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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8과 로마서 7장의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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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paulcho 작성일10-08-08 15:32 조회6,235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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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제 8과 로마서 7장의 사람
8월 21일
일몰: 오후 7시 17분

도입)
균형 잡힌 성화론을 위해서는 로마서 7장 14-25절에 대한 올바른 이해가 중요하다. 이 구절에 묘사된 사람은 신자인가 아니면 불신자인가에 대한 문제가 2천년 교회역사 속에서 계속되어 온 논쟁이었다. 칼빈이 전통적인 입장을 대변한다면 웨슬리는 반대 입장의 대표적인 옹호자이다. 전통적인 해석을 따르는 이들은 칼빈을 비롯해 어거스틴, 조나단 에드워즈, 찰스 스펄젼과 대부분의 청교도 목사와 신학자들, 찰스 핫지(Charles Hodge), 존 머레이(John Murray), 존 스탓(John Stott), 제임스 패커, 제임스 던(James Dunn)등이다. 웨슬리와 같은 입장을 취하는 이들로서는 미국의 부흥사 찰스 피니(Charles Finney)와 개혁주의 신학자 안토니 후크마(Anthony Hoekema), 헤르만 리델보스(Herrmann Ridderbos), 막스 터너(Max Turner)를 비롯한 많은 국내외 신약학자들을 들 수 있다. 최근 신학계에서는 비전통적인 해석이 오히려 주류를 이루고 있는 상황이다.

기억절: “이제는 우리가 얽매였던 것에 대하여 죽었으므로 율법에서 벗어났으니 이러므로 우리가 영의 새로운 것으로 섬길 것이요 의문의 묵은 것으로 아니할지니라”(롬 7:6).

* 교사(리더)는 “밑줄 그어 오셨나요?”라고 꼭 물어보십시오.

안식일 오후
|연구범위| 로마서7장.
성경에서 로마서 7장만큼 논쟁을 불러일으키는 곳도 드물다. 로마서 7장의 문제에 관하여 재림교 성경주석은 다음과 같이 언급하고 있다. “14~15절의 의미는 로마서 전체에서 가장 많이 논의된 문제들 중 하나였다. 주된 질문은 그런 격렬한 도덕적 투쟁에 대한 묘사가 자서전적인가, 만약 그렇다면 그 구절은 바울의 회심 이전, 이후 중 어느 때의 경험을 언급하는 것인가 하는 것이었다. 바울이 죄와 그 자신의 개인적인 투쟁에 대해 말하고 있다는 것은 그의 말의 의미가 매우 단순한 것으로 보아 확실한 것 같다(롬 7:7~11, 정로의 계단, 19, 교회증언 3권, 475 참조). 그가 하나님의 거룩한 율법의 신령한 요구에 직면하여 그것을 깨닫게 되는 각 영혼이 일반적으로 경험하는 투쟁을 묘사하고 있다는 것도 분명하다.”(재림교 성경주석 11권, 666)

성경 학도 사이에는 로마서 7장이 바울의 회심 이전의 경험인지, 이후의 경험인지 의견이 분분하다. 어떤 입장을 취하든지 중요한 것은 그리스도의 의안에서 우리가 하나님 앞에 완전하게 설 수 있으며, 그분은 우리에게 성화, 죄에 대한 승리 그리고 “그 아들의 형상”으로 변화될 것을 약속하신다는 사실이다(롬 8:29).

일요일
8월 15일
율법에 매임?

도입)
크리스천에게 있어서 율법은 지키기 위함이 아니라, 오히려 자신의 연약함을 적나라하게 들추어내게 만드는 것이다. 그래서 인간이라면 당연히 절망해야 한다. 그런데 율법은 절망하다 죽으라고 있는 것이 아니라, 예수그리스도를 만나라고 안내한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마침내 율법은 그의 할 일을 명백하게 마치게 된다. 율법은 점점 더 사람을 죄인 되게 만들 뿐이다. 그래서 율법으로 말미암아 사람은 하나님을 찾게 되고, 하나님께 감사드리게 된다. 많이 탄식한자가 더 많이 감사할 수 있다. 율법은 어떻게 나 같은 것이 구원을 받게 되었는지를 깨닫고 감사드리게 만드는 일을 한다. 탄식만큼 감사하는 것이 바로 크리스천이다. 탄식의 깊이만큼 감사하는 것이 그리스도인이다. '사망의 음침함 골짜기를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는 것'이 바로 크리스천이다. 참 평화는 적이 없는 평안한 곳에서 잠을 자는 어린 새가 아니라, 비바람이 몰아치고 거센 파도가 닥쳐와도 편안하게 잠을 자는 바닷가 절벽 둥지안의 어린 새다.

❶ 롬 7:1~6을 읽으십시오. 독자들로 하여금 율법과 맺고 있는 관계를 깨닫게 하기 위해 바울은 어떤 예증을 사용하고 있습니까? 그 예증을 통해 제시하고자 하는 요점은 무엇입니까?

