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0과 복음을 듣지 못한 이를 향한 선교 ~1(질문, 대답, 설명) 12/09/23 > 교과토의 자료

본문 바로가기

운영진
x


교과토의 자료 보기

교과토의 자료

제10과 복음을 듣지 못한 이를 향한 선교 ~1(질문, 대답, 설명) 12/09/23

페이지 정보

작성자 김명호 작성일23-11-30 22:20 조회3,651회 댓글0건

본문

제10과 복음을 듣지 못한 이를 향한 선교 ~1

(12월 9일 안식일 / 일몰: 오후 5시 14분)

 

연구 범위: 행 17:, 고전 2:2, 롬 1:18~25

 

기억절: "우주와 그 가운데 있는 만물을 지으신 하나님께서는 천지의 주재시니 손으로 지은 전에 계시지 아니하시고"(행 17:24)

 

누가는 바울이 아테네에서 한 일을 묘사하면서 이렇게 썼다. "회당에서는 유대인과 경건한 사람들과 또 장터에서는 날마다 만나는 사람들과 변론하니"(행 17:17).

바울은 자기 민족인 유대인들 사이에서 일하는 것이 가장 편했을 것이다. 그러나 바울은 그것에 만족하지 않았다. 그는 다른 사람들에게도 복음을 전하라는 부름을 받았다.

바울은 세계관이 이미 어느 정도 변화된 '하나님을 경외하는' 이방인들을 대상으로 일할 수도 있었다. 그들이 "경외하는" 하나님이 메시아이신 예수 그리스도인 것을 알게 할 필요가 있었지만, 그들에게는 바울이 그 위에 세워나갈 수 있는 성경적 기초가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바울은 철학으로 유명한 도시 아테네에 있는 동안 그 사람들에게도 복음을 전하고자 했다. 아테네인들은 바울이 가르치고자 했던 신앙의 토대가 되는 히브리식 세계관이나 유대인의 역사를 통해 유래한 믿음과는 전혀 다른 배경과 사고방식을 가지고 있었다. 

바울은 어떻게 그들에게 다가가려고 노력했으며 그의 시도에서 우리는 무엇을 배울 수 있는가?

 

*학습 목표

깨닫기: 기독교 배경이 없는 이에게 전할 때는 그 상황에 맞는 방법이 필요하다. 

느끼기: 상대방의 상황을 이해할 때에 복음이 상대에게 의미 있는 방식으로 전해질 수 있다. 

행하기: 선교할 때 비판하기보다는 존중하며 장점을 부각하여 그들을 위하는 사람으로서 다가가야 한다. 

 

TMI 위로

2. 아테네가 “우상이 가득한” 도시라는 표현은 어떤 의미를 담고 있을까요?(행 17:16) 

*답: 그들에게 종교심이 많다는 것을 드러내는 의미를 담고 있다.

3. 바울이 이방 신을 전하는 이로 보였던 이유는 무엇입니까? 무엇이 그렇게 달랐습니까?(행 17:18)

*답: 죽은 자의 부활을 전했기 때문이다.

4. 당신이라면 “알 수 없는 신”에 제사하는 이들을 어떻게 대했겠습니까? 바울을 보십시오(행 17:23). 

*답: 아마도 비웃지 않았을까? 바울의 방법을 반드시 배워야 한다.

5. 아테네인들에게 하나님은 얼마나 새로운 분이십니까? 당신에게는 어떻습니까?(행 17:24~27)

*답: 창조와 부활의 하나님은 전혀 새로운 하나님이었다. 

6. 바울의 노력에도 그들의 반응이 엇갈리는 것은 선교에 있어서 무엇을 시사합니까?(행 17:32) 

*답: 선교는 그 대상이 반드시 긍정적 반응을 하는 것이 아님을 드러낸다.

7. 바울의 경험을 통해 알 수 있는 선교를 하는 사람이 기억해야 할 일은 무엇이라고 생각합니까? 

*답: 상대를 자극하거나 무시하는 정신이나 태도는 금기라는 사실이다. 

 

결론: 기독교 배경이 없는 이에게 복음을 전하는 것은 그들의 상황을 이해하는 데서 시작한다. 바울은 아테네인들에게 복음을 전할 때에 아레오바고에서 관찰한 것을 통해 발견한 그들의 장점을 복음의 접촉점으로 삼았다. 그의 존중하는 태도는 아테네인의 유익을 위하는 사람으로 여겨지게 했고 그들이 알지 못하는 복음을 전할 수 있는 문을 열었다. 바울은 복음의 의미와 그것이 가져올 결과를 분명하게 전하였다. 

