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과-높임 받으신 예수님의 권능 - (핵심Q&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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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이봉주 작성일23-07-12 14:20 조회2,974회 댓글0건첨부파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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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과 높임 받으신 예수 님의 권능(權能)
(7월 15 (안) / 일몰: 오후 7시 53분)
<기억절(記憶節)>
“그의 힘의 위력으로 역사(役事)하심을 따라 믿는 우리에게 베푸신 능력의 지극히 크심이 어떠한 것을 너희로 알게 하시기를 구하노라 그의 능력이 그리스도 안에서 역사(役事)하사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리시고 하늘에서 자기의 오른편에 앉히사”(엡 1:19~20).
<서언(緖言)>
예수 님의 높임을 받으심에 있어서 세상의 어떤 권세(權勢)보다 높으신 권능(權能)의 주인(主人)이심을 보여주시며, “지금(現在)과 닦아올 미래(未來)에 대하여 축복과 능력은 예수그리스도의 높임을 받으심을 통해서 우리에게 이르러 임(臨)한다는 사실을 기억하여 성도(聖徒)들의 삶 속에 기도(祈禱)를 통하여 예수님과 연결(連結)되며 그 연결로 인(因)하여 하나님께서 주시는 능력(能力)을 발견(發見)하게 된다는 사실을 망각(忘却)해서는 안 될 것이다.
7월 9일 (일) 기도(祈禱)와 감사(感謝)
(Q)~쉬지 말고 기도하라는 것은 어떻게 기도하라는 의미이며, (살전 5:17), 사도 바울이 에베소교회에 감사(感謝)의 기도(祈禱)를 하나님께 드릴 수 있었던 것은? (살전 5:17~18)
(A)~“쉬지 말고 기도(祈禱)하라”(살전 5:17)라는 말씀은 문자적으로는 “끊임없이 기도하라”로서 헬라어에서는 계속의 의미(意味)가 강조된 것으로, 그리스도인은 자신의 생애(生涯) 속으로 들이마시는 끊임없는 기도(祈禱)의 영(靈)이 있어야 한다는 것으로, 하늘과 연결(連結)이 결코 끊어져서는 안 된다는 말씀으로 바울은 “밤과 낮으로” 일했지만(살전2:9) 또한 “주야(晝夜)로” 간구(懇求)했다. (살전3:10). 많은 활동이 그에게서 기도(祈禱)를 밀쳐내지 못했다. 그의 하늘 아버지와 활기찬 연결이 언제나 첫째가 되었다. 우리도 그렇게 되어야 한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이 에베소교회에 감사의 기도를 드릴 수 있었던 이유는 바울에게 밝고 즐거워하는 성품(性品)이 있었음을 나타내는데, 그런 특성이 없었다면 그는 여러 고난(苦難)을 결코 견디지 못했을 것이다. 즉 기도(祈禱)는 찬양(讚揚)과 감사의 문(門)을 여는 열쇠로 성령(聖靈)에 의한 믿음의 역사(役事)로 사랑의 수고(受苦)를 영위(榮位)한 신앙의 결과로 이르러 오기 때문이다.
(살전5:18 범사(凡事)에. 감사(感謝)한 것은)
즉 기쁨에 처(處)했든, 슬픔에 처(處)했든 상관없이 모든 환경(環境)에서(참조 빌 4:6; 골 4:2 주석). 상관없이 우리는 우리를 대적(對敵)하는 것처럼 보이는 것들까지도 우리의 유익(有益)을 이루어낼 수 있음을 분명히 확신하게 된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우리를 해(害)롭게 할 것들에 대하여 감사하도록 우리에게 요구(要求)하지 않으실 것이기 때문이다. (치료봉사, 255). 다니엘은 그의 생명을 취(取)하고자 계획된 칙령(勅令)을 알았을 때도 감사했다. (참조 단 6:10). 바울은 최악(最惡)의 역경(逆境)에서도 감사하는 인상적(印象的)인 모본(模本)을 남겼다. (참조 행 27:20, 35). 감사하는 것은 그리스도인의 습관(習慣)이 되어야 하고, 건강과 기쁨은 그것에 의(依)하여 증진(增進)된다. (치료봉사, 251).