롬 7:1~6에서 사용된 예증이 문맥 가운데 어떤 관련성을 가지고 있는지 대충 짐작할 수는 있겠지만 바울의 논리가 정확히 무엇인지 이해하려면 본문을 자세하게 분석할 필요가 있다.
서신 전체에서 바울은 시내산에서 제정된 예배 제도를 다루고 있다. 유대인들은 하나님께서 주신 이 제도가 메시야의 도래로 종결되어야 한다는 사실을 이해하지 못했다. 유대인 신자 역시 그들의 삶에 그토록 중요한 부분을 차지했던 것을 포기할 준비가 돼 있지 못했다. 바울이 다루고 있는 것은 바로 이러한 문제였다.
바울의 예증을 간추리면 다음과 같다. 한 여자가 한 남자와 결혼하였다. 사는 동안 여인은 남편에게 법적으로 예속되어 있다. 남편이 살아있는 한 그녀는 다른 남자의 배우자가 될 수 없다. 하지만 남편이 죽는다면 남편에게 매였던 법적 구속에서 자유롭게 된다.

❷ 바울은 혼인법에 관한 예증을 유대교 체계에 어떻게 적용하고 있습니까? 롬 7:4~5.

남편의 죽음으로 여자가 법적인 구속에서 자유롭게 된 것처럼, 육체에 거하는 옛 사람의 죽음으로 유대인들은 메시야가 올 때까지 지켜야 한다고 생각했던 율법으로부터 자유롭게 되었다.
이제 유대인들은 그리스도와 “재혼”할 수 있게 되었다. 그들은 부활하신 메시야의 초청을 받았으며 하나님께 드릴 열매를 맺을 수 있게 되었다. 이런 예증은 고대의 제도로부터 벗어나도록 유대인들을 설득하고자 바울이 의도했던 장치이다.
그러나 여기서 바울이 유대인 신자들에게 십계명에 얽매일 필요가 없다고 말하는 것은 아니다. 이 본문을 도덕법의 폐기를 증명하기 위해 사용하는 자들조차 사실은 그것을 원하는 것이 아니다. 그들은 단지 제칠일 안식일이 폐지되었음을 말하고 싶은 것이다. 그러나 이 본문을 가지고 넷째 계명의 폐지 및 변경을 주장하는 것은 말씀의 의도와 전혀 맞지 않는다.

교훈: 우리가 벗어나야 할 얽매임은 죄뿐 아니라, 죄를 극복하려는 우리의 노력도 포함된다. 특히 유대인 신자들은 메시야를 통해서 그런 신앙제도가 폐지되었음을 인정해야 했다.

부가적용)
로마서 7장은 결혼관계를 통하여 믿는 자와 율법의 관계를 설명하고 있다. 율법은 마치 남편과 같다. 과거 우리를 주장하였던 율법의 모든 요구를 예수님께서 충족시킴으로서 믿는 자는 율법의 구속에서 해방되었다. 율법의 역할은 결국 죄를 드러내는 것인데(7~13절) 그것은 율법자체가 악해서가 아니고 죄를 짓는 인간의 본성이 악하기 때문이다(14~25절). 이러한 바울의 논증은 율법을 폐기하려는 움직임의 잘못을 염두에 두고 있는 것이다. 로마서 7장은 율법과 그리스도를 대조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율법과 그리스도를 두 남편으로 묘사하고 있다. “남편 있는 여인이 그 남편 생전에는 법으로 그에게 매인바 되나 만일 그 남편이 죽으면 남편의 법에서 벗어났느니라 그러므로 만일 그 남편 생전에 다른 남자에게 가면 음부라 이르되 남편이 죽으면 그 법에서 자유케 되나니 다른 남자에게 갈지라도 음부가 되지 아니하느니라”(2-3). 바울 사도는 2-3절에서 법을 잘 아는 사람들을 위해 로마서 6장을 부연 설명하고 있다. 곧 로마서 6장은 죄의 종에서 의의 종이 되었다는 것을 말하였는데 이것이 부족한 설명이라고 생각하여 더욱 부연하여 설명하고 있다. 로마서 7장 2-3절과 같이 법이 존재하여도 법에 걸릴 수도 있고 걸리지 않는 경우가 있듯이 신앙에서도 그렇다.

월요일
8월 16일
그럼 율법이 죄란 말인가?

