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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기 제5과-극심한 시련 -( 핵심 Q & 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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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이봉주 작성일22-07-27 01:02 조회1,298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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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5과 극심(極甚)한 시련(試鍊)

                                                  (7월 30일 (안) / 일몰: 19시 43분)

 

서언

극심(極甚)한 시련(試鍊)을 만날 때 “하나님께서 계시지 않는 구나” 또는 “하나님은 멀리 계시구나” 또는 “하나님은 이러한 분이구나” 라는 등의 오해(誤解)를 할 수 있다. 하지만 하나님은 분명(分明)히 계신다. 하나님께서 이러한 오해(誤解)받을 위험(危險)을 감수(甘受)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는 것은 참으로 축복(祝福)중에 축복이다. 우리가 극심(極甚)한 시련(試鍊)이 닦아올 때 하나님을 향(向)한 우리의 믿음을 더욱 확고(確固)히 할 수 있는 기회(機會)라는 것을 기억(記憶)해야 할 것이다. 이것이 진정(眞正)한 믿음이다.

 

(07월 24일 (일) <아브라함의 시련(試鍊)>


(Q)~(창 22:1~2)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하나뿐인 아들을 제물(祭物)로 바치라고 하신 이유(理由)는 무엇입니까?

 

(A)~○.기이(奇異)한 명령(命令)(창세기 22:1-2)에 아브라함은 독자(獨子) 이삭을 모리아 산에서 기이(奇異)한 복종(服從)(창세기 22:3-10)을 통하여 아브라함의 믿음을 시험(試驗)함과 동시(同時)에 타락(墮落)한 인류(人類)를 위한 구속(救贖)의 경륜(經綸)의 독생자(獨生子) 희생(犧牲)을 미리 보았으며, 그의 이해력(理解力)에 깊이 새겨주기 위한 목적(目的)을 달성(達成)하는 모습을 우리는 교훈(敎訓)하자.

 

(07월 25일 (월) <제멋대로인 이스라엘>

 

(Q)~(호 2:1~12) 하나님께서는 영적간음(靈的姦淫) 중에 있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회개(悔改)시키고자 음란(淫亂)한 아내 고멜과, 호세아를 통해 이스라엘 백성과 하나님과의 관계(關係)를 묘사(描寫)하시면서, 하나님께로 되돌리시기 위해 어떤 방법(方法)과 교훈(敎訓)을 주시고 계십니까?

 

(A)~○. 하나님께서 그토록 사랑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을 떠나 다른 신(神)들을 섬김으로 영적간음(靈的姦淫)을 범(犯)하고 있지만,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불쌍히 여기시어 그들을 돌이키시기 위해 끝까지 사랑으로 이끄셨으나 그들의 반응(反應)은 끝까지 패역(悖逆)으로 하나님을 배신(背信)하고 있는 모습을 호세아서를 통하여 보여주시고 있다. 즉 죄인(罪人)을 구원(救援)하시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그 크신 사랑은 그때나 지금이나 앞으로도 변함이 없으신 사랑으로 이끄시고 인도(引導)하신다는 교훈(敎訓)을 주신다.

 

(07월 26일 (화) <시련(試鍊)을 통과(通過)하는 방법(方法) 1: 경배(敬拜)>


(Q)~(욥 1:6~2:10 ; 욥 1:20~21) 욥이 고통(苦痛)을 당한 이유(理由)는 무엇이며, 욥은 자신(自身)에게 닥친 시련(試鍊)에 어떻게 반응(反應)했습니까?

 

(A)~○. 욥은 사단의 시련(試鍊)과 고통(苦痛)중에서도 하나님을 경배(敬拜)하는 마음을 잃지 않았다. 우리도 욥처럼 고통(苦痛)중에서라도 내 자신(自身)의 무력(無力)함을 인식(認識)하고 하나님께서 우주만물(宇宙萬物)을 창조(創造)하시고 운행(運行)하신다는 즉 통치(統治)하심을 인정(認定)하고 하나님의 의(義)로우심에 확신(確信)을 같고 그분에게 찬양(讚揚)과 경배(敬拜)를 드리는 삶이라면 욥처럼 승리(勝利)할 수 있다.

 

(07월 27일 (수) <시련(試鍊)을 통과(通過)하는 방법(方法) 2: 소망(所望)>


(Q)~(고후 1:10, 11). 바울이 시련(試鍊) 중에도 끝까지 믿음 위에 굳게 설 수 있었던 비결(秘訣)은 무엇입니까?

 

(A)~○. 바울은 시련(試鍊)중에도 끝까지 믿음위에 굳게 설 수 있었던 비결(秘訣)은 자신이 보고 체험(體驗)한 하나님께서 죽은 자를 다시 살리시는 분이라는 확신(確信)과 소망(所望)으로 믿음위에 굳게 설수 있었다. 이것이 승리(勝利)의 비결(秘訣)이다.

