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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10 과 하나님의 사람: 순종은 선택의 문제가 아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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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조춘호 작성일10-11-26 11:25 조회3,567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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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10 과 하나님의 사람: 순종은 선택의 문제가 아님
12월 4일 일몰:오후 5시 14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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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께서 악행을 하더라도 방치해 두시는 것만큼 불행한 일은 없다. 그것을 모르는 인생들은 점점 더 담대히 악행을 저지른다. 하나님께서는 어떤 사람에 대해서는 악한 행동을 하여도 즉각적으로 징계를 내리시지 않는 경우가 있다. 어떤 사람은 정욕대로 더러움에 내어 버려 두시고(롬 1:24), 어떤 사람은 부끄러운 욕심에 내어 버려두시기도 하며(롬 1:26), 또 어떤 사람은 상실한 마음대로 내어 버려두신다(롬 1:28). 그러나 분명한 것은 저지른 악행에 대해 책임을 져야 할 때가 반드시 온다는 사실이다. 마 13:28에 보면 종이 주인에게 말하기를 밭에 곡식보다 더 큰 저 가라지를 뽑으시렵니까? 하니까, 주인이 종에게 말하기를 “추수 때까지 내버려두어라”라고 했다. 불의한 자들이 불의한 방법으로 잘사는 이유는 하나님의 공의에 문제가 있어서가 아니고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매 그 상실한 마음대로 내버려두시므로 멸망하게 하시는 것이다. 부모가 그 자녀에게서 간섭을 포기할 때 그 자녀는 그 시간부터 자유자가 되는 것 같지만 실은 그 시간부터 방탕의 길로 달려가게 되는 것이다. 아름다운 화단을 망치는 가장 좋은 방법은, 발로 밟거나 꽃나무를 모두 꺾어 버리거나 흙으로 덮어 버리는 것이 아니다. ‘가만히 내버려두는 것’이다. 가만히 내버려두면 잡초가 무성해지고 들쥐가 모여들어 망치게 된다. 하나님께서는 택하신 자녀에 대해서는 절대로 지속적으로 악행 하도록 방치하시지 않으신다. 그래서 성경은 하나님의 징계에 관해 많은 것을 교훈하고 있다.

기억절: “먼저 알 것은 경의 모든 예언은 사사로이 풀 것이 아니니 예언은 언제든지 사람의 뜻으로 낸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의 감동하심을 입은 사람들이 하나님께 받아 말한 것임이니라”(벧후 1:20~21).

안식일 오후 | 연구 범위 | 출 32장, 왕상 13:1~34, 단 5:13~17, 눅 16:13, 요 15:24, 딤후 4:3.

이번 주 우리는 구약에서 가장 기이한 이야기 중에 하나를 살펴보려고 한다. 이 이야기에는 변절한 왕, 음식을 거부하는 선지자, 깨진 달걀처럼 갈라진 제단이 등장한다. 게다가 가장 당혹스런 것은 거짓말하는 늙은 선지자와 사람을 차별하는 사자도 나온다는 것이다. 이 이야기는 분열 왕국 첫해, 정치적으로나 종교적으로 긴장감이 팽배한 시점을 배경으로 한다. 여로보암의 지도하에 이스라엘의 열 개 지파는 다윗 왕국의 상속자요, 솔로몬의 아들인 르호보암에게서 분리되었다. 전운이 감돌고 정국이 불안정한 이런 변화의 시기에 하나님은 여로보암 왕에게 그분의 선지자를 보내어 북방 왕국에서 행해지는 우상 숭배에 대하여 경고의 기별을 전하게 하셨다.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이 선지자에 관한 이야기는 하나님께서 우리의 순종을 얼마나 중요하게 취급하시는지 말하고 있다. 비록 풀리지 않는 의문이 있는 것도 사실이지만, 이 이야기는 순종으로 이어지지 않는 복음의 진술은 필연적으로
거짓 복음이 될 수밖에 없음을 보여준다.

