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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1과 - 시련중에 기다림 - (핵심 Q & 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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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이봉주 작성일22-09-05 02:20 조회1,318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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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11과 시련중(試鍊中)에 기다림

                                                (09월10일 (안) / 일몰: 18시48분)


<서언(緖言)>

인내(忍耐)라는 단어(單語)의 참을 인(忍)자(字)는 심장(心臟)위에 예리(銳利)한 칼(刀)이 있으므로 움직이면 심장을 찌르기에 꼼짝하지 않고 있는 것을 말하는바와 같이 기다림이란 인내(忍耐)를 다른 말로 지칭(指稱)할 수 있듯이 참는 것을 말한다. 즉 살기 위하여 참는 것처럼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특별히 시련(試鍊)(도가니)가운데에서 결코 쉬운 일이 아닌 인내심(忍耐心)을 개발(開發)하라는 중요한 교과(敎科)이다. 그 이유(理由)는 하나님께서 정(定)하신 때에 모든 것을 온전(穩全)히 이루신다는 것을 믿을 때 기쁨으로 예수님의 재림(再臨)을 맞이할 수 있기 때문이다.


(09월04일) (日)  <인내(忍耐)의 하나님>


(Q)~(로마서 15:4~6)이 구절(句節)에서 우리를 위한 어떤 중요(重要)한 교훈(敎訓)을 배울 수 있습니까?


(A)~○.인내(忍耐)란 괴로움이나 어려움을 참고 견딤을 뜻하는데, 인내(忍耐)는 (첫째) 우리가 기다리고 있는 것에 초점(焦點)을 집중(集中)하는 사람과, (둘째) 이 모든 것을 붙들고 계신 그분에게 시선(視線)을 고정(固定)시켜 인내(忍耐)하며 기다리는 것들을 주관(主管)하시는 분께 집중(集中)하며 인내(기다리는)사람으로 양분(兩分)할 수 있다. 그러므로 얼마나 오래 기다리느냐가 아니라, 어떤 자세(姿勢)로 기다리느냐가 본질적(本質的)인 차이점(差異點)임으로 만일 우리가 하나님을 신뢰(信賴)한다면, 어떤 상황(狀況) 속에서도 믿음으로 하나님의 역사(役事)하심을 기다릴 수 있어야 함을 소망(所望)을 주고 교훈(敎訓)해준다.


(09월05일) (月)  <하나님의 시간(時間)에>


(Q)~(롬 5:6, 갈 4:4) 하나님의 실수(失手)함 없으신 시간표(時間表)에 대해 우리가 확신(確信)할 수 있는 이유(理由)는 무엇입니까?


(A)~○.창조주(創造主)이시며 전지전능(全知全能)하신 하나님께서는 가장 합당(合當)한 때에 하나님의 일을 하신다는 분이심을 지난 성경(聖經)의 역사(歷史)에서도 실행(實行)하셨고 또한 미래(未來)에 관해서도 예언(豫言) 하셨으며 이 또한 성취(成就)하실 것을 깨닫고 하나님께 대한 확실(確實)한 신뢰(信賴)를 가지고 그분의 시간표(時間表)에 모든 것이 성취(成就)되신다는 것을 믿고 기다린다면, 그와 같은 기다림은 우리들의 신앙(信仰)에 강력(强力)한 힘과 유익(有益)이 될 것이다. 


(09월06일) (火)  <다윗: 기다림의 실물교훈(實物敎訓)>


(Q)~다윗이 왕이 되기까지 견뎌야 했던 고된 기다림을 통해 우리는 무엇을 배울 수가 있습니까?


(A)~○.다윗은 하나님의 기름부음 받은 자를 사람이 해(害)치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 아니라고 하였다. 또한 다윗은 하나님의 일을 하나님께서 성취(成就)하신 다는 것을 굳게 믿고 그 때가 오기를 인내(忍耐)로 기다렸으며 하나님께서 응답(應答)하실 때까지 기다림으로 자기가 그 일을 앞당기는 수단(手段)을 쓰지 않았다. 그러므로 다윗은 축복(祝福)을 받았다. 우리도 믿음의 여정(旅程)가운데 기다림을 통해 다윗과 같은 축복(祝福)을 경험(經驗)해야 한다. 


(09월07일) (수)  <엘리야 : 조급(躁急)함의 문제(問題)>


(Q)~(왕상 19) 갈멜산에서의 성공적(成功的)인 사역(使役) 이후(以後) 엘리야가 광야(廣野)로 도망(逃亡)한 이유는 무엇이며, 이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계획(計劃)밖으로 도망하게 하는 원인은 무엇이었습니까?


(A)~○.위대(偉大)한 신앙(信仰)이라고 해서 반드시 한결같이 강인(强忍)한 것만은 아니다. 엘리야는 이 중대(重大)한 시기(時期)에 자기가 이스라엘에게 크게 도움이 되고,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일을 하고 있는 동안에는 하나님의 보호(保護)하심을 의지(依支)할 수 있다는 것을 분명(分明)히 알았을 것이다. 그럼에도 그는 도망(逃亡)하였다. 그는 이 사악(邪惡)한 왕비(이세벨)의 냉정(冷靜)하고 결연한 증오심에 저항(抵抗)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다. 그는 단지 그처럼 원한(怨恨)에 차 있는 잔인(殘忍)한 원수(怨讐)의 마수(魔手)를 피할 방법을 생각할 뿐이었다. 엘리야의 교훈(敎訓)에서처럼 우리는 하나님의 선(善)하심과 인자(仁慈)하심을 신뢰(信賴)하는 믿음을 계발(啓發)하는 것만이 유일(唯一)한 안전책이며 이러한 신뢰심(信賴心)은 저절로 생기는 것이 아니다. 다만 믿음은 선물(膳物)이지만, 그것은 매 순간(瞬間)마다 주님께 굴복(屈伏)하는 것이고 우리가 가꾸고 양육(養育)하며 최선(最善)을 다해 돌보아야 할 선물(膳物)인 것이다. 


