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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과 수평적 속죄 : 십자가와 교회 (핵심 Q&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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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이봉주 작성일23-07-25 18:02 조회1,146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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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과 수평적 속죄(水平的贖罪): 십자가(十字架)와 교회(敎會)

                             (7월 29일(안) / 일몰: 오후 7시 44분)


<기억절(記憶節)>

“이제는 전에 멀리 있던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그리스도의 피로 가까워졌느니라 그는 우리의 화평이신지라 둘로 하나를 만드사 원수 된 것 곧 중간에 막힌 담을 자기 육체로 허시고”(엡 2:13~14). 


<서언(緖言)>

십자가는 죄인을 못 박아 죽이던 십자가의 형틀이다. 그러나 죄의 흉악성(凶惡性)을 상징(象徵)하는 † 자(字)모 양의 형틀에서 "예수님"께서 모든 사람의 죄를 대속(代贖)하시기 위하여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셨다. 그러나 십자가(十字架)는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關係)를 회복(回復) 시킬 뿐만 아니라, 십자가는 수직적(垂直的)으로 인간과 하나님과의 화목(和睦)하도록 인도(引導)하셨으며 수평적(水平的)으로는 사람과 사람을 화해(和解)시키는 능력이 있어 깨어진 관계(關係)를 회복하며 예수그리스도 안에서 막힌 담을 허무는 화해(和解)와 평화(平和)와 거룩한 성전(聖殿)인 새 공동체(共同體)를 향(向)한 하나님의 이상(理想)을 잘 보여주신다.


7월 23일 (일) 그리스도 안에서 가까워짐 


(Q)~예수님 밖에 있는 분열(分裂)된 유대인과 이방인(異邦人) 사이를 불화(不和)하던 그것과 같이, 인간관계(人間關係)의 화해(和解)는 어떻게 하여야 온전히 치유(治癒)될 수 있겠습니까? (엡 2:16)


(A)~⑴십자가(十字架)는 화목(和睦)의 수단(手段)과 원수(怨讐)된 것이 소멸(消滅)된 장소(場所)로 언급(言及)된다. 십자가가 위대한 평준기(平準機)이자 모든 사람을 위한 공통분모(共通分母)인 이유는, 그리스도가 모든 사람을 위해 돌아가셨으며 그분 외에는 다른 구원(救援)의 길이 없기 때문이다.


⑵. 바울 사도(使徒)는 에베소 교인들에게 권면(勸勉)하기를 적대 관계(敵對關係)있는 민족간의 화해(和解)의 근본(根本)이 십자가라는 사실을 강조한 말씀이며 이 십자가의 효력(效力)은 언제나 유효(有效)하다. 따라서 불안(不安)과 당파(黨派)로 갈라진 이 세상을 위해서는 복음(福音)만이 유일(唯一)한 해결책(解決責)이다. (골 1:20~23). 우리는 여기에서 무엇보다도 중요한 교회의 사명(使命)은 복음전파(福音傳播)와 그로 인한 화목(和睦)의 실천(實踐)이라는 사실을 발견할 수 있다. (고후 5:20: 딤후 4:2)


7월24일(월)화해(和解):십자가(十字架)에서 주신 하나님의 선물(膳物) 


(Q)~바울이 십자가(十字架)에 대해 말하는 그것과 십자가가 우리의 관계(關係)를 어떻게 변화(變化)시키는지에 대해 요약(要約)해 보세요. (엡1;7~8, 엡4:32, 2:13~14, 2:16, 5:2, 5:25)


(A)~바울은 본래 에베소 인들이 처해 있었던 비참(悲慘)한 정황(情況)을 설명하고 있다. 그들을 깨우치기 위해서 그는 본문에 "그러므로 생각하라"(엡2:11절)라고 하였다. 이 말씀은 "너희가 전에는 무엇이었는지 기억(記憶)하고 지금은 무엇이 되었는가를 비교하라. 그리고 너희가 스스로 겸손(謙遜)하고 하나님께 사랑과 감사를 드리도록 하라"는 뜻의 말씀이다. 회개(悔改)한 죄인들은 과거(過去)에 그들이 처하여 있던 본래적(本來的)인 불행과 죄 된 상태를 자주 회고(回顧)해야 한다는 사실을 기억하자. 사도(使徒)는 또한 그들에게 "육체로 이방인이요"((엡2:11절)이라고 말하였다. 이는 즉 본성의 타락 가운데서 살고 은혜의 언약에 참여하고 있다는 외적인 표시가 되는 할례를 못 받은 자도 있었다는 말이다. 즉 이러한 자들에게 은혜로 구원(救援)을 베풀어 주심을 생각한다면 죄인 된 우리에게 주신 하나님의 선물이 곧 화해(和解)를 깨닫게 될 것이다. (엡 2:14~16).


