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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6과 믿음을 설명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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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paulcho 작성일10-08-01 11:07 조회4,482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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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6과
믿음을 설명함
8월 7일
일몰: 오후 7시 35분

도입)
정상적인 부모라면 자식을 사랑해서 낳았고 그 자식에 대한 책임과 계획을 가지고 기르려 하였을 것이다. 자식을 행복하게 해주고 잘해주고 사랑해 주고 싶은 부모의 마음을 알 수 있을 것이다. 하나님 역시 다르지 않으시다. 인간을 창조하셨을 때 하나님께서 인간과의 관계에서 가장 소망했던 것은 하나님께 대한 절대적인 신뢰와 믿음이었다. 하나님께 대한 이런 믿음과 신뢰를 가지지 못한다면 인간은 불행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우리는 믿음에 대한 너무 고차원적이고 어려운 해석을 하려고 한다. 부모 자식 간에 가장 필요한 것은 서로간의 절대적인 신뢰와 믿음이다. 마찬가지로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게 할 수 없다. 들풀과 꽃들을 돌보시는 하나님께서 그 보다 더 귀한 인간을 더욱 사랑하신다는 것에 대한 절대적인 신뢰와 믿음이 필요하다. 그 어떤 관계에 있어서도 가장 중요한 것은 신뢰와 믿음이다. 믿음이 깨어진 관계는 더 이상 관계를 유지할 수가 없다. 하나님을 믿는 다는 것은 이런 절대적 신뢰에 기초한 믿음인 것이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다. 이것은 인류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최고의 사랑을 보여주신 지극한 행위이시다. 이런 주님에 대한 절대적인 신뢰와 믿음이 결국 하나님과의 깨어진 관계를 개선시켜 줄 것이고 사랑의 관계를 다시 이어주게 될 것이다. 믿음! 이것은 깨어진 하나님과의 관계를 다시 이어주고 회복시켜줄 첫 시작인 셈이다. 우리는 배가 깨질 것 같은 거친 풍랑 속에서도 하나님의 보호에 대한 절대적인 평안과 고요함을 간직하셨던 예수님의 평안을 배울 필요가 있다. 우리의 큰 믿음이 하나님을 더욱 기쁘게 할 것임을 기억해야 한다.

기억절: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었은즉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평을 누리자 또한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믿음으로 서있는 이 은혜에 들어감을 얻었으며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고 즐거워하느니라”(롬 5:1~2).

* 교과토의 시간에 서로의 의견을 존중하고 격려해 줍시다.

안식일 오후
|연구범위| 로마서5장.
바울은 칭의 또는 하나님의 가납하심이 오직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으로 가능함을 밝혀왔다. 왜냐하면 오직 예수의 의가 우리를 주님 곁에 설 수 있도록 합당한 지위를 주기 때문이다. 구원의 위대한 진리를 체계화시키기 위해 바울은 이 주제를 더욱 심도 있게 설명하려고 한다. 아브라함과 같이 소위 의로운 자마저 구원은 행위로 말미암는 것이 아니라 믿음으로 말미암는다는 사실을 보여준 후에 바울은 한걸음 뒤로 물러나 더 큰 그림을 본다. 그는 무엇이 죄와 고통과 사망을 야기했으며 그리스도 안에서 제시된 해결책과 인류를 위한 그분의 사역이 무엇인지 조망한다.
한 사람 아담의 타락으로 모든 인류는 정죄와 고립과 죽음에 직면했고, 한 사람 예수의 승리로 세상은 하나님 앞에 새로운 발판을 마련했다. 예수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죄의 기록과 형벌은 사라지고, 인간은 영원히 용서받을 수 있게 되었다.
바울은 아담과 예수님을 대조함으로써 아담이 행한 일을 그리스도께서 어떻게 만회하셨는지, 그리고 아담의 죄로 해를 당한 인류가 믿음으로 말미암아 어떻게 구세주 예수님에 의하여 구원을 받을 수 있는지 보여주었다. 이 모든 것의 기초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그의 대속적 죽음이다. 이를 통하여 유대인이든지 이방인이든지 모든 인류가 예수로 말미암아 구원받을 수 있는 길이 열렸다.

