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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7과 아비아달: 제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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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paulcho 작성일10-11-05 11:56 조회4,794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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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7 과 아비아달: 제사장
11월 13일 일몰:오후 5시 23분

도입)
* 세계적으로 유명한 믿음의 어머니 코리텐붐 여사는 독일 사람에게서 말할 수 없는 고통을 당했다. 그러나 세계대전이 끝난 뒤 그녀는 독일 사람들과 세계 사람들에게 사랑과 용서의 복음을 전하기 시작했다. 특히 공산주의 국가에 복음 전하기를 힘썼다. 그래서 아직도 공산주의 국가들의 문이 열리지 않았을 때 그녀는 성경책을 가지고 다니면서 공산국가에 말씀을 전했다. 한번은 코리텐붐 여사가 유고슬라비아를 향해서 가고 있었다. 국경 경계선에서는 검문관들이 기차에서 내리는 사람들의 짐을 하나 하나 검열하기 시작했다. 어떤 때는 검문관들이 짐을 샅샅이 뒤지지 않고 그냥 '가방 속에 무엇이 들었느냐?'고 물었다. 쭉 줄을 서서 검문 차례를 기다리는데 코리텐붐 할머니는 가방 속에 성경책이 가득 들어 있었다. 그래서 이 할머니는 생각해 보았다. '만약 저 검문관이 가방 속에 무엇이 들었느냐 물으면 어떻게 대답 하나? 주님을 위해서 거짓말을 해야 하나? 아니다, 거짓말은 거짓말이지. 나는 거짓말은 안하겠다. 그러면 어떻게 하나?' 이 할머니는 맨 끝줄에서 두 번째에 서 있었다. 이 할머니는 잠시 기도했다. '하나님 저에게 지혜를 주세요. 거짓말을 하지 않고서도 이 성경책을 가지고 들어가서 하나님의 일을 하게 해 주세요. 하나님, 도와주세요' 간절히 기도하는 동안에 맨 뒤에 서 있던 사람이 기다리다가 이 할머니가 하도 꾸물거리니까 더 참을 수 없어서 새치기를 했다. 그래서 이 할머니가 맨 뒤에 서게 되었다. 검문관이 검색을 다 하고 코리텐붐 할머니 차례가 왔다. 그때 검문관이 성경책이 잔뜩 들어 있는 짐을 들어보더니 '아이구 할머니, 굉장히 무겁네요 마지막이니까 제가 들어다 드리지요' 하면서 밖에까지 내다 주어서 그냥 통과했다고 한다. 할렐루야! 여러분, 이런 하나님을 믿으시는가? 도덕적인 기준을 범하지 않고서도 우리가 처한 모든 환경 속에서 하나님을 신뢰하고 의지함으로 마땅히 가야 할 길을 가게 하시는 그 하나님을 내 하나님으로 믿으시기 바란다.

기억절: “오직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
유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
게 하신 자의 아름다운 덕을 선전하게 하려 하심이라”(벧전 2:9).

안식일 오후

| 연구 범위 | 출 28:6, 39:2~7, 삼상 21:1~9, 22:6~23, 삼하 15:13~29.

제사장들은 이스라엘의 역사에 아주 중요한 역할을 감당했다. 그것은 이스라엘뿐 아니라, 다른 주변 국가에서도 마찬가지였다. 메소포타미아 문명권에서 왕은 제사장 역할을 겸했다. 그래서 정치와 종교적 권력은 통합되어 있었다. 제사장 계급은 궁궐 내에서 막강한 힘을 형성하고 있었기 때문에 많은 경우 왕의 배후 세력으로 자리잡고 있었다. 특히 구약에서 제사장의 역할은 이스라엘의 신앙과 삶의 중심이었다. 구속의 역사는 신약의 제사장들에게도 영향력 있는 역할을 제시하고 있다. 종교개혁을 통해 강조된 만인제사장설(벧전 2:9)은 전적으로 신약적인 개념만은 아니다(출 19:6 참조). 신자들로 하여금 다른 이들을 위해 중보하고, 섬기며, 구원의 계획을 전하는 거룩한 백성이 되도록 만드는 것은 언제나 하나님의 목적이었다.

이번 주 우리는 아비아달의 이야기를 통해 구약의 제사장 제도에 나타난 몇 가지 교훈들을 살펴보면서, 제사장 정신이 단지 혈통이나 훈련에 기초한다기보다 여호와께 대한 개인적인 헌신에 달려 있음을 깨닫게 될 것이다. 그러나 아비아달의 경우에서처럼 잘못된 선택은 제사장 자격을 잃게 만들기도 한다.