1. "메시아에 대한 지식이 없고 구세주 안에서 또는 그분과 관계를 맺음으로써 주어지는 구원의 유익을 모르는 그리스도 없는 상태에 있었다"라는 말이다. (엡2:12절).

2. "이스라엘 나라 밖의 사람이었다" (엡2:12절). 

3. "약속의 언약들에 대하여 외인이었다" (엡2:12절).

4. 그들은 현세의 삶을 초월하는 소망이 없다. (엡2:12절).


7월 25일 (화) 막힌 담을 헐어내시고 


(Q)~(엡2:14~15) 절의 “중간에 막힌 담을 허시고”를 에베소 교인들뿐만 아니라 지금까지도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잘못 해석 할 뿐만 아니라 잘못 적용하고 있다. 이 말씀을 올바르게 정리하여 보세요.


(A)~“중간에 막힌 담”이란? 문자적으로 “울타리 칸막이벽”, 즉 “울타리로 쓰이는 칸막이벽”을 의미한다. 이 비유적(比喩的) 표현(表現)은 이방인(異邦人)의 뜰과 유대인의 뜰을 구분(區分)한 성전(聖殿) 안에 있는 담에서 비롯되었을 것이다. 이 담은 어떤 이방인도 감히 넘지 못했다. 그러나 바울이 말하고자 하는 의미는 이방인(異邦人)과 하나님의 백성 사이를 갈라놓은 율법의 잘못된 사용(使用)을 반대(反對)하지만, 도덕법(道德法)인 십계명을 폐(廢)했다는 말씀이 아니다. 이 의문(儀文)의 법(法)이 예수님의 십자가로 폐지(廢止)되어서 이제는 그리스도 안에서 모두가 담이 없는 하나가 되었다는 말씀이다.


(엡2:14) 절에서 바울이 하는 말씀은 짐승을 잡아 제사(祭祀) 지낸 의문(儀文)의 제사법(祭祀法)으로 도덕적(道德的) 율법(律法) 즉 십계명(十誡命)을 폐지(廢止)한 것이 아니라, 십자가상(十字架上)에서 의식(儀式)들은 끝이 났음을 말씀하는 것이다. (골 2:14-17) 이 말씀은(성소봉사(聖所奉事)와 관계가 있는 의식(儀式)들은 상징(象徵)과 그림자로 그리스도를 예표(豫表) 하는 것으로서 그리스도의 십자가 때에 도말(塗抹)되었다. 왜냐하면, 십자가 위에서 참되고 완전한 제물(祭物) 곧 하나님의 어린양의 죽음으로 표상은 그 원형(原形)을 만났기 때문이었다. (원고 72, 1901).


 “의문(儀文)에 속한 계명(誡命)의 율법(律法)”이 여기서는 십계명 같은 도덕법이 아니라 제사제도(祭祀制度)를 말하는 율법(律法)임을 안다면 문제는 간단하다. 그리스도의 사명(使命)을 상징(象徵)하는 모든 제사제도의 규칙(規則)은 십자가(十字架)에서 다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7월 26일 (수) 평화(平和)의 사자(使者), 예수 


(Q)~바울은 (에베소서 2:17~18절)에서 그리스도의 사역(使役)을 어떻게 요약(要約)하고 있으며, 그러한 예수님이 우리의 “화평(和平)이시며” 그분의 십자가(十字架)가 평화(平和)를 창조(創造)한다고 주장(主張)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엡 2:14~16)


