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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과 - 우리를 위해 죽으심 - (핵심 Q & 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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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이봉주 작성일22-11-01 16:38 조회1,404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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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6과 우리를 위(爲)해 죽으심 

                                         (11월 05일 (안) / 일몰: 17시 30분) 


<서언(緖言)>

○. 인간이라면 선인(善人)이든 악인(惡人)이든 모두가 죽음을 피(避)할 수 없다, 다만 죽음을 지연(遲延)을 시킬 수는 있지만 인간은 모두가 다 죽는다. 그러기에 부활(復活)에 대한 소망(所望)은  아주 중요하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復活)은 우리 믿음에 있어 핵심(核心)이 되는 것이다. 이번 주 제6과는 부활과 소망(所望)이 되시는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이 영생(永生)의 약속(約束)에 있어 어떤 의미(意味)를 갖고 있는지에 대한 귀중한 교과(敎科)가 될 것이다.


(10월 30일) (日)  <“창세(創世) 때부터”> 


(Q)~ “영생(永生)의 소망(所望)을 위(爲)함이라 이 영생은 거짓이 없으신 하나님이 영원(永遠) 전(前)부터 약속(約束)하신 것인데” (딛 1:2)의  예수님의 죽음을 통한 구원(救援)의 계획(計劃)은 얼마나 오래 전(前)부터 준비(準備)되었던 것입니까?


(A)~○. 예수그리스도의 구원(救援)의 계획(計劃)은 아담과 하와의 범죄로 인한 타락(墮落) 이전(以前)에 하나님의 사랑에 기초(基礎)한 영원전(永遠前)부터 약속(約束)하셨고 준비(準備)되었으며 그 구원(救援)의 계획의 중심에는 예수님의 대속적(代贖的)죽음이 자리 잡고 있다는 것이다. (구속(救贖)=대속(代贖)+속죄(贖罪)) (요한계시록 13:8, 사도행전 2:23, 그리고 베드로전서 1:19~20) 참조


(10월 31일) (月)  <십자가(十字架)의 서문(序文)>


(Q)~(마 16:21~23, 눅 18:31~34) 제자(弟子)들을 비롯한 많은 사람들은 예수의 앞으로 다가올 십자가 사건과 부활의 가르침을 왜 불신 했으며, 예수님께서 자신의 고난(苦難)과 죽음에 대해 말씀하셨을 때 왜 제자(弟子)들은 그러한 예수님의 말씀을 이해하지 못하고 받아들이지 못했는가?


(A)~○. 사람들은 자신 쪽의 생각(生覺)의 선입견(先入見)과 편견(偏見)으로 매사(每事)를 바라보고 판단(判斷)하는 경향(傾向)으로 인하여 누(累)를 끼치게 된다. 예수님께서는 자신의 사명에 대해 분명히 알고 계셔서 장차 다가올 죽음에 대하여 말씀하실 때 그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받아들이려고 하지도 않았다. 메시아의 역할에 관한 잘못된 개념으로 가득 차 있었던 그들에게, 그들이 메시야에 대한 잘못된 기대감과 목적에 사로잡혀 결코 용납할 수 없었기 때문에 메시아로 여겼던 예수님의 죽음은 절대로 받아들이고 싶지 않은 일이었으며 그들의 잘못된 신학(神學)이 그들을 불필요(不必要)한 아픔과 고통(苦痛)으로 이끌게 되었다.

이와 같이 지금 우리도 예수님의 재림을 성경에 뜻(신본주의(神本主義)) 에 순종하지 않고 사회적 현실과 자의적(恣意的)인 생각으로 인본주의(人本主義) 신앙(信仰)으로 예수님 당시의 제자(弟子)들처럼 실수(失手)하지 않기를 교훈(敎訓)하자.


(11월 01일) (火)  <“다 이루었다!”>


(Q)~(요 19:1~30)? 예수님께서 십자가(十字架) 위에서 하신 “다 이루었다”라는 말씀이 우리에게 주는 중요(重要)한 기별(寄別)은 무엇입니까?


