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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과- 제련자의 얼굴이 보일 때까지-(핵심 Q & A-부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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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이봉주 작성일22-07-18 12:14 조회1,774회 댓글2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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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과 제련자(製鍊者)의 얼굴이 보일 때까지

                              (7월 23일 안식일 / 일몰: 오후 7시 48분)


<서언(緖言)>


죄악세상(罪惡世上)의 세속(世俗)의 삶이란 선악간(善惡間)의 대쟁투(大爭鬪)의 삶으로 사탄, 마귀(魔鬼)의 집요(輯要)한 책동(策動)을 통하여 곤고(困苦)한 삶을 살게 하여 하나님의 백성들이 넘어지고 낙망(落望)하고 실패(失敗)하여 멸망(滅亡)케 하는 사단에 관하여,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지피지기(知彼知己)는 백전백승(百戰百勝)할 수 있는 비밀(秘密)의 무기(武器)를 소유(所有)할 수 있도록 금번(今番) 제4과의 교과(敎科)에서 ①.우리는 모두 하나님의 형상(形狀)으로 지음을 받았고 ②.시련(試鍊)과 연단(鍊鍛)의 불 가운데에서 믿음으로 승리(勝利)한 욥의 경험(經驗)과 ③.예수 님께서 이 땅에 계실 때 마지막으로 부탁(付託)하신 말씀이 무엇인지 ④.과연(果然) 지혜(智惠) 있는 자(者)가 되려면 성경(聖經)에서 어떤 나침반(羅針盤)을 제공(提供)해주시는지 ⑤.이 땅의 여러 어려운 삶 가운데 그리스도인들의 가장 중요(重要)한 품성(稟性)과 공동체(共同體)의 삶에 관하여 중요(重要)한 공부(工夫)를 할 것입니다.


(07월 17일 (日) <그분의 형상(形狀)으로>


(Q)~(롬 8:29) 우리 삶 속에서 벌어지고 있는 대 쟁투(大爭鬪)의 궁극적(窮極的)인 목적(目的)인 무엇입니까?


(A)~○. 여호와 하나님의 형상(形狀)대로 창조(創造)된 사람이 죄(罪)로 인(因)하여 훼손(毁損)되었다. 그러므로 우리를 성령(聖靈)이 정결(淨潔)케 하심으로 하나님의 형상(形狀)으로 회복(回復)하는 것이 선악(善惡)의 대 쟁투(大爭鬪) 가운데서 하나님의 궁극적(窮極的)인 목표(目標)이다.


(07월 18일 (月) <연단(鍊鍛)하는 불 가운데서의 믿음>


(Q)~욥 23:1~10) 욥의 투쟁(鬪爭) 본질(本質)은 무엇이며, 그가 보지 못하는 것은 무엇이고, 그에게 닥쳐온 예상(豫想)치 못한 시험(試驗)에도 불구하고 욥은 어떻게 대응(對應)했습니까? (


(A)~○. 욥은 자신에게 이르러온 고난(苦難)과 시련(試鍊)을 이해(理解)할 수 없는 연단(鍊鍛)의 과정(過程)으로 깨닫고 정금(正金)과 같이 나오리라는 믿음으로 견디며 하나님을 신뢰(信賴)하였다. 


(07월 19일 (火) <예수 님의 마지막 말씀>


(Q)~(마 25:1~12, 25:31~46) 죽음을 목전(目前)에 둔 예수 님께서 가르쳐 주신 비유(譬喩)를 통해 우리가 배워야 할 중요(重要)한 교훈(敎訓)은 무엇입니까?


(A)~(마 25:1~12(열처녀의 비유), 마 25:31~46(양과 염소) 이 비유(譬喩)는 그리스도의 재림준비(再臨準備) 중요성(重要性)을 강조(强調)하고 있으며,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구원(救援)받은 성도(聖徒)는 변화(變化)된 품성(稟性)으로 이웃에게 구원(救援)을 나타내어야 하고 주님의 재림(再臨)을 항상(恒常) 예비(豫備)하고 있어야 함을 역설(力說)한다. (참조: 마 24:44).


(07월 20일 (水) <“지혜(智慧) 있는 자(者)”>


(Q)~(다니엘 12:1~10)에 예수 님의 재림직전(再臨直前) 기별(寄別)로써 하나님의 백성(百姓)에게 나타나는 지혜(智慧) 있는 자(者)들의 품성(稟性)과 구원(救援)받을 의인(義人)들의 특징(特徵)은 무엇입니까?


(A)~○. “이 세상역사(世上歷史)의 종말(終末)이 가까이 이르고 있는 이때, 다니엘이 기록(記錄)한 예언(豫言)들은 우리가 사는 바로 이 시대(時代)와 관계(關係)가 있으므로 우리는 그것에 특별(特別)한 주의(注意)를 기울여야 한다. 이 예언들은 신약성서(新約聖書)의 마지막 책의 가르침과 연결(連結)시켜야 한다. 사탄은 많은 사람으로 다니엘과 계시자(啓示者) 요한의 기록(記錄) 중 예언된 부분(部分)은 이해(理解)할 수 없는 것이라고 믿도록 인도(引導)했다. 그러나 이 예언들을 연구(硏究)하면 특별한 축복(祝福)이 함께하리라는 약속(約束)을 분명(分明)히 했다.” (선지자와 왕, 547) 


(07월 21일 (木) <품성(稟性)과 공동체(共同體)>


(Q)~(엡 4:11~16) 바울은 그리스도인 공동체(共同體) 안에서 그리스도의 장성(長成)한 분량(分量)이 충만(充滿)한 데까지 이르기 위(爲)한 역할(役割)에 대하여 무엇이라고 설명(說明)하고 있습니까?


(A)~ ○. 그리스도인 공동체(共同體) 안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어 은혜(恩惠)와 친절(親切)을 베풀 수 있을 때 비로소 온전(穩全)한 사람을 이루어 그리스도의 장성(長成)한 분량(分量)이 충만(充滿)한 데까지 이르”러야 한다는 말씀을 실천(實踐)할 수가 있다. (엡 4:13).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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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미부록(末尾付祿)>


제4과 제련자(製鍊者)의 얼굴이 보일 때까지


(07월 17일 (日) <그분의 형상(形狀)으로>


(Q)~(롬 8:29) 우리 삶 속에서 벌어지고 있는 대 쟁투(大爭鬪)의 궁극적(窮極的)인 목적(目的)인 무엇입니까?


(A)~○. 여호와 하나님의 형상(形狀)대로 창조(創造)된 사람이 죄(罪)로 인(因)하여 훼손(毁損)되었다. 그러므로 우리를 성령(聖靈)이 정결(淨潔)케 하심으로 하나님의 형상(形狀)으로 회복(回復)하는 것이 선악(善惡)의 대 쟁투(大爭鬪) 가운데서 하나님의 궁극적(窮極的)인 목표(目標)이다.


