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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4과 - 모든 것이 세롭게 됨 -(핵심Q & 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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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이봉주 작성일22-12-27 00:28 조회1,238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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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4과 모든 것이 새롭게 됨>

                                      (12월 31일 (안) / 日沒: 오후 5시 23분)


<서언(緖言)>

  ○.2022년 제4기의 <죽음 그리고 미래(未來)의 소망(所望)>이라는 대 주제(主題)로 한 기(期)동안 은혜의 시간 이였습니다. 이제 대(大) 단원(單元)의 공부를 마치면서 우리가 바라고 꿈꾸고 소망하는 그 새 하늘과 새 땅에 대해서 공부하면서 잠시(暫時) 잠간(暫間)이면 마칠 이 땅에서의 고난(苦難)과 고생(苦生)과 질병(疾病)들로 인(因)하여 사단의 노예(奴隸)생활을 벗어날 그날 그때를 위하여 더 깊은 하나님과의 관계(關係)를 돈독(敦篤)히 하여야 겠습니다.

성경의 약속(約束)은 새 하늘과 새 땅에 대한 확실한 약속과 보장(保障)으로 우리를 위해 예비하고 계시며 그 곳에는 성전(聖殿)과 하나님이 게시며 평화와 행복만이 있는 곳이고 우리 인간들의 나쁜 것들의 죽음이나, 슬픔이나 죄(罪)나 질병(疾病)이나 이별(離別)이나 실망(失望)이나 등등의 죄로 인하여 생겨난 모든 것들이 존재(存在)하지도 않을 뿐만 아니라 그런 흔적(痕迹)도 없는 그야 말로 모든 것이 새롭게 되는 곳 새 하늘과 새 땅을 일컬어 천국(天國)이라 합니다.

그러한 곳을 들어가기 위하여 우리는 매일 우리의 마음을 깨끗하게 하며 믿음으로 하나님의 약속을 굳게 붙들며 살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12월25일) (일)  <새 하늘과 새 땅>


(Q)~(사 65:17~25, 계 21:1~5) 성경이 묘사(描寫)하고 있는 새 하늘과 새 땅의 모습은 어떻습니까?


(A)~○.새 하늘과 새 땅은 죄악으로 오염되거나 타락하지 않고 새로운 질서에 의해 새롭게 창조될 온전한 세상(계 21:1)이며 이 새로운 세상은 종말(終末)에 이루어질 것인데 궁극적으로는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으로 인해 성취될 것이다. (마 19:28; 벧후 3:13; 계 21:1-17). 이에 따라 현재 우리 인간들이 살아가는 타락(墮落)하고 부패(腐敗)한 우주만물(宇宙萬物)은 소멸(燒滅)되거나 하나님의 창조 목적대로 회복(回復)됨으로써 새로운 형태(形態)의 세상(우주)이 나타나게 된다. 이 세상은 만유(萬有)의 회복(回復)이라는 의미(意味)와 더불어 하나님의 주권(主權)의 완전한 회복(回復)을 의미한다. 구원자(救援者)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거듭난 구원(救援)받은 자(者)들이 예수님의 재림(再臨)때에 들어가 살게 될 하나님의 영원(永遠)한 나라가 바로 새 하늘과 새 땅이다.(사 65:17; 계 22:1-5).


(12월26일) (월)  <하나님의 성전(聖殿)에서>


(Q)~(계 4:2~6, 7:9~15, 15:5~8) 새 예루살렘에 있는 하늘 성전(聖殿)에서는 어떤 일이 이어진다고 설명(說明)하고 있습니까?


(A)~○.하늘 성전(성소(聖所))은 항상 하늘의 천사들이 하나님을 경배(敬拜)하는 장소였다. 그러나 죄로 인하여 그 성전(聖殿)은 인류에게 구원(救援)이 주어지는 장소의 역할(役割)을 하게 되었다. 그러므로 죄의 문제가 끝나면 하늘 성소(聖所)는 본래의 기능으로 회복될 것이다. 그러므로 구원(救援)받은 자(者)들은 하나님의 보좌(寶座) 앞에. 끊임없이 하나님 면전(面前)에 있게 되며, 하늘의 하나님의 성전(聖殿)에서는 이제는 본래의 기능을 회복하여 구원(救援) 받은 모든 성도(聖徒)들이 어린양의 피에 그 옷을 씻어 희게 된 자들이 경배(敬拜)의 중심이 되시는 그리스도를 영원토록 찬양(讚揚)하며 경배(敬拜)할 것이다.