(A)~○. 예수님께서는 유다의 배신을 포함하여 십자가로 이끄는 사건들을 부추긴 것은 사탄이었지만, 예수님께서는 바로 그 고난을 통해 사탄의 왕국을 멸망시키고 계셨다. (요 6:70, 요 13:2, 27). “예수님의 죽음은 사탄이 벌인 일인 동시에 예수님께서 사탄과 싸워 이긴 사건이며” 또한 구원(救援)을 받기 위하여 다른 일이 더 필요하지 않다는 것을 선포(宣布)하신 것이다. 즉  십자가 위에서 “다 이루었다”고 외치심으로 예수님께서는 자신의 고통(苦痛)이 끝났음을 말씀하셨을 뿐만 아니라, 사탄 그리고 그를 따르는 악(惡)한 무리들과의 우주적(宇宙的), 역사적(歷史的) 쟁투(爭鬪)에서 승리(勝利)하셨음을 선언(宣言)하신 것이다. “온 하늘은 구주(救主)의 승리(勝利)에 개가(凱歌)를 불렀다. 사탄은 패배(敗北)했다. 그는 자기의 나라를 잃어 버렸다는 것을 알았다” (시대의 소망, 758). 


(11월 02일) (水)  <우리를 위(爲)해 죽으심>


(Q)~(요 3:14~18, 롬 6:23) 예수님의 죽음은 우리를 위해 무엇을 이루어 주셨나요?


(A)~○. 온 우주를 창조하신 예수님께서(요1:1~3) 우리의 구원(救援)을 위해 자신의 목숨을 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독생자(獨生子) 예수를 세상에 보내신 것은 죄(罪)로 인해 정죄(定罪) 받지 않도록 하시기 위해 우리 죄를 위한 희생제물(犧牲祭物)로써 예수님 자신을 내어 주신 것입니다. 이러한 사실을 받아들이고 예수님을 생명(生命)의 구주(救主)로 영접(迎接)하는 자는 구원(救援)을 받아 멸망(滅亡)치 않고 영생(永生)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11월 03일) (木)  <십자가(十字架)의 의미(意味)>


(Q)~(고전 1:18~24) 기독교(基督敎) 신앙(信仰)의 중심(中心)에 십자가(十字架)가 위치(位置)할 수밖에 없는 이유는 무엇이며, 십자가(十字架)의 도(道)란 무슨 의미(意味)입니까?


(A)~○. 세상의 기준과 세상의 지혜로 볼 때 십자가의 도는 어리석은 것처럼 보일 수 있지만, 십자가는 하나님의 사랑과 공의의 교차점입니다. 십자가는 사단의 운명에 종지부를 찍은 것이다. 십자가는 영원히 인류를 구원하는 표상이 되었다. 마귀가 예수를 십자가로 죽이려 했으나 예수께서는 오히려 사랑을 통하여서 영원한 승리를 거두신 것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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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미부록(末尾附錄)>



                  제6과 우리를 위(爲)해 죽으심 

                                    (11월 05일 (안) / 일몰: 17시 30분) 


<서언(緖言)>

○. 인간이라면 선인(善人)이든 악인(惡人)이든 모두가 죽음을 피(避)할 수 없다, 다만 죽음을 지연(遲延)을 시킬 수는 있지만 인간은 모두가 다 죽는다. 그러기에 부활(復活)에 대한 소망(所望)은  아주 중요하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復活)은 우리 믿음에 있어 핵심(核心)이 되는 것이다. 이번 주 제6과는 부활과 소망(所望)이 되시는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이 영생(永生)의 약속(約束)에 있어 어떤 의미(意味)를 갖고 있는지에 대한 귀중한 교과(敎科)가 될 것이다.


(10월 30일) (日)  <“창세(創世) 때부터”> 


(Q)~ “영생(永生)의 소망(所望)을 위(爲)함이라 이 영생은 거짓이 없으신 하나님이 영원(永遠) 전(前)부터 약속(約束)하신 것인데” (딛 1:2)의  예수님의 죽음을 통한 구원(救援)의 계획(計劃)은 얼마나 오래 전(前)부터 준비(準備)되었던 것입니까?