도입)
로마서 7장과 8장은 사도 바울이 다메섹에서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한 때부터 신앙생활을 하는 동안 하나님의 뜻대로 선하고 의롭고 거룩한 영적생활을 하기 위해서 최선을 다하다가, 하나님의 생명이 심령 가운데 내주함으로써 죄의 법에서 해방되는 경험을 할 때까지 있었던 체험적 사실을 종합적으로 정리하여 기록한 말씀이다. 그 중에서 로마서 7장 6절~ 8장 2절은 모든 성경말씀 가운데 가장 중요한 진리이며 핵심적인 복음이라고 할 수 있다. 로마서를 깊이 연구한 분이라면 누구든지 이 말씀이 성경 66권 중에서 가장 중요한 하나님의 복음이라는 것을 많이 강조하고 있다. 이 말씀은 모든 성도들에게 해당되는 말씀이 아니고, 도덕적으로 완전한 생활을 추구하면서 영적으로 빠르게 성장하는 성도들만 이해할 수 있고 체험할 수 있는 말씀이라는 것을 꼭 알아야 한다. 이 말씀은 사람의 능력과 노력으로서는 절대로 해결할 수 없는 죄 문제가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체험적으로 해결될 수 있다는 복음이 기록되어 있다. 그 중에서 로마서 7장은 성도들이 신앙생활을 시작할 때부터 영혼 가운데 하나님의 생명이 내주합일 되는 체험을 할 때까지, 범죄 할 수 있는 기회가 생길 때마다 마음속에 나타나는 죄의 법 즉 죄의 법칙 때문에 심각하게 고민하는 경험에 대하여 기록한 말씀이다. 여기에서 먼저 중요시 할 것은 사도 바울이 로마서 7장에서 증거 하는 말씀은 불신자 시절이나 초보적인 신앙생활을 할 때 경험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다시 말해서 로마서 7장의 고민은 죄의 능력이 얼마나 강하고 끈질긴가를 경험적으로 깨달은 성도, 즉 영적으로 많이 성장한 성도들이 하나님의 모든 계명을 완벽하게 실천하기 위해서 최선을 다하다가 죄의 법칙 때문에 실패할 때 나타나는 고민이라는 것이다. 모든 성도들은 성령의 감동하심으로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하고 구원받게 되면 영적인 것과 육적인 것, 빛과 어두움, 선과 악에 대하여 점점 폭이 넓어지고 확실하게 분별할 수 있게 된다. 다시 말해서 성도들은 영적으로 성장하는 가운데 점진적으로 선과 악, 빛과 어둠, 영성과 육성에 대한 지식을 경험적으로 얻게 된다는 것이다. 좀 더 자세히 말하자면 성도들이 하나님의 계명을 따라 철저하게 살려고 노력할 때 비로소 자기의 마음속에 나타나는 내면적인 죄의 세력이 얼마나 추악하고 강한지를 경험적으로 깨닫게 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뜻을 따라 철저하게 실천하고자 노력하지 않는 성도들은 로마서 7장의 말씀과 같이 내면적인 죄 때문에 심각하게 고민하는 경험을 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로마서 8장 2절에 나온 체험과 은총을 받지 못할 수도 있음을 알아야 한다.

그 동안 바울은 시내산에서 제정된 율법 전체를 다뤘다. 그런데 롬 7:7에 이르러 갑자기 십계명에 대하여 언급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혹시 이것으로 인하여 ‘바울은 십계명의 폐지를 말하지 않았다.’는 지금까지의 입장을 번복해야 하는 것은 아닌가?
그렇지 않다. 우리는 이것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바울이 말하는 율법은 십계명을 포함한 율법 전체이지, 십계명에 국한 된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바울은 앞서 유대 사회 제도로부터 예를 들었다. 그리고 이번에는 십계명을 예로 들어 자신의 논점을 분명히 하고 있을 뿐이다. 하지만 그리스도의 죽음으로 종결된 율법 제도에 도덕법은 포함되지 않았다. 그것은 시내산 이전처럼 갈보리 이후에도 존재하고 있다.

❶ 롬 7:8~11을 읽으십시오. 바울은 율법과 죄의 관계를 어떻게 묘사하고 있습니까?

하나님은 유대인들에게 자신을 계시하면서 도덕에 대하여, 시민 생활에 대하여, 제사에 대하여 그리고 건강에 대하여 무엇이 옳고 그른지 자세히 말씀해 주셨다. 그분은 율법을 위반할 경우의 처벌 조항도 두셨다. 계시된 하나님의 뜻을 어기는 것은 죄로 정의되었다.
그래서 바울은 율법이 탐심을 죄로 가르치지 않았다면 그것을 알 수 없었을 것이라고 설명한다. 왜냐하면 죄란 계시된 하나님의 뜻을 어기는 것이기 때문이다. 계시된 뜻을 모르면 죄에 대한 인식도 없겠지만, 계시된 뜻을 알면 사람은 자신이 죄인이며 죽음과 저주 아래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여기서 바울은 하나의 다리를 놓아 율법을 존중하는 유대인들이 그리스도를 율법의 성취로 바라볼 수 있도록 노력하고 있다. 그는 율법은 필요한 것이었지만 그 기능은 제한적이었다고 설명한다. 율법은 구원의 필요를 보여주기 위한 것이었지, 구원을 얻기 위한 도구가 될 수 없었던 것이다.
“사도 바울은 그의 경험을 말하면서 회심할 때 일어나는 일에 관한 중요한 진리를 제시하였다. 그는 “전에 법을 깨닫지 못할 때는 내가 살았더니 ― 그는 정죄 받은 느낌을 갖고 있지 않았다 ― 계명이 이르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의 율법이 그의 양심을 깨우칠 때, “죄는 살아나고 나는 죽었도다.” 그래서 그가 자기 자신을 보되 하나님의 율법으로 정죄를 받은 죄인으로 보게 되었다. 분명히 해 두어야 한다. 죽은 것은 율법이 아니고 바울이었다.”(화잇 주석, 롬 7:9)

