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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과 복음의 신비-(핵심 Q&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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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이봉주 작성일23-07-31 20:35 조회1,047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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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과 복음(福音)의 신비(神祕)

                          (8월 5일 (안) / 일몰: 오후 7시 37분)

 

(기억절)

 “우리 가운데서 역사하시는 능력대로 우리가 구하거나 생각하는 모든 것에 더 넘치도록 능히 하실 이에게 교회 안에서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영광이 대대로 영원무궁하기를 원하노라 아멘”(엡 3:20~21).


<서언(緖言)>

1. 우리는 그리스도인으로서 특권(特權)을 누리고 있음을 꼭 기억해야 할 것이다.

그 이유는 바울 사도가 로마의 감옥(監獄)에서 겪은 어려움과 수치(羞恥)스러운 고통이 로마의 포로(捕虜)가 아닌 그리스도의 포로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계획 가운데 있음을 분명히 알 수 있는 것처럼 우리가 이 땅에 사는 동안의 여러 환경의 지배를 받는 데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계획 가운데 있음을 분명히 알고 믿음으로 직면한 도전(挑戰) 앞에서 담대(膽大)함과 확신(確信)을 가질 수 있음에 감사하자.


2. 사도 바울은 (에베소서 3장)에서 신약교회의 구속사적(救贖事的) 중요성에 대하여 기록하고 있는바 ①.하나님의 경륜(經綸)을 깨닫고 ②.이방인(異邦人)을 위해 고난(苦難)받으며 ③.복음의 비밀(祕密)을 이방인(異邦人)들에게 드러내려는 바울의 엄숙(嚴肅)한 모습을 보여준다.

바울은 사도(使徒)로서 그의 삶은 교회활동(敎會活動)의 기준(基準)이 된다. 여기서 우리는 교회의 참된 아름다움은 물질(物質)이나 권위(權威)를 내세우는 데 있지 않고 복음 안에서 서로를 위해 희생(犧牲)하고 봉사(奉事)하는 데 있다는 점을 깨달을 수 있다. 아울러 <에베소서 3장을 굳이 구분해 본다면> ①.(엡3:1~13절). 바울 자신의 사역(使役)에 대한 바울의 설명과 ②.(엡3:14~21절) 성도(聖徒)들을 위한 바울의 중보기도(仲保祈禱)이다.


(7월 30일) (일)  <바울: 이방인(異邦人)을 위(爲)하여 갇힌 자 된 사도(使徒)>


(Q)~(에베소서 3장)의 주제(主題) 및 요점(要點)은 무엇인가?


(A)~(에베소서 3장)의 주제(主題)는 “이방인(異邦人)을 위하여 갇힌 자 된 사도 바울” 이며

바울 자신이 “로마의 포로가 아닌 예수 그리스도의 포로(捕虜)”라고 소개하고 있으며, 그러므로 명예(名譽)와 수치심(羞恥心)을 중시하는 문화 가운데에서 신자(信者)들에게 자신이 처한 상황은 하나님의 계획 가운데 있는 것으로 보도록 그들을 위해 고난(苦難) “너희를 위해 고난”을 받고 있으며 수치(羞恥)를 받을 일로 보이는 것이 사실은 그들의 “영광(榮光)”(엡3:13)을 위한 것으로 밝혀질 것이라 말하고 있다.


(에베소서 3장)은 교회의 숭고(崇古)한 사명(使命)에 대하여 기록하고 있다. 사도 바울이 말하는 그 사명은 ①.하나님의 지혜(知慧)를 선포(宣布)하는 것과 ②.그리스도의 사랑에 대해 더욱 자세히 아는 것이다. 그런데 바울은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지혜(知慧)를 특이하게 비밀(祕密)이란 말로 표현하였다. (엡3:3, 4, 9절) 그 이유는 세상 사람들의 조소(嘲笑) 거리이며 사단의 승리인 것처럼 보이는 십자가를 통해 하나님은 화해(和解) 불가능한 것을 화해시키시는 놀라운 지혜를 나타내셨기 때문이다. 따라서 바울은 본 에베소서 3장에서 이 십자가의 사랑을 선포하고 이를 깊이 아는 것이 곧 교회의 자랑이요 생명이 된다는 사실을 깨우치려 한다. 우리는 이 말씀을 통하여 오늘날 교회를 영광스럽게 만드는 진정한 활동이 무엇인가를 분명히 알 수 있다. 에베소서 3장은 ①.바울 자신의 사역에 대한 바울의 설명과 (엡3:1~13절). ②.성도들을 위한 바울의 중보기도(仲保祈禱)이다. (엡3:14~21절).