일요일 11월 28일 정치적인 종교

도입)
열왕기상 12장 20절에 [온 이스라엘이 여로보암이 돌아왔다 함을 듣고, 보내어 저를 공회로 청하였다가 온 이스라엘 왕을 삼았으니 유다 지파 외에는 다윗의 집을 좇는 자가 없으니라]고 했다. 이것은 정치적인 비극이다. 또 하나는 종교적 비극이었다. 여로보암은 정치적 분열에는 성공하였으나 저들 백성의 마음속에 남은 예루살렘 성전 예배의 길은 막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여로보암은 금송아지 두개를 만들어 벧엘과 단에 세우고, 이것이 너희를 애굽에서 인도하여 올린 너희 신(신)이라고 하였다(왕상12:25-33). 이렇게 하므로 여로보암은 북쪽 이스라엘의 온 백성의 마음을 하나님께로부터 갈라놓고 마는 무서운 죄를 범하고 말았다. 그는 우상 숭배의 길을 열어 놓은 악한 자의 표본이 되어 버렸다. 르호보암에게 노인들이 [.....왕이 만일 오늘날.....]하는 말로 권하고 있다. 이 말은 르호보암이 현재 처한 그때의 정치적 상황을 표현하는 말이다. 우선 권력의 변동이 일어난 때요 선왕 솔로몬의 정치적 라이벌이었던 여로보암이 애굽의 망명 상에서 백성들의 초청을 받아 다시 돌아온 때요 선왕 솔로몬의 정치적 공헌에 백성들이 피곤한 때요 더욱이 르호보암 주변에 그를 둘러싸고 있는 젊은 신하들의 무분별한 소행들이 염려스러웠던 때였다. 이렇게 노인들은 정치적 시류를 볼 수 있었던 자들이요, 읽을 수 있었던 자들이요, 앞을 내다 볼 수 있었던 자들이었다. 그러나 미래를 내다볼 수 있는 경험자들의 이야기를 듣지 않는 우매함이 르호보암에게 화를 자초하였다. 노인들의 충언은 백성의 참된 공복(公僕)이 되는 자문이었기 때문이다. 노인들이 준  교도 그 내용의 진리는 이것이었다. 낮아지고자 하면 높아지고, 높아지고자 하면 낮아진다고 하는 처세 원리였다. 하나님 나라의 정치적 원리는 항상 낮아지고자 하면, 높아지고, 높아지고자 하면 낮아진다는 것이다. 이것은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항상 처세하여야만 하는 처세 원리인 것이다. 하나님 나라의 모든 백성들에게 있어 가장 중요한 삶의 원칙은 낮아지고자 하는 자는 높아질 것이요, 높아지고자 하는 자는 낮아지리라는 주님의 말씀이다.

솔로몬이 죽고 난 뒤 그의 아들 르호보암의 판단 미숙으로 나라가 분리되어, 북방 이스라엘은 여로보암이, 남방 유다는 르호보암이 다스리게 되었다(왕상 12장 참조).
오래지 않아 여로보암은 매우 위태로운 방향으로 북방 왕조를 이끌었다. 그가 의도적으로 하나님 숭배에서 우상 숭배로 인도한 것은 아니었다. 대신 정치적 편리성에 따라 행동한 것이다. 그는 벧엘과 단, 두 곳을 예배의 중심지로 삼았다. 그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예배를 드리기 위해 예루살렘까지 여행할 필요가 없다고 주장했다. 금송아지는 가시적으로 하나님을 상기시키려는 도구였고, 일반 백성들에게 예배의 신뢰성을 심어주기 위한 것이었다. 그러나 정치적으로 출발했던 행보가 결국 십계명을 어기는 길로 인도한 셈이 되었다(출 20:4~5).

1. 출애굽기 32장의 금송아지 사건과 여로보암의 금송아지는 어떤 비슷한 점을 가지고 있습니까? 왕상 12:25~33 참조. 예배를 문화적 상황에 맞게 혁신하고 개선할 필요도 있겠지만 그럴 때마다 우리는 매우 주의해야 한다. 분명한 하나님의 명령으로부터 조금만 벗어나도 나중에는 걷잡을 수 없게 된다. 이스라엘의 경우 금송아지가 국가적 죄로 발전할 것이란 불 보듯 뻔한 일이었다. 그러나 문제는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여로보암에게 있어서 변화의 연쇄 반응은 불가피한 것이었다. 그는 북방 이스라엘에 거주하는 몇 레위인들에게 새롭게 세워진 신당의 제사장으로 일하도록 설득하였다. 그러나 그 위험성을 알았기 때문에 그들은 하나님의 명령을 어기지 않았다. 할 수 없이 여로보암은 일반 백성 가운데서 제사장을 삼았고, 그 결과 성직의 가치는 떨어지고 말았다(왕상 12:31~32). 여로보암의 종교적, 정치적 변화의 이야기는 초대 교회의 경고가 되어야 했다. 그러나 같은 일이 반복되었다. 하나님의 계명이 정치적인 이유와 사회적인 영향 때문에 변경되었다. 기독교와 유대교를 구분하기 위해 안식일 대신 일요일이 선택되었다. 이교도들을 위해 예배를 보다 시각적으로 만든다는 명분으로 성상숭배가 도입되었다. 이런 변화에 대한 압력은 결코 여로보암 시대나 기독교 초기에만 국한돼 있지않다. 오늘날 우리도 유사한 도전에 직면해 있다.

교훈: 분명한 하나님의 명령을 정치적인 명분과 문화적인 이유 때문에 변경시키기 시작하면 그 끝은 큰 배도로 이어지게 된다.