7월 10일(월) 성령(聖靈)의 지혜(智惠)를 체험(體驗)하기
(Q)~기도는 어떤 기능과 역할은 하며, 사도 바울이 에베소 교인들이 성령의 지혜를 체험하도록 기도한 내용은 어떤 것이었는가? (앱 1:16~19)
(A)~기도(祈禱)란
① 하나님과의 대화(對話)이다. ②영혼(靈魂)의 호흡(呼吸) ③하늘 창고(倉庫)를 여는 열쇠(Key) ④영혼(靈魂)의 생명(生命) = 영적생활(靈的生活)을 유지(維持)하는 것은 GOD(하나님)로 더불어 은밀(隱密)히 교제(交際)하는 일인 것이다.
바울은 에베소 교인들이 성령의 지혜를 체험하도록 기도한 내용은 ⑴하나님을 잘아 “그의 부르심의 소망”(앱 1:18)을 알도록 ⑵.성도(聖徒) 가운데 있는 하나님의 기업(基業)의 영광(榮光) 풍성(豊盛)함이 어떤 것인지를 깨닫도록 구약(舊約)의 개념(槪念)을 상기(想起) 시키며(신 9:29, 신 32:9, 슥2:12, 앱 1:11 절) ⑶믿는 우리에게 베푸시는 하나님의 힘과 능력을 체험한 믿음으로 승리한 삶이 되길 기도(祈禱)하였다.
7월 11일 (화) 부활(復活)의 능력(能力)을 맛보기
(Q)~기도 가운데 발견하는 모든 복과 능력은 무엇에 기초를 두고 있으며, 바울은 하나님의 능력을 가장 잘 보여주는 어떤 두 가지 구속(救贖)사적 사건(事件)을 제시(提示)하고 있습니까? ((엡 1:20~31절),
(A)~⑴.예수 님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復活)하신 것과 ⑵.예수 님께서 우주(宇宙)의 보좌(寶座)에 오르신 것을 언급하면서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復活)을 통한 믿는 자의 경험으로 거듭나길 간절히 간구(懇求)하며 예수 님의 권능은 하나님의 능력의 광대(廣大)하심을 가장 잘 보여주고 있다.
그리스도의 부활(復活)에 역사(役事)했던 같은 능력이 지금 신자(信者)의 심령(心靈) 속에서도 역사(役事)한다는 것은 놀라운 사실이다. 그 능력이 바로 그리스도의 죽은 육체(肉體)에 임(臨)했듯이, “허물과 죄로 죽었던” 자들에게도 임(臨)한다. (엡 2:1; 참조 롬 8:11; 고후 4:14). 그리스도는 영광스러운 몸으로 일어나서 하나님 우편에 앉는 권위를 얻으셨다. 그분의 부활은 성도(聖徒)의 부활(復活)을 보증(保證)하며(롬 4:25; 고전 15:20~22), 그분이 높임 받으신 것 역시(亦是) 성도(聖徒)가 마지막에 높임 받을 것을 보장한다. (참조 엡 1:18 EG 주석)
7월 12일 (수) 모든 능력(能力) 위에 계신 그리스도
(Q)~성부(聖父) 하나님은 예수 님을 어떤 권능(權能)으로 인도하셨으며, 바울이 모든 권세(權勢)와 그리스도를 비교(比較)해 보이는 이유는 무엇이라 생각합니까? (엡 1:21)
(A)~사도 바울은 성부(聖父) 하나님과 함께 우주(宇宙)의 보좌(寶座)에 앉아 높이 들리신 예수님을 찬양(讚揚)하셨다. 이는 아버지와의 관계 속에 예수 님의 위치(位置)를 정의(定義)한 다음 “하늘에서 자기의 오른편에 앉히사”(앱 1:20). 이처럼 사도 바울은 예수님과 “권세(權勢)들”과의 관계를 정의(定義)하고 예수님은 성부(聖父) 하나님 아버지와 동등하신 분으로서 모든 권세보다 “훨씬 위(上)에 (앱 1:21)에 계심을 설명하고 있다. 즉 예수님과 권세들을 비교한 것은 예수그리스도는 비교할 수 없이 높으신 분이실 뿐만 아니라 앞으로 도래(到來)할 세상까지도 통치(統治)하 실뿐이라는 것을 증거(證據)하기 위해서이다.