 

(07월 28일 (목) <극심(極甚)한 시련(試鍊)>

(Q)~(이사야 43:1~7)에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약속(約束)은 무엇입니까?

 

(A)~○. 믿음의 시련(試鍊)은 금(金)보다 더 귀(貴)하다. 참된 믿음은 어떤 상황(狀況)에서도 하나님을 굳게 신뢰(信賴)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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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미부록(末尾附錄)>

 

 

         제5과 극심(極甚)한 시련(試鍊)

                                                       (7월 30일 (안) / 일몰: 19시 43분)

<서언(緖言)>

극심(極甚)한 시련(試鍊)을 만날 때 “하나님께서 계시지 않는 구나” 또는 “하나님은 멀리 계시구나” 또는 “하나님은 이러한 분이구나” 라는 등의 오해(誤解)를 할 수 있다. 하지만 하나님은 분명(分明)히 계신다. 하나님께서 이러한 오해(誤解)받을 위험(危險)을 감수(甘受)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는 것은 참으로 축복(祝福)중에 축복이다. 우리가 극심(極甚)한 시련(試鍊)이 닦아올 때 하나님을 향(向)한 우리의 믿음을 더욱 확고(確固)히 할 수 있는 기회(機會)라는 것을 기억(記憶)해야 할 것이다. 이것이 진정(眞正)한 믿음이다.

 

(07월 24일 (일) <아브라함의 시련(試鍊)>

 

(Q)~(창 22:1~2)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하나뿐인 아들을 제물(祭物)로 바치라고 하신 이유(理由)는 무엇입니까?

 

(A)~○.기이(奇異)한 명령(命令)(창세기 22:1-2)에 아브라함은 독자(獨子) 이삭을 모리아 산에서 기이(奇異)한 복종(服從)(창세기 22:3-10)을 통하여 아브라함의 믿음을 시험(試驗)함과 동시(同時)에 타락(墮落)한 인류(人類)를 위한 구속(救贖)의 경륜(經綸)의 독생자(獨生子) 희생(犧牲)을 미리 보았으며, 그의 이해력(理解力)에 깊이 새겨주기 위한 목적(目的)을 달성(達成)하는 모습을 우리는 교훈(敎訓)하자.

 

○. 확약(確約)된 아브라함의 축복(祝福)(창세기 22:15-19)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의 복종(服從)을 즐겁게 받아 주시었다. 그러나 그것이 전부(全部)는 아니었다. 아브라함의 복종(服從)이 보상(報償)을, 그것도 그가 그 자리를 떠나기 전에 넘치도록 보상(補償)을 받았다는 사실을 보게 된다. 아마 그가 제물(祭物)로 바친 수양이 아직도 타고 있는 동안, 하나님께서는 이 은혜(恩惠)로운 말씀을 그에게 하시고, 그와 맺은 계약(契約)을 새로이 확인(確認)해 주신 것이다. 모든 계약(契約)은 제사(祭祀)에 의하여 맺어진다. 그러므로 이번 계약도 이삭을 드리는 상징적(象徵的)인 제사(祭祀)와 수양의 제사에 의하여 이루어진 것이다. 하나님께서 이 계약(契約)을 아브라함에게 확인(確認)하시면서, 이제까지 그가 받았던 어떤 축복에서도 표현(表現)되지 않았던 지극(至極)히 큰 은총(恩寵)을 베풀려는 것을 말씀해 주셨다. 비상(非常)한 영예(榮譽)와 위로(慰勞)를 상(賞) 받게 된다는 것을 기억(記憶)하자. 그리고 그 약속(約束)이 담고 있는 은총(恩寵)은 아직 이루어지지 않았다고 할지라도, 가장 진실(眞實)하고 가치 있는 보상(補償)으로 여기지 않으면 안 된다고 하는 사실(事實)도 잊지 말자.

 

○. 기이(奇異)한 명령(命令)(창세기 22:1-2)

아브라함은 처음에 믿음으로 자기 고향(故鄕)을 떠났고, 하나님과의 친교(親交)를 나누면서 오랜 정착생활(定着生活)을 해왔다. 이제 하나님은 아브라함이 이 오랜 안락(安樂)한 생활(生活)속에서도, 처음에 그가 지녔던 강(强)하고 뜨거웠고 승리(勝利)에 찬 신앙(信仰)을 여전히 지니고 있는가를 시험(試驗)해 보고자 하셨다. 처음에 고향(故鄕)을 떠날 때, 아브라함은 자기 아버지보다도 하나님을 더 사랑하고 있음을 나타내 보여 주었다. 그런데 이제는 그가 자기 아들보다 하나님을 더 사랑하고 있음을 보여 준 것이다.

 

○. 기이(奇異)한 복종(服從)(창세기 22:3-10)

⑴.이 복종(服從)의 행위(行爲)에서 그가 겪어야 했던 난관(難關)은 무엇인가? 

엄중(嚴重)한 처벌(處罰)을 경고(警告)하여 살인(殺人)을 금지(禁止)한 기성율법(旣成律法)(창9:5~6)과 이 명령(命令)은 직접적(直接的)으로 모순(矛盾)되는 것 같이 보였다.