(A)~예수님은 우리의 화평(和平)이신지라. 그리스도는 화평(和平)케 하시는 분일 뿐만 아니라, 그 자신이 평화(平和)요 연합(聯合)과 화평(和平)의 띠이시다. 그분 안에서 인류의 모든 분열(分裂)은 사라질 것이다. 구약(舊約)에서는 화평(和平)이라는 개념이 메시아의 화평(和平)과 연결되곤 한다. (사 9:6; 참조 미 5:5). 하나님 앞에서 그들에게 화평(和平)이 됨으로써 그리스도는 유대인과 이방인(異邦人) 사이에 화평(和平)을 이루셨다. "예수님"은 평화(平和)의 사도(使徒)요 사랑의 사도(使徒)이시다. 암흑을 뚫고 진리의 불을 밝힌 구원자(救援者)이시다. 그리스도는 평화의 사자(使者)이시다. 예수님의 평화의 사역(使役)은 이 땅에서의 봉사기간(奉仕期間)을 넘어 신자(信者)들의 삶까지 이어지는 사역(使役)이며 에베소서의 핵심 주제(核心主題)다. 


7월 27일 (목) 거룩한 성전(聖殿)인 교회(敎會)


(Q)~(엡 2:19~22)에서 바울이 교회를 성전(聖殿)으로 비유(譬喩)한 그것과 너희는 사도(使徒)들과 선지자(先知者)들의 터 위에 세우심을 입은 자라 그리스도 예수께서 친히 모퉁잇돌이 되셨느니라, 그의 안에서 건물(建物)마다 서로 연결(連結)하여 주 안에서 거룩한 성전(聖殿)이 되어 가고, 라는 바울의 말씀은 어떤 의미(意味)로 이해(理解)하십니까?


(A)~‘성도(聖徒)는 모든 하나님의 백성으로 즉 그리스도인을 의미한다. 이제 에베소 교인들은 과거(過去)의 소외(疏外)된 이방인(異邦人)의 신분(身分)에서 벗어나 나머지 그리스도인들과 연합(聯合)한 그리스도인들이다. 또한, 그들은 하나님의 권속(眷屬) 즉 가족(家族)이라는 말씀으로 예수님 안에서 하나가 되는 원칙(原則)이다. 성전(聖殿)에서의 예배(禮拜)가 금지(禁止)되었던 이방인(異邦人)이 새 성전(聖殿)을 구성(構成)하는 자로서 제시(提示)된 성전의 은유(隱喩)는 새 공동체(共同體)를 향한 하나님의 이상(理想)을 잘 보여준다.


교회는 우연히 쌓인 돌무더기가 아니라, 형태(形態)를 갖추고 결합(結合)된 것이다. 각 돌은 각자(各自)의 위치(位置)가 정해져 있다. 건물의 안전(安全)도는 주의 깊은 계획에 달려 있다. 만약 모든 돌이 적당한 장소에 있어서 산 돌이신 그분이 빛을 발하게만 한다면 세상에 많은 은혜를 끼칠 수 있는 교회의 현 상태를 보시고 하늘은 참으로 놀라지 않겠는가! 빛을 내지 않는 돌은 가치(價値) 없는 돌이다. 우리 교회의 가치(價値)는 생명이 없고 광택이 없는 돌로 이루어져 있지 않고 산 돌, 곧 크신 모퉁이 돌이신 의(義)의 태양으로부터 밝은 빛줄기를 받는 돌들로 되어 있다. (편지 15, 18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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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미부록(末尾附錄)>


⑴.