(A)~○. 예수그리스도의 구원(救援)의 계획(計劃)은 아담과 하와의 범죄로 인한 타락(墮落) 이전(以前)에 하나님의 사랑에 기초(基礎)한 영원전(永遠前)부터 약속(約束)하셨고 준비(準備)되었으며 그 구원(救援)의 계획의 중심에는 예수님의 대속적(代贖的)죽음이 자리 잡고 있다는 것이다. (구속(救贖)=대속(代贖)+속죄(贖罪)) (요한계시록 13:8, 사도행전 2:23, 그리고 베드로전서 1:19~20) 참조


○. 한편 어린 양이 창세 이후로 죽임을 당했다는 생각은 베드로의 진술 “오직 흠 없고…어린 양 같은…그는 창세전부터 미리 알리신바 된 자나”(벧전 1:19, 20)와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다. 죄를 범한 인류를 위해 그리스도가 죽으리라는 결정은 이 세상이 창조되기 전에 이루어졌으며 인간이 타락했을 때 추인되었으므로, 그러한 의미에서 그는 창세전부터 죽임을 당한 것으로 간주될 수 있다.  (계 13:8, 재림교주석)


○. (행2:23) 하나님의 정하신 뜻과 미리 아신 대로. ‘정하신’(호리스메네)이란 ‘고정되어진, 결정되어진’의 의미로 하나님의 뜻을 영원 속에 두었다는 말이다. 이는 하나님이 영원 속에서 예수를 통한 구원 계획을 가지셨다는 것을 보여 준다. 하나님의 정하신 뜻은 인간에 의해서 변하지 않는다. 따라서 유대인의 악한 행위가 하나님의 영원 전에 세우신 계획을 바꿀 수 없었던 것이다.


○. (행2:23) 정하신 뜻. 

베드로는 영적 통찰력을 계발해 왔으므로 이제 그리스도의 죽음과 관련된 비극적인 사건들 속에서, 하나님이 미리 아신 대로 그분의 목적한 바가 이루어진 것을 볼 수 있었다. (행 1:16; 참조 사 53:10 주석; 눅 22:22).


○.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는 비길 데 없으며, 그의 구속을 다른 어떤 것보다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위대한 것으로 만든다(참조 롬 3:25 주석). 참으로, 그리스도의 보혈만이 우리를 죄에서 구속할 수 있다.  (벧전 1:19, 재림교주석)


○. (벧전1:19) 오직 흠 없고 점 없는 어린 양 같은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로 한 것이니라. 

‘어린 양 같은’에 해당하는 헬라어 ‘호스 암누’은 침례 요한이 예수를 갈릴리 때 이미 사용한 표현이다(요 1:29,36). 본문의 유래에 대해 혹자는 사53장에서 비롯되었다고 주장한다(Bigg). 왜냐하면 사 52장에서는 구속의 대가를 예수의 보혈과 비교하며 사 53장에서 예수와 어린 양을 대비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견해는 무리가 따른다. 왜냐하면 본 절에서 어린 양의 피는 예수의 보혈로 비유되는 반면에 사 53장에는 어린 양의 피가 없으며 심지어 침묵하는 어린 양으로만 비유되고 있기 때문이다. 즉 사 53장은 예수의 고난을 나타내나 구속의 보혈과는 연결되지 않는다. 차라리 본문은 세상 죄를 지고 가는 어린 양을 출 12장에 나타난 유월절 어린 양과 대비시킨 것이다. 왜냐하면 본문은 유월절 어린 양이 지닌 구원과 해방에 대비된 예수의 사역을 시사 하기 때문이다(Michaels). 예수께서는 유월절의 어린 양과 같이 죄와 허물이 없으신 유일한 분으로서 그의 구속은 보다 완전하고 귀한 것이다(출 12:46, 요 19:36, 고전 5:7, Blum). (벧전 1:19, 만나주석)


(10월 31일) (月)  <십자가(十字架)의 서문(序文)>


(Q)~(마 16:21~23, 눅 18:31~34) 제자(弟子)들을 비롯한 많은 사람들은 예수의 앞으로 다가올 십자가 사건과 부활의 가르침을 왜 불신 했으며, 예수님께서 자신의 고난(苦難)과 죽음에 대해 말씀하셨을 때 왜 제자(弟子)들은 그러한 예수님의 말씀을 이해하지 못하고 받아들이지 못했는가?