부가적용)
여로보암이 왕위에 오른 뒤 유월절과 칠칠절, 초막절 등 이스라엘의 명절 때가 되면 이스라엘 사람들이 모두 국경을 넘어 남쪽 예루살렘에 있는 성전으로 가는 것을 보자 혹시 민심이 이반이나 되지 않을까? 두렵고 못마땅했다. 그래서 그는 사람들이 남쪽으로 내려가지 않도록 단과 벧엘에 금송아지 우상을 만들고는 이것이 너희를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신 여호와라고 백성들을 우롱했다. 절기도 남 왕국의 본래 절기와 한 달씩 차이가 나게 해 비슷한 때 지키게 했고 레위인 뿐 아니라, 돈을 받고 아무나 제사장을 세워 이 가짜 여호와의 전의 제사장이 되게 했다. 그것은 표면상으로는 여호와를 위한 제단이라고 했지만 이세벨이 세웠던 바알 우상이나 아세라 목상과 다를 바 없고, 므낫세가 예루살렘 성 전 안에 세웠던  일월성신들을 위한 단이나 몰렉신을 위한 단과 조금도 다를 바 없었다. 하나님의 사자가 벧엘에 왔을 때 마침 여로보암 왕은 친히 제단에 분향하고 있었다. 제사장만 하게 되어 있는 제사분향을 손수 하는 데는 그의 교만이 숨겨져 있었다. 그리고  벧엘 우상 제단의 종교적 부흥을 일으키려는 그의 열심을 엿볼 수 있다. 여로보암이 이토록 우상의 제단을  만들고 종교를 부흥시키고자 노력한 것은 그 종교가 고귀해서나 그 신을 사랑해서가 아니라, 자신의 정권을 강화시키기 위해서요, 자신의 아성을 든든히 쌓기 위한 도구로 삼고자 함이었던 것이다. 여로보암 종교는 결코 여호와의 종교가 아니요, 그 제단이 십자가의 그리스도의 제단이 될 수 없었다. 그것은 여로보암 자신을 높이기 위한 자의적인 것이었을 뿐이다. 이 세상에 종교의 이름을 이용하여 인간의 권력을 두호하거나 혹은 인간 자신을 신격화하는 예가 얼마나 많았는가?  

월요일 11월 29일 하나님의 행보

도입)
이름도 가문도 나와 있지 않았던 이 무명의 선지자가 여로보암이 제사 드리는 그 제단에 앞에서, 여로보암의 죄를 지적하며, 그의 멸망을 선포한 그의 당당한 죄에 대한 질책은 이스라엘 백성과 유대백성들 가운데 오래도록 깊은 인상을 남겨주었다. 여로보암 왕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자기 수하에 묶어두기 위해 인간적 책략을 썼다. 벧엘과 단에 금송아지 우상제단을 건립하고 그것을 온 이스라엘이 여호와로 알고 섬기도록 인도했다. 이에 대해 하나님께서는 한 선지자를 보내어 그 잘못을 책망하며 벧엘의 제단이 멸망할 것을 예언했다. 그 징조로 단이 갈라져 그 제단의 재가 쏟아 졌고, 또한 선지자를 잡으라고 가리키던 왕의 손이 말라붙어 버렸다. 그러나 손을 쓸 수 없었던 여로보암이, 하나님께 긍휼을 구하였을 때 기도함으로 그의 손을 다시 치유시켜 주었다. 여로보암 왕은 그에게 벧엘 궁궐로 가서 자신과 함께 식사를 하자는 권유를 뿌리치고 자기의 갈 길로 갔다.

하나님은 여로보암의 정치적인 행보에 개입하셔서 자신의 음성을 듣게 하셨다. 그분은 유다로부터 한 선지자를 보내셨다. 신원 미상의 이 선지자는 여로보암이 신당을 봉헌하기 위해 막 제단 앞에 섰을 때 나타났다. 이스라엘에서 내로라하는 사람은 모두 그 자리에 있었을 것이다. 하나님은 기막힌 순간을 선택하셔서 행동하셨다. 결과는 극적이었다.

1. 왕상 13:1~6을 읽으십시오. 어떤 일이 벌어졌습니까? 이 이야기에서 즉시 떠오르는 교훈은 무엇입니까? 신원 미상의 이 선지자는 하나님의 사람이라고 불렸다. 이는 하나님의 사자로 인정받는 사람들에게 붙여지는 통상적인 칭호였다. 모세와 엘리야도 그렇게 불렸다(신 33:1, 왕상 17:18). 이 칭호는 구약의 위대한 선지자들을 떠올리게 만든다. 그래서 이 선지자에 대한 독자들의 기대감이 크다. 하나님의 사람은 목소리를 높여 여로보암의 제단을 저주하고 예언을 베풀었다. 예언 중 그는 요시야라는 특정 이름을 언급 하였다(왕상 13:2). 요시야는 거의 삼백 년 후에나 태어날 인물이었다. 페르시아 황제 고레스도 태어나기 이백 년 전에 이사야 선지자에 의하여 언급되었다(사 44:28, 45:1 참조).
하나님의 사람이 전한 기별의 요점은 무엇인가? 우선, 그 단은 불법이었다. 하나님의 사람은 요시야라는 다윗의 후손이 와서 이 단을 더럽힐 것이라고 예언하였다. 이것이 바로 여로보암이 가장 두려워하는 것이었다. 그가 예배장소를 따로 만든 것도 다윗의 보좌에 앉은 자에게 왕국을 뺏기지 않으려고 했던 것인데 말이다. 그 다음, 선지자는 이 예언의 확실성을 각인시키고 하나님의 능력을 즉각적으로 보여주었다. 모든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제단이 갈라졌다. 구경꾼들은 이를 보고 모세가 금송아지 숭배를 보고 분노하여 돌비를 깨뜨렸던 사건을 떠올렸다. 여로보암은 역사로부터 교훈을 얻지 못했던 것 같다. 그는 금송아지를 한 개도 아닌 두 개나 만들었다. 회개하기는커녕 그는 하나님의 사람을 가리켰다. 성경에서 가리키는 손, 지팡이, 홀은 언제나 심판을 상징한다. 여로보암은 그를 붙잡아 두기 원했다. 하나님의 뜻에 굴복하는 일은 그렇게 끝났다.