 

(7월 31일) (월)  <오랫동안 감춰진 복음(福音)의 비밀(祕密)>


(Q)~하나님께 받은 바울에게 맡겨진 비밀(祕密)은 무엇인가? (엡 3:1~6)


(A)~“비밀(祕密)”이라는 말은 “헬”뮈스테리온“은 ①.인간의 지식으로는 깨달을 수 없으나 하나님의 계시로 밝히 알 수 있는 진리(眞理). ②.그리스도께서 그 원천이며 본질이 되시는 진리(眞理) ③.유대인과 이방인(異邦人)이 모두 그리스도와 연합함으로 말미암는 상호간(相互間)의 완전한 연합을 의미한다. (고전 1:22~24) 이처럼 바울이 공개한 복음의 비밀은 유대인과 이방인(異邦人)으로 구성(構成)된 교회에서 함께 상속자가 되고 함께 한 지체가 되어 함께 주의 약속하신 것을 받게 된 기쁨을 말한다.


(8월 1일) (화)  <하나님의 지혜(智慧)를 나타내는 교회(敎會)>


(Q)~바울이 ”교회로 말미암아 하늘에서 정사(政事)와 권세(權勢)들에게 하나님의 각종 지혜를 알게 하려 하심이니“라고 권면(勸勉)한 의미는 무엇인가? (엡 3:10)


(A)~바울이 교회(敎會)를 설명하는 말씀으로 ”교회는 유대인과 이방인(異邦人)을 연합(聯合)하게 하는 교회(敎會)의 구성(構成)은 만물을 그리스도 안에서 통합(統合)하여 하나 되게 하는 하나님의 계획(計畫)의 승리(勝利)를 보여주는 것이다”라고 말씀하시며 더 나아가 ”교회는 하나님의 지혜(知慧)에 대한 활력 넘치는 실연(實演)이 되도록 계획된 것이라는 점과 교회는 사실상 하나님의 능력과 지혜(智慧)의 대리자(代理者)라기보다는 오히려 증인(證人)이나 증거(證據)라고 말할 수 있으며, 모든 교인(敎人)의 은사(恩賜)가 다 발휘(發揮)될 때 교회는 가장 잘 하나님을 증거(證據)할 수 있으며, 특히 구속 사업(救贖事業)에 나타난 지혜를 가리키는바. 하나님의 지혜(知慧)는 물질계(物質界)와 인간 마음의 복잡다단(複雜多端)함 그리고 그분이 사람들에게 손을 뻗어 구원(救援)을 베풀기 위해 사용하시는 수많은 방법에도 나타난다. 이 지혜의 전체 범위는 구원(救援)의 계획이 끝날 때까지 헤아리지 못할 것이다. 라고 말씀하신다. (본교 성경주석)


(8월 2일) (수)  <나의 마음에 거(居)하시는 그리스도>


(Q)~우리 아니 나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의 비밀을 어떻게 표현할 수 있겠습니까? (엡 3:16~19) 


(A)~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은 인류(人類)의 지식을 넘어서는 것인데, 이는 그 사랑이 무한하지만, 값없이 주어지며, 결코 다함이 없고, 언제나 이해(理解)할 새로운 분야(分野)를 제시해 주기 때문이다. 그것은 우리의 사랑이 성장하는 경험(經驗)의 원천이다(요일 4:19). 사람들은 그리스도의 사랑을 충분하게 경험(經驗)하는 가운데 발견하는 삶의 능력을 손끝으로 만진 데 불과하다. 개개인의 심령에서만 이뤄지는 모종의 영적인 교류도 있지만, 하나님의 공동체(共同體) 안에서 이뤄지는 다른 일들도 있는데 그리스도의 사랑을 깨닫는 것이 그중 하나이다. 그것은 신자들을 한데 묶어주는 공동 소유물(所有物)이다. 즉 그리스도를 향한 우리의 사랑이 아니라 우리를 향한 그분의 사랑을 언급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즉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신성한 이름을 모두에게 주셨다 그렇게 하시는 이유는 온 가족들이 하나님의 소유이며 측량(測量)할 수 없는 사랑의 대상이라는 것을 의미(意味)한다.


