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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0과 - 시련중의 온유함 - (핵심 Q & A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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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이봉주 작성일22-08-30 16:29 조회1,210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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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10과 시련중(試鍊中)의 온유(溫柔)함

                                                       (09월03일 (안) / 일몰: 18시59분)

 

<서언(緖言)>

고해(苦海)와 같은 이 세속(世俗)의 삶은 어려움과 고난(苦難)과 시련(試鍊)들이 편만(遍滿)해 있다. 그러나 하나님의 백성은  탈리오의 법칙('피해자(被害者)가 입은 피해(被害)와 같은 정도의 손해(損害)를 가해자(加害者)에게 가(加)하는 보복(報服)의 법칙(法則)'을 탈리오 법칙(lex talionis)이라 한다. 우리말로는 동해보복법(同害報復法) 혹은 반좌법(反坐法)이라고 하며, 흔히 '눈에는 눈, 이에는 이'라는 말로 표현한다)

 

‘탈리오의 법칙’을 적용(適用)하며 사는 것이 아니라 겸손(謙遜)과 온유(溫柔)함으로 그리스도께서 손수 실천(實踐)하셨던 마음의 겸손(謙遜)은 그리스도를 따르는 자들에게는 승리(勝利)를 주는 능력(能力)이 된다는 말씀이며 하나님을 피난처(避難處)로 삼고 지금의 현실(現實)보다 장차(將次) 하늘의 소망(所望)으로 어떠한 시련(試鍊)이라도 온유(溫柔)함이 약점(弱點)이 아닌 강점(强點)이 된다는 사실을 학습(學習)하시기 바랍니다.

 

(08월28일 (일) <“부서진 떡과 부어진 포도즙(葡萄汁)”> 

 

(Q)~⑴.(오스왈드 챔버-Oswald Chambers)의 (일) 교과(敎科)의 제목의 “깨진 떡과 부어진 포도주” 의미(意味)는 무엇이며? ⑵.(에스겔 24:15~27)에서 에스겔이 겪어야 했던 시련(試鍊)은 어떤 일이 일어났으며, 하나님께서 그 시련(試鍊)을 어떻게 사용(使用)하셨습니까?

 

(A)~◎.성경에 나오는 많은 하나님의 백성들이나 가족(家族)들이 “깨어지고 부서지는” 사건(事件)들을 당하였지만 그럼에도 하나님의 권능(權能)이 임(臨)하였다. 이와 같이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다른 사람을 위해 “부서지거나 깨어지는 것”들을 조금도 두려워하지 말아야 한다. 

 

(08월29일 (월)  <은혜(恩惠) 베푸시기를 중재(仲裁)함> 

 

(Q)~(출 32:1~14) 금송아지 사건(事件)이후(以後) 모세가 드린 중보기도(中保祈禱)에서 우리가 배워야 할 교훈(敎訓)은 무엇입니까?

 

(A)~◎.온유(溫柔)함은 내적(內的)평안(平安)으로 인(因)해 나오는 것으로서 하나님의 은혜(恩惠)와 평강(平康)이 없이는 불가능(不可能)하다. 그는(모세) 비방(誹謗)의 소리에 요동(搖動)치 않으며 자신의 인격(人格)과 감정(感情)전체를 하나님께 의탁(依託)하고 묵묵히 참아 하나님의 뜻을 기다렸던 것이다. 이는 하나님께 대한 모세의 신앙(信仰)을 나타내는 것이기도 하다.(참조 : 마 5:5 마 11:29). 그러므로 모세의 교훈(敎訓)은 그리스도인이라면 반대(反對)와 시련(試鍊)등이 도래(到來)할 때는 하나님의 은혜(恩惠)를 나타낼 수 있는 절호(絶好)의 기회(機會)라는 것을 명심(銘心)하고 모세처럼 온유(溫柔)함으로 하나님께 은혜(恩惠)를 간구(懇求)하는 자(者)가 되어야 한다.

 

(08월30일 (화)  <상처(傷處)를 주는 사람을 사랑함> 

 

(Q)~(마 5:43~48) 예수님께서 원수(怨讐)를 사랑하라고 말씀하시면서 주신 예(例)를 통해 가르치시고자 했던 것은 무엇일까요?