7월 13일 (목) 예수, 만물(萬物), 그리고 그의 교회(敎會)
(Q)~ 어떻게 하면 세상 권세를 이기는 그분의 권능이 우리에게 나타날 수 있으며 (엡 1:16~19), 그리스도의 높이 올리심은 그분의 권세(權勢)에 대해 무엇을 말해줍니까? (히 1:6, 계 5:12)
(A)~그리스도는 천상(天上)과 지상(地上)의 모든 권세보다 뛰어나시다. 그분은 전 우주(宇宙)에서 최상의 권위(權威)를 가진 만군의 주(主)이시다(참조 롬 8:38). 그러므로 바울은 에베소 지방의 현실을 직시하고 예수님 만이 최고의 권세임을 깨닫게 하려고. 하며 특히 영지주의(靈知主義) 이단(異端)의 점증(漸增)하는 영향에 비춰볼 때 쉽게 용납할 수 있는 개념(槪念) 곧 그리스도를 열등한 신격(sub deity)으로 여겨서는 안 된다는 점을 분명히 하고자 했다. 그는 당시 유대의 가르침으로 이미 익숙해진 용어를 사용하여(참조 외경 에녹 1서 61:10), 그리스도가 실제 혹은 가상(假像)의 지위고하(地位高下)를 막론하고 다른 모든 존재(存在)보다 우월(優越)하시다는 진리(眞理)를 밝힌다. (엡 1:21, 재림교주석) 이상과 같이 모든 권세를 이기시고 통치(統治)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삶에 나타난 권능(權能)이 예수그리스도를 머리로 삼은 교회에도 역사하며 그러한 것들이 바로 성도들의 기도와 직접 연결되어 있다는 것이다.
*******<말미부록(末尾附錄)>**********
01.
너희를 인하여 감사하기를 마지아니하고 내가 기도할 때에 너희를 말하노라.
바울은 기도할 때마다 에베소 교인들의 믿음과 사랑에 감사하는 것을 잊지 않았다.
이 감사는 에베소 교인들의 믿음과 사랑이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신 하나님의 사역으로 인해서 생겨난 것임을 암시한다(Lincoln). 한편‘말하노라’로 번역된 ‘므네이안 포이우메노스’은 단순히 ‘기억하다’라는 의미(remembering, NIV, RSV)보다 훨씬 구체적이고 명확한 표현이다(Foulkes). 왜냐하면, 이것은 사도 바울이 기도할 때에 기도 대상자의 성품과 인격 그리고 신앙의 정도와 처해 있는 환경을 기억하면서 하나님 앞에서 그의 이름을 불러가며 간구하는 것을 뜻하기 때문이다(Wood). 이런 바울의 기도는 에베소 교인들이 성숙을 향해 성장해갈 수 있도록 간구하는 중보 기도이다(17~19절). (엡 1:16, 만나주석)
02.
유사한 감사의 진술이 (롬 1:8; 고전 1:4; 빌 1:3; 골 1:3; 살전 1:2; 살후 1:3; 딤후 1:3; 몬 4, 5절)에도 나온다. 바울의 감사 정신은 감사의 표현을 “쉬지 말고” 하는 것이었기에 많이 볼 수 있다. 자주자주 감사를 표현하는 것은 바울에게 밝고 즐거워하는 성품이 있었음을 나타내는데, 그런 특성이 없었다면 그는 여러 고난을 결코 견디지 못했을 것이다. 안타까운 사실은 기쁨과 감사의 선율이 다수 그리스도인의 생애에 부족하다는 것인데, 이에 대한 해법 중에는 신앙생활의 행복한 경험들을 나누는 것이 포함된다. (엡 1:16, 재림교주석)
03.
또 형제들과 너희를 권면하노니 규모 없는 자들을 권계하며 마음이 약한 자들을 안위하고 힘이 없는 자들을 붙들어 주며 모든 사람을 대하여 오래 참으라 삼가 누가 누구에게든지 악으로 악을 갚지 말게 하고 오직 피차 대하든지 모든 사람을 대하든지 항상 선을 좇으라 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행적, 263)
04.
(살전5:17) 쉬지 말고 기도하라.
문자적으로는 “끊임없이 기도하라”로서 헬라어에서는 계속의 의미가 강조됨(참조 16절 주석). 그리스도인은 자신의 생애 속으로 들이마시는 끊임없는 기도의 영이 있어야 한다. 하늘과 연결이 결코 끊어져서는 안 된다(참조 눅 18:1 주석). 바울은 “밤과 낮으로” 일했지만(2:9), 또한 “주야로” 간구했다(3:10). 많은 활동이 그에게서 기도를 밀쳐내지 못했다. 그의 하늘 아버지와 활기찬 연결이 언제나 첫째가 되었다. 우리도 그렇게 되어야 한다. 예수의 기도 생애를 참조하라(참조 막 3:13 주석).” (살 전 5:17, 재림교주석)
05.