교훈: 어리석은 죄인은 하나님의 경고를 무시하지만, 지혜로운 사람은 잘못을 깨달은 즉시 회개하고, 하나님의 뜻에 굴복한다.

부가적용)
우리가 성경을 읽다보면 참으로 어리석은 사람들의 이야기를 하나님께서는 왜 성경에 기록으로 남겨 두셨을까? 하는 점이다. 여로보암을 비롯한 이스라엘의 역대 왕들이 취한, 멸망으로 향하여 가는 그들의 행동들을 성경은 왜 그토록 자세히 기록하고 있는 것일까? 바울 사도를 통해 우리에게 주신 말씀 가운데 그 분명한 이유가 설명되어진다. 고전10:11에 <저희에게 당한 이런 일이 거울이 되고 또한 말세를 만난 우리의 경계로 기록하였느니라.>고 하셨다. 여로보암이나 그 아내의 모습이 우리에게 거울이 되고 경계가 된다는 것이다. 거울을 보고 자기의 모습을 단장하는 것처럼 성경에 나타나는 어리석은 자들의 모습을 보면서 자기를 살피도록 하기 위해서 기록하고 있다. 동시에 여로보암과 그 아내가 당하는 결과를 보면서 우리의 경계, 곧 경고가 된다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아무런 이유도 없이 여로보암과 그 아내의 사건을 성경의 페이지 수를 채우기 위해 넣은 것이 아니다. 이 여로보암과 그 아내의 사건을 통해 이 글을 읽는 사람들에게 거울이 되는 것을 하나님은 기뻐하신다. 여로보암의 잘못을 보면서도 자신을 돌아보지 않고 자신을 단장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이 말씀이 거울에서 경계, 곧 경고로 바뀌게 된다. 다시 말해서 여로보암과 같이 우리도 망하는 길로 갈 수 있다는 것이다. 성경을 읽을 때에 이 말씀이 경고가 아니라 자신의 삶을 돌아보고 그 삶을 바로 하는 거울이 되게 하는 사람은 복이 있다. 똑같은 성경이 어떤 사람에게는 경고가 될 수가 어떤 사람은 그 삶을 고칠 수 있는 거울이 될 수도 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예를 들면 어떤 성도는 성경을 읽어가면서 늘 자기를 되돌아보고 또 돌아보면서 자신의 삶을 성찰하면서 영적인 단장을 한다. 그런데 어떤 사람은 성경을 읽으면서 단순히 성경 지식만 늘려 가는 사람들이 있다. 품성의 변화 없이 성경의 지식만 늘려 가는 사람에게 위험한 특징이 있다. 성경 지식만 늘려 가는 사람에게서 나타나는 큰 특징은 남을 정죄 하는 것에 익숙하다는 것이다. 그런 사람은 지식으로 축적한 그 성경 자체가 그의 삶에 이미 경고가 되고 있는 것이다. 성경에 나타나는 인물들이 그들의 삶에서 만나는 사건이나 문제들은,  사실 가끔 특수한 경우가 있지만 대부분 우리들의 삶에서도 역시 일어날 수 있는 일들이다. 그러기에
우리의 거울이 되고 경계가 될 수가 있는 것이다.

화요일 11월 30일 선물을 주는 자

도입)
여로보암 왕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자기 수하에 묶어두기 위해 인간적 책략을 썼다. 벧엘과 단에 금송아지 우상제단을 건립하고 그것을 온 이스라엘이 여호와로 알고 섬기도록 인도했다. 이에 대해 하나님께서는 한 선지자를 보내어 그 잘못을 책망하며 벧엘의 제단이 멸망할 것을 예언했고, 그 징조로 단이 갈라져 그 제단의 재가 쏟아 졌으며, 또한 선지자를 잡으라고 가리키던 왕의 손이 말라붙어 버렸다. 그러나 손을 쓸 수 없었던 여로보암이, 하나님께 긍휼을 구하였을 때 기도함으로 그의 손을 다시 치유시켜 주었다. 그것은 정말 대단한 이적이었다. “말라 다시 거두지 못”(왕상 13:4)했던 여로보암의 손이 즉시 회복되었다. 그 정도로 확실한 증거가 주어졌다면 우리는 여로보암 왕이 대중 앞에서 회개할 것이라고 기대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적은 사람의 의지를 변화시키지 못한다. 하나님의 극적인 개입이 있은 후에도 사람들은 그것을 그냥 자연적인 현상으로 여기고 과거의 습관으로 돌아가 버리고 만다.