⑵. 더구나 자식(子息)에 대한 사랑은 극(極)히 자연스러운 것인데, 하나님의 명령(命令)이 이것과 도대체 어떻게 조화(調和) 될 수 있는 것일까? 

⑶. 하나님은 이에 대하여 아무런 이유(理由)도 설명(說明)하지 않으셨다. 

이스마엘을 쫓아 낼 때는 아브라함이 만족(滿足)할만 한 정당(正當)한 이유(理由)가 있었다. 

⑷. 이 같은 하나님의 명령(命令)은 그의 약속(約束)과 어떻게 조화(調和)를 이룰 수 있는가?

⑸. 사단의 얼굴을 어떻게 다시 대할 수 있을 것인가? 

⑹. 애굽 사람들은 무어라고 말한 것이며, 그 때 그 땅에서 정주(定住)하여 살고 있던 가나안 사람들과 브리스 사람들은 무어라고 말할 것인가? 

 

※.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말씀을 복종(服從)한 그 하나, 하나를 살펴보면 그 복종의 행위(行爲)를 함에 있어서 그가 얼마나 심사숙고(深思熟考)했으며, 신앙(信仰)에 따라 행동(行動)했는가 하는 것을 볼 수가 있다.

⑴. 그는 아침 일찍 일어났다. (창22:3절). 

⑵. 아브라함은 번제(燔祭)를 위한 준비(準備)를 차근차근히 했다. 

⑶. 사라에게는 이 일에 대하여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던 것이 거의 확실(確實)하다. 

⑷. 아브라함은 하나님께서 이 제사(祭祀)를 위하여 어떤 징표(徵標)를 보여 주시면서 약속해주신 그 지정(指定)된 장소(場所)를 찾기 위하여 자기 주위(周圍)를 주의 깊게 살펴보았다. 

⑸. 그는 자기의 종들을 얼마쯤 거리가 떨어진 곳에 남겨 놓았다(창22:5절). 

⑹. 아브라함은 이삭에게 나뭇단을 짊어지고 가게 하였다. 

  <먼저 사소(些少)한 일을 시킴으로써 이삭의 복종(服從)을 시험(試驗)한 것이다. 또한 이 사실은 자기의 십자가(十字架)를 지고 가신 그리스도의 모습을 예시(豫示)하는 것이기도 하다(요 19:17). 아브라함 자신은 자기가 지금 뭣 하러 가고 있는지 알면서도, 불변(不變)하고 강직(剛直)한 결심(決心)을 하고 날카로운 칼을 가지고 갔다(창22:6절). 하나님을 위(爲)하여는 어떠한 봉헌(奉獻)이나 어떠한 고통(苦痛)도 즐거운 마음으로 받아들이겠다고 결심(決心)한 사람들은, 혈육(血肉)에 고난(苦難)을 주는 사소한 사정(事情)은 무시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을 명심(銘心)하자.

⑺. 아브라함은 마치 늘 하던 제사(祭祀)를 지내러 가는 것처럼 조금도 당황(唐惶)하거나 혼란(混亂)을 일으키지 않고 번제(燔祭)를 드리러 가고 있다는 사실을 이삭에게 이야기해 준다. (창22:7~8절)

⑻. 마음속에 일어나는 많은 생각들을 누르고 아브라함은 자기가 이미 결심(決心)한 대로 침착하게 이 제사(祭祀)에 착수(着手)한다. (창22:9~10절). 

 

○. 성경(聖經)에 나타난 시험(試驗)에는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사탄에게서 기원(起源)한 시험(試驗)으로(엡 2:2) 인간을 타락(墮落)케 하는 유혹(temptation)이다(3:1-6). 그리고 

다른 하나는 하나님에 의한 시험(試驗)으로 성도(聖徒)의 신앙(信仰)을 증험(證驗)해 보는 테스트(test)이다(욥 23:10). 여기서 아브라함이 당한 시험(試驗)은 후자(後者)의 경우(境遇)로 그를 믿음의 조상(祖上)으로 연단(鍊鍛)시키려는 하나님의 뜻에 인간적(人間的)인 생각을 완전(完全)히 굴복(屈伏)시켜야 하는 순종(順從)의 시험이었다.

 

○. 네 아들 네 사랑하는 독자(獨子) 이삭. 

   3중으로 강조(强調)된 점층법적(漸層法的) 표현(表現)이다. 즉 

(1) 하나님의 피조물(被造物) 중에서도 가장 고귀(高貴)한 사람 

(2) 그중에서도 100세에 낳은, 이 세상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아들이자 

(3) 이스마엘이 떠난 후(後) 자신에게 남은 유일(唯一)한 혈통(血統)이며 25년을 기다려 얻은 ‘언약(言約)의 아들’이란 점을 강조(强調)한 말이다. 

