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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기 제2과-닥쳐오는 시련 - (핵심 Q & A =부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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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이봉주 작성일22-07-05 02:41 조회1,383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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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2과 닥쳐오는 시련(試鍊)

                                         (2022년07월09일 (안)/일몰 : 17시56분)


<서언(緖言)>

인생(人生)이란 현재(現在)도 미래(未來)에도 지속적(持續的)으로 시련(試鍊)이 닥쳐온다. 즉 예상(豫想)치 못한 일들로 사탄이 주는 시련(試鍊)이 있고 죄(罪)로 인한 시련(試鍊)이 있고 우리를 정결(淨潔)케 하시고자 하는 시련(試鍊)도 있고, 성숙(成熟)하도록 하기 위한 시련(試鍊)들이 우리 앞에 전개(展開)된다. 이러한 시련(試鍊)들을 잘 극복(克服)하기 위해서 이번 제3기(期)의 안식일학교(安息日學校) 교과공부(敎科工夫)를 통하여 알차게 확실(確實)하게 시련(試鍊)을 극복(克服)할 수 있는 지혜(智慧)를 찾으시기 바랍니다.


<왜 성령(聖靈)인가요?>

길이 막히면 어떡해야 할까요?

길을 막는 것이 사탄일수도 있고, 성령(聖靈)일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길이 막혔을 때 먼저 사탄의 방해(妨害)인지, 

성령(聖靈)의 도움인지를 분별(分別)해야 합니다.

그리고 사탄이 방해(妨害)한 것이면 뚫고 나아가야 합니다. 

그러나 성령(聖靈)께서 막는 것이라면 바울처럼 순종(順從)해야 합니다. 

이때 순종(順從)은 포기(抛棄)하고 단념(斷念)하는 것입니다. <아멘>


(07월03일 (日)  <예상(豫想)치 못한 일>


(Q)~(벧전 4:12~19) 베드로가 고난(苦難)에 대해 권면(勸勉)하면서 전(傳)하고자 하는 기별(寄別)은 무엇입니까?


(A)~○. 고통(苦痛)과 시험(試驗)은 예상(豫想)치 못한 모습(模襲)으로 찾아온다. 베드로는 핍박(逼迫)과 고통(苦痛)당하는 자들에 대하여 “이상(異常)한 일”이나 “낮선 일”이라 하여  함정(陷穽)에 빠지지 말라고 권면(勸勉)하면서 많은 사람들이 그리스도인 삶에 대한 단순(單純)한 견해(見解)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선(善)한 하나님 편(便)과, 악(惡)한 사단의 편(便)이 있음을 알고 있다. 이는 모든 고난(苦難) 가운데에서 하나님께서 지켜주시며 돌보아 주시기 때문에 그 고난(苦難) 가운데에서 성화(聖化)의 과정(過程)을 거쳐 구원(救援)에 이르게 되기 때문이다.


(07월04일 (月)  <사탄이 주는 시련(試鍊)들>


(Q)~(벧전 5:10) 고난(苦難)당하는 이들을 위(爲)한 하나님의 약속(約束)은 무엇입니까?


(A)~○. 사탄의 하는 일은  끊임없이 그리스도인들을 공격(攻擊)하고 시련(試鍊)을 가져다주는 일로 "삼킬 자를 찾아 두루 다니는 것"이다. 그의 계획(計劃)은 영혼(靈魂)을 파멸(破滅)시키며 삼키는 일이다. 그리고 이러한 목적(目的)을 달성(達成)하기 위해서는 지치는 일도 없고 휴식(休息)도 취(取)하지 않는다. 그들은 영혼(靈魂) 파멸(破滅)을 위하여 올가미를 씌울 자를 찾아내려고 밤이나 낮이나 두루 다닌다.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그리스도께 붙어 있다면 능(能)히 사탄을 대적(對敵)할 수 있다.


(07월05일 (火)  <죄(罪)로 인(因)한 시련(試鍊)>


(Q)~(롬 1:21~32) 바울은 사람이 죄에 빠지는 과정(過程)과 그 결과(結果)에 대해 어떻게 묘사(描寫)하고 있습니까?


