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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11과 은혜의 선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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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paulcho 작성일10-09-01 09:33 조회4,244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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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제 11과
은혜의 선택
9월 11일
일몰: 오후 6시 47분

도입)
하나님께서는 구원 받을 사람들을 예정하시고 은혜를 차별하시는가? 아니다. 하나님이 사람을 심판하시고 구원하시는 모든 과정에는 하나님의 은혜가 나타나 있다. 하나님께서는 죄인들이 죽는 것을 원하지 않으신다. 하나님의 갈망은 모든 죄인들이 돌이켜서 사는 것이다. 하나님의 심판에는 언제나 목적이 있다. 하나님의 심판의 목적은 회복을 가져오는 것이다. 그분은 어떤 것을 회복하시려는 목적을 떠나서는 심판을 행하시지 않으신다. 백성이나 세상의 상태가 그분의 의와 거룩과 영광에 일치하지 않을 때마다, 하나님은 회복의 목적으로 심판을 집행하실 것이다. 하나님은 그분의 의, 거룩, 영광에 따라 그분의 백성들을 회복하기를 원하신다. 하나님께서 심판을 집행하실 때 무한한 인자를 가지고 그분의 백성이 회개하기를 바라신다. 중요한 것은 과거가 아니라 현재이다. 하나님은 은혜로운 분이시기 때문에 누구든지 죄악으로부터 돌이켜 회개한다면, 그 즉시 용서를 받는다. “그래도 네 민족은 말하기를 주의 길이 공평치 않다 하는도다. 그러나 실상은 그들의 길이 공평치 아니하니라.”(겔 33:17절) 고 말씀하신다. 하나님은 모든 인간에게 은혜로운 분이시며 악인에게 조차도 은혜로운 분이시다. 그럼으로 구원 받는 자와 심판 받는 모든 자가 모두 다 하나님의 은혜 아래 있다. 악인이 죽는 것도 하나님의 은혜이다. 마지막 날 죄인들에 대하여 하나님께서 얼마나 은혜로우셨는지 당신의 공의와 사랑이 온 천하에 드러날 것이다.

기억절: “그러므로 내가 말하노니 하나님이 자기 백성을 버리셨느뇨 그럴 수 없느니라 나도 이스라엘인이요 아브라함의 씨에서 난 자요 베냐민 지파라”(롬 11:1).

* 학생은 활기찬 교과 토의를 위해 반드시 예습을 하십시오.

안식일 오후
|연구범위| 로마서10~11장
로마서 10장에서 분명히 나타나는 한 가지는 모든 인간의 구원을 보기 원하시는 하나님의 열망과 그분의 사랑이다. 구원에서 제외된 집단은 없다. 로마서 10장은 이점을 분명히 하고 있다.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차별이 없음이라”(롬 10:12). 모든 사람은 죄인이며,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세상에 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필요로 한다. 이런 은혜는 국적이나 혈통이나 율법의 행위가 아닌 오직 온 세상의 죄인들을 대신하여 죽으신 예수님을 믿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이에게 주어진다. 역할이 바뀌었지만 구원의 기본 계획은 전혀 바뀌지 않았다.
바울은 로마서 11장에서도 이 주제를 이어간다. 여기서도 바울은 택하심과 부르심에 관하여 말하는데, 중요한 것은 이것이 온 세상에 복음을 전하려는 하나님의 계획과 역할에 관한 것이지 개인의 구원에 관한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구원에서 제외된 집단은 없다. 절대 그런 문제를 논하고 있는 것이 아니었다. 그래서 십자가 이후, 특히 바울이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소개한 이후 유대인과 이방인으로 구성된 초기 기독교는 세계를 복음화 하기 위한 역할을 감당하였다.

일요일
9월 5일
율법의 마침

도입)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신 것은 하나님으로서 오신 것이 아니다. 신, 인 즉 인성을 취하셨으며, 여자에게서 나셨고, 율법 아래에 오셨으며, 율법의 요구에 복종하시되 죽기까지 복종하셨다(갈4:4, 빌2:8, 히5:7-10). 새 인류의 머리로서 침례를 받음으로 율법의 요구를 이루시고(마3:15), 범죄한 우리에게 율법은 준엄한 심판과 형벌을 요구하는데, 하나님의 율법 앞에서, 인성을 입으신 우리의 대표자가 혈육의 동작으로, 우리가 받아야 할 심판과 형벌을 대신 받으셨으므로 하나님의 영광을 변호하고, 의를 드러내며, 공의를 만족시키셨기에 율법의 궁극적인 요구를 다 이행하신 마침이 되셨다는 뜻이다. 하나님의 율법의 준엄한 요구가 완전히 성취되고, 그래서 하나님의 공의가 만족되었음을 선포하고 확증하는 것이 무엇인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이다(롬1:4, 4:24, 8:34). 그리스도의 부활은 율법이 요구하는 형벌이 이루어졌다는 선언이며, 그로인해 하나님의 공의가 만족되었음을 확증하는 것이다. 즉 그리스도의 부활은 그가 죄와 사단과 율법과 사망의 권세를 이기시고 그 영역 밖으로 나오셨음을 선포하는 것이다. 율법의 모든 요구는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과 그의 사역 안에서 만족되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율법의 요구를 이루었다는 것은, 율법에 대하여 어떤 작별을 고했다는 것이 아니라, 율법에 대한 완벽한 순종을 통해 율법의 요구조항을 다 만족시키셨으므로 "...다 이루었다...(요19:30)" 는 의미의 마침이 되셨다는 것이다. 즉 의를 이루기 위한 율법의 마침이란 뜻이다.