1. 예수님은 이적과 믿음의 관계에 대해 뭐라고 말씀하셨습니까? 눅 16:31, 요 10:25~28, 15:24. 주님의 말씀이 우리에게도 해당된다고 생각한다면 이유는 무엇입니까? 거짓 예배 행위를 중단하고 진심으로 개혁을 시작하기보다 여로보암은 전략을 바꿨다(왕상 13:7 ~10 참조).
그는 하나님의 사람을 궁에 초청하여 선물을 주겠다고 했다. 이것은 이적을 목격한 백성들 앞에서 선포된 기별의 효과를 중화시키려는 일종의 정치적 행위였다. 여로보암 왕은 하나님의 사람에게 자신을 위해 일해 줄 것을 제안했다. 책임자의 입장에 있거나 봉사를 요청한 입장에 있는 사람이 상급을 주는 것이기에 하나님의 사람은 매매되지 않았다. 그는 하나님께 충성을 바쳤기 때문에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기별을 후원자의 원함에 따라 변경시킬 수 없었다.
2. 왕하 5:14~16과 단 5:13~17을 읽으십시오. 선물을 주겠다는 제안에 선지자들은 어떻게 반응하였습니까? 선물을 주는 자는 선물을 받는 자에게 압력을 행사할 수 있는 위치에 있게 되고, 선물을 받는 자는 선물을 준 자에게 빚을 지게 된다. 하나님의 사람은 왕의 선물을 사양하고, 이스라엘 땅에서는 먹지도 마시지도 않겠다고 선언하였다. 여로보암의 호의를 거절함으로써 그는 참예배와 우상숭배가 혼합된 예배에 대한 반대의 입장을 분명히 하였다. 하나님의 백성들은 매매되어서는 안 된다. 우리는 다른 길을 걸어야 한다. 하나님의 사람은 그렇게 많이 걸을 필요가 없었다. 신당 봉헌이 있었던 벧엘은 유다 국경에서 2킬로미터 정도밖에 떨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가장 가까운 유다 마을인 미스바도 벧엘에서 불과 10킬로미터밖에 떨어지지 않았다. 하나님의 사람은 먹지도 마시지도 않고 왔던 길과 다른 길을 택하여 돌아가는 극적인 실물교훈을 통해 우상숭배가 하나님께 얼마나 반역적인지 보여주어야 했다.

교훈: 우리가 불의한 일을 행하는 자에게 선물을 받는다는 것은 그의 행위를 지지하거나 모르는 체하겠다는 암묵적인 동의이며, 그의 죄에 참여하는 것이다.

부가적용)
여로보암의 일시적 신체 장애, 제단의 붕괴, 불순종한 선지자에 대한 심판, 벧엘의 선지자의 행동은 여로보암을 향한 하나님의 직•간접적인 경고였다. 이러한 하나님의 계시들 앞에 여로보암은 잠시 주춤했다. 그러나 시간이 흘러 충격의 강도가 약해지자 여로보암은 모든 문제가 다 해결된 것으로 간주하고, 다시 자신의 정치적 목적을 이루기 위한 혼합 종교 정책을 주도해 나갔다. 하나님은 우리의 생각에서 시작된 죄가 행동으로 드러날 때까지 몇 차례씩 경고하신다. 그렇기에 끝까지 돌이키지 않는 사람에게는 심판이 주어진다. 하나님은 이 모든 경고를 무시한 여로보암에게 주셨던 모든 것과 그가 꾀를 내어 세웠던 기반을 한 순간에 완전히 무너뜨리시고 계신다. 복 있는 사람은 죄인의 길에 서지 않고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지 않는다고 했다. 죄인의 길에 설 때 억대의 돈이 들어오고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을 때 권력과 명예가 한 손에 들어온다 하더라도 말씀과 일치하지 않는 그 길을 떠나고 그 자리를 떠나는 것이 의인의 도리요 그것이 복된 삶임을 기억하고 하나님께 충성하며 사시기 바란다.

수요일 12월 1일 달콤한 거짓말

도입)
하나님께서는 한 선지자를 보내어 그 잘못을 책망하며 벧엘의 제단이 멸망할 것을 예언했다. 이 행동을 감명 깊게 바라본 또 다른 노 선지자의 아들이 지금 제단에서 일어난 일을 아버지께 보고하였다. 그런데 간교한 이 노 선지자는 그 선지자의 예언과 능력을 약화시키기 위한 계략을 세웠다. 늙은 선지자는 벧엘에서 일어난 사건을 이야기 듣고 급히 나귀를 타고 그 선지자를 만났다. 그리고 그 선지자에게 "나와 함께 집으로 가자!" 고 청하였다. 그러나 선지자는 벧엘에서 먹지도 말고 마시지도 말라는 하나님의 명령을 받았으므로 그의 초청을 거절하였다. 이 늙은 선지자는 거짓말로 자기도 같은 선지자인데 방금 하나님이 천사를 내게 보내어 당신을 데리고 와서 떡을 먹이우고 물을 마시우라고  하였다고 속였다. 이미 큰일을 이룬 이 선지자는 경계심을 풀고 이 늙은 선지자를 따라가서 먹고 마셨다. 그러나 결국 하나님의 말씀을 어김으로 인해 돌아가던 길에 그는 사자에게 물려 죽음을 당하고 말았다.