일요일 11월 7일 거짓과 비극

도입)
다윗은 사울에 의해 그 목숨이 위태롭게 쫓기고 있었다. 그래서 다윗은 친구 요나단에게 자기가 살아남기 위해서 한 가지 요구를 하였다. 그런데 그 요구가 문제였다, '만일 사울 왕이 내가 어디 있느냐고 자세히 묻거든 거짓말을 해달라'고 요청했다. 그가 비록 죽음 앞에 쫓기면서 너무 절박한 상황에서 어쩔 수 없이 거짓말을 했다고 하지만 거짓말은 거짓말이다. 다윗에 대한 기록 가운데서 여기 그 최초의 실수를 볼 수 있다. 다윗은 친구에게 거짓말을 종용하고 있다.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사람인 다윗의 모습이 이럴 수 있는가? 이것이 사람이다. 뿐만 아니다. 다윗은 라마라는 곳에서 놉이라는 곳으로 다시 피했다. 거기서 제사장 아히멜렉을 만나 숨겨 달라고 부탁했다. 그 때 아히멜렉은 몹시 걱정하고 무서워했다. 왜냐 하면 사울은 현재 왕인데 다윗을 잡아 죽이려 하는 것은 천하가 아는 사실이었다. 그런데 왕이 찾고 있는 사람을 숨겨 주면 은닉죄가 될 것 이고 다윗과 똑같은 형벌을 받을 수밖에 없으니 떨지 않을 수가 없었다.

1. 삼상 21:1~9과 22:6~23을 읽고 아래 질문에 답하십시오.

․ 그곳에 온 이유에 대하여 다윗은 아히멜렉에게 뭐라고 거짓말했는가?
․ 다윗을 신뢰한 결과 아히멜렉에게는 어떤 일이 벌어졌는가?
․ 사울은 자기 사람들을 다윗에게서 돌이키기 위해 어떻게 노력하였는가? 그는 어떤 논리를 사용했는가?
․ 다윗의 인격과 성실성에 대하여 아히멜렉은 사울에게 뭐라고 대답하였는가?
․ 이 이야기는 사울 왕이 타락하고 부패한, 복수심에 가득 찬 인물이 되는 과정을 어떻게 그리고 있는가?
․ 이방인이었던 도엑은 왜 사울의 종들이 꺼리는 일을 했다고 생각하는가?
․ 학살 소식을 듣고 다윗은 어떻게 반응하였는가? 어떤 면에서 그의 반응이 바람직했는가?
․ 유일한 생존자인 아히멜렉의 아들이 학살자에게서 도망쳐 왔을 때, 다윗은 그에게 어떤 약속을 주었는가?

교훈: 순수한 마음으로 섬기고 봉사하는 자들에게 하는 우리의 거짓말은 그들의 인생을 파괴하는 무서운 무기가 되기도 한다.

부가적용)
왜 혼자 왔느냐는 물음에 그는 '사울 왕께서 비밀한 일을 내게 주셨기 때문에 왕의 명령을 받들어 혼자 왔다'고 했다. 거짓말은 거짓말을 낳는다. 죄를 짓기 시작하면 멈출 수가 없다. 죄는 걷잡을 수 없는 파멸의 자리까지 계속 나를 몰고 간다. 다윗이 아히멜렉 앞에서 거짓말을 하고 있는 그 자리에 그의 말하는 내용을 엿듣고 있는 한 사람이 있었다. 사울 왕이 파송했던, 말하자면 비밀경찰 요원 도엑이라는 사람이 바로 그 자리에 있었던 것이다. 이 사람이 나중에 밀고자의 역할을 하게 된다. 그래서 결국 아히멜렉 일가와 그의 온 가문이 사울 왕에 의해서 떼죽음을 당했다. 다윗을 숨겨준 것 때문이었다. 다윗의 거짓말 때문에 아히멜렉 제사장 일가와 그의 온 가문이 끔찍한 죽음 앞에 내던져지는 살인극이 일어나게 된 것이다. 다윗은 계속 도망 다니는 신세가 되었다. 다윗이 거짓말을 한 것은 큰 실수였다. 그는 거짓말로 제사장을 속였다. 후에 제사장들을 죽게 하였다. 그때 사실대로 말해서 제사장의 도움을 받았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를 생각해 본다. 아히멜렉은 아무 것도 모르는 상황에서 나중에 큰 화를 당하게 되었다. 얼마 후에 놉의 제사장들 85명이 죽임을 당하게 되었다.(22:9-22) 마침 그곳에 에돔사람으로 사울이 신임하는 목자장 도엑이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그가 이 모든 것을 목격하고 나중에 사울에게 밀고했기 때문이다.

월요일 11월 8일

도입)
사울이 다윗과 관련되었다는 이유로 놉의 제사장들을 살해한 것은 명백한 위법이었다. 사울은 정당한 재판의 절차를 무시하였고 신하들이 반대했음에도 불구하고 에돔 사람 도엑을 시켜 제사장들과 그 가족들을 살해했던 것이다. 가까스로 도망 나온 대제사장 아히멜렉의 아들 아비아달로부터 이 소식을 접한 다윗은 사울이 반신국적인 만행을 저지른 일에 애통을 표하고 이스라엘 나라의 회복을 위해 적극적으로 활동하기 시작하였다. 아비아달이 에봇을 가지고 다윗에게 합류했다는 것은 다윗에게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에봇은 대제사장의 의복 위에 걸쳐 입는 옷의 일종이다. 이 에봇에는 판결의 흉배라고 하는 우림과 둠밈이 있어서 여호와의 뜻을 밝혀주는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었다. 때문에 다윗은 선지자 갓의 합류와 더불어 여호와의 뜻을 깨닫고 이행할 수 있는 제반 여건을 골고루 갖출 수 있게 된 것이다. 엄청난 비극 중에서 다윗은 아비아달에게 사울왕의 학살로 제사장들과 가족과 가축이 죽게 된 비참한 상황을 듣게 되었다. 그 때 자신이 아히멜렉 제사장에게 도움을 받을 때 도엑이 있는 것을 보고 사울에게 보고할 줄 알았다고 하면서 제사장들과 그 가족들이 죽은 것이 모두 자기 잘못이라고 통탄했다. 다윗은 놉에서 아히멜렉에게 떡과 칼을 얻을 당시 옆에 도엑이 있었고 도엑에 그 사실을 사울에게 보고하므로 자신이 위험에 지고 제사장이 보복을 당할지도 모른다는 직감이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도 자신이 살기 위해 거짓말을 해서 아히멜렉과 제사장들이 애매하게 추궁을 당하고 죽임을 당했다. 그래서 다윗은 아히멜렉과 제사장들과 그 가족들과 가축들의 죽음이 자신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꼭 아히멜렉에게 거짓말을 하여 도움을 받은 사실 외에도 근본적으로 사울이 자신을 미워하여 잡아 죽이려 하다가 일어난 사건이므로 그들의 죽음의 원인이 자신에게 있다고 생각한 것이다.