○. 하나님의 도덕적(道德的) 형상(形狀)이 그리스도를 통(通)하여 회복(回復) 됨(고후 3:18; 골 3:10)

하나님의 도덕적(道德的) 형상(形狀)은 아담의 죄로 말미암아 거의 훼손(毁損)되었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공로(功勞)와 능력(能力)으로 새롭게 될 수 있다. 인간은 그 품성(稟性)에 하나님의 도덕적(道德的) 형상(形狀)을 지닐 수가 있다. 왜냐하면, 예수께서 그것을 그에게 주실 것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도덕적(道德的) 형상(形狀)이 사람 속에 보이지 않으면 그 사람은 정복자(征服者)로서 하나님의 도성(都城)에 들어갈 수가 없다. (리뷰 1890.6.10).” (롬 8:29~30, 화잇주석)


(07월 18일 (月) <연단(鍊鍛)하는 불 가운데서의 믿음>


(Q)~욥 23:1~10) 욥의 투쟁(鬪爭) 본질(本質)은 무엇이며, 그가 보지 못하는 것은 무엇이고, 그에게 닥쳐온 예상(豫想)치 못한 시험(試驗)에도 불구하고 욥은 어떻게 대응(對應)했습니까? (


(A)~○. 욥은 자신에게 이르러온 고난(苦難)과 시련(試鍊)을 이해(理解)할 수 없는 연단(鍊鍛)의 과정(過程)으로 깨닫고 정금(正金)과 같이 나오리라는 믿음으로 견디며 하나님을 신뢰(信賴)하였다. 


○. <정금(正金)같이 나오리라>

 욥기의 핵심(核心) 성경 절(聖經節)들 가운데 하나이다. 그는 하나님이 자기의 행위(行爲)를 아시며 어떤 목적(目的)이 있어서 자기를 그처럼 처우(處遇)하신다고 믿었다. 욥은 자기가 연단(鍊鍛)을 받고 있음을 깨닫기 시작했다. 그는 그때까지도 사단이 자기를 힐난(詰難)했음을 알지 못했다. 욥은 자기가 형벌(刑罰)을 받거나 부당(不當)한 취급(取扱)을 받는 것이 아니라 용광로(鎔鑛爐)에서 순금(純金)처럼 나오기 위해 시험(試驗)받고 있다는 사실을 스스로 깨닫게 됨으로써 절망(絶望)에서 신앙(信仰)으로 한 계단(階段) 상승(上昇)했다. (욥 23:10, 재림교주석)


○. 욥은 이 문제에 있어서 하나님께서 그를 은혜(恩惠)롭게 대해 주시라는 소망(所望)으로 자신을 스스로 위로(慰勞)했다(욥 23:6~7절). 하나님과 관련(關聯)되어 있는 모든 일에서 언제나 하나님을 선(善)하게 생각하는 것은 우리에게 매우 중요(重要)한 일이다. (욥 23:1~10, 매튜헨리)


○. 하나님의 길은 욥이 걷고 있는 길이다

욥이 그의 현재(現在)의 고통(苦痛)이 이처럼 좋은 결말(結末)을 가져오리라는 소망(所望)으로 그 자신을 스스로 위안(慰安)한 이 사실은 그가 하나님을 경외(敬畏)하면서 선(善)한 삶을 살아왔다는 것을 알려 주는 그의 양심(良心)의 증거였다. (욥 23:11 절)


○. 욥은 하나님의 공의(公義)를 신뢰(信賴)하고 있었기 때문에 자신의 무죄(無罪)함과 순전(純全)함이 입증(立證)될 것이라는 확신(確信)하고 있었다.


○. 나를 단련(鍛鍊)하신 후(後)에는 내가 정금(正金)같이 나오리라. 

즉, ‘하나님의 시련(試鍊)이 끝날 때 용광로(鎔鑛爐)에서 연단(鍊鍛) 받은 금(金)처럼 내가 깨끗하고 순결(純潔)하게 될 것이다’라는 뜻이다. 이것은 욥이 자기 무죄성(無罪性)을 강(强)하게 확신(確信)하고 있고, 고난(苦難) 뒤에 심판대(審判臺)에서 의(義)로운 자로 인정(認定)받을 것을 전제(前提)하고 있는 말이다. 여기서 욥의 확신(確信)과 기대는 절정(絶頂)에 다다른다. 욥이 자신의 시련(試鍊)을 금제련(金製鍊)에 비유(譬喩)한 것은 그의 염원(念願)이 재물(財物)의 회복(回復)이 아니라 바로 인격(人格)과 영예(榮譽)의 회복(回復)이었음을 암시(暗示)한다. 앞에서 엘리바스는 욥더러 재물(財物)에 마음을 빼앗기지 말고 하나님을 금(金)과 은(銀)처럼 여기라고 충고(忠告)하였으나(22:24, 25), 욥은 자신이야말로 신앙인격(信仰人格)과 신앙(信仰) 안에서의 명예(名譽)를 그 무엇보다 중요시한다는 사실을 힘주어 말하고 있다.” (욥 23:1~10, 만나주석)


○. 하나님의 말씀은 욥의 걸음을 인도(引導)하는 규례(規例)였다. 

그는 "하나님 입술의 명령(命令)"으로써, 그 자신을 스스로 다스렸고 그것을 피(避)함이 없이 그것을 따라 행했다. 우리가 하나님의 명령(命令)으로 인도받아 광야(廣野)를 지나갈 때, 그 명령(命令)의 길을 따르는 데 어떠한 어려움을 만나든지 간에 우리는 결코 후퇴(後退)하려는 생각을 말고 그 목적지(目的地)를 향해 계속(繼續) 전진(前進)해 가야 한다. 욥은 말할 때도 하나님의 율법(律法)을 견고(堅固)히 지켰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심판(審判)과 그 사랑이 욥으로 하여금 그렇게 하도록 인도(引導)했기 때문이다. "내가 일정(一定)한 음식(飮食)보다 그 입의 말씀을 귀(貴)히 여겼구나." 즉, 욥은 그것을 그의 일정(一定)한 음식(飮食)으로 여겼다. 그는 일용(日用)할 양식(糧食) 없이 살아갈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말씀 없이도 살아갈 수 없었다. 공격(攻擊)에 대비(對備)하여 물품(物品)들을 쌓아둔 자들과 같이, 또는 기근(饑饉)에 대비(對備)하여 곡식(穀食)을 모아둔 요셉과 같이 내가 그것을(단어 그대로) 쌓았도다. 엘리바스는 욥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그의 마음에 두라"고 명(命)했다(22:22). "그렇게 하겠다." 욥은 말했다. "내가 하나님을 거슬러 죄(罪)를 범(犯)하지 않도록, 그리고 훌륭한 가장(家長)으로서 다른 사람들에게 유익(有益)을 베풀 수 있도록 하기 위(爲)해 항상(恒常) 그렇게 하리라."(욥 23:12 절) 주석