일요일
8월 1일
그러므로 의롭다 칭함을 얻음

도입)
의롭다 칭함을 받았다는 가장 훌륭한 예증이 있다. 바라바라는 감옥에서 다기의 죄를 청산하지 못하고 죽을 수밖에 없는 흉악한 죄인이었다. 그가 얼마나 큰 죄인인지 말해주는 표현들이 있는데 마태는 악명 높은 죄수(마 27:16)라고 말했고, 마가와 누가는 반란과 살인죄를 지은 자라 했고(막 15:7, 눅 23:19), 요한은 강도라고 했다(요 18:40). 이런 표현들로 보아 바라바는 분명 민란을 일으키고 살인을 저지른 큰 범죄자임에 틀림이 없다. 바라바는 만능 죄인이었다. 강도, 폭행, 살인, 강간 등 사람을 몸서리치게 하는 흉악한 범죄는 다 저지른 죄인이었다. 그 사회 배경으로도 바라바는 절대로 공짜로 용서 받고 풀려날 수 있었던 사람이 아니었다. 죄의 대가를 단단히 치러야 할 죄인이었다. 그 대가는 바로 죽음이었다. 죽음 외에는 그의 죄를 속할 길이 없었던 것이다. 그런 바라바는 전혀 소망이 없는 자인데 예수님과 거룩한 교환이 이루어졌다. 그토록 큰 죄인이 예수님으로 인해 석방을 받되 완전석방, 무조건 석방을 받은 것이다. 갑자기 죄를 한 번도 짓지 아니한 사람처럼 바라바는 무죄한 상태가 되어 풀려나게 되었다. 이것이 바로 의롭다 칭함을 받은 가장 적절한 사례가 될 것이다. 이보다 완벽한 칭의가 어디에 있겠는가? 예수님께서는 철저하게 자기가 한 번도 지지 않은 죄를 담당해야 하셨다면 그 동시에 바라바에게는 자기가 지은 모든 죄로부터 완전히 자유함을 얻게 되었다. 이것이야말로 우리가 어떻게 의로워 질수 있고 구원을 받게 되었는지에 대한 놀라운 예증이 될 것이다. 그러나 바라바가 이 사실을 전적으로 믿었다면 말이다.

❶ 롬 5:1~5을 읽으십시오. 바울의 기별을 아래에 요약해 보십시오. 지금 그대 자신에게 적용할 수 있는 교훈은 무엇입니까?

“의롭게 되었다”는 말은 문자적으로 완료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다. 우리는 율법의 행위가 아닌 그리스도를 영접함으로 이미 의롭다고 칭함을 얻었다. 주께서 이 땅에서 보여주셨던 완전한 생애와 율법의 준수가 우리의 것으로 인정되었다.
그와 함께 우리의 죄는 예수께 옮겨졌다. 하나님은 우리의 죄를 예수께서 행한 것으로 간주하심으로 우리가 받아야 할 형벌을 그분께서 당하게 하셨다. 죄인에게 이 보다 더 영광스런 소식이 어디 있겠는가?
의롭다 칭함을 받은 사람은 환난 중에서도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그들의 믿음과 신뢰에 집중하며 즐거워할 수 있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모든 것들을 선하게 이루실 줄 확신한다. 그래서 그들은 그리스도를 위해 고난당하는 것을 명예롭게 생각할 것이다(벧전 4:13 참조).
다음은 3절부터 5절까지의 흐름이다.
1. 인내. 그리스어 휴포모네는 “변함없이 견딤”을 의미한다. 이는 시험을 통해 계발되며, 삶을 매우 비참하게 만드는 시련과 고통 중에서도 그리스도 안에 있는 소망을 잃지 않고 믿음을 지키는 자 안에서 생성되는 품성이다.
2. 연단. 그리스어 도키메는 문자적으로 “검증된 자질”, 더 구체적으로 “검증된 품성”을 의미한다. 시험을 묵묵히 견디는 자는 품성을 계발할 수 있다.
3. 소망. 인내와 연단은 자연스럽게 소망, 즉 예수 안에 있는 구원의 약속과 소망으로 이어진다. 우리가 믿음과 회개와 순종으로 예수님을 붙잡는 이상, 우리는 모든 것을 소망할 수 있다.

교훈: 하나님께 의롭다 칭함을 얻은 우리는 여전히 시험과 환난을 당하지만, 인내하고 연단을 받으면서 품성을 계발시킬 수 있다.

