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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5과 아비가일: 상황에 지배받지 않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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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paulcho 작성일10-10-21 00:36 조회4,820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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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5 과 아비가일: 상황에 지배 받지 않음
10월 30일 일몰:오후 5시 37분

도입)
언젠가 뉴욕 타임스 지에 보통 사람에 비해 화를 잘 내는 사람들의 사망률이 20% 가량 높다는 듀크 의대 팀의 연구결과가 나왔다. 또 화를 내는 사람은 자신의 육체에 큰 타격을 주는데, 유명한 권투선수의 강펀치를 맞는 것 같은 심한 타격을 받는다는 보고도 있었다. 한 저명한 의사가 분노와 수명의 상관관계를 연구했다. 그는 오랜 연구를 통해 중요한 결론을 내렸다. "분노는 사람의 생명을 앗아가는 극약입니다. 그러므로 남을 화나게 하는 것은 곧 그를 죽이는 행위다" 그는 이 사실을 의학협회에 보고할 기회를 얻었다. 그리고 자신만만한 태도로 연구논문을 발표했다. 그런데 한 의사가 자리에서 일어나 그의 논문에 대해서 신랄한 비난을 퍼붓는 것이었다. 그는 자신을 비난하는 그 사람을 향해 고함을 질러대며 맞섰다. 그리고 그 분노를 참지 못하고 그 자리에서 쓰러져 죽고 말았다. 분노가 사람을 죽일 수도 있다는 사실을 생생하게 증명한 셈이다. 이렇게 분노라는 것은 매우 위험한 것이다. 영어로 분노, 화라는 말을 Anger 라고 하는데, 거기에 D 자만 더 붙이면 Danger 위험이 된다. 분노나 화가 매우 위험한 것이라는 말이다.

기억절: “지혜는 명철한 자의 마음에 머물거니와 미련한 자의 속에 있는 것은 나타나느니라”(잠 14:33).

안식일 오후

| 연구 범위 | 삼상 25장, 사 28:23, 53:12, 단 9:15~19, 마 15:10, 롬 8:34.

상황이 그대를 지배하고 있음을 느낀 적이 있는가? 다른 곳으로 피하고 싶은 마음이 든 적이 있는가? 아니면 다른 사람이 됐으면 좋겠다고 생각해 봤는가? 그렇다면 이번 주에 공부할 아비가일의 삶을 묵상해 보라.

그녀는 지적이고 아름다운 여인이었지만, 불행히도 이기적이고 근시안적이며 미련한 나발과 결혼하였다. 갈렙의 후손이었던 나발은 조상의 명성에 조금도 미치지 못하는 인물이었다. 그는 부자였으나 그의 이름이 말해주는 것처럼 “우둔하고 어리석은” 사람이었다.

그 시절에는 가문끼리 자녀의 결혼을 미리 약조하는 풍습이 있었다. 그래서 아비가일에게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상황은 마치 그녀의 편이 아닌 것처럼 보였다. 조건이 유리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우리는 아비가일이 남긴 삶의 일면을 통해 상황에 지배되지 말라는 조언을 듣는다.

아비가일은 현실 도피를 꿈꾸지 않았다. 그녀는 상황을 받아들였다(삼상 25:25). 하지만 그 상황이 자신을 파멸시키도록 내버려 두지 않았다. 그녀는 자신이 처한 상황에서 성장하리라 다짐하였다.