(8월 3일) (목)  <교회(敎會) 안에서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영광(榮光)>


(Q)~바울은 무엇 때문에 짧고 시적(詩的)인 찬양(讚揚)과 영광(榮光)을 하나님께 드리고 있습니까? (엡 3:20~21) 


(A)~ 바울이 에베소서의 서신(書信)에서 지금까지 제시(提示)한 내용 전체가 장엄(莊嚴)한 송영(誦詠)에 요약돼 있다. (엡3:20~21절). 하나님을 향(向)한 찬양은 회심(悔心)한 심령(心靈)에서 기꺼이 터져 나온다. 성경에는 각기 독특한 사상(思想)이 들어 있는 송영(誦詠)이 많다(롬 16:25~27; 딤전 6:15, 16; 계1:6). 여기서 사도(使徒)는 형용(形容) 못 할 하나님의 능력과 사람을 향한 그분의 무한(無限)한 사랑을 깨닫고 교회를 돌보시고 협력하시는 예수그리스도의 사랑으로 교회 가운데 그분의 영광이 풍성하게 나타날 것을 상상하며 그것에 감사하고 있다. 










 


******<말미부록(末尾附錄)>*********




⑴.

 "너희가 더 이상 외인이나 나그네가 아니며(엡2:19), 그리스도와 연합하고 그의 교회와 더불어 하나가 되었으므로"란 말씀으로 볼 수 있겠다. 그러므로 "그리스도를 위하여 갇힌 바 된 바울은 너희가 하나님의 은총을 입고, 그러한 특권에 동참하는 자로서 손색이 없는 행동을 할 것을 위하여 기도한다."라는 말이다. 이러한 그의 취지가 14절에서 바울 자신에 의해 표현된 것을 읽을 수 있다. 그는 1절 이후 주제에서 이탈하여 다른 것을 말한 후 14절에서는 첫 절에서 시작한 것을 연결시킨다. 하나님에게서 오는 은혜와 특별한 은총을 받은 사람은 앞으로 나가고 그들에게 요구된 바를 계속 수행하기 위해 기도가 필요하다는 사실을 생각해 보자. 바울이 감옥에 갇히었던 동안에도 에베소 인들을 위하여 하나님께 끊임없이 기도한 것을 볼 때 우리는 하나님을 향한 우리의 기도에서 다른 사람들을 위한 기도를 열심히 하기를 게을리하며 핑계할 만큼 특별한 고난은 없다는 사실을 배우게 된다. 그는 다시 그가 받은 고난에 대하여 말한다. 이에 대하여 그는 "그러므로 너희에게 구하노니 너희를 위한 나의 여러 환난에 대하여 낙심치 말라. 이는 너희의 영광이라"(13절) 고 말한다. 바울이 감옥에 갇혀 있는 동안, 그곳에서 많은 고통을 받았다. 비록 바울이 당하는 고통이 그들 때문이라고 할지라도, 그늘 하나님께서 그의 전도를 통하여 그들에게 행하신 놀라운 일을 볼 때, 이 일로 그들을 실망하게 하거나 낙심시키게 하려 하지 않았다. 에베소 인들은 이 얼마나 따뜻한 관심을 받았던 것인가! 바울은 자신이 그 고난을 참기 어렵다는 생각보다는 에베소 인들이 자신의 고난을 보고 약해지거나 실망하게 될 것을 더 염려할 것처럼 보인다. 이러한 결과를 막기 위하여, 바울은 자기의 고난이 그들의 영광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만약 에베소 인들이 이 문제를 바르게 보고 이 고난으로 인하여 그들이 영광을 돌리고 기쁨을 지닌다면 낙심할 이유가 없노라고 말한다. 왜냐하면, 이 일을 통하여 하나님의 그들을 향하신 큰 관심과 염려가 나타나기 때문이다. 이 일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복음을 주기 위하여 사도들을 보내셨을 뿐만 아니라, 그들을 위하여 고난을 받게 하셨고 그들이 박해까지 견디며 진리를 전하였다는 사실이 오히려 그 진리를 확고히 해 주는 것이 되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의 신실한 사역자들에게 있어서 뿐만 아니라, 그의 백성들까지도 그들이 복음의 섭리를 위하여 고난을 받을 때 기뻐하고 영광을 돌릴 수 있어야 함을 생각하자.


⑵.

바울은 이방인들을 위해 일하다가(행 21:28), 특히 그들이 동일하게 약속의 후사가 되었다고 주장했기 때문에 옥에 갇혔다. 따라서 그는 동족에게 미움을 샀다. 그의 시야는 모든 민족적인 장벽들을 넘어섰다. (엡 3:1~6, 재림교주석)


⑶.