(A)~○. 하나님께서 우리 인간(人間)들에게 자유의지(自由意志)를 주셨다. 그러므로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여 상실(喪失)한 마음대로 버려두셔서 (롬1:24)에 ‘내버려 두셨다’는 표현(表現)에서 행위(行爲)의 적극적(積極的)인 주체(主體)가 하나님이 아니라 오히려 “내버림”을 받는 사람이다. 하나님의 개입(介入)을 사람이 적극적으로 싫어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간섭(干涉)하실 수 없으셨다는 말이다.  그러므로 모든 일에는 원인(原因)과 경과(經過)와 결과(結果)가 있게 마련이다. 수많은 고통(苦痛)과 고난(苦難)은 죄의 결과로 이르러 온 것이다 이는 스스로 자초(自招)한 것이지 하나님 탓으로 돌려서는 안 되는 것이다.


(07월06일 (水)  <정결(淨潔)케 하는 시련(試鍊)> 


(Q)~(렘 9:7~16)  하나님께서 유다와 예루살렘을 녹이고 연단(鍊鍛)하신다고 한 이유(理由)는 무엇입니까?


(A)~○. (렘9:7)에서 (내가…그들을 녹이고) 불순물(不純物)을 제거(除去)하기 위해서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고난(苦難)의 풀무 속에 넣으실 것이다. 즉 우리에게서 죄를 제거(除去)하시기 위해 하나님께서 말씀의 칼을 대실 때 우리는 고통(苦痛)을 느끼지 않을 수 없으나 그것은 우리를 정결(淨潔)케 하는 과정(過程)임을 기억(記憶)하고 감사(感謝)해야 할 것이다.


(07월07일 (木)  <성숙(成熟)을 위(爲)한 시련(試鍊)> 


(Q)~(고린도후서 12:7~10)에서 바울은 자신에게 허락(許諾)된 가시를 어떻게 대하고 있습니까?


(A)~○. 나무나 정원(庭園)에 수목(樹木)들에 전정(剪定)을 하는 것은 똑 같이 나무를 자르는 것이다.

그런데 나무의 가능성(可能性)을 내다볼 때에의 가지치기는 풍성(豊盛)한 열매를 맺기 위(爲)함이고, 더 이상 가꾸지 않을 때 에는 잘라내 버린다. 이와 같이 하나님께서 때때로 고난(苦難)과 시험(試驗)을 통하여 우리를 가지치기 하고자 하시는 것은 우리를 성숙(成熟)시키시기 위(爲)함이라는 것을 배워 믿음 생활(生活)에 적용(適用)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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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미부록(末尾附錄)>


         제2과 닥쳐오는 시련(試鍊)                                        

(07월03일 (日)  <예상(豫想)치 못한 일>


(Q)~(벧전 4:12~19) 베드로가 고난(苦難)에 대해 권면(勸勉)하면서 전(傳)하고자 하는 기별(寄別)은 무엇입니까?


(A)~○. 고통(苦痛)과 시험(試驗)은 예상(豫想)치 못한 모습(模襲)으로 찾아온다. 베드로는 핍박(逼迫)과 고통(苦痛)당하는 자들에 대하여 “이상(異常)한 일”이나 “낮선 일”이라 하여  함정(陷穽)에 빠지지 말라고 권면(勸勉)하면서 많은 사람들이 그리스도인 삶에 대한 단순(單純)한 견해(見解)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선(善)한 하나님 편(便)과, 악(惡)한 사단의 편(便)이 있음을 알고 있다. 그런데 너무나 쉽게 좋은 것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고 나쁜 것은 모두 사단에게 속한 것으로 분류(分類)해 버린다는 것에 대하여 그렇게 간단(簡單)한 것이 아니라 느낌만으로 판단(判斷)하지 말고, 고난(苦難)과 시험(試驗)이 내 자신의 욕심(慾心)과 욕망(慾望)으로 인한 것이 있고, 반면에 그리스도인들이 삶을 영위(營爲)하는 가운데 그리스도의 영광(榮光)을 위(爲)하고 그리스도인이라는 이름으로 인(因)해 찾아오는 많은 시련(試鍊)과 고난(苦難)을 겪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다. 이는 모든 고난(苦難) 가운데에서 하나님께서 지켜주시며 돌보아 주시기 때문에 그 고난(苦難) 가운데에서 성화(聖化)의 과정(過程)을 거쳐 구원(救援)에 이르게 되기 때문이다.