아비아달이 어떻게 학살을 피했는지는 알려진 바가 없다. 단지 그가 탈출하여 다윗에게 왔다는 사실만 알려져 있다. 그러나 탈출 이전에 그는 에봇을 확보했다(삼상 23:6 참조). 에봇은 중요한 결정을 내릴 때 하나님의 뜻을 구하기 위해 사용되었던 의복으로서 제사장들에게 가장 중요한 도구였다(출 28:6, 39:2~7 참조). 성경 기자는 적어도 두 번 이상 다윗이 아비아달에게 에봇을 가져오라고 했던 사실을 기록하고 있다(삼상 23:9~ 12, 30:7~8).

오늘날과 다르게 아비아달 시대의 사람들은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을 접하기 어려웠다. 율법책(모세오경) 필사본이 겨우 몇 개 있을 뿐이었다. 그래서 스스로 하나님의 말씀을 연구할 기회가 없었다. 우리는 말씀에 접근할 수 있는 특권을 누리고 있다. 하나님은 개인적으로 그리고 집단적으로 우리에게 말씀을 설명해 주실 성령을 보내겠다고 약속하셨다(요 14:26). 하나님은 사람을 사용하여서 우리에게 거룩한 조언을 주시기도 하며(잠 20:18), 상황을 통해 일하시기도 한다(롬 8:28).

1. 아비아달은 제사장으로서 어떤 역할을 했습니까? 삼상 23:9 ~13, 삼하 15:24, 17:15~22.


이런 역할을 하기 전에 아비아달은 다윗과 같이 개인적으로 충격적인 경험을 겪고 정처 없이 도망하는 신세였다. 이런 경험은 함께 도망하는 처지였던 미래의 왕을 더욱 잘 보필하기 위한 준비과정이 되었다. 아비아달은 다윗과 그의 부하들이 박해로부터 느끼는 고뇌와 두려움 그리고 배신감을 잘 이해할 수 있었다.

어떤 사람이나 집단에 대한 동질감은 신약의 제사장 개념에 있어서 중요한 요소이다. 히브리서 기자는 예수께서 우리를 완전히 이해하시기 때문에 우리의 대제사장이 될 자격이 있다고 말한다(히 2:17).

교훈: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서 제사장처럼 봉사하려면 하나님의 뜻을 분명히 이해할 뿐 아니라 사람들의 처지를 잘 헤아려야 한다.

부가적용)
다윗은 시편에서 악인들의 잔인함과 말로, 그리고 자신의 범죄함과 하나님의 긍휼에 대해 읊었다. 다윗의 훌륭한 점은 항상 자신의 죄를 인정하는 자세이다. 본문 사건도 법 심리로 본다면 아무 잘못도 없다. 그러나 그 사건 속에서 자신의 잘못을 찾아 뉘우친 모습을 보인다. 아히멜렉의 아들 가운데 아비아달이 죽음을 모면하고 다윗에게로 도망갔다. 그리고 되어진 일들을 자세히 알렸다. 그때 다윗은 "네 아버지 집의 모든 사람 죽은 것이 나의 탓이로다"(22)라고 말한다. 참으로 그의 마음이 아팠을 것이다. 우리들도 어떠한 일이든 잘못되어 질 때마다 남의 탓으로만 돌리려 하지 말고 나의 탓이라고 고백할 수 있는 자세를 가져야 하겠다. 아비아달은 다윗과 함께 있으면서 보호를 받고 그를 도와서 제사장의 사명을 잘 감당했다. 에봇을 입은 제사장 아비아달이 다윗의 위기에 함께 한다. 고대사회에서는 전쟁을 시작하기 전에 반드시 신의 뜻을 묻는 것이 전통이다. 아비아달이 다윗에게 우림과 둠밈이 달린 에봇을 가지고 도망한 사실은 중요한 의미를 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왕권이 세워지려면 선지자와 제사장이 함께 해야 한다. 다윗에게는 다윗이 모압에 있을 때 하나님의 뜻을 전해 주는 갓 선지자가 있었는데 이제 아비아달 제사장까지 함께 있게 되었다. 이는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다윗이 왕이 될 수 있는 준비가 이루어지고 있음을 암시하는 사건이다. 하나님은 우리가 고난과 역경이라고 생각하는 환경 속에서도 숨은 뜻을 이루어 가시는 분이시다. 사울 왕으로부터 고난을 당하는 다윗은 비슷한 어려움을 당하는 무리를 거절하지 못하고 받아들였다. 이들도 다윗과 동병상련의 처지에 있었다. 이 때문에 다윗은 이들을 신분 고하를 막론하고 받아들였다. 그리고 고난을 당할 때 흔히 단합이 잘된다. 이들은 다윗을 잘 섬기며 서로서로 잘 도왔다.