부가적용)
인간이 가지고 있는 상식의 핵심이 무엇인가? 인과율이다. 원인이 있으면 결과가 있다는 것이다. 곧 선한 행실을 하면 그 행실만큼의 응보를 받는다는 것이다. 악한 행실을 하면 악한 업보를 받고 선한 행실을 하면 선한 업보를 누린다. 우리 인간이 가지고 있는 정의의 기초가 이것이다. 인간이 추구하는 인간의 의의 핵심이 이것이라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이 인과율을 당신의 역사의 경륜에 이용하시기도 하지만, 이 인과율에 속박 당하시지는 않으신다. 이것을 넘어서고 초월하시는 분이 우리 하나님이시다. 인과율에 매이신 분이라면 하나님이 아니시다. 하나님의 의는 사람의 정의를 무시하지 않으시지만 사람의 의, 정의를 훨씬 넘어서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이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사람과의 관계에서 가져야 할 의의 진정한 의의 모습을 정의하셨다. 의란 무엇인가? 하나님께서 보여주신 의의 구체적 모습은 하나님의 율법인 십계명이다. 예수님께서 밝히신 산상수훈의 십계명의 정신은 하나님께서 요구하시는 의가 얼마나 높고 고상한지를 보여준다. 그러나 사람의 의로는 하나님의 이 높은 의의 표준을 따라갈 수가 없다. 흉내 낼 수가 없고 도저히 도달할 수 없다. 인간이 성령을 의지하고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고서는 도달할 수 있는 높은 표준이다. 그러므로 우리 인간이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으면 우리가 의롭다 칭함을 받았다 할지라도 지속해서 넘어지고 우리의 연약성에 의해 시험을 받게 될 것이다. 이런 연단을 통해 우리는 하나님을 의지하며 진리에 바로 서고 의로운 편에 서는 연습을 한 걸음씩 더 가까이 가는 훈련을 하여야만 할 것이다. 그러므로 신앙이란 날마다 하나님을 바라보며 의지하며 사는 삶이다.

월요일
8월 2일
인류를 찾으시는 하나님

도입)
인류의 가장 큰 문제는 정작 자신에게 중요한 일에 대해서 무지하다는 것이다. 다른 일들에는 엄청난 사건과 관심을 쏟으면서 정작 가장 큰 일, 가장 영광스러운 일에는 알지도 못할 뿐 아니라 관심도 없고 이해하지도 못한다. 어느 시대에나 그러했다. 왜 그러한가? 무엇보다 중요한 하나님께서 인류를 찾으시는 이 사건들을 사람들이 무시하고 이해하지 못하는 이유가 무엇인가? 인간의 진정한 문제점은 자신들의 상황을 제대로 모른다는데 있다. 사람들은 자신들의 가장 깊은 문제, 가장 깊은 필요를 모르고 있다. 자신들의 문제와 필요를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에 하나님이 그 무한한 은혜로 우리의 구원을 위해 행하신 일들을 인식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와 상관없이 우리를 구원하려는 목적을 가지고 계신다. 그는 우리를 살리시기 위해 죽으셔야만 했다. 우리가 마땅히 받아야 할 영원한 재앙과 형벌과 심판을 면하게 하기 위해 우리 죄를 덮어줄 피를 흘려야 했던 것이다. 과거에 어떤 삶을 살았는지는 문제가 되지 않는다. 세상에서 가장 도덕적인 사람이라 할지라도 우리보다 나을 것이 하나도 없다. 롬3:23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종교적인 사람이 다른 사람들보다 낫다는 것은 헛소리일 뿐이다. 구원을 얻기 위한 오직 하나의 길은 주 예수를 믿는 일 뿐이다. 영존하시며 영원하신 하나님, 우주를 운행하시는 하나님이 나에게 관심을 갖고 계시고, 나를 보고 계시며, 나에 대한 모든 것, 나의 실패, 죄, 수치, 소망 없음, 절망을 전부 아시고 나의 탄식 소리를 들으심을 알아야 한다.

❶ 롬 5:6~8을 읽으십시오. 이 말씀은 하나님의 품성에 대하여 뭐라고 말합니까? 이 말씀 들은 어떤 희망으로 가득 차 있습니까?

아담과 하와가 수치스럽고 용서받기 힘든 죄를 저질렀을 때, 하나님은 먼저 화해의 손길을 내미셨다. 하나님은 구원 받을 수 있는 길을 제공하시는 일에 주도적으로 접근하셨고, 그것을 받아들이도록 인간들을 초청하셨다. “때가 차매 하나님이 그 아들을 보내사 여자에게서 나게 하시고 율법 아래에 나게 하”셨다(갈 4:4).

❷ 롬 5:9은 예수님으로 인하여 우리가 하나님의 진노로부터 구원받을 수 있다고 말합니다. 우리는 이 말씀을 어떻게 이해해야 합니까?

출애굽 당시 문설주에 바른 피처럼 하나님의 진노가 죄를 파괴할 때, 그리스도의 피는 의인들을 보호하고 그들의 지위를 보증해 줄 것이다. 어떤 이들은 사랑의 하나님께서 진노하신다는 사실을 받아들이지 못한다. 그러나 하나님의 진노는 정확히 그분의 사랑 때문에 존재한다. 세상을 사랑하시는 하나님께서 어떻게 죄에 대하여 진노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그분이 우리에게 관심이 없다면, 여기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신경 쓰지도 않으실 것이다. 세계를 둘러보라. 죄가 그분의 창조세계를 어떻게 만들어놨는지 보라. 하나님께서 그러한 죄악과 참상을 보시고 어떻게 진노하시지 않을 수 있겠는가?