(12월27일) (화)  <하나님의 임재(臨在) 가운데서>


(Q)~(요일 3:2, 3, 계 22:3, 4)  하늘에 가면 우리가 하나님의 얼굴을 직접(直接) 볼 수 있을까요? 성경은 무엇이라고 이야기합니까?


(A)~○.성경은 어느 곳에서는 하나님을 가까이 할 수 없다고 기록하였고, (딤전 6:16)에는 하나님을 “가까이 가지 못할 빛에 거하”시며, (요 1:18, 요일 4:12“본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다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그렇게 기록하신 사도 요한은 다른 곳에서는 하나님을 볼 것이라고, 요한복음과 요한일서에는 (요 1:18, 요일 4:12) “그의 참모습 그대로”, “그의 얼굴”을 (요일 3:2, 3, 계 22:3, 4) 볼 것이라고도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는 구원(救援)받아 하늘에 들어가게 될 모든 성도들은 하나님을 대면(對面)하여 볼 수 있는 최고의 특권이 있다는 말씀입니다. 그러한 특권(特權)을 누리기 위하여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恩惠)를 힘입어 마음을 정결(淨潔)케하여야 할 것입니다. 그 정결케 되는 과정(過程)의 핵심(核心)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이랍니다.


(12월28일) (수)  <다시는 사망(死亡)이나 눈물이 없고>


(Q)~(계 21:1~4) 새 하늘과 새 땅에 없는 것은 무엇일까요? 어떤 위로(慰勞)와 소망(所望)을 얻게 되나요?


(A)~○.새 하늘과 새 땅에는 죽음과 질병(疾病)과 고통(苦痛)과 슬픔이 없으며, 이 땅에서 죄로 말미암아 생겨난 모든 것들이 없는 문자(文字)그대로의 하늘나라 천국(天國)이라는 곳이다. 비록 이 땅에서의 삶은 죄로 인하여 훼손된 모든 것들이 예수님의 재림(再臨)으로 공평(公平)한 심판(審判)으로 구원(救援)을 받게 되는 그날에 모든 수치(羞恥)고통들이 녹는 눈처럼 사라질 것이라는 소망의 위로(慰勞)와 희망(希望)됩니다.


(12월29일) (목)  <하나님의 이름이 그들의 이마에 있음> 


(Q)~(롬 4:2, 3) 우리가 구원(救援)의 확신(確信)을 가질 수 있는 유일(唯一)한 이유는 무엇입니까?


(A)~○.구원(救援)은 오직 믿음으로 주어지는 것이며 그 사실을 개인의 구주(救主)로 받아들이고 그분께 순종하고, 그분 안에서 지금 누릴 수 있는 새로운 삶을 포함하여 그분의 약속을 주장(主張)하며, 오직 그분의 은혜에만 전적(全的)으로 의지(依支)한다면, 우리는 구원(救援)의 확신을 가질 수 있다. 이는 아브라함은 믿었고, 그것이 그에게 의(義)로 여겨졌다” 우리에게도 마찬가지다. 이것이 바로 우리들의 이마에 하나님의 이름이 기록되어 있다는 말씀의 의미(意味)다. 만일 지금 우리 이마에 그분의 이름이 기록되어 있고, 그분으로부터 돌아서지 않는다면, 그 이름은 새 하늘과 새 땅에서도 기록되어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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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미부록(末尾附錄)>






<제14과 모든 것이 새롭게 됨>

                                  (12월 31일 (안) / 日沒: 오후 5시 23분)


<서언(緖言)>

  ○.2022년 제4기의 <죽음 그리고 미래(未來)의 소망(所望)>이라는 대 주제(主題)로 한 기(期)동안 은혜의 시간 이였습니다. 이제 대(大) 단원(單元)의 공부를 마치면서 우리가 바라고 꿈꾸고 소망하는 그 새 하늘과 새 땅에 대해서 공부하면서 잠시(暫時) 잠간(暫間)이면 마칠 이 땅에서의 고난(苦難)과 고생(苦生)과 질병(疾病)들로 인(因)하여 사단의 노예(奴隸)생활을 벗어날 그날 그때를 위하여 더 깊은 하나님과의 관계(關係)를 돈독(敦篤)히 하여야 겠습니다.