(A)~○. 사람들은 자신 쪽의 생각(生覺)의 선입견(先入見)과 편견(偏見)으로 매사(每事)를 바라보고 판단(判斷)하는 경향(傾向)으로 인하여 누(累)를 끼치게 된다. 예수님께서는 자신의 사명에 대해 분명히 알고 계셔서 장차 다가올 죽음에 대하여 말씀하실 때 그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받아들이려고 하지도 않았다. 메시아의 역할에 관한 잘못된 개념으로 가득 차 있었던 그들에게, 그들이 메시야에 대한 잘못된 기대감과 목적에 사로잡혀 결코 용납할 수 없었기 때문에 메시아로 여겼던 예수님의 죽음은 절대로 받아들이고 싶지 않은 일이었으며 그들의 잘못된 신학(神學)이 그들을 불필요(不必要)한 아픔과 고통(苦痛)으로 이끌게 되었다.


이와 같이 지금 우리도 예수님의 재림을 성경에 뜻(신본주의(神本主義)) 에 순종하지 않고 사회적 현실과 자의적(恣意的)인 생각으로 인본주의(人本主義) 신앙(信仰)으로 예수님 당시의 제자(弟子)들처럼 실수(失手)하지 않기를 교훈(敎訓)하자.


○. 하나님의 일 … 사람의 일. 베드로는 하나님의 일, 즉 하나님께서 이미 계획하시고 섭리한 바대로 예수가 예루살렘에 올라가 수난 받고 죽어야 한다는 것(21절)을 생각지 않고, 사람의 일, 곧 예수가 수난의 현장에 가면 안 된다는 생각에 집착(執着)했던 것이다. 실로 그는 철저히 인간의 이성에 근거하여 세속적 관점에서 예수의 수난 사건을 평가함으로써 결국 예수에게 크나큰 수치와 장애를 안겨 주고 말았다(Chrysostom).” (마 16:21~23, 만나주석)


○. (마16:22) 베드로와 그리스도 사이에 있었던 사단(눅 22:31, 32)

주께서 베드로에게 말씀하신 것을 보라. … 그는 “사단아, 내 뒤로 물러가라”고 말씀하셨다. 사단이 무엇을 하고 있었는가? 사단은 바로 베드로의 면전에서 베드로와 마주 대하여 주님과 베드로 사이에 있었다. 베드로는 사단을 힘입어 주님을 비난하려고 하였다. 그러나 주님이 베드로에게 아주 가까이 다가가시자 사단은 그리스도의 뒷자리에 놓이게 되었다. 주님은 베드로에게 사단이 밀 까부르듯 하려고 베드로를 청구하였지만 “네 믿음이 떨어지지 않기를 기도하였다”고 말씀하셨다. 베드로가 만약 배워야 할 교훈들을 배웠더라면 그는 시련의 때에 바르게 섰을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가르치신 교훈에 대해서 그가 무관심하지 않았더라면 그는 그의 주님을 결코 부인하지 않았을 것이다(원고 14, 1894).


○. 예수께서는 민 21:4-9의 내용을 들어 자신의 구속 사업 즉 하늘의 일을 설명하셨다. 출애굽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은 광야 생활 가운데서 하나님과 모세를 원망하다가 불 뱀에 물려 죽게 되었을 때 모세가 장대 위에 매달아 놓은 놋뱀을 쳐다본 사람은 살아날 수 있게 되었다. 이 사건은 그리스도께서 십자자에서 돌아가실 것과 그 십자가의 예수를 바라보고 믿는 자는 구원을 얻게 될 것임을 예표(豫表)하는 것이다. 이는 놋뱀 자체가 어떤 치유의 능력이 있었던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 사람들의 마음을 하나님께로 인도함으로 구원을 받게 하였던 것이다. (요 3:14~15, 만나주석)