❶ 롬 10:1~4을 읽으십시오. 이전의 말씀들을 바탕으로 했을 때, 이 말씀이 주는 기별은 무엇입니까? 우리는 언제 “자기 의”를 세우려는 위험에 빠지게 됩니까?

율법주의의 형태는 다양하다. 어떤 것은 매우 미묘하다. 자신을 바라보는 자들, 즉 자신의 선행과 식습관, 엄격한 안식일 준수, 그들이 금하고 있는 일들, 심지어 최고의 의도를 가지고 행했던 업적들을 바라보는 자들은 율법주의의 덫에 빠지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순간마다 죄에 빠지기 쉬운 자아보다는 거룩하신 하나님을 바라보아야 한다. 그것이 그리스도의 의와 반대되는 “자기 의”로부터 우리를 보호할 수 있는 가장 확실한 방법이다.
롬 10:4은 로마서 전체 기별의 핵심을 파악하는데 중요한 성경절이다. 우선 우리는 말씀의 배경을 알 필요가 있다. 많은 유대인들은 “자기 의를 세우려고 힘”쓰고 있었다(롬 10:3). 그들은 “율법으로 말미암는 의”를 추구하고 있었다(롬 10:5). 그런데 메시야가 오심으로 참된 의의 길이 제시되었다.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고정시킨 모든 자에게 의가 베풀어졌다. 그분은 구약의 제사 제도가 가리켰던 분이었다.
여기에 나오는 율법의 정의에 십계명을 포함시킨다할지라도 십계명이 폐지된 것은 아니다. 율법은 우리의 죄와 잘못, 부족을 지적함으로써 구주에 대한 필요와 오직 예수 안에서만 발견할 수 있는 용서와 의에 대한 필요로 우리를 인도해 준다. 이런 의미에서 그리스도는 율법의 마침이다. 왜냐하면 그리스도는 율법이 우리를 인도해 주려고 했던 종착점이기 때문이다. “마침”을 의미하는 그리스어 텔레오는 “목표” 또는 “목적”으로 해석될 수도 있다. 그리스도는 율법이 우리를 인도하고자 하는 최종 목표이다.
이 말씀을 근거로 십계명, 특히 넷째 계명의 폐지를 가르치는 것은 바울이 가르쳤던 수많은 교훈에 역행하는 것이다.

교훈: 예수님은 율법의 마침이 되셨다. 이제 우리는 자신의 의를 바라보지 말고 그리스도의 의와 은혜에 시선을 고정시켜야 한다.

부가적용)
율법은 죄를 깨닫게 할 뿐만 아니라, 죄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을 선언하며, 형벌을 요구한다. 하나님은 우리의 죄를 그에게 전가시키시고 우리를 대신하여 죄를 삼으셨다(고후5:19-21). 그의 대속사역으로 이루시고 획득하신 의를 우리에게 선물로 주신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모든 사람들에게 해당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믿는 모든 자" 곧 그리스도 안에 속하고, 그에게 연합된 그의 몸에게만 해당되는 진리이다(요17:2, 6, 9-11, 20, 24). 아담 한 사람의 실패는 그 안에 속한 모든 사람들의 실패였으며, 두 번째 사람 예수 그리스도의 승리 또한 그 안에 속한 모든 사람들의 승리인 것이다(롬5:12-19). 성령께서 그리스도와의 하나 되게 하시는 신비로운 연합을 통하여 그가 획득하신 의를 그에게 속한 자들의 의가되게 하시는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율법의 요구를 다 이루셨고, 이제 우리가 그 안에 있으므로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롬8:1)" 라고 선언한다. 그러나 이것이 "그리스도밖에 있는 모든 자들" 에게까지 미치는 것은 아니다. 그들은 여전히 율법의 정죄아래 있을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 안에 속한 자라면, 아담 안에 속한 옛사람을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았으며(롬6:6), 또한 죄에 대하여 죽고(롬6:11), 율법에 대하여도 죽었다(롬7:4). 즉 율법이 죽은 것이 아니라, 율법에 대하여 죽었다는 것이다(죄가 죽은 것이 아님). 이것은 이제 율법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는 뜻이 아니라. 율법이 우리로부터 불가능한 것을 요구하고, 우리를 정죄하는 차원에서는 더 이상 율법아래 있지 않고 용서를 받았다는 뜻이다.