성경의 약속(約束)은 새 하늘과 새 땅에 대한 확실한 약속과 보장(保障)으로 우리를 위해 예비하고 계시며 그 곳에는 성전(聖殿)과 하나님이 게시며 평화와 행복만이 있는 곳이고 우리 인간들의 나쁜 것들의 죽음이나, 슬픔이나 죄(罪)나 질병(疾病)이나 이별(離別)이나 실망(失望)이나 등등의 죄로 인하여 생겨난 모든 것들이 존재(存在)하지도 않을 뿐만 아니라 그런 흔적(痕迹)도 없는 그야 말로 모든 것이 새롭게 되는 곳 새 하늘과 새 땅을 일컬어 천국(天國)이라 합니다.

그러한 곳을 들어가기 위하여 우리는 매일 우리의 마음을 깨끗하게 하며 믿음으로 하나님의 약속을 굳게 붙들며 살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12월25일) (일)  <새 하늘과 새 땅>


(Q)~(사 65:17~25, 계 21:1~5) 성경이 묘사(描寫)하고 있는 새 하늘과 새 땅의 모습은 어떻습니까?


(A)~○.새 하늘과 새 땅은 죄악으로 오염되거나 타락하지 않고 새로운 질서에 의해 새롭게 창조될 온전한 세상(계 21:1)이며 이 새로운 세상은 종말(終末)에 이루어질 것인데 궁극적으로는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으로 인해 성취될 것이다. (마 19:28; 벧후 3:13; 계 21:1-17). 이에 따라 현재 우리 인간들이 살아가는 타락(墮落)하고 부패(腐敗)한 우주만물(宇宙萬物)은 소멸(燒滅)되거나 하나님의 창조 목적대로 회복(回復)됨으로써 새로운 형태(形態)의 세상(우주)이 나타나게 된다. 이 세상은 만유(萬有)의 회복(回復)이라는 의미(意味)와 더불어 하나님의 주권(主權)의 완전한 회복(回復)을 의미한다. 구원자(救援者)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거듭난 구원(救援)받은 자(者)들이 예수님의 재림(再臨)때에 들어가 살게 될 하나님의 영원(永遠)한 나라가 바로 새 하늘과 새 땅이다.(사 65:17; 계 22:1-5).


○. ‘새 하늘과 새 땅’은 구약성경(舊約聖經)(사 65:17, 66:22)과 유대 묵시문학(黙示文學)에 나타나며(위경 에녹1서 45:4,5, 72:1, 91:16, 바룩 2묵시록 32:6, 44:12, 57:2, 에스라 4서 7::75) 신약성경에서도 받아들여져 나타난다.(마 19:28, 롬 8:21, 계 21:1). 이것은 하늘과 땅이 새롭게 창조되어(시 102:26, 사 51:6, 히 1:11, 계 20:11) 새로워지고 완전해짐을 시사한다. 따라서 ‘하나님의 날’이 죄악된 세상과 피조물(被造物)에 대해서는 멸망(滅亡)과 재앙(災殃)의 날이 될 것이지만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죄악(罪惡)과 세상의 고난(苦難)을 도말(塗抹)하는 기쁨의 날이 될 것임을 기억하고 기대(期待)하며 사모(思慕)해야 한다. (벧전 1:7).” (벧후 3:13, 만나주석)


○.<(벧후3:13) 그(주님)의 약속(約束)>

  주님의 약속에 대하여 그 기롱자(欺弄者)들이 어떻게 생각하든지 상관없이(벧후3:4절), 베드로는 그가 그것을 절대적(絶對的)으로 신뢰하며 자신의 생애를 그것에 일치(一致)시키기로 정하고 있음을 보여 준다. (벧후3:9절) 


○.헬라어 카이노스(kainos), 일반적으로 시간의 관점(觀點)에서 새롭다는 뜻의 “최근에”(recent)를 의미하는 네오스(neos)보다는 본질에 있어 다르고 새로운 상태에 있는 것을 의미하는 “새로운”(new). 여기서 베드로는 모든 더러움에서 깨끗하여진 새롭게 된 하늘과 땅을 고대(苦待)하고 있다. (참조 계 21:1 주석). (벧후 3:13, 재림교주석)