○. 그렇다면 왜 죄와 사탄을 상징하는 뱀이 사람을 구원하는 그리스도의 상징이 되었는가? 그것은 사탄이 죄를 이 땅에 들여옴으로 저주를 받은 것처럼(창 3:15), 예수께서는 인류의 모든 죄를 지시고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갈 3:13)으시고 십자가에서 돌아가셨기 때문이다. (요 3:14~15, 만나주석)


(11월 01일) (火)  <“다 이루었다!”>


(Q)~(요 19:1~30)? 예수님께서 십자가(十字架) 위에서 하신 “다 이루었다”라는 말씀이 우리에게 주는 중요(重要)한 기별(寄別)은 무엇입니까?


(A)~○. 예수님께서는 유다의 배신을 포함하여 십자가로 이끄는 사건들을 부추긴 것은 사탄이었지만, 예수님께서는 바로 그 고난을 통해 사탄의 왕국을 멸망시키고 계셨다. (요 6:70, 요 13:2, 27). “예수님의 죽음은 사탄이 벌인 일인 동시에 예수님께서 사탄과 싸워 이긴 사건이며” 또한 구원(救援)을 받기 위하여 다른 일이 더 필요하지 않다는 것을 선포(宣布)하신 것이다. 즉  십자가 위에서 “다 이루었다”고 외치심으로 예수님께서는 자신의 고통(苦痛)이 끝났음을 말씀하셨을 뿐만 아니라, 사탄 그리고 그를 따르는 악(惡)한 무리들과의 우주적(宇宙的), 역사적(歷史的) 쟁투(爭鬪)에서 승리(勝利)하셨음을 선언(宣言)하신 것이다. “온 하늘은 구주(救主)의 승리(勝利)에 개가(凱歌)를 불렀다. 사탄은 패배(敗北)했다. 그는 자기의 나라를 잃어 버렸다는 것을 알았다” (시대의 소망, 758). 


○. (요한복음19:30) <다 이루었다>

예수는 아버지가 그에게 하라고 준 일을 완수했다(4:34). 

세계의 기초가 놓이기 전부터 준비된 구속의 경륜의 매 단계가 예정에 따라 완성되었다. (참조 눅 2:49 주석). 사단은 그 계획을 뒤엎으려는 일에 실패했다. 그리스도의 승리는 인간의 구원을 확실하게 하였다(참조 시대의 소망, 758~764).  (요 19:30, 재림교주석)


○. 사단이 번개같이 떨어짐(마 27:51)―

그리스도께서 “다 이루었다”고 부르짖으셨을 때 하나님의 보이지 않는 손이 튼튼한 실로 짠 성소의 휘장을 위에서 아래까지 찢으셨다. 지성소로 나아가는 길이 나타났다. 하나님은 만족한 마음으로 고개를 숙이셨다. 이제는 공의와 자비가 한데 섞일 수가 있다. 그는 공의로운 분이지만 그리스도를 믿는 모든 자를 의롭다고 하실 수도 있으시다. 그분은 십자가 위에서 숨을 거두시는 희생 제물을 바라보시고 “다 이루었다. 인류에게 다시 한 번 더 기회를 주겠다.고 말씀하셨다. 구속의 값은 치루어졌고, 사단은 하늘에서 번개같이 떨어졌다(원고 111, 1897).


○. 거룩한 천사들은 한때 그들 가운데 있었던 자가 그토록 잔인한 짓을 할 수 있을 만큼 타락할 수 있다는 사실에 경악을 금치 못하였다. 사단이 쫓겨났을 때 천사들이 갖고 있었던 동정과 연민의 정은 그들의 마음속에서 모두 다 사라져 버렸다. 투기심 때문에 아무 죄없는 사람에게 그렇게 심한 복수를 한다는 것은 하늘빛으로 가장한 그의 옷을 벗겨서 그 밑에 숨겨 놓은 결함을 폭로하기에 족하리. 만큼 큰 잘못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을 받은 사람에 대한 사랑과 선례를 볼 수 없는 자기 부정의 정신을 가지고 하늘에서 내려 오셔서 타락한 인간의 성정을 취하신 하나님의 아들을 향한 원한을 그런 식으로 나타낸다는 것은 하늘 정부를 거스른 악하기 그지없는 범죄이기 때문에 그것은 천사들을 공포에 질려 벌벌 떨게 하고 사단과 하늘 간에 남아있던 마지막 동정의 끈을 영원히 잘라버리고도 남음이 있었다(3예언 183,184).