교훈: 율법은 하나님의 뜻을 우리에게 계시해 준다. 우리는 하나님의 뜻을 알면 알수록 우리가 얼마나 멀리 떠나 있는지 깨닫게 된다. 그래서 그리스도가 필요한 것이다.

부가적용)
그리스도인들에게 왜 율법에 대한 이런 갈등이 일어날까? 사실 그리스도인이 되기 전의 우리의 상태는 자연인으로서 영적으로 죽은 사람이었다. 그러나 예수를 믿게 되면서 영적인 각성이 일어나면서 우리의 내면이 양심이 다시 살아나게 된다. 또한 하나님의 율법을 대하게 되면 그동안 우리 자신들이 얼마나 큰 죄인인지를 알지 못한 채 살아오다가 율법을 통해 우리가 큰 죄인들임을 깨닫게 되는 것이다. 그러면서 우리의 영적 세포들이 하나 하나 되살아나면서 참으로 우리는 구원받을 수 없는 큰 죄인들임을 처절하게 절감하게 되는 것이다. 우리의 죄가 크게 느껴지면 느껴질수록 우리의 죽었던 죄에 대한 자의식이 더 민감하게 살아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빛이 더 가까울수록 우리는 우리 자신들의 죄로 인해 더 이상 소망이 없는 죄인들임을 깨닫게 될 것이다. 율법은 바로 우리 자신이 영적으로 죽어있었던 경험에서 이제 되살아나는 경험을 가지면서 일어나는 마음의 심적 고통이다. 그러면서 우리 스스로는 이 죄의 절망적인 경험에서 벗어날 수 없고 깨끗해 질 수 없다는 사실을 느끼게 된다. 이젠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서만 우리의 구원이 가능하다는 사실을 절감하게 되는 것이다. 이 고통스러운 경험이 크면 클수록 인간은 철저히 자신의 무력함을 느끼고 철저히 예수님만 의지하게 될 것이다. 우리의 구주요 우리의 의이신 그분의 의를 갈망하고 그분의 구원을 열망하게 될 것이다.

화요일
8월 17일
거룩한 율법

도입)
예수님께서는 왜 우리가 율법의 정신과 요구에서 벗어나면 안 되는지, 그 이유를 말씀하고 계신다. 우리가 율법으로부터 자유하게 되어졌고, 율법에 대하여 죽었다 할지라도 잊어서는 안 될 율법의 중요성을 말씀하고 계신다. 율법의 중요한 역할은 사람의 죄를 드러내고, 그 죄를 정죄하여, 심판하는 것이다. 이것은 폐하여 지는 법이 없다. 율법의 역할은 사라지지 않는다. 인간의 죄를 심판하는 그 기능과 역할은 여전히 살아있는 것이다. 그래서 구원받은 사람에게는 율법이 “구원을 받을 만한 자격의 여부”가 아닌, “온전한 상급 여부”로 작용 되는 것이다. 영적인 영광의 수준을 측정하는 시금석이 바로 율법인 것이다. 언젠가 우리는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서게 된다. 만약 천국에 차등이 없고 누구나 다 같은 것이라면, 우리가 애써 하나님의 율법에 주목하고 거룩함의 수준에 도달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예컨대 십자가의 강도와 베드로와 사도 바울이 모두 천국에서 똑같다면, 왜 우리가 벌써부터 예수님을 믿어서 이토록 주님 뜻대로 살고자 하는 것인가? 죽기 직전에 예수님을 영접해도 되지 않겠는가? 십자가의 강도와 주님의 일꾼들은 분명히 다를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구원받은 이후에도 우리의 삶이 여전히 거룩해야 하며 하나님과의 관계를 늦출 수 없는 이유는, 천국에서의 영원한 상급의 문제가 이 땅에서의 거룩함의 수준에 달려 있기 때문이다.

❶ 롬 7:12을 읽으십시오. 지금까지 내용을 토대로 이 말씀을 어떻게 이해해야 합니까?