 

(A)~◎.예수님의 가르침에 원수(怨讐)를 사랑하라고 말씀하심은 그리스도인들의 마음에 온유(溫柔)함이 없다면 우리에게 상처(傷處)를 주는 사람을 사랑하는 일은 거의 불가능(不可能)하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신앙인(信仰人)이라 자부(自負)하는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께 기도(祈禱)하기를 원수(怨讐)도 사랑할 수 있는 온유(溫柔)함을 주시도록 특별(特別)히 기도(祈禱)해야 하며 그들에게도 특별히 하나님의 은혜(恩惠)와 사랑을 깨닫도록 기도(祈禱)해야 한다. 

 

(08월31일 (수)  <굳게 다문 입>

 

(Q)~(벧전 2:18~25) 베드로가 예수님의 모본(模本)을 통해 보여준 온유(溫柔)와 겸손(謙遜)의 원칙(原則)은 무엇입니까?

 

(A)~◎.고난(苦難)의 인내(忍耐)에 대하여 베드로는 그리스도의 수난(受難)과 인내(忍耐)를 제시(提示)하여 성도(聖徒)의 인내(忍耐)를 강조(强調)하고 있다. 예수님께서는 부당(不當)하게 심문(審問)받으며 고통(苦痛)당하실 때에 자신을 정당화(正當化)하기 위한 어떤 말씀도 하지 않으심으로 예수님 자신의 온유(溫柔)함으로 하나님의 영광(榮光)을 나타내셨다. 즉 예수님의 침묵(沈黙)은 그 분의 온유(溫柔)하심을 나타내는 웅변(雄辯)이었다. 이와 같이 그리스도인들은 고통(苦痛)을 주는 사람에게까지도 위(爲)하여 복(福)을 비는 정신(精神)을 배우고 실천(實踐)해야 할 것이다

 

(09월01일 (목)  <우리의 반석(磐石)과 피난처(避難處)>

 

(Q)~(시편 62:1~8)에서 다윗이 말하고자 하는 핵심(核心)은 무엇일까요? 

 

(A)~◎.다윗은 (시62편)에서 우리가 어떤 시험(試驗)이나 역경(逆境)과 시련(試鍊)을 만나게 되더라도 임마누엘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며 하나님의 특별(特別)하고 위대(偉大)하신 섭리(攝理)에 따라 우리를 선(善)한길로 인도(引導)하고 계신다는 것을 믿고 오직 하나님만을 소망(所望)으로 바라볼 때 하나님은 우리의 반석(磐石)과 피난처(避難處)가 되므로 믿는 자들은 절대 흔들림이 없을 것이라는 다윗의 간증(干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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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미부록(末尾附錄)>



 제10과 시련중(試鍊中)의 온유(溫柔)함

                                                          (09월03일 (안) / 일몰: 18시59분)

 

<서언(緖言)>

고해(苦海)와 같은 이 세속(世俗)의 삶은 어려움과 고난(苦難)과 시련(試鍊)들이 편만(遍滿)해 있다. 그러나 하나님의 백성은  탈리오의 법칙('피해자(被害者)가 입은 피해(被害)와 같은 정도의 손해(損害)를 가해자(加害者)에게 가(加)하는 보복(報服)의 법칙(法則)'을 탈리오 법칙(lex talionis)이라 한다. 우리말로는 동해보복법(同害報復法) 혹은 반좌법(反坐法)이라고 하며, 흔히 '눈에는 눈, 이에는 이'라는 말로 표현한다)

 

‘탈리오의 법칙’을 적용(適用)하며 사는 것이 아니라 겸손(謙遜)과 온유(溫柔)함으로 그리스도께서 손수 실천(實踐)하셨던 마음의 겸손(謙遜)은 그리스도를 따르는 자들에게는 승리(勝利)를 주는 능력(能力)이 된다는 말씀이며 하나님을 피난처(避難處)로 삼고 지금의 현실(現實)보다 장차(將次) 하늘의 소망(所望)으로 어떠한 시련(試鍊)이라도 온유(溫柔)함이 약점(弱點)이 아닌 강점(强點)이 된다는 사실을 학습(學習)하시기 바랍니다.