○. 마지막 동정의 끈도 잘려짐

그리스도께서 “다 이루었다” 부르짖으셨을 때 온 하늘은 승리의 함성을 질렀다. 구원의 계획의 집행에 관한 그리스도와 사단간의 쟁투는 이제 끝났다. 사단과 그의 사업 정신은 인간 자녀들의 애정에 깊이 뿌리를 내리고 있었다. 권력을 잡은 사단이 세상에서 죽을 것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아들에 대하여 그가 가진 무자비한 증오심이 그가 세상에 계실 때에 그분을 대하는 태도에 나타났다. 그리스도가 팔 리우고, 재판을 받고, 십자가에 처형된 것은 모두 다 이 타락한 원수가 계획한 그대로였다. 하나님의 아들의 죽음으로 인하여 현실로 드러난 사단의 증오심은 죄로 인하여 타락한 일이 없는 하늘의 모든 지적 존재자들에게 극악무도한 그의 성품을 극명(克明)하게 보여 주었다. (요 19:30, 화잇주석)


○. 계약이행(契約履行)(마 27:45) 

이 말씀은 그리스도께서 그의 아버지께 아뢴 말씀이었다. 이같이 큰 희생을 하실 때 그리스도는 홀로 계시지 않았다. 그것은 땅의 기초가 놓이기 전에 아버지와 아들이 맺은 언약의 성취였다. 만약 인간이 사단의 궤변에 속아 넘어가면 그리스도가 인류를 위한 보증인과 대속물이 될 것이라는 것을 아버지와 아들은 손을 굳게 잡으시고 맹세하셨다. 그 언약은 이제 완전히 성취되었고, 그 절정에 이르렀다. 그리스도는 그가 맺은 언약을 글자 그대로 성취하고 있다는 의식을 갖고 있었다. 죽음으로 그는 정복자 이상이 되셨다. 구속의 값은 치러졌다. (원고 111, 1897).


(11월 02일) (水)  <우리를 위(爲)해 죽으심>


(Q)~(요 3:14~18, 롬 6:23) 예수님의 죽음은 우리를 위해 무엇을 이루어 주셨나요?


(A)~○. 온 우주를 창조하신 예수님께서(요1:1~3) 우리의 구원(救援)을 위해 자신의 목숨을 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독생자(獨生子) 예수를 세상에 보내신 것은 죄(罪)로 인해 정죄(定罪) 받지 않도록 하시기 위해 우리 죄를 위한 희생제물(犧牲祭物)로써 예수님 자신을 내어 주신 것입니다. 이러한 사실을 받아들이고 예수님을 생명(生命)의 구주(救主)로 영접(迎接)하는 자는 구원(救援)을 받아 멸망(滅亡)치 않고 영생(永生)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 죄는 죄의 노예들에게 그들이 벌어들인 그대로 갚아 준다. “범죄하는 그 영혼이 죽으리라”(겔 18:4). 여기서 사망은 영생과 대조되고 있으므로, 바울은 특별히 영원한 죽음 즉 “둘째 사망”을 언급하고 있다(계 20:6, 14, 15; 참조 각 시대의 대쟁투, 544; 초기문집, 51). 마지막 멸망 시에 죄인들은 그들이 마땅히 받을 대접을 받게 될 것이다. 그들은 은혜와 영생을 주시겠다는 하나님의 제안을 거절했으므로, 그들이 고의로 선택한 결과를 받게 될 것이다. (시대의 소망, 763, 764,).