❸ 우리가 기뻐해야 할 또 다른 이유가 있습니까? 롬 5:10~11.

바울은 예수께서 죽으셨을 뿐 아니라, 부활하셔서 영원히 살아계심을 강조하고 있다(히 7:25 참조). 그분이 살아계시기 때문에 우리가 구원받는다는 것이다. 그분이 여전히 무덤에 있다면 우리의 소망도 사라지고 만다. 11절은 계속해서 우리가 기뻐해야 하는 이유는 주께서 우리를 위해 행하신 일 때문이라고 말한다.

교훈: 하나님의 진노는 죄인에 대한 것이 아니라 죄에 대한 것이다. 우리가 그분의 사랑과 은혜를 믿는다면 우리는 죄에 대한 그분의 진노를 피할 수 있다.

부가적용)
"여호와는 공의의 하나님이심이라"는 선언(사 30:18)에서 보이는 것같이 공정하고 올바르게 모든 일을 처리하시는 하나님의 성품을 공의(公義)라고 한다. 공의의 하나님께서는 선한 사람과 죄인을 동등하게 다루시지 않는다. 사람들의 의로운 행위를 사랑하시지만 그릇된 행위는 미워하신다. 하나님의 공의와 사랑이 잘 나타난 것이 그리스도의 십자가이다. 의인으로 죄가 없으신 예수지만 그가 세상 죄를 대신 지시니 죄인의 자리에서 버림을 받으셨다. 아들이라도 죽이실 만큼 하나님은 죄를 미워하신다. 그러나 죄인을 사랑하시되 독생자를 희생시킬 만큼 죄인된 우리 인간을 사랑하신다. 십자가는 죄를 벌하시고 죄인은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공의와 사랑의 표다. 나 하나가 바르게 산다고 그게 뭐 큰 보탬이 될 것인가 하는 생각이 신자의 빛과 소금으로서의 역할을 막는 것이다. 나 하나쯤이야 하며 법을 어기고 잘못하는 일들이 모여질 때 사회 전체와 온 세상이 혼란과 파멸에 이르게 된다. 공의로우신 하나님께서 인간의 성품과 행동 하나 하나를 감찰하신다. 그리고 마지막 날에 공의로 심판하실 것이다. 살아 있는 자 뿐 아니라 죽은 자를 심판하기 위해 예수님께서 하늘로부터 다시 오실 것이다. 공의로우신 하나님의 자녀들이 의롭게 살아갈 이유가 여기에 있다. 사도 바울은 자신의 구원은 하나님의 참으심으로 인하여 왔다고 고백한다. 하나님의 참으심은 한사람이라도 더 구원하시려는 사랑하심이시다.

화요일
8월 3일
죽음이 삼킨 바 됨

도입)
죽음은 모든 사람을 두렵게 한다. 마귀는 이런 약점을 노린다. 사람이 가장 잃지 않으려고 몸부림치는 그것을 시험의 도구로 삼아 마치 그것을 빼앗고 주는 권한이 자기에게 있는 양 믿게 만든다. 그러나 이것은 거짓이다. 그가 예수님의 생명조차 빼앗은 것같이 보였지만, 예수님은 참 생명이 하나님 아버지의 손에 있음을 죽음과 부활을 통해 분명히 보여주셨다. 그분 안에서 함께 죽은 자들에게 마귀는 더 이상 빼앗을 것이 없다. 예수님과 함께 부활한 사람에게는 마귀가 손댈 수 없는 하나님의 생명이 작용한다. 예수님을 떠난 인간은 얼마나 나약한 존재인지 모른다. 그러나 예수님 안에서 우리는 사망을 이기고 마귀 권세를 이긴 자들이다. 이런 승리의 삶을 나눠주시려고 예수께서 우리의 연약함을 취하셨다. 세상은 수많은 경쟁과 싸움, 갖가지 문제들로 넘쳐 난다. 이런 문제들을 이겨 낸 사람들만이 승리의 기쁨을 누릴 수 있다. 그 기쁨은 세상을 살아가는 힘이 되고, 이유가 되어 주기도 한다. 그만큼 소중한 것이다. 그러나 세상에서의 그 어떤 승리 보다 더 크고 기쁜 승리가 있다. 죽음을 이겨 낸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이 그것이다. 예수님의 부활은 단지 예수님 자신만을 위해서 죽음에서 살아난 사건이 아니다. 우리에게 죄인으로서의 삶이 끝이 났음을 의미하는 동시에 이제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새 삶이 시작되었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이 보다 더 큰 승리가 어디 있겠는가?
죽음은 최후의 원수이다. 하나님은 인류가 영원히 살도록 창조하셨다. 인간이 죽기를 원하는 경우는 거의 없다. 간혹 엄청난 고뇌와 고통 때문에 죽기를 바라는 사람이 있다. 하지만 죽음은 우리의 본성에 어긋나는 것이다. 우리는 영원히 살도록 창조되었다. 죽음은 우리에게 낯선 것이었다.