○.<(이사야65:23) 새 하늘과 새 땅에서 안식일(安息日)을 지킴>

  안식일은 이스라엘만을 위하여 있는 것이 아니라 세상 사람들을 위하여 있는 것이다. 안식일은 에덴에 있던 아담에게 알려진바 되었고 십계명의 다른 명령과 같이 폐(廢)할 수 없는 의무(義務)에 속한다. 넷째 계명(誡命)이 그 일부를 이루는 율법에 대하여 그리스도께서 말씀하시기를 “천지(天地)가 없어지기 전(前)에는 율법의 일점(一點) 일획(一劃)이라도 반드시 없어지지 아니하고 다 이루리라”고 하셨다. 하늘과 땅이 존속(存續)하는 한 안식일은 창조주의 능력의 표징(表徵)으로 남아 있을 것이다. 그리하여 에덴이 다시 지상에 회복(回復)될 때에 하나님의 거룩한 안식의 날은 해 아래 있는 모든 사람에게 존귀(尊貴)히 여김을 받을 것이다. “매 안식일에” 영화롭게 된 새 땅의 주민(住民)들이 “이르러 내 앞에 경배(敬拜)하리라”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마 5:18; 사 66:23). (화잇주석, 사 66:23)


○.베드로는 “우리는 그의 약속(約束)대로 의(義)의 거(居)하는 바 새 하늘과 새 땅을 보도다.(벧후 3:13)라고 말하였다. 계시(啓示)가운데 요한은 영광스러운 신천지(新天地)의 왕국을 보았다. 그날에 “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씻기시매 다시 사망(死亡)이 없고 애통(哀痛)하는 것이나 곡(哭)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니 처음 것들이 다 지나갔음 이러라. (계 21:4).<(성연1-3, 제1편>7. 우리는 아마겟돈으로 향(向)하고 있는가?)>


(12월26일) (월)  <하나님의 성전(聖殿)에서>


(Q)~(계 4:2~6, 7:9~15, 15:5~8) 새 예루살렘에 있는 하늘 성전(聖殿)에서는 어떤 일이 이어진다고 설명(說明)하고 있습니까?


(A)~○.하늘 성전(성소(聖所))은 항상 하늘의 천사들이 하나님을 경배(敬拜)하는 장소였다. 그러나 죄로 인하여 그 성전(聖殿)은 인류에게 구원(救援)이 주어지는 장소의 역할(役割)을 하게 되었다. 그러므로 죄의 문제가 끝나면 하늘 성소(聖所)는 본래의 기능으로 회복될 것이다. 그러므로 구원(救援)받은 자(者)들은 하나님의 보좌(寶座) 앞에. 끊임없이 하나님 면전(面前)에 있게 되며, 하늘의 하나님의 성전(聖殿)에서는 이제는 본래의 기능을 회복하여 구원(救援) 받은 모든 성도(聖徒)들이 어린양의 피에 그 옷을 씻어 희게 된 자들이 경배(敬拜)의 중심이 되시는 그리스도를 영원토록 찬양(讚揚)하며 경배(敬拜)할 것이다.


○.<그 옷을 씻어>

  옷이 순결(純潔)한 이유가 주어져 있다. 성도(聖徒)들은 그들의 노력에 의해서가 아니라 갈바리에서 그리스도께서 얻은 승리(勝利) 때문에 승리자(勝利者)가 된다. (참조 6:11 주석). 둘 다 흰옷으로 상징(象徵)된 의(義)와 승리의 밀접(密接)한 관계가 여기서 설명되고 있다. (참조 3:4 주석; 1:5). 전쟁은 죄에 대항(對抗)하는 것이고, 의(義)는 승리이다. 그리스도의 의(義)가 승리(勝利)를 얻었다. 그러므로 그의 의(義)를 얻음으로써 죄인들은 의(義)롭게 되고 승리자(勝利者)가 된다. (계 7:9~15, 재림교주석)


○.<그들이 누릴 축복이 다음과 같이 준비되어 있다.>

   (1) 그들은 매우 축복된 자리에 서 있다. "그들은 밤낮 하나님의 보좌(寶座) 앞에 서 있다." 또 "그들 가운데 살고 있다." 그들은 충분한 기쁨 가운데 살고 있다.