(살전 5:18) 범사에 감사하라.
‘범사’의 헬라어 ‘엔 판티’은 ‘모든 상황과 환경에서’라는 의미이다(in all circumstances, NIV). 성도는 이미 영원한 천국을 소유하였으므로 모든 상황에 있어서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는 하나님께 감사할 수 있다. 한편 감사는 1 : 2에 기록된 대로 기도와 밀접한 관계가 있다. 빌 4 : 6에는 “오직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라고 기록되어 있다.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 ‘하나님의 뜻’은 4:3에 언급된바 ‘신자들의 성화’(sanctification)에 있다. 혹자는 ‘기뻐하고, 기도하며, 감사하는 것’이 성령께서 신자들을 성화시키는 내적인 역사로 본다(Bruce). 한편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는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가장 원초적(原初的)이며 기본적인 요소이다. ‘그리스도 예수 밖에서’ 신자들의 성화나 하나님의 뜻은 생각할 수 없다. (살전 5:18, 만나주석)
06.
(살전5:18 범사에. 감사한 것은)
즉 기쁨에 처했든, 슬픔에 처했든 상관없이 모든 환경에서(참조 빌 4:6; 골 4:2 주석). 여기에서 우리는 우리를 대적(對敵)하는 것처럼 보이는 것들까지도 우리의 유익(有益)을 이루어낼 수 있음을 분명히 확신하게 된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우리를 해(害)롭게 할 것들에 대하여 감사하도록 우리에게 요구하지 않으실 것이기 때문이다. (치료봉사, 255). 다니엘은 그의 생명을 취하고자 계획된 칙령(勅令)을 알았을 때도 감사했다. (참조 단 6:10). 바울은 최악(最惡)의 역경(逆境)에서도 감사하는 인상적인 모본(模本)을 남겼다. (참조 행 27:20, 35). 감사하는 것은 그리스도인의 습관(習慣)이 되어야 하고, 건강과 기쁨은 그것에 의하여 증진(增進)된다. (치료봉사, 251).
07.
(엡 4:10) 충만(充滿).
헬라어 플레로마(PLA-ro-ma), “전부(수)”, “전부(범위)”, “전체 내용”, “보충.” 이 단어는 채워짐(수동의 의미) 혹은 어떤 것이 채워진 상태를 가리킨다(참조 골 1:19 주석). 바울은 교회를 하나님의 충만으로 채워진 그리스도의 몸으로 본다(엡 3:19). 그리스도는 자신의 충만과 속성을 부어 주어 교회를 거룩한 생명, 참으로 풍성한 생명으로 채우셨다. 바울은 골로새서에서 머리의 신성을, 에베소서에서 몸의 특권을 강조한다. (엡 1:20~23, 재림교주석)
08.
“(엡 1:21 모든 정사와…주관하는 자.
여기에 나열된 것들은 일반적으로 선한 천사나 악한 천사의 세력들을 가리키는 것으로 이해된다(참조 엡 6:12; 롬 8:38 주석). 그리스도는 천상과 지상의 모든 권세보다 뛰어나시다. 그분은 전 우주에서 최상의 권위를 가진 만군의 주이시다(참조 롬 8:38 주석; 고전 15:24; 엡 3:10; 6:12; 골 1:16). 항상 바울은 영지주의 이단의 점증하는 영향에 비춰볼 때 쉽게 용납할 수 있는 개념 곧 그리스도를 열등한 신격(sub deity)으로 여겨서는 안 된다는 점을 분명히 하고자 했다. 그는 당시 유대의 가르침으로 이미 익숙해진 용어를 사용하여(참조 외경 에녹 1서 61:10), 그리스도가 실제 혹은 가상의 지위 고하를 막론하고 다른 모든 존재보다 우월하시다는 진리를 밝힌다..
09.
