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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기 제3과-선교를 향한 하나님의 부르심-(교사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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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이봉주 작성일23-10-18 11:35 조회589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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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과 선교(宣敎)를 향(向)한 하나님의 부르심

                                        (10월 21일 (안) / 일몰: 오후 5시 48분)

 

<기억절(記憶節)>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행 1:8)

 

<요점(要點)>

⑴.하나님은 선교를 위해서 사람을 부르셔서(통해서) 사용하십니다.

⑵.자신만의 안주(安住)(안락(安樂))한 지대(地帶)에서 편하고 친숙한 삶의 영역에서 불러내시어 변화를 주시어 선교(宣敎)를 하도록 사용하십니다.

⑶.흩어지게 하는 도구(상황)로 박해(迫害)나 고통(苦痛)과 불행(不幸)한 사건이 오히려 훑어져서 세계복음화(世界福音化)의 계기(契機)가 되었다.

⑷.예수 님께서도 우리가 예루살렘에와 유대에서 시작하여 사마리아와 땅끝까지 복음을 전(傳)하기를 원(願)하셨다.

(例) <바벨탑 건설의 목적을 반대로 역사하심, 아브라함의 경우, 마가의 다락방 경험,>

 

10월 15일(일) 나의 경계를 넘어 하나님께서 가라시는 곳으로  

 

(Q)~ 바벨탑 이야기에서 얻은 교훈(敎訓)은 무엇이며, 하나님께서는 왜 그것을 막으셨는가? (창세기 11:1~9)

 

(A)¹~<바벨탑 정신>

⑴.바벨탑 건설자들은 그들의 공동 사회를 한 단체로 연합시켜서 결국 온 세계를 포함할 한 왕국(王國)을 세우기로 하였다.

⑵.“바벨탑 건설자들은 하나님께 대한 불평(不平)의 정신에 빠졌다. 

   그들은 최초의 부부(夫婦)를 에덴에서 추방(追放)하시고 세계를 홍수(洪水)로 멸망(滅亡)시킨 하나님의 가혹(苛酷)하심에 대하여 불평(不平)하였다

⑶.“바벨탑 건설자들의 계획은 수치(羞恥)와 패배(敗北)로 끝났다. 

   그들의 교만(驕慢)의 기념비는 그들의 어리석음의 기념비(記念碑)가 되었다. 

⑷.“바벨 사람들은 하나님에게서 독립(獨立)된 정부(政府)를 세우기로 하였었다. 

   그들 중에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들도 있었으나 그들은 불신자(不信者)들의 주장에 속아 그들의 술책(術策)에 말려든 사람들도 있었다.

⑸.그들은 하나님의 주권(主權)이나 영광(榮光)을 인정하지 않고 자신들을 높이고자 왕국을 건설(建設)하려고 하였다

⑹.바벨탑은 그 건축자들의 우월(優越)한 지혜와 기술(技術)에 대한 하나의 기념비가 될 것이었다. 

   그들의 이름, 곧 명성(名聲)을 내기 위해서 사람들은 스스로 어려움과 위험과 궁핍(窮乏)을 기꺼이 견딘다.

⑺.성경은 바벨론의 시작을 하나님을 대적(對敵)하여 반란(叛亂)을 일으킨 한 도시(都市)로서 묘사(描寫)하고 있다. 

⑻.바벨은 자기 행위(行爲)와 계획(計劃)으로 구원(救援)받고자 한 원리(原理)에 따라 처음부터 하나님의 뜻을 배척(排斥)하였다. (救援의 兵車 104)

 

(A)²~ <하나님께서 원(願)하심은>

①.이기적(利己的)인 이유로 뭉치는 것은 (바벨 정신은) 결국 멸망을 초래하기 때문에

②.구원(救援)의 광선(光線)을 세상 끝까지 확산(擴散)시키기 위해서 흩어지게 하심.

③.하나님을 대적하려는 계획을 버리고 하나님의 사랑으로 행복을 누리게 하려고

④.안주(安住)하는 삶의 추구(追求)로 하나님께 떨어져 나감을 방지(防止)코자

⑤.결국, 그들의 노력은 얼마나 헛되고 무의미 한 짓이라는 것을 알도록 (전 2:1~11절) 

⑥.하나님께서는 그러한 삶을 넘어온 세상에 흩어져 선교(宣敎)의 삶의 자리로 나아가기를 원하신다.