일요일 10월 24일 경청할 줄 아는 사람

도입)
마온이란 곳에 살고 있는 부자가 있었다. 삼상 25:2절에 보면 그를 큰 부자라고 부르고 있는데 "양이 삼천 마리요 염소가 천 마리"나 되는 많은 재산을 소유하고 있었음을 볼 수 있다. '나발'이란 이름은 "어리석음, 바보"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그는 이름대로 어리석은 사람이었다. 그는 완고하고 행실이 악하며 갈렙 족속이었다.(3) 그는 도움을 요청하는 사람을 거절하고 모욕하기까지 하였다. (9-11) 그의 하인의 말에 따르면 불량하고 더불어 말할 수 없는 사람이기도 하였다.(17) 또한 큰 잔치를 그의 집에서 열고 크게 취하며 지내는 정신없는 사람이었다.(36) 다윗은 나발이 자기 양털을 깎는다는 소식을 듣고 소년 열 명을 보내며 그에게서 먹을 것을 조금 얻어오라고 하였다. 양털을 깎는 날은 유목민의 축제의 날로서 주인은 잔치를 벌이며 나그네와 일꾼들에게 푸짐한 대접을 하였다. 그동안 다윗의 부대는 나발의 양떼를 지켜주는 담이 되었다. 그리고 그들을 해하거나 그들의 것을 빼앗지 않았다.(7)
그러므로 다윗의 생각으로는 나발이 그의 요청을 받고 기쁨으로 나누어 줄 것이라고 믿었을 것이다. 더구나 다윗은 나발에게 "네 손에 있는 대로 네 종들과 네 아들 다윗에게 주기를 원하노라"(8)는 말로서 자신을 낮추고 그를 높이 올려주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그는 힘으로 얼마든지 다른 사람의 재산을 빼앗을 수 있었지만 오히려 보호해 주고, 양털을 깎는 축제날에 무엇을 나누어 달라고 요청하면서, 최대의 예의를 갖추었다. 그러나 나발은 다윗의 요구를 모욕적인 말로 거부하였다. 10~11절에 보면 "다윗은 누구며 이새의 아들은 누구냐 요즈음에 각기 주인에게서 억지로 떠나는 종이 많도다 내가 어찌 내 떡과 물과 내 양털 깎는 자를 위하여 잡은 고기를 가져다가 어디서 왔는지도 알지 못하는 자들에게 주겠느냐"고 하였다. 다윗이 골리앗을 죽여 나라를 구원하고, 왕의 사위가 되었으며, 천부장이었는데 나발이 그를 모를 리가 없었다. 그리고 다윗이 그를 향하여 "아버지"라고 부르며 존경을 표했는데도 이런 폭언을 하였으니 그는 큰 실수를 저지른 것이다. 또한 다윗과 부하들을 주인 사울을 억지로 떠난 불량배로 취급하였으니 이것은 큰 모욕이었다. 더구나 "어디서 왔는지도 알지 못하는 자들"이라는 표현에서 모욕적인 언사가 극에 달하였음을 볼 수 있다. 이를 전해들은 다윗은 분노와 복수심으로 나발과 그의 권속들을 다 죽이기로 작정하고 칼을 차고 사백명을 이끌고 갈멜로 향하였다.

대부분 말하는 데는 문제가 없다. 사실 너무 말이 많아 탈이다. 듣기를 잘하면 훨씬 좋을 텐데 말이다. 그래서 경청하는 법을 가르치는 강좌도 있다. 우리 주변에 참으로 많은 일들이 일어나고 있다. 그래서 더욱 잘 들을 필요가 있다.

1. 사 28:23, 마 15:10, 약 1:19을 읽으십시오. 이 말씀에 따르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그 이유는 무엇입니까?


다윗과 그의 부하들은 사울에게서 도망 중이었다. 바란 광야에 머물 때, 그들은 대지주인 나발의 목동들과 가축들을 만났다. 다윗과 그의 부하들은 그들을 내버려 두지 않고 보호해 주었다. 양털 깎는 계절이 돌아오자 축제 분위기가 감돌았다. 감사를 표하고 선물을 돌리는 시절이 온 것이다. 다윗은 양식을 얻고자 나발에게 열 명의 부하를 보냈다.

2. 삼상 25:1~11을 읽으십시오. 나발의 대답에 다윗이 흥분한 까닭은 무엇입니까? 다윗은 그 말을 어떻게 생각했까?


나발은 이름에 걸맞게 행동했다. 그는 다윗의 부하들에게 도망친 종들이라고 비꼬며 빈손으로 돌려보냈다. 나발이 다윗을 업신여긴다는 사실이 여실히 드러났다. 그에게 있어서 다윗은 어디 출신이며 무엇을 하는 사람인지 알 필요도, 물을 필요도 없는 무가치한 존재였다. 지금까지 다윗은 자신을 죽이려는 사울 왕에 대해서는 놀라우리만큼 감정을 잘 조절해 왔다. 그러나 자신을 업신여기고 무가치하게 여기는 말을 들었을 때, 그도 우리처럼 깊은 상처를 받았다. 자신은 선대했건만 상대는 저주와 모욕으로 갚았다는 사실 때문에 문제는 더욱 심각했다.

나발은 자신이 상대하고 있는 자가 누구인지 제대로 알지 못했다. 다윗의 부친이 누구이며 그가 사울에게서 도망 중이라는 사실은 알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너무도 자기중심적이고 교만한 그는 하인들의 말을 이해하지도, 들으려고 하지도 않았다. 나발의 하인들은 다윗의 부하들 곁에서 지냈었기 때문에 그들이 군대에 버금간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자신들의 “주인은 불량한 사람이라 더불어 말할 수 없”다고 한탄하며 자신들의 이야기를 들어줄 사람, 아비가일에게로 갔다.

교훈: 하나님은 여러 경로를 통해 우리에게 지혜를 주시며, 위험에 대하여 경고하기도 하신다. 하지만 다른 사람의 말에 귀를 기울이지 못한다면 나발과 같이 될 것이다.