   (2) 그들은 하나님을 계속적(繼續的)으로 섬기는 직분(職分)으로 말미암아 축복을 누리고 있다. 그들에게는 약(弱)함도, 지루함도, 염려(念慮)도 없다. 천국은 고통을 모르는 가운데 섬기는 곳이다. 게으름을 모르는 안식의 곳이다. 다시 말해서 기쁨이 충만한 안식을 찬양(讚揚)하는 곳이다.

   (3) 그들은 이 세상의 모든 불편(不便)으로부터 자유로워진 축복을 누리고 있다.

①.그들은 모든 궁핍(窮乏)으로부터 자유롭다. "다시는 주리지도 아니하며, 목마르지도 아니한다." 모든 요구가 공급되며, 궁핍(窮乏)에서 오는 불안감(不安感)이 사라졌다.

②. 모든 질병(疾病)과 고통(苦痛)으로부터 자유롭다. 그들은 이제 "해(害)나 아무 뜨거운 기운에 상(傷)하지 아니"한다. (계 7:9~15, 매튜헨리)


○. 그들은 주 예수의 사랑과 인도하심 가운데서 축복을 누리고 있다. "보좌(寶座) 가운데 계신 어린 양(羊)이 저희의 목자(牧者)가 되사 생명수(生命水) 샘으로 인도하신다." 예수께서 그들의 영혼(靈魂)을 새롭게 하고, 기쁘게 하는 모든 것을 그들에게 주시기 때문에 다시는 주리지도 아니하며 목마르지도 아니한다.


○. 그들은 모든 슬픔으로부터 건짐을 받음으로 말미암아 축복을 누리고 있다. "하나님께서 저희 눈에서 모든 눈물을 씻어 주실 것임 이러라." 그들이 전(前)에는 죄와 고통 때문에 슬픔을 당하고 많은 눈물을 흘렸으나, 하나님이 친히 부드러운 은혜(恩惠)의 손으로 그들의 눈에서 눈물을 닦아주시매 다시는 눈물을 흘리지 않아도 되게 되었다. 이 때 하나님은 눈물을 흘리는 사랑하는 자녀를 본 아버지처럼 그들을 대하사, 그들을 유도(誘導)하여 주시며, 그들의 눈에서 눈물을 닦아주시며, 그들의 슬픔을 기쁨으로 바꾸어 주신다. 이 때문에 이 세상에서 그리스도인들은 슬픔을 감당할 수 있으며, 이 세상에서 당하는 환난(患難)을 능히 이길 수 있다. "눈물을 흘리며 씨를 뿌리는 자는 기쁨으로 거두리로다. 울며 씨를 뿌리러 나가는 자는 정녕 기쁨으로 그 단을 가지고 돌아오리로다."(시 126:5, 6). (계 7:9~15, 매튜헨리)


(12월27일) (화)  <하나님의 임재(臨在) 가운데서>


(Q)~(요일 3:2, 3, 계 22:3, 4)  하늘에 가면 우리가 하나님의 얼굴을 직접(直接) 볼 수 있을까요? 성경은 무엇이라고 이야기합니까?


(A)~○.성경은 어느 곳에서는 하나님을 가까이 할 수 없다고 기록하였고, (딤전 6:16)에는 하나님을 “가까이 가지 못할 빛에 거하”시며, (요 1:18, 요일 4:12“본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다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그렇게 기록하신 사도 요한은 다른 곳에서는 하나님을 볼 것이라고, 요한복음과 요한일서에는 (요 1:18, 요일 4:12) “그의 참모습 그대로”, “그의 얼굴”을 (요일 3:2, 3, 계 22:3, 4) 볼 것이라고도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는 구원(救援)받아 하늘에 들어가게 될 모든 성도들은 하나님을 대면(對面)하여 볼 수 있는 최고의 특권이 있다는 말씀입니다. 그러한 특권(特權)을 누리기 위하여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恩惠)를 힘입어 마음을 정결(淨潔)케하여야 할 것입니다. 그 정결케 되는 과정(過程)의 핵심(核心)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이랍니다.