사상의 흐름의 골자를 계속 이어가기 위해 “이러하므로”(엡3:1절)라는 말이 반복되는 14절까지 이어질 여담이 여기서 시작된다. 이 여담에서 바울은 밀접하게 관련된 두 주제를 취급한다. 하나는 이방인도 동료 후사가 돼야 한다는 숨겨진 비밀의 계시이고, 다른 하나는 이 비밀을 이방인에게 알리라고 바울을 특별한 사도직으로 부르신 소명이다. (엡 3:1~6, 재림교주석)


⑷.

깨달은 것. 

혹은 “통찰”, “이해.” 바울이 여기서 확언하는 것은 자신의 총명이 아니라, 영적인 지각을 지닌 이 편지의 독자들이 입증할 수 있는 어떤 통찰을 하나님이 자신에게 부여하셨다는 사실이다. 그는 그런 독자들에게 자신이 기록하는 문제들을 충분하게 파악하고 있으며, 따라서 그에 대한 신뢰는 잘못된 것이 아니라고 확언하고 있다. 하나님의 모든 증인은 이렇게 자신의 기별이 진실하고 타당하다는 확신을 지닐 수 있다. (엡 3:1~6, 재림교주석)


⑸.

다른 세대. 모든 세대가 각기 계시를 가졌지만, 그리스도 초림 이후의 세대가 가졌던 계시에 비하면 그 정도와 형태는 미미했다. 한편으로 각 세대에 가장 유익이 되도록 고안됐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백성의 강퍅한 무지로 인해 제한됐던 계시는 어떤 의미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완벽한 계시의 홍수가 드러나기까지는 점진적이었다. (엡 3:1~6, 재림교주석)


⑹.

함께 지체(肢體)되고.(엡 3:6)

수 세기 동안 두려움과 적의로 인해 멀리하던 자들을 한 몸으로 결합하는 것은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공인하신 목적이다. 역사적으로 인종과 나라와 사회적 신분이라는 모든 차이는 정치적인 통일이 아니라 압도적인 사랑의 능력과 그리스도께 같은 마음으로 하는 충성을 통해 해소될 수 있다. 차이점들을 해소하려는 인간의 모든 헛된 노력은 가치는 있으나 불가불 실패하는데, 이는 하나님 나라의 기본 원칙인 상호 존경과 사랑으로 규제되지 않기 때문이다. 바울은 이 사실을 유대인과 이방인에게 똑같이 알려주고자 했다. (엡 3:6, 재림교주석)


⑺.

각종 지혜(엡3:10)

특히 구속 사업에 나타난 지혜를 가리킴. 하나님의 지혜는 물질계와 인간 마음의 복잡다단함 그리고 그분이 사람들에게 손을 뻗어 구원을 베풀기 위해 사용하시는 수많은 방법에도 나타난다. 이 지혜의 전체 범위는 구원의 계획이 끝날 때까지 헤아리지 못할 것이다 (성경주석)


⑻.

구속(救贖)의 우주적(宇宙的)인 목적에는, 사단이 이의를 제기하고 천사들이 의문을 품어온 하나님의 이름과 품성이 옹호되는 일이 포함된다(참조 1:6 주석). 이것은 하늘의 지적 존재들이 심사숙고할 수 있는 최대의 광경이다(참조 고전 4:9). 그들이 하늘의 관점에서 세력들과 사건들의 상호작용을 관찰할 수 있다면 역사의 과정이 어떻게 보이겠는가? (성경주석)


⑼.

(엡3:7)이 복음을 위하여 그의 능력이 역사하시는 대로. 바울이 일꾼이 된 목적은 복음을 모든 이에게 특히 이방인에게 전파하는 것이다(고후 3:5, 4:1). 이런 복음 전파 사역은 바울 자신의 힘만으로는 불가능한 것이었다. 그래서 바울은 사역을 감당함에 있어 하나님의 능력이 역사하셨음을 고백한다(1:19, 골 1:29). 그 역사하심은 성령의 내주로 바울의 삶 전체에서 일어났다. 바울이 말씀과 하나님의 계획을 잘 이해해서 전파할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에게서 온 하나님의 능력 역사를 통해서였다. (엡 3:7, 만나주석)


⑽.

내게 주신 하나님의 은혜 선물을 따라 내가 일꾼이 되었노라.