부가적용)
우리는 다윗이 자신을 죽이려고 하는 사울을 향하여 얼마나 온유하게 대접을 했는지를 안다. 자기에게 자신의 원수인 사울을 죽일 수 있는 기회가 왔지만 "원수 갚는 것은 내게 있다"는 주님의 말씀대로 자기 손으로 원수를 갚지 않고 하나님께 다 맡기며 자기를 잡아 죽이려고 살기가 등등하여 잡으러 다니던 사울 왕을 용서해 주고 하나님께 다 맡기던 다윗이었다. 그러나 다윗이 자신이 담이 되어 지켜준 나발의 망발과 자신의 상처를 건드린 나발을 향해 참기가 어려웠다. 다윗의 자존심을 건드린 것이다. 다윗이 도대체 누구이며! 다윗이 어디서 굴러먹다 온 뼈다귀냐 하는 모욕이었다. 자신을 욕하는 사람들을 향하여 참기가 참으로 어려운 것이다. 이것을 볼 때, 우리 인간이 얼마나 약하고 어리석은지 모른다. 특별히 분노에 얼마나 약하다는 것을 여러분은 알 수 있다. 생각해 보라. 자기를 몇 번이고 죽이려고 하던 사울은 수없이 용서해 주고, 자기를 모욕하고 팁 안 준 나발에게는 이렇게 칼을 가지고 달려드니 말이다. 때때로 우리도 큰일에는 거뜬히 승리하면서도 작은 일에는 여지없이 무너지기 쉽다.

월요일 10월 25일 행동은 말보다 강력하다

도입)
자신들을 치기 위해 다윗이 온다는 그 소식을 들은 나발의 총명하고 아름다운(삼상 25:3절) 아내인 아비가일이 음식을 준비하고 내려가 무릎을 꿇고 다윗을 막았다. 아비가일은 다윗에게 하나님과 그의 은혜를 상기시켰다. 미련한 자 나발을 치는 것과 같은 시시한 일에 에너지를 낭비하지 말 것을 권면했다.(25절) 무엇보다 다윗이 광야에 있는 이유를 기억나게 했다. 아비가일은 보수하는 것을 막으시는 하나님(26절), 든든한 집을 세우실 하나님(28절), 그리고 다윗의 생명을 생명싸개 속에 싸서 보호하시는 하나님을 증거하였다(29절). 지혜로운 이 여인이 살인, 분노로서 다윗의 명성에 해를 줄, 치명적인 결과를 막았다. 그 많은 어려움과 시험 속에서도 자신을 지켜왔던 다윗의 생애가 한 순간에 추락할 뻔하였으나 이 한 여인의 출현이 그를 놀랍게 회복시켰던 것이다.

1. 삼상 25장을 읽으십시오. 이야기의 핵심은 무엇입니까? 이 이야기에서 즉각적으로 얻을
수 있는 교훈은 무엇입니까? 어떤 의문의 여지가 남아있까?

하인들의 이야기를 듣고 아비가일은 즉시 채비를 하였다. 그녀는 듣는 데 그치지 않고 행동으로 옮겼다. 삼상 25:18~19에서 화자는 그녀가 준비한 목록을 구체적으로 나열했다. 건포도, 무화과, 양, 볶은 곡식, 떡 그리고 포도즙. 이 음식들은 다윗의 부하들이 기대했던 것보다 훨씬 종류가 다양하고, 양도 풍족하였을 것이다.

이후 이야기는 극적으로 전개된다. 성경기자는 장면들 사이를 오가며 긴장감을 고조시킨다. 우리는 숨을 죽이며 만남의 순간을 기다린다. 감정이 극에 달한 다윗과 부하들은 미처 하나님께 묻거나 생각할 겨를도 없이 보복을 위해 출발하였다. 다윗과 함께 간 부하의 수는 분노의 정도를 말해 준다. 다윗의 병사 삼분의 이가 출격하였다.

분노에 대하여 적절히 대응하기란 매우 어렵다. 대체로 과민반응을 보이게 마련이다. 그래서 아비가일은 선물만 보내놓고 상황을 지켜보기 위해 기다리지 않았다. 그녀는 나귀의 안장 위에 올라 다윗을 만나기 위해 달렸다. 그녀는 비록 경솔하고 독불장군 같은 자와 결혼했을지라도 자신의 정신까지 짓밟도록 허락하지 않았다. 그녀는 스스로 피해자가 되는 것을 용납하지 않았다. 그는 여전히 자존감을 가지고 있었으며, 가문을 지키기 위해 목숨을 걸 준비가 돼 있었다. 소년 다윗이 골리앗에 맞섰던 것처럼 사태를 해결할 가능성은 거의 없었다. 하인들과 함께 음식을 싣고 나귀를 타고 가는 한 여인이 칼과 분노로 무장한 4백 명의 군사와 마주쳐야 했다.

한편 미련한 나발 역시 나름대로 바쁜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그의 아내가 분노한 군대를 대면하러 나아가고 있는 동안 그는 집에서 잔치를 열고 취해 있었다.