유대인들은 율법을 존중했기 때문에 바울은 가능한 한 율법의 가치를 높이려고 했다. 율법은 그 자체로는 좋은 것이지만, 그 존재 목적 이상의 것이 될 수는 없다. 즉 죄로부터 우리를 구원할 수는 없는 것이다. 구약의 율법은 그것이 제도이든 도덕법이든 우리에게 구원을 줄 수는 없었다. 그러나 그로 인해 우리는 예수를 필요로 하게 되었다. 구원은 오직 예수님과 믿음으로 얻는 그분의 의로 말미암는 것이다.

❷ 죽을 수밖에 없는 자신의 처지에 대하여 바울은 무엇을 탓하고 있습니까? 그러나 무엇 에 대해서는 탓하지 않습니까? 이런 구별이 중요한 이유는 무엇입니까? 롬 7:13.

이 성경절에서 바울은 율법을 되도록 가치 있게 제시하려고 한다. 그는 자신의 끔찍한 상황, 즉 “온갖 탐심”을 이루게 된 것에 대하여 율법이 아닌 죄를 탓하였다(8 절). 율법은 하나님께서 주신 행동의 표준이기 때문에 선한 것이지만, 바울은 그 앞에서 죄인으로 정죄받을 수밖에 없었다.

❸ 바울을 끔찍한 죄인으로 만들 정도로 죄가 강력하게 된 원인은 무엇입니까? 롬 7:14~15.

바울은 자신이 “죄 아래에 팔렸”다고 말한다. 그는 죄의 노예가 되었다. 그에게는 자유가 없다. 그는 자신이 원하는 것도 할 수 없다. 그는 율법이 그에게 말하는 선을 행하기 원하지만, 죄는 그렇게 하지 못하도록 그를 막는다.
이런 예증을 통하여 바울은 유대인들에게 메시야가 필요함을 설명하려고 했다. 그는 은혜 아래 있을 때만 승리가 가능하다는 사실을 이미 밝혔다(롬 6:14). 같은 주제가 로마서 7장에서 재차 강조되고 있다. 율법 아래 산다는 것은 죄라는 무자비한 주인의 종이 됨을 의미한다.

교훈: 율법은 너무나 선한 것이지만, 메시야 없는 율법은 우리가 죄인임을 드러낼 뿐이다. 구원을 바라는 자는 율법 아래에서 은혜 아래로 옮겨가야 한다.

부가적용)
예수님은 율법을 폐하러 온 것이 아니라 완전케 하러 오셨다고 말씀하셨다. 그리고 율법을 완전케 하러 오셨을 뿐만 아니라, 우리로 하여금 율법의 일점일획이라도 버리지 말고 그대로 지켜야 될 것을 말씀하셨다. 또 이 율법은 훗날 우리의 인생을 심판하는 기준과 근거로써 여전히 유효하고 가치가 있다고 하셨다. 우리가 율법에 주목해야 할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하나님이 무엇으로 우리를 심판하시고 판단하시는가? 훗날 천국에서 우리가 큰 자가 되고, 작은 자가 되는 것이 무엇을 근거로 해서 이루어지는가? 바로 그것은 율법의 가르침과 율법의 정신으로 이루어 질 것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율법이 본질적으로 강조하려고 하는 바, 즉, 계명을 통해서 본질적으로 강조하려고 하는 바가 무엇이냐를 올바로 이해하여야 한다. 계명을 통해서 강조하는 바가 무엇인가? 살인하지 말라는 것은 사람을 죽이지 말라는 말만이 아니다. 그 계명은 마음속에 사람에 대해서 진정으로 관심을 가지고, 그 형제에 대해서 애정을 가지고, 그를 섬기고 돌보고, 그를 위해서 자기 자신을 내어주는 참된 사랑의 사람이 되라는 말씀이다. 간음하지 않는다고 해서 율법을 지켰다고 말하지 말라는 것이다. 이 계명 속에 담겨진 내용은 음란한 생각들로 마음을 물들이지 말라는 것이다. 내 마음속에 온통 음란한 생각이 가득하면서도 겉으로는 다른 남자 혹은 여자와 동침하지 않았으므로 깨끗하다고 말하는 것이 바로 서기관과 바리새인의 의라는 말이다. 율법의 본질, 율법이 가지고 있는 그 정신을 주목하라고 주님께서는 오늘 우리에게 거듭 강조하고 있다는 사실을 기억하여야 할 것이다.