 

12월 3일(일) 아테네의 히브리인

 

사도행전 17:1~16을 읽어 보라. 바울은 어떻게 해서 아테네에 가게 되었으며 그곳에서 발견한 것에 대해 어떤 반응을 보였는가?

[행17:1~16] 그들이 암비볼리와 아볼로니아로 다녀가 데살로니가에 이르니 거기 유대인의 회당이 있는지라 2 바울이 자기의 관례대로 그들에게로 들어가서 세 안식일에 성경을 가지고 강론하며 3 뜻을 풀어 그리스도가 해를 받고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야 할 것을 증언하고 이르되 내가 너희에게 전하는 이 예수가 곧 그리스도라 하니 4 그 중의 어떤 사람 곧 경건한 헬라인의 큰 무리와 적지 않은 귀부인도 권함을 받고 바울과 실라를 따르나 5 그러나 유대인들은 시기하여 저자의 어떤 불량한 사람들을 데리고 떼를 지어 성을 소동하게 하여 야손의 집에 침입하여 그들을 백성에게 끌어내려고 찾았으나 6 발견하지 못하매 야손과 몇 형제들을 끌고 읍장들 앞에 가서 소리 질러 이르되 천하를 어지럽게 하던 이 사람들이 여기도 이르매 7 야손이 그들을 맞아 들였도다 이 사람들이 다 가이사의 명을 거역하여 말하되 다른 임금 곧 예수라 하는 이가 있다 하더이다 하니 8 무리와 읍장들이 이 말을 듣고 소동하여 9 야손과 그 나머지 사람들에게 보석금을 받고 놓아 주니라 10 밤에 형제들이 곧 바울과 실라를 베뢰아로 보내니 그들이 이르러 유대인의 회당에 들어가니라 11 베뢰아에 있는 사람들은 데살로니가에 있는 사람들보다 더 너그러워서 간절한 마음으로 말씀을 받고 이것이 그러한가 하여 날마다 성경을 상고하므로 12 그 중에 믿는 사람이 많고 또 헬라의 귀부인과 남자가 적지 아니하나 13 데살로니가에 있는 유대인들은 바울이 하나님의 말씀을 베뢰아에서도 전하는 줄을 알고 거기도 가서 무리를 움직여 소동하게 하거늘 14 형제들이 곧 바울을 내보내어 바다까지 가게 하되 실라와 디모데는 아직 거기 머물더라 15 바울을 인도하는 사람들이 그를 데리고 아덴까지 이르러 그에게서 실라와 디모데를 자기에게로 속히 오게 하라는 명령을 받고 떠나니라 16 바울이 아덴에서 그들을 기다리다가 그 성에 우상이 가득한 것을 보고 마음에 격분하여,

*답: 데살로니가와 베뢰아에서 유대인의 반대와 소동으로 형제들이 바울을 아데네로 보냈다. 거기서 바울이 그 성에 우상이 가득한 것을 보고 마음에 격분했다.

 

아테네는 "우상이 가득한" 도시였다(행 17:16). 바울은 끝없는 경고에도 불구하고 우상 숭배에 대해 보였던 유대인의 역사와 성향을 알고 있었기에 아테네에 가득한 우상들을 보며 화가 났을 것이다. 참 하나님을 알지 못한다면 죄로 인해 멸망하게 될 아테네 사람들을 향한 동정심이 바울의 동기가 되었음이 분명하다. 

아테네에서 바울이 본 것처럼 드러나 보이지는 않지만 오늘날 우리의 도시에는 여전히 우상이 가득하다. 그런데 많은 신자들은 우상에 대해 개의치 않고 도시에서 생활하고 있다. 그러나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은 바울은 이에 대해 매우 안타까워하였다. 복음이 온 세상을 위한 것이라는 사실을 이해하지 못한 다른 신자들과 달리, 바울은 하나님께서 아테네 시민들도 구원받기를 원하신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는 세계 선교의 개념이 우상을 숭배하는 이교도뿐만 아니라 아테네 거리를 가득 메운 철학자들을 포함하여 복음을 전혀 듣지 못한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것임을 이해했다.

그래서 바울은 이러한 사람들이 있는 광장을 자주 방문했다. 바울은 이 경험을 통해 이교도들의 마음과 생각에 다가갈 수 있는 방법을 연구하고 시험하기 위한 최초의 글로벌선교센터를 시작한 셈이다.

바울은 유대인이나 하나님을 경외하는 이방인에게 접근하는 것과 같은 방식으로는 아테네 사람들에게 다가갈 수 없다는 것을 알았다. 그들은 이스라엘의 하나님, 그리고 그분이 이스라엘 민족 가운데서 행하신 일이 자신과 관계가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었다. 유대인이나 하나님을 경외하는 이방인들에게 그렇게 중요한 하나님에 대한 개념과 믿음일지라도 아테네 광장에서 만난 사람들에게는 아무 의미가 없었다. 그러므로 완전히 새로운 접근 방식이 필요했다.