쳐다보고 그리고 살라(사 45:21, 22; 마 16:24; 요 1:29)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달리셨기 때문에 그는 복음이었다. 이제 우리는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을 보라”(요 1:29)는 기별하고 있다. 우리 교회의 신자들은 못 박히신 구주를 쳐다보지 않을 것인가? 영생의 소망 중심이 된 부활하신 구주를 바라보지 않을 것인가? 이것이야말로 우리의 기별이며, 우리의 논리이며, 교리이다. 그리고 회개하지 않는 자들에게 주는 우리의 경고이며, 슬퍼하는 사람들에게 주는 우리의 위로이며, 모든 믿는 자들의 소망이다. 만약 우리가 사람들의 관심을 일깨워서 그들의 시선을 그리스도께 고정시키게 할 수만 있다면 우리는 옆으로 비켜설 수 있을 것이며, 그들의 시선을 하나님의 어린양께 계속 고정시키라고 요청할 수가 있을 것이다. 그렇게 하면 그들은 가르침을 받을 것이다. “아무든지 나를 따라서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 (마 16:24; 막 8:34). 그리스도께 시선을 고정한 사람은 모든 것을 버릴 것이다. 이기심에 대하여 죽을 것이요, 하나님의 모든 말씀을 믿을 것이며, 그 말씀은 그리스도 안에서 매우 놀랍고도 영광스럽게 높임을 받을 것이다. (6BC 1113).
10.
죄인이 사랑 많으신 구주를 있는 그대로 볼 때 희망과 확신이 그의 마음을 사로잡는다. 의지 없는 영혼을 예수 그리스도께 남김없이 내던진다. 그 어떤 사람도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를 보지 못하게 하거나 의심을 일으킬 수가 없다. 불신은 사라져 버린다(원고 49, 1898). (6BC 1113)
11.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세상을 움직임(시 85:10)(약 2:13 주해 참조)
갈바리의 십자가는 모든 땅의 권세와 지옥의 권세에 도전하여 종내에는 그것들을 완전히 추방할 것이다. 십자가 안에 모든 감화가 집중되어 있고 거기에서 모든 감화가 흘러나간다. 그것은 매력의 큰 중심이다. 이는 그 십자가 위에서 그리스도가 인류를 위하여 그의 생명을 주셨기 때문이다. 이 희생 제물을 드리신 것은 인간을 본래의 완전한 상태로 회복시키실 목적으로 그리하셨다. 그렇다. 인간에게 품성의 완전한 변화를 주셔서 정복자 이상의 존재가 되게 하시려고 제물을 바치신 것이다. (6BC 1113)
12.
그리스도께서 “내가 땅에서 들리면 모든 사람을 내게로 이끌겠노라”(요 12:32)라고 선언하셨다. 만약 십자가가 사람들에게 호의적인 감응을 일으키지 못하면 그러한 감화를 만들어 낼 것이다. 여러 세대를 이어 내려오면서 이 시대를 위한 진리가 현대 진리로 나타났다. 십자가 위에 계신 그리스도는 중개인이시다. 그분으로 말미암아 사랑과 진리가 함께 만나고 의와 평화가 서로 입맞추었다. 이것은 세상을 움직이는 수단이다(원고 56, 1899). (6BC 1113)
13.
(엡1장:3-6) 참 과학이 되는 복음(요 1:12; 골 1:26, 27; 2:2, 3, 10)
참된 신자는 이 거룩한 높이에 다다를 수가 있다. 원하는 자는 모두 다 경건의 오묘를 볼 수가 있을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우리를 그의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받으실 때 그분 안에서 완전하게 될 가능성이 우리의 손이 닿는 곳에 있게 되는 것은 우리가 그리스도의 하신 일과 그의 사명을 정확히 이해함으로써이다. 그분의 기다란 인성의 한쪽 팔이 인간 가족들을 안으시고 그의 신성의 팔이 무한하신 분의 보좌를 붙잡으신 것은 그가 사람을 위해서 치르신 무한하신 희생의 은혜를 우리로 입게 하려 하심이다. 아무리 많은 사람이라도 그분을 받아들이는 사람에게, 곧 그의 이름을 믿는 사람에게까지도 하나님의 아들이 되는 권세를 주신다. (6BC 1113)
14.