화요일 11월 9일 압살롬의 반역

도입)
압살롬의 반란은 구속사적인 측면에서 어떤 모습일까? 압살롬의 반란은 바로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죽이려고 반역한 이스라엘 지도자들의 모습이다. 더 나아가 오늘날의 교회 안에서 일어나는 교회의 분쟁의 모습에 대한 표상이기도 하다. 압살롬이 반란을 생각하며 행한 그 특징이 무엇인가? 압살롬이 다윗에게 나오는 모든 사람을 다 자기 사람을 만든다는 것이다. 그리고 압살롬은 백성들의 마음을 도적질하였고, 장로들도 압살롬이 왕이 되려는 음모를 알지 못한 채 따라 갔다. 이것이 사단이 동원하는 일인데 사단이 어떻게 자기의 사람을 만들어 가는지를 본다. 예수님을 잡아 죽이는 일에 있어서 사단도 마찬가지였다. 실상 바리새파와 총독 빌라도, 그리고 헤롯, 이 세력들은 극과 극을 달리는 서로 원수지간의 세력들이었다. 또 제사장 중심의 사두개인들도 그들과는 빌라도나 헤롯과는 극과 극이었다. 또한 바리새파와 사두개파도 서로 앙숙이었다. 헤롯당과 바리새파도 앙숙지간이다. 그런데 예수를 잡아 죽이는 데는 이 네 세력들이 합동을 해서 예수를 죽였다. 실상 사단의 이 음모에 그들은 모두가 이용을 당했다. 실상 네 영역의 사람들은 예수를 왜 죽이려 하는지 사단의 음모를 잘 모른 채 이용을 당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이나 지도자들 모두가 압살롬에게 모두 이용을 당하였다는 것을 볼 수 있다. 사단은 자신의 목적을 성취시키는 일에 언제나 사람들을 이용한다. 이것이 항상 교회를 분쟁케 하는 사단의 방법이다. “네 집에 칼이 떠나지 않으라”는 하나님의 경고대로 다윗 왕궁을 둘러싼 골육상쟁의 비극이 그의 말년을 어둡게 했다. 그것은 주로 이복의 왕자간에 연로한 다윗의 왕위 계승 문제를 놓고 벌어졌다. 다윗 왕에게는 8인의 처와 열 사람이 넘는 첩이 있어 (삼하 3:2-5)그 아들 수는 성서에 기록된 것만도 17인에 달한다. 압살롬의 반역도 궁중의 문란에서 오는 왕자들의 반목과 갈등에서 싹튼 것이었다. 다윗의 셋째 아들 압살롬이 부친에 대한 반역의 선두에 섰다. 즉, 다윗의 장자 암놈이 이복누이 다말을 능욕했으므로 다말의 친 오빠 압살롬은누이의 복수로 암놈을 살해하고, 어머니의 고향인 아람의 그늘로 도망했다. 이것은 단순한 복수일 뿐만 아니라 장자인 그를 제거하여 왕위를 노렸기 때문이었다. 3년후 다윗은 압살롬을 용서해 주었으나 그는 부친을 반역할 계획을 노렸기 때문이었다. 3년 후 다윗은 압살롬을 용서해 주었으나 그는 부친을 반역할 게획을 마음에 품고 고향으로 돌아왔다. 압살롬은 특히 북부 지파 중의 베냐민 지파에서 다수의 젊은 자를 모으고 헤브론에서 왕위에 오를 것을 선언했다. 그리하여 강한 젊은 자들로 편성한 군대를 이끌고 예루살렘으로 진군했다. 아무 준비도 없는 다윗은 급히 이스보셋의 전 수도였던 마하나임으로 물러갔다. 여기서 다윗의 군대장 요압은 병사를 모아 압살롬의 군대와 에브라임 숲에서 마주하여 부자 대결의 비극적 전쟁을 치르게 되었다. 다윗은 가신들에게 자식을 죽이지 말라고 명령했으나, 패전을 하게된 압살롬은 나귀를 타고 도망하다가 큰 나무 가지에 머리카락이 걸려 요압의 부하에게 살해되었다. 다윗은 자식의 죽음을 슬퍼하면서 예루살렘으로 돌아갔다.

사무엘하 15~18장은 아버지의 통치에 반기들을 들고 일어선 다윗의 아들 압살롬의 비극적인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압살롬의 군대는 예루살렘을 향해 진군하고 있었다. 아비아달에게는 악몽과 같은 순간이었을 것이다. 다윗은 예루살렘을 전쟁터로 만들기보다 도망하기로 결심하였다. 다윗의 충신들은 그와 함께 도망할 준비를 하였다. 아비아달은 그의 가족과 친척들이 사울 왕에게 학살당했던 일을 떠올렸을 것이다. 그래서 그는 다윗과 함께 떠날 준비를 하려고 했다.