월요일
9월 6일
은혜로 선택됨

도입)
이스라엘은 이방인들에 비해 하나님께 많은 특혜를 받았다. 그들은 하나님의 백성으로 선택을 받았으며, 세상을 구원할 제사장 나라로 위임받았다. 하나님은 그들에게 율법과 하나님을 섬기는 규례를 주셨으며, 그들에게 자신의 영광을 나타내셨다. 그리고 하나님은 그들을 통해서 세상에 메시아를 보내 주셨다. 그러나 그들은 하나님이 보낸 메시아를 거절하는 과오를 범했다. 그리고 이로 인해 하나님은 복음을 이방인들에게 전하게 하셨다. 바울은 이러한 일을 생각할 때마다 항상 마음속으로 깊은 고통을 느끼고 있었다. 그렇다면 이스라엘은 이제 영원히 하나님으로부터 버림을 받은 것일까? 이제 이스라엘은 더 이상 구원받을 희망이 없게 되었는가? 바울은 바로 이러한 문제에 대해서 독자들에게 이야기 하고 있다. 하나님의 말씀은 폐지되지 않았다. "물론 하나님의 말씀은 폐지되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모든 이스라엘 사람들이 다 이스라엘은 아니기 때문입니다."라고 말한다. 바울은 이스라엘의 거역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을 향한 하나님의 약속은 취소되지 않았다고 선언한다. 왜냐하면 모든 이스라엘 사람이 다 하나님의 백성으로 선택받은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처음부터 이스라엘 백성들 중에는 두 개의 이스라엘이 있어 왔다. 하나는 혈통을 따른 육적인 이스라엘이고, 다른 하나는 약속을 받은 영적인 이스라엘이다. 우리가 잘 아는 대로 이스마엘이나 에서는 혈통으로는 이스라엘인이었지만, 하나님의 약속에서 제외되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 백성 중에서 일부가 메시아를 거부하고 하나님의 약속에서 멀어진 것도 이상한 일이 아니다. 그들은 이스라엘이나 에서처럼 약속의 자녀가 아니었기에 메시아를 거부하고 약속에서 제외된 것이다. 그들은 성령을 통해서 할례를 받은 영적인 유대인이 아니라, 혈통적인 유대인이었다. 그러므로 그들이 하나님의 약속에서 제외되었다고 해서 이스라엘에 대한 하나님의 약속이 취소된 것은 아니다.

❶ 롬 11:1~7을 읽으십시오. 이 말씀은 일반적으로 알려져 있는 가르침을 어떻게 부인하고 있습니까?

“하나님이 자기 백성을 버리셨느냐?”는 질문에 대하여 바울은 그렇지 않다고 말한다. 그리고 그 증거로서 은혜로 선택받은 남은 자들이 있다고 주장했다. 구원은 유대인이든 이방인이든 그것을 영접하는 누구에게나 열려있다.
우리는 최초의 그리스도인들이 모두 유대인이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예를 들어 오순절에 회심한 집단은 모두 유대인들이었다. 그 다음 베드로가 보았던 특별한 이상을 통해서 이방인들도 동등하게 그리스도의 은혜에 접근할 수 있으며 복음이 그들에게도 전해져야 한다는 사실이 확인되었다(사도행전 10장과 행 15:7~9 참 조).

❷ 롬 11:7~10을 읽으십시오. 정말 하나님은 예수님을 거절한 이스라엘이 구원에 대하여 눈이 멀도록 하셨습니까? 이런 이해는 어떤 점에서 잘못되었습니까?

바울은 여기서 유대인들이 그 권위를 인정하고 있는 구약 말씀을 인용하고 있다. 이 말씀은 마치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어리석게 만들어서 보지 못하고 듣지 못하게 하신 것처럼 설명하고 있다. 정말 하나님께서 구원을 밝혀주는 빛을 보지 못하도록 그들의 눈을 가린다는 말인가? 절대 그렇지 않다. 이 본문의 말씀을 이해하기 위해서 우리는 로마서 9장의 조명을 받을 필요가 있다. 바울은 개인의 구원에 관하여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구원에 있어서 어떤 집단도 제외시키지 않으시기 때문이다. 이 말씀은 지금까지 살펴 본 것처럼 하나님의 역사 속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감당했던 역할에 관한 것이다.