○. 일정(一定)한 음식(飮食)이 우리 몸에 중요(重要)하듯이,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 영혼(靈魂)에 중요하다. 그것은 영적생명(靈的生命)을 유지(維持)해 주고, 그러한 생명의 활동(活動)을 위해 우리에게 힘을 준다. 우리는 그것 없이 살아나갈 수가 없으며, 그 부족함을 다른 것으로 대치(代置)시킬 수도 없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것을 중히 여기고 그것을 얻도록 노력(努力)하며, 그것을 갈급(渴急)하게 찾으며, 그것을 기쁘게 먹고, 그리고 그것으로 우리 영혼(靈魂)을 키워야 한다. 그리고 이것은 여기에 나오는 욥의 경우(境遇)와도 같이 악(惡)한 날 우리의 기쁨이 될 것이다. ” (욥 23:1~10, 매튜헨리)


○. 우리를 연단(鍊鍛)하시는 주님의 방법(方法)

자기 죄에 대한 처벌(處罰)을 선택(選擇)하라는 명령(命令)을 받았을 때, 다윗은 “여호와께서는 긍휼(矜恤)이 크시니 우리가 여호와의 손에 빠지고 내가 사람의 손에 빠지지 않기를 원(願)하노라”(삼하 24:14)라고 말하였다. 그는 하나님께서 영혼(靈魂)의 투쟁(鬪爭)과 고뇌(苦惱)를 아신다고 느꼈다. 하나님의 성품(性稟)의 모습(模襲)을 엿볼 수 있다면, 인간은 동료(同僚) 인간에게서 볼 수 있는 그런 무자비(無慈悲)하고 복수심(復讐心)에 불타는 모습들을 그분에게서는 보지 못할 것이다. 오히려 그는 고난(苦難)과 시련(試鍊)이 그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은혜(恩惠)를 붙잡을 수 있도록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자녀들을 훈련(訓練)하시고, '하나님'의 길을 가르치시고자 임명(任命)하신 방법(方法)들을 보게 된다. “너희 중에 여호와를 경외(敬畏)하며 그 종의 목소리를 청종(聽從)하는 자가 누구뇨 흑암(黑暗) 중에 행(行)하여 빛이 없는 자라도 여호와의 이름을 의뢰(依賴)하며 자기 하나님께 의지(依支)할지어다”(사 50:10). 뒤로 미끄러지는 불쌍한 사람들이 하나님의 사랑의 강가로 인도(引導)될 때, 그는 “그가 나를 단련(鍛鍊)하신 후에는 내가 정금(正金)같이 나오리라”(욥 23:10)라고 외친다. 고난(苦難) 닥치는 영혼(靈魂)은 역경(逆境) 아래에서도 하나님 안에서 인내심(忍耐心) 있고, 신뢰(信賴)할 만하며, 승리(勝利)하는 인물(人物)이 된다. (목사 355). (욥 23:1~10, 화잇주석)

 

(07월 19일 (火) <예수님의 마지막 말씀>


(Q)~(마 25:1~12, 25:31~46) 죽음을 목전(目前)에 둔 예수 님께서 가르쳐 주신 비유(譬喩)를 통해 우리가 배워야 할 중요(重要)한 교훈(敎訓)은 무엇입니까?


(A)~(마 25:1~12(열처녀의 비유), 마 25:31~46(양과 염소) 이 비유(譬喩)는 그리스도의 재림준비(再臨準備) 중요성(重要性)을 강조(强調)하고 있으며,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구원(救援)받은 성도(聖徒)는 변화(變化)된 품성(稟性)으로 이웃에게 구원(救援)을 나타내어야 하고 주님의 재림(再臨)을 항상(恒常) 예비(豫備)하고 있어야 함을 역설(力說)한다(참조: 마 24:44)….


1. "신랑(新郞)"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2. 처녀(處女)들은 신앙(信仰)을 고백(告白)한 자들로서 교회(敎會)의 한 지체(肢體)들이다. 

3. 이러한 처녀(處女)들의 할 일은 신랑(新郞)을 만나는 그들의 의무(義務)일 뿐만 아니라 행복(幸福)이기도 하다. 

4. 우리는 그리스도와 그의 재림(再臨)을 고대(苦待)하는 자(者)임을 고백(告白)해야만 한다. 

5. 그들의 주요(主要)한 임무(任務)는 신랑을 수행(隨行)할 때 손에 등불을 가지는 것이며 이렇게 함으로써 그를 영화(榮華)롭게 하며 또한 그를 봉사(奉仕)하는 것이다. 


○. 마음의 그릇이며, 이것을 잘 갖추는 것은 지혜(智慧) 있는 일이다. 


○. 은혜(恩惠)는 이 "그릇"에 담아야 할 "기름"이다. 

장막(帳幕)(성소(聖所))에는 "불을 켤 수 있는 기름"(출 25:14)이 항시(恒時) 준비(準備)되어 있었다. 우리의 빛은 선(善)한 행실(行實)로써 사람들 앞에 비쳐야만 한다. 그러나 마음속에 그리스도를 믿는 신앙(信仰)이나 하나님과 이웃에게 대한 사랑의 "고정(固定)된 능동적(能動的)인 원칙(原則)"이 없다면 그러한 일(빛을 비추는 일)은 도저히 있을 수 없으며 또한 오래 가지도 않을 것이다. 


○. 신랑(新郞)이 더디게 오는 동안 그들이 저지른 공동적(共同的)인 허물, "다 졸며 잘 쌔"(마 25:5절). 


○. 그 신랑(新郞)은 더디 왔다. 

    즉 그들이 기대(期待)했던 것만큼 빨리 오지 않았다. 우리는 자칫하면 우리가 찾는 것이 매우 가까이 있다고 생각하기 쉽다. 사도시대(使徒時代)에도 많은 사람이 "주의 날이 가까이 이르렀다"라고 상상(想像)하였다. 그러나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 우리에게 있어서 그리스도는 더디게 오시는 것같이 "보이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아니하다"(합 2:3). 신랑이 더디 오는 데는 그럴 만한 이유(理由)가 있다. 즉 여러 가지 중개적(仲介的)인 의논(議論)과 성취(成就)되어야 할 목적(目的)들이 있으며 선택(選擇)받은 자는 모두 불러 모아져야만 하며, 하나님의 참으심이 나타나 져야만 하며, 또한 성도(聖徒)들의 인내(忍耐)가 시련(試鍊)되어져야만 하며, 땅의 추수(秋收)가 행해져야만 하며, 또한 하늘의 추수(秋收)도 해져야만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리스도는 "우리의" 시간(時間)보다 더 지체(遲滯)되는 것이지, "적당(適當)한" 시간(時間)보다 더 지체(遲滯)되시지는 않는다.


○. 그가 지체(遲滯)하시는 동안 그를 기다리는 자들은 점점 부주의(不注意)하게 되고 급기야(及其也)는 그들이 기다리고 있다는 사실 자체(自體)도 잊고 마는 것이다. "그들은 다 졸며 잤다." 마치 그들은 그를 기다리는 것을 포기(抛棄)한 것처럼 졸며 잤던 것이다. 그러므로 "인자(人子)가 올 때 그는 믿음을 보지" 못하게 되실 것이다. 그러므로 "인자(人子)가 올 때 그는 믿음을 보지" 못하게 되실 것이다(눅 18:8). 


