는 자녀라는 사실을 바꾸지 않기 때문이다. 

따라서 예배는 하나님의 위대하심뿐만 아니라 그분의 선하심에 의해 촉발된다. 

 

온 땅과 모든 세대가 하나님을 찬양할 것이다(시 113:2, 3). 

하나님의 위대함과 자비하심은 타락한 인류를 일으키기 위해 하늘을 기꺼이 버리고 십자가에 죽기까지 낮아지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가장 놀랍게 나타났다(빌 2:6~8). 하나님을 찬양하고 경배할 수 있는 가장 큰 이유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 행하신 일, 십자가 밑에서 찾을 수 있다. 

 

<교훈>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을 찬양하는 이유는 그분께서 우리를 위해 행하신 십자가의 사랑 때문이다. 그것이 하나님의 높으심과 엄위하심의 진정한 본질이다. 

 

<부가설명> 성경은 하나님은 사랑이라고 계시했다(요일4:8,16). 그런데 하나님은 생명 자체이시다. 그분은 스스로 계시는 분이시다. 그분이 생명이기 때문에 스스로 계신다. 스스로 계시는 이 생명은 본질이 사랑이다. 하나님은 생명 자체라는 표현이나 하나님은 사랑이라는 표현은 같은 표현이다. 성경이 가르치는 하나님의 생명은 영원한 생명이다. 죽음이 범접할 수 없는 생명이다. 성경은 죽지 아니함이 그에게만 있다고 했다(딤전6:16). 그 생명이 사랑으로 나타난다. 예수님을 믿어서 거듭나서 새로운 피조물이 되어 이 영생의 생명을 얻으면 그는 사랑의 사람이 된다고 성경이 가르친다. “우리가 형제를 사랑함으로 사망에서 옮겨 생명으로 들어간 줄을 알거니와 사랑치 아니하는 자는 사망에 거하느니라”(요일3:14). 형제를 사랑하는 것이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긴 증명이라고 기록하였다. 형제를 사랑하지 않는다면 그가 예수님을 믿는다고 해도 말만 믿는다고 하는 것일 뿐 실상은 사망의 존재라는 것이다. 하나님의 사랑은 자비와 긍휼과 용서로 드러난다. 그래서 하나님을 배반한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셔서 말씀 하나님께서 독생자의 신분으로 세상에 오셔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의 사랑을 증명하셨다(롬5:8). 성경 기자들은 성령님 감동으로 이런 사랑을 알았고 그 사랑과 자비에 의지하여 용서를 간구했고 하나님께서는 기꺼이 용서하셨다. 그러나 다시는 죄를 짓지말라는 당부를 잊지 않으신다(요8:11).

 

2월 15일(목) 그의 모든 은택을 잊지 말라 

 

시편 103편을 읽어 보라. 여기에는 하나님의 자비가 어떻게 묘사되어 있는가?

[시103:1~22] 각각 직접 읽기를 바란다.

*답: 모든 병을 치료하시며 죄를 따라 우리를 처치하지 않으시고 아버지의 사랑으로 긍휼을 베푸신다. 그의 자비와 은혜는 하늘처럼 광대하시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백성들은 그분의 선하심을 기억하고 그분을 찬양해야 한다. 모든 피조물은 그분을 찬양해야 한다. 

 

시편 103편은 주님의 다양한 복을 열거하고 있다. 그 복은 번영하는 삶을 위한 "그의 모든 은택"(시 103:2)을 포함한다(시 103:3~6). 하나님은 은혜로우시고 이스라엘과의 언약을 신실하게 지키시기에 이런 복을 주신다(시 103:7~18). 주님은 인생의 연약함과 덧없음을 "기억"하시고 그의 백성을 긍휼히 여기신다(시 103:13~17).

기억하는 것은 단순한 인지 그 이상이며 행동으로 나타나는 헌신이 수반된다. 하나님은 그의 백성을 구원하시고 존재하게 하신다(시 103:3~13). 시편 103:11~16의 강력한 심상은 하늘의 무한한 광대함(사 55:9)만이 비견할 수 있는 하나님의 은혜의 측량할 수 없는 위대함을 보여준다. 그 사랑에 우리는 어떻게 반응할 것인가?

첫째, 주님을 송축하는 것이다(시 103:1, 2). 축복은 일반적으로 누군가에게 물질적, 영적 유익을 주는 행위로 이해된다(창 49:25, 시 5:12). 하나님은 모든 복의 근원이신데 인간이 어찌 하나님을 축복할 수 있겠는가? 낮은 우리는 주님께 감사와 찬양으로 송축할 수 있다(왕상 8:66, 욥 29:13). 하나님은 선을 베푸심으로써 사람들에게 복을 주시고, 사람들은 하나님 안에 있는 선을 찬양하며 그의 은혜로우신 성품을 경외함으로 하나님을 송축한다. 둘째, 주님께서 연약한 인간의 상태와 그들과 맺은 언약을 기억하시는 것처럼(시 103:3~13) 우리도 그분의 은혜와 언약을 기억하는 것이다(시 103:2, 18~22). 기억하는 것은 하나님과 백성 사이의 관계에서 매우 중요하다. 하나님께서 백성에게 하신 약속을 기억하시는 것처럼, 사람들도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기억해야 하고 사랑과 순종으로 하나님께 반응해야 한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생애를 깊이 명상하는 데 매일 한 시간을 바치는 것은 매우 좋은 일이다. 우리는 그의 생애를 한 조목 한 조목씩 연구하고, 각 장면 특히 그의 생애의 마지막 장면을 확실히 머리 속에 그릴 것이다. 