오늘날 우리는 '유대~기독교' 유산이라고 불리는 것과 전혀 공통점이 없는 배경을 가진 사람들에게 다가가려고 노력한다. 따라서 우리도 바울처럼 접근해야 한다. 예를 들자면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잘 통하는 접근 방식이 방콕에서는 쓸모없는 방식이 될 수도 있다.

 

<교훈> 바울은 전혀 복음이 전해지지 않은 아테네인들에게 복음을 전하고자 했다. 기독교 배경이 없는 그들에게 나갈 때 바울은 전혀 다른 방식으로 다가갔다. 

 

<부가설명> 고전 9장에는 바울이 대하는 상대에 따라서 복음 전하는 방법을 어떻게 적용했는지 기록되어 있다. 중국의 전략가 손무는 병법을 쓰면서 지피지기(知彼知己)면 백전백승(百戰百勝)이라고 썼다. 적을 알고 나를 알면 백번 싸워 다 이긴다는 말이다. 이것은 전도 전략에도 적용할 수 있는 말이다. 문제는 전도자가 자기를 너무 모른다는 사실이다. 바울은 자기가 믿는 것과 믿는 분 예수님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확신과 자신감으로 전파했다. 그런데 현금의 재림 성도들이 자기의 믿음과 믿는 분에 관하여 확신과 자신감으로 증거할 수 있는 상태에 있는지 자못 의심스럽다. 복음을 전할 사람들은 먼저 자기에게 복음을 확실하게 전해야 한다. 전할 내용을 올바르게 알아야 올바르게 전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날마다 말씀을 공부해야 한다. 다음으로 전할 대상을 바르게 알아야 한다. 그가 어떤 사람인지 무엇에 관심이 많은지 등등. 바울은 아테네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할 때 유대인의 회당에서 전하던 방법으로 하지 않았다. 그는 헬라 시인의 시를 인용하여 창조와 생명의 복음을 전했다. 화잇의 말대로 바울은 논리에는 논리로 철학에는 철학으로 복음을 전했다. 그러나 결과는 그리 좋은 편은 아니었다. 그들이 철학과 이론이라는 우상에 빠져있기 때문이었다. 결과는 성령님께 맡기고 바울은 성령께서 인도하시는 대로 최선을 다하여 복음을 설명했다. 우리도 이 모범을 깊이 생각하고 증거하는 자가 되면 좋지 않겠는가? 

 

12월 4일(월) 아레오바고의 바울

 

하나님으로부터 사명을 받은 바울은 어디에 있든 복음을 전하려고 했다. 그는 아테네에서 바로 그 일을 시도했다.

 

사도행전 17:18~21을 읽어 보라. 바울의 연설과 질문에 광장의 이교도들은 어떤 다양한 방식으로 반응하였는가?

[행17:18~21] 어떤 에피쿠로스와 스토아 철학자들도 바울과 쟁론할새 어떤 사람은 이르되 이 말쟁이가 무슨 말을 하고자 하느냐 하고 어떤 사람은 이르되 이방 신들을 전하는 사람인가보다 하니 이는 바울이 예수와 부활을 전하기 때문이러라 19 그를 붙들어 아레오바고로 가며 말하기를 네가 말하는 이 새로운 가르침이 무엇인지 우리가 알 수 있겠느냐 20 네가 어떤 이상한 것을 우리 귀에 들려 주니 그 무슨 뜻인지 알고자 하노라 하니 21 모든 아덴 사람과 거기서 나그네 된 외국인들이 가장 새로운 것을 말하고 듣는 것 이외에는 달리 시간을 쓰지 않음이더라.

*답: 말쟁이로 보고, 이방 신들을 전하는 사람으로도 보고 새로운 가르침으로도 여겼다.

 

“이방 신들을 전하는”(행 17:18) 이로 보였던 바울은 광장에 있던 사람들에게 깊은 인상을 준 것이 분명하다. 아테네 사람들은 법적, 종교적 문제를 다루는 그 도성의 아레오바고로 바울을 데려갔다. 그가 재판에 회부된 것은 아니었고, 다만 아테네 사람들이 바울과 그의 "새로운 교리"(행 17:19)를 함께 들어보려고 한 것이었다. 매우 이상해 보이는 가르침을 전하는 것 같았지만 바울의 언변, 열정 그리고 지성으로 보여준 웅변을 그저 무시할 수 없었다. 