봉헌 의식에서 하나님의 극적인 개입을 목격한 일반 백성들은 그 사실을 방방곡곡에 전파하였다. 그 중 어떤 젊은이는 자기 아버지에게 하나님의 사람에 대하여 전하였다. 그 아버지의 이름은 나타나지 않았지만, 그는 늙은 선지자였다. 늙은 선지자는 하나님의 사람을 찾아 나섰고, 나무 아래 쉬고 있는 그를 만났다. 1. 왕상 13:11~19을 읽으십시오.
이 본문을 창 3:1~5에 나오는 최초의 유혹과 비교해 보십시오. 어떤 유사성이 있습니까? 이 사건을 통해 배워야 할 교훈은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사람은 사명의 긴박성을 이해해야 했다. 그는 왕에게 기별을 전한 다음, 지체하지 말고 돌아와야 했다. 그러나 나무 아래 쉬면서 그는 긴장을 늦추고 있었다. 2킬로미터만 걸으면 유대 땅 나무 아래에서 쉴 수 있었다. 긴박성을 망각함으로 하나님의 사람은 스스로 유혹에 노출되었다. 늙은 선지자는 하나님의 사람을 속였다. 늙은 선지자가 그를 속인 동기는 알 수 없다. 그의 동기가 무엇이든지 성경은 그가 그 사람을 속였다고 했다(왕상 13:18). 그 순간 늙은 선지자는 거짓의 아비인 사단의 대리자가 되었다(요 8:44). 더욱 편치 않은 부분은 하나님의 사람이 너무나 쉽게 걸려들었다는 것이다. 줄곧 하나님의 인도를 받아 그분의 뜻을 철저하게 이행하던 그가 하나님께서 명하신 바와 정반대의 속임수에 빠지고 말았다. 정말 이해하기 어렵지 않은가? 우리는 잠깐 유혹에 넘어간 그에게 동정표를 던지기 쉽다. 그러나 주어진 명령에 완전히 반대되는 거짓을 믿었기 때문에 그것은 하나님께 핑계가 될 수 없었다. 유혹은 계시된 하나님의 뜻에 불순종하는 선택 주변을 맴돈다. 유혹은 같으나 유혹의 형태는 변한다. 히 4:15은 예수께서 우리처럼 시험을 받으셨다고 말한다. 지금은 현대적인 형태로 가장하고 있지만 우리가 받는 동일한 유혹을 예수께서 받으시고 이기셨다. 예수님은 사단의 유혹에 넘어가지 않도록 우리에게 통찰력과 “피할 길”을 약속하셨다(고전 10:13).

교훈: 믿을 만한 사람일지라도 하나님의 명령과 반대되는 길을 제시할 수도 있기 때문에 우리는 오직 명백한 하나님의 말씀과 진리를 판단 기준으로 삼아야 한다.

부가적용)
이 무명의 선지자는 단호히 그 회유를 거절하고 자기의 갈 길을 갔다.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순종은 평강이 보장된다. 그런데, 이 유다에서 온 선지자를 이스라엘에 있는 늙은 선지자가 찾아가서 “나도 선지자라”고 하면서 내게 하나님의 말씀이 천사를 통하여 임하였다면서 거짓으로 넘어뜨린다. 사단은 언제나 간계를 써서 공격한다. 가장 종교적인 모습으로 유혹하여 온 사단의 유혹에 넘어가고 말았다. 유다의 이 선지자는 그 순간 하나님께 직접 물어봄으로 그 위기를 극복할 수 있어야 했다. 왕의 권유도 일언지하에 거절하였던 선지자는 신성과 성결을 빙자한 유혹에 너무 쉽게 무너지고 말았다. 우리는 하나님을 빙자하거나, 신앙을 사칭한 달콤한 유혹들에 조심해야 한다. (행17:11)“베뢰아 사람은 데살로니가에 있는 사람보다 더 신사적이어서 간절한 마음으로 말씀을 받고 이것이 그러한가 하여 날마다 성경을 상고하므로”라고 하였다. 이러한 자세가 신앙의 바른 자세이다. 이 불순종으로 유다에서 온 선지자는 길에서 맹수인 사자에게 물려서 죽고 말았다. 이렇게 하나님의 말씀은 반드시 이루어지고야 만다. 유다의 선지자가 죽은 이유는 동류 선지자의 말을 자신이 받은 말씀보다 더 신뢰하였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만일 그 뜻을 바꾸셨다면 유다 선지자에게 직접 말씀하셨을 것이다. 그는 이러한 사실을 확신치 못했다. 자기와 교제하는 하나님이시라면 분명코 자신에게 말씀하시리라는 것을 알아야 했다. 다른 사람의 말이나 조언보다도 하나님으로부터 직접 그 뜻을 깨닫는 것이 축복의 길을 가는 비결이다. 열왕기상 13장 25절 하나님은 결코 스스로 모순에 빠지는 분이 아니시다. 따라서 그분의 기록된 말씀인 성경에 위배되는 일은 계시하지 않으신다. 하나님께로부터 왔다고 주장하지만 성경을 통해 인정받을 수 없는 메시지는 무시되어야 할 거짓 메시지이다.