1. 삼하 15:13~29을 읽으십시오. 이 말씀을 통해서 우리는 이런 위기에 때에도 다윗의 품성이 어떠했음을 알게 됩니까?


하나님의 법궤를 메고 아비아달과 제사장들은 도성을 떠나려고 했다. 그러나 다윗은 법궤를 움직이지 말도록 명령했다. 그는 하나님의 임재의 상징을 옮겨야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는 것은 아님을 알고 있었다. 하나님은 다른 존재의 조종을 받는 분이 아니다. 법궤는 있을 곳에 있어야 했다. 법궤를 남겨두는 것도 다윗에게 있어서는 일종의 믿음의 행위였다. 그는 하나님께서 자신을 구원하시고 다시 예루살렘으로 인도해 주시리라 믿었다.

하나님의 언약궤를 내려놓고 아비아달은 모든 백성이 성을 빠져나갈 때까지 제사를 드렸다(삼하 15:24). 이런 중대한 시기에 제사장 아비아달과 사독은 다윗과 백성들을 위한 중보자가 되었다.

다윗의 비밀 정보원들은 이야기의 흥미를 더한다(삼하 17:15~29). 아비아달과 사독은 도성 안에 일어나는 일들에 대하여 다윗의 눈과 귀가 되었다. 아비아달과 사독의 아들들은 예루살렘 밖에서 전갈을 기다리고 있었다. 믿음직한 여종이 그들에게 전갈을 건넸다. 그런데 그들 곁에서 서성이던 순진하게 보이는 한 소년이 뭔가를 눈치 채고 이를 압살롬에게 알렸다. 제사장의 아들들은 압살롬의 군대의 추격을 받다가 한 농가의 우물에 숨었다. 그 집의 여인은 천으로 우물 아귀를 덮고 곡식을 널어놓아 그들이 그곳에 없는 것처럼 꾸몄다. 이는 마치 두 명의 정탐꾼을 삼대 밑에 숨겨준 라합의 방식을 연상케 했다(수 2:6).

종종 보이는 것과 실상은 다르다. 상처 입은 마음이 미소에 가려져 있다. 우리는 주님의 제자들로서 그분의 손이 되어 우리 주위 사람에게 다가서야 한다. 우리는 사람들의 외모 이면에 있는 그들의 참모습과 현실을 헤아리고 그들을 도와야 한다.

교훈: 가장 어려운 때에도 법궤가 이동하지 않았듯이, 하나님의 종들은 맡겨진 영적인 일들을 중단 없이 수행해야 한다.

부가적용)
다윗은 사실 하루아침에 왕권을 잃어버리고 도망을 가는 비참한 신세가 되고 만다. 이 이후에 기록된 성경을 보면 그가 얼마나 비참했던지 맨발로 예루살렘성을 떠나서 맨발로 걸어가면서 머리를 풀어 헤치고 울면서 예루살렘을 떠났다고 기록을 하고 있다. 이때 상황으로 보면 다윗은 아들에게 배신을 당하고, 믿었던 신하들로부터, 가장 가까운 측근들로부터 배신을 당하고 인생의 허무함을 느꼈을 것이다. 그는 아주 비참한 심정을 가지고 예루살렘을 떠났다. 그와 같은 비참한 심정 가운데 빠져 있을 때, 인간적으로 보면 굉장히 절망적인 상황 가운데에 빠져 있을 때에 제사장의 무리가 자기편에 서준다고 하는 것은 그 어떠한 군대를 얻은 것보다도, 천군만마를 얻은 것보다 더 힘이 생기는 기회요, 축복이라고 생각되어질 그러한 상황이다. 사실 그 어떠한 군대를 얻은 것보다도 제사장의 무리가 자기를 따른다고 하는 것은, 하나님의 법궤가 자기와 함께 있다고 하는 것은 엄청난 힘이다. 그러나 다윗은 이렇게 고백한다. “이 하나님의 법궤를 성으로 다시 메어가라. 만일 내가 여호와 앞에서 은혜를 얻으면 도로 나를 인도하사 내게 그 궤와 그 계시들을 보이시리라.” 다윗은 알았다. 법궤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법궤와 함께 하는, 법궤가 상징하고 의미하는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사실이 중요하다는 것을 그는 알았다. 법궤를 메고 가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법궤가 의미하고 있는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시는 것, 그 하나님의 은혜가 더욱 더 중요하다는 것을 다윗은 깨달았다는 말이다. 또한 하나님의 법궤가, 제사장들이 자기와 함께 한다는 것은 천군만마보다 더 큰 힘을 갖고 있다는 것은 확실한 사실이지만 그것보다도 하나님의 법궤는 있어야 될 자리에 있어야 된다고 하는 것이 다윗의 주권적 믿음이었다. 하나님은 사람의 필요에 의해서 좌우되는 분이 아니라는 사실을 우리는 깨달아야만 한다. 어떠한 경우라도 하나님은 제 자리에 제 위치에 모셔져야 된다는 것이 다윗의 신앙인 것이었다.