이 말에는 이삭에 대한 아브라함의 애정(愛情)을 최고도(最高度)로 불러 일으켜 절박(切迫)한 상황(狀況)을 만들어 놓은 후 그러한 상황(狀況)하에서도 자신의 명령에 순종(順從)토록 하시려는 하나님의 연단(鍊鍛)의 의미(意味)가 담겨있다.

 

○. 번제(燔祭)로 드리라. 

   인신제물(人身祭物)로 바치라는 뜻이다. 

이러한 하나님의 명령(命令)은 인간의 이성(異性)으로서는 도저히 납득(納得)할 수 없는 것이나 신앙(信仰)으로는 받아들여야만 하는 난제(難題)였음에 틀림없다. 왜냐하면 

(1) 이는 피 흘리는 것을 싫어하며 생명의 존엄성(尊嚴性)을 강조(强調)하던 하나님의 속성(창 9:4-6)과 상치(相馳)되며 

(2) 거듭된 약속(約束)과 맹세(盟勢) 속에 겨우 태어난 유일(唯一)한 약속(約束)의 씨 이삭을 다시 거두어 가려 하시는 것 역시 하나님의 약속(17:5, 6)과는 일견(一見) 모순(矛盾)되는 듯 하기 때문이다.

 

○. (창 22:1) 시험(試驗)받을 환경(環境)을 허락(許諾)하심(약 1:13)

 시험(試驗)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하나님의 자녀들이라고 하는 사람들을 검증(檢證)하시고 연단(鍊鍛)하시는 수단(手段)이다. 이 말은 하나님께서 믿음을 시험할 만한 환경(環境)을 허락(許諾)하시고 그들이 도움을 청(請)하기 위하여 하나님을 향(向)하게 하신다는 뜻이다. 오늘날도 하나님은 그의 백성들에게 시험(試驗)이 닥치도록 허락(許諾)하셔서 하나님이 그들을 돕는 자이심을 실감(實感)하게 하신다. 시험을 받을 때 그들이 하나님께 가까이 하면 하나님은 그들에게 힘을 주셔서 시험을 감당케 하시지만 그들이 전능(全能)하신 조력자(助力者)를 가까이 하기를 등한히 하다가 원수(怨讐)에게 굴복(屈伏)하면 그들은 정복(征服)당하고, 하나님을 떠난다. 이리하여 그들은 하나님의 길을 가고 있다는 증거(證據)를 보이지 못하게 된다. (사인즈 1912. 3. 12).

 

○. (창 22:2) 하나님께 드리지 못할 만큼 너무 귀(貴)한 것은 없음

이 같은 아브라함의 믿음의 행위(行爲)는 우리의 유익(有益)을 위해서 기록(記錄)되었다. 그것은 하나님의 요구(要求)가 숨 막힐 듯하고, 살을 에는 듯할지라도 그분을 믿는 확신(確信)을 갖고 있어야 한다는 큰 교훈(敎訓)을 가르치고 있다. 그것은 또 하나님과 부모님에 대한 온전(穩全)한 순종(順從)을 아이들에게 가르치고 있다. 아브라함의 순종(順從)으로 우리들이 배우는 또 하나의 교훈(敎訓)은 “이것은 너무 귀한 것이어서 하나님께 바칠 수가 없다”고 할 만한 것이 우리에게는 아무것도 없다는 것이다(사인즈 1887. 1. 27).

 

○. 아브라함의 시험(試驗)은 우주(宇宙)의 교과서(敎科書)

아브라함에게 요구(要求)된 희생(犧牲)은 다만 그의 유익(有益)만을 위해서가 아니요 또한 후대(後代)의 이익(利益)만을 위해서도 아니다. 그것은 하늘과 다른 세계들의 무죄(無罪)한 지적존재(知的存在)들도 교훈(敎訓)하시기 위함이었다. 그리스도와 사단의 대쟁투(大爭鬪)의 전장(戰場) 곧 구속(救贖)의 경륜이 이루어지는 장소는 우주(宇宙)의 교과서(敎科書)이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약속(約束)에 대한 신앙(信仰)이 부족함을 보였기 때문에 사단은 하나님과 천사(天使)들 앞에서 그가 언약(言約)의 조건(條件)을 따르지 못하였다고 비난(非難)하고, 그러므로 하나님의 축복(祝福)을 받을 자격(資格)이 없다고 그를 고소(告訴)하였다. 하나님께서는 온 하늘 앞에서 당신의 종의 충성을 시험하여 완전한 순종만이 받으시는바 된다는 것을 증명(證明)하고 구속(救贖)의 경륜을 더 완전(完全)하게 저들 앞에 밝히고자 하셨다.  (창 22:1~18, 화잇주석)

 

○. (창 22:6) 이삭에게 지우고. 

하나님께서 인간들이 짊어져야 할 십자가(十字架)를 독생자(獨生子) 예수 그리스도에게 옮겨 지우신 대속(代贖)사역(사 53:4-6, 요 19:17)을 연상(聯想)시켜 주는 장면(場面)으로 예표론적(豫表論的) 의미(意味)를 지닌다.