(09월08일) (木)  <주 안에서 기뻐하기를 배움>


(Q)~ “주 안에서 기뻐한다.는 말의 의미(意味)는 무엇입니까?(시 37:1~11)


(A)~○.주안에서 기뻐한다는 말은 하나님을 온전(穩全)히 신뢰(信賴)하며 살아갈 때 누릴 수 있는 평안(平安)과 기쁨 축복(祝福)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님 안에서 기뻐하는 법을 배울 필요가 있다. 우리가 언제나 주님을 찬양(讚揚)할 때 기쁨과 행복(幸福)한 삶을 누릴 수 있으며 마침내 천국(國)을 얻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말미부록(末尾附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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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11과 시련중(試鍊中)에 기다림

                              (09월10일 (안) / 일몰: 18시48분)


<서언(緖言)>

인내(忍耐)라는 단어(單語)의 참을 인(忍)자(字)는 심장(心臟)위에 예리(銳利)한 칼(刀)이 있으므로 움직이면 심장을 찌르기에 꼼짝하지 않고 있는 것을 말하는바와 같이 기다림이란 인내(忍耐)를 다른 말로 지칭(指稱)할 수 있듯이 참는 것을 말한다. 즉 살기 위하여 참는 것처럼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특별히 시련(試鍊)(도가니)가운데에서 결코 쉬운 일이 아닌 인내심(忍耐心)을 개발(開發)하라는 중요한 교과(敎科)이다. 그 이유(理由)는 하나님께서 정(定)하신 때에 모든 것을 온전(穩全)히 이루신다는 것을 믿을 때 기쁨으로 예수님의 재림(再臨)을 맞이할 수 있기 때문이다.


(09월04일) (日)  <인내(忍耐)의 하나님>


(Q)~(로마서 15:4~6)이 구절(句節)에서 우리를 위한 어떤 중요(重要)한 교훈(敎訓)을 배울 수 있습니까?


(A)~○.인내(忍耐)란 괴로움이나 어려움을 참고 견딤을 뜻하는데, 인내(忍耐)는 (첫째) 우리가 기다리고 있는 것에 초점(焦點)을 집중(集中)하는 사람과, (둘째) 이 모든 것을 붙들고 계신 그분에게 시선(視線)을 고정(固定)시켜 인내(忍耐)하며 기다리는 것들을 주관(主管)하시는 분께 집중(集中)하며 인내(기다리는)사람으로 양분(兩分)할 수 있다. 그러므로 얼마나 오래 기다리느냐가 아니라, 어떤 자세(姿勢)로 기다리느냐가 본질적(本質的)인 차이점(差異點)임으로 만일 우리가 하나님을 신뢰(信賴)한다면, 어떤 상황(狀況) 속에서도 믿음으로 하나님의 역사(役事)하심을 기다릴 수 있어야 함을 소망(所望)을 주고 교훈(敎訓)해준다.


○.인내(忍耐)와 위로(慰勞)는 마치 수도관(水道管)과 같은 성경(聖經)을 통(通)해서 저수지(貯水池) 되는 하나님에게서 흘러나오는 것이다. 우리가 하나님으로부터 위로(慰勞)와 인내(忍耐)를 받으면 받을수록 그만큼 더 우리는 서로를 사랑할 수 있게 된다. 조급(躁急)해하고 투정 대며 짜증내는 우울(憂鬱)한 기질(氣質)보다 화평(和平)을 잘 깨뜨리는 것도 없다.


○.<하나님에 대한 명칭(名稱).>

"인내(忍耐)와 안위(安慰)의 하나님. "곧 그가 모든 성도(聖徒)의 인내(忍耐)와 안위(安慰)의 원저자(原著者)지요 원천(源泉)이라는 얘기다. 그분만이 인내(忍耐)의 은혜(恩惠)를 주시고 안위(安慰)의 하나님으로서 그 인내(忍耐)를 확증(確證)해 주시고 유지(維持)시켜 주신다. 왜냐하면 성령(聖靈)의 위로(慰勞)는 신자(信者)들을 북돋아 주고 모든 난관(難關)에서 격려(激勵)하고 즐겁게 해 주기 때문이다. 사도(使徒)는 사랑과 통일(統一)의 영(靈)을 부어 달라고 기도(祈禱)하는 데 있어서 하나님을 인내(忍耐)와 안위(安慰)의 하나님으로 부르고 있다. (롬 15:4~5, 매튜헨리)


○.(롬15:5) 이제 인내(忍耐)와 안위(安慰)의 하나님이. 

  인내(忍耐)와 안위(安慰)는 성경(聖經)을 통하여 오지만 궁극적(窮極的)으로 그것은 하나님께서 주시는 은사(恩賜)이다(E.F. Harrison). 이 같은 인내(忍耐)와 안위(安慰)는 미래(未來)에 대한 소망(所望)을 가지게 하고 또한 현재(現在)에는 형제간(兄弟間)에 사랑과 협조(協助)를 갖게 한다. (롬 15:5, 만나주석)


○. “각(各) 시대(時代)를 통하여 여호와께서는 하나님의 말을 듣지 않는 자녀(子女)들에 대하여 오래 참으셨고 이제 도전적(挑戰的)인 반역(叛逆)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단 마음으로 그들을 구원(救援)하시고자 하심을 나타내 보이고자 하셨다. 하나님께서는 “에브라임아 내가 네게 어떻게 하랴 유다야 내가 네게 어떻게 하랴 너희의 인내(忍耐)가 아침 구름이나 쉬 없어지는 이슬 같도다.”(호 6:4)고 부르짖으셨다.”(선지, 284)


○. “열성 있고 진실(眞實)한 신자(信者)들은 그리스도를 위하여 모든 것을 버리고 전(前)보다 그리스도 앞에 더욱 가까이 나아갔다. 그들은 그들이 확신(確信)한 그대로 세상에 최후(最後)의 경고(警告)를 하였다. 그들은 미구(未久)에 그들이 주님과 하늘의 천사(天使)들에게 영접(迎接)되리라고 기대(期待)하면서 경고(警告)의 기별(寄別)을 받지 않은 자들과의 교제(交際)에서 거의 떠나 있었다. 그들은 간절(懇切)한 마음으로 “주 예수여 속히 오시옵소서.라고 기도(祈禱)하였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오시지 아니하셨다. 그리하여 그들은 다시 생애(生涯)의 염려(念慮)와 수고(受苦)의 무거운 짐을 질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조롱(嘲弄)하는 세상의 모욕(侮辱)과 조소(嘲笑)를 견디는 일은 믿음과 인내(忍耐)가 요망(要望)되는 무서운 시련(試鍊)이었다.”(쟁투, 404)