○.그들은 졸았으며 그 후(後)에 자버렸다. 

  여기에서 유의(有意)할 것은 일말의 부주의(不注意)와 나태 심은 더 큰 그것으로 길을 내 준다는 사실(事實)이다. 졸기 시작(始作)하는 자는 잠을 자지 않을 수 없게 된다. 그러므로 영적(靈的)인 쇠퇴(衰頹)가 시작(始作)되는 것을 두려워하라. 


○. 그리스도께서는 오래 지체(遲滯)하시지만 결국(結局)은 오실 것이다. 

  그는 느리게 보이지만 분명(分明)하시다. 그가 처음 오셨을 때 이스라엘의 위로(慰勞)를 기다렸던 자들에게는 그가 오랫동안 지체(遲滯)하셨다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그는 "때가 찼을 때" 오셨다. 이처럼 그의 재림(再臨)도 오래 지체(遲滯)되는 것같이 보이지만 완전(完全)히 망각(忘却)되고 있는 것은 아니다. 


○. 그리스도의 오심은 우리가 가장 소홀(疏忽)히 그를 찾으며 우리의 휴식(休息)을 가장 포근히 누리고 있을 한밤중에 있을 것이다. 그의 백성을 구원(救援)하기 위하여 오시는 것은 종종 그러한 선(善)한 의도(意圖)가 멀리 떨어져 있는 것처럼 보일 때이다. 그의 원수(怨讐)들과 계산(計算)하기 위하여 오시는 것은 그들이 그 악(惡)한 날을 자기들에게서 멀리 내버리는 때이다. 애굽의 장자(長子)가 죽임을 당하고 이스라엘이 구원(救援)받은 것은 한밤중이었다(출 12:29). 죽음은 종종 거의 예기치 않을 때 오는 수가 있다. 영혼(靈魂)은 "이 밤에 거두어진다."(눅 12:20). 그리스도께서는 그의 지배권(支配權)을 보여주시기 위하여 자신이 기뻐하시는 때에 오실 것이며 또한 우리의 의무(義務)를 가르쳐 주시기 위하여 그때를 우리에게 가르쳐 주시지 않을 것이다.


○. "그리스도께서 오실 때 우리는 그를 맞으러 나가야만 한다."


○. 그리스도가 오신다는 사실을 알리는 것과 그를 만나라고 부르는 것은 "깨우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즉 "소리가 났다." 그가 처음 오실 때는 그 누구의 관찰(觀察)(주시(注視))도 전혀 없었으며, "보라. 그리스도가 여기 있다. 혹 저기 있다"라고 말하는 사람도 없었다. "그는 세상에 계셨으나 세상은 그를 알지 못하였다." 그러나 그의 재림(再臨)은 온 세상이 주시(注視)하는 가운데 있게 될 것이다.


○. 이 호출(呼出)에 응(應)하여 그들이 취(取)한 태도(態度)(7절). 

"이에 그들은 다 일어나 등을 준비(準備)하였다." 즉 심지(심주)의 까맣게 탄 부분(部分)을 자르고 기름을 담아 넣고 가능(可能)한 한 빨리 신랑(新郞)을 맞이할 준비(準備)를 차렸다. 


○. 슬기로운 처녀(處女)들의 경우(境遇)는 신랑(新郞)이 오심에 대비(對備)하여 실제적(實際的)으로 잘 준비(準備)된 것을 나타내고 있다. 


○. 미련한 처녀(處女)들의 경우(境遇)는 헛된 신뢰(信賴)와 그들의 좋은 지위(地位)에 대한 헛된 자만(自慢), 그리고 저세상을 위한 준비(準備)에 대해 쓸데없는 자부심(自負心)을 가진 것을 나타내고 있다. 


○. 그들의 등(燈)불이 꺼져 버렸다. 


○. 그들은 등불이 꺼졌을 때 거기에 기름을 넣으려고 했다.

  여기에서 유의(有意)할 것은, 참된 은혜(恩惠)를 모자라게 가진 자는 언젠가 그 부족(不足)을 느끼게 되리라는 사실이다. 평판(評判)이 잘 나 있는 신앙고백(信仰告白)은 사람을 멀리 데리고 갈 수는 있지만 속으로 꿰뚫고 데리고 갈 수는 없다. 그것은 이 세상에 있을 때 그를 비출 수 있지만, 사망(死亡)의 음침(陰沈)한 골짜기의 습기가 그것을 꺼 버릴 것이다.


○. 그들은 자기들의 그릇에 기름을 채우기 위하여 슬기로운 처녀(處女)들에게 신세(身世)를 지려고 하였다. 심판자(審判者)가 각 사람의 참된 성격(性格)을 아시는 대 심판(審判) 날에는 보증인(保證人)이 필요가 없다. 그들이 "기름을 좀 나눠 달라"고 한 것이 좋지 않은가? 그렇다. 그것은 좋지 않다.


○. 이 요구는 민감(敏感)한 필요성(必要性)에 의해 간청(懇請)되었다. 

  현재 은혜(恩惠)의 필요성(必要性)을 인식(認識)하지 못하는 자들은 그것이 그들을 구원(救援)하며 또한 그들을 거룩게 하고 다스리게 될 때 그들의 은혜(恩惠)의 필요성(必要性)을 깨닫게 될 것이다.


○. 그때는 이미 늦은 것이다. 

그들이 때를 맞추어 요구(要求)했다면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 기름을 주었을 것이다. 시장(市場)이 문을 닫았을 때 그것을 살 수는 없으며, 소량(少量)의 초가 떨어졌을 때 그것을 다시 묶을 수도 없을 것이다.


○. 그들은 동료(同僚)의 기름을 얻으려고 했으나 거절(拒絶)당하였다. 

    그들이 이와 같이 선(善)한 사람에게 거절(拒絶)당한 것은 하나님께도 거절(拒絶)당할 것이라는 불길한 징조(徵兆)이다. "슬기로운 자는 그렇게 할 수 없다고 대답(對答)하였다." 

○. 구원(救援)을 받으려고 하는 자는 그들 자신의 은혜(恩惠)(덕(德)) 를 가지고 있어야만 한다. 

우리가 구원(救援)받는 데는 우리 자신이 성결(聖潔)케 되는 것이 절대적(絶對的)으로 필요(必要)하다. 의인(義人)은 그의 믿음으로 살게 될 것이다. 


○. 가장 좋은 은혜(恩惠)를 소유(所有)하고 있는 자들은 다른 사람에게 나누어 줄 것을 가지고 있지 않다. 우리가 가진 모든 것은 하나님 앞에 가지고 나가기에는 너무나 부족(不足)한 것이다. 가장 훌륭한 자는 그리스도에게서 빌려 올 필요(必要)를 느끼지만 어떤 이웃에게도 빌려줄 것은 가지고 있지 못하다. 은혜(恩惠)를 소유(所有)하려고 하는 자는 은혜(恩惠)의 수단(手段)에 의지(依支)해야만 하며 또한 그것들에 유의(有意)해야만 한다는 사실이다. (이사야서 55장 1절)을 보라.