수요일
8월 18일
로마서 7장의 사람

도입)
로마서 7장의 사람을 원만하게 해석하는 열쇠는 로마서 7장을 8장과의 긴밀한 연관관계 속에서 이해하는 것이다. 로마서 7장만을 분리시켜 거기에 묘사된 상태가 거듭나기 전인지 후인지를 따지는 것은 그 자체가 적절치 못한 질문이다. 로마서 7장에 신자의 경험의 한 면이 묘사되었다면 다른 한 면은 로마서 8장에서 발견할 수 있다. 로마서 7장과 8장이 서로 합쳐져 거듭난 자의 경험을 온전히 묘사한 한 폭의 그림을 이루고 있다. 로마서 7장에서 그 반쪽을 볼 수 있다. 그러나 나머지 반쪽은 8장에 그려져 있다. 로마서 7장에서 바울은 신자의 경험을 율법과 육신의 관점에서 조명하였다. 그리하여 육신의 약함 때문에 율법의 요구를 지킬 수 없다는 사실과 우리 안에 역사하는 죄와 사망의 법과 세력이 얼마나 강한지를 밝혀주었다. 반면에 8장에서는 신자의 경험을 내주하는 성령의 관점에서 조명하므로 생명의 성령의 법이 어떻게 죄와 사망의 법에서 우리를 해방하여 육신의 약함의 문제를 해결하고 율법의 요구를 지킬 수 있게 하는지를 설명하였다(롬 8:1-4). 이렇게 이중적인 관점에서 신자의 경험을 고찰함으로써 우리를 죄의 지배와 율법의 저주에서 자유케 하시는 그리스도와 성령의 은혜가 얼마나 풍성한지를 한층 더 효과적으로 부각시킨 것이다.

“만일 내가 원하지 아니하는 그것을 행하면 내가 이로써 율법이 선한 것을 시인하노니 이제는 그것을 행하는 자가 내가 아니요 내 속에 거하는 죄니라”(롬 7:16~17).

❶ 이 말씀에서 어떤 내적 갈등을 볼 수 있습니까?

율법을 거울처럼 사용할 때, 성령은 그 사람이 율법의 요구를 충족시키지 못함으로 하나님을 불쾌하게 만들고 있다는 사실을 확인시켜 준다. 한편 죄인이 율법의 요구를 만족시키려고 노력한다는 것은 율법이 선하다는 사실에 동의한다는 뜻이다.

❷ 바울이 제시했던 요점이 어떻게 다시 강조되고 있습니까? 롬 7:18~20.

그리스도에 대한 필요를 절실히 느끼도록 성령은 가끔 사람들을 “옛 언약”과 같은 경험으로 이끈다. 엘렌 G. 화잇은 이스라엘의 경험을 이렇게 묘사했다. “백성들은 그들의 마음의 죄악과 그리스도 없이는 그들이 하나님의 율법을 지킬 수 없다는 것을 인식하지 못하면서도 선뜻 하나님과 언약을 맺었다. 자신들의 의를 세울 수 있으리라는 생각으로 그들은 “여호와의 모든 말씀을 우리가 준행하리이다”(출 24:7)라고 선언하였다. . . . 그러고도 불과 몇 주일이 지나지 않아 그들이 하나님과 세운 언약을 깨뜨리고 새긴 우상에 엎드려 경배하였다. 그들은 그들이 깨어버린 언약을 통해 하나님의 은총을 바랄 수 없었다. 그러고 나서야 이제 그들은 자신들의 죄악과 용서의 필요를 깨닫게 되었고 그들은 아브라함과의 언약에 나타나 있고 희생 제물로 예표된 구주의 필요를 느끼게 되었다.”(부조와 선지자, 371~372)
인정하고 싶지 않겠지만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자신을 날마다 주님께 드리는 일에 실패함으로 죄를 섬기고 있다. 그들은 여전히 갈 길이 멀 뿐이지 자신은 성화의 정상적인 과정을 밟고 있다는 식으로 상황을 합리화시킨다. 그리스도께 죄를 가져가고, 그것을 극복할 수 있게 해 달라고 구하는 대신, 의를 행하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것이 로마서 7장의 주장이라고 핑계를 댄다. 그러나 실상 로마서 7장이 주장하는 것은 죄의 종이 의를 행하는 것은 불가능하지만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는 승리할 수 있다는 것이다.

교훈: 우리가 회심한 그리스도인이라면 더 이상 의를 행할 수 없다고 핑계해서는 안 된다. 실제로 우리는 여전히 연약하지만, 예수님께서 승리를 주시도록 기도해야 한다.

부가적용)
로마서 7장과 8장은 우리에게 꼭 있어야 할 두 가지 깨달음과 확신을 제공한다. 곧 로마서 7장은 우리 안에는 죄와 사망의 법과 세력이 역사하기에 내 힘만 의지하면 쓰러질 수밖에 없고 하나님의 법대로 살 수 없다는 깨달음을 안겨준다. 동시에 로마서 8장은 우리는 약하나 우리 안에 내주하는 성령으로 말미암아 우리는 넉넉히 승리할 수 있다는 확신을 갖게 한다. 우리 신앙생활에 이 두 가지 확신이 항상 공존해야 한다. 내 힘만 의지하면 쓰러질 수밖에 없다는 자신의 철저한 무력감에 대한 인식과 더불어 내게 능력주시는 이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다는 믿음의 확신이 있어야 한다. 우리 신앙생활의 문제는 어느 한쪽의 확신이 결여된데 서 기인한다. 어떤 이는 자신의 약함은 뼈저리게 절감하지만 자신의 무력함만을 바라보고 우리에게 이김을 주시는 주님의 능력을 온전히 신뢰하지 못한다. 신자의 부패성과 불완전을 지나치게 강조하는 성화론이 이런 패배주의적 신앙을 조장할 수 있다. 반대로 주 안에서 승리할 수 있다는 긍정적인 확신은 있으나 자신의 연약함에 대한 깊은 인식이 부족함으로 실제로는 성령의 능력보다는 자신의 힘과 열심을 더 의지하는 경우가 있다. 성령만을 의존하기에는 아직 육신이 너무 강한 것이다. 긍정의 힘과 믿음마저 성령이 아니라 육신에서 산출될 수 있다.