○. “우리는 하나님의 형상(形像)을 마치 거울 속에 비췬 것처럼 천연계(天然界)가운데서, 또한 그분께서 인류를 취급(取扱)하시는 일을 통하여 바라본다. 그러나 그 때에는 사이를 가로막아 놓았던 희미한 휘장(揮帳) 없이 하나님을 직접 대면(對面)하여 보게 될 것이다. … 우리는 그분 앞에 서서 그분의 얼굴의 영광을 직접 바라볼 것이다.”(쟁투, 676-677)


○.그의 이름도 그들의 이마에 있으리라. 이름은 품성(稟性)을 나타내고, 이마도 품성을 나타낸다. 하나님과 어린 양의 품성이 구속(救贖)받은 사람들의 품성(稟性)이 될 것이다. (계 14장)의 말씀의 반복(反復)이다(계 14:1).


○. “그곳에 들어가는 자는 모두 그리스도의 의(義)의 옷을 입을 것이요 그들의 이마에는 하나님의 이름을 쓴 것이 보일 것이다. 이 이름은 그 사도(使徒)가 계시(啓示) 중에 본 상징(象徵)으로써 마음을 굴복(屈伏)하여 하나님의 모든 계명을 이성적(理性的)으로 또 충성스럽게 순종하는 것을 뜻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아들과 딸들, 370)


○. “가장 행복스러운 하늘 가정에서 영원히 산다는 것, 영혼과 몸과 마음에 죄와 저주(詛呪)의 흔적(痕迹)을 지니지 않고 우리 창조주의 완전하신 모습을 닮는 것, 영원한 시대를 통하여 지혜, 지식 및 거룩함에 나아가면서 새로운 사상적(思想的) 세계를 개척(開拓)한다는 것, 언제나 새로운 경이(驚異)들과 새로운 영광을 발견하고, 알고 즐기며 사랑하는 역량(力量)을 증가(增加)시키며, 항상 우리들에게 넘치는 기쁨과 사랑과 무한(無限)한 지혜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는 것-바로 이런 것이 그리스도인의 소망이 지적(指摘)하고 있는 목적이며 바로 그 목적이 그리스도인 교육이 위하여 준비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교육을 받는 것과 다른 사람들이 이런 교육을, 받도록 돕는 것이 그리스도인 생애의 목표가 되어야 한다.” (부모와 교사와 학생에게 보내는 권면, 55)


○. “조금만 있으면 우리는 우리의 약속(約束)된 본향(本鄕)에 가게 될 것이다. 그 곳에서 예수께서는 하나님의 보좌에서 흘러나오는 생명강(生命江)가로 우리를 인도하시고 우리의 품성을 완성시키시기 위하여 이 땅에서 우리로 겪게 하신 어두운 섭리(攝理)들을 설명해 주실 것이다. 그 곳에서 우리는 회복(回復)된 에덴의 아름다움을 흐리지 않은 시력(視力)으로 보게 될 것이다. 구속주(救贖主)께서 우리의 머리에 씌워 주신 면류관(冕旒冠)을 그분의 발 앞에 던지고, 금(金) 거문고를 켜면서 우리는 보좌(寶座)에 앉으신 분께 돌리는 찬양(讚揚)으로 온 하늘을 충만(充滿)케 할 것이다.” (교회증언 8권, 254)


(12월28일) (수)  <다시는 사망(死亡)이나 눈물이 없고>


(Q)~(계 21:1~4) 새 하늘과 새 땅에 없는 것은 무엇일까요? 어떤 위로(慰勞)와 소망(所望)을 얻게 되나요?


(A)~○.새 하늘과 새 땅에는 죽음과 질병(疾病)과 고통(苦痛)과 슬픔이 없으며, 이 땅에서 죄로 말미암아 생겨난 모든 것들이 없는 문자(文字)그대로의 하늘나라 천국(天國)이라는 곳이다. 비록 이 땅에서의 삶은 죄로 인하여 훼손된 모든 것들이 예수님의 재림(再臨)으로 공평(公平)한 심판(審判)으로 구원(救援)을 받게 되는 그날에 모든 수치(羞恥)고통들이 녹는 눈처럼 사라질 것이라는 소망의 위로(慰勞)와 희망(希望)됩니다.