교훈: 하나님의 구원의 계획 속에서 이스라엘 백성은 예수님을 거절하는 역할을 하게 되었다. 그러나 그로 인하여 구원의 은혜는 모든 민족에게 미칠 수 있게 되었다.

부가적용)
바울은 이스라엘의 거역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을 향한 하나님의 약속은 취소되지 않았다고 선언한다. 왜냐하면 모든 이스라엘 사람이 다 하나님의 백성으로 선택받은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처음부터 이스라엘 백성들 중에는 두 개의 이스라엘이 있어 왔다. 하나는 혈통을 따른 육적인 이스라엘이고, 다른 하나는 약속을 받은 영적인 이스라엘이다. 우리가 잘 아는 대로 이스마엘이나 에서는 혈통으로는 이스라엘인이었지만, 하나님의 약속에서 제외되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 백성 중에서 일부가 메시아를 거부하고 하나님의 약속에서 멀어진 것도 이상한 일이 아니다. 그들은 이스라엘이나 에서처럼 약속의 자녀가 아니었기에 메시아를 거부하고 약속에서 제외된 것이다. 그들은 성령을 통해서 할례를 받은 영적인 유대인이 아니라, 혈통적인 유대인이었다. 그러므로 그들이 하나님의 약속에서 제외되었다고 해서 이스라엘에 대한 하나님의 약속이 취소된 것은 아니다. 이러한 사상은 이미 구약에서도 여러 번 언급된 적이 있다. 여러 선지자들은 이스라엘이 멸망한 후에 그들 중에 "경건한 자들"이 남아서 구원을 받게 될 것이라고 예고했다. 선지자들은 그들은 "남은 자"라고 불렀다. 구약 시대에 많은 유대인들이 살았지만, 그들 중에 대부분은 혈통적으로만 유대인이었다. 그러므로 그들은 이방인과 같이 생각하고 이방인과 같은 가치관을 가지고 살았다. 하나님이 구원을 약속한 사람들은 이러한 육적인 유대인이 아니었다. 하나님은 그들 중에서 소수의 사람들을 남겨두셨으며 그들이 바로 구원의 대상이 될 것이라고 선언하셨다. 주님이 탄생할 때에 하나님께 쓰임을 받은 요셉과 마리아, 엘리사벳과 사가랴, 그리고 시므온과 안나와 같은 사람들은 하나님이 선택한 남은 자들이었다(눅 2:38). 주님은 나다나엘을 보고 이렇게 말씀하셨다. "이는 참 이스라엘 사람이라 그 속에 간사한 것이 없도다"(눅 1:47). 주님은 그가 진정한 영적인 이스라엘인이라고 증거해 주셨다.

화요일
9월 7일
접붙인 가지

도입)
바울은 구원받은 이방인들이 취해야 할 두 가지 태도에 대해 말했다. 첫째는 유대인들에 대해 자긍하지 말라는 것이다. 유대인은 원 가지(뿌리)이고 이방인은 접붙인 지류(가지)인데, 유대인이 예수님을 믿지 않아 꺾이고 접붙여진 이방인이 유대인에게 약속된 특권을 대신해 누리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구원받은 이방인은 구원받지 못한 유대인에 대해 교만하거나 우월감을 가져선 안 된다. 둘째는 자신의 공로로 구원받은 것처럼 생각하고 하나님 앞에서 높은 마음을 품거나 방자하게 행치 말라는 것이다. 만일 그렇게 처신한다면 하나님은 이방인들도 얼마든지 꺾어 버리신다는 것이다. 우리가 받은 구원은 다른 사람들을 구원에 이르게 하는 도구가 되고, 하나님의 은혜 앞에 자신을 낮추고 감사하는 근거가 돼야 한다. 하나님은 이방인이든, 유대인이든 모두 하나님의 백성이 되기를 바라신다. 유대인도 믿음이 없으면 가차 없이 가지에서 자르신다. 이방인이라도 믿음이 있으면 접붙여서 좋은 나무로 만드신다. 우리가 믿음으로 하나님께 붙어 있기만 하면 열매를 맺는 나무가 될 수 있다. 우리가 유대인이든, 이방인이든 상관하지 말고 하나님께 붙어 있도록 믿음을 지켜야 한다. 믿음이 없어 버림받은 유대인이라도 회개하고 돌아오면 다시 접붙여 좋은 나무를 만드시는 하나님이시다.

❶ 롬 11:11~15을 읽으십시오. 이 말씀에서 바울은 어떤 위대한 소망을 전하고 있습니까?