※. 신랑(新郞)이 오는 것과 또한 슬기로운 처녀(處女)들과 미련한 처녀들의 상이(相異)한 이 모든 특성의 결과(結果) 어떤 일이 일어났는가를 살펴보도록 하자.


[1] "저희가 사러 간 동안에 신랑(新郞)이 왔다.

[2] "예비(豫備)하였던 자들은 함께 혼인(婚姻) 잔치에 들어갔다." 

 (첫째), 영원(永遠)히 영광(榮光)을 받는 것은 그리스도와 함께 결혼식(結婚式)에 참여하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그가 계시는 곳에 함께 있는 것이며 또한 영원한 휴식(休息)과 즐거움과 풍족(豊足)한 상태(常態)에서 그와 더불어 친밀(親密)한 교제(交際)와 관계(關係)를 맺는 것이다.

(둘째), 이 세상에서 하늘나라를 위해 예비(豫備)한 자들, 즉 "이것을 이룬 자"(고후 5:5)들만이 장차(將次) 하늘나라에 가게 될 것이다.

(셋째), 우리가 항상(恒常) 준비(準備)되어 있다면 죽음이나 또는 그리스도가 갑자기 이른다고 해서 그것이 우리의 행복(幸福)을 방해(妨害)하는 걸림돌(障碍物)이 되지는 않는 것이다.


[3] "문(門)은 닫혔다." 

 이는 마치 들어오도록 허용(許容)된 사람이다. 

들어왔을 때 흔히 문(門)을 닫아버리는 것과 같다. 문이 닫힌 것은 안에 있는 자들을 안전(安全)하게 보호(保護)하기 위함이다. 영화(榮華)롭게 된 성도(聖徒)가 천국(天國) 낙원(樂園)에 두어지게 될 때 그들은 속에 안전(安全)히 보호(保護)가 되는 것이다.

밖에 있는 자들을 내쫓기 위함이다. 노아는 보존(保存)]되었지만 그 밖의 모든 사람은 결국 버림을 당하였던 것이다.


[4] 미련한 처녀(處女)들은 "늦게" 왔다(11절). 

  

○. <슬기 있는 자들이 잠에서 깨어남>

비유(譬喩)에서 하늘의 신랑(新郞)을 기다리는 사람 모두가 주께서 더디 옴으로 다 졸며 잔 것으로 나타나 있지만 슬기 있는 자들은 그의 오실 때가 가까웠다는 기별(寄別)을 듣고 잠에서 깨어나 그 기별(寄別)에 응답(應答)하였다. 그들의 영적(靈的) 식별력이 다 없어진 것은 아니었으며 그들은 일어나 그 대열(隊列)에 참여(參與)하였다. 그들이 그리스도의 은혜(恩惠)를 꼭 붙들었을 때 그들의 신앙적(信仰的) 경험(經驗)은 활기(活氣)가 있고 풍성(豊盛)하여 졌으며 그들의 애정(愛情)은 위에 있는 것들에 고정(固定)되었다. (마 25:1~12, 화잇주석)


○. 그들은 도움의 근원(根源)이 어디 있는가를 알았고, 하나님의 사랑에 감사(感謝)하였다. 

그들은 성령(聖靈)을 받아들이기 위하여 마음을 열어 놓았고, 그 성령(聖靈)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랑이 그들의 마음에서 흘러나왔다. 그들이 등잔(燈盞)의 심지를 자르고 손질을 해서 불을 붙여 도덕적(道德的) 흑암(黑暗)에 싸여 있는 세상에 한결같은 빛을 보내었다. 그들은 하나님을 영화(榮華)롭게 하였으니, 이는 그들이 마음에 은혜(恩惠)의 기름을 가졌기 때문이며, 그들의 주님이 그들 앞서 행하신 일 곧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救援)하는 일을 하려고 나아갔기 때문이었다. (사인즈 1910. 6. 28).


○. 목자(牧者)가 양(羊)과 염소를 분별(分別)하는 것같이. 

종말적(終末的) 심판(審判)의 때에, 열처녀 비유(譬喩)나 달란트 비유(譬喩)처럼, 천국(天國)에 들어갈 수 있는 사람과 그렇지 못한 사람을 구분(區分)한다는 것을 비유(譬喩)의 서두(序頭)에서 밝히고 있다. 여기서 양(羊)과 염소는 낮에 풀을 뜯을 때는 무리에 구분(區分) 없이 섞여 지낸다. 그러나 특히 일교차(日較差)가 심한 기후(氣候)인 팔레스타인에서는 잠을 잘 때 목자들이 양과 염소를 구별(區別)하였다. 왜냐하면 양(羊)들은 추위에 강(强)하지만 염소는 추위에 약(弱)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염소는 따뜻한 곳에서 잠을 자도록 하였다. 


○. 또 낮에도 서로 구분(區分)되기는 하는데 왜냐하면 팔레스타인 염소들은 대부분(大部分) 검은 계통(系統)인 데 반해 양들은 흰색을 띠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들은 서로 성격(性格)이 판이(判異)한 짐승인지라 저회들끼리 무리를 이룬다. 여기서는 목자(牧者)가 직접(直接) 무리를 구별하는 것으로 묘사된다. 이러한 묘사(描寫)는, 앞에서 ‘모든 민족(民族)’을 심판(審判)의 대상(對象)으로 삼는다는 것으로 보아 양과 염소를 심판(審判)의 대상(對象)이 되는 모든 민족(民族)으로 보아야 한다. (마 25:31~46, 매튜헨리)


○. 그 죄(罪)과는 가난한 자(者)에게 자선(慈善)을 소홀(疏忽)히 한 것이다. 

그들이 판결(判決)을 받은 것은 그들이 희생(犧牲)의 제사(祭祀)나 변제(燔祭)를 소홀(疏忽)히 했기 때문이 아니라(그들은 이러한 일들을 매우 잘하였다. 시 50:8) 율법(律法)의 중(重)한 것들, 즉 "심판(審判), 자비(慈悲), 신앙(信仰)"을 소홀(疏忽)히 하였기 때문이다. 암몬 족속(族屬)과 모압 족속(族屬)은 성소(聖所)에 들어오지 못하도록 금지(禁止)를 당하였다. 왜냐하면, 그들은 "떡과 물로 이스라엘을 영접(迎接)하지 않았기" 때문이다(신 23:3, 4). 여기에서 유의(有意)할 것은, 가난한 자에게 선행(善行)을 베풀지 않는 것은 정죄(定罪) 받는 죄라는 사실이다. 만일 우리가 보상(報償)받을 희망(希望)을 가지고 선행(善行)을 베풀려고 하지 않는다면 형벌(刑罰)을 두려워해서라도 자극(刺戟)을 받아 선행(善行)을 베풀도록 하자. 왜냐하면 "긍휼(矜恤)을 나타내 보이지 않는 자는 긍휼(矜恤) 없는 심판(審判)을 받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 다음의 사실(事實)에 유의(有意)하라. 