○.각 시대(時代)의 의인(義人)들이 이 땅에 사는 동안 감수(甘受)했던 치욕(恥辱)과 불명예(不名譽). 이제 “저희 하나님이 어디 있느냐”(시 79:10)는 이방인(異邦人)들의 조롱(嘲弄)은 영원히 잠잠해졌다. 더 이상 그들은 압제(壓制)와 고통(苦痛)을 당하지 않고, 의(義)의 면류관을 쓰고 영원한 기쁨의 노래를 부르며 승리자(勝利者)로 선다. (사 25:8, 재림교주석)


○.<(사 25:8) 사망(死亡)을 영원히 멸(滅)하실 것이라.>

  인생을 지배(支配)하던 최후의 적(敵)인 죽음(고전 15:26)의 정복(征服)에 대한 놀라운 기사(記事)가 덧붙여진다. 본문을 직역(直譯)하면, ‘그가 사망을 꿀꺽 삼켜버릴 것이다(빌라), 영원히’이다.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의 부활을 노래하면서 이 말을 이렇게 인용(引用)한다: 이 썩을 것이 썩지 아니함을 입고 이 죽을 것이 죽지 아니함을 입을 때에는 사망이 이김의 삼킨 바 되리라고 기록된 말씀이 응(應)하리라”(고전 15:54). 이와 유사(類似)한 사상에 대하여는 (사65:20, 단 12:2, 호 13:14 등을 참조).


○.<눈물을 씻기시며 … 수치(羞恥)를 온 천하에서 제(除)하시리라>

  죽음이 제거(除去)되면 그로부터 연유(緣由)하는 눈물도, 슬픔도 없게 될 것이다. 여호와는 죽음이라는 근본 원인을 제거(除去)하실 뿐 아니라 친히 그 손으로 모든 사람들의 얼굴에 묻은 눈물을 닦아주신다(계 7:17, 21:4). ‘그 백성의 수치(羞恥)’는 기본적으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관련된 말이다. 이들은 하나님을 모르는 세상의 한 가운데서 홀로 여호와 종교를 갖는다는 것만으로 조소(嘲笑)거리가 되어 왔던 것이다. 그러나 세계 모든 민족들이 이스라엘을 통하여 구원(救援)을 받게 되는 그날에 모든 수치(羞恥)는 녹는 눈처럼 사라질 것이다(롬 11:11, 12, Oswalt).  (사 25:8, 만나주석)


(12월29일) (목)  <하나님의 이름이 그들의 이마에 있음> 


(Q)~(롬 4:2, 3) 우리가 구원(救援)의 확신(確信)을 가질 수 있는 유일(唯一)한 이유는 무엇입니까?


(A)~○.구원(救援)은 오직 믿음으로 주어지는 것이며 그 사실을 개인의 구주(救主)로 받아들이고 그분께 순종하고, 그분 안에서 지금 누릴 수 있는 새로운 삶을 포함하여 그분의 약속을 주장(主張)하며, 오직 그분의 은혜에만 전적(全的)으로 의지(依支)한다면, 우리는 구원(救援)의 확신을 가질 수 있다. 이는 아브라함은 믿었고, 그것이 그에게 의(義)로 여겨졌다” 우리에게도 마찬가지다. 이것이 바로 우리들의 이마에 하나님의 이름이 기록되어 있다는 말씀의 의미(意味)다. 만일 지금 우리 이마에 그분의 이름이 기록되어 있고, 그분으로부터 돌아서지 않는다면, 그 이름은 새 하늘과 새 땅에서도 기록되어 있을 것이다.


○.<(롬4:3) 믿음은 그리스도의 의를 붙잡음(롬 3:28; 5:1; 엡 2:8)>

  믿음은 하나님이 죄인들에게 용서를 약속하시기에 적합(適合)한 상태이다. 그것은 믿음에 구원(救援)을 얻을만한 공로(功勞)가 있기 때문이 아니요, 믿음이 죄를 위해서 마련된 치료제(治療劑)인 그리스도의 공로(功勞)를 붙잡을 수 있기 때문이다. 믿음은 죄인의 죄와 허물 대신에 그리스도의 완전한 순종을 제시(提示)할 수가 있다. 죄인이 그리스도를 그의 구주(救主)로 믿을 때에 틀림없으신 그분의 약속에 의하여 하나님은 그의 죄를 용서하시고, 그를 값없이 의롭다 하신다. 회개(悔改)한 사람은 그의 칭의(稱義)가 그리스도께서 그의 대속자(代贖者)와 보증인(保證人)으로서 그를 위해 죽으시고 그의 속죄(贖罪)와 의(義)가 되셨기 때문에 오는 것임을 절실히 깨닫는다.