⑦.하나님께서는 그들의 의도가 순수하지 않고 이기심으로 가득 차 있음을 아셨습니다.

 

10월 16일(월) 온 세상에 축복(祝福)이 되는 삶 

 

(Q)~하나님은 온 세상에 복된 삶을 위해 아브람을 어떻게 부르셨으며 아브라함은 어떻게 순종하였는가?

 

(A)~<아브람 ☞ 아브라함>

⑴.믿음의 사람이었다. (약 2:23; 창 15:9; 창 15:6; 롬 4:11)

⑵.하나님께서 명(命)하시면 그 약속을 믿고 갔다. (창 12:1~5절)

⑶.하나님의 약속을 굳게 믿었다. (창 15:6절)

⑷.“아브라함이 바랄 수 없는 중에 바라고 믿었으니.”(롬 4:18)

⑸.순종의 사람 아브라함(히11:8)

⑹.명(命)하는 대로 곧 행하는 사람(요15:14)

⑺.하나님께서도 감동한 사람 (창 22:1~18절)→

⑻.아브라함으로 말미암아 천하만민이 복음 얻으리라(창 22:18 절)

⑼.순종은 큰 복과 선교의 통로가 된다. (창 12:1~3절)

 

10월 17일(화) 아브라함의 부르심 

 

(Q)~아브라함을 부르셨지만, 그는 잘못과 실수(失手)에도 하나님께서 여전히 사랑하시고 사용하셨다. 어떤 잘못과 실수를 경험(經驗)했는가? 그럼에도 여전히 믿고 사용하시는 하나님은 부족한 나도 선교(宣敎) 함께 하도록 어떻게 용기(勇氣)와 결심(決心)을 할 수 있을까? (창 12:10~13:1절)

 

(A)¹~<아브라함의 실수(失手)>

⑴.축복의 땅을 떠나 애굽으로 내려갔습니다. (창 12:10)

⑵.사람을 두려워하여 거짓말을 했습니다(창 12:11~13)

⑶.애굽(이방(異邦)에 내려갔다. (창 12:10)

 

⑷.애굽(이방(異邦)에 내려와서는 여호와를 위하여 제단(祭壇)을 쌓지 않았습니다.

⑸.후사(後嗣)에 대해서 인내치 못해서였습니다.

  (창 15장에 허락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창 16장)에 하갈을 취하여 인간의 방법으로 후사(後嗣)를 취하고자 함.

 

(A)².<아브라함의 시험(試驗)>

⑴.너의 친척 아비 집을 떠나라(창 12:1)

⑵.롯에게 슬픔을 당하는 시험 (창 13:1~11)→모든 권리를 양보하고 떠났다(창 13:8~9)

⑶.신앙의 용기가 있느냐 하는 시험. (창 14:1~16)

⑷.세상 부귀영화(富貴榮華)의 시험. (창 14:21~23)

⑸.독자(獨子) 이삭에 대한 시험. (창 22:1~19)

 

(A)³~<아브라함으로 본 영적교훈(靈的敎訓)>

⑴.위대한 믿음의 사람이라도 넘어질 수 있다는 것이다. 

믿음의 사람이라도 순간적인 판단 미숙으로 인하여 실수하고 넘어지며 심지어 비굴한 사람도 될 수 있다는 것이다. 

⑵.하나님의 약속(말씀)이 없는 곳에는 사탄의 약탈이 있다는 것이다. 

⑶.하나님 없이 고안해 낸 인간의 잔꾀는 자신에게 비굴함과 수치(羞恥)와 모멸감만 안겨 준다는 것이다. 

⑷.약속의 땅에도 가끔 기근(饑饉)이 찾아올 수 있다는 것이다. 

  사실 천국 이외에 그 어떤 장소에도 안전한 곳이란 없다. 

  참된 만족(滿足)과 안정(安定)과 안식(安息)이 있는 곳은 오직 천국뿐이기 때문이다. 

⑸.하나님의 사람은 언제나 약속의 땅 곧 하나님의 말씀 안에 머물러야 한다는 것이다.

⑹.하나님께 묻지 않고 행한 일의 결과는 두고두고 화근(禍根)이 된다는 것이다. 