자신의 의견을 너무 높이기 때문에 이러한 오묘한 일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다. 지극히 높으신 자가 이들 위대한 사람들로 깨닫게 하시는 과학이 있다. 그러나 그들은 세상의 진리요, 생명이요, 빛이신 분을 볼 수가 없다. 인간의 과학은 하나님이 비춰주신 빛이 아니다. 하나님의 과학은 하나님의 영의 나타나심이며, 그분을 믿는 절대적 믿음을 고취하는 것이다. 세상 사람들은 이런 믿음은 그들이 위대하고, 총명한 마음의 주의를 끌 만한 것이 못 된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들은 여기에서 큰 잘못을 저지르고 있다. 그것은 너무 높아서 인간의 지성이 전혀 미치지 못할 수준에 있다는 것이다. (6BC 1113)
15.
복음 기별은 참 과학이나 인간의 학식에 정면으로 배치되는 것이 아니다. 참 지혜는 세상 지혜가 깨달은 바를 훨씬 초월하는 것이다. 영광의 소망이신 우리 속에 계신 그리스도 곧 숨은 지혜는 하늘만큼이나 높은 지혜이다. 경건의 심오한 원칙들은 숭고하고 영원하다. 그리스도인 경험만이 우리를 도와서 이 문제를 이해하게 할 수가 있고 지식의 보화를 얻게 할 수가 있다. 이 지식은 하나님의 처소에 감취었던 것으로 그리스도와 산 관계가 있는 모든 사람에게 이제 알려진 것이다. 원하는 자는 누구나 다 그 교리를 알 수 있을 것이다(리뷰 1899.7. 18). (6BC 1114)
16.
사람들이 구원(救援)을 받으려면 받아들여야 할 진리가 있다.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는 것은 영원한 생명이다. 그러나 성경은 한때 생명의 길을 알고 진리 안에 즐거워하던 사람들이 배도하고 떨어져 나가서 잃어버림을 당할 위험이 있다는 것을 분명히 하고 있다. 그러므로 매일 하나님께 결정적으로 회심할 필요성이 여기에 있다. (6BC 1114)
17.
참으로 회심한 사람들은 그의 돌아가심을 본받아 그와 함께 장사 되고 그의 부활을 본받아 곧 무덤에서 일어나 새 생명 가운데 행하여야 한다. 그들은 진리를 신실하게 순종함으로 그들의 부르심과 택하심을 굳게 해야 한다 (원고 57, 1900). (6BC 1115)
18
인간의 마음의 통로를 통하여 여러 세대를 거쳐 내려온 아버지의 모든 사랑, 사람들의 심령 속에 열린 긍휼의 모든 샘은 하나님이 무한하고 다함이 없는 사랑과 비교해 볼 때, 끝없는 대양에 대한 작은 실개천에 불과하다. 그것은 혀로도 말할 수 없고, 붓으로도 묘사할 수 없다. 그대는 매일의 생애에서 그것을 명상할 수 있고, 그것을 이해하기 위하여 부지런히 성경을 탐구할 수도 있다. 그대는 또한 하늘 아버지의 사랑과 긍휼을 깨닫기 위하여 노력하면서 하나님께서 그대에게 주신 모든 능력과 재능을 총동원할 수도 있다. 그러나 피안(彼岸)에는 무한히 있다. 그대는 여러 해 동안에 걸쳐 그 사랑을 연구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그대는 하나님께서 그분의 아들을 주셔서 세상을 위하여 돌아가게 하신 그분의 사랑의 길이와 넓이와 깊이와 높이를 결코 완전히 깨달을 수는 없다. 영원 자체도 그것을 결코 완전히 드러낼 수 없다. 그러나 우리가 성경을 연구하고 그리스도의 생애와 구속의 계획을 명상할 때 우리는 이 위대한 주제들을 차츰 이해하게 될 것이다. 그리하여 우리는 바울이 에베소 교회를 위하여 기도할 때 바랐던 그 축복을 깨닫게 될 것이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 영광의 아버지께서 지혜와 계시의 정신을 너희에게 주사 하나님을 알게 하시고 너희 마음눈을 밝히사 그의 부르심의 소망이 무엇이며 성도 안에서 그 기업의 영광 풍성이 무엇이며 그의 힘의 강력으로 역사하심을 따라 믿는 우리에게 베푸신 능력의 지극히 크심이 어떤 것을 너희로 알게 하시기를 구하노라.” (엡 1:17-19). (5T 740).