이와 같이 우리를 위한 그의 크신 희생을 깊이 생각할 때에 그에 대한 우리의 신뢰는 더욱 굳어질 것이며 우리의 사랑은 격발되고 우리는 더욱 그리스도의 정신으로 깊이 물들게 될 것이다. 만일 우리가 마침내 구원을 얻고자 한다면 우리는 십자가 밑에서 통회와 겸손의 공과를 배워야 한다"(시대의 소망, 83).

 

<교훈> 기억하는 것은 단순한 인지 이상을 넘어 행동하는 헌신을 포함한다. 하나님께서 약속을 기억하는 것처럼 사람도 사랑과 순종으로 그분에게 반응해야 한다. 

 

<부가설명> 바울은 에베소 1:12에서 “이는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전부터 바라던 그의 영광의 찬송이 되게 하려 하심이라”라고 했다. 우리는 하나님께 갚을 수 있는 것이 없다. “누가 주께 먼저 드려서 갚으심을 받겠느냐 이는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감이라 그에게 영광이 세세에 있을지어다 아멘”(롬11:35,36). 우리에게 있는 것 중에 하나님께로부터 받지 않은 것이 있는가(고전4:7)? 결코 없다. 그러므로 항상 기뻐하고 쉬지말고 기도하며 범서에 감사할 수밖에 없다(살전5:16~18). 시편은 하나님께 송축하라고 강권한다. 이사야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창조하신 것은 그분을 찬송하게 하려는 것이라고 기록했다(사43:21). “여호와께서 내게 주신 모든 은혜를 무엇으로 보답할꼬 내가 구원의 잔을 들고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며 여호와의 모든 백성 앞에서 나의 서원을 여호와께 갚으리로다”(시116:12~14). 다윗처럼 아삽처럼 찬양과 감사로 충성하며 굴복하여 사랑이 실천되는 신앙생활이 되도록 기도하며 살자. 

 

2월 16일(금) 더 깊은 연구를 위하여

 

정로의 계단 2장 "죄인에게 필요한 그리스도"를 읽어 보라. 

백성들의 목소리는 하나님의 영원한 사랑을 찬양하며 "그의 인자하심이 영원하"심을 한목소리로 반복한다(시 106:1, 107:1, 118:1~4, 29, 시편 136편). "하나님을 찬양하지 않는 것은 그분이 베푸신 은총을 잊어버리고 감사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은총을 기억하는 자가 찬양한다. 하나님에 대해 생각하고 말하는 것도 찬양하는 것에 미치지 못한다. 찬양은 하나님의 위엄과 행하시는 일을 인정하고 그의 선하심과 자비와 지혜를 사모하는 것에서 시작된다"(한스 K. 라론델, 178).

그 찬양은 하나님의 헤세드(khesed), 즉 인류의 죄와 반역 가운데도 그분의 언약적 사랑과 신실하심이 굳건하고 변함없음을 기억할 때 더욱 깊은 의미를 가진다. 

“우리는 범죄하였고 그의 은총을 받을 아무 자격도 없지만 그분은 친히 우리의 입술에 ‘주의 이름을 위하여 우리를 미워하지 마옵소서 주의 영광의 위를 욕되게 마옵소서 우리와 세우신 주의 언약을 기억하시고 폐하지 마옵소서’(렘 14:21)라는 가장 놀라운 기도를 넣어 주셨다. 우리가 그분에게 나아가 우리의 죄와 무가치함을 자복할 때에 그는 우리의 부르짖음에 귀를 기울이시겠다는 보증을 주셨다. 당신의 보좌의 명예를 걸고 당신이 우리에게 하신 말씀을 성취시켜 주시겠다고 약속하셨다"(실물교훈, 148).

자신에게 베푸신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하는 것은(시 103:2) 시편 기자로 하여금 "여호와께서 공의로운 일을 행하시며 억압당하는 모든 자를 위하여 심판하시는도다"(시 103:6)라고 고백하게 한다. 따라서 시편 기자의 최종 목표는 다른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인애하심을 확신하게 만들어 그들도 하나님께 마음을 열고 구원의 은혜를 받으며 하나님을 찬양하도록 하는 것이다(시 9:11, 12, 22:22~27, 66:16).

 

함께하는 토의를 위하여

1. 사람들의 구원을 위한 하나님의 인자하심이 영원하다는 것은 무엇을 말하는 것인가? 그것은 계속 죄를 지어도 된다는 의미인가?

*답: 인자하심으로 구원하시는데 구원받은 사람은 생명을 얻었기 때문에 사랑이 생활로 드러나고 죄와 상관없는 생명으로 생할하게 된다. 이것이 구원의 실상이다. 

2. 우리의 죄를 용서하시는 바로 그 하나님께서 죄를 심판하신다는 사실을 어떻게 조화시킬 수 있겠는가?

*답: 그분이 심판하시기 때문에 그분 안에 있는 우리를 의롭다고 선고하신다. 

3. 신약성경에 표현된 하나님의 자비는 시편에 기록된 자비와 어떻게 일치하는가?(엡 2:4, 5, 딤전 1. 1:16, 딛 3:5, 히 4:16)

*답: 같은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일치하는 것이 당연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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