‘일꾼’에 해당하는 헬라어 ‘디아코노스’은 본래 ‘손님 식탁에서 시중드는 자’를 가리키는 것으로 신약에서 그리스도와 그의 복음을 섬기는 자를 의미한다. 바울은 자신이 이런 직분을 받게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 선물이라고 고백한다. ‘하나님의 은혜’는 바울 자신을 선택해 주시고, 부르셨으며, 능력을 부여하신 것을 가리키는 것으로(1:6, 7) 바울 자신이 과거에 교회의 박해자로서 도저히 그 직분을 감당할 수 없는 자였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복음 사역의 직분을 주셨음을 시사한다. 그래서 바울은 하나님께서 값없이 주신 선물이라고 고백한다. (엡 3:7~13, 만나주석)


⑾.

(엡3:8) 모든 성도 중에 지극히 작은 자보다 더 작은 나에게 이 은혜를 주신 것은. 

‘지극히 작은 자보다 더 작은’ 애에 대해서 혹자는 후대 사람들이 바울의 겸손을 드러내기 위해서 개작한 것이라고 주장한다(B.S. Easton). 그러나 과연 그들이 바울을 낮추는 말을 썼는가에 대해서는 확신할 수가 없다(C. Spicq, Wood). 왜냐하면, 본 절만 갖고 진정성을 논하기에는 무리가 있기 때문이다(Lincoln). 또한, 바울이 다른 서신에서도 자신에 대해 ‘지극히 작은 자’(고전 15:9, 10), ‘죄인 중에 괴수’(딤전 1:15)라고 고백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본 절의 바울 고백은 신빙성이 있다. 바울의 이 고백에 대해서 혹자는 인위적이고 과장된 표현이라고 주장한다(Mitton). 그러나 수사학적인 화려한 묘사가 아니라 과거에 교회의 박해자였으며 하나님 앞에서 죄인이며 육체에 하나님을 거스르는 나쁜 욕망(欲望)으로 가득 차 있다(롬 7:18, 딤전 1:13-15)는 죄의식에서 비롯된 겸손이다(Blaikie). 한편 ‘은혜를 주신 것’은 바울 자신이 받은 직분이 하나님에게서 비롯된 것이며,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은 것임을 시사한다(Lenski, Blaikie).(엡 3:8, 만나주석)


⑿.

(엡3:8) 측량할 수 없는 

그리스도의 풍성을 이방인에게 전하게 하시고. 바울이 하나님에게서 받은 직분은 이방인에게 복음을 전파하는 것이다. ‘이방인’에 해당하는 헬라어 ‘에드네신’은 ‘경멸’을 뜻하는 용어이다. 바울은 이방인을 욕되게 부르는 용어를 사용해서 하나님이 이방인에게 베푸신 은혜와 축복이 지극히 큰 것임을 나타낸다(Blaikie). 이방인에게 베푸신 하나님의 은혜는 무한한 것이다. 한편 ‘측량할 수 없는’ 데 해당하는 헬라어 ‘아넥시크니아스톤’은 ‘밑바닥까지 도달할 수 없는’ 혹은 ‘한계가 없는’을 의미하는 것으로(Mitton) 주로 인간이 이해할 수 없는 하나님의 방법을 가리키는 데 사용되었으나(LXX, 욥 5:9, 9:10, 34:24, 롬 11:33), 본 절에서는 ‘그리스도의 풍성’과 관련된다. ‘그리스도의 풍성’의 헬라어 ‘플루토스 투 크리스투’에 대해서 두 가지 해석이 가능하다(Lincoln). (1) 주격 적 소유격으로 해석해서 ‘그리스도’가 구원을 소유하신 자이며 수여하시는 자임을 시사한다(Meyer). (2) 목적격 적 소유격으로 그리스도 자신이 복음의 풍성함 내용임을 시사한다(골 1:27, 2:3). 이것은 그리스도 안에 있는 무한한 사랑과 긍휼 그리고 구원의 은총과 은사를 가리킨다(Bruce, Wood,Lenski). 바울은 이런 그리스도의 풍성을 이방인에게 전하기 위해서 사도로 부르심을 받았다. (엡 3:8, 만나주석)


⒀.

(엡3:9) 영원부터 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 속에 감치었던 비밀의 경륜이 어떠한 것을 드러내게 하려 하심이라. 