⑺.아브라함은 믿음도 있는 사람이었지만 모든 사람과 같은 성정(性情)을 가진 사람으로 시험(試驗)과 실수(失手)를 경험(經驗)했다. 그럼에도 하나님께서는 자복(自服)하고 회개(悔改)하고 믿음으로 하나님께 제단(祭壇)을 쌓는 자들에게는 복(福)의 통로(通路)요 구원(救援)의 도구(道具)로 선교(宣敎)에 함께하기를 원(願)하신다.

 

10월 18일(수) 초대교회(初代敎會)와 안주지대(安住地帶)(안락(安樂) 

 

(Q)~초대교회(初代敎會)와 제자(弟子)들은 안주지대(安住地帶)에서 유대인 외(外)에는 복음을 전(傳)하려 하지 않는 선민사상(選民思想)이 깨어진 계기(契機)와 베드로에게 주신 기별은 무엇이며 우리는 이 원리(原理)를 선교 사역(宣敎使役)에 어떻게 적용(適用)하여야 하는가? (행전8:1~4; 행전 10:9~15절 28~29절)

 

(A)~<흩어진 계기(契機)>

⑴.독실(篤實)한 유대인이자 바리새인이었던 사울의 적극적(積極的)인 개입(介入)으로 박해(迫害)가 시작되자 예루살렘에 있던 교회는 유대와 사마리아 전역(全域)으로 흩어졌다. 

⑵.앉은뱅이를 고친 후 (행전 3:10절 행22:4; 26:10, 11) 핍박(逼迫)이 임함

⑶.예수의 부활을 전(傳)하니 핍박(逼迫)(행 4:1~7)

⑷.복음 증거(證據)와 전도(傳導)로 핍박(逼迫)

⑸.스데반의 순교(殉敎) 여파

⑹.교회와 교인에 임(臨)한 박해(迫害)

<1. 박해(迫害)의 대상(對象)>

   (박해(迫害)는 "예루살렘에 있는 교회"를 향해서였다. 그곳에 교회가 뿌리를 내리자마자 박해가 시작되었다.)

<2. 박해(迫害)에 주동적(主動的)인 인물(人物)>

   (그는 젊은 바리새인 사울로서 열심이나 그 정도에 있어 아무도 그를 따를 수 없었다.)

  (1) 그는 각 집에 들어갔다. 

   (그는 밤과 낮을 막론하고 아무런 장애 없이 주택을 수색하였고 이 목적을 위하여 군대를 대동하였다.)

  (2) 그는 가장 무자비(無慈悲)하고도 경멸(輕蔑)하듯이 남녀들을 거리로 끌어냈다.

  (3) 그는 그들을 감옥(監獄)에 넣었다. 

  (그것은 그들이 그리스도를 배반(背叛)하지 않는 한 고문(拷問)을 당하다가 죽게 하기 위해서였다.)

<3. 이 박해(迫害)의 결과(結果)>

"그들이 모든 땅으로 흩어졌다." (행전8:1절). 모든 신자뿐만 아니라 모든 전도자(傳道者)들이 흩어졌고 이들 전도자들이 타격(打擊)을 제일 많이 받았다. 

그리고 이들에 대하여 그들을 체포(逮捕)해 들이도록 영장이 발부되었다. 그들은 우리 주님이 가르친 법칙을 기억하고("그들이 너희를 박해하면 다른 곳으로 가라") 서로 합의(合意)하여 "유대와 사마리아 모든 땅으로" 흩어졌다. 

⑺.초대교회(初代敎會)와 제자(弟子)들은 유대인 외에 이방인(異邦人)들에게 복음을 전(傳)하려 하지 않았으나 하나님은 섭리(攝理)를 통해 그들을 밖으로 나가게 하시고 선교(宣敎)의 안목(眼目)을 넓혀 주셨다.

 

⑻.초기의 베드로는 이방인(異邦人)들과 함께 있는 모습을 보이는 것조차 꺼렸다(갈 2:11, 12).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베드로를 자신의 안주지대에서 나오게 하셨고 그의 마음을 바꾸셨다. 그는 복음 전파의 사명이 실제로 무엇을 수반하는지, 예수 님의 죽음이 온 세상을 위해 무엇을 이루시는 것인지 배우기 시작했다. 