2. 다음 성경절들은 행동의 중요성에 대해 어떤 교훈을 주고 있까? 마 7:21, 25:31~46, 약 2:14~17.

말하기는 쉽다. 하지만 행동은 말보다 강력하다. 아비가일, 다윗 그리고 나발의 행동은 그들이 무엇을 생각하고 있으며, 누구를 중요하게 여기고 있는지, 그리고 그들의 동기는 무엇인지 분명하게 말해주고 있다.

교훈: 말보다 행동이 필요할 때가 있다. 왜냐하면 우리의 행동은 우리의 생각을 더 강력하게 말해주기 때문이다.

부가적용)
말 한마디로 천냥 빚을 갚는다"는 속담이 있다. 말의 위력을 나타내 주는 말이다. 말은 사람을 죽일 수도 있고 살릴 수도 있다. 말은 대화의 도구이지 판단의 도구가 아니다. 다른 사람을 판단하려면 먼저 자기 자신부터 판단해 보아야 한다. 파스칼은 이런 말을 했다. "이상한 일이 하나 있다. 사람은 다른 사람의 죄악과 잘못된 일에 대해서는 대단히 분개하면서 스스로의 잘못된 점은 인식치 않고 찾지 않으려 한다." 아비가일은 모든 위기 속에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손길을 보았다. 내가 앞에 나서게 된 것도, 이렇게 당신을 만나게 된 것도, 당신이 앞으로 왕에 오르는 그 모든 길도, 원수들의 손에서 당신을 보호하시고 구원하시는 일도, 앞으로 모든 일들이 잘 풀려 나가는 일도, 당신의 생명 그 자체도 하나님의 손 안에 있다고 고백하면서 하나님의 뜻에 맡기라고 다윗에게 부탁한다. 그녀는 모든 사건 속에서 하나님의 섭리가 어떻게 움직이고 있는가를 보고 있다. 위기 속에서 하나님이 누구를 들어쓰시는가를 신앙의 눈으로 보고 있었던 것이다. 그녀는 기도의 사람이자 믿음의 사람이었다. 그러기에 그녀는 위기 앞에서도 담대할 수 있었고, 두려움 없이 모든 문제를 해결해 나아갔던 것 같다. 참으로 지혜로운 여인이 아닐 수 없다. 우리 삶 앞에도 언제나 위기가 도사리고 있다. 견디기 어렵고 힘든 고통의 나날들이 언제까지 계속될지 아무도 모fms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우리가 믿음의 눈을 떠서 불가능속에 담겨져 있는 가능을, 절망 뒤에 숨어있는 소망을, 불행 속에 담겨있는 축복을, 위기 속에 숨어있는 하나님의 기회를 찾고 겸손히 자기희생의 길을 걸으며 하나님의 섭리에 순종하고 나아갈 때, 위기는 극복되고 영광의 미래가 아름답게 펼쳐진다는 것이다.

화요일 10월 26일 말할 때

도입)
참으로 지혜로운 한 여인의 감화가 얼마나 중요한가? 신앙으로 사는 여자의 지혜가 얼마나 남자들에게 필요한가? 남자들이 흥분하여 날 뛸 때 그 흥분을 믿음으로 가라앉히고 자제하게 하고 용서하게 하고 차분한 이성을 갖도록 돕는 여인의 조언이 얼마나 남자들에게 중요한가? 다윗은 이 여인을 만나서 고백한다. "오늘날 너를 보내어 나를 영접케 하신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를 찬송할지로다. 또 네 지혜를 칭찬할지며 또 네게 복이 있을지어다.(32,33절) 칼과 창이 지배하던 시대, 남자 중심의 시대에서 지혜로운 한 여인과의 만남이 추락할 뻔했던 다윗의 생애를 아름답게 회복시켰다. 우리는 성경에서 읽는 아름다운 여인들의 이야기, 룻, 에스더, 아비가일,...... 수많은 아름다운 여성들을 본다. 사랑하는 재림교회 여성 여러분~! 남자들이 분노할 때 같이 불 놓지 말고 이토록 지혜로운 권면으로 남자들의 마음을 가라앉히는 지혜로운 여인이 되시기를 바란다. 그래서 가정과 사회와 교회를 살리는 그런 지혜로운 여인이 되도록 하나님께 기도하시기 바란다.

골짜기에서 아비가일은 다윗의 군대와 마주쳤다. 그는 다윗에게 절하고 그가 이미 왕이 된 것처럼 예우하였다.

1. 삼상 25:23~31에서 아비가일의 말을 주의 깊게 읽으십시오. 나발의 대답(10~11절)과 얼마나 대조됩니까? 이는 두 사람의 차이점에 대해 무엇을 말해 주고 있까?