 

(08월28일 (일) <“부서진 떡과 부어진 포도즙(葡萄汁)”> 

 

(Q)~⑴.(오스왈드 챔버-Oswald Chambers)의 (일) 교과(敎科)의 제목의 “깨진 떡과 부어진 포도주” 의미(意味)는 무엇이며? ⑵.(에스겔 24:15~27)에서 에스겔이 겪어야 했던 시련(試鍊)은 어떤 일이 일어났으며, 하나님께서 그 시련(試鍊)을 어떻게 사용(使用)하셨습니까?

 

(A)~◎.성경에 나오는 많은 하나님의 백성들이나 가족(家族)들이 “깨어지고 부서지는” 사건(事件)들을 당하였지만 그럼에도 하나님의 권능(權能)이 임(臨)하였다. 이와 같이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다른 사람을 위해 “부서지거나 깨어지는 것”들을 조금도 두려워하지 말아야 한다. 

 

⑴.성경 전체에 걸쳐 다른 사람을 섬기기 위해 “상(傷)한 (부서지고 깨진)” 사람들의 일예(一例)가 있습니다. 즉 (모세)는 사람들을 약속(約束)의 땅으로 인도(引導)하면서 끝없는 험담(險談)과 비판(批判)의 말들을 견디도록 부름을 받았습니다. 또한 (요셉)은 애굽에서 총리(總理)의 자리에 오르기까지 많은 배신(背信)과 투옥(投獄)과 관련(關聯)된 험난(險難)한 여정(旅程)에 부름을 받았습니다.

 

○.각각(各各)의 경우(境遇)에 하나님은 하나님의 백성의 삶이 그들 자신뿐 아니라 다른 사람들의 유익(有益)을 위해서도 하나님의 은혜(恩惠)와 보살핌의 본보기가 될 수 있도록 상황(狀況)을 허용(許容)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같은 방식(方式)으로 사용하실 수 있습니다. 그러한 상황에서 화(禍)를 내거나 상처(傷處)를 받기 쉽습니다. 그러나 전자(前者) 언급(言及)했듯이 온유(溫柔)는 “인내(忍耐)와 분노(忿怒)함이 없이” 그러한 일을 견디도록 하나님께서 주신 능력(能力)이라는 것입니다.

 

⑵.에스겔이 왜 이 도가니(시련(試鍊)를 통과(通過)했습니까?

(에스겔 24:24절)에서 하나님은 말씀하십니다. 그가 행(行)하신 대로 너희도 행(行)할 것이다. 이 일이 일어나면 내가 주 여호와인 줄 너희가 알리라”(NIV). 에스겔의 본을 통해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이 주권자(主權者)이신 분이라는 것에 대한 진리(眞理)를 깨닫게 될 것이며, 에스겔의 삶이 상징(象徵)하는 예언(豫言)의 성취(成就)와 그가 겪었던 고난(苦難)을 체험(體驗)하면서 이 진리(眞理)를 보게 될 것입니다. 우리 자신의 “부서지거나 깨어진” 곳에서도 우리를 통해 "주 여호와"를 보게 될 사람이 얼마나 될지 누가 압니까?

☞. (아내가 죽는 사건(겔24:18)이었고 하나님의 섭리(攝理)를 깨닫게 하는 도구(道具)로 사용(使用)하였다.)

 

(08월29일 (월)  <은혜(恩惠) 베푸시기를 중재(仲裁)함> 

 

(Q)~(출 32:1~14) 금송아지 사건(事件)이후(以後) 모세가 드린 중보기도(中保祈禱)에서 우리가 배워야 할 교훈(敎訓)은 무엇입니까?

 

(A)~◎.온유(溫柔)함은 내적(內的)평안(平安)으로 인(因)해 나오는 것으로서 하나님의 은혜(恩惠)와 평강(平康)이 없이는 불가능(不可能)하다. 그는(모세) 비방(誹謗)의 소리에 요동(搖動)치 않으며 자신의 인격(人格)과 감정(感情)전체를 하나님께 의탁(依託)하고 묵묵히 참아 하나님의 뜻을 기다렸던 것이다. 이는 하나님께 대한 모세의 신앙(信仰)을 나타내는 것이기도 하다.(참조 : 마 5:5 마 11:29). 그러므로 모세의 교훈(敎訓)은 그리스도인이라면 반대(反對)와 시련(試鍊)등이 도래(到來)할 때는 하나님의 은혜(恩惠)를 나타낼 수 있는 절호(絶好)의 기회(機會)라는 것을 명심(銘心)하고 모세처럼 온유(溫柔)함으로 하나님께 은혜(恩惠)를 간구(懇求)하는 자(者)가 되어야 한다.