 

10월 19일(목) 내가 있는 곳에서 시작(始作)하기 

 

(Q)~예수 님은 세상을 향(向)한 그분의 증인(證人)이 되거나 나눔을 실천(實踐)하기 위한 어떤 원칙(原則)을 제시(提示)하셨는가? (행전1:8)

 

(A)~<예수 님의 증인(證人)이 되는 원칙(原則)>

⑴.값진 선물 성령(聖靈)을 받으라. (행전1:8)

⑵.성령(聖靈)은 곧 그분(예수님)의 대리자(代理者)(행전1:8)

⑶.권능(權能). <헬라어 뒤나 미스(dunamis), “힘”, “수완”, “능력” 영어 단어 “dynamite”(폭약)는 뒤나 미스에서 유래한다.> 

⑷.이 능력은 증거를 위한 것이다. 이것은 

①.내적(內的)인 능력(能力)과, 

②.복음을 전파(傳播)하기 위한 능력(能力)과, 

③.다른 사람들을 하나님께로 이끄는 능력(能力)을 준다.

⑸.성령이 주는 이 증거는 기독 교회(基督敎會)의 특징적(特徵的)인 표지가 될 것이었다.

⑹.예수 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선교(宣敎) 즉 전도(傳道)는 내가 속해 있는 가까운 곳에서부터 시작한 이후에 복음을 모르는 곳 먼 곳까지 나아가 전파하는 것이 선교의 원칙으로 제시해 주십니다. (아멘)

 

<정리(定理)>

1. 하나님께서 우리를 향하여 부르심은 같은 끼리끼리의 생활에서 안주(安住)하지 말고 흩어져 땅끝까지 나아가라 하심.

2. 우리와 같은 성정을 같이 아브라함을 부르시어 복에 통로가 되게 하심은 그의 믿음을 사용하셨으며

3. 초대 교회와 교인들이 안주지대에서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끝까지 복음을 전하게 된 배경을 깊이 교훈으로 삼되 특히 가장 중요한 사항은 성령의 임재와 충만함으로 사역하시되 나 있는 곳에서부터 점점 지경을 넓혀 땅끝까지 이르라 하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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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미부록(末尾附錄)>**************

<(바벨탑)>

⑴.

<(창 11:2) 다시 갖게 된 인간의 적의(敵意)>

사람들이 다시 땅에 거주하기 시작하자 곧 사람들은 하나님과 하늘에 대한 적개심을 다시 갖게 되었다. 그들은 백성들을 오도하는 사람들의 간교한 꾀와 책략이 거룩한 유산이라도 되는 것처럼, 그들의 적개심을 후손들에게 물려 주었다(편지 4, 1896).

 

<(창 11:3) 연합(聯合)으로 인하여 반역(叛逆)이 생김>

이 연합은 하나님을 향한 반역을 가져왔다. 

시날 평지의 거민들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가 아니라 자신들을 높이기 위하여 그들의 왕국을 건설하였다. 만약 그들이 성공했더라면 의를 추방하고 새로운 종교를 등장시키는 데에 막강한 힘을 발휘했을 것이며, 세상은 도덕이 없는 곳이 되었을 것이다. 그릇된 이론들을 가진 종교적 관념들의 혼합은 결과적으로 평화와 행복과 안전으로 가는 문을 닫았을 것이다. 이 가설들과 그릇된 이론들이 완성되어 실천에 옮겨졌더라면 사람들의 마음은 하나님의 율법에 충성하려는 데서 돌이키고 여호와의 율법은 무시되고 잊힌 바 되었을 것이다(리뷰 1903. 12. 10).

 

<(창 11:4) 자, 성(城)과…쌓아. >

하나님의 원래 계획은 사람들이 지면에 퍼져 땅을 경작하도록 하는 것이었다(참조 1:28). 

성들을 건축하는 것은 이 계획에 대한 반대를 드러낸 것이다. 

<인간의 집중화 현상은 항상 나태와 부도덕과 기타 악습들을 부추겨 주었다.>

도시들은 항상 범죄의 온상이 되어 왔는데, 그러한 환경 가운데 사는 사람들은 천연계와 가까이 접촉할 수 있는 작은 공동체들보다 저항을 덜 받으면서 사단이 공격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노아에게 땅을 채우고 충만케 하라고 말했다(9:1). 그러나 우려되는 미지의 위험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사람들은 안전을 찾아보려는 소망으로 자신들 스스로의 작업을 통해 성을 건축하고자 했다. 그들은 진정한 안전이 하나님을 의지하고 순종할 때에만 이르러온다는 것을 잊기로 선택했다. 급증하는 노아의 후손들은 매우 신속하게 참 하나님을 경배하는 것으로부터 떠났음이 분명하다. 그들의 악행이 다시금 대격변을 부를 것이라는 두려움으로 그들은 보호책을 강구했다. (창 11:4, 재림교주석)