○.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백성을 버리지 아니하셨다. 성령(聖靈)께서는 받은 빛을 부인(否認)하지 않고 재림운동을 버리지 않는 사람들과 여전히 함께 하셨다. 히브리서에는 이러한 위기(危機)에 처하여 시련(試鍊) 중에 재림(再臨)을 기다리는 사람들을 위하여 다음과 같은 권면(勸勉)과 경고(警告)의 말씀이 있다. “그러므로 너희 담대(膽大)함을 버리지 말라 이것이 큰 상(賞)을 얻느니라. 너희에게 인내(忍耐)가 필요함은 너희가 하나님의 뜻을 행한 후에 약속(約束)을 받기 위(爲)함이라 잠시 잠깐 후면 오실 이가 오시리니 지체(遲滯)하지 아니하시리라 오직 나의 의인(義人)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또한 뒤로 물러가면 내 마음이 저를 기뻐하지 아니하리라 하셨느니라 우리는 뒤로 물러가 침륜(沈淪)에 빠질 자가 아니요 오직 영혼(靈魂)을 구원(救援)함에 이르는 믿음을 가진 자니라.”(히 10:35-39).”(쟁투, 407)


○.우리로 하여금 인내(忍耐)로 또는 성경(聖經)의 안위(安慰)로 소망(所望)을 가지게 함이니라. 성경을 상징(象徵)하는 진정(眞正)한 목적(目的)은 영생(永生)에 대한 위대(偉大)한 소망(所望)을 갖는데 있다(요 5:39). 


○. “오래지 아니하여 우리는 우리의 영생(永生)의 소망(所望)의 중심(中心)이 되신 분을 보게 될 것이다. 그분 앞에서는 이생에서 겪은 모든 시련(試鍊)과 고통(苦痛)이 흔적(痕迹)도 없이 사라질 것이다. 쳐다보라. 쳐다보라. 그리하여 그대들의 믿음이 계속 증가(增加)되게 하라. 그대들은 이 믿음으로 하나님의 도성(都城)을 거쳐 구속(救贖)받은 자들을 위한 넓고 끝없는 먼 저쪽의 미래(未來)의 영광(榮光)을 향(向)해 가는 좁은 길을 따라야 한다. “그러므로 형제(兄弟)들아 주의 강림(降臨)하시기까지 길이 참으라. 보라 농부(農夫)가 땅에서 나는 귀한 열매를 바라고 길이 참아 이른비와 늦은비를 기다리나니 너희도 길이 참고 마음을 굳게 하라 주의 강림(降臨)이 가까우니라.”(약 5:7, 8).”(9증언, 287)


○.<인내(忍耐)에 대한 성경절(聖經節)>    

⑴."너희의 믿음의 역사와 사랑의 수고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소망(所望)의 인내(忍耐)를 우리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쉬지 않고 기억(記憶)함이니" (데살로니가전서 1장 3절)

⑵."인내(忍耐)는 연단(鍊鍛)을, 연단(鍊鍛)은 소망(所望)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 소망이 부끄럽게 아니함은 우리에게 주신 성령(聖靈)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은바 됨이니" (로마서 5장 3-4절)

⑶."내 형제들아 너희가 여러 가지 시험(試驗)을 만나거든 온전(穩全)히 기쁘게 여기라 이는 너희 믿음의 시련(試鍊)이 인내(忍耐)를 만들어 내는 줄 너희가 앎이라 인내(忍耐)를 온전(穩全)히 이루라 이는 너희로 온전(穩全)하고 구비(具備)하여 조금도 부족함이 없게 하려 함이라" (야고보서 1장 2-4절)

⑷."우리가 선(善)을 행하되 낙심(落心)하지 말지니 피곤(疲困)하지 아니하면 때가 이르매 거두리라" (갈 6장 9절)

⑸."그러나 끝까지 견디는 자는 구원(救援)을 얻으리라" (마태복음 24장 13절)

⑹."성도(聖徒)들의 인내(忍耐)가 여기 있나니 저희는 하나님의 계명(誡命)과 예수 믿음을 지키는 자니라." (요한계시록 14장 12절)

⑺."주께서 너희 마음을 인도(引導)하여 하나님의 사랑과 그리스도의 인내(忍耐)에 들어가게 하시기를 원(願)하노라" (데살로니가후서 3장 5절)

⑻."그 영광(榮光)의 힘을 좇아 모든 능력(能力)으로 능(能)하게 하시며 기쁨으로 모든 견딤과 오래 참음에 이르게 하시고" (골로새서 1장 11절)

⑼."너희의 인내(忍耐)로 너희 영혼(靈魂)을 얻으리라" (누가복음 21장 19절) 

⑽."게으르지 아니하고 믿음과 오래 참음으로 말미암아 약속(約束)들을 기업(基業)으로 받는 자들을 본(本)받는 자 되게 하려는 것이니라." (히브리서 6장 12절)

⑾."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디느니라." (고린도전서 13장 7절)

⑿."너희 속에 착한 일을 시작(始作)하신 이가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이루실 줄을 우리가 확신(確信)하노라" (빌립보서 1장 6절)


(09월05일) (月)  <하나님의 시간(時間)에>


(Q)~(롬 5:6, 갈 4:4) 하나님의 실수(失手)함 없으신 시간표(時間表)에 대해 우리가 확신(確信)할 수 있는 이유(理由)는 무엇입니까?


(A)~○.창조주(創造主)이시며 전지전능(全知全能)하신 하나님께서는 가장 합당(合當)한 때에 하나님의 일을 하신다는 분이심을 지난 성경(聖經)의 역사(歷史)에서도 실행(實行)하셨고 또한 미래(未來)에 관해서도 예언(豫言) 하셨으며 이 또한 성취(成就)하실 것을 깨닫고 하나님께 대한 확실(確實)한 신뢰(信賴)를 가지고 그분의 시간표(時間表)에 모든 것이 성취(成就)되신다는 것을 믿고 기다린다면, 그와 같은 기다림은 우리들의 신앙(信仰)에 강력(强力)한 힘과 유익(有益)이 될 것이다. 


○.(갈 4:4-5)은 성경에서 복음을 가장 간결(簡潔)하게 설명(說明)한 말씀 가운데 하나이다. 

이 분명(分明)한 말씀은 세상(世上)을 위한 하나님의 계획(計劃)을 제시(提示)하며, 예수께서 인간 역사(歷史) 속으로 오신 것은 우연(偶然)한 일이 아니었음을 보여준다. ‘하나님이 그 아들을 보내’신 것이다. 즉 하나님께서 우리의 구원(救援)을 주도(主導)하셨다. 또한 이 말씀에는 그리스도의 영원(永遠)한 신성(神性)에 대한 기독교(基督敎)의 기본신조(基本信條)가 들어 있다. (요 1:1-3, 18, 빌 2:5-9, 골 1:15-17). 하나님께서는 하늘의 사자(使者)를 보내지 않고 자신(自身)이 직접(直接) 오셨다.