“그리스도께서 타락한 사람을 구원하시기 위하여 자신을 낮추신다는 것은 온 우주가 경탄할 일이었다. 별에서 별로, 세계에서 세계로 다니시면서 만물을 감독하시고 그분의 섭리로 창조하신 광대한 우주의 각계각층의 존재들에게 그들의 필요를 공급하시는 그분께서 하나님(예수님)의 영광을 떠나 몸소 인성을 취하시기로 동의하신 것은 죄 없는 다른 세계들의 지적 존재자들이 이해하기를 원하는 신비였다. 그리스도께서 인간의 모습으로 우리 세상에 오셨을 때 온 우주는 그분께서 말구유에서 갈 바리에 이르기까지 피 묻은 길을 한 걸음 한 걸음 옮겨 놓으시며 가로지르시는 모습을 비상한 관심을 가지고 지켜보았다. 하늘은 그분이 받으신 능욕과 멸시를 주목하였고, 그것이 사단의 선동으로 말미암은 것임을 알았다. 그들은 서로 적대적인 세력의 역사(役事)가 진행되는 것을 주목하였다. 사단은 인류에게 계속하여 흑암과 슬픔과 고통을 가져다주려고 노력하고 있었고 그리스도께서는 그것을 막고 계셨다. 그들은 빛과 어두움 사이의 투쟁이 더욱 격렬해지는 것을 지켜보았다. 그리고 그리스도께서 십자가 위에서 숨을 거두시며 고통 중에 “다 이루었다”고 부르짖으실 때 승리의 함성이 온 하늘과 모든 세계에 울려 퍼졌다. 그렇게 오랫동안 이 세상에서 진행되어 오던 대쟁투의 승부가 그때 판가름이 났다. 승리자는 그리스도이셨다. 그분의 죽음은 아버지 하나님과 아들이 사람을 위하여 자기 부인과 희생의 정신을 발휘하실 만큼 충분한 사랑을 가지셨는지에 대한 의문을 풀어 주었다. 사단은 거짓말쟁이요 살인자로서의 자신의 참 성격을 드러냈다. 하늘의 지적 존재자들을 통치하도록 허용되었었더라면 사단은 자기의 권세하에 있는 사람들을 다스렸던 바로 그 같은 정신을 나타내었을 것이라는 사실이 밝히 드러났다. 충성스러운 우주는 목소리를 합하여 하나님의 통치를 찬양하였다. “(부조, 69)


⑵.

“광야의 시험에서, 겟세마네 동산에서, 십자가 위에서 우리의 구주께서는 흑암의 왕 사단과 싸우셨다. 하나님(예수님)의 상처는 인류를 위한 하나님(예수님)의 승리의 트로피가 되었다.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달리셔서 고통 중에 신음하시고 악의 영들이 기뻐하며 악인들이 욕을 퍼붓던 그때 과연 사단은 그리스도의 발꿈치를 상하게 하였다. 그러나 바로 그 행위는 뱀의 머리를 부수고 있었다. 그리스도께서는 “사망의 세력을 잡은 자 곧 마귀를” 멸하셨다. 이 행위는 반역 두목의 운명을 결정하였고 구속의 경륜을 영원히 확실하게 하였다. 그리스도께서 돌아가심으로 그 죽음의 권세를 이기셨고 부활하심으로 하나님(예수님)의 모든 추종자에게 무덤의 문을 여셨다. 그 최후의 대투쟁에서 우리는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창 3:15)라는 예언이 성취된 것을 본다.”(선지, 701)


⑶.

“하늘 성소에서 사람을 위하여 진행되는 그리스도의 중보 사업은 구원의 계획에 있어서 십자가상에서의 그분의 죽음과 마찬가지로 긴요하다. 그분께서 부활하신 후 승천하여 하늘에서 완성하실 일은 그분의 돌아가심으로 시작되었다. 우리는 믿음으로 “앞서가신 예수께서 … 우리를 위하여 들어가”(히 6:20)신 그 휘장 안으로 들어가야 한다. 거기는 갈바리의 십자가에서 나온 빛이 비치고 있다. 우리는 거기서 구속의 오묘를 더욱 밝히 살펴볼 수 있다. 인류의 구원은 하늘에서 무한한 값을 치르고 완성된다. 거기에 치러지는 희생은 하나님의 율법을 범한 데 대한 최대한의 요구에 해당하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아버지의 보좌로 나아가는 길을 열어 주셨으므로 그분을 믿음으로 그분께 나아가는 모든 사람의 진정한 소망도 그분의 중보를 통하여 하나님 앞에 상달 될 수 있다.”(쟁투, 489)