아비가일은 다윗을 “내 주여”라고 불렀다. 아마도 이 말은 다윗이 사냥감을 찾는 무리의 두목이 아닌 하나님의 기름부음 받은 왕답게 행동해야 함을 상기시켰을 것이다. 아비가일은 스스로 자존감을 유지하고 있었기에 다윗 안에 있는 존귀함에 호소할 수 있었다. 이 말로 인하여 그녀는 다윗의 진면목을 볼 수 있었고 다윗이 경건하게 행동하도록 격려할 수 있었다.

2. 아비가일이 다윗에게 건넨 첫 번째 말은 무엇이었까? 그녀의 말은 그대에게 무엇
을 상기시킵니까? 그녀의 의도는 무엇이었까? 출 32:32, 에 7:2~4, 사 53:12, 단 9:15~19, 롬 8:34 참조.

중재를 하려면 공통분모가 중요하다. 중재자는 중재 과정 중에 아무것도 바라지 않음을 명확히 할 필요가 있다. 그는 자신의 이기적인 관심을 기꺼이 뒤로 하고 오직 다른 이의 유익을 구해야 한다. 아비가일은 생명을 위협하는 사태를 남편을 제거하고 자유를 얻을 수 있는 방편으로 여길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녀는 자신과 남편을 동일시하고 그의 무가치한 생명을 위해 탄원하기로 결정하였다.

아마 가장 훌륭한 중재는 중보기도일 것이다. 우리는 스스로 기도할 수 없거나 기도할 마음이 없는 자들을 위해 기도한다. 우리는 자신의 소원과 필요를 내려놓고 이 사람들을 위해 하나님께 말씀드려야 한다. 우리의 기도는 하나님께서 사단의 영역에 깊게 개입할 수 있도록 여지를 마련해 드린다. 우리에 대한 하나님의 끝없는 동정심을 깨닫게 되는 것은 바로 우리가 다른 이를 위해 기도할 때이다. 우리를 저주하는 자를 축복하고 우리를 함부로 대하는 자들을 위해 기도할 줄 알아야 한다(눅 6:28).

교훈: 우리는 사람의 마음 속에 있는 존귀함에 호소하고 그들이 경건하게 행동할 수 있도록 지혜롭게 말하며, 그들의 유익을 위해 중보할 수 있어야 한다.

부가적용)
때때로 우리도 큰일에는 거뜬히 승리하면서도 작은 일에는 여지없이 무너지기 쉽다. 다윗이 그랬듯 우리도 그렇다. 특별히 화 낼 때 보면 아주 큰일에는 잘 참다가 작은 일에 다 쏟아 놓아서 공든 탑을 무너뜨리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우리가 조심해야 한다. "그런즉 선줄로 생각하는 자는 넘어질까 조심하라" 했다.(고전 10:12) 열 번 참았다가도 한 번 쏟아 놓으면 아무 소용이 없다. 그 한번이 우리의 공든 탑을 다 무너지게 만드는 것이다. 저는 그런 경우를 많이 보았다. 화 한번 잘못 내서 이혼까지 한 경우와, 화 한번 잘못 내서 직장에서 쫓겨난 경우 등, 특별히 화 한번 잘못 내서 인생의 큰 시험에 빠진 사람들을 얼마나 많이 볼 수가 있는지 모른다. 그래서 성경에 무어라고 했는가? "미련한 자는 분노를 당장에 나타내거니와 슬기로운 자는 수욕을 참느니라" (잠 12:14) "노하기를 더디 하는 자는 크게 명철하여도 마음이 조급한 자는 어리석음을 나타내느니라" (잠 14:29). "노하기를 더디 하는 자는 용사보다 낫고 자기의 마음을 다스리는 자는 성을 빼앗는 자보다 나으니라" (잠 16:32) 다윗은 참지 못하고 이런 실수를 한 것이다. 다윗은 자신을 죽이고자 하는 사울의 미치광이적 집착에도 불구하고 그를 하나님의 세우신 자로 인정하고 용서하였다. 다윗은 광야의 훈련을 통해 "광야의 영성"을 배웠다. 고독, 단조로움, 외로움 속에서 그의 영성이 개발되고, 갈급하면서 주님을 바라보는 훈련을 광야에서 받았다. 그런 그가 나발의 한 마디에 참지 못하고 분노에 휩싸여 복수를 맹세하였다. 다윗의 마음에 끌어 오르는 분노로 인하여 그 마음에 하나님은 없어지고 자신의 자아로만 꽉 차게 되었다. 하나님의 종으로서의 자아상(identity)을 잃어버렸던 것이다. 그는 점차 마음이 회복되어 가는 과정 속에 있었는데 그의 상처와 마음의 자존심을 건드린 나발로 인해 다시 그 마음이 예전 상태로 돌아가 버린 것이다. 그런데 그가 어떻게 그런 실수에서 벗어 날 수 있었는가? 그를 도운 사람이 있었다. 그는 아비가일이라는 여인이다.