○.예수께서는 선재(先在)하는 거룩한 하나님의 아들이셨지만, ‘여자(女子)에게서 나’셨다. 물론 이 말은 처녀출생(處女出生)을 뜻하기도 하지만 그분의 참된 인성(人性)을 더욱 분명(分明)하게 확증(確證)하고 있다(요 1:14, 빌 2:6-7). (Carl P. Cosaert, 안교장년교과, 2017. 8. 15). (갈 4:4, 만나주석)


○. “예수님께서는 예수님의 재림(再臨)의 날과 시간(時間)은 밝히지 않으셨다. 그분은 하나님이 다시 나타나실 날이나 시간은 자신이 알게 할 수 없다고 제자(弟子)들에게 분명(分明)히 말씀하셨다. 만일 그분이 이것을 자유로 나타내실 수 있었다면 왜 항상(恒常) 기다리는 태도(態度)를 가지도록 그들을 권유(勸諭)하실 필요가 있었을까? 우리 주님께서 나타나실 그날과 시간을 안다고 주장(主張)하는 자들이 있다. 매우 열심히 그들은 미래(未來)의 시간표(時間表)를 상세(詳細)하게 만들고 있다. 그러나 주께서는 그들이 가지고 있는 근거(根據)에 대하여 그들을 경고(警告)하신다. 인자(人子)의 재림(再臨)의 정확(正確)한 시간은 하나님의 오묘(奧妙)이다.”(소망, 632)

주께서 하늘의 시간표를 주관(主管)하신다. 회복(回復)을 위한 주의 뜻은 주의 계획(計劃)하신 시간표에 따라서 진행(進行)될 것이다. 너무 빠르지도 않고 너무 느리지도 않게 서두르지도 않고 게으르지도 않고 정확(正確)하게 진행(進行)되었고 조금 더 남았을 뿐이다.”


○.기약(期約)대로. 

이에 해당(該當)하는 헬라어 ‘카타 카이론’은 ‘정해진 시기(時期)에’ 또한 ‘적절(適切)한 때에’라는 의미(意味)를 지닌다. 이 표현(表現)은 하나님의 경륜(經綸)이 세상 가운데에서 시행(施行)될 정확(正確)한 시점(時點)이 있음을 보여 준다(요 2, 4, 4:23). 하나님의 구원계획(救援計劃)은 일찍이 구약(舊約)의 선지자(先知者)들을 통하여 예언(豫言)된 바이거니와(사 7:14, 53:2) 하나님께서 일을 행하실 때에는 막연한 시기(時期)에 하는 것이 아니라 만세전(萬歲前)에 예정(豫定)하신 계획(計劃)에 따라 행하신다. 


○. ‘기약(期約)대로’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신 때가 ‘적절한 시기(時期)’ 즉 ‘인류에게 가장 소망(所望)이 없던 때’였음을 의미(意味)하는 바, 사건(事件)이 이루어진 때의 중요성(重要性)을 강조(强調)함과 더불어 배후(背後)에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우주적(宇宙的)인 계획의 중요성(重要性)을 강조(强調)한다. 구약성경(舊約聖經)에 예언(豫言)된 그리스도께서 기약(期約)대로 이 땅에 오셨듯이, 재림(再臨)도 기약(期約)대로 이루어질 것이다(마 24:42-44). 실로 하나님은 역사(歷史)의 주관자(主管者)로서 하나님의 영원(永遠)하신 계획(計劃)대로 인류(人類)와 우주(宇宙)의 역사(歷史)를 다스리시며 성도(聖徒)들에게 약속(約束)하신 바를 반드시 성취(成就)하시는 분이시다(민 23:19). (롬 5:6, 만나주석)


○. “‘때가 차다’라는 말은 

인간 역사(歷史)에서 그분의 목적(目的)을 성취(成就)하기 위한 하나님의 적극적(積極的)인 역할(役割)을 보여준다. 예수는 아무 때나 오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준비하신 정확(正確)한 시간(時間)에 오셨다. 역사적(歷史的)으로 당시(當時)는 ‘팍스 로마나(Pax Romana, 로마의 평화)’ 시대(時代)로써 로마 제국(帝國) 전체(全體)가 약 2백 년 동안 비교적(比較的) 평화(平和)와 안정(安定)을 누렸다. 지중해(地中海) 세계를 로마가 지배(支配)함으로써 평화(平和)가 찾아왔고, 공용(公用) 언어(言語), 편리한 교통수단(交通手段)들, 잘 보급(普及)된 공통문화(共通文化)로 말미암아 복음(福音)의 신속(迅速)한 전파(傳播)가 용이하게 되었다. 성경의 관점(觀點)에서 보면 하나님께서 약속(約束)하신 메시아를 보내실 때가 된 것이다. (단 9:24-27 참고).


○.(갈 4:4) 때가 차매. 

‘때’에 해당(該當)하는 ‘크로노스’는 (갈2:2절)의 ‘아버지의 정(定)한 때’(프로데스미아)와 연관(聯關)이 있다. 따라서 본문(本文)은 하나님이 주권적(主權的)으로 작정(作定)한 기간이 되었음을 의미한다. 또한 때가 차기 전에 일정한 기간 동안 율법(律法)에 매여 있었던 암담(暗澹)한 상태(常態)가 끝났음을 암시(暗示)한다. 이는 율법(律法)이 하나님의 백성을 억압(抑壓)함으로 그들이 더 이상 견디기 어려운 무기력(無氣力)과 곤고(困苦)함에 이르렀음을 보여준다.