 

내게 아끼지 아니하였으니. 

여호와의 사자가 자신과 하나님을 동일시하고 있음은 그가 제2위 성자(聖子) 하나님이심을 뒷받침해 준다. (창 22:12 만나주석)

 

○. 하나님을 경외(敬畏)하는 줄을. 

자신이 근본(根本) 하나님이면서도 여호와의 사자(使者)가 이처럼 하나님을 객관화(客觀化)시켜 이야기 하고 있는 것은 성부(聖父), 성자(聖子), 성령(聖靈) 하나님 같이 구별(區別)된 위격(位格)이 있음을 시사(示唆)해 준다. (창 22:12 만나주석)

 

(07월 25일 (월) <제멋대로인 이스라엘>

 

(Q)~(호 2:1~12) 하나님께서는 영적간음(靈的姦淫) 중에 있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회개(悔改)시키고자 음란(淫亂)한 아내 고멜과, 호세아를 통해 이스라엘 백성과 하나님과의 관계(關係)를 묘사(描寫)하시면서, 하나님께로 되돌리시기 위해 어떤 방법(方法)과 교훈(敎訓)을 주시고 계십니까?

 

(A)~○. 하나님께서 그토록 사랑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을 떠나 다른 신(神)들을 섬김으로 영적간음(靈的姦淫)을 범(犯)하고 있지만,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불쌍히 여기시어 그들을 돌이키시기 위해 끝까지 사랑으로 이끄셨으나 그들의 반응(反應)은 끝까지 패역(悖逆)으로 하나님을 배신(背信)하고 있는 모습을 호세아서를 통하여 보여주시고 있다.

즉 죄인(罪人)을 구원(救援)하시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그 크신 사랑은 그때나 지금이나 앞으로도 변함이 없으신 사랑으로 이끄시고 인도(引導)하신다는 교훈(敎訓)을 주신다.

 

○. 호세아서의 기록 목적은 “음란한 이스라엘을 향한 하나님의 절대적 은혜”로 인간의 패역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얼마나 자기백성을 사랑하고 계시는지에 대해 교훈한다. 이 같은 하나님의 사랑은 음란한 여인 고멜을 아내로둔 호세아의 가정을 통하여 보다 생생하게 증거되고 있다. 

 

○. 즉 이스라엘의 백성의 죄악을 경고하는 가운데 하나님으로 말미암은 심판의 확실성과 하나님의 신실한 사랑을 증거하기 위함으로 고멜과 호세와의 관계를 통해 이스라엘과 하나님간의 관계를 비유적으로 설명하는 은유법적 표현이 호세아서의 전체에 걸쳐 사용되고 있다. 

 

○. “하나님을 알라”는 이 외침은 여전히 우리의 교회(敎會)와 가정(家庭)과 우리의 삶 속에 울려 퍼진다.

오늘날 우리도 재물(財物)과 위선(僞善)과 권세(權勢)의 신(神)을 좇아서 간음(姦淫)을 행한 까닭에 심판(審判)아래 있기 때문이다. 또한 우리는 회개(悔改)하라는 하나님의 명령(命令)도 받았다.

피상적(皮相的)이거나 의식적(意識的)인 것에 그치지 않는 회개(悔改)가 당신을 기다린다.

“나는 인애(仁愛)를 원(願)하고 제사(祭祀)를 원하지 아니하며 번제(燔祭)보다 하나님을 아는 것을 원(願)하노라” (호6:6) 하나님은 우리를 “사람의 줄 곧 사랑의 줄로…….이끌어 오셨다. (호11:4)

그러므로 우리의 반응(反應)은 마음과 혼(魂)과 힘을 다한 전적(全的)인 순종(順從)이 되어야 한다.

  

○. 호세아가 말하고자 했던 것은 바로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외면당해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저주를 받고 어려움에 봉착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은혜와 사랑의 자리를 떠나 죽음의 길을 걸어가면서도 깨닫지 못하고 오히려 모든 원인을 하나님께 돌려 하나님을 원망하고 그 해결을 방법으로 다른 인간적인 방법들을 모색하는 마치 이방민족과 같은 모습을 가진 이스라엘을 책망하고자 했다.

 

○. 또한 호세아가 질책했던 이스라엘의 부패는 주로 가나안 족속으로부터 본받은 이교적 생활 방식이다. 이스라엘 백성의 삶의 구석구석마다 바알 숭배가 스며들었고, 이스라엘의 지도자마저도 바알 숭배를 조장했으며, 그 결과 불법과 불공정이 난무했다. 호세아는 혼인 언약을 어긴 신부처럼 여호와를 거역한 이스라엘의 패역함을 도적질, 노략질, 살인, 술 취함, 음모 등으로 묘사함으로 그들이 하나님과의 약속을 어긴 사람들로 묘사하며 하나님과 이스라엘간의 관계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 이미 잃어버린 하나님의 긍휼과 자비를 그들에게 찾아본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더 이상 그들의 삶 속에서 하나님의 음성과 하나님을 경험하는 것을 볼 수 없는 일이었다. 오로지 자신의 이익과 자신의 안락을 추구하기 위해서 그들은 남을 밟고 서는 것에 익숙해졌으며, 누구를 돌아보거나, 지난날의 자신을 바라보는 것은 잃어버린 기억이 되어 버렸다.