바울의 사명은 비밀의 경륜을 드러내는 것이었다. ‘비밀의 경륜’이 공인 본문(Textus Receptus)에서는 ‘코이노니아 투 뮈스테리우’(’비밀의 친교’)로 되어 있다(the fellowship of the mystery, KJV). 그러나 대부분의 사본에는 ‘코이노니아’ 대신 ‘오이코노미아’(’경륜’)로 되어 있다(Foulkes). 또한 ‘경륜’은 ‘계획’(plan, RSV)을 의미하는 것으로 그리스도를 통해서 이방인에게까지 하나님의 은총을 베푸시고자 하는 계획을 가리킨다. 이런 계획은 세상이 시작되기 이전부터 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 속에 감추어졌던 것이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자신 안에 비밀을 감추었다는 의미로 비밀의 신적 출처를 시사한다(Lincoln). 한편 바울이 ‘만물을 창조하신 분’이라고 하나님을 부르는 것은 당시의 거짓 교리 즉 영지주의에 대항하기 위한 것이다(Bruce, Wood). 영지주의자들은 이분법(二分法)을 이용하여서 ‘창조주’와 ‘구속주’를 구별하였다. 바울은 하나님 속에 감취었던 비밀의 계획 즉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을 통해서 인간을 구속하시고 자신과 화해시킴으로 이방인과 유대인 사이를 화목하게 하여 하나님 나라를 완성해가시는 분이 곧 창조주이신 하나님이라 선언하고 있다. 이는 구속주와 창조주가 영지주의자들이 말하는 것처럼 다른 존재가 아니라 한 분이신 하나님이심을 천명한 것이다. 창조주이시며 구속 주이신 하나님께서 이방인에게 베푸신 은혜의 계획을 모든 사람에게 드러내는 것이 바울의 사명이다. (엡 3:9, 만나주석)


⒁.

(엡3:13) 너희에게 구하노니 

너희를 위한 나의 여러 환난에 대하여 낙심치 말라. 본 절에 대한 해석은 여러 가지다. (1) ‘낙심하다’에 해당하는 헬라어 ‘엥카케인’의 주어가 헬라어 본문에서는 명확지 않기 때문에 ‘바울 자신이 낙심치 않도록 기도 부탁을 했다’라는 의미이다(Origen, Jerome, Theodore, Goodspeed). (2) 바울이 에베소 교인들로 하여금 낙심치 않게 하려고 지금 기도하고 있다는 ‘기도문’으로 해석하기도 한다. (3) 바울이 에베소 교인들에게 낙심치 않기를 부탁하는 것이다(Mitton, Lincoln). 본 절에 대한 세 가지 해석 중 마지막 해석이 가장 타당하다. 첫 번째 해석의 경우 만약 바울 자신의 절망 문제를 다룬 것이라면 본 절에서 ‘나의 환난’이라고 기록하지 않았을 것이다(Lenski). 두 번째 해석의 경우 ‘구하노니’에 해당하는 헬라어 ‘아이투마이’은 기도 대상인 하나님에 대한 언급이 없이는 ‘기도를 드린다.’라는 의미로 사용되지 않기 때문에 본 절을 기도문(祈禱文)으로 해석하기 어렵다(Foulkes). 따라서 본 절은 에베소 교인들이 바울 자신의 환난으로 인해서 낙심하지 않기를 부탁하는 것으로 해석하는 것이 가장 적절하다(NIV, RSV, NEB, Meyer,Wood, Lenski).(엡 3:13, 만나주석)


⒂.

(엡3:13) 이는 너희의 영광이니라.

 바울은 본문에서 에베소 교인을 위하여 당하는 자신의 환난이 에베소 교인의 영광이 된다고 말함으로 ‘자신의 고난’과 ‘에베소 교인의 영광’을 대조 병렬시키고 있다. 바울 사상에 있어서 ‘고난’은 ‘영광’의 전제 조건이다(롬 8:17, 18, 고후 4:17). 그러나 대부분의 경우에 고난당하는 사람이 후에 영광을 받는 반면에 본 절에서는 바울 사도의 고난이 에베소 교인의 영광으로 나타난다. 이것은 바울 자신이 겪는 고통을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를 위해 채워져야 하는 남은 분량의 고난으로 알고 기뻐했던 것과 일맥상통한다(골 1:24). 이러한 선포를 통해서 바울은 자신이 현재의 고난을 장차 얻게 될 지극히 큰 영광을 예비하는 것으로 알았던 것처럼(고후 4:17) 에베소 교인들도 바울의 현재 고난이 미래의 교회에 미칠 그리스도의 영광에의 참여라는 사실을(롬 8:17) 깨닫고 낙심하지 않기를 권면한다. ” (엡 3:13, 만나주석)


(16).