수요일 11월 10일 아비아달의 선택

도입)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제사장 나라이다. 아비아달은 비운의 대제사장이다. 사독의 그늘에 가려 대제사장임에도 불구하고 언제나 2인자에 불과하다. 이미 오래 전 엘리 가문에 내려진 비운의 예언 때문에 그의 자리는 위태위태하였다. 그리고 다윗의 통치 말년에 그 위기는 사실화되는 것처럼 보였다. 성전건축을 위한 제반 모든 준비를 끝낸 다윗은 서둘러 왕위를 물려줄 계획을 세운다. 그런데 왕위를 물려줄 왕자가 솔로몬이라는 사실이 그에겐 안타까움이었다. 그저 서열대로 왕위를 물려주겠거니 생각하고 다윗의 아들들 가운데 서열도 높고 아무런 책망도 듣지 않았던 준수한 왕자인 아도니야가 왕이 될 줄로 생각했었기 때문이다. 부쩍 아도니야는 최근 들어 아비아달 대제사장을 가까이 한다. 그리고 그의 수하에 많은 사람들이 오가는데 중요한 인물 중 하나로 자신이 선택되었다는 사실이 즐겁기도 했다. 그러면서도 한편으로 사독 대제사장의 눈치를 살핀다. 그런데 사독 대제사장은 어린 솔로몬 왕자의 편에 있는 것 같았다. 아비아달 대제사장은 정권교체가 되면 이제 자신이 진정한 의미에서 일인자가 되리란 생각을 하였다. 그리고 드디어 거사 날이 왔다. 군대장관 요압과 다윗의 아들인 왕자들이 대거 이 모임에 참석했다. 아비아들은 이 구테타는 성공한 구데타라고 생각했다. 군대를 장악하고 영권을 쥔 대제사장과 권력의 핵심인 왕자들과 여러 귀족들이 함께 했다면 그렇겠다고 생각되었다. 그런데 솔로몬 편에는 사독 대제사장과 나단 선지자가 있었다. 아비아달 대제사장은 이번 혁명은 충분히 성공할 것이라 생각하였다. 대제사장인 자신이 지지를 하고, 더구나 병권을 가진 군대장관인 요압이 군대와 더불어 함께 한다면 이 세력을 과연 누가 당해낼 수 있겠는가 스스로 생각하며 만족해하고 있었다.

우리는 아비아달의 개인적인 견해나 정치적 종교적 관점에 대하여 알지 못한다. 다윗에게 있어서 그가 하는 모든 말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기록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말보다 그의 행동이 더 크게 말했다. 그가 어떤 말을 했는지 남아 있지 않지만, 그가 거기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강력한 진술이 되고 있다.

다윗의 시대에는 장자가 아버지의 상속자가 되는 것이 관습이었다. 왕의 자녀 가운데는 첫째 아들이 왕위를 잇게 된다. 그러나 하나님은 관습에 얽매이지 않으셨다. 실제로 이스라엘의 역사를 보면 때로는 하나님의 명령으로, 때로는 피치 못할 사정 때문에, 때로는 장자 본인의 결정에 의해서 하나님은 첫째 대신 다른 아들을 세우셨다(창 4:1 ~5, 21:8~12, 25:21~36, 48:8~ 19, 삼상 16:6~ 12).

1. 왕상 1:1~8을 읽으십시오. 다윗에게 그토록 충성스러웠던 아비아달로 하여금 이런 일을 하도록 만든 것은 무엇이었습니까?


전통을 따르자면 솔로몬은 장자가 아니었기 때문에 정상적으로 왕위를 이을 수 없었다. 장자인 암논이 형제 압살롬에게 살해되었고, 압살롬도 쿠데타를 시도하다 죽었다. 이제 넷째 왕자인 아도니야는 왕위가 자신의 차지라고 생각했다. 그는 요압과 아비아달과 모의하여 그들의 지지를 받아냈다(왕상 1:7).

솔로몬은 아도니야보다 어렸고 가족력도 자랑스럽지 못했다. 그의 어머니는 다름 아닌 밧세바였다. 그녀와의 불륜을 감추기 위해 다윗은 그녀의 남편이었던 우리아를 죽였었다. 이런 수치스런 배경을 가지고 있었지만 솔로몬은 하나님의 총애를 받았다(삼하 12:24). 하나님은 그를 다윗의 계승자로 선택하신 것이 분명했다(대상 22:9~ 10). 그러나 이런 결정을 언짢게 여겼던 것인지 아비아달은 그것 때문에 명예를 잃기보다는 하나님께서 보여주신 뜻에 반대하여 전통에 의지하려고 했던 것 같다.

전통을 따르는 것이 편할 때가 많다. 왜냐하면 계시된 하나님의 뜻과 빛을 통해 사물을 분별해야 하는 책임에서 우리를 면제시켜 주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것을 항상 이렇게 했다.”라고 말하는 것이 얼마나 쉽고 안전해 보이는가?

교훈: 하나님의 뜻을 헤아리기보다 전통과 관습에 의지하려는 태도는 분명 잘못된 것이며,
그렇게 되지 않기 위해서 우리는 늘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구해야 한다.