○. “제자(弟子)들은 하나님의 왕국(王國)이 나타날 정확(正確)한 시기(時期)를 알기 위하여 궁금해 하였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하늘 아버지께서 저들에게 나타내 보이지 않으셨으므로 그 때와 시기(時期)를 저들이 알 수 없을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언제 하나님의 왕국이 회복(回復)될 것인지에 대하여 아는 것이 저들이 알아야만 할 가장 중대(重大)한 사실이 아니었다. 저들은 다만 주님을 순종(順從)하는 생애 가운데서 기도(祈禱)하고 기다리며 깨어서 일할 뿐이었다. 저들은 세상 사람들에게 그리스도의 품성(稟性)을 대표(代表)하는 사람들이 되어야 할 것이었다. 제자들이 살던 당시(當時)에 성공적(成功的)인 신앙적(信仰的) 체험(體驗)에 긴요(緊要)했던 요소(要素)는 오늘날에도 긴요(緊要)한 것이다. “가라사대 때와 기한(期限)은 아버지께서 자기의 권한(權限)에 두셨으니 너희의 알 바아니요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臨)하시면 너희가 권능(權能)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證人)이 되리라 하시니라”(행 1:7, 8).”(1기별, 185)


○.만일(萬一) 우리가 영적(靈的) 지식(知識)에 있어서 자라기만 한다면 우리가 거의 생각지 못했던 방면에 진리가 계발(啓發)되고 확대(擴大)되는 것을 볼 수 있을 것이며 그러한 진리는 결코 하늘 아버지께서 하나님의 권한(權限)에만 두신 때와 시기(時期)를 아는 일에 상상(想像)의 재료가 되도록 계발(啓發)되지는 않을 것이다. 나는 거듭거듭 시기(時期) 설정(設定)에 관한 경고(警告)의 말을 해왔다. 하나님의 백성을 위하여 시기(時期)에 근거(根據)를 둔 기별(寄別)은 결코 다시 주시는 일이 없을 것이다. 우리는 성령(聖靈)의 강림(降臨)이나 그리스도의 재림을 위한 정확(正確)한 시기(時期)를 알 필요가 없다.”(1기별, 188)


○.주님께서 오직 하나님 자신의 권한(權限)에 두시고 인간에게 알려 주시지 않은 때와 시기(時期)에 관하여 생각하는 일에 우리의 정신력(精神力)을 소모(消耗)시키는 대신에 우리는 성령의 지배(支配)에 우리 자신을 복종(服從)시키고, 현재의 의무(義務)들을 수행(遂行)하고, 진리(眞理)를 모르고 죽어가는 영혼(靈魂)들에게 인간적(人間的)인 견해(見解)가 섞이지 않은 생명의 떡을 나누어 주어야 한다. ( 리뷰 앤 헤랄드, 1892년 3월 22일)”(전도, 702)


(09월06일) (火)  <다윗: 기다림의 실물교훈(實物敎訓)>


(Q)~다윗이 왕이 되기까지 견뎌야 했던 고된 기다림을 통해 우리는 무엇을 배울 수가 있습니까?


(A)~○.다윗은 하나님의 기름부음 받은 자를 사람이 해(害)치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 아니라고 하였다. 또한 다윗은 하나님의 일을 하나님께서 성취(成就)하신 다는 것을 굳게 믿고 그 때가 오기를 인내(忍耐)로 기다렸으며 하나님께서 응답(應答)하실 때까지 기다림으로 자기가 그 일을 앞당기는 수단(手段)을 쓰지 않았다. 그러므로 다윗은 축복(祝福)을 받았다. 우리도 믿음의 여정(旅程)가운데 기다림을 통해 다윗과 같은 축복(祝福)을 경험(經驗)해야 한다. 

○. “다윗의 신앙생애(信仰生涯)는 진실(眞實)하고 열렬(熱烈)했다. 그는 하나님께 진실(眞實)하였고 이러한 고상(高尙)한 품성(稟性)을 소유(所有)하였으므로 하나님께서도 그를 내 마음에 합(合)한 자라고 불렀다. (영적선물 4권, 85, 86.)”(높임, 199)


○. “내 명령(命令)과 내 법도(法道)를 지켰으므로. 

하나님이 다윗에게 큰 은혜(恩惠)를 베푼 것은 그가 하나님께 순종(順從)하여 그분의 계명(誡命)과 율례(律例)를 지켰기 때문이다. 다윗에 대한 이런 칭찬(稱讚)은 헷 사람 우리야의 일.(삼하 11장)이나 이스라엘의 인구(人口)를 계수(計數)한 행위(行爲) 등과 같은 다윗의 한심스러운 실수(失手)에 비추어 볼 때 주목(注目)할만 하다. 다윗은 이 두 가지 큰 실수(失手)를 신실(信實)히 회개(悔改)하여, 은혜(恩惠)로 말미암아 이런 죄를 전혀 범(犯)하지 않은 것처럼 가납(嘉納)되었다. 품성(稟性)은 이따금씩 하는 선행(善行)이나 비행(非行)으로 결정(決定)되는 것이 아니라 생애의 습관적(習慣的)인 경향(傾向)으로 결정(決定)되는 것이다.”(성경주석, 왕상 11:34)


○.하나님께서 다윗을 그 아버지의 양(羊)의 우리에서 부르사 이스라엘의 왕으로 기름을 부으실 때에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성령(聖靈)을 주실 수 있는 한 사람을 그에게서 보셨다. 다윗은 성령의 감화(感化)에 예민(銳敏)하였고, 주께서는 하나님의 섭리(攝理)로 그를 훈련(訓練)시키사 봉사(奉仕)케 하셨고, 그를 준비(準備)시키사 하나님의 뜻을 수행(遂行)케 하셨다. 그리스도는 다윗의 품성(稟性) 건설(建設)의 주(主) 건설자(建設者)이셨다(원고 163, 1902).”(화잇주석, 삼상 16:7-13)


○.다윗이 사울에 대하여 취(取)한 행동(行動)에는 교훈(敎訓)이 있다. 

하나님의 명령(命令)으로 사울은 이스라엘을 다스리는 왕으로 기름부음을 받았다. 

그가 불순종(不順從)하였기 때문에 주님께서는 그에게서 나라를 빼앗을 것이라고 선언(宣言)하셨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울에 대한 다윗의 태도(態度)는 얼마나 부드럽고 예모(禮貌) 있고 관대(寬待)하였던가. 사울은 다윗의 생명을 빼앗으려고 광야(廣野)로 왔다. 그리하여 그는 아무런 수행원(隨行員)도 없이 다윗과 그의 용사(勇士)들이 숨어 있는 바로 그 동굴(洞窟)에 들어왔다. 다윗이 … 자기 사람들에게 이르되 내가 손을 들어 여호와의 기름부음을 받은 내 주를 치는 것은 여호와의 금(禁)하시는 것이니 그는 여호와의 기름부음을 받은 자가 됨이니라.”(삼상 24:4-6). (치료, 484)