(엡3:8) 지극히 작은 자보다 더 작은. <고전 15:9, 10; 고후 11:30; 딤전 1:12~16과 비교하라.>

 하나님의 은혜와 은총을 인식할 때면 바울의 마음에는 늘 겸손한 생각이 들었다. 그는 자신이 한때 성도를 박해했다는 사실에 관해 늘 민감했다. 그래서 자신의 소명의 위대함과 개인적인 부족함에 대한 인식은 늘 바울에게 새롭게 다가왔다. 바울은 하나님이 이토록 결점이 많고 반역자였던 자기를 취해서 은혜의 일꾼으로 삼았다는 데에 항상 놀라움을 금치 못하는 것처럼 보였다. 그는 자신이 선지자와 사도들보다 더 작을 뿐 아니라 어떤 성도보다도 더 작다고 느꼈다. 하나님의 은혜에 가장 근접한 자들은 가장 겸손할 것이다. 그래야만 그들은 봉사할 채비를 적절히 갖추게 된다.

그렇지만 바울이 과거 생애를 돌아볼 때 깃든 정서는 “범사에 양심을 따라 하나님을 섬겼노라”(행 23:1)라고 한 주장과 회심자들에게 자기를 “본받는 자”(문자적으로 “모방자”)가 되라고 한 권면(고전 4:16; 11:1; 빌 3:17)과 연결 지어 이해해야만 한다. 겸손은 소극적인 특성이 아니라, 죄에 대해 개인적으로 승리한 것과 은혜 가운데 성장한 것에 대한 인식과 조화를 이룬다. (성경주석)


(17).

너희의 영광. 

훌륭한 목사가 그러하듯이 바울은 자기를 양 떼와 동일시한다. 그가 자신의 고난에서 영광을 발견한다면 양 떼도 그 영광을 그와 공유할 것이다. 그는 하나님의 사도와 대사라는 고귀한 직분 때문에 고난받았으며, 에베소 교인들은 그 사도직의 결실이었다. 그렇기에 그들에게는 그 영광을 반영할 자격이 있었다. 그리스도의 몸의 한 지체가 고통스러워하면 온몸도 함께 고통받는다. (엡 3:13, 재림교주석)


(18).

구주께서는 당신 자신의 생애에 관하여 “내가 아버지의 계명을 지켜”(요 15:10) “나를 보내신 이가 나와 함께 하시도다. 내가 항상 그의 기뻐하시는 일을 행하므로 나를 혼자 두지 아니하셨느니라”라고 말씀하셨다(요 8:29). 하나님께서는 당신을 따르는 사람들도 예수 님께서 인성을 취하시고 하셨던 것처럼 할 수 있기를 바라신다. 그분의 능력을 통하여 우리는 구주께서 사셨던 순결하고 거룩한 생애를 살아야 한다. (MH 426.) 


(19).

바울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이러므로 내가 하늘과 땅에 있는 각 족속에게 이름을 주신 아버지 앞에 무릎을 꿇고 비노니 그 영광의 풍성을 따라 그의 성령으로 말미암아 너희 속 사람을 능력으로 강건하게 하옵시며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께서 너희 마음에 계시게 하옵시고 너희가 사랑 가운데서 뿌리가 박히고 터가 굳어져서 능히 모든 성도와 함께 지식에 넘치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아 그 넓이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가 어떠함을 깨달아 하나님의 모든 충만하신 것으로 너희에게 충만하게 하시기를 구하노라.”(엡 3:14-19). (MH 426.) 


(20).

“이로써 우리도 듣던 날부터 너희를 위하여 기도하기를 그치지 아니하고 구하노니 너희로 하여금 모든 신령한 지혜와 총명에 하나님의 뜻을 아는 것으로 채우게 하시고 주께 합당히 행하여 범사에 기쁘시게 하고 모든 선한 일에 열매를 맺게 하시며 하나님을 아는 것에 자라게 하시고 그 영광의 힘을 좇아 모든 능력으로 능하게 하시며 기쁨으로 모든 견딤과 오래 참음에 이르게 하시고”(골 1:9-11). (MH 426) 


(21)

(교회를 위한 바울의 기도) 바울은 에베소교회에 보내는 편지 가운데서 “복음의 비밀”(엡 6:19)과 “측량할 수 없는 그리스도의 품성”(엡 3:8)을 그들 앞에 소개하며 그들의 영적 번영을 위해 열렬히 기도한다는 사실을 확신하게 한다. (성화된 생애 84)  


(22).