 

<우리 이름을 내고>

바벨탑은 그 건축자들의 우월한 지혜와 기술에 대한 하나의 기념비가 될 것이었다. 그들의 이름, 곧 명성을 내기 위해서 사람들은 스스로 어려움과 위험과 궁핍을 기꺼이 견딘다. 명성에 대한 욕망은 분명히 그 탑을 쌓기 위한 추진 동기 중의 하나였으며, 또한 그러한 건축물에 대한 자랑은 다른 성스럽지 못한 계획들을 이루기 위한 연합을 지탱해 줄 것이었다. 하나님의 목적에 의하면, 사람들은 참된 종교의 결속을 통하여 연합을 유지할 것이었다. 우상숭배와 다신 주의가 이 내면의 영적 결속을 깨뜨렸을 때, 그들은 종교의 연합뿐만 아니라 형제 우애의 정신도 잃어버렸다. 상실된 내적인 연합을 외적인 수단으로 보존하려는, 탑을 쌓는 것과 같은 사업은 결코 성공할 수가 없었다. 분명히 하나님을 저버린 사람들만이 그 활동에 참여했었다.

 (창 11:4, 재림교주석)

 

“그들은 이곳에 도시를 건설하고, 그 도시 안에 세계의 경이가 될 굉장히 높은 탑을 세우기로 하였다. 이 사업은 백성들이 각지에 널리 흩어지는 것을 막고자 계획되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들이 온 땅에 흩어져서 땅에 충만하고 그것을 정복하도록 지시하셨었다. 그러나 이 바벨탑 건설자들은 그들의 공동 사회를 한 단체로 연합시켜서 결국 온 세계를 포함할 한 왕국을 세우기로 하였다. 그리하면 그들의 도시는 세계적 제국의 수도가 될 것이며, 그 영광은 온 세계의 칭찬과 존경을 자아낼 것이며 건설자들은 명성을 얻을 것이었다. 하늘에까지 닿을 굉장한 탑은 이 탑 건설자들의 명성을 후대에 길이 보존시키면서, 저들의 능력과 지혜의 기념비로써 서 있게 하고자 의도되었다. “(부조, 118)

 

“바벨탑 건설자들은 하나님께 대한 불평의 정신에 빠졌다. 아담에게 베푸신 그분의 긍휼과 노아와 맺으신 그분의 은혜로운 언약을 기억하면서 감사하기는커녕 그들은 최초의 부부를 에덴에서 추방하시고 세계를 홍수로 멸망시킨 하나님의 가혹하심에 대하여 불평하였다. 그러나 하나님을 가혹하며 독단적이라고 불평하는 한편 그들은 폭군 중에도 가장 잔인한 폭군의 통치를 받아들이고 있었다. 사단은 그리스도의 죽음을 예표 하는 희생 제물에 치욕을 끼치려고 애쓰고 있었다. 백성들의 마음이 우상숭배로 어두워지자 사단은 그들로 하여금 제물을 모조(模造)하게 하여 그들의 우상의 제단에 자신들의 자녀들을 제물로 드리게 하였다. 사람이 하나님을 떠났을 때 공의, 순결, 사랑 등과 같은 하나님의 속성들은 압박, 폭력, 잔인에 밀려났다. “(부조, 120)

 

“바벨탑 건설자들의 계획은 수치와 패배로 끝났다. 그들의 교만의 기념비는 그들의 어리석음의 기념비가 되었다. 지금도 사람들은 여전히 동일한 노선-자아를 의지하고 하나님의 율법을 배척하는 노선-을 따르고 있다. 그것은 사단이 하늘에서 실천에 옮기고자 하던 원칙이요 그의 제사를 지내는 데 있어서 가인을 지배했던 원칙이다. “(부조, 123)

 