 

○. 하지만 이스라엘 백성들이 믿지 않았던 그런 현상들을 호세아는 하나님의 의도이며, 하나님의 심판이라고 말한다. 그는 이스라엘의 자연적 재난들과 군사적 패배를 자연적 발생 과정마저도 궁극적으로는 그들의 뜻대로 되지 않음을 그들에게 상기시키기 위한 하나님의 의도적인 보응이라고 보았으며, 앗수르의 침공으로 인한 이스라엘의 수난과 포로로 잡혀 간 것을 마치 새끼를 빼앗긴 어머니 심정으로 표현하였다. 

 

○. 결국 백성들은 지금처럼 자신들이 원하는 삶을 살아가는 것이 하나님으로 축복이라 생각했지만 그것은 이미 어미 품을 떠난 새와 같이 온갖 위험과 고난에 노출되어 다시 그 어미의 품을 그리워 할 것이다.

 

○. 호세아는 당시의 배교는 길고 긴 패역의 역사의 절정에 해당하였으며, 하나님은 마침내 심판을 선언하셨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은 하나님으로부터 분리된 자신들의 처지를 인정하지 않았으며, 실제적으로는 전혀 변화된 삶의 결실을 맺지 못하면서 겉으로는 궁중 예배를 강조하고자 했다. 

 

○. 이런 백성들에게 기대나 소망이 있다면 포로 생활뿐이었는데, 포로지에서는 우상을 가까이 하지 않을 것이라는 이유 때문이었다. 그들은 궁핍을 통해 그 절망적 상태를 깨닫게 될 것이며, 진정한 회개와 견실한 관계로 하나님께 돌아올 것이라는 것이다. 

 

○. 호세아 선지자가 하나님의 사랑 가운데서 발견한 그 엄청난 고뇌는, 하나님과의 관계 회복의 길을 열기 위한 예수님의 성육신과 죽으심에서 궁극적으로 성취되었다. 하나님은 결국 패역한 이스라엘 백성이 진정으로 돌아오길 원한다. 

 

○. 하지만 그들은 이미 자신의 귀를 막아 버리고 살아 온지 오래이다. 더 이상 그들은 마음으로 듣지 않는다. 겉으로는 마치 하나님의 백성처럼 살아가는 것처럼 행동하지만, 그들에게선 어떤 진실함이 없다. 그들에게 할 수 있는 마지막 단계는 심판일 수밖에 없다. 

 

○. 그러나 그런 심판 속에서도 하나님은 여전히 그들에게 한 길을 열어 놓으신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과 긍휼과 자비를 기억하는 자들의 몫으로 말이다. 다시 말해 호세아서는 이방신을 섬기며 진정한 회개를 하지 않는 그들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과 아울러 희망과 소망의 메시지를 담고 있다. 그 당시 많은 정치적, 경제적 부패 세력에 대해 호세아는 공의와 정의를 행하지 않는 그들과 우상숭배를 하는 백성들이 이미 하나님을 떠난 사람들이며 배교자라 선포한다. 

 

○. 마치 신랑을 떠나 다른 곳으로 한눈을 파는 신부(新婦)처럼 부정(不貞)하고 온전치 못한 여인으로 표현(表現)하고 있다. 결국 그들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審判)이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시 돌아 올 수 있도록 길들을 열어 놓고 있으며, 언제든지 다시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할 수 있으며, 더 나아가 전의 맺었던 언약들을 다시 회복할 수 있음을 호세아는 선언하고 있다.

 

(07월 26일 (화) <시련(試鍊)을 통과(通過)하는 방법(方法) 1: 경배(敬拜)>

 

(Q)~(욥 1:6~2:10 ; 욥 1:20~21) 욥이 고통(苦痛)을 당한 이유(理由)는 무엇이며, 욥은 자신(自身)에게 닥친 시련(試鍊)에 어떻게 반응(反應)했습니까?

 

(A)~○. 욥은 사단의 시련(試鍊)과 고통(苦痛)중에서도 하나님을 경배(敬拜)하는 마음을 잃지 않았다. 우리도 욥처럼 고통(苦痛)중에서라도 내 자신(自身)의 무력(無力)함을 인식(認識)하고 하나님께서 우주만물(宇宙萬物)을 창조(創造)하시고 운행(運行)하신다는 즉 통치(統治)하심을 인정(認定)하고 하나님의 의(義)로우심에 확신(確信)을 같고 그분에게 찬양(讚揚)과 경배(敬拜)를 드리는 삶이라면 욥처럼 승리(勝利)할 수 있다.