❶ 롬 5:12을 읽으십시오. 바울은 여기서 무엇을 묘사하고 있습니까? 이 말씀은 무엇에 관 한 설명입니까?

그 어떤 성경절보다 이 구절에 대한 주석가들의 논쟁이 뜨겁다. 재림교 성경주석에서 밝히고 있는 것처럼 “이런 어려움이 생기는 것은 바울이 의도한 것과 다른 목적으로 성경절을 이용하려 하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재림교 성경주석 11권, 635)
그들이 제기하는 문제는 어떤 방식으로 아담의 죄가 그 후손에게 전달되었냐는 것이다. 아담의 후손들이 아담의 죄에 대한 책임을 함께 지고 있는 것인가? 아니면 그들은 자신의 죄 때문에 하나님 앞에 죄인이 되는 것인가? 사람들이 이 성경 절에서 그 해답을 얻고자 하지만, 그것은 바울이 다루고자 하는 문제가 아니다. 그는 완전히 다른 목적을 염두에 두고 있다. 그는 이미 언급했던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롬 3:23)다는 사실을 재차 강조하고 있다. 우리는 스스로 죄인이라는 사실을 인정해야 한다. 왜냐하면 그것만이 우리가 구주의 필요를 인정하는 길이기 때문이다. 바울은 여기서 독자들의 죄가 얼마나 나쁜 것이며 그것이 아담을 통해서 이 세상에 무엇을 가지고 왔는지 깨닫기를 바라고 있는 것이다. 그런 다음 그는 아담의 죄 때문에 세상에 이르러온 비극을 치유할 수 있는 유일한 해결책이신 예수님을 통해 하나님이 우리에게 무엇을 베푸셨는지 보여주고 있다.
그러나 이 말씀은 아담 안에 있는 죽음의 문제뿐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 있는 생명에 대하여 말하고 있다. 복음의 가장 밝은 측면은 죽음이 생명에 삼킨 바 되었다는 것이다. 예수는 무덤의 문을 여시고, 죽음의 속박을 벗기셨다. 그분은 “곧 살아 있는 자라 내가 전에 죽었었노라 볼지어다 이제 세세토록 살아 있어 사망과 음부의 열쇠를 가졌노”(계 1:18)라고 말씀하신다. 예수께서 열쇠를 가지고 계시기 때문에 원수는 더 이상 포로들을 무덤에 붙잡아 둘 수 없다.

교훈: 아담은 인류에게 죽음을 가져왔으나, 예수님은 인류에게 생명을 가져왔다. 기쁜 소식은 생명이 사망을 삼켰다는 것이다. 사망은 이제 예수를 믿는 자에게 왕노릇 할 수 없다.

부가적용)
부활은 언제나 죽음을 전제로 일어나는 사건이다. 죽음이 없이 다시 사는 일도 없다. 예수께서는 십자가에서 죽어 장사 지낸바 되었고 약속대로 삼일 만에 부활하셨다. 죽음이 없는 부활은 있을 수 없고, 죽음이 없이 죄 사함도 없다. ‘죄의 삯은 사망이요 하나님의 은사는 그리스도 우리 주 예수 안에 있는 영생이니라’ (롬6:23) 하였다. 사람은 누구나 자신의 죄로 죽는다. 여기에 어느 누구도 예외가 없다. 그러나 그 죽음은 자신의 죄의 결과로 오는 형벌이지 그 죽음 자체가 구원이 아니다. 죽음과 함께 영원한 심판이 기다리고 있을 뿐이다. 사람 스스로 영생을 얻을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를 위해 예수 그리스도를 대신 죽게 하시고 또 다시 살리심으로 영원한 생명을 은혜의 선물로 주셨다.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심은 자신의 죄가 아니라 세상 모든 사람의 죄를 대신하기 위함이었다. 죽음을 당하실 필요가 없는 하나님의 아들이 세상의 죄인들을 대신하여 죽으심으로 모든 사람이 죽음으로 당할 형벌을 대신하였다. 그러나 예수는 죄의 형벌인 죽음을 이기고 다시 살아나심으로 사람들을 영원한 죽음 속에 가두는 죄의 세력을 꺾으셨다. 죽음을 이긴 것은 곧 죄를 이기심이었다. 이제 누구든지 예수 안에 있는 사람은 그와 함께 죽음의 길에도 부활의 길에도 함께 한다. 그가 부활의 첫 열매가 되신 것처럼 그분 안에 있는 사람들은 그와 연합하여 그 다음 부활의 열매가 되어 영원한 삶을 누린다. 이것이 성경이 우리에게 전하는 복음이다.