이 말씀에서 우리는 두 개의 평행 문구를 발견할 수 있다. (1) “그들(이스라엘)의 충만함”(12절)과 (2) “그(들의) 받아들이는 것”(15절). 바울은 이스라엘의 쇠락과 퇴출은 한시적인 것이며 그 뒤에 충만함과 용납이 있을 것이라고 믿었다. 이것은 바울이 11장에서 제기한 “하나님이 자기 백성을 버리셨느냐?”는 질문에 대한 두 번째 대답이다. 한시적으로 버려진 것처럼 보였던 것이다.

❷ 롬 11:16~24을 읽으십시오. 여기서 바울이 말하고자 하는 바는 무엇입니까?

바울은 이스라엘의 신실한 남은 무리를 귀한 감람나무에 비유하였다. 그 나무에서 잘려진 가지 몇 개는 믿지 않는 자들을 의미한다. 이 비유를 통해 바울은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버리지 않으셨음을 증명한다(2절). 뿌리와 그루터기가 아직 남아 있는 것이다.
예수님을 거절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일어났던 일은 이방인 신자들에게도 일어날 수 있는 일이었다. 성경은 “사람이 한번 구원받으면 그 구원은 영원하다.”는 교리를 가르치지 않는다. 구원을 받을 자유도 있지만, 구원을 거절할 자유도 우리에게 있다. 우리가 ‘실수할 때마다 구원을 잃어버린다.’거나 ‘완전하지 않으면 구원받을 수 없다.’는 생각도 조심해야 하지만, 반대로 ‘한번 하나님의 은혜를 입으면 구원의 특권에서 멀어질 수 있는 선택은 불가능하다.’는 생각도 피해야 한다. 단지 “하나님의 인자하심에 머물러 있”(22절)는 자들만이 구원을 얻게 될 것이다.
신자들은 자신의 선함을 자랑하거나 동료 인간에 대하여 우월감을 가져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구원은 선함이나 우수함의 대가가 아니라, 선물이기 때문이다. 십자가 앞에서 그리고 하나님의 거룩함이라는 표준 앞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가 필요한 죄인들이라는 점에서 모두 똑같다. 우리에게는 자랑할 것이 없다. 우리의 자랑은 이 땅에 오셔서 고통당하시고, 우리 죄를 대신해 죽으시고, 어떻게 살아야 할지 모본을 보여주시고, 그렇게 살 힘을 약속하신 예수밖에 없다. 그분이 없다면 이 세상 모든 것을 다 준다하여도 우리에게는 소망이 없는 것이다.

교훈: 구원 받는 일에 있어서 인간이 자랑할 것은 없다. 오히려 선민사상을 자랑했던 이스라엘은 자리를 잃었고, 예수님을 믿은 이방인은 그 자리를 대신했다.

부가적용)
이스라엘의 실패는 이방인들에게 구원을 가져다주었다. 따라서 바울은 이방인들에게 교만하지 말고 하나님을 더욱 두려워하라고 교훈한다. 원 가지인 이스라엘을 꺾으신 하나님이 접붙인 가지인 이방인들도 꺾으실 수 있기 때문이다. 이방인은 어디까지나 접붙여진 돌 감람나무이다. 참 감람나무 가지인 유대인들이 잘렸는데 돌 감람나무인 이방인들이 그 잘린 가지에 접붙여졌다. 그래서 참 감람나무의 진액을 함께 받는 자 되었다. 참 감람나무는 물론 하나님이요 그리스도이시다. 이방인은 본성적으로 접붙여진 가지이다. 이방인은 유대인의 보호를 받고 있다. 유대인이 전해준 하나님의 말씀과 복음을 통해서 보호를 받고 있다.

수요일
9월 8일
신비가 드러남

도입)
오늘은 이방인들의 충만한 수에 대한 비밀을 말한다. 이 비밀 신비가 무엇인가? 이방인들의 충만한 수가 들어오기까지 이스라엘(곧 유대인들)의 더러는 우둔하게 될 것이라는 것이다. 그러다가 이방인들의 충만한 수가 차게 되면, 온 이스라엘, 곧 유대인들과 이방인들의 모든 구원 받은 자들이 구원에 이르게 된다는 것이다. 이방인들의 충만한 수가 들어와서 온 이스라엘이 구원에 이르게 될 일이 있다는 것이 비밀이다. 이 비밀을 아는 것이 왜 중요한가? 이 비밀을 아는 자들이 바로 그리스도인 됨의 목적을 아는 자들이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인 됨의 목적이 무엇인가? 오직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는 것, 구원 받게 된다는 것을 다른 사람, 다음 세대에 이방인의 충만한 수가 들어올 때 까지 전하는 것이 그 목적이다. 이방인들의 충만한 수가 차기까지 이방인들을 주님께로 인도하는 것이 그 목적이다. 우리가 그리스도인이라면, 전도해야 할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❶ 롬 11:25~27을 읽으십시오. 바울은 여기서 어떤 큰 사건을 예언하고 있습니까?