○. 우리들이 우리 자신의 죄와 어리석음 때문에 우리 자신에게 불러들인 고난(苦難)에는 위로(慰勞)함이 없다. 순교자(殉敎者)를 만드는 것은 고난(苦難)이 아니라 그 고난의 참된 동기(動機)가 순교자(殉敎者)를 만든다.


○. 고난(苦難)이 심(深)하고 극렬(極烈)하다 할지라도, 이는 그들을 단련(鍛鍊)하고자 함이지 결코 멸(滅)하고자 함이 아니다. 그들의 성실성(誠實性)과 강(强)함과 인내(忍耐), 그리고 하나님을 신뢰(信賴)하는 도(道)를 시험(試驗)하고자 함이다. 반대(反對)로 그들은 고난(苦難) 중에서도 오히려 기뻐해야 한다. 그 이유(理由)는 그들의 고난(苦難)이 그리스도가 당(當)하신 고난으로 마땅히 일컬어질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이 고난은 같은 종류(種類)의 것이며, 동일(同一)한 이유로 그리스도가 고난을 받으셨다. 이 고난이 우리로 하여금 그리스도와 일치(一致)하는 마음을 갖게 한다. 그리스도는 고난으로 고통(苦痛)을 당(當)하셨다. 그리고 우리의 연약(軟弱)함을 체험(體驗)하셨다. 만일 우리가 그의 고난에 참예하는 자가 된다면 또한 우리들은 그의 영광(榮光)에 참예하는 자가 될 것이며 그의 원수(怨讐)들을 심판(審判)하고 그의 신실(信實)한 종들에게 면류관(冕旒冠)을 씌우기 위하여 재림(再臨)하실 때 큰 기쁨으로 그를 영접(迎接)하게 될 것이다(살후 1:7). (벧전 4:12~19, 매튜헨리)


○. 그리스도인들에게 다가오는 시련(試鍊)은 ‘불 시험’으로 묘사(描寫)된다. 

‘시련(試鍊)하려고’에 해당(該當)하는 헬라어 ‘프로스 페이라스몬’은 진위(眞僞)를 가리는 것으로 유혹(誘惑)이 아니라 시험(test)을 의미(意味)한다. 이 ‘시련(試鍊)’은 본 절(節)에서 ‘불 시험’과 동일(同一)시 되고 있다. 

‘불 시험’의 헬라어 ‘테 엔 휘민 퓌로세이’은 문자적(文字的)으로 ‘너희 중에 타고 있는 불’이라는 의미(意味)이다. 

이는 ‘고통(苦痛)스럽게 타는 불’로서 소돔성을 파괴(破壞)시킬 때의 불로 묘사되며(Josephus) 또한 종말(終末)에 ‘바벨론 성(城)’을 멸망(滅亡)시킬 불로 나타나기도 한다(계 18:9, 18). 


○. ‘퓌로세이’는 순수(純粹)한 금속(金屬)을 얻기 위해 제련(製鍊)하는 것으로서 그리스도인에게 주어지는 시련이 불같이 뜨거울 것을 상징(象徵)한다(시 66:10, 잠27:21, 계 3:18, Stibbs, Blum).


○.  이러한 시련(試鍊)을 끝까지 믿음으로써 견디는 자는 저주(詛呪)로부터 구원(救援)을 얻을 것이다. 한편 ‘오는’에 해당(該當)하는 헬라어 ‘기노메 네’은 현재분사로 베드로나 수신자(受信者)가 이미 경험(經驗)했고 또한 현재에도 고난(苦難)을 당하고 있으며 장차(將次) 계속 다가올 시험임을 시사(示唆)한다.


○. 그리스도인들은 자신들 앞에 다가오는 시련(試鍊)을 엄청난 충격(衝擊)으로 받아들일 이유가 없다. 그 시련(試鍊)은 하나님께서 허락(許諾)하신 것으로 그 고난(苦難)의 동참(同參)을 통해 하나님께서 기쁨과 영광(榮光)에 참예케 하실 것이기 때문이다(Stibbs, Blum).