○.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매 이것이 저에게 의(義)로 여기신바 되었느니라. 일하는 자에게는 그 삯을 은혜(恩惠)로 여기지 아니하고 빚으로 여기거니와 일을 아니할지라도 경건(敬虔)치 아니한 자를 의(義)롭다 하시는 이를 믿는 자에게는 그의 믿음을 의로 여기신다. 의(義)는 율법에 순종하는 것이다. 율법은 의(義)를 요구(要求)하고, 죄인은 율법에게 이 빚을 갚아야 하는데 이제 그는 이것을 치룰 수 있게 되었다. 그가 의(義)에 이를 수 있는 유일한 길은 믿음을 통해서 가는 길 뿐이다. 믿음으로 그는 그리스도의 공로(功勞)를 하나님께 가져갈 수 있게 되었고 하나님은 그 아들의 순종을 죄인의 계정(計定)에다 두신다. 인간의 실패 대신으로 그리스도의 의(義)가 가납(嘉納)된다. 그리고 하나님은 믿고 회개하는 영혼을 받으시고, 용서(容恕)하시고, 의(義)롭다 하시고, 의인을 대하듯 그를 대하시고, 그의 아들을 사랑하듯 그를 사랑하신다. 이것이 바로 믿음이 어떻게 의(義)로 여기시는 바 되는가 하는 것이다. (리뷰 1890. 11. 4).  (롬 4:2~3, 화잇주석)


○.아브라함의 믿음이 의(義)로 여겨졌다는 사실이, 믿음 그 자체에 칭의(稱義)를 얻을 수 있는 어떤 공로(功勞)가 들어 있었다는 뜻은 아니다. (참조 EGW Supplementary Material on ch. 4:3~5). 의(義)로 여겨진 것은 하나님에 대한 아브라함의 믿음이었다. 그런 믿음은 하나님을 향(向)한 인간의 관계요 태도(態度)이며 생각이다. 그것은 하나님이 무엇을 나타내든지 기쁨으로 받아들이고자 하며, 하나님이 무엇을 지시(指示)하든지 기쁨으로 행하고자 준비되어 있음을 의미한다. 그는 하나님을 알았고 또한 그분의 벗(약 2:21~23)이었기 때문에 하나님을 사랑하고 신뢰(信賴)하고 순종했다. 그의 믿음은 사랑과 확신과 복종(服從)의 진정한 관계였다. 더욱이 아브라함은 구원(救援)의 복음을 알았고, 자신의 칭의(稱義)는 오실 분의 속죄(贖罪)하는 희생(犧牲)에 의존(依存)되어 있음을 알았다(갈 3:8; 참조 요 8:56). 언약을 세울 때에 구속(救贖)의 경륜(經綸)이 “위대한 희생제물이신 그리스도의 죽음과 영광스러운 그분의 오심 가운데 그에게 펼쳐졌다”(부조와 선지자, 137). 


○.아브라함은 메시야에 대한 약속(約束)을 믿었고, 그의 “믿음은 오실 구세주(救世主)에게 고정(固定)되었다”(부조와 선지자, 154). 아브라함이 의(義)로운 자로 여겨진 것은 자신의 불의(不義) 대신 그리스도의 속죄(贖罪)와 의(義)를 감사함으로 신뢰하면서 받아들였기 때문이다. 이것은 모든 믿는 그리스도인들이 누리는 믿음으로 말미암는 칭의(稱義)의 경험(經驗)과 같다.(롬 4:2~3, 재림교주석)


○.<(롬4:2) 의(義)롭다 하심을 얻었으면>. 

  만약 아브라함이 자기의 순종의 행위로 인한 보상(報償)으로 의(義)롭다 함을 받았다면 그는 정말 무엇인가 자랑할 것이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사실상 아브라함은 하나님 보시기에 자랑할 만한 것이 전혀 없었다. (롬3~5절)에서 바울은 그 이유를 설명한다. 분명한 사실은 아브라함이 전혀 행위(行爲)에 대한 보상(報償)으로 의(義)롭다 함을 받은 것이 아니라, 오히려 다른 모든 신자(信者)와 동일한 방법으로 받았다는 것이다. (롬 4:2~3, 재림교주석)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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