사도행전 17:21은 아테네 사람들이 새로운 것에 대해 말하고 듣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고 말한다. 누가는 이 구절에서 아테네 사람들이 게으르다고 비난하고 있는 것인가? 아닐 것이다. 그보다는 그들이 숙련된 사상가이자 토론자라는 점을 지적하였을 것이다. 그리스인들은 소크라테스,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와 같은 철학자를 배출했고 그 영향력은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다. 아테네는 수세기 동안 지적, 철학적 사상의 중심지로 여겨져 왔다. 이 사상가들 중 일부는 무신론자가 아니었고 오늘날 우리가 무신론이라고 생각하는 의미에서의 무신론자는 더욱 아니었지만, 그들의 철학 사상의 대부분은 기독교의 가르침과 근본적으로 달랐다. 예를 들어 에피쿠로스 철학이나 스토아 철학에는 부활하신 메시아 같은 개념이 없었다.

바울은 가말리엘 밑에서 교육을 받으면서 얻은 그의 지식과 웅변술을 성령께서 아테네에서도 사용하실 수 있을 것으로 기대했다. 

"그의 청중 가운데 가장 슬기로운 사람들도 그의 정연한 논리를 듣고 놀랐다. 바울은 자신이 그들의 예술 작품, 문학 그리고 종교에 정통함을 나타내었다”(사도행적, 237). 그러나 실제로 성령께서 더 많이 사용하실 수 있었던 것은 바울이 아테네 거리에서 받은 교육이었다. 

 

<교훈> 바울의 가르침은 사람들을 아레오바고로 이끌었다. 그는 철학과 문화에 정통한 논리 정연한 이였지만 그보다 아테네 거리에서 파악한 내용이 더 유익했다. 

 

<부가설명> 아테네는 오늘날 서양철학의 발상지라고 볼 수 있다. 누가가 기록한 아테네 거리 풍경은 라파엘이 그린 아테네 학당을 연상하게 한다. 그들은 토론하기를 좋아했고 자기들의 지식을 과시하는 경향이 강하였던 것 같다. 그런데 바울은 그들이 상상도 못했던 죽은 자의 부활을 말하니 그들은 놀랄 수밖에 없었다. 그들이 만일 소크라테스나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의 사상을 받았다면 영혼불멸설을 믿고 있었을 것이다. 소크라테스는 죽음을 영혼이 육체의 감옥에서 해방되는 것으로 가르쳤기 때문이다. 그런데 죽은 사람이 같은 인격으로 부활한다는 것은 그들에게는 생소하고 불가능한 것을 말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그들은 아레오바고로 바울을 데리고 가서 대중에게 강연할 시간을 줬다. 거기서 바울은 부활과 창조 등 만고의 확실한 진리를 정연한 논리로 증거 했다. 그는 헬라 시인의 싯구를 인용하면서 창조주 하나님을 알아듣게 말했고 예수님의 부활과 심판에 관한 기별도 한꺼번에 다 증거했다. 오늘날 우리도 기회가 주어질 때 성경의 복음 진리를 성경대로 질서 정연하게 증거할 수 있도록 자신을 준비해야 할 것이다. 바울의 이 강연으로 얻는 신도는 몇 되지 않았다. 아테네의 경험 후 바울이 고린도 교인에게 "예수 그리스도와 그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고전 2:2)다고 쓴 이유가 복음은 인간의 방법이 아니라 오직 성령의 능력으로 된다는 것을 깊이 깨달았던 것같다.

 

12월 5일(화) 바울과 “알 수 없는 신”

 

바울이 아테네 사람들의 거짓 종교나 거짓 신을 폄하하지 않았다는 점을 주목하라. 바울은 그가 찾을 수 있는 좋은 점이 있다면 아무리 작아도 그것을 찾아내어 활용했다.

 

사도행전 17:22, 23을 읽어 보라. 바울은 이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 무엇을 말하고 있는가?

[행17:22,23] 바울이 아레오바고 가운데 서서 말하되 아덴 사람들아 너희를 보니 범사에 종교심이 많도다 23 내가 두루 다니며 너희가 위하는 것들을 보다가 알지 못하는 신에게라고 새긴 단도 보았으니 그런즉 너희가 알지 못하고 위하는 그것을 내가 너희에게 알게 하리라.

*답: 온 거리에 있는 우상들과 신전을 보고 또 알지 못하는 신이라는 말을 인용하여 창조와 생명의 주님이신 하나님과 예수님을 증거했다.

 

"아덴 사람들아 너희를 보니 범사에 종교심이 많도다"(행 17:22). 바울은 이교도들을 칭찬하고 있다. 그들의 종교는 모든 면에서 잘못되었지만 바울은 그들의 열심을 칭찬했다. 