“내가….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앞에 무릎을 꿇고 비노니 그 영광의 풍성을 따라 그의 성령으로 말미암아 너희 속사람을 능력으로 강건하게 하옵시며,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께서 너희 마음에 계시게 하옵시고, 너희의 사랑 가운데서 뿌리가 박히고 터가 굳어져서 능히 모든 성도와 함께 지식에 넘치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아 그 넓이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가 어떠함을 깨달아 하나님의 모든 충만하신 것으로 너희에게 충만하게 하시기를 구하노라.”(엡 3:14-19). (SL 84)


(23).

그는 또 고린도의 형제들에게도 편지하기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에게 주신 하나님의 은혜로 인하여 내가 너희를 위하여 항상 하나님께 감사하노니 이는 너희가 그의 안에서 모든 일 곧 모든 구변과 모든 지식에 풍족함으로 그리스도의 증거가 너희들로 견고케 되어 너희가 모든 은사에 부족함이 없이 우리 주 그리스도의 나타나심을 기다림이라”(고전 1:2-7)라고 한다. 이 말씀은 고린도 교회뿐만 아니라 말세까지 이르는 모든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주신 말씀이다. 그리스도인은 누구나 성화 되는 축복을 누릴 수 있다. 그 사도는 계속 이렇게 말한다. (SL 84) 


(24).

그는 또한 에베소 교회의 형제들에게 그리스도인의 특권이 얼마나 고귀한 것인지를 깨닫기를 바라는 편지를 보냈다. 그는 그들에게 가장 의미 깊은 말로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자녀들이 소유할 놀라운 능력과 지식을 열어서 보여준다. “성령으로 말미암아…. 속사람을 능력으로 강건하게 하옵시며…. 사랑 가운데서 뿌리가 박히고 터가 굳어져서 능히 모든 성도와 함께 지식에 그 넘치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아 그 넓이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가 어떠함을 깨”닫는 것이 그들의 특권이었다. 그리고 “하나님의 모든 충만하신 것으로 너희에게 충만하게 하시기를 구하노라”라고 기도함으로 그 사도의 간구는 절정에 이르게 된다 (엡 3:16~19). (GC 476)


(25).

구(求)하는 것

전체 표현이 특별히 신령한 은혜 곧 “하나님의 충만하신 것”(19절) 을 가리킨다는 것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바울은 하나님의 은혜와 베풂이 넘치도록 풍성하다는 사상을 부언하여 강조한다. 가히 상상도 할 수 없는 영적 능력의 자원이 열려 있지만, 우리는 그것을 제대로 활용하지 못한다. 주님의 권면과 비교하라. (엡 3:20, 재림교주석) 


(26).

더 넘치도록

 헬라어 휘페렉페릿수(hupe-rekperissou), “모든 한계를 완전히 넘어서는.” 바울은 합성어를 좋아한다. 여기서 그는 넘치도록 풍성함을, 가득 차다 못해 넘쳐흐르는 것으로 지적한다(참조 살전 3:10; 5:13). 이 풍부함은 특히 가장 절실하게 필요할 때에 나타나므로(참조 롬 5:20), 신자는 그것을 붙잡을 수밖에 없다. (엡 3:20, 재림교주석)


능(能)히 하실

 바울은 하나님이 착수한 일을 이루시는 능력을 자주 강조한다(롬 4:21; 11:23; 고후 9:8). 그는 이 사실이 지친 성도에게 큰 격려가 된다고 보는데, 이는 그들이 연약하고 흠 있는 대상에게 신뢰를 두지 않음을 확신하기 때문이다. (엡 3:20, 재림교주석)


이에게

 바울이 서신에서 지금까지 제시한 내용 전체가 장엄한 송영에 요약돼 있다(20, 21절). 하나님을 향한 찬양은 회심한 심령에서 기꺼이 터져 나온다. 성경에는 각기 독특한 사상이 들어 있는 송영이 많다(롬 16:25~27; 딤전 6:15, 16; 계1:6). 여기서 사도는 형용 못 할 하나님의 능력과 사람을 향한 그분의 무한한 사랑을 깨닫고 압도됐다. (엡 3:20, 재림교주석)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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