그리스도인들은 이 성경절들을 가지고 수세기동안 논쟁해 왔다. 그러나 몇 가지 사실은 명확하다. 우선 전체 논조는 하나님께서 유대인들을 구제하신다는 것이다. 바울이 말하고 있는 것은 로마서 11장 서두에서 “하나님이 자기 백성을 버리셨느냐?”고 했던 질문에 대한 대답이다. 그의 대답은 물론 “아니다.”이다. 바울은 이스라엘이 오직 (1) “부분적으로”, “이방인의 충만한 수가 들어오기까지” 단지 (2) “한시적으로” 우둔하게 되었다(그리스어 프로시스는 “단단함”을 의미함)고 설명한다.
그러면 “이방인의 충만함”이 의미하는 것은 무엇인가? 대다수는 이 구절이 온 세상에 복음을 전하라는 대사명의 성취를 표현하는 것으로 보고 있다. 복음이 모든 곳에 전파될 때, “이방인의 충만함”이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그리스도 안에 나타난 이스라엘의 믿음이 보편화되고, 복음이 온 세상에 전파되면, 예수님의 재림이 가까워진다. 바로 이러한 때에 많은 유대인들이 예수께로 돌아올 것이다.
“온 이스라엘이 구원을 받으리라”(26절)는 말씀도 이해하기 어려운 구절이다. 이것을 마지막 때에 하나님의 특별한 선포에 의한 모든 유대인의 구원으로 해석해서는 안 된다. 성경 어디에도 인류 전체 혹은 특별 지역에 대한 구원의 보편주의 (universalism)를 가르치는 곳은 없다. 바울은 그 중에 “얼마”라도 구원하기를 소망하였다(14절). 다른 민족과 마찬가지로 그들 가운데 어떤 이들은 메시야를 영접했고, 어떤 이들은 거부하였다.
로마서 11장을 주석하면서 엘렌 G. 화잇은 “복음의 마지막 선포”의 때에 “많은 이(유대인들)가 믿음으로 그리스도를 그들의 구속주로 영접할 것이다.”라고 말하였다.(사도행적, 381)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에는 이루어야 할 막중한 과업이 있다. 주님께서는 이방인들이 모이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셨으며 이방인들뿐만 아니라 유대인들도 모이 게 될 것이라고 선언하셨다. 유대인들 가운데는 개종하게 될 사람들이 많이 있으며 저들을 통하여 우리는 비치는 등불처럼 퍼져 나가는 하나님의 구원을 보게 될 것이다. 어디를 가든지 유대인들이 있으므로 현대진리의 빛이 저들에게도 소개되어야 한다. 저들 중에는 빛으로 나와서 놀라운 능력으로 하나님의 율법의 불변성을 선포할 많은 사람들이 있다.”(복음전도, 578)

교훈: 복음이 모든 민족에게 전파될 때, 많은 유대인들이 구원받는 무리 가운데 합류할 것이다. 그리하여 믿음으로 승리한 모든 영적 이스라엘이 구원을 얻을 것이다.

부가적용)
언제 이방인들의 충만한 수가 들어오겠는가? 이 사실을 아는 것은 오직 하나님 한 분 뿐이시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그것은 예수님께서 다시 오실 때와 관련될 것이다. 예수께서 “천국복음이 모든 민족에게 증언되기 위하여 온 세상에 전파되리니 그제야 끝이 오리라”(마 24:13) 하셨기 때문이다. 또한, “그때에 인자의 징조가 하늘에서 보이겠고 그 때에 땅의 모든 족속들이 통곡하며 그들이 인자가 구름을 타고 능력과 큰 영광으로 오는 것을 보리라 그가 큰 나팔소리와 함께 천사들을 보내리니 그들이 그의 택하신 자들을 하늘 이 끝에서 저 끝까지 사방에서 모으리라”(마 24:30-31). 유대인들 중에서 택하신 자들, 이방인들 중에서 택하신 자들을 하늘 이 끝에서 저 끝까지 사방에서 모으실 것이다.