○. 고난(苦難)을 당하는 것은 힘들고 어려운 일이지만 그리스도의 이름을 위한 것이라면 그것은 가치(價値)있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고난’은 ‘그리스도를 위한 고난’을 말하는 것으로 그리스도를 믿기 때문에 겪어야 하는 필연적(必然的)인 여러 가지 핍박(逼迫)과 치욕(恥辱) 등을 의미한다. 이러한 것들은 그리스도가 십자가(十字架)의 고난을 겪을 때 와같이 그리스도의 고난에 함께 참여(參與)하는 것이 된다. 그러나 그것은 영광(榮光)의 승리(勝利)가 기다리고 있으므로 즐거워할 수 있는 이유가 된다. ‘즐거워하라’의 헬라어 ‘카이레테’은 현재분사로 그 즐거움이 일순간적(一瞬間的)인 것이 아니라 지속적(持續的)인 것임을 시사(示唆)한다. 그리스도인들은 그리스도를 위해 고난(苦難)을 받을 때 후에 주어질 영광(榮光)의 승리(勝利)를 바라보며 항상(恒常) 어떤 조건(條件)하에서도 즐거워해야 한다.


○. 그리스도인이 받는 고난(苦難)은 ‘그리스도의 이름’때문에 받는 것이어야 하며 세상에서의 잘못 때문에 고난(苦難)을 받아서는 안 된다. 그리스도인이 자신의 악행(惡行)으로 받는 고난(苦難)은 결코 그리스도의 영광(榮光)이 아니며 그 악행(惡行) 자체는 형벌(刑罰)을 받아 마땅한 것이므로 그리스도의 고난(苦難)과는 별개(別個)의 것이다. 여기서 ‘ … 로’(호스)는 앞의 세 가지 범죄(犯罪)와 다음의 ‘남의 일을 간섭(干涉)하는 자’ 사이를 분리(分離)하여 ‘남의 일을 간섭(干涉)하는 자’를 강조(强調)하고 있다. ‘남의 일을 간섭(干涉)하는 자’는 ‘남의 것을 탐(貪)내는 사람’이나(Deismann), ‘금지(禁止)된 일하는 자’(Bigg) 혹은 ‘밀고자(密告者)’(NIV)를 가리킨다. 이러한 자들이 받는 고난(苦難)은 그리스도의 영광(榮光)을 위한 것도, 그리스도의 이름 때문에 받는 것도 아니다. 그러므로 이런 일로 인해 고난(苦難)을 받지 않도록 주의(注意)해야 한다.


○. 하나님과 동행(同行)하는 것이 힘들고 어려운 일이 될 수도 있고, 사단을 따르는 것이 커다란 보상(報償)을 받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지만, 우리에게 닥치는 시련(試鍊)을 이상(異常)하게 생각지 말아야 할 것은 이 세상에서는 의인(義人)이 고난(苦難)을 당(當)하고 악인(惡人)이 번영(繁榮)하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기 때문에 이번 교과(敎科)를 통해서 올바른 고난(苦難)에 대한 정의(定義)를 배워야 축복이라 할 것이다.


(07월04일 (月)  <사탄이 주는 시련(試鍊)들>


(Q)~(벧전 5:10) 고난(苦難)당하는 이들을 위(爲)한 하나님의 약속(約束)은 무엇입니까?


(A)~○. 사탄의 하는 일은  끊임없이 그리스도인들을 공격(攻擊)하고 시련(試鍊)을 가져다주는 일로 "삼킬 자를 찾아 두루 다니는 것"이다. 그의 계획(計劃)은 영혼(靈魂)을 파멸(破滅)시키며 삼키는 일이다. 그리고 이러한 목적(目的)을 달성(達成)하기 위해서는 지치는 일도 없고 휴식(休息)도 취(取)하지 않는다. 그들은 영혼(靈魂) 파멸(破滅)을 위하여 올가미를 씌울 자를 찾아내려고 밤이나 낮이나 두루 다닌다.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그리스도께 붙어 있다면 능(能)히 사탄을 대적(對敵)할 수 있다.


○. 유혹자(誘惑者)들의 계략(計略)이나 원수(怨讐)들의 핍박(逼迫)에도 불구하고 복음(福音)을 받은 사람들로서는 믿음에 굳게 서야 할 것이라고 정중하게 권면(勸勉)한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영생(永生)을 상속(相續)받은 사람은 이 세상에서 반드시 고난(苦難)을 받아야 하지만 그 기간(期間)은 잠간 동안이다.