19
사람들의 마음이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얻지 못하게 하는 사물에 몰두 되게 하는 것이 사단의 끊임없는 연구 과제이다. 그는 그들이 이해력을 어둡게 하고 심령을 낙담케 할 것을 끊임없이 생각하게 하고자 노력한다. 우리는 그리스도를 따르는 자들을 유혹하고 낙담케 하는 영향으로 둘러싸인 악과 타락의 세상에 처해 있다. 구주께서는 “불법이 성하므로 많은 사람의 사랑이 식어지리라” (마 24:12)고 말씀하셨다. 많은 사람은 그들의 주위에 있는 무서운 악, 곳곳에 있는 반역과 허약에 그들의 눈을 고정한다. 그들은 그들의 마음이 마침내 슬픔과 의심으로 충만해질 때까지 이런 것들에 관하여 이야기한다. 그들은 맨 먼저 대 기만자의 교묘한 역사를 마음으로 생각하며 그들의 경험에서 용기를 잃게 하는 것들을 숙고하는 한편 하늘 아버지의 능력과 그분의 비할 데 없는 사랑은 보지 않는 것 같다. 이 모든 것은 사단이 의도하는 그대로이다.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과 그분의 능력을 그처럼 작게 생각하면서 의의 원수가 그처럼 큰 능력으로 옷 입은 것처럼 생각하는 것은 잘못이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강대(强大)하심에 관하여 이야기해야 한다. 우리는 사단의 손아귀에서 우리 자신을 구출해 내기에 전혀 무력하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피할 길을 정해 놓으셨다. 지극히 높으신 분의 아들께서는 그 싸움을 우리를 위하여 싸울 능력을 갖추고 계신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넉넉히 이” (롬 8:37) 길 수 있다. (5T 740.2)
20.
하나님께 기도할 때에 굽히는 자세를 취하는 것이 마땅하다. 이러한 예배의 행위가 바벨론에 있는 세 명의 히브리 포로들에게 요구되었다……. 그러나 그러한 행위는 세상의 주권자이시며 우주의 통치자이신 오직 하나님께만 나타내야 할 경배의 표현이다. 비록 순금으로 만든 우상일지라도 세 히브리인은 우상에게 그러한 영예를 돌리는 일을 거부하였다. 만약 저들이 우상에게 경배한다면 모든 의사(意思)와 목적에 있어서 바벨론의 왕에게 굴복하는 격이 되는 것이다. 왕이 명령하는 것을 거부함으로써 저들은 형벌을 당할 수밖에 없었으며 맹렬히 불타는 풀무 불에 던 지움을 받게 되었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는 친히 저들에게 나타나셨고 볼 가운데서 저들과 함께 행하셨으므로 저들은 아무런 해도 받지 않았다. (2 SM 312)
21.
하나님께 대한 진정한 경외심은 그분의 무한하신 위대하심을 알고 그분의 임재를 깨달을 때 고취된다. 모든 사람은 보이지 않는 분에 대한 이 같은 느낌으로 마음속에 깊은 감명을 받아야 한다. 기도하는 시간과 장소는 하나님께서 거기 계시기 때문에 거룩하다. 그리고 경외심이 행동과 태도에 나타날 때 그것을 고취시키는 생각 또한 깊어질 것이다. “그 이름이 거룩하고 지존하시도다”(시 111:9)라고 시편 기자는 선포한다. 천사들도 그분의 이름을 말할 때는 얼굴을 가리는데 하물며 타락하고 죄를 범한 우리가 여호와의 성호를 말할 때 얼마나 경의를 표해야 하겠는가! (PK 48.3)
22.
에베소에 있는 교회에 바울은 다음과 같이 기록하였다.
“이러하므로 내가 하늘과 땅에 있는 각 족속에게 이름을 주신 아버지 앞에 무릎을 꿇고 비노니 그 영광의 품성을 따라 그의 성령으로 말미암아 너희 속사람을 능력으로 강건하게 하사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너희 마음에 계시게 하옵시고 너희가 사랑 가운데서 뿌리가 박히고 터가 굳어져서 능히 모든 성도와 함께 지식에 넘치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아 그 넓이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가 어떠함을 깨달아 하나님의 모든 충만하신 것으로 너희에게 충만하게 하시기를 구하노라 우리 가운데서 역사하시는 능력대로 우리의 온갖 구하는 것이나 생각하는 것에 더 넘치도록 능히 하실 이에게 교회 안에서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영광이 저희에게 대대로 영원무궁하시기를 원하노라.”(엡 3:14-21). (하늘에 158) (HP 158)
23.