목요일
9월 9일
죄인들의 구원

도입)
바울은 "내 마음 속에 끊임없이 고통이 존재하고 있다!"고 고백하고 있다. 그는 자기 동족이 예수 그리스도를 거부하고 축복에서 제외된 일로 인해서 마음으로 끊임없는 고통을 받고 있었다. 그러면 왜 바울은 자기 동족에 대한 깊은 고통을 호소하면서 자신의 말이 사실임을 강조했을까? 아마도 그 이유는 그가 그 동안 줄곧 이방인의 편에 서서 복음을 증거 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유대인들은 이러한 바울의 발언에 대해 그가 유대인을 버렸다고 생각했을 수도 있다. 사도행전의 기록을 보면 유대인 중에는 그를 죽이기 전에 음식을 먹지 않겠다고 서원한 사람이 40명이나 있었다(행 23:12-13). 바울은 이방인에게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 선택된 이방인의 사도였다. 그러나 그는 동시에 유대인이었다. 그러므로 그는 자기 동족을 위해서 기도하는 일을 쉬지 않았다. 그러므로 그는 이방인에게 복음을 전하는 동시에 복음을 거부하는 자기 동족을 인해 큰 고통을 느꼈던 것이다. 이러한 심정은 믿지 않는 가족이 있는 사람은 잘 알 수 있을 것이다. 자기 가족 중에 믿지 않는 사람이 있는 경우에, 그는 타인에게 복음을 전하면서도 믿지 않는 가족을 인해 마음에 고통을 느낀다. 이러한 고통과 슬픔은 우리의 고통인 동시에, 우리 안에 계신 성령께서 함께 느끼시는 탄식인 것이다.

로마서 11장에서 우리는 바울이 자기 민족을 얼마나 사랑하고 있는지 볼 수 있다. 동족의 일부가 자신과 복음의 진리에 저항하여 싸우고 있다는 사실이 그에게는 큰 고통이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울은 많은 이들이 예수님께서 메시야임을 깨달게 될 것이라고 여전히 믿고 있었다.

❶ 롬 11:28~36을 읽으십시오. 바울은 유대인뿐 아니라 모든 인류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 을 어떻게 보여주고 있습니까? 그는 하나님의 놀랍고도 신비한 은혜의 능력을 어떻게 설명 하고 있습니까?

위 성경절에서 유대인과 이방인이 대조되어 있지만, 한 가지 명백한 사실은 하나님의 자비와 사랑과 은혜가 죄인들에게 부어진다는 것이다. 세상의 기초가 놓이기도 전에 하나님은 인류를 구원하기로 계획하셨고, 그분의 뜻을 성취하기 위한 도구로 사람들을, 때로는 나라들을 사용하기로 계획하셨다.

❷ 기도하는 마음으로 31절을 자세히 읽어보십시오. 이 말씀에서 우리는 전도에 관한 어떤 중요한 교훈을 얻어야 합니까? 유대인뿐 아니라 우리가 접촉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어떻게 복음을 전해야 합니까?

수세기 동안 기독교가 유대인들을 더욱 잘 대했다면, 더 많은 유대인들이 그들의 메시야를 찾았을 것이다. 기원 후 몇 백 년 동안 이루어진 큰 배도와 제칠일 안식일을 배격하고 일요일을 선호하는 등 기독교 내에 이루어진 급격한 이교화로 인하여 유대인들이 예수께로 나아오기란 분명 쉽지 않았을 것이다.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예수님께서 자신들에게 베푸신 은혜를 깨닫고 다른 이들에게 그런 자비를 보이는 것은 얼마나 중요한 일인가! 만약 우리가 그렇게 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그리스도인이라 할 수 없을 것이다(마 18:23~36 참조).

교훈: 죄인을 구원하기 위한 하나님의 자비가 유대인들에게 계시되었고, 그들은 그 자비를 이방인들에게 나타내야 했었다. 그리고 이제는 우리가 그렇게 해야 할 차례이다.