그는 "내가 병들었으나 너희는 나를 치료(治療)하지 않았다. 내가 감옥(監獄)에 있을 때 너희는 나를 해방(解放)시켜 주지 않았다"(아마도 그것은 그들이 할 수 있는 것 이상이다)라고 말씀하지 않으시고 "너희는 나를 돌아보지 아니하였다. 이 일은 너희가 할 수 있는 일이었다." 여기에서 유의(有意)할 것은 죄인(罪人)들이 대 심판(審判) 날에 정죄(定罪)를 받게 되는 것은 자신들의 할 수 있는 선행(善行)을 소홀(疏忽)히 했기 때문이라는 사실이다. 긍휼(矜恤)을 베풀지 않은 자에 대한 판결(判決)이 그렇게도 무서운 것이라고 한다면 하물며 무자비(無慈悲)하게 악(惡)을 행하는 자, 즉 박해자(迫害者)에 대한 판결(判決)은 얼마나 더 비참(悲慘)한 것이 될 것인가! 그런데 이 판결(判決)의 이유(理由)는,


○. 미래(未來)에 있어서 악(惡)한 자에 대한 형벌(刑罰)은 영원(永遠)한 형벌(刑罰)이 될 것이다. 왜냐하면, 그 미래(未來)의 상태(常態)는 돌이킬 수 없는 상태이기 때문이다. 죄인(罪人)들이 그들 자신의 성품(性稟)을 변화(變化)시키거나 또는 하나님께서 이 세상에서 은혜(恩惠)의 날이 낭비(浪費)되고 은혜의 성령(聖靈)이 거부(拒否)되고 은혜(恩惠)의 방편(方便)들이 남용(濫用)되고 방해(妨害)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을 변화(變化)시키기 위하여 자신의 은혜를 부여(附與)하리라는 것은 상상조차도 할 수 없는 일이다.


○. 죽는다고 해서 생명(生命) 그 자체를 끝마칠 수는 없고 늙는다고 해서 그 생명의 위로(慰勞)나 그것을 괴롭히는 슬픔을 종지부(終止符) 찍을 수는 없다. 이처럼 생명과 죽음, 선(善)과 악(惡), 축복(祝福)과 저주(詛呪)는 우리 앞에 놓여 있는데, 이는 우리로 하여금 자신의 길을 선택(選擇)할 수 있도록 하기 위(爲)함이다. 우리의 마지막도 그렇게 될 것이다. 이방인(異邦人)들도 저세상(世上)에서의 선(善)과 악(惡)의 다른 상태(常態)에 대한 어떤 개념(槪念)을 가지고 있다. (마 25:31~46, 매튜헨리)


(07월 20일 (水) <“지혜(智慧) 있는 자(者)”>


(Q)~(다니엘 12:1~10)에 예수님의 재림직전(再臨直前)의 기별(寄別)로써 하나님의 백성(百姓)에게 나타나는 지혜(智慧) 있는 자(者)들의 품성(稟性)과 구원(救援)받을 의인(義人)들의 특징(特徵)은 무엇입니까?


(A)~○. “이 세상역사(世上歷史)의 종말(終末)이 가까이 이르고 있는 이때, 다니엘이 기록(記錄)한 예언(豫言)들은 우리가 사는 바로 이 시대(時代)와 관계(關係)가 있으므로 우리는 그것에 특별(特別)한 주의(注意)를 기울여야 한다. 이 예언들은 신약성서(新約聖書)의 마지막 책의 가르침과 연결(連結)시켜야 한다. 사탄은 많은 사람으로 다니엘과 계시자(啓示者) 요한의 기록(記錄) 중 예언된 부분(部分)은 이해(理解)할 수 없는 것이라고 믿도록 인도(引導)했다. 그러나 이 예언들을 연구(硏究)하면 특별한 축복(祝福)이 함께하리라는 약속(約束)을 분명(分明)히 했다.” (선지자와 왕, 547) 


○. 그러므로 지혜(智慧) 있는 자(者)들은 여호와를 경외(敬畏)함으로 말씀을 깊이 연구(硏究)하여 환난(患難)의 시기(時期)가 임(臨)할 것을 알아야 할 뿐 아니라 그 시기(時期)를 연단(鍊鍛)의 기회(機會)로 삼아야 한다. 


○. <오직 지혜(智慧) 있는 자(者)는 깨달으리라>

히브리어 함마스킬림(hammaskilim). 동사(動詞) 사칼(sakal), “신중(愼重)하게 되다”에서 파생(派生)했다. 이 형태(形態)는 단순(單純)한 의미(意味)에서 “신중한 자들”, “통찰력(洞察力)을 가진 자들”로 이해할 수 있고, 사역(使役) 동사의 의미로는 “통찰력(洞察力)을 가지게 하는 자들” 즉 “가르치는 자들”로 이해할 수 있다. 하나님의 사물(事物)들에 대해 진정(眞正)한 통찰력을 가진 자들은 바로 그 때문에 이 사물들이 다른 사람들과 공유(共有)되어야 한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하나님의 지혜(智慧)는 그를 인도(引導)하여 그 지혜를 다른 이들에게 가르치는 자가 되게 한다..

옳게 분별(分別)하는 일은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이 필수적(必須的)으로 소유(所有)해야 할 특성(特性)이다. 왜냐하면 마귀(魔鬼)가 우는 사자(獅子)처럼 삼킬 자를 찾고 있기 때문이다. (골 2:3, 딤후 2:15, 벧전 5:8).(단 12:1~12, 재림교주석)


○. “봉함(封緘)되었던 책은 요한계시록이 아니었고 마지막 날에 관련된 다니엘 예언서(豫言書)의 일부(一部)였다. 성경(聖經)에 보면 ‘다니엘아 마지막 때까지 이 말을 간수(看守)하고 이 글을 봉함(封緘)하라 많은 사람이 빨리 왕래(往來)하며 지식(知識)이 더하리라’(단 12:4)라고 기록되어 있다. 그 책이 펴 놓였을 때 ‘지체(遲滯)하지 아니하리’(계10:6)라고 선포(宣布)되었다. 지금 다니엘서는 인봉(印封)되어 있지 않으며 그리스도께서 요한에게 주신 계시는 지상(地上)의 모든 거민(居民)들에 전(傳)해져야만 하였다. 지식(知識)의 증가(增加) 때문에 백성들은 마지막 날에 설 수 있도록 준비(準備)되어야 한다.” (가려 뽑은 기별 2권, 105)


○. 하나님의 존귀(尊貴)한 선견자(先見者)요 종인 다니엘은 자기가 기록(記錄)한 계시(啓示)들의 완전(完全)한 의미(意味)를 다 알도록 허락(許諾)받지 못했다. 그 완전한 의미는 이 예언들의 역사적(歷史的)인 성취(成就)를 보는 자들만이 이해(理解)하게 될 것이었다. 왜냐하면, 그때가 되어야만 그것들이 성취(成就)된 사실(事實)에 근거(根據)하여 세상(世上)에 기별(寄別)이 주어질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각 시대의 대쟁투, 356).