수요일 10월 27일 아비가일이 거부한 일

도입)
우리는 내가 어떤 존재인지 확인하는 것이 필요하다.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들이다. 우리의 마음속에 이는 분노로 인하여 하나님의 구속의 계획을 망칠 수 없는 하나님의 자녀인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있어 분노는 하나님의 의를 이룰 수가 없는 것이다. 우리는 분노하거나 화를 내서 인생을 망쳐서는 안될 하나님의 자녀라는 정체성을 항상 잊지 말아야 한다. 우리가 화를 낼 때, 우리 자신도 용서 긍휼이 필요한 존재임을 알아야 한다. 다윗은 나발이 자신을 모함하고 모욕한 가해자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아비가일은 나발이 가해자가 아니라 불쌍한 자, 치유가 필요한 자임을 지적했다. 나발도 피해자인 것을 지적한 것이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나발은 남을 욕하고 남에 대한 이해성이 부족하고 정말 미련한 사람이었지만 그러나 그가 가해자가 아니라 오히려 치유가 필요한 불쌍한 자임을 아비가일이 지적하여 준 것이다. 우리는 어떤 사람들이 나를 공격하여 올 때, 그 사람도 상처가 있는 사람이고 그도 치료가 필요한 불쌍한 자임을 기억하고 상대방을 이해할 수 있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란다.

사람들은 학대자들을 두려워한다. 사람들은 학대자를 두둔하며, 그의 기분을 누그러뜨리기 위해 거짓을 말하며 진실을 감춘다.

1. 삼상 25:25~26을 읽으십시오. 아비가일은 남편의 흠에 대하여 얼마나 공개적이었까? 이런 점에서 비추어 볼 때, 그녀가 남편을 위해 중재한 일은 얼마나 의미심장한 일입니까? 누군가 지금 그대를 위해 중재한다면, 그대에 대해서 어떤 말을 하게 될까요?


비록 남편을 구하기 위해 기꺼이 목숨을 걸었지만, 아비가일은 고귀함을 잃지 않았다. 그는 나발에 대하여 거짓을 말하지 않았다. 그녀는 남편이 문제가 많은 사람임을 알고 있었고, 그 사실을 사람들 앞에 밝히기를 두려워하지 않았다.

학대 받는 관계에 있는 사람은 학대자의 행동이 자기 때문이라는 죄책감을 느끼기도 한다. 그러나 아비가일은 그렇지 않았다. 그녀의 자존감은 강했다. 이런 자존감은 그녀의 사명감의 밑바탕이 되었다. 그녀는 다윗의 길을 막고 선물을 준 일에 대하여 자신에게 공을 돌리지 않고, 단지 다윗의 마음을 변화시키는 일에 하나님께서 자신을 도구로 사용하셨다고 생각했다. 아비가일의 자기확신은 다윗이 자기를 분명하게 인식하는 데도 도움이 되었다. 그녀는 다윗이 여호와의 싸움을 싸워야 하기 때문에 개인적인 모욕을 갚기 위해 시간과 힘을 낭비하지 말아야 함을 상기시켰다. “내 주에게서 악한 일을 찾을 수 없”(삼상 25:28)다는 아비가일의 언급은 사실이기도 했지만 다윗이 기름부음을 받은 왕이라는 높은 지위를 스스로 인정하지 않고 있음에 대한 경고이기도 했다.

아비가일은 또한 하나님께서 다윗의 생명을 생명싸개에 두셨음을 일깨워 주었다. 따라서 체면을 세우거나 명예를 회복하기 위해 노력할 필요가 없었다. 그런 것들은 하나님께서 대신 해 주실 것이다.

아비가일이 살았던 시대의 여인들은 이혼이나 별거를 선택할 수 없었다. 지상의 관점에서 여자는 죽을 때까지 남편의 소유였다. 그러나 아비가일은 자신이 쓸모없이 갇혀 살아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녀는 하나님께서 언젠가 남편을 해결해 주실 것이라고 믿었다.

아비가일의 언변을 보면 우리가 하나님께 굴복할 때 어떤 상황에서도 지혜를 발휘할 수 있음을 깨닫게 된다. 지혜는 이론이 아니라 이웃과 함께 살아가고 그들에게 반응하는 실제적인 방법이다.

교훈: 학대를 받는 최악의 상황에서도 하나님께 의지하는 자들은 다른 사람들을 도울 수
있는 강한 자존감을 지켜 나아간다.