목요일 12월 2일 반복된 시험

도입)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가장 위험한 순간이 있다. 마귀는 위대한 일을 행하려는 사람에게도 시험하기도 하지만, 위대한 일을 수행한 그 사람, 그 일을 마친 뒤에 더 신랄한 공격을 해오는 경우가 많다. 이 선지자는 여로보암 앞에 위대한 능력을 행사하였다. 그는 왕의 손을 굳게 만드는 능력을 행사하였고, 다시 그의 손을 풀어주는 일을 행하였고, 그가 단을 저주하였을 때, 제단이 갈라지는 능력을 보여주었다. 얼마나 통쾌하였을까? 얼마나 기분이 좋았을까? 아마 나였을지라도 이런 경험이 있었다면 어깨가 으쓱했을지 모른다. 그는 집으로 돌아가면서 아마도 마음이 흡족하고 기분이 좋고 통쾌한 기분으로 돌아가고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한편 자신에게 그런 놀라운 능력이 행사되었다는 것을 생각할 때, 그는 마음에 자만심이 가득 찼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야! 내가 이런 큰일을 해내다니!.....인간에게 가장 위험한 순간은 어떤 큰일을 이루기 위한 때보다, 그 일을 이루었을 때가 더 위험하다는 것이다. 왕상 13장 전체에 "여호와의 말씀"또는 "여호와가 명한 말씀이란 말이 14번이나 나온다. 그 중 늙은  선지자가 거짓으로 여호와의 말씀이라고 한 말을 빼면 13번이 나온다. 이곳에 여호와의 말씀이라는 것이 매우 강조되고 있다. 여호와의 말씀, 그 말씀은 반듯이 실현되어야 한다. 여호와의 사자는 여호와의 말씀을 증거 하는 사람이다. 그러므로 그는 자신이 몸소 그 말씀대로 살아야 했다. 그런데 말씀을 증거 하는 그 사람이 그 말씀을 어겼을 때 이 노 선지자의 입에서 나온 여호와의 말씀에 무엇이라 하였는가? 26절, 이는 여호와의 말씀을 어긴 하나님의 사람이로다!"  이 말은 얼마나 깊은 교훈을 주는 말인가? 이 선자자의 죽음은 여호와의 말씀을 어긴 사람이 결국 어떻게 되는지를 이 선지자의 죽음을 통해서 보여주었다.

1. 하나님의 사람은 두 번에 걸쳐 시험을 당했습니다. 왕으로부터 온 첫 번째 시험은 완강히 물리쳤습니다. 그러나 늙은 선지자로부터 온 두 번째 시험에서 넘어졌습니다. 이런 사실로부터 오늘날 우리가 배워야 할 교훈은 무엇입니까? 딤후 4:3, 벧후 2:1, 유 4~16 참조. 우리의 신앙을 위협하는 가장 큰 시험은 외부에 있지 않다. 정치적 권력에 의한 박해보다 더 위험한 것은 우리 내부에서 하나님의 이름을 빙자해 말하는 거짓 선지자들과 교사들이다. 그래서 하나님께로부터 명확한 말씀을 받는 것도 중요하지만, 우리 스스로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연구할 필요가 있다. 참선지자와 교사는 다른 영감적인 계시와 모순되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스스로 모순되지 않을 뿐더러, 하나님께로부터 온 새로운 예언과 가르침은 이미 주어진 진리에 더해지는 것이지, 그것에서 벗어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것은 순종을 권하지 불순종을 권하지 않을 것이다. 선지자들과 교사들은 그들의 교훈을 들은 자들과 본인들의 삶에 나타난 결과로 판단 받아야 할 것이다.

2. 왕상 13:20~34을 읽으십시오. 그 다음 무슨 일이 일어났습니까? 여기서 우리가 배워야 할 교훈은 무엇입니까? 이 이야기의 난해성은 늙은 선지자가 하나님의 사람에게 거짓말한 이유에서 시작 된다. 그는 기만자 사단의 역할을 하다가 그 장이 끝나기도 전에 여호와의 말씀을 전하는 자가 된다(21절). 이해하기 어려운 것이 한두 개가 아니지만 확실한 단 하나의 사실은 하나님의 사람이 여호와의 명백한 명령을 그렇게 직접적이고 노골적으로 무시해서는 안 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의 죽음은 헛되지 않았다. 왕은 이적을 보고도 계속 죄를 지었던 반면, 늙은 선지자는 예언이 성취될 것이라고 믿었다. 그리고 자신이 죽거든 자신을 하나님의 사람 옆에 묻어 달라고 유언했다. 하나님의 사람이 선포한 예언은 삼백 년 후 요시야에 의하여 문자적으로 성취되었다(왕하 23:15~16). 예언대로 요시야는 제단에서 뼈를 태웠다. 하지만 하나님의 사람의 뼈는 보존하였고, 그 덕에 함께 묻힌 늙은 선지자의 뼈도 보호를 받았다(왕하 23:17 ~18).