구주께서는 당신 자신의 생애에 관하여 “내가 아버지의 계명을 지켜”(요 15:10) “나를 보내신 이가 나와 함께 하시도다. 내가 항상 그의 기뻐하시는 일을 행하므로 나를 혼자 두지 아니하셨느니라”라고 말씀하셨다(요 8:29). 하나님께서는 당신을 따르는 사람들도 예수 님께서 인성을 취하시고 하셨던 것처럼 할 수 있기를 바라신다. 그분의 능력을 통하여 우리는 구주께서 사셨던 순결하고 거룩한 생애를 살아야 한다. 치료봉사 426)
24.
“이로써 우리도 듣던 날부터 너희를 위하여 기도하기를 그치지 아니하고 구하노니 너희로 하여금 모든 신령한 지혜와 총명에 하나님의 뜻을 아는 것으로 채우게 하시고 주께 합당이 행하여 범사에 기쁘시게 하고 모든 선한 일에 열매를 맺게 하시며 하나님을 아는 것에 자라게 하시고 그 영광의 힘을 좇아 모든 능력으로 능하게 하시며 기쁨으로 모든 견딤과 오래 참음에 이르게 하시고”(골 1:9-11). (MH 426)
25.
변화를 일으키는 지식
그리스도 안에 게시된 그대로 하나님을 아는 지식은 구원받은 모든 사람이 소유해야 할 지식이다. 그것은 품성의 변화를 일으키는 지식이다. 이 지식은 받아들이기만 하면 영혼을 하나님의 형상으로 재창조할 것이다. 그것은 온몸에 거룩한 영적 능력을 나누어 줄 것이다. (8T 289)
26.
하나님의 백성의 인도자로서 자기의 경험을 회고하여 볼 때 그가 범한 한 번의 그릇된 행위는 그의 생애의 기록에 오점을 남겼다. 만일 그 범죄 행위가 지워질 수 있다면 그는 죽음을 겁내지 않았을 그것으로 생각했다. 모세는 회개와 약속하신 희생 제물이신 구세주에 대한 믿음이 하나님이 요구하신 전부임을 확신하고 다시 한번 그의 죄를 자복하고 예수의 이름으로 용서를 간구하였다. (PP 472)
27.
그러나 모세는 자신이 진 짐들에 대하여 후회하지 않았다. 모세는 자기의 사명과 사업이 하나님께서 친히 정해 주신 것임을 알고 있었다. 그는 속박하고 있는 이스라엘의 지도자가 되도록 처음에 부르심을 받았을 때 그 책임을 지지 않으려고 했으나 일단 사업을 착수한 후에는 그 짐을 버리지 않았다. 여호와께서 그를 놓아주시고 반역한 이스라엘 백성을 멸하시겠다고 제의하셨지마는 모세는 그것에 동의하지 않았다. 비록 그가 겪은 시련은 컸으나 모세는 하나님의 특별한 은총의 표를 받았다. 그는 광야에서 체류하는 동안 하나님의 능력과 영광의 출현을 목격하였고 그분의 사랑과 교통하는 값진 경험을 얻었다. 그는 잠시 동안 죄악의 낙을 누리는 것보다 오히려 하나님의 백성으로 더불어 고난받기를 선택한 것이 현명한 결정이었다고 느꼈다. (PP 472)
28.
여기 말하는 영적인 능력은 우리 각자가 얻어야 할 어떤 것이 있음을 말하고 있으나 우리는 그것을 어떻게 가질 수 있는가? 아마도 우리는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사랑하시지 않는가 하여, 앞이 캄캄하며 무력함과 실망을 느낄 때가 있다. 그렇다 하더라도 우리는 그 느낌에 길을 열어주지 말라. 느낌은 실재와 아무 상관이 없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읽는 그대로, 그리스도의 말씀을 그분이 그것을 말씀하신 그대로 받아들인다. (LHU 265)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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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S>
지난 7월2일부터 10일까지 필리핀 민다나오 에 선교여행 을 하나님의 은혜로 무사히 잘 다녀왔습니다.
지난 안식일(7월8일)에 274명의 침례식이있었습니다
이는 지난 3월부터 gospel waker 를 고용해서 매월 생활비를 지급해서 5개월동안 물밑 작업을해서 금번에 침례식을 하게되었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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