수요일
8월 4일
율법이 필요를 일깨움

도입)
하나님께서 율법을 주신 것은 우리에게 죄가 무엇인지를 알게 하시기 위함이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주신 율법을 통해서 해야 할 일과 하지 말아야 할 일을 분별하고, 하지 말아야 할 일에 대한 대가를 지불해야 함을 알게 된다. 그러나, 율법의 역할은 여기까지 이다. 우리가 아무리 선하고자 노력하여도 율법을 완벽하게 지킬 수는 없는 것이다. 만약 율법을 완벽하게 지킨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우리의 속사람을 변화시켜 주지는 못한다. 그러하기에 율법에 있어 완전한 자라고 스스로 칭한 사도 바울도 자신을 돌이킬 때 죄인임을 부정할 수 없던 것이다. 율법을 지키기 위해 노력할 때, 인간의 연약함과 죄된 속성을 발견할 수 있다. 또한, 스스로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없음을 깨달았을 때,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하게 된다. 사도 바울도 이 문제에 대해서 로마서 7장에서 내 마음속에 선을 행하고자 하는 원은 있으나, 행함이 없음을 한탄하였고, 내 속에 하나님의 법과 다른 법이 싸워서 나를 죄의 법으로 사로 잡는다고 고백하였다. 그러므로, 율법의 역할은 초등교사와 같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은 죄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을 제시하여 줍니다. 22절의 더 좋은 언약이란 율법을 지킴으로써 하나님께서 복을 주시는 옛날의 언약이 아니라, 누구든지 주 예수를 믿으면 예수의 의가 전가되어 우리가 의롭게 됨으로 죄의 문제에서 놓이게 됨을 의미한다.

“죄가 율법 있기 전에도 세상에 있었으나 율법이 없었을 때에는 죄를 죄로 여기지 아니하였느니라 그러나 아담으로부터 모세까지 아담의 범죄와 같은 죄를 짓지 아니한 자들까지도 사망이 왕노릇 하였나니 아담은 오실 자의 모형이라”(롬 5:13~14).

바울이 말하고자 하는 바는 무엇일까? “율법이 있기 전에는”이라는 구절은 “아담으로부터 모세까지”라는 구절과 같은 의미이다. 바울은 창조로부터 시내산까지, 즉 십계명을 포함하여 이스라엘에게 문자적으로 규례와 법도를 소개하기 전까지의 시대를 말하고 있는 것이다. 죄는 시내산 이전에도 존재했다. 어떻게 없을 수 있겠는가? 그때까지 거짓말, 살인, 간음, 우상숭배는 죄가 되지 않았단 말인가? 그럴 수 없다.

❶ 시내산 이전에 죄가 존재했음을 보여주는 성경절들은 어디에 있습니까?

시내산 이전에 인류에게 하나님의 계시가 제한적으로 주어졌던 것은 사실이다. 그럴지라도 인류는 죄에 대한 책임을 느끼기에 충분한 지식을 가지고 있었다. 시내산 이전의 사람들은 모두 죽었다. 그 이유는 그들이 명백하게 계시된 명령을 어긴 것은 아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분명 죄를 지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자연 속에서 하나님의 계시를 발견할 수 있었지만 거기에 반응하지 않음으로써 범죄하였다. “창세로부터 그의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이) ...... 그가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보여 알려졌나니 그러므로 그들이 핑계하지 못할지니라”(롬 1:20).

❷ 하나님은 무슨 목적으로 율법을 통해 자신을 더 많이 계시하셨습니까? 롬 5:20~21.

성경에 따르면 도덕법이 성문화되어 반포된 것은 이것이 처음이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요구와 자신을 비교했을 때, 자신의 부족을 발견하게 되었다. 한마디로 죄가 더해졌다. 그들은 어느덧 광범위한 죄악상을 깨닫게 되었다. 그와 같이 계시의 목적은 이스라엘로 하여금 구주의 필요성을 깨닫고 하나님께서 값없이 베푸시는 은혜를 받아들이도록 하기 위함이었다. 이렇듯 구약은 절대 율법주의가 아니었다.

교훈: 하나님께서 율법을 계시하신 이유는 우리로 하여금 죄를 알고, 구세주를 갈망함으로 구원받게 하려는 것이었다.