부가적용)
아비아달의 실수는 여기에 있다. 아버지인 아히멜렉의 죽음이라는 비극적 상황에서 다윗과의 동행은 시작되었다. 그리고 다윗은 끝까지 아비아달과 함께 하며 그이 왕국건설에 일등공신 중 하나로 치켜세운다. 비록 대제사장이 한 사람이 아닌 두 사람으로 세워졌다고 해도 그 이유가 다름 아닌 자신을 위한 다윗의 따뜻한 배려라는 것을 알아야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2인자라는 패배주의에 사로잡혀 이제까지의 은혜를 망각하고 구데타 음모에 가담하고 말았다. 대제사장이면 권력과는 거리를 두어야 하는데 아비아들은 나이가 들어가면서 더욱 권력지향적인 인물이 되고 말았다. 유감스럽게도 여전히 자신이 최고여야 한다는 권력욕에 사로잡혀 스스로 죽음을 자초하고 말았다. 적어도 대제사장이라고 한다면 이런 모든 일들이 과연 정당한 일일까에 대한 물음이라도 있어야 하는데 아비아들에게는 하나님께 묻는 기도의 과정이 생략되었다. 하나님의 사람에게 있어서 기도가 생략된다는 것은 곧바로 죽음을 의미한다. 결국 거품 같은 인생을 살다간 자가 되고 만 것이다.

목요일 11월 11일 아비아달의 운명

도입)
제사장 아비아달은 당시 군대장관 요압과 함께 아도니야 편에 서서 반역적인 행동을 하였다. 아도니야의 반역적인 거사에 종교적인 정당성을 부여해주려고 하다가 결국 아비아달은 하나님께로부터 심판을 받게 된다. 솔로몬은 제사장 아비아달을 제사장직에서 파면하고 결국 고향 아나돗으로 추방하였던 것이다. 하나님과 하나님께서 세우신 다윗과 솔로몬 편에 서서 하나님의 뜻을 사람들에게 전해주어야 할 사람이 하나님의 뜻을 생각하지 않고 스스로 자신들을 높이려고 하는 권력과 야합하게 되었을 때에 결국 하나님께로부터 심판을 받게 된다. 사실 아비아달이 반역에 가담했다는 사실만으로도 당시에 죽어 마땅했지만 다윗을 이전에 도와 언약궤를 멘 것과 다윗이 환란 중에 있었을 때 함께 동참했다는 그 사실로 인해 솔로몬은 아비아달을 죽음에 처하게 하지 않고 단지 고향으로 추방했던 것이다. 아비아달은 하나님을 향한 처음 사랑을 잃어버리고 자기의 길로 갔다. 요한계시록 2장 4절, 5절을 보면 “그러나 너를 책망할 것이 있나니 너의 처음 사랑을 버렸느니라 그러므로 어디서 떨어졌는지를 생각하고 회개하여 처음 행위를 가지라 만일 그리하지 아니하고 회개하지 아니하면 내가 네게 가서 네 촛대를 그 자리에서 옮기리라.” 주님께서 친히 말씀하셨다. 아비아달은 하나님을 향한 처음 사랑을 잃어버리고 오히려 하나님의 뜻을 대적하는 사람이 되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그에게 있던 은총과 사명의 촛대를 다른 사람에게 옮겨버리셨다. 이후에 이 아비아달을 대신에 사독이 대제사장이 됩니다. 은총과 사명의 촛대가 사독에게로 옮겨지게 되었던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 대신에 자기의 뜻과 자기 야망, 자기를 높이는 자를 물리치신다.

다윗이 죽고 솔로몬이 즉위한 이후 몇 문제들이 해결될 필요가 있었다. 아도니야는 처형되었지만(왕상 2:13~25), 솔로몬의 부친을 충성스럽게 섬겼던 제사장 아비아달의 문제가 여전히 남아 있었다. 역모에 가담한 일에 대하여 그에게 어떤 책임을 물어야 할까?

1. 왕상 2:26~27을 읽으십시오. 솔로몬은 아비아달의 문제를 어떻게 다루었습니까? 그런 조치의 이유는 무엇이었습니까?


언뜻 보면 아비아달은 백여 년 전에 엘리에게 주어졌던 예언 때문에 파면된 듯이 보인다(삼상 2:30~36). 그러나 이 말씀은 하나님께서 미래에 우리가 무엇을 선택할지 알고 계심을 말해주고 있다. 하나님은 우리와 우리 후손이 무엇을 선택할지 아시기 때문에 미래를 예언하실 수 있다. 하나님은 엘리의 아들들이 그들의 행위 때문에 제사장 자격을 잃었던 것처럼 그 자손인 아비아달도 하나님의 선택을 달갑게 받아들이지 않음으로 제사장 자격을 잃게 될 것을 아셨다.

2. 마 26:14~16, 20~25을 읽으십시오. 아비아달의 좌천에 비추어 이 예언을 설명해 보십시오. 공통적으로 어떤 유사한 원칙이 적용되고 있습니까?


예수님은 유다가 배신할 것을 아셨지만 그렇다고 그를 내치지는 않으셨다. 유다는 열두 제자 중 하나였다. 그는 하나님의 능력을 직접적으로 경험하였다. 그러나 아비아달처럼 하나님의 뜻을 받아들일 마음이 없었다. 그는 왕권이나 권력과 지배의 문제에 있어서 아마도 아비아달과 비슷한 생각을 가지고 있었던 것 같다. 유다는 예수께서 지상 왕국의 임금이 되시기를 기대했다. 그러나 기대가 좌절되자, 참되신 왕을 배신하고 전통을 중시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에게로 향했다.

하나님의 예지를 하나님의 예정으로 해석해서는 안 된다. 유다와 아비아달처럼 사람들에게는 선택권이 있다. 하나님은 우리의 선택을 예지하실 뿐이지, 선택의 자유를 제한하시는 것은 아니다.