○. 은혜(恩惠) 가운데서 선(善)한 백성(百姓)을 강(强)하게 하시고 인내(忍耐)하게 하시고 안전(安全)하게 한다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어서 하나님의 은혜(恩惠)가 아니면 성취(成就)하기 어려운 일이며, 쉬지 않고 그의 약속(約束)을 의존(依存)하고 기도(祈禱)함으로써만이 가능(可能)하다.


○. 그것은 그들이 고난(苦難)을 피(避)하게 해줍시사 라고기도(祈禱)하는 것이 아니라, 고난(苦難)이 닥친다해도 그것은 잠간(暫間)이며 견딜만한 것이다. "잠간 고난(苦難)을 당한 후에" 하나님이 그들을 회복(回復)시킬 것이 되기를 바라는 것이다. 그것은 그가 믿음이 있는가 흔들어 보는 것이며, 약(弱)한 자를 강(强)하게 하고 반석(磐石)되시는 그리스도 위에 서서 영원(永遠)히 견고(堅固)하게 하실 것이라고 바라고 기도(祈禱)했다. (벧전 5:8~11, 매튜헨리)


○. 우리가 지금 천국(天國)으로 가는 참된 길에 있다는 강(强)한 신념(信念)을 가지는 것은 우리를 신앙(信仰)에 굳게 서게 하고 그곳을 추구(追求)하게 하는 원동력(原動力)이 될 것이다.


○. 이것은 구원(救援)에 대한 교리(敎理)를 확증(確證)시키고 강조(强調)하기 위하여 여기에 기록(記錄)했다. 하나님의 은혜(恩惠)에 대한 이야기는 선지자(先知者)들에 의하여 예언(豫言)된 것이지만 그리스도에 의하여 완성(完成)되었다.


○. 세상 각처(各處)에서 언제나 일어났던 대 환난(患難)들은 모두 사탄에 의하여 발생(發生)된 영적(靈的) 싸움이었다. 사탄은 고소(告訴)자이며 속이는 자일뿐만 아니라 대 박해자(大 迫害者)다. 그는 사람을 악(惡)의 도구(道具)로 사용하며 그리스도와 그의 백성을 대적(對敵)하는 전쟁(戰爭)에서 가장 큰 원수(怨讐)가 된다. "내가 너를 여자와 원수(怨讐)가 되게 하고 너의 후손(後孫)도 여자의 후손(後孫)과 원수(怨讐)가 되게 하리니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傷)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傷)하게 할 것이니라"(창 3:15). 이는 마귀(魔鬼)가 자기의 때가 얼마 못 된 줄을 앎으로 크게 분(憤)내어 너희에게 내려갔음이라"(계 12:12)


○. "믿음으로 굳게 서서" 이를 대적(對敵)하라. 사탄의 과녁은 우리의 믿음이다. 만일 그가 우리의 믿음을 탈취(奪取)한다면 우리는 배교자(背敎者)가 되고 말 것이다. 사탄은 우리의 영혼을 파멸(破滅)시키면 그의 목표(目標)가 달성(達成)되는 것임을 잘 알고 있다. 그러므로 우리의 믿음을 파괴(破壞)하려고 핍박(逼迫)하며 세상의 주권자(主權者)로 군림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믿음으로 굳게 서서 이런 시험(試驗)과 유혹(誘惑)을 물리쳐야 한다.


(07월05일 (火)  <죄(罪)로 인(因)한 시련(試鍊)>


(Q)~(롬 1:21~32) 바울은 사람이 죄에 빠지는 과정(過程)과 그 결과(結果)에 대해 어떻게 묘사(描寫)하고 있습니까?


(A)~○. 하나님께서 우리 인간(人間)들에게 자유의지(自由意志)를 주셨다. 그러므로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여 상실(喪失)한 마음대로 버려두셔서 (롬1:24)에 ‘내버려 두셨다’는 표현(表現)에서 행위(行爲)의 적극적(積極的)인 주체(主體)가 하나님이 아니라 오히려 “내버림”을 받는 사람이다. 하나님의 개입(介入)을 사람이 적극적으로 싫어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간섭(干涉)하실 수 없으셨다는 말이다. 하나님은 강제(强制)하지 않으시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간절(懇切)한 호소(呼訴)를 거절(拒絶)하고 죄악(罪惡)으로 달려가는 장성(長成)한 자녀를 바라보는 부모(父母)의 안타까운 심정(心情)이 포함(包含)된 것이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그냥 두셨다는 것은 곧 멸망(滅亡)을 의미(意味)하기 때문에 그것은 자유(自由)가 아니라 가장 두려운 심판(審判)이요 무서운 비극(悲劇)이다. 그러므로 모든 일에는 원인(原因)과 경과(經過)와 결과(結果)가 있게 마련이다. 수많은 고통(苦痛)과 고난(苦難)은 죄의 결과로 이르러 온 것이다 이는 스스로 자초(自招)한 것이지 하나님 탓으로 돌려서는 안 되는 것이다.