○. “선지자학교(先知者學校)에서 가르친 원칙(原則)들은 다윗의 품성(稟性)을 형성(形成)하고 그의 인생을 꼴지 운 것과 동일(同一)한 원칙(原則)들이었다. 하나님의 말씀은 곧 다윗의 교사(敎師)였다. 그는 “주의 법도(法道)로 인하여 내가 명철(明哲)케 되었으므로 … 내가 주의 율례(律例)를 길이 끝까지 행하려고 내 마음을 기울였나이다.(시 119:104, 112) 하고 말하였다. 하나님께서 아직 젊은 다윗을 왕위에 앉히실 때 그를 두고 “내 마음에 합(合)한 사람”(행 13:22)이라고 선언(宣言)하신 이유(理由)는 바로 여기에 있다.”(교육, 48)


○. “그대는 자기 자신을 개선(改善)하여 하나님께 나아가도 될 만큼 충분(充分)히 선(善)한사람이 될 때까지 그리스도께 나갈 수 없다고 속삭이는 원수(怨讐)(마귀)의 말을 듣지 말라. 만일 그대가 그 때까지 기다린다면 그대는 결코 그리스도께 나갈 수 없을 것이다. 사단이 그대의 더러운 옷(품성)을 가리키며 그런 말을 할 때에는 “내게 오는 자는 내가 결코 내어 쫓지 아니하리라”(요 6:37)하는 예수의 약속(約束)을 암송(暗誦)하라. 원수(怨讐)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피가 모든 죄를 깨끗이 씻어 버릴 수 있다고 말하라. 다음의 다윗의 기도(祈禱)가 그대의 기도가 되게 하라. “우슬초로 나를 정결(淨潔)케 하소서 내가 정(淨)하리이다 나를 씻기소서. 내가 눈보다 희리이다.”(시 51:7).”(실물, 205)


(09월07일) (수)  <엘리야 : 조급(躁急)함의 문제(問題)>


(Q)~(왕상 19) 갈멜산에서의 성공적(成功的)인 사역(使役) 이후(以後) 엘리야가 광야(廣野)로 도망(逃亡)한 이유는 무엇이며, 이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계획(計劃)밖으로 도망하게 하는 원인은 무엇이었습니까?


(A)~○.위대(偉大)한 신앙(信仰)이라고 해서 반드시 한결같이 강인(强忍)한 것만은 아니다. 엘리야는 이 중대(重大)한 시기(時期)에 자기가 이스라엘에게 크게 도움이 되고,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일을 하고 있는 동안에는 하나님의 보호(保護)하심을 의지(依支)할 수 있다는 것을 분명(分明)히 알았을 것이다. 그럼에도 그는 도망(逃亡)하였다. 그는 이 사악(邪惡)한 왕비(이세벨)의 냉정(冷靜)하고 결연한 증오심에 저항(抵抗)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다. 그는 단지 그처럼 원한(怨恨)에 차 있는 잔인(殘忍)한 원수(怨讐)의 마수(魔手)를 피할 방법을 생각할 뿐이었다. 엘리야의 교훈(敎訓)에서처럼 우리는 하나님의 선(善)하심과 인자(仁慈)하심을 신뢰(信賴)하는 믿음을 계발(啓發)하는 것만이 유일(唯一)한 안전책이며 이러한 신뢰심(信賴心)은 저절로 생기는 것이 아니다. 다만 믿음은 선물(膳物)이지만, 그것은 매 순간(瞬間)마다 주님께 굴복(屈伏)하는 것이고 우리가 가꾸고 양육(養育)하며 최선(最善)을 다해 돌보아야 할 선물(膳物)인 것이다. 


○.용기(勇氣)는 하나님을 쳐다봄으로 가능(可能)함

어떤 특수(特殊)한 일을 수행(遂行)함에 있어서 아무리 용감(勇敢)하고 성공적(成功的)이었던 사람일지라도 그의 믿음이 시험(試驗)을 당할 만한 환경(環境)이 조성(造成)되었을 때, 만약 그가 끊임없이 하나님을 쳐다보지 않으면 용기(勇氣)를 잃게 될 것이다. 비록 하나님께서 그 능력(能力)의 현저한 증거를 그에게 주신 이후(以後)라 할지라도, 비록 그가 능력을 받아서 하나님의 사업(事業)을 하게 된 후일지라도, 만약 그가 전적(全的)으로 전능자(全能者)를 신뢰(信賴)하지 않으면 실패(失敗)하고야 말 것이다. (리뷰 1913. 10. 16).” (왕상 19:4, 화잇주석)


○.엘리야가 하나님의 권능(權能)으로 행한 일에 관한 놀라운 이야기를 이세벨에게 고(告)하니 그러나 이 이야기가 이세벨의 마음을 감동(感動)시켜 그의 악(惡)한 행실(行實)을 고치게 하는 데 아무런 영향(影響)도 끼치지 못하였다. 진리(眞理)를 듣기만 하고 구원(救援)을 경험(經驗)하지 못하면 마음이 강퍅케 될 뿐이다. (왕상 19:1~9, 재림교주석)


○.엘리야는 자신이 마땅히 있어야 할 자리를 떠났다는 점에서 그릇 행하였다. 그의 사명(使命)은 아직 끝나지 않았으며 싸움은 이제 시작(始作)에 불과(不過)하였다. 그가 만일 굳건히 서서 왕비(王妃)에게 기별(寄別)을 보내 바알의 선지자(先知者)들을 이기게 하신 분이 지금도 자신을 버리지 않았다는 점을 상기(想起)시켜 주었더라면 천사(天使)들이 그의 생명(生命)을 보호(保護)할 준비(準備)를 갖추고 있다는 것을 발견(發見)했을 것이다. 놀라운 모습으로 하나님의 심판(審判)이 이세벨에게 임(臨)하여 백성들에게 대단한 인상(印象)을 주었을 것이며 힘 있는 개혁(改革)이 전국(全國)을 휩쓸었을 것이다. (참조 선지자와 왕, 160). 엘리야는 자신의 생명을 보존(保存)하기 위해 도망(逃亡)함으로써 원수(怨讐)의 술수(術數)에 넘어갔다. 브엘세바로 도망(逃亡)간 것은 갈멜산에 얻은 승리(勝利)의 효과(效果)를 현저히 감소(減少)시키는 행위(行爲)였다. (왕상 19:1~9, 재림교주석)