부가적용)
율법이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과 배치되는 것은 아니다. 율법도 하나님으로 부터 나온 것이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도 하나님으로 부터 나온 것이다. 그 근본이 같다. 근본이 같은 것이 서로 배치될 수는 없는 것이다. 죄의 문제를 해결 받은 사람들은 그 사랑에 감격하고 감사하게 된다. 그러한 감사가 순종을 이끌어 낸다. 순종을 통해 우리의 삶의 주도권을 하나님께 맡기어 드림으로써, 우리는 우리의 의로써 율법을 완성하는 것이 아니라, 성령의 인도에 따라, 의로운 대제사장인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을 실천하기 위해 노력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율법도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어지고 완성된다. 율법을 주신 하나님께서 그 율법을 실천하고 가르치던 제사장들을 대신하여 더 탁월한 제사장을 보내신 것은 전에 주신 율법의 역할이 다했고, 새로운 복음의 시대를 열기 위함이다. 새로운 제사장은 분별하고 가르치는데 그치지 않고 율법을 완성할 수 있도록 하셨다.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이 얼마나 큰 지를 보여주신다. 그 사랑, 얼마나 큰지 알면 알수록 그 사랑에 감격하고 감사할 따름이다.

목요일
8월 5일
둘째 아담

도입)
인류의 역사는 아담과 예수 그리스도의 역사이다. 아담은 죄의 뿌리가 되고, 예수님은 생명의 뿌리가 되신다. 육신의 시작과 모든 죄의 시작은 아담부터 이다. 그러나 영생을 시작은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시작이 되었다. 성경은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여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했다고 한다. 성경은 왜 인류가 하나님의 진노 아래 놓이게 되었는지를 말씀해 주신다. 아담과 그리스도를 대조시키면서 아담을 오실 자, 즉 예수 그리스도의 표상으로 보는 한편, 그 둘 간의 상반되는 차이점을 증거하고 있는 부분이다. 사람은 모두가 다 세상에 존재할 때부터 아담에게 연관되어 있다. 그러므로 첫 사람 아담으로 말미암은 죄와 사망도 보편적으로 인간 누구에게나 적용 되어진 것이다.

“그런즉 한 범죄로 많은 사람이 정죄에 이른 것같이 한 의로운 행위로 말미암아 많은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받아 생명에 이르렀느니라 한 사람이 순종하지 아니함으로 많은 사람이 죄인된 것같이 한 사람이 순종하심으로 많은 사람이 의인이 되리라”(롬 5:18~19).

❶ 이 말씀에서 대조적인 두 가지 사실은 무엇입니까? 그리스도 안에는 어떤 소망이 있습니까?

우리는 아담에게 죽음의 선고를 물려받았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오셔서 인간의 편에서 모든 시험을 견디심으로 아담이 넘어졌던 곳에서 승리하셨다. 그분은 우리의 대속자로서 아담의 수치스런 실패와 타락을 만회하셨고, 그럼으로써 우리는 유리한 입장에서 하나님 곁에 있게 되었다. 예수님은 그렇게 우리의 “둘째 아담”이 되셨다.
“둘째 아담은 자기의 행위에 대하여 자신이 책임을 져야 하는 윤리적 자유 행위자였다. 그릇된 길로 인도하려는 강렬하고도 교묘한 영향력에 둘러 싸여 있었기 때문에 그에게 있어서 죄 없는 생애를 살기란 둘째 아담보다 훨씬 더 어려운 것이었다. 그러나 죄인들 틈바귀에서 살면서도 그분은 죄를 짓게 하는 모든 유혹을 뿌리치고 순결무구함을 유지하셨다. 그분은 항상 죄가 없는 분이셨다.”(화잇 주석, 롬 5:12~19)

❷ 롬 5:15~19에 아담과 그리스도의 행위가 어떻게 비교되고 있습니까?

서로 상반되는 개념들을 보라. 죽음과 생명, 불순종과 순종, 정죄와 칭의, 죄와 의. 예수님은 아담이 저지른 일을 다 복구시키셨다.
15절에서 17절 사이에 은사(선물)이라는 말이 5번이나 등장하고 있는 것도 주목할 만하다. 요점은 간단하다. 칭의는 획득되는 것이 아님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가 합당하기 때문에, 공로가 있어서 주어지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선물이다. 어떤 선물이든지 손을 내밀어 받는 것처럼 우리는 믿음으로 칭의의 선물을 받는다.

교훈: 아담은 죽음을 물려주었지만, 둘째 아담은 생명을 물려주었다. 우리는 첫째 아담의 후손으로 태어났지만, 믿음으로 둘째 아담의 후손이 된다.