○. 죄는, 인간에게 대하여 병균(病菌)과 같이 신속(迅速)한 번식성(繁殖性)을 가지고 인간을 아주 점령(占領)해 버리고 또 살해(殺害)한다. 몸으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지 않는 죄(21-13)는, 번식(繁殖)하여 무서운 죄의 수렁에 이르렀으니 그것을 (롬1:29-32에서 볼 수 있다.


○. 인생은, 하나님을 아는 혹종의 의식(意識)을 가졌다고 할 수 있다. 그것은, 인간이 하나님 없이 살 수 없는 의식(意識) 그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을 바로 알고 찾는 자는 드물다. 그들은 참 하나님 아닌 자 곧 피조물(被造物)을 하나님으로 잘못 알고 섬기니, 이는 하나님을 욕(辱)되게 하는 일이요 영화(榮華)롭게 함이 아니다. 이는 마치 귀머거리 소경된 어린 아이가 그의 친아버지를 바로 알지 못하고 어떤 악한(惡漢)을 가리켜 자기 아버지라고 할 때에 그 아버지에게 무쌍한 욕(辱)이 됨과 같다. (롬 1:21~32, 만나주석)


○. 로마서 1장에서 바울은 이방인(異邦人)들이 모두 죄인(罪人)임을 보이고 그들의 악(惡)의 목록(目錄)을 제시(提示)한다(롬 1:21-32). 그것을 보고 유대인 청중(聽衆)들은 그에게 박수(拍手)를 보냈을 것이지만 이제 바울은 로마서 2장에서 유대인들 역시(亦是) 죄인(罪人)임을 지적(指摘)한다. 그리고 로마서 3장에서 그는 모든 사람이 다 죄인이므로 우리를 위한 그리스도의 희생(犧牲)에 나타난 하나님의 은혜(恩惠)에 의존(依存)돼 있다고 결론(結論)짓는다. 

로마서 6장에서 바울은 우리 모두가 죄의 종이었으나 예수로 말미암아 죄에서 해방(解放)될 수 있다는 사실(事實)을 더 상세(詳細)히 설명(說明)한다(롬6:18). 


○. 바울의 논증(論證)은 A.D. 1세기의 사람들에게만 국한(局限)되지 않고, 모든 시대(時代)의 모든 사람을 포괄(包括)한다. 


○. 하나님의 노(怒)는 인간의 악행(惡行)을 그대로 버려두심이다. 그로솨이데(F,W. Grosheide)는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죄악이 죄악(罪惡)을 낳았다. 그 이유는, 하나님께서 그들을 내버리셨기 때문이다. 그것은, 신앙(信仰) 없는 세계에 나타난 하나님의 공의(公義)의 결과(結果)이다. 그것이 이교(異敎)가 가져오는 표본(標本)이니, 곧 우상주의(偶像主義)가 무서운 죄악(罪惡)들을 동반(同伴)함이다. 이렇게 하나님의 심판(審判)은 자연 심판(審判)으로 시작 된다”라고 하였다. 


○. 종교(宗敎)를 바로 가지지 못한 것이 모든 죄악(罪惡)의 근원(根源)이 된다. 하나님에게 버림받은 때부터 이렇게 인간은 죄를 범(犯)하게 되었다. 그러므로 리델보스(Ridderbos)는 말하기를, “죄악은 세력(勢力)인데, 그 세력 앞에서 인간은 하나님으로 말미암아서만 보호(保護)를 받는다”라고 하였다. 하나님에게 버림받은 자들은 음행(淫行)으로 떨어진다. 그것은, 너희 몸은 하나님의 전(殿)인데(고전 6:19), 하나님이 계신 동안은 그 몸이 깨끗할 수 있으나 하나님이 떠나시는 그 때부터는 불결(不潔)해질 수밖에 없다.