 

◉. 모세는 중재자(仲裁者)의 역할(役割)을 했다. 

이스라엘의 범죄(犯罪)를 자기의 죄로 여기고 차라리 그들 대신에 자기를 생명책(生命冊)에서 이름을 도말(塗抹)하라고 간구한다. 

 

⑴. “어찌하여 애굽 사람들이 이르기를 여호와가 자기의 백성을 산에서 죽이고 지면(地面)에서 진멸(殄滅)하려는 악(惡)한 의도(意圖)로 인도(引導)해 내었다고 말하게 하시려 하나이까? 

 

⑵. 은혜(恩惠)는 그것을 받을 만한 자격(資格)이 없는 사람들에게 필요(必要)한 것이다. 하지만 상대(相對)가 가장 받을 만한 자격(資格)이 없다고 느껴질 때야말로 가장 은혜(恩惠)를 베풀고 싶지 않은 때이기도 하다.

 

○.<(출 32:14) 여호와께서 뜻을 돌이키사>

여호와는 충성(忠誠)스러운 종의 진지하고 사심 없는 기도(祈禱)에 감동(感動)을 받았다. 하나님은 자신의 높여짐과 명예(名譽)보다 백성을 더 생각하는 자의 탄원(歎願)을 거절(拒絶)할 수 없었다. 얼마나 찬사(讚辭)를 받을 만한 모세의 품성(稟性)이며, 얼마나 놀랍고 거룩한 사랑의 계시(啓示)인가(요 3:16; 빌 2:5~8). (출 32:14, 재림교주석)

 

○.모세는 그 백성들을 위하여 하나님께 간절(懇切)히 중재(仲裁)하고 나섰다.(출32:11-13절). 

그는 여호와 그의 하나님께 간원(懇願)하였다. 설사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하나님" 이라고 불리워지기를 원(願)치 않는다 하더라도, 모세는 하나님을 자기 자신의 하나님이라고 부를 수 있기를 원(願)하였던 것이다. 이제 모세는 이 진퇴양난(進退兩難)의 계곡에서 하나님의 진노(震怒)를 돌이키려고 서 있는 것이다(시 106:23).

 

○.모세는 하나님께서 "나대로 하게 하라" 고 말씀하셨을 때, 지혜(智慧)롭게도 하나님께서 자기에게 주신 그 암시(暗示)를 포착(捕捉)했다. 그 말씀은 그가 중재(仲裁)에 나서는 것을 금(禁)하시는 것같이 보이나, 실상(實狀)은 믿음으로 하는 기도(祈禱)가 하나님께 대하여 얼마나 큰 힘을 발휘(發揮)하는가를 보여줌으로써 오히려 중재(仲裁)할 용기(勇氣)를 북돋우었던 것이다. 그와 같은 경우(境遇), 하나님께서는 "중재자(仲裁者)가 없음을 이상히 여기신다." (사 59:16). 

(1. 모세의 기도(祈禱)(출32:12절))

"맹렬(猛烈)한 진노(震怒)를 돌이키소서." 라고 했다. 하나님의 진노(震怒)하심이 부당하다고 모세가 생각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진노가 백성들을 불살라 버릴 만큼 맹렬(猛烈)하지는 않기를 바란 것이다. "심판(審判)을 거두시고 자비(慈悲)를 베푸소서! 이 화(禍)를 돌이키소서. 멸망(滅亡)의 판결(判決)을 교화(敎化)의 판결(判決)로 바꾸소서!"

(2. 모세의 탄원(歎願))

그는 열심히 변론(辯論)을 펴는데, 이것은 하나님을 감동(感動)시키려 함이 아니라 그 자신의 신앙(信仰)을 표현(表現)하고 자기의 기도(祈禱)에 열정(熱情)을 불러일으키기 위해서였다. (출 32:11~14, 매튜헨리)

 