부가적용)
바울은 육신을 따라 그의 동족이며 형제인 유대인을 위해서 "내가 저주를 받아서 그리스도로부터 분리되어도 좋다!"고 고백하고 있다. 물론 그가 그리스도로부터 분리될 가능성은 없다. 왜냐하면 그가 이미 말한 것처럼 하나님의 선택받은 성도를 하나님의 사랑으로부터 끊을 것은 아무 것도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러한 바울의 기도는 그가 자기 동족인 유대인을 자기 생명처럼 사랑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그는 자기 동족을 마음 깊이 사랑하고 있었고, 그들의 구원을 위해서 간절하게 기도하고 있었다. 그는 동족들뿐만 아니라 이방인들에게도 하나님의 사랑을 전했다. 우리는 다른 사람의 구원 문제로 인해 고민해 본적이 있는가? 믿지 않는 가족과 동족을 가진 사람이라면 누구나 다 이와 비슷한 고통을 느낄 것이다. 이러한 근심은 성도들의 고통인 동시에, 그 안에 계신 성령님의 근심이시다. 우리는 복음을 받지 않는 가족이나 친지, 또는 민족을 인해 고민해야 한다. 왜냐하면 우리는 그리스도를 거역한 사람들이 장차 당할 심판과 저주가 어떤 것인지 알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 중에는 자녀를 그리스도께 인도할 수만 있다면 목숨도 내놓을 수 있는 부모나, 부모나 형제를 구원하기 위해서 대신 저주를 받아도 좋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을 것이다. 물론 이렇게 기도해도 그들이 죽거나 저주받지는 않는다. 그러나 형제와 친지, 그리고 민족을 사랑하는 사람은 그들의 불신앙에 대해서 이러한 기도를 할 수밖에 없다. 우리 안에 계신 성령님도 믿지 않는 형제들을 인해서 말없이 탄식하고 계신다. 우리 중에 혹시 가족의 구원을 위해서 기도하다가 낙심하고 있는 분이 계시는가? 힘을 내서 다시 기도하시기 바란다. 하나님은 영혼을 위한 그들의 기도에 반드시 응답해 주실 것이다. 바울은 그의 동족을 위해서 기도하다가 유대인 구원에 대한 하나님의 섭리를 깨닫게 되었다. 하나님은 믿지 않는 사람을 위해서 기도하는 성도들에게 그들의 구원을 위한 하나님의 계획을 가르쳐 주신다. 우리는 이 시대의 바울이 되어 믿지 않는 친족과 민족과 인류를 위해 성령 안에서 탄식하며 기도해야 한다. 친족과 민족과 인류의 영혼 구원을 위한 기도를 쉬는 것은 성도로서의 직무를 유기하는 일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금요일
9월 10일
더 깊은 연구를 위해

독서 과제: 사도행적, 77~79 “산헤드린 앞에서”, 112~114 “박해자에서 제자로”, 474~475 “로마에서 편지함”, 복음전도, 573~577 “천주교인을 위한 사업”, 가려 뽑은 기별 1권, 155~156 “전파해야 할 것과 해서는 안 될 것.”

“한 국민으로서의 이스라엘의 실패에도 불구하고 구원을 받을 만한 자들로서 상 히 많은 무리가 그들 중에 남아 있었다. 구주의 초림 때에 침례 요한의 기별을 기쁨으로 받아들여 메시야에 관한 예언들을 새로이 연구하게 된 충실한 남녀들이 있었다. 초기 그리스도 교회가 세워졌을 때, 이 교회는 나사렛 예수를 그들이 그의 강림을 갈망해 온 분으로 인정한 충실한 유대인들로 구성되었다.”(사도행적, 376~377)
“유대인 중에는 다소 사람 사울처럼 성경에 능한 사람들이 있고 이들은 경이로운 능력을 가지고 하나님의 율법의 불변성을 선포할 것이다. . . . 당신의 종들이 오랫동안 버려두고 멸시하여 온 사람들을 위하여 믿음으로 수고할 때에 그분의 구원이 나타날 것이다.”(사도행적, 381)
“복음 기별의 마지막 선포에 있어서 지금까지 무시되었던 계층의 백성들을 위하여 특별한 사업을 해야 하는 이 때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사자들이 세상 각처에서 발견되는 유대인들에게 특별한 관심을 가지기를 기대하신다. 여호와의 영원한 목적을 설명함에 있어서 구약 성경을 신약 성경과 합할 때 이것은 많은 유대인에게 새로운 창 곧 영혼의 부활의 아침처럼 될 것이다. 그들이 복음 시대의 그리스도가 구약 성경의 여러 페이지에 묘사된 것을 보고 신약 성경이 얼마나 분명하게 구약 성경을 설명하는지를 깨달을 때 그들의 잠자던 기능은 일깨움을 받고 그들은 그리스도를 세계의 구주로 인정할 것이다. 많은 사람들은 믿음으로 그리스도를 그들의 구속주로 영접할 것이다.”(사도행적, 381)

핵심적인 토의를 위해
1. 하나님의 율법, 특히 안식일 계명이 날카롭게 부각되는 마지막 때에 재림 신도들처럼 십계명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유대인들이 세계 앞에서 중대한 문제들을 증명하는 역할을 하게 될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바람직한 기대인가요 아닌가요? 토론해 보십시오.
2. 여러 교회들 가운데 재림교회가 유대인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일에 가장 성공적인 교회 가 될 수 있다면 그 이유는 무엇일까요? 그대의 지역에 사는 유대인들에게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 그대 또는 그대의 교회가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이겠습니까?
3. 고대 이스라엘 백성들이 저지른 실수로부터 우리가 배워야 할 것은 무엇입니까? 우리도 그와 같은 잘못을 저지르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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