(07월06일 (水)  <정결(淨潔)케 하는 시련(試鍊)> 


(Q)~(렘 9:7~16)  하나님께서 유다와 예루살렘을 녹이고 연단(鍊鍛)하신다고 한 이유(理由)는 무엇입니까?


(A)~○. (렘9:7)에서 (내가…그들을 녹이고) 불순물(不純物)을 제거(除去)하기 위해서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고난(苦難)의 풀무 속에 넣으실 것이다. 즉 우리에게서 죄를 제거(除去)하시기 위해 하나님께서 말씀의 칼을 대실 때 우리는 고통(苦痛)을 느끼지 않을 수 없으나 그것은 우리를 정결(淨潔)케 하는 과정(過程)임을 기억(記憶)하고 감사(感謝)해야 할 것이다.


○. 형벌(刑罰)의 목적(目的)은 파멸(破滅)에 있지 않고 정화(淨化)에 있었다. (참조: 슥 13:9; 말 3:3).  (참조 렘 6:27~30 주석; 사 48:10).  (렘 9:7~16, 재림교주석)


○. (렘9:7) “그들을 녹이고 연단(鍊鍛)하리라” 여기서는 이전에 사용되었던 예화(例話)로 다시 되돌아가고 있다. 이미 유다인들은 제련(製鍊)되지 않는 불량(不良) 금속(金屬)에 비유(譬喩)된 바 있다(렘6:27-30).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기서는 그들을 다시 녹여서 유용(有用)하게 만들어 보시겠다는 하나님의 굳은 의지(意志)가 표명(表明)된다. 택(擇)한 백성을 끝까지 버리지 않으시는 하나님의 무한(無限)하신 자비(慈悲)를 엿보게 한다.


○. 하나님의 연단(鍊鍛)과 시험(試驗)에는 단호한 행동(行動)이 수반(隨伴)된다. 그러므로 연단(鍊鍛)과 시험(試驗)이 고난(苦難)으로 느껴지는 이유(理由) 세 가지가 있다.

(첫째). 하나님께서 우리가 처(處)한 상황(狀況)을 통해 우리의 죄를 주목(注目) 하실 때 우리는 고통(苦痛)을 느낀다. (둘째). 우리 앞에 명백(明白)이 드러난 죄로 인하여 슬픔을 느낄 때 우리는 괴로움을 경험(經驗)한다. (셋째). 우리가 새로운 삶을 살려고 노력(努力)할 때 우리는 고통(苦痛)을 경험(經驗)하게 된다. 


(07월07일 (木)  <성숙(成熟)을 위(爲)한 시련(試鍊)> 


(Q)~(고린도후서 12:7~10)에서 바울은 자신에게 허락(許諾)된 가시를 어떻게 대하고 있습니까?


(A)~○. 나무나 정원(庭園)에 수목(樹木)들에 전정(剪定)을 하는 것은 똑 같이 나무를 자르는 것이다.

그런데 나무의 가능성(可能性)을 내다볼 때에의 가지치기는 풍성(豊盛)한 열매를 맺기 위(爲)함이고, 더 이상 가꾸지 않을 때 에는 잘라내 버린다. 이와 같이 하나님께서 때때로 고난(苦難)과 시험(試驗)을 통하여 우리를 가지치기 하고자 하시는 것은 우리를 성숙(成熟)시키시기 위(爲)함이라는 것을 배워 믿음 생활(生活)에 적용(適用)하자. 


○. (고후12:7)에서 바울의 고통(苦痛)은 제거(除去)되지 않음. (행 9:8~9참조)

바울은 육체적(肉體的)인 고통(苦痛)이 있었다. 그의 시력(視力)이 나쁜 것이었다. 그는 열렬한 기도로 고칠 수 있으리라고 생각하였지만 주님이 가지신 목적은 따로 있었다. 그리고 그분은 바울에게 말씀하시기를 이 문제로 내게 더 이상 말하지 말라. 내 은혜가 네게 족(滿足)하도다고 하셨다. (편지 207, 1899). (고후 12:7, 화잇주석)