○.여호와께서는 모세의 간청(懇請)을 들으시고 그의 이기심(利己心) 없는 기도(祈禱)를 응답해 주셨다. 하나님께서는 그분의 종을 시험(試驗)하셨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성실성(誠實性)과 범죄(犯罪)하고 감사(感謝)할 줄 모르는 백성들에 대한 그의 사랑을 시험(試驗)하셨다. 그러나 모세는 이 시련(試鍊)을 고상(高尙)하게 잘 견디어 냈다. 이스라엘에 대한 그의 관심(關心)은 이기적(利己的)인 동기(動機)에서 나오지 않았다. 그에게 있어서 하나님의 선민(選民)의 번영(繁榮)은 자기 개인의 명예(名譽)나 큰 나라의 조상(祖上)되는 특권(特權)보다도 더 귀중(貴重)했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성실(誠實)함과 단순(單純)한 마음과 그의 진실(眞實)함을 기뻐하시고 그에게 신실(信實)한 목자(牧者)로서 이스라엘 백성을 약속(約束)의 땅으로 인도(引導)할 중대(重大)한 책임(責任)을 맡기셨다”(부조와 선지자, 319).

 

(08월30일 (화)  <상처(傷處)를 주는 사람을 사랑함> 

 

(Q)~(마 5:43~48) 예수님께서 원수(怨讐)를 사랑하라고 말씀하시면서 주신 예(例)를 통해 가르치시고자 했던 것은 무엇일까요?

 

(A)~◎.예수님의 가르침에 원수(怨讐)를 사랑하라고 말씀하심은 그리스도인들의 마음에 온유(溫柔)함이 없다면 우리에게 상처(傷處)를 주는 사람을 사랑하는 일은 거의 불가능(不可能)하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신앙인(信仰人)이라 자부(自負)하는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께 기도(祈禱)하기를 원수(怨讐)도 사랑할 수 있는 온유(溫柔)함을 주시도록 특별(特別)히 기도(祈禱)해야 하며 그들에게도 특별히 하나님의 은혜(恩惠)와 사랑을 깨닫도록 기도(祈禱)해야 한다. 

 

○. “그리스도께서는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들에게 “너희 원수(怨讐)를 사랑하며 너희를 핍박(逼迫)하는 자들을 위해기도(祈禱)하라”고 분부(分付)하신다(마 5:44). 그분께서는 우리로 하여금 우리를 억압(抑壓)하고 우리에게 해(害)를 끼치는 자들을 사랑하게 하신다. 우리는 말과 행동(行動)에서 저들과 같은 정신(精神)을 나타내지 말아야 한다. 대신 기회(機會)있을 때마다 저들에게 선(善)을 베풀어야 한다.”(하늘, 220)

 

○.사랑의 무제한적(無制限的) 실천(實踐)

사랑의 주님 예수님께서 원수(怨讐)까지 적극적(積極的)으로 사랑하라고 명(命)하신다. 여기서 우리는 예수님은 이 명령(命令)을 하셨을 뿐 아니라 십자가(十字架)에 못 박히기까지 실천(實踐)하셨다.(히 9:28 벧전 2:24)는 사실(事實)을 기억(記憶)하고 우리도 최선(最善)을 다해서 이 명령(命令)을 실천(實踐)해야 할 것이다.(요 15:9~10 벧전 4:8)

○.예수님께서는 사랑 운동(運動)을 명(命)하시되 사랑의 질(質)과 양(量)의 문제(問題)뿐 아니라 그 사랑의 대상(對象)까지도 규정(規定)해 놓으셨다. 원수(怨讐)박해(迫害)하는 자에 대한 사랑 명령(命令)은 극단적(極端的) 이기주의(利己主義)를 당연시(當然視) 하는 오늘날의 우리들에게 단순(單純)한 윤리(倫理)이상의 종교적(宗敎的) 묵상(黙想)을 자아낸다. (요일4:11)

 

○.<“너희 원수(怨讐)를 사랑하며” (마태복음 5장 44절).>

“악(惡)한 자(者)를 대적(對敵)지 말라”고 한 구주(救主)의 교훈(敎訓)이, 복수심(復讐心)이 강(强)한 유대인들에게는 어려운 말이었으므로, 그들은 이에 대하여 불평(不平)하였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그보다 더욱 강(强)한 주장(主張)을 하셨다.

“또 네 이웃을 사랑하고 네 원수(怨讐)를 미워하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원수(怨讐)를 사랑하며 너희를 핍박(逼迫)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祈禱)하라 이같이 한즉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아들이 되리니.”