바울은 "이곳 저곳을 돌아다니면서 여러분이 섬기는 것들을 자세히"(행 17:23, 쉬운) 보았다고 했다. 바울은 아테네 종교에 대해 자신이 살펴본 것을 말하면서 존중하는 태도로 그들에게 다가갔다. 그는 사람들이 어떻게 변해야 하는지에 대하여 모든 답을 가지고 있는 것처럼 말하는 오늘날의 전문가들처럼 서두르지 않았다. 실상 바울은 전문가였고 이들이 정말 필요로 하는 답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을 그렇게 나타내지 않았다. 그렇게 했더라면 완전히 거부당했을 것이지만 반대로 바울은 아테네 사람들을 배려하고 그들의 유익을 바라는 사람으로 여겨졌다.

"알 수 없는 신에게"(행 17:23)라고 새겨진 제단에 대해 언급하면서 바울은 아테네인과 자신의 공통점으로 보이는 점을 활용했다. 신의 존재를 부정하는 이들과 달리 그들 중 많은 이들이 신을 믿었고 이것은 더 깊은 대화로 나갈 수 있는 좋은 시작점이었다. 그는 알 수 없는 신을 위한 제단이라는 어처구니없고 부정적인 현실에 대해 비웃지 않았다. 대신, 그들이 혹시라도 빠트리지 않기 위해서 알지 못하는 신에게까지 노력과 비용을 들여 숭배할 만큼 영적인 것에 관심을 기울이는 사람들이라고 높이 평가하며 존중하는 모습을 보였다. 

그들이 잘못된 길을 걸은 것은 분명하지만 그것은 해결될 수 있는 문제이다. 그보다 중요한 점은 그들이 이해하는 것과 자신이 믿는 것에 대해 독실했다는 것이다. 바울은 그것이 성령께서 역사하실 수 있는 중요한 부분이라고 여겼다. 

바울은 그들의 관심을 끌 만한 접점을 찾았다. 

 

<교훈> 바울은 아덴 사람들의 상황 속에서 좋은 점을 발견하여 접촉점으로 삼았다. 그의 존중하는 태도로 그는 아덴 사람의 유익을 위하는 사람으로 여겨졌다. 

 

<부가설명> 예수 믿는 사람들은 때로 다른 종교를 무시하는 태도를 보이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그런 자세는 복음을 전하는데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 바울은 아테네 사람들의 유익을 생각함으로 그들의 이상한 점도 좋은 점으로 볼 수 있었다. 우리는 어떤 시선으로 타 종교를 보고 있는지 심각하게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그렇다고 그들이 종교가 옳다고 인정하라는 것은 아니다. 그들의 종교심을 칭찬하고 그 종교심을 바른 진리 위에 세우도록 유도하는 전도법을 사용해야 한다고 바울은 본을 통하여 가르치고 있다. 우리는 이 본을 잘 따를 필요가 있다. 또 대화할 때 그들이 말하는 그들의 신앙과 교리를 알아듣고 동의할 것은 동의하며 그들의 주장을 이해하고 성경의 진리를 증거하는 지혜를 성령님께 간구해야 할 것이다. 바울은 헬라 시인의 시까지 인용하여 창조주 하나님을 증거했다. 이것이 복음을 그들에게 증거할 수 있는 연결고리 역할을 했다. 그들의 종교와 우상도 역시 연결고리로 사용했다. 이런 지혜를 얻는 것은 중요한 것이다.

 

12월 6일(수) 전혀 다른 하나님을 소개함

 

아테네의 사상가들의 관심을 끈 바울은 이제 청중에게 하늘의 하나님을 소개한다. 

 

사도행전 17:24~27을 읽어 보라. 이 사람들에게 다가가기 위해 바울은 어떤 접근 방식을 취하고 있는가?

[행17:24~27] 우주와 그 가운데 있는 만물을 지으신 하나님께서는 천지의 주재시니 손으로 지은 전에 계시지 아니하시고 25 또 무엇이 부족한 것처럼 사람의 손으로 섬김을 받으시는 것이 아니니 이는 만민에게 생명과 호흡과 만물을 친히 주시는 이심이라 26 인류의 모든 족속을 한 혈통으로 만드사 온 땅에 살게 하시고 그들의 연대를 정하시며 거주의 경계를 한정하셨으니 27 이는 사람으로 혹 하나님을 더듬어 찾아 발견하게 하려 하심이로되 그는 우리 각 사람에게서 멀리 계시지 아니하도다.

*답: 바울은 점진적으로 성경의 하나님 창조주께로 그들의 관심을 유도했다. 그리고 모든 것을 창조하시고 모든 필요를 공급하시는 하나님, 사람의 손으로 섬김 받으시는 신이 아닌 사람들에게 모든 것을 친히 주시는 하나님을 소개했다. 