○. 하나님은 바울이 자고(自高)하지 않도록 보호(保護)하는 것이 적절(適切)하다고 보셨다.(고후 12:7, 만나주석)


○. 육체(肉體)에. 연약(軟弱)함은 육체적(肉體的)인 것이었지 영적(靈的) 혹은 정신적(精神的)인 것은 아니었다. 그것은 바울에게 곤란(困難)과 불편(不便)을 주는 것임은 물론이요 그를 매우 힘들게 하는 것이었음에 틀림없다. 그것은 시력(視力)에 영향(影響)을 준 고통(苦痛)이 분명(分明)했던 것 같다.(갈 4:13~15; 참조 EGW, Supplementary Material, on 고후 12:7~9). (고후 12:7, 만나주석)


○. 고통(苦痛)은 사단에게 속한 것이지만 하나님의 허락(許諾)이 있어야 한다. 욥이 그러했다(욥 1:6~12; 2:7; 참조 눅 13:16). 육체(肉體)에 고통(苦痛)과 질병(疾病)을 주는 것은 사단의 본성(本性)과 사업(事業)에 속한 것이다.


○. 사도바울은 특별히 세 번에(고후12:8) 걸쳐 바울은 이 비참(悲慘)한 고통(苦痛)을 사라지게 해 달라고 하나님에게 간구(懇求)했다. 하지만 대답(對答)이 분명(分明)해지자 그는 그것을 자신을 위한 하나님의 뜻으로 받아들였다. 그리스도가 자신이 마셔야 할 잔을 지나가게 해 달라고 세 번 기도(祈禱)하신 뒤, 그것을 하나님의 뜻으로 받아들이신 사건(事件). (마 26:39~44)과 비교(比較)하라.


○. 바울은 기도(祈禱)를 통해 자신의 고통(苦痛)에서 벗어나지는 못했지만, 그것을 견딜 수 있는 은혜(恩惠)는 받았다. 바울은 틀림없이 자신의 사역(使役)에 장애(障碍)가 된다는 이유를 들며 연약(軟弱)함에서 벗어나게 해 달라고 호소(呼訴)했을 것이다. 그리스도는 풍성(豊盛)한 은혜(恩惠)를 내려 그의 필요를 넘치게 채워 주신다. 하나님은 환경(環境)을 바꾸거나 어려움에서 해방(解放)시켜 주겠다고 결코 약속(約束)하시지 않는다. 그분에게 육체(肉體)의 연약(軟弱)함과 다루기 힘든 환경(環境)은 이차적(二次的)인 관심사(關心事)이다. 인내(忍耐)할 수 있는 내면(內面)의 힘은 인생의 외면적(外面的)인 곤란(困難)을 극복(克服)하는 능력보다 훨씬 더 고차원적(高次元的)인 하나님의 은혜(恩惠)를 표현(表現)한다. 외견상(外見上) 찢기고 초췌(憔悴)해지며, 지치고 거의 쇠약(衰弱)해지더라도, 마음속으로 그리스도 안에서 완전(完全)한 평안(平安)을 누리는 것이 사람에게 주어진 특권(特權)이다. (참조 사 26:3, 4 주석).


○. 그리스도인의 역설(逆說)은 약(弱)한 것이 강(强)한 것으로 변화(變化)될 수 있다는 것이다. 패배(敗北)는 언제나 승리(勝利)로 바뀔 수 있다. 진정(眞正)한 품성(稟性)의 힘은 자아(自我)를 불신(不信)하고 하나님의 뜻에 굴복(屈伏)하는 연약(軟弱)함에서 나온다. 자신의 힘이 강(强)한 사람은 하나님을 의지(依支)하는 대신에 자아를 신뢰(信賴)하는 경향(傾向)이 있기에 자주 하나님의 은혜(恩惠)가 필요(必要)함을 깨닫지 못한다. 성경의 위대(偉大)한 영웅(英雄)들, 노아, 아브라함, 모세, 엘리야, 다니엘과 같은 사람들도 동일(同一)한 교훈(敎訓)을 배웠다. 자신의 연약(軟弱)함과 불안정(不安定)함을 복(福)된 하나님의 뜻에 완전(完全)히 맡긴 자들만이 진정한 능력(能力)을 소유(所有)하는 것이 무엇인지 안다.” (고후 12:7~10, 재림교주석)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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