○.이것이 바로 랍비들이 냉혹(冷酷)하고 까다로운 강요(强要)의 법전(法典)으로 그릇 해석(解釋)하고 있던 율법(律法)의 참 정신(精神)이었다. 그들은 자신을 다른 사람들보다 더 나은 것으로 여기고, 이스라엘 백성으로 출생(出生)한 특권(特權) 때문에 하나님의 특별한 은총(恩寵)을 받을 자격(資格)이 있는 것으로 생각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용서(容恕)해 주는 사랑의 정신(精神)이란 그들이 저희가 멸시(蔑視)하는 세리(稅吏)와 죄인(罪人)들보다 더욱 고상한 동기(動機)로 행동(行動)하고 있다는 증거(證據)를 보여 주는 것임을 지적(指摘)하셨다. (보훈, 73)

 

(08월31일 (수)  <굳게 다문 입>

 

(Q)~(벧전 2:18~25) 베드로가 예수님의 모본(模本)을 통해 보여준 온유(溫柔)와 겸손(謙遜)의 원칙(原則)은 무엇입니까?

 

(A)~◎.고난(苦難)의 인내(忍耐)에 대하여 베드로는 그리스도의 수난(受難)과 인내(忍耐)를 제시(提示)하여 성도(聖徒)의 인내(忍耐)를 강조(强調)하고 있다. 예수님께서는 부당(不當)하게 심문(審問)받으며 고통(苦痛)당하실 때에 자신을 정당화(正當化)하기 위한 어떤 말씀도 하지 않으심으로 예수님 자신의 온유(溫柔)함으로 하나님의 영광(榮光)을 나타내셨다. 즉 예수님의 침묵(沈黙)은 그 분의 온유(溫柔)하심을 나타내는 웅변(雄辯)이었다. 이와 같이 그리스도인들은 고통(苦痛)을 주는 사람에게까지도 위(爲)하여 복(福)을 비는 정신(精神)을 배우고 실천(實踐)해야 할 것이다

 

○.(첫째). 성도(聖徒)는 선(善)을 행(行)하도록 부르심을 받았으며

(둘째). 고난(苦難)은 신앙적(信仰的) 성숙(成熟)과 사랑의 실천(實踐)의 원동력(原動力)이 되며

(셋째). 고난(苦難)은 고난(苦難) 그 자체(自體)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장차(將次)누리게 될 영광(榮光)의 전제조건(前提條件)이 됨을 교훈(敎訓)해주고 있다. 이것은

⑴.그리스도인들은 그리스도가 당하신 것처럼 고난(苦難)을 받을 준비(準備)가 되어 있어야 하며

⑵.자신이 당(當)하는 고난(苦難)을 자랑으로 여길 수 있어야 한다는 뜻이다.

그리스도께서 고난(苦難) 받으심으로 그리스도인은 죄로 인한 정죄(定罪)에서 벗어나 (롬8:3~4) 하나님 앞에 의인(義人)으로써 나아갈 수 있게 되었음을  가리킨다. (롬 8:33).

여기서 우리는 그리스도의 삶을 따라가는 성도(聖徒)들 역시(亦是) 형제(兄弟)들의 유익(有益)을 위하여 자신을 희생(犧牲)할 각오(覺悟)가 있어야 한다. <그러므로 (마16:25 ; 요 15:13 ; 고전 10:24)을 깨닫게 된다.>

 

(09월01일 (목)  <우리의 반석(磐石)과 피난처(避難處)>

 

(Q)~(시편 62:1~8)에서 다윗이 말하고자 하는 핵심(核心)은 무엇일까요? 

 

(A)~◎.다윗은 (시62편)에서 우리가 어떤 시험(試驗)이나 역경(逆境)과 시련(試鍊)을 만나게 되더라도 임마누엘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며 하나님의 특별(特別)하고 위대(偉大)하신 섭리(攝理)에 따라 우리를 선(善)한길로 인도(引導)하고 계신다는 것을 믿고 오직 하나님만을 소망(所望)으로 바라볼 때 하나님은 우리의 반석(磐石)과 피난처(避難處)가 되므로 믿는 자들은 절대 흔들림이 없을 것이라는 다윗의 간증(干證)이다.

 

○.이 시는 사람들에게 어떤 시련(試鍊)을 당하더라도 오직 하나님만을 온전(穩全)히 의지(依支)하라고 권면(勸勉)한다. 