⑷.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영원토록 구속받은 자들의 연구와 찬양의 대상이 될 것이다. 그들은 영광을 입으신 그리스도를 통하여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를 볼 것이다. 광대한 우주의 무수한 세계들을 창조하시고 유지하시는 그분, 그룹과 영광의 스랍들이 즐겨 경배하는 사랑받는 하나님의 아들, 하늘의 왕께서 타락한 인류를 구원하시고자 자신을 낮추시고 죄의 치욕과 슬픔을 지시고 아버지의 얼굴에서 숨겨진 채 마침내 잃어버린 세상의 죄 때문에 갈바리의 십자가 위에서 하나님(예수님)의 심장이 터지고 생명이 떠나간 사실은 결코 잊혀지지 않을 것이다. 온 우주의 창조자시며 모든 운명의 결정자께서 인류를 위한 사랑 때문에 하나님(예수님)의 영광을 버리시고 스스로를 낮추셨다는 것은 영원히 우주의 경이와 존경을 자아낼 것이다. 구원을 받은 모든 민족이 그들의 구주를 쳐다보고 그분의 얼굴에서 아버지 하나님의 영원한 영광이 빛나고 있는 것을 볼 때, 또한 그들이 영원부터 영원까지 존속하는 그분의 보좌를 보고, 그분의 나라가 끝이 없을 것을 알게 될 때 그들은 환희에 사로잡혀 노래를 부를 것이다. “우리를 그 귀하신 보혈로 하나님께 구속하시고자 죽임을 당하신 어린양이 영광과 찬송을 받으시기에 합당하도다.””(쟁투, 651)


⑸.

“십자가가 없었다면 인류는 아버지와 연합할 수가 없었다. 거기에 우리의 모든 소망이 달려 있다. 십자가로부터 구주의 사랑의 빛이 비쳐 나오므로 십자가의 발아래에서 죄인이 그를 구원하시기 위하여 돌아가신 분을 쳐다볼 때, 그는 충만한 기쁨으로 기뻐할 수 있을 것이다. 이는 그의 죄가 사함을 받은 까닭이다. 죄인이 십자가 곁에 믿음으로 무릎을 꿇을 때, 그는 인간이 도달할 수 있는 최고의 장소에 도달한 것이다.”(행적, 209)


⑹.

“십자가를 통하여 우리는 하늘 아버지께서 무한한 사랑을 가지고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사실을 배운다. 바울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갈 6:14 )다고 부르짖은 것을 우리는 이상히 여길 수 있는가? 또한, 십자가를 자랑하는 것은 우리의 특권이며, 우리를 위하여 자신을 주신 그분께 우리 자신을 전적으로 바치는 것도 우리의 특권이다. 그리할 때 우리는 갈바리에서 흘러나와 우리의 얼굴을 비추는 그 빛을 받아, 흑암 중에 있는 사람들에게 나아가 이 빛을 나타낼 수가 있게 될 것이다.”(행적, 210)


⑺.

“바울은 영혼들을 십자가 아래로 인도하고자 노력하면서 방탕한 자들을 직접 책망하거나 그들의 죄가 거룩하신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얼마나 흉악한지를 보이고자 하지 아니하였다. 오히려 그는 그들 앞에 생애의 참 목적을 제시하였으며 저희가 받아들일 것 같으면 세욕과 죄에서 그들을 끌어올려 순결과 의로 인도할 거룩하신 교사의 교훈으로 그들의 마음에 감명을 주고자 노력하였다. 그는 특별히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기에 합당하다고 여김을 받을 사람들이 얻어야 할 실제적인 경건과 성화를 강조하였다. 그는 그리스도의 복음의 빛이 그들의 마음의 암흑을 꿰뚫어 그들의 부도덕한 행습이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얼마나 불쾌한 것인지 깨닫게 되는 것을 보기를 갈망하였다. 그러므로 그들에게 가르친 그의 교훈의 요지는 그리스도와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분이었다. 그는 그들의 가장 진지한 연구와 최고의 기쁨은 하나님께 대한 회개와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통한 놀라운 구원의 진리여야 함을 그들에게 보여주고자 하였다.”(행적, 272)


⑻.