○.선지자(先知者)는 낙담(落膽)할 대로 낙담(落膽)하였다. 갈멜산에서 승리(勝利)할 때는 힘이 솟구쳐 하늘을 찌를 듯 하였지만, 이제 그가 며칠 전에 경험(經驗)한 일을 돌이켜 볼 때 그의 마음은 땅바닥으로 내려앉았다. 그는 스스로 죽기를 원하였다. 그의 고통(苦痛)은 지나친 긴장감(緊張感)에서 오는 무기력(無氣力) 때문이었다. 그것은 때때로 어떤 영혼(靈魂)이 높은 수준(水準)의 영광(榮光)과 승리(勝利)에 이른 후에 뒤따라오는 경험 즉 큰 신앙적 부흥(信仰的復興)의 여파(餘波)로 오는 경험(經驗)과 같은 것이다. 그때 영혼은 일상(日常)의 생활에서 오는 실망(失望)과 낙담(落膽)에 마음이 꺾인다. 우리가 똑똑히 기억(記憶)해 두어야 할 것은, 언제나 산의 정상(頂上)에 머물러 있을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는 점이다. 때때로 인생길은 내리막길로 치달아 골짜기에 이르고, 거기서 곤고(困苦)와 실망(失望)을 어쩔 수 없이 겪게 되는 것이 사실이다. 정상(頂上)에 있을 때 행복(幸福)해 하고 용기(勇氣)를 내는 것은 쉬운 일이지만, 마음이 침체(沈滯)되어 세상 모든 것이 그를 결정적(決定的)으로 파멸(破滅)시킬 것처럼 보일 때는 그렇게 하기가 좀처럼 쉽지 않다. 온 힘을 다하여 계속 하나님을 굳게 붙들 필요가 있는 때는 바로 그때이다. 그렇게 하여 의심(疑心)과 절망감(絶望感)을 극복(克服)할 수 있다. 미끄러져 내릴 때 위를 쳐다보라. 그리고 다시 높은 곳으로 기어 올라가라. (왕상 19:1~9, 재림교주석)


○.가장 극심(極甚)한 타락(墮落)과 변심(變心)의 시대(時代)에도 하나님께서는 항상(恒常) 하나님에게 신실(信實)한 남은 자를 남겨 주셨으며, 앞으로도 남겨 주시리라는 사실이다. 그들은 자기들의 정직(正直)을 수호(守護)하며, 시류(時流)에 굴복(屈伏)하지 아니한 자들이다. 바울 사도도 엘리야에 대한 하나님의 이와 같은 대답(對答)을 언급(言及)하고 있으며(롬 11:4), 그것을 유대인들이 보편적(普遍的)으로 복음(福音)을 거역(拒逆)하던 자기의 시대(時代)에 적용(適用)시키고 있다. "그런즉 이와 같이 이제도 남은 자가 있느니라." 라고 말하고 있다(롬 11:5). (왕상 19:1~9, 매튜헨리)


○.우리가 하나님의 권능(權能)을 힘입어 큰 기적(奇蹟)과 역사(歷史)를 이룬다고 할지라도 항상(恒常) 우리는 인간의 연약성(軟弱性)을 생각하며 늘 겸손(謙遜)한 자세(姿勢)를 잃지 않아야 할 것이다. (왕상 19:1~9, 만나주석)


○. “엘리야는 그가 맡은 의무(義務)의 자리에서 도망(逃亡)하지 말아야 하였다. 그는 여호와의 영광(榮光)을 옹호(擁護)하도록 사명(使命)을 맡겨 주신 하나님께서 그를 보호(保護)하여 주시기를 호소(呼訴)하면서 이세벨의 위협(威脅)을 직면(直面)하여야 하였다. 엘리야는 자기가 신뢰(信賴)하는 여호와께서 그를 왕후(王后)의 분노(忿怒)에서 보호(保護)하여 주실 것을 그 사자(使者)에게 말했어야 하였다. 그가 여호와의 능력의 놀라운 출현(出現)을 목격(目擊)한 지 불과 몇 시간밖에 경과(經過)하지 아니하였으므로 그것이 그가 이제 버린바 되지 않을 것이라는 보증(保證)이 되어야 했었다. 만일 엘리야가 그가 있던 곳에 그대로 머물러 있으면서 하나님을 그의 피난처(避難處)와 힘으로 삼고 진리(眞理)를 위하여 굳게 섰더라면 그는 해(害)를 받지 않고 보호(保護)함을 받았을 것이다. 여호와께서는 이세벨에게 하나님의 형벌(刑罰)을 내리심으로 엘리야에게 또 다른 놀라운 승리(勝利)를 주셨을 것이며 왕과 백성들에게 끼친 감명(感銘)으로 큰 개혁(改革)이 이루어졌을 것이다.”(선지, 160)


(09월08일) (木)  <주 안에서 기뻐하기를 배움>


(Q)~ “주 안에서 기뻐한다.는 말의 의미(意味)는 무엇입니까?(시 37:1~11)


(A)~○.주안에서 기뻐한다는 말은 하나님을 온전(穩全)히 신뢰(信賴)하며 살아갈 때 누릴 수 있는 평안(平安)과 기쁨 축복(祝福)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님 안에서 기뻐하는 법을 배울 필요가 있다. 우리가 언제나 주님을 찬양(讚揚)할 때 기쁨과 행복(幸福)한 삶을 누릴 수 있으며 마침내 천국(國)을 얻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루터는 시 37편에 관해서 “성도(聖徒)들의 인내(忍耐)가 여기에 있다”라고 말하였다. 시인(詩人)은 이 시(詩)에서 외견상(外見上) 악인(惡人)들이 승리(勝利)한 것처럼 보이는 문제(問題)에 관심(關心)을 나타낸다. 그러나 이 문제는 그가 외견상(外見上)의 번영(繁榮)이 일시적(一時的)인 것에 불과하다는 것을 깨달음으로 그의 마음속에서 해결(解決)된다. 그는 자신의 인생(人生) 경험(經驗)(참조 시37:25절)을 토대(土臺)로 우리에게 하나님을 신뢰(信賴)하라고 권고(勸告)한다. 하나님은 그가 정하신 바로 그 시간에 죄인들을 벌(罰)하시고 의인(義人)들에게는 상(賞)을 주실 것이다. (시 37:1~11, 재림교주석)


(○.시37:7) 잠잠하고 참아 기다리라. 