이는 사람은 누구를 막론(莫論)하고 실제적(實際的)인 도움이 될 수 없기 때문이다. 

이 시(詩)에서 시인(詩人)은 하나님께 대한 자기의 의기양양(意氣揚揚)한 믿음을 고상하게 표현(表現)하고 있다. 

시인(詩人)은 자신의 구원(救援)이 하나님께로부터 온다는 것만을 말하는 것으로 그치지 않고(시62:1절), 이에 더하여 하나님이 자신의 구원(救援)이라고 말한다.

 

○.우리는 확신(確信)을 가지고 궁극적(窮極的)이고도 완전(完全)한 구원(救援)을 기다릴 수 있다. “너희 속에 착한 일을 시작(始作)하신 이가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이루실 줄을 우리가 확신(確信)하노라”(빌 1:6). (시 62:1~8, 재림교주석)

 

○.<다윗은 영원(永遠)히 하나님을 바람(시편 62:1-7)>

오직 그만을 의지(依支)하겠다고 고백(告白)하고 있다(1절). "나의 영혼(靈魂)이 잠잠(潛潛)히 하나님만 바라나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어떤 사람들은 이렇게 풀이하고 있다), 또는 "아무튼, 어떠한 난관(難關)이나 위험(危險)을 만나거든, 하나님께서 나에 대해 얼굴을 찌푸리시고, 내가 그를 섬기는 중에 낙심(落心)을 당할지라도, 내 영혼(靈魂)은 하나님을 바라리라(또는 단어(單語) 그대로 하나님 앞에 잠잠하리라)." "그가 행하시는 것에 대해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가 행하실 것을 조용히 기대하리라."

 

○.우리의 영혼(靈魂)이 하나님을 바랄 때, 우리가 자신과 우리의 모든 일을 그의 뜻과 지혜(智慧)에 의뢰(依賴)할 때, 우리가 그의 섭리(攝理)의 모든 통치(統治)에 순응(順應)하고 우리 자신을 적응(適應)시키면서, 확실(確實)치 않은 사건(事件)이 생겼을 때, "그것이 어찌되든, "그의 의(義)로우심과 선(善)하심에 대해 전적(全的)으로 만족(滿足)하게 여기고 그것을 참을성 있게 기대(期待)할 때, 우리는 의무(義務)의 길과 또 위로(慰勞)의 길에 들어서 있는 것이다. "내 영혼(靈魂)의 하나님께 속하자 않았느냐?"(칠십인 역에는 이렇게 풀이되어 있다) 그렇다. 그것은 분명(分明) 그렇게 되어야 한다. 우리의 의사(意思)는 그의 뜻 속으로 녹아 들어가야 한다. "나의 구원(救援)이 하나님에게서 나오므로 나의 영혼(靈魂)이 하나님께 관심(關心)을 갖는다."

 

○.다윗은 비록 지금 그가 위협(威脅)을 당하고 있고 어려움 속에 있을지라도, 그의 구원(救援)이 오리라는 것만큼은 의심(疑心)하지 않고 있으며, 구원(救援)은 하나님에게서, 오직 그에게서 올 것을 기대하고 있다. "작은 산들과 큰 산 위의 떠드는 무리에게 바라는 것은 참으로 하사이기" 때문이다(렘 3:23; 시 121:1, 2). "그에게서 구원(救援)이 오리라는 것을 알고 있다. 그러므로 그 구원(救援)이 올 때까지 나는 참을성 있게 그를 바라리라. 그가 뜻하신 때가 가장 좋은 때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그것을 하나님의 구원(救援)이라 불리우는(50:23) 우리의 영원(永遠)한 구원(救援)에 적용(適用)시킬 수 있다. 그에게서 그 구원(救援)이 온다. 그는 우리를 위해 구원(救援)을 예비(豫備)하시며 그것을 위해 우리를 예비(豫備)하시고, 그것에 이르도록 우리를 보호(保護)하신다. 그러므로 우리의 영혼(靈魂)으로 하여금 그를 바라게 하여, 그가 합당(合當)케 여기시는 그러한 방법(方法)으로 이 세상(世上)을 지나 저 영원(永遠)한 구원(救援)으로 인도(引導)되게 하자.