“그리스도를 바라보는 사람들은 모두 그와 같을 것이다. 우리가 예수께 더욱 가까이 가면 갈수록, 그분의 품성의 순결을 더욱 분명히 알면 알수록 우리는 더욱더 죄의 극악함을 알게 되고 자신들을 높일 마음이 더욱더 적어질 것이다. 하나님을 향한 계속적인 영혼의 발돋움, 계속적이며 열렬한 죄에 대한 마음을 찢는 회개와 그분 앞에 마음을 겸비하게 하는 일이 있을 것이다. 우리의 그리스도인 적 경험에 있어서 진보의 매 발걸음이다. 우리의 회개는 깊어질 것이다.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만 우리의 충분함이 있다는 것을 알 것이며 다음과 같은 사도의 고백이 우리의 것이 되게 할 것이다. “내 속 곧 내 육신에 선한 것이 거하지 아니하는 줄을 아노니”,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 내가 또한 세상에 대하여 그러하니라”(롬 7:18; 갈 6:14).”(행적, 561)


⑼.

“우리가 그리스도의 생애를 깊이 명상하는 데 매일 한 시간을 바치는 것은 매우 좋은 일이다. 우리는 그의 생애를 한 조목 한 조목씩 연구하고, 각 장면 특히 그의 생애의 마지막 장면을 확실히 머릿속에 그릴 것이다. 이처럼 우리가 우리를 위한 그의 크신 희생을 깊이 생각할 때에 그에 대한 우리의 신뢰는 더욱 굳어질 것이며 우리의 사랑은 격발되고 우리는 더욱 그리스도의 정신에 깊이 물들게 될 것이다. 만일 우리가 마침내 구원을 얻고자 한다면 우리는 십자가 밑에서 크게 뉘우침과 겸손의 공과를 배워야 한다.”(소망, 83)


⑽.

“땅에 묻힌 씨앗은 열매를 가져오고 또다시 그 열매는 씨앗으로 뿌려진다. 이렇게 하여 수확은 증대된다. 그와 같이 갈바리 십자가 위에서의 그리스도의 죽음을 통하여 영생에 이르는 열매가 맺힐 것이다. 이 희생을 숙고하는 것이 그 희생의 열매로써 영생할 자들의 영광이 될 것이다.”(소망, 623)


⑾.

“우리의 영적 생활에 하나님의 말씀은 얼마나 더욱 그러한가! 예수께서는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영생을 가졌”다고 선언하셨다. 우리를 위하여 갈바리의 십자가 위에서 버리신 생명을 받아들임으로 우리는 거룩한 생애를 살 수 있다. 그리고 그분의 말씀을 받아들이고 그분이 명하신 일을 행함으로 우리는 이 생명을 받아들인다. 이렇게 하여 우리는 그리스도와 하나가 된다. 예수께서는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내 안에 거하고 나도 그 안에 거하나니 살아 계신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시매 내가 아버지로 인하여 사는 것같이 나를 먹는 그 사람도 나로 인하여 살리라”(요 6:54, 56, 57)라고 말씀하셨다. 이 성경 말씀은 특별한 의미에 있어서 성만찬에 적용된다. 믿음으로 우리 주님의 큰 희생을 깊이 생각할 때에 그 영혼은 그리스도의 영적 생애와 같아지게 된다. 그 사람은 모든 성만찬 예식 때마다 영적 능력을 받을 것이다. 이 예식은 신자로 그리스도와 밀접한 관계를 맺게 하는 산 연결을 이루고 그리하여 하나님과도 밀접한 관계를 맺게 한다. 특별한 의미에 있어서 이것은 의존적인 인간과 하나님 사이의 연결을 이룬다.”(소망, 660)


⑿.

“구주의 다함이 없는 사랑을 바라보는 자는 사상이 향상되고, 마음이 순결하게 되고, 품성이 변화될 것이다. 그는 나아가 세상의 빛이 될 것이며 이 오묘한 사랑을 어느 정도 반사할 것이다. 그리스도를 생각하면 할수록 더욱더 우리는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 내가 또한 세상에 대하여 그러하니라”(갈 6:14)라고 말한 사도의 말을 더욱 완전히 받아들일 것이다.”(소망, 661)


⒀.