이것은 자포자기(自暴自棄)나 절망(絶望)이 아니라 하나님을 의뢰(依賴)함으로써 불평(不平)하거나 의심(疑心)하는 마음을 바꾸기 위하여 적극적(積極的)이고 긍정적(肯定的)인 노력을 기울이라는 것을 뜻한다. 진정(眞正) 인간이 당면(當面)한 문제의 해결(解決)은 오직 하나님 그 분을 통해서만 가능(可能)하기 때문이다(시62:1, 5, 사 30:15). (시 37:1~11, 만나주석)


○.우리는 여기에서 행악자(行惡者)들의 번영(繁榮)과 성공에 대해 불만(不滿)을 갖지 말라고 경고(警告)받는다(1,2절). "불평(不平)하지 말며 투기(妬忌)하지 말지어다." 우리는 다윗이 일단 이것을 자기 스스로에 먼저 말하며 그들 부패(腐敗)한 혈기(血氣)를 억제(抑制)하기 위하여 그 자신의 마음을 (그의 침상(寢牀)에서 반성(反省)하는)향해 설교(說敎)한 것이라고 상상(想像)할 수 있다. 즉 그 자신의 마음 가운데에서 그러한 썩어 빠진 열정(熱情)이 꿈틀거리는 것을 발견한 그는 그와 유사(類似)한 시험(試驗)을 당하게 될지도 모를 다른 사람들에게 훈계(訓戒)를 주기 위하여 문서(文書)로 남겨둔 것이라고 상상(想像)할 수 있다. 맨 먼저 우리 자신에게 설교(說敎)를 한 설교(說敎)가 가장 훌륭한 설교이며 타인(他人)들에게서도 성공(成功)할 확률(確率)이 가장 높다.


○.우리가 믿음의 눈으로 바라볼 때 우리는 악인(惡人)들에게서 저희의 번영(繁榮)을 시기(猜忌)할만 한 하 등의 이유(理由)를 찾아볼 수가 없게 되는 것이다. 왜냐하면 저희의 파멸(破滅)이 문 밖에 이르러 있고 저들은 파탄(破綻)을 향해 급속(急速)히 무르익어 가고 있기 때문이다(시 37:2절). 그들은 무성(茂盛)하다. 그러나 그것은 단지 풀과 같고 푸른 채소(菜蔬)와 같은 무성(茂盛)함에 불과(不過)하다. 아무도 풀과 푸른 채소의 무성함을 시기(猜忌)하거나 불평(不平)하지는 않는다. 경건(敬虔)한 자의 무성함은 열매 많은 나무와 같으나(시 1:3) 악한 자(惡漢者)의 경우(境遇)는 풀이나 채소(菜蔬) 같아서 아주 단명(短命)한 것이다.


○. “그대가 거듭나고자 기도(祈禱)하라. 만일 그대가 새 탄생(誕生)을 경험(經驗)하면 그대의 구부러진 욕망(慾望) 안에서가 아니라 주안에서 기뻐할 것이다. 그대는 그분의 권세(權勢) 아래 있기를 갈망(渴望)할 것이다. 그대는 더 높은 표준(標準)에 미치고자 끊임없이 애쓸 것이다. 성경을 읽지만 말고 열심(熱心)히 연구(硏究)하라. 그리하여 하나님이 요구(要求)하시는 것이 무엇인지를 배우라. 그대는 그분의 뜻을 어떻게 행할 것인지에 대한 경험적(經驗的)인 지식(知識)이 필요하다. 그리스도는 우리의 교사(敎師)이시다.”(6증언, 161)


○. “다시 나는 말한다. 주안에서 기뻐하라. 그분 안에서 쉬라. 그대는 그분의 능력(能力)이 필요하며, 이 능력을 소유(所有)할 수가 있다. 확고(確固)하고, 씩씩하고, 용감(勇敢)하게 전진(前進)하라. 그대는 판단(判斷)하는 데 실수(失手)할 수도 있다. 그러나 예수님을 굳게 붙들어라. 그분은 지혜(智慧)이시다. 그분은 빛이시다. 그분은 능력(能力)이시다. 그분은 그대에게 피곤(疲困)한 땅에서 큰 바위와 같으시다. 그분의 그늘 아래 쉬라. 그대는 지혜(智慧)가 필요하며, 예수께서 그것을 그대에게 주실 것이다. 불신(不信)에 빠지지 말라. 그대가 배척(排斥)당하고, 오해(誤解)를 받고, 허위(虛僞) 진술(陳述)을 듣고, 잘못 전해지면 질수록 그대가 주님을 위한 일을 하고 있다는 증거(證據)를 더욱 갖게 된다. 그러므로 그대는 그대의 구주(救主)께 더욱 가까이 달라붙어야 한다. 그대가 당하는 모든 어려움 속에서 침착(沈着)하고, 안정(安定)되고, 오래 참으며, 인내(忍耐)하고, 악(惡)으로 악(惡)을 갚지 말고 선(善)으로 악(惡)을 갚으라. 사닥다리의 맨 위층을 쳐다보라. 하나님께서 그 위에 계신다. 그분의 영광(榮光)이 하늘을 향(向)해 오르고 있는 모든 영혼(靈魂)에게 비친다. 예수님이 이 사닥다리이시다. 그분을 통해 올라가고, 그분께 붙으라. 그리하면 미구(未久)에 그대는 그 사닥다리에서 그분의 영원(永遠)한 나라로 옮겨 서게 될 것이다.”(8증언, 130)


○.우리는 표면적(表面的)인 사업(事業)에만 만족(滿足)하기 쉽다. 그러나 우리는 주안에서 기뻐할 때까지 만족(滿足)해서는 안 된다. 그리고 그 때에 우리는 다른 이들의 회심(悔心)을 위해 수고(受苦)하고자 열망(熱望)해야 하며, 그들도 우리와 같이 생명(生命)을 주신 분으로부터 받은 것을 받아야 한다.”(2설교, 237)


○. “만일(萬一) 우리가 그의 계명(誡命)을 지킨다면 주안에서 기뻐할 것이다. 만일 우리가 참으로 하늘에 우리의 시민권(市民權)이 있고 불멸(不滅)의 유업(遺業)과 영원한 실체(實體)에 대한 권리(權利)를 갖고 있다면 우리는 사랑으로 역사(役事)하고 영혼(靈魂)을 순결(純潔)하게 하는 믿음을 가져야 한다. … 우리는 하늘 가족의 일원(一員)이며 하늘 왕의 자녀이며 하나님의 상속자(相續者)이며 그리스도와 함께 한 상속자(相續者)이다. 주께서 오실 때에 결코 쇠(衰)함이 없는 생명의 면류관(冕旒冠)을 가질 것이다. (청년 지도자, 1898.8.25.)(아들과 딸, 371)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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