 

○.다윗은 하나님을 의지(依支)하였으므로, 그의 마음은 확고(確固)했다. "하나님이 나의 힘이요, 강(强)한 구원자(救援者)이시라면, 내가 크게 동요(動搖)치 아니하리로다." 즉, "나는 멸망(滅亡)치 아니하리로다. 나는 충격(衝擊)을 받을지라도 모른다. 그러나 가라앉지는 않을 것이다. 나는 약간(若干) 놀랄지도 모른다. 그러나 나는 어떤 놀라움에 내 영혼(靈魂)을 버리게 될 정도(程度)로 두려워하지는 않을 것이다. 내가 답답한 일을 당하여도 낙심(落心)하지 아니하리라"(고후 4:8). 하나님께 대한 이 소망(所望)은 확실(確實)하고 견고(堅固)한 영혼(靈魂)의 닻줄이 될 것이다.

 

○.여기에서 우리는 다윗의 다른 사람들에게 자기가 했던 것처럼 하나님을 의지(依支)하고 바라도록 권유(勸諭)하는 것을 알 수 있다. 하나님의 길에서 위로(慰勞)를 발견(發見)한 자들은 자진(自進)해서 다른 사람들을 그 길로 초대(招待)할 것이다. 하나님 안에는 모든 성도(聖徒)들이 끌어낼 수 있을 만큼 충분(充分)히 있으며 다른 사람들과 함께 나눈다고 해서 우리의 몫이 결코 더 작아지지 않을 것이다.

 

○.<다윗 그가 주고 있는 훌륭한 조언(助言)은 무엇인가?>

(1) 하나님을 신뢰(信賴)하는 것이다. 

"저를 의지(依支)하라. 그와 교제(交際)하라. 그리고 그를 의지(依支)하기를 즐거워하라. 너희를 위한 모든 일들을 이행(移行)함에 있어서 그를, 즉 그의 지혜(智慧)와 선(善)하심, 그의 능력(能力)과 약속(約束), 그의 섭리(攝理)와 은혜(恩惠)를 의뢰(依賴)하라. 

 

(2) 하나님과 대화(對話)하는 것이다. 

"그 앞에 마음을 토(吐)하라." 이 어법(語法)은 여호와 앞에 전제(前提)를 쏟아 붓는 것을 언급(言及)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우리가 회개(悔改)하면서 죄를 자백(自白)할 때, 우리의 마음은 그 속에서 "여호와 앞에 부어진"다(삼상 7:6). 그러나 여기에서는 기도(祈禱)를 의미(意味)하고 있다.

 

○.<이 세상 사람들을 의지(依支)하지 말자.>

그들은 상(傷)한 갈대들이다.(시 62:9절). "진실(眞實)로, 천(賤)한 자도 헛되고," 즉 우리를 도울 능력(能力)이 아주 없고, "높은 자(者)도 거짓되니," 우리가 그들을 의지(依支)한다면 그들은 우리를 속일 것이다. 천(賤)한 자들은 그들의 많은 수효(數爻)와 육체적(肉體的)인 힘과 노동(勞動)을 신뢰(信賴)할 수도 있다고 혹자(或者)는 생각(生覺)할 것이다. 

 

○.<이 세상 재물(財物)을 의지(依支)하지 말자.>

그것을 우리는 견고(堅固)한 성(城)으로 삼지 말자(시 62:10절). "포악(暴惡)을 의지(依支)하지 말라. "즉 속임과 강포(强暴)함으로 취(取)한 재물(財物)을 의지(依支)하지 말라. 왜냐하면 많은 것이 있는 곳에는 흔히 좋지 못한 방법(方法)으로 긁어내거나 저축(貯蓄)함으로써(우리 구세주(救世主)는 그것을 "불의(不義)에 재물(財物)"이라 부른다. 눅 16:9), 또는 탈취(奪取)함으로써 얻게 된 경우(境遇)가 흔하기 때문이다.

 

○.다윗은 우리가 하나님을 신뢰(信賴)해야 하는 매우 좋은 이유(理由)로서 그가 무한(無限)한 권능(權能)과 인자(仁慈)함과 의(義)로움의 하나님이시라는 사실(事實)을 들고 있다(시62:11~12). 이것을 그는 매우 확신(確信)하고 있었고 우리에게 그것을 확신(確信)시키려 했다. "하나님이 한두 번 하신 말씀을 내가 들었다."  (시 62:1~8, 매튜헨리)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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