부가적용)
분노의 원인을 찾아보면 대개 분노는 자신에게도 책임이 있는 것이다. 우리는 주님의 음성을 듣는 유보의 시간이 필요하다. 분노를 통해 남을 변화시킬 수는 없다. 자신을 변화시켜야 한다. 하나님께 나아가 부당한 대우, 불공평한 취급, 억울한 것들을 다 하나님께 쏟아놓고 부르짖어 기도하며 십자가에 달리신 주님을 바라보며,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 바른 영성에 기초한 치유와 회복의 역사가 일어나도록 기도하여야 한다. 우리는 오늘의 이야기 속에 세 종류의 사람을 생각해 보자. 하나는 나발과 같은 사람이다. 그는 자기밖에 모르는 사람이고 자기 이익에만 눈이 어둡고 남을 전혀 생각하지 않는 사람이다. 남을 화내게 하는 사람이다. 그런가 하면 다윗과 같은 사람이 있다. 나발처럼 남을 화나게 하지는 않지만 화나는 일이 있을 때 참지 않고 그 화를 나타내는 사람이다. 그런 사람이 있기 때문에 이 세상에는 늘 피흘리는 일들이 일어난다. 그런가 하면 아비가일 같은 사람이 있다. 화난 사람들의 마음을 식혀주고 화나게 하는 사람들을 위해 중보해 주는 사람이다. 이런 사람이 있기 때문에 이 세상은 유지가 된다. 그나마 피 흘리는 일들이 줄어들고 화평이 이루어진다. 우리는 어떤 사람인가? 나발이나 다윗과 같은 사람인가? 아니면 아비가일과 같은 사람인가?

목요일 10월 28일 등장 그리고 퇴장

도입)
아비가일의 모든 말을 경청한 다윗은 그녀를 보내신 하나님을 찬송하였다. 다윗은 그녀의 제안을 받아들여 나발을 죽이려던 계획을 거둘 뿐 아니라 그녀의 모든 청을 들어주겠다고 약속한다. 아비가일은 집으로 돌아온 후에 기회를 보아 나발에게 모든 일을 고한다. 그리고 10일 후에 하나님께서 나발의 생명을 거두셨다. 다윗으로 하여금 복수의 피를 흘리는 것을 피하게 하시고 직접 나발을 심판하신 하나님의 모습 속에서 우리는 다윗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을 보게 된다. 하나님은 다윗을 거룩하게 보존하심으로, 그가 이스라엘의 왕이 되기에 부족함이 없도록 준비시켜 주셨던 것이다. 인간적인 노력으로 스스로의 몸과 마음을 정결하게 유지하는 데에는 한계가 있다. 그러나 우리가 성령의 도우심을 구한다면, 그 거룩함을 지켜나갈 수 있을 것이다.

보통 사람들과 같지 않게 다윗은 건설적인 비판을 받아들였다. 그리고 아비가일의 말 속에서 하나님의 일하심을 보았다. 순간 그는 자신이 하려던 일의 결과를 멀리 내다보게 되었다. 그리고 피흘림을 막기 위해 개입해 주신 하나님께 감사하였다.

집에 돌아온 아비가일은 남편이 듣지 못할 상황임을 보고 지혜롭게 다음 날 아침까지 기다렸다가 전날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려주었다. 나발은 공포에 사로잡혔다. 그는 뇌졸중과 같은 증세를 보이다 열흘 만에 죽었다. 다윗은 아비가일을 잊지 않고 부하들을 보내 청혼의 뜻을 전했다.

1. 삼상 25:41에 기록된 아비가일의 말을 살펴보십시오. 이를 통해 아비가일의 어떤 면을 알게 됩니까? 이와 동일한 행동 원칙을 보여주는 성경의 예가 어디에 또 있까?


아비가일은 감화를 끼치는 여인이었다. 그녀에게는 다섯 명의 하녀가 있었지만, 그는 기꺼이 함께 섬기는 여주인이었다. 예수께서도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한다고 말씀하셨다(마 20:28).

아비가일은 다윗과 결혼한 이후에도 절대 동화 같은 인생을 살지 않았다. 당시의 관습대로 다윗은 많은 아내를 두었고, 그의 가족사는 하나님의 이상과 거리가 멀었다. 아비가일은 다윗의 둘째 부인이었고, 다윗은 여전히 사울 왕으로부터 도망치는 신세였다. 시글락에서 그녀는 다른 부하들의 가족들처럼 아말렉의 노예로 잡혀갔다가 구조되었다. 이후부터 그녀는 더 이상 성경에 등장하지 않는다. 우리는 다윗 왕 곁에 이렇게 지혜롭고 아름다운 여인이 있었으니 앞으로 전개될 이야기에서도 중요한 역할을 하리라고 기대하지만 성경은 그녀에 대하여 침묵하고 있다. 단지 그녀에게 다니엘(대상 3:1) 또는 길르압(삼하 3:3)이라는 아들이 있었다는 기록이 추가됐을 뿐이다. 아비가일과 그의 자녀들은 그렇게 무대에서 사라졌다. 어떤 학자들은 아비가일과 그녀의 아들들이 살해되었을 것이라고 믿고 있다. 이후에 다윗의 아들들이 저지른 강간, 살인, 봉기, 반란 이전에 사망했다면 오히려 다행이다.