목요일
8월 19일
사망에서 건져 냄

도입)
곱사등이에게 허리를 펴고 바르게 걸으라는 법이 건강을 지켜주는 최고의 법이라고 가르친다 하더라도 곱사등이에게 있어서는 이 법은 곱사등이를 살리는 법이 아니라, 오히려 곱사등이를 죽이는 법이 된다. 곱사등이가 아무리 열심히 허리를 편다 해도 그는 결코 1자로 된 '허리 펴기 법'을 만족시킬 수 없다. 그 법으로 인하여 사실 그는 이 땅에 태어나자마자 그의 의지와 관계없이 죄의 저주아래 있는 죄인이 되었다. 이와 같이 우리는 '내가 내 자신을
보호해야 한다'는 '코드로 기록된 옛 길'을 걸으며 지속적 절망에 빠져버렸다. 그 이유는 곱사등이처럼 나는 결코 내 자신을 보호할 수 없는 상태로 태어났기 때문이다.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의 희생은 '내가 내 자신을 보호해야 한다'는 처절한 본능에서 우리를 해방시켜 주셨다. 그래서 우리는 내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언제나 해왔던 손익계산의 굴레에서 벗어나 이제는 거기서 자유하게 되고, 내가 손익계산을 함과 동시에 나와 상대방에게 주게 되는 죄악의 굴레에서 벗어나게 되는 것이다. 그것은 내가 생각하는 손익계산 액의 몇 천배 되는 풍성한 성령의 은혜를,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받게 되었기 때문이다.

❶ 롬 7:21~23을 읽으십시오. 그리스도인으로서 그대는 이런 종류의 갈등을 경험해 본 적 이 있습니까?

이 구절에서 바울은 육체의 법과 죄의 법을 동일시하고 있다. 바울은 “육신으로는 죄의 법”을 섬긴다고 말한다(롬 7:25). 죄를 섬기고 그 법에 순종한다는 것은 사망을 의미한다(10~13절). 따라서 죄에게 순종하고 있는 그의 몸을 “이 사망의 몸”이라고 묘사해도 무방한 것이다.
마음의 법이란 하나님의 뜻에 관한 계시, 곧 하나님의 법이다. 성령의 확신 아래 바울은 이 법에 동의한다. 그의 마음은 이를 따르기로 결정한다. 그러나 노력해도 소용이 없었다. 왜냐하면 그의 육체는 죄를 원했기 때문이다. 그런 갈등을 겪어보지 않은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그대 마음은 선을 행하기 원하지만, 그대의 육체가 다른 것을 요구하는 것이다.

❷ 이런 곤란한 상황에서 빠져나올 수 있는 방법은 무엇입니까? 롬 7:24~25.

어떤 사람은 바울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라고 말한 후에 왜 이미 벗어난 문제에 대하여 다시 영혼의 갈등을 언급해야 하는지 의아해 한다. 어떤 이는 이 감사의 표현을 삽입된 감탄구로 이해한다. 그들은 그와 같은 감탄사는 “누가 나를 건져내랴?”는 절규 뒤에 자연스럽게 따라오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들은 영광스런 구속(8장)으로 들어가기 전에 바울이 앞서 말했던 것들을 정리하고 죄와의 갈등을 다시 한 번 고백하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어떤 이들은 “내 자신”이라는 표현은 “그리스도 없이 남겨진 자아”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그리스도 없이 남겨진 자아는 죄에 대하여 속수무책이라는 것이다. 그리스도와 함께 그 안에서 새로운 삶을 사는 자들은 비록 자아가 끊임없이 살아난다 할지라도 승리의 약속을 구함으로써 그것을 자신의 것으로 삼을 수 있다. 아무도 그대로 하여금 그리스도께 굴복하도록 만들 수 없다. 그런 결정은 오직 자신만이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약속하신 승리를 아무도 그대에게 가져다줄 수 없다.

교훈: 절망 중에 있음을 고백해야 하는 것도 나 자신이고, 예수께서 주신 약속을 선택하는 것도 나 자신이어야 한다.