○.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세상’을 뜻하는 헬라어 ‘코스모스’는 유대인과 이방인을 포함한 온 인류를 가리킨다. 유대인의 전통적인 사고방식으로는 하나님의 사랑은 선민 이스라엘에게만 국한되는 것으로 여겨졌다. 그러나 요한은 하나님의 사랑이 민족이나 계급을 초월하여 모든 인류에게 미친다는 사실을 분명히 밝힌다. 이는 곧 복음의 보편성과 그 맥을 같이 한다. 모든 사람에게 하나님의 은혜가 개방되어 있지만 그 은혜를 받을 수 있게 하는 것은 오직 믿음임은 물론이다. 그리고 본 절에는 독생자를 보내신 것이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이 동기가 된 것임이 밝혀져 있다. 특별히 ‘사랑’의 헬라어 ‘아가페’은 요한복음에서 가장 중요한 단어들 중의 하나로써, 하나님 편에서 선수권(先手權)과 주도권(主導權)을 가지고 인생의 연약함과 죄성을 끝없이 감싸 안으신다는 뜻을 내포하고 있다. 사랑은 바로 하나님의 본성이라 하겠으며(요일 4:8) 인류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고난을 통해 그 절정에 이르렀다. 그리고 본질상 하나님과 동등하신 예수의 생애를 보면 우리는 그 사랑을 보다 구체적으로 이해할 수 있다. 이 사랑은 결코 타율적인 것이 아니라 자발적인 것이며 막연한 이론이나 말로써 하는 것이 아니라 반드시 응분(應分)의 대가를 아낌없이 지불하는 것이다. (요 3:14~18, 만나주석)


○. 그리스도는 “부활이요 생명”이다(요 11:25). 그분은 그분에 대한 믿음을 가진 모든 자에게 영생을 주는 생명의 시여자이다(요 6:40). 하나님의 영생의 은사는 그리스도를 통하여 주어질 뿐만 아니라, 그것의 영구적인 원천인 그리스도 안에 있으며 “우리 생명이신” 그분과의 연합을 통하여 받을 수 있다(골 3:4. 참조 시대의 소망, 786, 787,).


○. (롬6:23) 죄의 삯은 사망이요 하나님의 은사는 … 영생이니라. 

‘죄의 삯은 사망’이라는 말은 죄에 계속 거하는 자에게 지불되는 대가가 사망이라는 의미이다. ‘삯’에 해당하는 헬라어 ‘와소니아’은 흔히 ‘병사들의 급료’의 의미로 사용된다(Hendriksen, Murray, Calvin, Barmby, Black). 비록 ‘와소니아’가 딤전 5:18에서는 단순히 노동자가 일한 것에 대한 대가의 의미로 사용되고 있을지라도 나머지 구절들(눅 3:14, 고전 9:7)에서는 군사적인 의미를 지니고 있다. 바울은 이 단어를 사용함으로써 일꾼과는 달리 군인들이 철저하게 군사적인 의무에 매여 있음에 대한 대가를 받는 것처럼, 사람이 ‘죄의 종’으로서 죄에게 충성함으로 ‘사망’이라는 대가를 받게 됨을 강조하고 있다. 그리고 이 ‘와소니아’는 그 다음에 언급되는 은사(카리스마)와 대조되고 있다. 이 ‘은사’는 ‘일한 것 없이 하나님께 의로 여기심을 받는’(4:6) 것에 대하여 적용될 수 있는 적절한 용어다. 그리고 이 ‘은사’는 성도가 죄에서 해방되어(18, 22a절) 거룩의 열매를 얻게 된(22b절) 사실을 지적하고 있음이 분명하다. 이처럼 성도는 구원의 전 과정에 있어서 자신이 노력한 대가를 받게 되는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은사로 값없이 ‘의’, ‘성화’, 그리고 ‘구원’을 받게 되므로 결코 자랑할 수 없다. (롬 6:23, 만나주석)


(11월 03일) (木)  <십자가(十字架)의 의미(意味)>


(Q)~(고전 1:18~24) 기독교(基督敎) 신앙(信仰)의 중심(中心)에 십자가(十字架)가 위치(位置)할 수밖에 없는 이유는 무엇이며, 십자가(十字架)의 도(道)란 무슨 의미(意味)입니까?