○. 한때와 두 때 반 때.

 이 기간(期間)은 1260년의 기간으로써 538부터 1798년까지의 기간인 것은 이미 확인(確認)하였다(7:25 주석 참고). 그러므로 1798년은 마지막 때의 시작(始作)이 된다..


○. 다니엘은 이 세상이 계속(繼續)되는 한, 우리가 지금 보는 것처럼 선(善)한 것과 악(惡)한 것이 혼합(混合)되어 있다는 것을 고려(考慮)해야만 했다. 우리는 하나님의 밭에서 가라지는 전혀 못 보고 온통 밀만 보며 그의 타작(打作)마당에서 알곡만 보고 겨는 찾아보지 못하게 되기를 원한다. 그러나 추수(秋收)의 때가 올 때까지, 키질하는 날이 이르기까지는 그렇지 못할 것이다. 두 가지 모두가 추수(秋收)할 때까지 같이 자라야 한다. 과거(過去)에도 그랬듯이 지금도 그러하고 또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악(惡)한 사람은 악을 행할 것이나 지혜(智慧) 있는 자는 깨달으리라." 사도(使徒) 요한의 계시록(啓示錄)은 다른 일에서처럼 여기서도 다니엘과 같이 끝맺고 있다. "더러운 자는 그대로 더럽고, 거룩한 자는 그대로 거룩 되게 하라." (계 22:11) .(단 12:1~12, 매튜헨리)


○. 깨달으리라. 

마지막 때에 독실(篤實)하고도 지성적(知性的)으로 탐구(探究)하는 자들은 그들의 시대를 위한 하나님의 기별(寄別)을 이해(理解)할 것이라는 보증(保證)이다.


○. 하늘의 충성(忠誠)된 종 다니엘

바벨론과 메데 바사 나라의 정치가로서의 다니엘이 당한 경험(經驗)은, 사업가(事業家)란 반드시 기획(企劃)을 잘하는 정략가(政略家)가 되는 것이 아니며 매 발걸음마다 하나님의 가르침을 받는 사람이 사업가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을 나타내 보인다. 다니엘은 세상에서 가장 큰 나라들의 총리(總理)임과 동시(同時)에 하늘의 영감(靈感)의 빛을 받는 하나님의 선지자(先知者)였다. 영감(靈感)의 기록(記錄)은 다니엘은 우리와 같은 성정(性情)의 사람이로되 과오(過誤)가 없는 사람이라고 묘사(描寫)하였다. 그의 원수(怨讐)들의 면밀(綿密)한 점검(點檢) 하에서도 그의 업무처리(業務處理)에는 한가지의 흠(欠)도 발견(發見)되지 아니하였다. 다니엘은 그 마음이 변화(變化)되고 성화(聖化)되었을 때, 그 동기(動機)가 하나님 보시기에 의(義)로울 때에, 모든 사업가가 어떻게 될 수 있는지의 모본(模本)이었다. (단 12:1~12, 화잇주석)


○. (계22:11) 불의(不義)를 하는 자. 

이 구절(句節)은 문자적(文字的)으로 “불의(不義)를 행(行)하는 자(者), 그로 하여금 계속(繼續) 불의(不義)를 하게 하라. 그리고 더러운 자, 그로 하여금 계속 더러워지게 하라. 그리고 의(義)로운 자, 그로 하여금 계속 의(義)를 행(行)하게 하라. 거룩한 자(者), 그로 하여금 계속(繼續) 거룩해지게 하라”이다. 이 말은 특히 각 사람의 장래(將來)가 돌이킬 수 없도록 고정(固定)될 때에 적용(適用)될 수 있다. 그러한 명령(命令)은 조사심판(調査審判)이 마쳐질 때 내려진다(참조 14:7 주석). 어떤 이들은 이 진술(陳述)을 가라지의 비유(譬喩)에서 그리스도가 한 말, “둘 다 추수(秋收) 때까지 함께 자라게 두어라”(마 13:30)와 비교(比較)하는 일을 통해 그것을 좀 더 널리 적용(適用)한다. 인간의 자유의지(自由意志)는 방해(妨害)를 받지 말아야 한다. 사람들은 그들 자신의 선택(選擇)에 따라 삶을 살아 그들의 진정(眞正)한 성품(性稟)이 분명(分明)해지도록 허용(許容)되어야 한다. 각 시대(時代)의 각 사람은 그리스도의 재림(再臨) 때에 그가 어떤 부류(部類)에 속했는지를 명백(明白)히 드러낼 것이다. (계 22:11, 재림 교 주석)


○. “오. 재림신도(再臨信徒)들이여! 우리는 전적(全的)으로 주님(主任)을 위해 살고, 질서정연(秩序整然)한 생활과 경건(敬虔)한 대화(對話)를 통하여 우리가 예수님과 함께 살아왔다는 사실(事實)과 지금도 그분이 온유(溫柔)하고 겸손(謙遜)한 추종자(追從者)들임을 보여주자! 우리는 낮 동안 열심(熱心)히 일하여야 한다. 고난(苦難)과 시련(試鍊)의 어두운 밤이 올 것인데 그때에는 아무도 하나님을 위하여 일할 수 없기 때문이다. 예수께서는 지금 지성소(至聖所)에서 우리의 희생(犧牲)과 기도(祈禱)와 잘못과 죄에 대한 고백(告白)을 받고 계신다. 그분은 성소(聖所)를 나오시기 전에 모든 이스라엘의 죄를 도말(塗抹)하시고 용서(容恕)하실 것이다. 예수께서 성소(聖所)를 떠나실 때 거룩한 자는 그대로 거룩하고 의(義)로운 자는 그대로 의(義)로울 것이다. 그 이유(理由)는 그들의 모든 죄가 도말(塗抹)되고 살아 계신 하나님의 인(印)을 받게 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불의(不義)를 행하고 더러운 자들은 그대로 불의(不義)를 행(行)하고 더러울 것인데 이는 그들의 희생(犧牲)과 고백(告白)과 기도(祈禱)를 하나님의 보좌(寶座) 앞에 드려 줄 대제사장(大祭司長)이 성소(聖所)에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다가오는 진노(震怒)의 폭풍(暴風)으로부터 영혼(靈魂)을 구원(救援)해 내는 일은 예수께서 지성소(至聖所)에서 나오시기 전(前)에 해야 한다.” (초기문집, 47-48)


(07월 21일 (木) <품성(稟性)과 공동체(共同體)>


(Q)~(엡 4:11~16) 바울은 그리스도인 공동체(共同體) 안에서 그리스도의 장성(長成)한 분량(分量)이 충만(充滿)한 데까지 이르기 위(爲)한 역할(役割)에 대하여 무엇이라고 설명(說明)하고 있습니까?