 

알 수 없는 신에게까지 제단을 쌓을 정도로 영적인 것을 중요하게 여겼던 사람들에게 바울의 말은 흥미로웠다. 창조주 하나님은 사람의 손으로 지은 전에 계시지 않고 인간에게 무언가를 요구하지 않으시며 대신 인간의 필요를 공급하신다는 것이었다. 신들은 예측할 수 없고 자기중심적이며 잔혹한 존재로 묘사하는 그리스 신관에 젖어 있던 문화에서 바울이 말한 것 같은 신의 존재는 놀랍도록 흥미로운 관점이었다. 그렇게 아레오바고에 있던 사람들은 사랑의 하나님을 향해 첫 걸음을 내디뎠다. 

무엇보다 놀라운 사실은 그들이 몰랐던 신을 알 수 있다는 것이다. 실제로 하나님도 자신을 보여주기를 원하신다.

바울은 누가가 기록한 것보다 더 많은 이야기를 아레오바고에서 했을 것이다. 지면 관계상 그 연설이 요약되었겠지만 아마 지금까지 우리가 살펴본 각각의 개념들에 대해 바울은 더 자세히 설명했을 것이다. 바울의 연설을 개념별로 분류해 보자. 

1. 바울은 먼저 그들이 지금 가지고 있는 영적 인식과 성실함을 칭찬했다.

2. 다음으로 바울은 자신이 그들의 믿음을 연구했으며 그것을 통해 발견한 것을 존중하는 모습을 보였다.

3. 그다음 바울은 그들의 종교를 연구하면서 발견한 그들이 알지 못한다고 말한 특별한 사실에 대해 이야기 했다. 

4. 그 후, 그는 그들에게 절실히 필요한 하나님의 모습, 즉 존재하시며 그들을 사랑하시고 멀리 계시지 않은 하나님의 모솝을 나누었다.

5. 마지막으로, 바울은 그들이 아직 알지 못하는 이 하나님에 대한 지식을 거부하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경고하며 웅변을 마쳤다.

그들이 믿는 것에 대해 자신이 알고 있는 것을 바탕으로 바울은 그들을 최대한 하나님께 가까이 데려갔다. 그 정도까지 전할 수 있었다면 바울은 많은 성과를 거둔 것이다.

 

<교훈> 아덴 사람들을 잘 파악한 바울은 그들에게 필요한 새로운 하나님의 모습을 제시하여 그들을 최대한 하나님께 가까이 나오도록 인도하였다. 

 

<부가설명> 대부분의 종교인들이 이미 있는 세계가 창조주가 창조하셨다는 생각을 하지 않는 것 같다. 그것은 그냥 있는 것이라는 생각을 하는 것같다. 그래서 자연(自然)이라고 부른다. 이 말은 스스로 있다는 뜻이다. 스스로 있는 분은 성경의 하나님 여호와뿐이시다. 여호와는 그 뜻이 ‘스스로 있는 분’이라는 말이다. 나는 어떤 공학한 분과 이야기하면서 자연과학자들이 성경의 하나님의 이름을 가장 많이 부르는 사람이라고 말했다. 그것은 자연이라는 말을 할 때마다 성경의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는 것이다. 그들이 모를 뿐이다. 바울은 이점을 그 철학자들에게 분명히 밝혔다. 우주와 그 가운데 만물을 지으신 분이 바로 성경의 하나님이라고 선포한 것이다. 그분은 창조하셨을 뿐만 아니라 모든 피조물들을 돌보시는 분이라고 강조했다. 그분은 생명과 호흡과 만물을 친히 주시는 분임을 강조하고 그분은 모든 인류를 한 혈통으로 지으신 분이기 때문에 모든 인류의 조상이라고 주장하고 그러므로 그분은 인간 족보의 맨 꼭대기에 계셔서 그분으로부터 지금 우리가 있다고 설명해서 생명과 존재를 주신 분으로 내가 있다는 것은 그분이 바로 나와함께 계시는 것과 같다는 말로 27절을 맺었다. 

 

12월 7일(목) 반응이 엇갈리는 지점 

 

사도행전 17:24~34을 읽어 보라. 바울은 그의 증언을 어떻게 이어가는가?