“흠 없는 하나님의 아들이 십자가에 달리셨으며 그분의 살은 채찍에 맞아 찢어졌고, 그처럼 자주 축복하시기 위하여 펴시던 그분의 손은 나무 막대기에 못 박히셨다. 사랑의 봉사로 피곤할 줄 모르던 그분의 발도 나무 기둥에 못 박히셨고, 그분의 고귀하신 머리는 가시관에 찔리셨다. 그분의 떨리는 입술은 비통의 부르짖음을 발했다. 그분이 참으신 모든 것 곧 그분의 머리와 손과 발에서 흘러내린 핏방울과 그분의 몸을 괴롭힌 고통과 아버지께서 얼굴을 숨기심으로 그분의 영혼을 가득 채웠던 말할 수 없는 고민은 우리 인류 각 사람에게 이렇게 말한다. 하나님의 아들이 이와 같은 죄악의 짐을 지기로 동의하신 것은 다 그대를 위함이다. 그리고 그대를 위하여 그분은 사망의 권세를 깨뜨리시고, 낙원의 문을 여신다고 선언한다. 성난 파도를 잔잔케 하시고 거품이 이는 파도 위를 걸으셨으며 귀신들로 떨게 하시고 질병이 물러가게 하셨으며, 소경의 눈을 뜨게 하시고 죽은 자를 살리셨던 그분이 자기 자신을 제물로 십자가 위에 바치셨다. 이것은 다 그대를 사랑하기 때문에 그렇게 하신 것이다. 죄를 짊어지신 그분은 거룩한 공의의 진노를 견디시고 그대를 위하여 죄 그 자체가 되셨다.”(소망, 755)


⒁.

에베소인들 가운데 일어난 변화(2)(에베소서 2:11-13)

본문에서 바울은 본래 에베소 인들이 처해 있었던 비참한 정황을 설명하고 있다. 그들을 깨우치기 위해서 그는 본문에 "그러므로 생각하라"(11절) 고 하였다. 이 말씀은 "너희가 전에는 무엇이었는지 기억하고 지금은 무엇이 되었는가를 비교하라. 그리고 너희가 스스로 겸손하고 하나님께 사랑과 감사를 드리도록 하라"는 뜻의 말씀이다. 회개한 죄인들은 과거에 그들이 처하여 있던 본디 불행과 죄 된 상태를 자주 회고해야 한다는 사실을 기억하자. 사도는 또한 그들에게 "육체로 이방인이요"(11절) 라고 말하였다. 이는 즉 본성의 타락 가운데서 살고 은혜의 언약에 참여하고 있다는 외적인 표시가 되는 할례를 못 받은 자도 있었다는 말이다. 또 그들에게 "무할례당이라 칭함을 받는 자들이라"라고 말한다. 즉 "너희는 무할례 때문에 외적인 고백만을 즐기고 외적인 의식 외에는 더 이상 바라지 않는 외식 적인 유대인들에게 비난과 책망을 받았도다"라는 말이다. 위선적인 신앙 고객자들은 외적인 우수성에 의해 자기들이 평가되기를 원하며 또 그것이 부족한 타인들을 비난하고 꾸짖는다는 사실을 기억하자. 몇 가지 특징을 들어서 그들의 경우가 비참함을 표현하였다(12절). "너희가 이방인으로 있던 그때에는 또한 회개하지 않은 상태에 있었던 그때에는" 다음과 같았다고 말한다.


⒂.

(엡2:14-16) 십자가에 못 박힌 분은 그리스도이지 율법이 아님(롬 3:31)

 십계명은 살아있고 영원히 살아있을 것이다. 표상이 그리스도의 죽음에서 그 원형을 만났을 때 희생과 헌물로 예배를 드릴 필요가 없어지게 되었다. 그리스도 안에서 그림자는 그 실체에 도달한 것이다. 하나님의 어린양은 완전한 제물이었고, 충분한 제물이었다.

 하나님의 율법은 여호와의 보좌가 있는 한 그 고상한 성질을 계속 유지할 것이다. 이 율법은 하나님 품성의 표현이다. 표상, 그림자, 그리고 희생과 헌물은 십자가에서 그리스도께서 돌아가신 후에는 아무런 효험이 없지만, 하나님의 율법은 십자가에 못 박히지 않았다. 만약 율법이 십자가에 못 박혔다면 사단이 하늘에서 얻고자 하였던 것을 다 얻었을 것이다. 사단이 하늘에서 이것을 시도하였기 때문에 하늘에서 추방된 것이다. 그는 그가 속여 넘긴 그의 사자들과 함께 하늘에서 떨어졌다. 그는 오늘날 하나님의 율법에 관하여 사람들을 기만하고 있다. (원고 167, 1898).