 

○. 천사들이 하나님을 뵈러 올 때, 사단도 그들과 함께 하나님 앞에 왔다. 하나님께서 사단에게 “네가 어디서 왔느냐?”고 물으시자 “땅을 두루 돌아 여기 저기 다녀왔나이다”라고 대답했다.(욥기 1:7). 그러자 욥을 주의하여 보았느냐(욥1:8) 하나님께서 질문하심으로 욥을 시험의 대상으로 지목했다는 것이다. 이로 사단은 욥의 시험(試驗)에 세 가지로 시험(試驗)을 한다.  <⑴.소유(所有)(욥1:13~19), ⑵.건강(健康)(욥2:7~8), ⑶.관계(關係)(욥2:9~10)>

 

○. 흔히 인간들은 고통(苦痛)이 닥치면 억울(抑鬱)한 마음으로 노(怒)여워 하면서 세 부류(部類)로 하나님에 대해서 반응(反應)한다. ⑴.하나님을 잔혹(殘酷)한 분으로 ⑵.하나님은 존재(存在)하시지 않는 분으로 ⑶.하나님을 더욱 굳게 붙잡는 사람으로 분류(分類)된다. 

 

○. 욥은 사단의 시험(試驗)에서 다음과 같이 반응(反應)하였다.

⑴.욥은 자신의 무력(無力)함을 인식하고 아무것도 주장할 것이 없음을 인정했다.(내가 모태(母胎)로 적신(赤身)알몸으로 태어나 적신(赤身)으로 돌아간다고(욥1:21) ⑵.하나님께서 만물(萬物)의 주권자(主權者) 이시며 주관자(主管者) 이심을 주장(主張)하였다.(주신분도 여호와시오 취(取)하실 분도 여호와시이다.(욥1:21)) ⑶.하나님의 의(義)로우심을 확신(確信)하면서 하나님께서 찬송(讚頌)을 받으실분으로 하나님을 경배(敬拜)하였다.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讚頌)을 받으실지니이다“(욥1:21)) 

 

족장 욥은 그가 고통을 당하던 밤에 자신의 확고한 신앙을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내가 알기에는 나의 구속자가 살아 계시니 후일에 그가 땅 위에 서실 것이라 … 내가 친히 그를 보리니 내 눈으로 그를 보기를 외인처럼 하지 않을 것이라”(욥 19:25-27).”(쟁투, 299)

 

“욥도 폭풍 가운데서 주님의 음성을 듣고 “내가 스스로 한하고 티끌과 재 가운데서 회개하나이다.(욥 42:6)고 부르짖었다. (쟁투, 471)

 

“근시안적이고, 짧은 체험의 친구들은 그들의 좁은 시야로 타인의 구원과 관련하여 그리스도의 심령과 밀접한 조화를 이루고 있는 이의 감정을 이해할 수 없다. 그의 친구들에 의하여 그의 동기는 오해되고 그의 행동은 곡해되어 결국 욥처럼 그는 “내 친구들에게서 나를 구원하여 주소서” 라고 열렬히 기도하게 된다. 하나님께서는 욥의 사례를 친히 접수하셨다. 그분의 인내하심은 가혹할 만큼의 짐을 안겨 주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말씀하실 때 그의 모든 부질없는 감정은 변하였다. 친구들의 정죄를 버티는 일에 필요하다고 느꼈던 자기 정당화는 하나님을 향하여 필요하지 않다. 그분께서는 결코 잘못 판단하시지 않는다. 그분께서는 결코 과오를 범하지 않으신다. 주님께서 욥에게 말씀하셨다 “너는 대장부처럼 허리를 묶고 내가 네게 묻는 것을 대답할지니라.(욥 38:3). 욥은 하나님의 음성을 듣자마자 그의 영혼은 죄의식을 갖고 엎드러졌고 그는 하나님께 “내가 스스로 한하고 티끌과 재 가운데서 회개하나이다”(욥 42:6)라고 말했다.”(3증언, 509)

 

(07월 27일 (수) <시련(試鍊)을 통과(通過)하는 방법(方法) 2: 소망(所望)>

 

(Q)~(고후 1:10, 11). 바울이 시련(試鍊) 중에도 끝까지 믿음 위에 굳게 설 수 있었던 비결(秘訣)은 무엇입니까?

 

(A)~○. 바울은 시련(試鍊)중에도 끝까지 믿음위에 굳게 설 수 있었던 비결(秘訣)은 자신이 보고 체험(體驗)한 하나님께서 죽은 자를 다시 살리시는 분이라는 확신(確信)과 소망(所望)으로 믿음위에 굳게 설수 있었다. 이것이 승리(勝利)의 비결(秘訣)이다.