[행17:24~34] 우주와 그 가운데 있는 만물을 지으신 하나님께서는 천지의 주재시니 손으로 지은 전에 계시지 아니하시고 25 또 무엇이 부족한 것처럼 사람의 손으로 섬김을 받으시는 것이 아니니 이는 만민에게 생명과 호흡과 만물을 친히 주시는 이심이라 26 인류의 모든 족속을 한 혈통으로 만드사 온 땅에 살게 하시고 그들의 연대를 정하시며 거주의 경계를 한정하셨으니 27 이는 사람으로 혹 하나님을 더듬어 찾아 발견하게 하려 하심이로되 그는 우리 각 사람에게서 멀리 계시지 아니하도다 28 우리가 그를 힘입어 살며 기동하며 존재하느니라 너희 시인 중 어떤 사람들의 말과 같이 우리가 그의 소생이라 하니 29 이와 같이 하나님의 소생이 되었은즉 하나님을 금이나 은이나 돌에다 사람의 기술과 고안으로 새긴 것들과 같이 여길 것이 아니니라 30 알지 못하던 시대에는 하나님이 간과하셨거니와 이제는 어디든지 사람에게 다 명하사 회개하라 하셨으니 31 이는 정하신 사람으로 하여금 천하를 공의로 심판할 날을 작정하시고 이에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신 것으로 모든 사람에게 믿을 만한 증거를 주셨음이니라 하니라 32 그들이 죽은 자의 부활을 듣고 어떤 사람은 조롱도 하고 어떤 사람은 이 일에 대하여 네 말을 다시 듣겠다 하니 33 이에 바울이 그들 가운데서 떠나매 34 몇 사람이 그를 가까이하여 믿으니 그 중에는 아레오바고 관리 디오누시오와 다마리라 하는 여자와 또 다른 사람들도 있었더라.

*답: 그는 창조주 하나님을 소개하고 사람들은 그분을 힘입어 살며 존재하고 활동한다고 주장한 후에 그런 하나님은 금속이나 돌을 사람의 기술로 조각하여 만드는 그런 신이 아니라고 강하게 말하고 또 그분은 사람들을 심판하시는데 부활하신 예수님의 부활의 증거로 심판하실 것이라고 선포하고 끝맺었다.

 

바울이 성경 진리에 매우 근접한 그들의 시인의 글을 실제로 인용했다는 점도 흥미롭다. 그것을 사용하여 바울은 청중들이 더 친숙하게 진리 가까이에 나올 기회를 마련했다. 즉, 바울은 아테네 사람들이 한걸음 더 내딛을 수 있도록 이미 그들의 신앙에서 친숙한 부분을 활용한 것이다. 누군가에게 다가갈 때 그들에게 친숙한 것 중에서 공통점을 찾는 것은 의문의 여지 없는 그들에게 다가갈 수 있는 효과적인 방법이다. 

바울은 아테네 사람들과의 공통점을 바탕으로 자신이 이끌고자 했던 곳, 즉 예수님의 부활과 그 부활이 그들 모두에게 주는 소망으로 이끌었다. 누가는 부활에 대한 바울의 결론에 사람들이 어떻게 반응했는지를 기록했다. 어떤 이들은 비웃었다. 다른 이들은 이 문제에 대해 바울의 말을 다시 듣고 싶다고 했고, 그것을 믿는 사람도 있었다. 이 이야기에서 우리가 주목할 것은 반응이 어떻든 그들 모두가 바울의 말을 들었다는 사실이다. 그것이야말로 바울이 처음부터 바라던 것이었다. 

그중에서 어떤 사람들은 복음을 거부하겠지만 그 전에 적어도 그들이 무엇을 거부하고 있는지를 이해할 수 있도록 가능한 모든 것을 해야 한다. 아테네 사람들에게 다가가고 그들에 대해 연구하고 배운 것을 잘 활용해 바울은 그들이 알지 못했던, 그러나 그들을 창조하신 하나님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열린 마음으로 들을 수 있도록 확실하게 증거했다. 하나님은 아테네 사람들을 사랑하셨고 그들이 당신에 대해 알기를 원하셨다. 그들의 무지에도 불구하고 그분은 그들에게 자비를 베푸셨다. 하지만 심판의 날이 다가오고 있다. 이 모든 것이 정말 너무 믿기 어려운 일처럼 들릴지라도 그리스도의 부활안에 그 모든 것을 확증하는 증거가 있다. 

이제 아테네 사람들은 실제로 기별을 듣고 이해했기 때문에 이 기별을 완전히 거부할지 아니면 더 살펴볼 것인지 스스로 선택해야 했다. 어떤 사람들은 복음을 더 살펴보고 예수를 따르게 되었다(행 17:34).

 

<교훈> 바울은 아덴 사람들에게 친숙하게 다가갔지만 그 중에도 복음이 무엇이며 그 가치는 어떤 것인지를 분명하게 전하여 그들이 바르게 선택할 수 있게 도왔다. 