(A)~○. 세상의 기준과 세상의 지혜로 볼 때 십자가의 도는 어리석은 것처럼 보일 수 있지만, 십자가는 하나님의 사랑과 공의의 교차점입니다. 십자가는 사단의 운명에 종지부를 찍은 것이다. 십자가는 영원히 인류를 구원하는 표상이 되었다. 마귀가 예수를 십자가로 죽이려 했으나 예수께서는 오히려 사랑을 통하여서 영원한 승리를 거두신 것이다. 


○. 예수 그리스도는 세상의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십니다(요 1:29). 예수님을 하나님의 어린 양으로 언급한 것은 출애굽기 12장에서 유대인들의 유월절로 다시 돌아가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흠 없는 어린 양을 희생시켜 그 피를 집 문설주에 바르라는 명령을 받았습니다. 그 피로 인해 죽음의 천사가 그 집을 “지나가게” 되고, 그 피로 인해 그 집은 안전하게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침례를 받으러 요한에게 오셨을 때, 요한은 예수님을 알아보고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고 외쳤습니다(요 1:29). 이것은 예수님이 누구인지, 그리고 예수님이 우리 죄를 위한 제물이 되실 하나님의 계획임을 증거 합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보여주신 속죄의 희생으로 말미암아 예수님을 구주로 믿고 신뢰하는 사람들에게는 영생이 보장됩니다(요 3:16). 1세기 사람들에게 십자가는 죽음이라는 단 하나의 의미였습니다.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하고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찾으리라”(마 16:25). 갈라디아서에서는 죄 많은 자아의 죽음과 그리스도를 통해 새로운 삶으로 나아가는 이 주제를 반복해서 이야기합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갈 2:20). 그러므로 구주(救主) 예수그리스도를 믿는 우리들에게 십자가는 우리를 구원하는 가장 강력한 구원의 표시이다.  


○. 십자가상의 그리스도를 보라

우리를 위하여 얼마나 엄청난 값이 지불되었는가! 십자가를 보라! 그곳에 놀라우신 희생자를 보라! 그리스도께서 그분 자신의 몸에 우리의 죄를 지셨다. 그 고통, 그 번민이 그대의 구속의 값이다(놀라운 은혜 172).  (요 19:30, 화잇주석)


‘○. 십자가의 도’에는 하나님의 능력이 있음을 앞의 ‘미련한 것’과 대조시켜 강조한다(고전 4:20). ‘능력’에 해당하는 헬라어 ‘뒤나미스’은 신체적, 영적, 지적 능력을 포함한 총체적 능력을 가리키며, 헬라 세계에서는 우주의 원리로서의 생명력을 의미하였다(TDNT). 신약성경에서는 ‘뒤나미스’가 그리스도와 밀접하게 연결되어 사용되며, 본 절에서는 인간의 구원이 오직 하나님의 초월적인 힘에 의해서만 가능하다는 것을 보여준다.


○.  “십자가의 도”는 십자가에 달린 주님을 믿는 믿음을 통해 받는 구원에 관한 기별이다. 그러한 기별은 철학을 사랑하는 헬라인들과 의식주의적인 유대인들에게는 어리석음의 극치로 보였다.

(고전 1:18~24, 재림교주석)


○. (고전1:21) 하나님의 지혜에 있어서는. 

창조의 위대한 작품들, 천연계의 경이로움, 천체의 영광들 그리고 그들을 대신하여 이뤄진 섭리의 놀라운 역사, 이렇게 하나님의 지혜에 관한 많은 증거들에 둘러싸여 있었지만 그들은 하나님 아는 법을 배우지 않았다. 잃어버린 인류를 향한 사랑과 동정 가운데 하나님은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구원의 영광스러운 소식을 선포하셨다. 이 소식은 세상의 지혜로운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에 지나지 않았지만, 그것을 받아들이는 사람들에게는 구속을 위해 하나님이 선택하신 매개가 됐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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