“바벨 사람들은 하나님에게서 독립된 정부를 세우기로 하였었다. 그들 중에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들도 있었으나 그들은 불신자들의 주장에 속아 그들의 술책에 말려든 사람들도 있었다. 주님께서는 그들 가운데 있는 충성스러운 자들을 위하여 그분의 심판을 지체하시고, 그들의 참된 품성을 나타내도록 백성들에게 시간을 주셨다. 백성들의 참된 본성이 드러나게 되자 하나님의 아들들은 그들에게 그들의 목적을 단념시키고자 노력하였다. 그러나 백성들은 그들의 대담한 사업에 완전히 연합되었다. 저지하지 않은 채 그대로 버려두었더라면 그들은 세계를 그 여명기에 타락시켰을 것이다. 그들의 동맹은 반역에 기초하였다. 그들은 하나님의 주권이나 영광을 인정하지 않고 자신들을 높이고자 왕국을 건설하려고 하였다. 만일, 이 동맹이 허용되었더라면 그것이 한 강대국이 되어 지상에서 의로움-평화와 행복과 안전도 함께-을 몰아내는 데 그 통치력을 사용했을 것이다. 사람들은 “거룩하며 의로우며 선한”(롬 7:12) 하나님의 율법을 그들 자신의 이기적이며 잔인한 마음의 의도와 맞는 법으로 대체하려고 노력하고 있었다. “(부조, 123)

 

“요한계시록 14장에는 첫째 천사의 뒤를 이어 둘째 천사가 “무너졌도다. 무너졌도다. 큰 성 바벨론 이여 모든 나라를 그 음행으로 인하여 진노의 포도주로 먹이던 자로다”(계14:8)라고 선포한다. 바빌론이라는 말은 바벨(Babel)이라는 말에서 나온 것으로 혼잡을 의미하는 말이다. 그 말은 성경에서 여러 가지 모양의 허위적이요 배교적인 종교를 나타내는 데 사용되었다. 요한계시록 17장에는 바벨론이 여인으로 표상되었는데, 성경 상으로 여인은 교회를 상징하되, 정숙(貞淑)한 여인은 순결한 교회를, 음란한 여인은 배교한 교회를 상징한다.”(쟁투, 380)

 

<우리 이름을 내고>

바벨탑은 그 건축자들의 우월한 지혜와 기술에 대한 하나의 기념비가 될 것이었다. 그들의 이름, 곧 명성을 내기 위해서 사람들은 스스로 어려움과 위험과 궁핍을 기꺼이 견딘다. 명성에 대한 욕망은 분명히 그 탑을 쌓기 위한 추진 동기 중의 하나였으며, 또한 그러한 건축물에 대한 자랑은 다른 성스럽지 못한 계획들을 이루기 위한 연합을 지탱해 줄 것이었다. 하나님의 목적에 의하면, 사람들은 참된 종교의 결속을 통하여 연합을 유지할 것이었다. 우상숭배와 다신 주의가 이 내면의 영적 결속을 깨뜨렸을 때, 그들은 종교의 연합뿐만 아니라 형제 우애의 정신도 잃어버렸다. 상실된 내적인 연합을 외적인 수단으로 보존하려는, 탑을 쌓는 것과 같은 사업은 결코 성공할 수가 없었다. 분명히 하나님을 저버린 사람들만이 그 활동에 참여했었다.

(성경주석)

 

 왜 하나님께서 “바벨론”에 마지막 일곱 재앙을 내리시는지 그 이유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첫 번째 바벨론의 신학적인 중요성을 연구할 필요가 있다. 다시 말하자면 하나님과 그의 언약 백성들을 대적한 태도를 조사하여야만 한다는 것이다. 성경은 바벨론의 시작을 하나님을 대적하여 반란을 일으킨 한 도시로서 묘사하고 있다. 그 도시의 거주민들은 “하늘에 닿게끔” 탑을 세웠다(창 11:4). 아마도 이것은 또 다른 홍수를 두려워하였기 때문일 것이지만 그러므로 인하여 하나님께서 인류의 미래를 위하여 행하신 약속을 무시하였다. 그렇지만 그들의 언어를 혼잡게 하신 하나님의 심판으로 “그들은 온 지면에 흩어짐”을 당하였다(9절). 바벨은 자기 행위와 계획으로 구원받고자 한 원리에 근거하여 처음부터 하나님의 뜻을 배척하였다. (구원의 병거 104)

 