 

 ○. 바울은 복음을 증거(證據)하다가 ‘루스드라’에서 유대인들에게 돌로 맞아 거의 죽을 지경에 이르렀고 (행14:19), 빌립보에서는 귀신(鬼神)들린 여종을 고쳐주었다가 주인의 고소(告訴)로 매를 맞고 투옥(投獄)당하기 까지 했다.(행16:19~24), 특별히 에베소에서는 ‘데메드리오’를 위시한 은장색(銀匠色)들의 소동(騷動)과 폭도(暴徒)들의 난동(亂動)으로 인해 살 소망(所望)이 끊어질 정도로 심한 곤경(困境)에 처하였다.(행19:23~40)

 

○. 바울은 사형선고(死刑宣告) 법정(法廷)에서 이루어진 실제의 선고(宣告)가 아니라 고난(苦難)의 극치(極致)에 대한 상징(象徵)이다. (고전 15:31). 즉 견디기 힘든 시련(試鍊)가운데 있던 바울의 심적(心的) 상태(常態)를 표현(表現)한 말이다.

 

○. 우리는 ⑴.그리스도인들이 체험(體驗)하는 고난(苦難)은 인간의 교만(驕慢)을 버리게 하고  ⑵.하나님을 전적(全的) 신뢰(信賴)하게 만들며 ⑶.큰 환란(患亂)은 더 큰 기쁨과 승리(勝利)의 체험(體驗)을 낳는 다는 사실을 깨달을 수 있다.

 

○. 사도 바울은 과거(過去),현재(現在), 미래(未來) 시제(時制)를 모두 언급(言及)함으로서 하나님의 구원(救援)의 행위(行爲)와 위로(慰勞)가 단회적이거나 한순간에 그치는 제한적(制限的)인 것이 아니라 영원(永遠)전부터 영원까지 미치는 무한(無限)한 것임을 강조(强調)한다. (욥 42:2 ; 전 3:14)

 

⑴.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은 곧 적극적(積極的)으로 고난(苦難)을 선택하는 것이며,

⑵.인내(忍耐)는 환란(患亂)을 이길 수 있는 비결(秘訣)이며

⑶.환란(患亂)을 통해 신앙(信仰)이 더욱 성숙(成熟)하게 된다는 점과

⑷.환란(患亂)당하는 성도(聖徒)들에게는 하나님의 위로(慰勞)가 늘 함께하신다는 것 그리고

⑸.환란(患亂)을 통해 환란 중에 있는 다른 형제들을 위로할 수 있는 사랑의 능력(能力)을 얻게 된다는 점을 교훈해준다. (엡 3:13 ; 딤후 4:5)

 

(07월 28일 (목) <극심(極甚)한 시련(試鍊)>

 

(Q)~(이사야 43:1~7)에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약속(約束)은 무엇입니까?

 

(A)~○. 믿음의 시련(試鍊)은 금(金)보다 더 귀(貴)하다. 참된 믿음은 어떤 상황(狀況)에서도 하나님을 굳게 신뢰(信賴)하는 것이다. 

 

 ○. 우리는 이번기 교과(敎科)를 통해 하나님께서 우리를 정결(淨潔)케 하시고 그리스도의 형상(形狀)을 본받게 하시려고 여러 가지 시련(試鍊)의 모습들을 살펴보았다. 이러한 하나님께서 전(傳)하시는 핵심(核心)은 구원(救援)의 성격(性格)과 목적(目的)이 있다.

 

⑴.이스라엘이 무조건적(無條件的) 은혜(恩惠)를 받은 원천적(源泉的)근거(根據)→ 하나님께서 먼저 그들을 지명(指名)하여 부르셨기 때문이다. (이사야 43:1~8)

⑵.무조건적(無條件的) 구원(救援)의 유일(唯一)한 시행자(施行者) → 하나님만이 그 구원(救援)을 행(行)할 능력(能力)이 있으시다. (이사야 43:9~13)

⑶.구원(救援)의 구체적(具體的)방법과 그 결과(結果)  → 원수(怨讐)는 도망(逃亡)가고 광야(廣野)에 강(强)이 흐를 것이다. (이사야 43:14~21)

⑷.그 구원(救援)의 성격(性格) → 하나님의 무한(無限)하신 일방적(一方的) 사랑에 근거(根據)한 것이다. (이사야 43:22~26)

 

○. 우리는 하나님께서 허락(許諾)하시는 시련(試鍊)에 관해 배운 것을 세 가지로 요약(要約)할 수 있다. 

(첫째), 하나님이 허락(許諾)하시는 극심(極甚)한 시련(試鍊)은 우리를 파괴(破壞)하기 위함이 아니라 우리의 죄를 파괴(破壞)하기 위함이다. 

(둘째), 극심(極甚)한 시련(試鍊)은 우리를 비참(悲慘)하게 하기 위함이 아니라 우리를 창조(創造)된 본래(本來)의 형상(形狀)으로 회복(回復)하기 위함이다. 

(셋째), 하나님께서는 모든 상황(狀況) 속에서 변함없는 사랑으로 우리를 언제나 돌보신다. 그분은 어떤 일이 생길지라도 결코 우리를 홀로 내버려 두지 않으신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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