 

<부가설명> 사람들은 분별력을 가진 존재다. 바울의 강연을 들은 후에는 들은 사람들이 그 기별을 분별해야 한다. 바르게 깨달으면 창조주께로 돌아올 것이고 깨닫기를 거절하면 심판 때 정죄를 자초한다. 복음을 거절하면 정죄를 자초하는 것이고 그것이 이미 심판을 받은 것이나 다를 것이 없다. “저를 믿는 자는 심판을 받지 아니하는 것이요 믿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의 독생자의 이름을 믿지 아니하므로 벌써 심판을 받은 것이니라 그 정죄는 이것이니 곧 빛이 세상에 왔으되 사람들이 자기 행위가 악하므로 빛보다 어두움을 더 사랑한 것이니라”(요3:18,19). 심판은 멀리 있지 않다. 날마다 자기 생활이 자기를 심판하는 생활이다. 성도들은 이 진실을 깨달으면 좋을 것이다. 그 심판은 예수님의 부활로 확증된다. 왜냐하면, 사망이 사람들의 끝이 아니고 부활로 영원한 생명을 확증하시고 그분이 생명 자체심을 증명하셨기 때문이다.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그분이 참으로 부활하셨다는 것을 믿는 것이고 그것을 믿지 않으면 교회 다녀도 예수님을 믿지 않는 것이다. 그래서 심판의 핵심은 이 진리를 믿고 영원한 생명을 얻었느냐 아직도 생명을 부인하느냐 하는 것을 가리는 것이다. 

 

12월 8일(금) 더 깊은 연구를 위하여

 

바울이 아레오바고에서 경험한 이야기에서 얻는 주요 시사점은 전도 받지 않은 불신자 그룹에 어떻게 접근해야 하는지에 대한 현장 연구의 중요성과 그 결과 아테네에서 소수의 신자 모임이 시작되었다는 점이다.

“영감의 붓으로 기록된 사도의 말과 그의 태도와 그가 처했던 환경에 대한 묘사는 앞으로 오는 모든 세대에 전달되어 고독과 역경 속에서도 흔들리지 않는 그의 확신과 용기, 그리고 그가 이교의 심장부에서 기독교를 위하여 얻은 승리를 증거해야 하였다.

바울의 말에는 교회를 위한 지식의 보배가 담겨 있다. 바울은 그의 말로 교만한 청중들의 분노를 일으켜 자신에게 어려움을 초래하기 쉬운 위치에 있었다. 만일 그의 설교가 직접적으로 그들의 신들과 그 도시의 위인들을 공격하였더라면 그도 소크라테스와 같은 운명을 맞을 위험에 처했을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랑을 통하여 얻은 감각을 가지고 그는 그들이 알지 못한 참 하나님을 나타냄으로써 그들의 마음을 조심스럽게 이교의 신들로부터 돌아서게 하였다"(사도행적, 240).

바울은 사람들과 직접 접촉하고, 그들의 문화와 종교를 연구하고, 영적인 것에 대한 그들의 열심을 존중함으로써 아테네에서 주목할 만한 일, 즉 교회를 위한 귀한 지식의 보화가 될 일을 해냈다. 그는 청중을 자극하지 않았다. 이것은 그 자체로 하나님의 영감을 따른 중요한 성취였다. 엘렌 화잇에 따르면 이것이 바로 이 이야기에서 교회가 주목해야 할 지식의 보화이다.

 

토의를 위한 질문

1. 아테네에서 바울의 이야기를 모델로 삼아 한 도시에서 새로운 복음 전도 활동을 시작하는 사람이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무엇이겠는가?

*답: 주민들을 자극하지 않는 방법으로 접근하는 지혜를 익히는 것이다. 

2. 하나님을 모르는 도시나 다른 모든 지역에서 사람들과 가교 놓기를 원하는 그리스도인에게는 어떤 행동이 필요한가?

*답: 그들의 현재 사정을 좋게 인정하면서 그들 삶 속에서 연결점을 발견하여 활용하는 것이다.

3. 현대 우상들의 도전을 마주할 때, 특히 그런 우상을 숭배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새로운 일을 시작할 때 당신이 하지 말하야 할 행동은 무엇인가?

*답: 그들을 무시하거나 자극하는 일을 하지 않아야 한다. 

4. 아테네 사람들은 바울이 그들을 사랑하시는 하나님을 소개하는 것으로 끝낼 수 있었다면 매우 만족했을 것이다. 그러나 바울이 이어서 부활에 대해 말했을 때에 아테네 사람들은 그가 미혹되었다고 생각했다. 바울은 그렇게 했어야만 했는가? 어떻게 하는 것이 좋았겠는지 토의해 보라. 

*답: 부활의 기별이 빠지면 복음 전파가 아니다.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


대총회 북아태지회 한국연합회 성경통신학교
제칠일안식일예수재림교 한국연합회 선교부 | 고유번호증번호: 204-82-62040 | 대표자: 강순기 | 부서장: 신광철
Copyright © 2014 안식일학교·선교부 All rights reserved.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