(16)

오늘날 하나님께서는 낮은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높은 사람 중에서도 영혼들을 찾고 계신다. 주께서 당신의 사업에 관계하기를 원하시는 고넬료와 같은 사람들이 세상에는 많이 있다. 그들은 주의 백성에게 호감이 가기는 하지만 그들을 세상에 붙들어 매는 인연이 그들을 굳게 붙잡고 있다. 그들이 그리스도에게로 돌아서는 데는 도덕적인 용기가 필요하다. 이 영혼들을 위하여 특별한 노력을 기울여야 하는데, 그들은 저희의 책임과 인간적인 유대 때문에 큰 위험에 빠져 있기 때문이다. (AA 139) 


(17)

믿는 자들에게 그리스도는 확고한 기초가 된다. 이 산 돌 위에 유대인과 이방인은 다 같이 세움을 입었다. 그것은 만인에게 충분한 만큼 넓고, 온 세계의 걱정과 근심을 지기에 충분할 만큼 튼튼하다. 이것은 바울 자신이 분명히 깨달은 사실이었다. 그의 봉사 말년에 복음 진리에 대한 그들의 사랑에 굳게 선 이방 신도들의 무리에게 편지하면서 사도는 기록하기를 “너희는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터 위에 세우심을 입은 자라 그리스도 예수께서 친히 모퉁잇돌이 되셨느니라”(엡 2:20)라고 하였다. (AA 175.3)


(18)

(엡2:14~16) 사단의 파렴치한 거짓말(요일 3:4)

 하나님이 사람에게, 현세와 내세에서 그의 계명을 범하고 사는 특권을 얻어 주시기 위해서 그의 독생자를 이 세상에 주신 그 무한하신 희생을 치르신 것이 아니다. 이것은 사단에게서 비롯된 파렴치한 거짓말로써 그 거짓되고 기만적인 성격이 드러나야만 한다. 사단이 그토록 간절히 취소되고 무효가 된 것으로 간주하려 했던 이 율법은 크신 의의 도덕적 표준이다. 그 율법 중 어느 계명을 범해도 그것은 하나님을 대적하는 범죄 행위이며, 거룩한 율법이 정한 형벌을 면치 못할 것이다. 여호와의 율법을 무효화시키고 계속해서 죄 가운데서 사는 세계의 모든 거민들 에게 틀림없이 죽음이 임할 것이다(원고 72, 1901).


(19)

 너희도 성령 안에서 하나님의 거하실 처소가 되기 위하여 예수 안에서 함께 지어져 가느니라. 본 절의 ‘처소’는 ‘예루살렘 성전’이나 ‘하늘 처소’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이방 그리스도인들이 참여하는 ‘전체 교회’를 가리킨다(Lincoln). ‘함께 지어져 가느니라’에 해당하는 헬라어 ‘쉬노이코도메이스데’ 또한 현재 시상으로 처소가 계속 지어져 가고 있음을 나타낸다. 한편 하나님이 교회에 거하시는 수단은 ‘성령’이며(고전 3:16) 교회는 성령의 작용으로 지어진다(Wood).” (엡 2:22, 만나주석)


(20)

만약 모든 돌이 적당한 장소에 있어서 산 돌이신 그분이 빛을 발하게만 한다면 세상에 많은 은혜를 끼칠 수 있는 교회의 현 상태를 보시고 하늘은 참으로 놀라지 않겠는가! 빛을 내지 않는 돌은 가치 없는 돌이다. 우리 교회의 가치는 생명이 없고 광택이 없는 돌로 이루어져 있지 않고 산 돌, 곧 크신 모퉁이 돌이신 의의 태양으로부터 밝은 빛줄기를 받는 돌들로 되어 있다(편지 15, 1892). (엡 2:19, 화잇주석)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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