<성령은 하나님의 권위를 주심>

예수께서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내 증인이 되리라” 하셨다. 세상을 경고하는 것은 성령과 산 증인의 연합에 의한 것이다. 하나님의 일꾼은 하늘의 기별을 통과시키는 대리자이다. 그리고 성령은 진리의 말씀에 하나님의 권위를 부여한다(리뷰 1893.4. 4

(행 1:8, 화잇주석)

 

<증인(證人)>

헬라어 마르튀레스(martures). 다른 어떤 수단을 통해 자신이 보거나 들었거나 알게 된 것을 확증하거나 확증할 수 있는 사람. 이 단어는 사도행전에서 13번 사용되었다. “증인”으로서 사도들은 그리스도가 예언된 메시야이며, 인류의 구속 주임을 알았다. 그들은 또한 그의 재림의 약속에 대하여 증거가 될 수 있었다. 증인으로서 제자들은,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셨다가 부활하여 승천하신 주와 그들의 증거를 통하여 믿게 될 세상 사람들 사이의 최초이자 으뜸가는 가시적(可視的) 증거를 연결하는 자들이었다(참조 요 1:12 주석). 요한은 “우리가 보고들은 바를 너희에게도 전”한다(요일 1:3)고 기록하였다. 오늘날 그리스도를 따르는 사람들도 이와 비슷한 방법으로 예수의 행한 일과 가르침에 대하여, 자신의 아들을 통하여 세상을 구원하려는 하나님의 목적에 대하여 그리고 그들 자신의 마음속에 있는 복음의 효력에 대하여 개인적으로 증명하라는 요청을 받는다. 이보다 더 확신을 주는 증거는 있을 수 없다. 개인적인 경험이 없이는 진정한 기독교의 증인이 될 수 없다. 앉은뱅이를 고친 후에 했던 베드로의 담대한 진술(행 4:10)은 사도 시대에 있은 증거에 대한 탁월한 모본이다. (행 1:8, 재림교주석)

 

<(행 1:8)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성령이 임하시면 그들이 하늘의 능력을 받게 될 것이라는 사실을 확신시키셨다. 그 능력(뒤나민)이란 그들의 증인으로서의 사역을 수행하는 데 필요로 하는 모든 능력을 말한다. 예수 자신이 침례를 받으실 때 성령과 능력으로 기름 부음을 받았던 것처럼(10:38, 마 3:16, 막 1:10, 눅 3:21, 22) 이제 제자들도 그와 똑같이 기름 부음을 받아 사역을 수행할 수 있어야 했다. 증인(證人)으로서의 사역은 본서 전체에 걸쳐 두루 나타나는 주요 주제이다(2:32, 3:15, 5:32, 10:39, 13:31, 22:15). 구약시대에 이스라엘 민족이 제사장 나라로서의 증인의 사역에 이어 제자들의 사역을 통해 완수해 나가야 할 과제로 남겨졌다. 여기에서 ‘성령이 임한다.’라는 것은 5절에서 언급된 성령의 침례를 의미한다.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끝까지 이르러>

사도들이 앞으로 감당해야 할 사역의 영역을 요약하고 있다. 이 지리적인 명칭들은 마치 본서의 목차와 같은 구실을 하는 것처럼 보인다(F.F. Bruce). 즉, 본서의 기록에 의하면 복음은 예루살렘에서 시작하여(1~7장) 온 유대와 사마리아를 거쳐(8:1-11:18) 온 세계로 확장되어 갔다(11:19-28:31). 누가복음에서는 복음 사역의 지리적 이동 상황이 갈릴리로부터 베레아를 지나 예루살렘으로 이어져 가는데 본서의 경우는 ‘예루살렘’에서 시작하여 로마까지 퍼져 나간다.

 

(16)

<내 증인(證人)이 되리라>

 영어의 순교자(martyr)라는 말이 ‘증인’(마르튀스)이라는 헬라어에서 유래했다. 이는 증인은 순교적(殉敎的) 자세를 가지고(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보고 들은 것을(요일 1:1) 증거가 돼야 함을 암시한다. ‘내 증인’이란 ‘나(예수 그리스도)에 의해서, 나를 위해서, 나에 관한 모든 것을 증거가 되는 것’을 말한다(R.C.H.Lenski). 그리고 ‘내 증인이 되리라’라는 미래 시제는 성령 강림의 약속 실현과 더불어 제자들이 본격적으로 증인의 사역을 감당하게 될 것을 말하고 있다. (행 1:8, 만나주석)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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