교훈: 시험은 반복적으로 끈질기게 찾아온다. 우리가 시험을 이길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오직 하나님의 말씀과 기도로 깨어 있는 것이다.

부가적용)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어기고 그릇된 길로 가는 것은 이미 죽음의 시작인 것이다. 그러나 이 선지자의 이야기 속에서 충격을 받은 것은 그토록 충성스럽게 하나님의 말씀을 증거하고 제단을 가르고 여로보암의 손을 말라붙게 하는 기적을 행사했던 이런 사람! 이런 능력의 사람이 하나님의 버림을 받은 것이 무섭다. 여로보암의 죄를 두려움 없이 지적하고, 온 이스라엘 백성을 떨게 하였던 이 큰 선지자를 하나님께서 왜 죽이셨을까? 아무리 큰 능력을 행사하고 사람의 보기에 큰 성공을 거둔 사람일지라도 이렇게 한 순간 방심하면, 부지중에 무너질 수 있음을 가리치고 있음을 기억하시기 바란다. 얼마나 많은 유능한 목사나 지도자들이 한 순간 방종하고, 한 순간 방심하여 하나님께로부터 버림을 받았는가? 아무리 큰 성공을 거둔 사람이라 할지라도 늘 자신을 겸비하고 이것이 하나님의 말씀과 일치되는 길인가를 늘 생각하며 살아야 한다. 하나님의 말씀이면 그것이 비록 작은 것이 되었든 전적으로 순종하기를 원하시기 바란다. 조금의 타협도 바로 우리의 영원한 생명을 잃게 하는 원인이 될 수가 있다는 것이다. 전적인 순종! 이것만이 우리의 살길이다. 이것만이 우리의 영혼을 살리는 길이다. 우리의 모든 삶에 있어 전적인 하나님께 대한 순종을 우리의 삶의 철학으로 삼으시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간절히 바란다.

금요일12월 3일 더 깊은 연구를 위해 “구주께서는 사람이 어떻게 승리할 수 있을 것인지 보여 주기 위하여 승리하셨다. 그리스도께서는 사단의 모든 시험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대항하셨다. 그분께서는 하나님의 약속을 신뢰함으로 하나님의 계명에 순종할 능력을 받으셨다. 그러므로 유혹하는 자는 아무런 유익을 얻을 수 없었다. 그분께서는 모든 시험을 “기록하였으되”라는 말씀으로 대처하셨다. 그와 같이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말씀을 우리에게 주셔서 악을 저항할 수 있게 해 주셨다. 지극히 크고 귀한 약속을 우리에게 주셨으므로 우리는 그 약속으로 말미암아 “정욕으로 인하여 세상에서 썩어질 것을 피하여 신의 성품에 참여하는 자가” 될 수 있다(벧후 1:4). 시험받는 자에게 환경과 자신의 연약함과 유혹의 힘을 보지 말고 하나님의 말씀의 능력을 보도록 알려 주라. 그 모든 힘은 우리의 것이다. 시편 기자는 “내가 주께 범죄치 아니하려 하여 주의 말씀을 내 마음에 두었나이다.” “주의 입술의 말씀을 좇아 스스로 삼가서 강포한 자의 길에 행치 아니하오며”라고 말한다(시 119:11, 17:4).” (치료봉사, 181) 핵심적인 토의를 위해1. 진리는 점진적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진리를 잘 이해하면 할수록 우리의 생활과 신념, 조직들과 선교활동 등은 변화될 것입니다. 현상유지는 대안이 될 수 없습니다. 우리가 추진하려고 하는 계획이 하나님의 인도하심에서 온 것인지 아니면 사회의 영향 때문인 지 어떻게 구별할 수 있을까요? 교과반에서 토론해 보십시오. 2. 하나님의 사람의 의무는 사람들과 어울리지 않음으로써 죄를 허용치 않는 것이었습니다. 반면 예수께서는 죄인과 교제하셨습니다. 우리는 사람들과 어떻게 만나야 합니까? 죄악의 행습을 권하지 않더라도 서로를 받아들일 수 있는 관계를 만들려면 어떻게 접근 해야 하는지 실제적인 예를 들어보십시오. 3. 많은 나라에서 뇌물을 주거나 특별한 선물을 주는 것은 경제적, 정치적으로 합법적인 거래의 일부입니다. 제칠일 안식일 예수 재림교인으로서 우리는 어떻게 그런 사회에서 생존할 수 있을까요? 이번 주 교과의 교훈을 바탕으로 이런 문제를 풀기 위한 지침을 적어보십시오. 4. 만약 신자 가운데 한 사람이 계시를 받았다고 주장하거나, 수석장로가 마지막 시대의 사건에 관한 새로운 사실을 발견했다고 주장한다면 그대는 어떻게 하겠습니까? 그들의 주장은 어떻게 검증되어야 할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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