교훈: 우리에게도 선택의 자유가 있다. 그러나 우리의 생각을 하나님의 뜻보다 중요하게 여기는 경향이 있다면 우리의 운명은 아비아달과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부가적용)
아비아달은 다윗 왕의 충성된 대제사장이었다. 그는 다윗이 사울 왕에게 쫓길 때에 끝까지 다윗과 함께했었고(삼상 23:6-9), 다윗의 아들 압살롬의 반역 때에도 다윗의 명에 따라 하나님의 궤를 떠나지 않았다(삼하 15:24-29). 그는 다윗이 모든 환난을 받을 때에 함께 환난을 받은 자였다. 아비아달은 실로 하나님이 세우신 인도 직분에 항상 순종하며 신실히 따른 자였다. 그런 그가 단 한 번의 실수로 대제사장 직분에서 파면당하고 말았다. 그것은 바로 그가 아도니아의 반역에 가담한 일 때문이었다. 아비아달의 대제사장직의 파면과 추방은 우리에게 하나님의 행정에 대한 반역의 심각성을 잘 보여 준다. 아비아달은 이 일에 있어서 하나님의 뜻을 충분히 묻지 않았고 인도자인 다윗과도 교통(교제)하지 않았다. 그는 전적으로 자신의 판단에 따라 그 일을 결정하였다. 하나님의 행정과 관련된 일에 잇어서 단 한번의 느슨함이 그로 하여금 하나님을 섬기는 영광스런 직분과 위치를 잃게 했다. 대제사장 아비아달의 추방은 우리에게 하나님의 왕국의 행정과 관련된 일에 있어서 우리가 늘 깨어 있어야 하며, 기도와 교통의 생활이 우리의 보호임을 말해 준다. 아비아달은 결국 자기의 길, 교만의 길을 가다가 은총도 잃고, 사명도 잃고 결국 나락으로 빠지게 되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의 뜻과 그 편에 겸손히 서는 인생들에게 은총을 베푸신다. 하나님께서는 그러한 사독에게 은총의 촛대를 옮기신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을 향한 처음 사랑, 하나님 앞에서의 그 처음 겸손을 잊지 말아야 한다.

금요일 11월 12일 더 깊은 연구를 위해

“하나님께서는 위대하고 엄숙한 사업을 위하여 그대를 선택하셨습니다. 주님께서는 하나님께 속한 영광만을 바라보면 이 거룩한 사업이 성취되도록 그대를 훈련하시고 시험하시며 입증하시고 세련되게 하시고 고귀하게 만들기를 바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한 인물을 선택하시고 당신과 더불어 밀접한 교제를 하게 하시며 수행해야 할 사명을 주셔서 당신을 위하여 일하도록 하신다는 것은 얼마나 놀라운 특권입니까? 연약한 사람이 강하게 되고 소심하던 사람이 용감하게 되며 결단력이 없던 사람이 단호하고 민첩한 결정을 내리는 사람이 되게 하는 것입니다. 만왕의 왕에게서 사명을 받게 될 때에 그 사람이 성취할 수 있는 수많은 성과의 가능성이 얼마나 놀라운 것입니까? 신성한 책임과 거룩한 사명이 세속적인 야심 때문에 유혹을 받아야 할 것입니까?”(가려 뽑은 기별 2권, 167)


핵심적인 토의를 위해

1. 성경의 다른 예지만 사울의 생애를 묵상해 보십시오. 그토록 많은 것을 받은 사람이 어떻게 모든 것을 잃을 수 있습니까? 그의 이야기를 통해 우리는 어떤 교훈을 얻게 됩니까? 어떤 실수가 몰락의 계기가 되었습니까? 그는 무엇 때문에 이번 주 우리가 보았던 그런 종류의 행동을 하기에 이르렀습니까?

2. 예수께서는 그분의 인성을 통하여 우리의 고뇌를 잘 이해하신다는 점을 깊게 묵상해 보십시오. 그리스도의 인성이 우리에게 그렇게 중요한 이유는 무엇입니까?

3. 교과반에 사별을 경험한 분이 있다면 교과반에서 그분을 도울 방법은 무엇일까요? 위로의 말 외에 어떤 실질적인 도움을 줄 수 있습니까? 경우에 따라 단지 위로의 말을 전하는 것 외에는 할 수 있는 일이 없을 때도 있습니까?

4. 하나님의 예지와 인간의 자유 의지는 오랜 세월 동안 기독교 사상가들을 고민에 빠뜨렸던 난제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선택을 미리 아신다면, 우리에게 정말 선택의 자유가 있는 것입니까? 우리에게 선택의 자유가 없다면 우리의 행동에 대하여 어떻게 공정하게 심판을 받을 수 있을까요? 이런 난제를 풀기 위해 어떤 이들은 하나님께서 우리의 행동을 예측하지 못하시며 그렇지 않다면 우리는 자유로운 것이 아니다라고 주장합니다. 어떤 이들은 하나님께서 사람의 행동을 미리 아신다 해도 그것이 선택의 자유를 침해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에 문제가 없다고 봅니다. 이 문제를 교과반에서 토의해 보십시오. 명확한 결론을 내리기란 어려울 것입니다. 명심해야 할 것은 인간은 자유로운 존재이며, 하나님은 선택의 자유를 존중하는 우주의 통치자라는 사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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