예수님을 따르는 우리도 꼭 동화 같은 인생을 살지는 못한다. 우리는 인생의 매 순간을 다 이해하지 못하며 오직 하나님만이 처음과 끝을 아신다. 그래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하나님의 선하심에 대한 신뢰심이다.

교훈: 이 땅에서는 지혜롭고 신앙심이 깊은 사람도 행복한 결말을 보장받지 못한다. 그러나
구속의 역사 속에서 책임을 다한 그들의 영원한 운명은 하나님께서 책임져 주신다.

부가적용)
나발의 죽음을 전해들은 다윗은 다시금 하나님의 역사하심을 찬양한다. 그리고 아비가일에게 사환들을 보내어 자신의 아내가 되도록 초청한다. 사실 아비가일이 나발에 대한 다윗의 보복 계획을 저지한 것은 매우 위험한 일이었음에 틀림없다. 다윗이 마음을 돌이키지 않는다면 그녀도 목숨을 잃을 수 있는 상황이었다. 그러나 하나님에 대한 그녀의 믿음과 지혜로 인해 그녀는 생명이 보존됐을 뿐 아니라 이제는 이스라엘 왕의 아내가 되는 영광을 얻게 되었다. 이러한 아비가일은 우리에게 믿음의 표상이 된다. 모든 일이 잘 풀려 나갈 때는 누구나 독실한 신앙을 가지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어려움을 당할지도 모르는 길을 담대히 걸어갈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을 믿는 믿음으로만 가능한 것이다. 아비가일은 다윗과 결혼함으로 이상적인 성도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그리스도와 결혼할 하나님의 백성들의 모습은 이런 지혜로운 사람들이 되어야 함을 보여주는 것일 것이다. 신부로서의 아름다운 모습을 보여줌으로 훗날 그리스도의 신부로서의 우리의 품성이 어떠한 모습이 되어야 할지를 보여주는 모습의 상징으로서 보여주신 것일 것이다.

금요일 10월 29일 더 깊은 연구를 위해

“이 말들은 하늘의 지혜를 받은 자의 입술에서만 나올 수 있었다. 꽃향기와 같은 아비가일의 경건은 얼굴과 말과 행동에서 무의식적으로 모든 자들에게 풍겼다. 하나님의 아들의 영이 여인의 마음에 거하고 계셨다. 은혜가 깃들고 친절과 평화로 가득 찬 그의 말은 하늘의 감화를 끼쳤다. 다윗은 좋은 감정으로 돌아왔고 그는 그의 조급한 의도의 결과가 어떠했을 것인가를 생각하고 떨었다. “화평케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요”(마 5:9). 이 이스라엘 여인처럼 분노한 마음을 가라앉히고 조급한 충동을 막고 조용한 말과 때에 적합한 지혜로 큰 악을 억누를 자들이 많이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성화된 그리스도인의 생애는 항상 빛과 위로와 평화를 주고 있다. 이것은 순결, 기지, 단순, 유용성으로 분명히 식별된다. 이것은 감화를 신성하게 하는 무아적 사랑에 지배된다. 이것은 그리스도로 충만하고 이것을 가진 자는 가는 곳마다 빛의 자취를 남긴다. 아비가일은 현명한 책망자요 권고자였다. 다윗의 격분은 여인의 감화와 설득의 능력으로 가라앉았다. 다윗은 그가 현명하지 못한 행동을 취했고 자신의 마음이 자제력을 잃었음을 수긍하였다. 다윗은 겸손한 마음으로 “의인이 나를 칠지라도 은혜로 여기며 책망할지라도 머리의 기름같이 여긴”(시 141:5)다는 자신의 말과 같이 그 책망을 받아들였다. 다윗은 감사히 생각하고 축복하였으니 이는 그 여인이 그를 의롭게 충고한 까닭이었다. 책망을 받을 때에 안달하지 않고 그 책망을 받기만 해도 칭찬받을 만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다. 그러나 책망을 감사한 마음으로 받아들이고 그들을 책망하여 악한 길에서 구원하려고 노력하는 자를 축복하는 자는 얼마나 드문가!”(부조와 선지자, 667)


핵심적인 토의를 위해

1. 배우자 학대는 아주 심각한 문제입니다. 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는 그런 어려움을 당하고 있는 자들을 도울 책임이 있다. 그래서 우리는 매년 8월 4째 안식일을 “학대 및 가정폭력 예방 강조일”로 정하여 신자들을 교육하고 이런 문제에 대하여 경각심을 불러 일으키는 기회로 삼고 있다. 우리는 이런 심각한 고통을 겪고 있는 자들을 어떻게 도와야 합니까?

2. “화평하게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요”(마 5:9). 이번 주 교과에서 우리는 화평하게 하는 자의 어떤 특성을 배울 수 있었까? 원칙의 타협 없이 평화를 추구할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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