(A)~ ○. 그리스도인 공동체(共同體) 안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어 은혜(恩惠)와 친절(親切)을 베풀 수 있을 때 비로소 온전(穩全)한 사람을 이루어 그리스도의 장성(長成)한 분량(分量)이 충만(充滿)한 데까지 이르”러야 한다는 말씀을 실천(實踐)할 수가 있다. (엡 4:13). 


○. ‘믿는 것’은 믿음의 행위(行爲)라기보다 믿음의 내용(內容)을 의미(意味)하는 것이며 ‘믿는 것’과 마찬가지로 아는 일은 그리스도가 중심(中心)이 된 구원(救援)에 포함(包含)된 모든 것을 인식(認識)하는 것이다. 이런 ‘믿음’과 ‘지식(知識)’의 대상(對象)은 하나님의 아들이신 그리스도이다. ‘하나님의 아들’은 바울의 전통적(傳統的)인 기독론적(基督論的) 칭호(稱號)이다(롬 1:3, 4, 9, 5:10, 8:3, 고전 1:9, 고후 1:19, 갈1:16, 2:20, 4:4, 골 1:13, 살전 1:10). 


성도(聖徒)들이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 되게 하는 것은 목사(牧師)와 교사(敎師)들에게 부여(附與)된 과제(課題)로서, 목사(牧師)와 교사(敎師)는 그리스도에 대한 한 믿음과 한 지식(知識)을 향(向)한 점진적(漸進的) 진보(進步)가 있어야 함을 인식(認識)해야 한다(Lincoln).

댓글목록

이봉주님의 댓글

이봉주 작성일

내용이 짤려져서 이곳에 추가합니다
<첨부파일로 보시면 짤리지 않습니다>
오직 사랑 안에서 참된 것을 하여.
본(本) 절(節)은 교회성장(敎會成長)의 수단(手段)을 나타낸다. ‘참된 것을 하여’의 헬라어 ‘알레듀온테스’은 문자적(文字的)으로 ‘진리(眞理)를 말하여’를 의미하는데(speaking the truth, NIV) 이것은 교회가 구원(救援)의 복음(福音)을 선포(宣布)하는 것을 시사(示唆)한다(엡2:5). 교회의 복음선포(福音宣布)는 ‘사랑 안에서’ 이루어져야 한다. ‘사랑’은 진리(眞理)에 대해 충성(忠誠)할 수 있게 하는 원동력(原動力)이기 때문이다.

바울이 여기서 감독(監督)과 집사(執事)와 그 외 다른 직분(職分)을 왜 언급(言及)하지 않느냐는 의문(疑問)이 생길 수 있다. 그는 여기서 우열(優劣)을 가리는 것이 아니라 행정(行政)보다는 가르침을 위해 성령(聖靈)의 은사(恩賜)를 받았다는 특징(特徵)이 있는 자들에 관해 말하고 있음이 분명(分明)하다. 이 직분(職分)들은 상호(相互) 배타적(排他的)이지 않았다.

교회(敎會)는 양적(量的)인 면과 질적(質的)인 면에서 함께 세워져야 한다..
하나가 되라는 말은 이 단어(單語)는 믿음과 지식(知識) 모두에 연결(連結)되어, 즉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에 하나가 되며 그분을 아는 지식(知識)에 하나가 되는 것을 가리킨다. 믿음은 언제나 지식과 결합(結合)돼야 한다..

그리스도만이 완전(完全)한 성장(成長)을 이뤘고, 그분 홀로 완성(完成)된 사람, 온전(穩全)한 사람이다. 우리는 이런 본성(本性)에 참여(參與)하라는 부름을 받으며, 교회(敎會)의 모든 직분(職分)과 성령(聖靈)의 은사(恩賜)들은 이 목적(目的)을 위해 주어진다.

나무가 영양분(營養分)과 수분(水分)을 얻고자 땅에 뿌리를 내리듯이, 성장(成長)하는 하나님의 자녀는 생명력(生命力)과 자양분(滋養分)을 얻고자 그리스도에게 다다른다. 그리스도와의 연합(聯合)은 성장(成長)하는 요인(要因)인 동시(同時)에 결과(結果)이다. 그분은 교회의 머리인 동시에 각 사람의 머리가 된다.(고전 11:3)….

상합(相合)하여. 견고(堅固)함과 내구력(耐久力)을 보증(保證)하는 지체상호간(肢體相互間)의 지속적(持續的)인 연결(連結)로 복잡(複雜)한 구조(構造)는 머리에서 은혜(恩惠)를 공급(供給)받으므로 자라간다. 각(各) 지체(肢體). 중심개념(中心槪念)은 머리와 연결(連結)됨으로 이뤄지는 상호간(相互間)의 응집(凝集)과 공동성장(共同成長)이다..

교회(敎會)로 말미암아.
“교회를 통해”, “교회를 매개(媒介)로.” 마치 회복(回復)된 환자(患者)가 의사(醫師)의 기술(技術)을 본 증인(證人)이듯이, 교회는 하나님의 지혜(智慧)에 대한 활력(活力) 넘치는 실연(實演)이 되도록 계획(計劃)된 것이었다. 사실(事實)상 교회는 하나님의 능력(能力)과 지혜(智慧)의 대리자(代理者)라기보다는 오히려 증인(證人)이나 증거(證據)라고 말할 수 있다. 모든 교인의 은사(恩賜)가 다 발휘(發揮)될 때 교회는 가장 잘 증거(證據)할 수 있다. (엡 3:10, 재림교주석)

각 지체(肢體)의 분량(分量)대로 역사(役事)하여 그 몸을 자라게 하며 사랑 안에서 스스로 세우느니라. ‘각 지체’는 교회의 다양성(多樣性)을 지시(指示)하는 것으로, 본 절(節)은 ‘각 지체(肢體)’가 몸 전체(全體)를 위해서 자신만이 갖고있는 독특(獨特)한 역할(役割)을 수행(隨行)해야 함을 시사(示唆)한다. 특히 ‘스스로’는 비록 머리이신 그리스도가 성장(成長)의 근원(根源)이 된다고 할지라도 교회의 성장을 위해서 교회의 자발적(自發的)인 참여(參與)를 필요로 함을 말한다(Lincoln). 각 지체가 유기적(有機的)으로 잘 연합(聯合)함으로 몸은 성장(成長)할 수 있다(Wood). 한편 각 지체를 하나로 묶을 수 있는 비밀(秘密)의 열쇠는 ‘그리스도의 사랑’으로(고후 5:14) 사랑은 교회성장(敎會成長)의 척도(尺度)이다. 따라서 그리스도인들은 강권(强勸)하시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통해서 그리스도의 분량(分量)에까지 자랄 수 있다(Bruce).” (엡 4:11~16, 만나주석)  <아멘>

최문규님의 댓글

최문규 작성일

장로님
수준 높은 교과공부를 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잘 나누겠습니다
은혜 받았습니다
행복한 안식일 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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