부가적용)
그리스도인들이 세상과 타협하여 살아간다는 말이 종종 들리는데, 사람들은 어떻게 그런 일이 일어나는지 궁금해 한다. 어찌하여 그토록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의 자녀 된 특권과 영광을 드러내지 못하고 오히려 세상에 속박당해 살면서 인생을 낭비하는가? 왜 수백 번 기도하고 다짐했는데도 여전히 분열되고 열의 없고 뒤죽박죽된 삶을 사는가? 이런 질문들에 대한 대답은 단 하나뿐이다. 모든 문제의 뿌리는 우리의 "자아"이다. 자아 중심적인 삶에서 벗어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자아에서 벗어나는 방법은 오직 한가지뿐이다. 마음을 다해 주님을 따르고 주님의 가르침에 귀 기울이고 날마다 자신을 주께 드려서 주님이 우리의 전부가 되시게 하는 것이다. "내게는 부인할 자아가 없다"라고 말할 수 있는 단계에 있는 그리스도인은 없다. 그 누구도 "나는 자아를 부인할 필요가 없다"라고 말할 수 없다.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동참하려는 사람은 매 시간, 매 순간마다 하나님의 은혜에 힘입어 끊임없이 자아를 부인해야 한다. 예수님이 죽음과 무덤까지 날아지셨다는 것을 기억하라. 끝까지 주님을 따라가 자아의 죽음에 이를 때, 우리에게 구원과 생명이 있을 것이다. 하나님의 영광을 가린 모든 잘못의 뿌리가 바로 "자아"라는 것을 인정하고 "주님, 제가 바로 이런 존재입니다."라고 주께 고백하라. 그런 다음 그리스도의 생명이 당신의 생명이 될 수 있음을 확실히 믿고 당신 삶의 통제권을 완전히 주님께 넘겨 드려라. 그리스도께서 죄 없는 자아를 하나님께 드린 갈보리 언덕의 죽음이 준엄한 사림이듯이, 우리의 자아를 죽음에 내어주는 것도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서 준엄한 현실이 되어야 한다.

금요일
8월 20일
더 깊은 연구를 위해

독서과제: 가려 뽑은 기별 1권, 212~215 “완전한 법”, 308~310 “신령하신 죄의 담당자”, 치료봉사, 84~85 “심령의 치료”, 452~454 “참지식을 탐구하는 중요성.”
“율법을 범하는 생애 가운데는 안전함이 없고 평안과 정당성이 없다. 인간이 죄를 계속해서 짓고 있으면서 하나님 앞에 무죄한 자로 서기를 바랄 수 없으며 그리스도의 공로를 통하여 하나님과 화평할 수도 없다.”(가려 뽑은 기별 1권, 213)
“바울은 그의 형제들이 죄를 용서하시는 구주의 크신 영광이 유대인들의 모든 성소 제도에 깊은 뜻을 부여한다는 것을 깨닫게 되기를 바랐다. 그는 또 그들이 그리스도께서 세상에 오셔서 사람의 희생제물로 죽으셨을 때 표상은 그 원형을 만났다는 것을 깨닫게 되기를 바랐다.
그리스도께서 속죄 제물로 십자가에서 죽으신 후에 의문의 율법은 아무런 효력을 가질 수가 없었다. 하지만 그것은 도덕률과 관계가 있는 것이며 영광이 있었다. 이 두 율법은 다 신성의 소인을 받은 것이며 하나님의 거룩하심과 의로움과 공의를 나타내신 것이었다. 폐지될 의문의 직분에도 영광이 있었다면,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시사 그분의 생명을 주시고 성결케 하는 영을 주실 때, 그 실체는 얼마나 더 영광스럽겠는가?”(화잇 주석, 고후 3:7~11)

핵심적인 토의를 위해
1. 로마서 7장의 사람은 누구라고 생각합니까? 회심 전 바울? 아니면 회심 후 바울? 아니면 로마서 7장은 모든 상황에 관한 것입니까? 그대는 어떤 칭의를 가지고 있습니까?
2. 침례를 받고 거듭난 그리스도인이 죄와 씨름한다는 사실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습니까? 그냥 자동적으로 모든 것을 극복하게 될 수는 없는 것입니까? 아니면 계속 죄를 져야 하는 것입니까? 아니면 해답은 그 중간쯤에 있는 것입니까?
3. 우리가 그리스도인이지만 계속 죄를 지을 수밖에 없고, 실패하며, 하나님의 법을 어길 수밖에 없다고 생각하는 견해에는 어떤 잠재적인 위험 요소가 있습니까? 반면 우리는 그리스도인이기 때문에 우리의 삶에서 모든 그릇된 행동과 생각과 경향을 다 고쳐야 하며 그렇지 않으면 구원받을 수 없다고 생각하는 견해에는 어떤 위험이 내포되어 있습니까?
4. 비록 로마서 7장의 사람이 누구인지 의견이 다양하지만, 우리는 로마서 7장에서 예수님 의 신자가 되는 데 도움이 되는 어떤 약속을 배워야 합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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