부가적용)
성경은 확실하게 증거하고 있다. 한 사람 아담 때문에 죄가 세상에 들어왔다. 죄로 말미암아 아담뿐 아니라 이후의 모든 사람이 죽게 되었다. 죄의 뿌리는 아담이다. 그러나 한 분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생명이 주어졌다. 이제 죽음이 우리를 지배할 수 없다. 아담은 지극히 사소한 일을 한 것 같지만 그 결과는 엄청났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이 엄청난 결과를 회복시키셨다. 아담은 오실 자의 모형이다. 아담은 선악과로 인해 죄의 시초가 되었듯이, 예수님의 십자가가 의의 모형이 될 것을 의미한다. 사망의 권세에서 벗어나는 길, 인간이 사망의 길에서 벗어나는 길은 오직 하나밖에 없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길이다. 아담이 전 인류의 대표이듯, 예수님도 모든 인류의 대표가 되신다. 예수님은 모든 믿는 자의 대표가 되어 십자가에서 죽으셨고 부활하셨다. 우리의 죄 때문에 우리가 죽어야하지만 예수님이 대표로 죽으신 것이다. 우리는 죄로 생명을 잃었지만 예수님이 대표로 부활하셨기 때문에 부활하게 되었다. 이제 예수님 안에서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되었다. 아담의 죄가 모든 사람을 덮은 것 같이, 예수님의 의가 모든 사람을 덮는다. 아담에게 자유의지가 있었듯이 우리도 아담이나 예수 그리스도를 자유롭게 선택할 수 있다. 아담은 불순종의 길을 열어 놓았지만 예수님은 순종의 길을 열어 놓으셨다. 아담의 길을 따를 때에 사망의 길이지만,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따를 때에 생명의 길을 걷게 되는 것이다. 예수님의 십자가의 은혜는 아담의 죄를 덮고도 남는다. “너희의 죄가 주홍 같을지라도 눈과 같이 희어질 것이요 진홍 같이 붉을지라도 양털 같이 희게 되리라”(사 1:18) 아무리 큰 죄도 주님의 은혜로 능히 용서 받을 수 있다. 죄인인 우리는 죄의 값으로 죽는 것 외에는 없다. 하나님은 죽음이 더 이상 왕 노릇하지 못하도록 예수님을 보내셨다. 아담 이후에 예수님이 오시기까지 죽음이 왕 노릇했다. 모든 인간이 죽음의 지배를 받았다. 그러나 예수님 안에서 생명이 왕 노릇하게 되었다.

금요일
8월 6일
더 깊은 연구를 위해

독서과제: 치료 봉사, 470~472 “일상생활에서의 도움”, 가려 뽑은 기별 1권, 383~384 “그리스도는 기별의 중심이심”, 부조와 선지자, 60~62 “유혹과 타락.”

“많은 사람들은 저희 심령의 상태에 관하여 속고 있다. 저들은 육신에 속한 마음이 만물보다도 거짓되며 몹시 악하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하고 있다. 저들은 저희 자신의 의로 스스로 감싸고 있으며 저들 자신의 인간적인 품성의 표준에 도달하는 것으로 만족하고 있다.”(가려 뽑은 기별 1권, 320)
“그리스도께서 유일한 소망이시며 구원이 되심을 중점적으로 설교해야 할 필요성이 크다.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에 대한 교리를 로마에서 열린 집회에서 증거하였을 때에 그 진리는 마치 목마른 나그네에게 주는 시원한 냉수처럼 진리에 갈급한 많은 영혼들에게 복된 소식이 되었다. 우리에게 공로가 있어서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값없이 주신 선물로서 그리스도의 의를 우리에게 전가(傳家)시켜 주셨다는 생각은 실로 보배로운 사상이었다.”(가려 뽑은 기별 1권, 360)
“시련은 하나님의 자녀들에게서 세속의 찌끼를 제거하기 위해 그리스도의 학교에서 받는 교육의 일부분이다. 괴로운 경험이 그들에게 닥쳐오는 것은 하나님께서 당신의 자녀들을 인도하시고 계시는 까닭이다. 시련과 장애물들은 하나님께서 선택하신 훈련의 방법이며 그분께서 정하신 성공의 조건들이다. 사람들의 마음을 읽으시는 하나님께서는 그들보다 그들의 약점을 더 잘 알고 계신다. 하나님께서는 바르게 지도받을 수만 있다면 그분의 사업 발전에 기여할 수 있는 자질을 가진 인물들이 있음을 아신다.”(사도행적, 524)

핵심적인 토의를 위해
1. 끔찍한 시련이 올 때, 믿음은 그대를 어떻게 지탱시킵니까? 시련은 그대와 하나님에 대 하여 어떤 교훈을 얻게 합니까? 그런 경험을 통해서 고통스런 시간을 보내고 있는 자들을 그대는 어떻게 도울 수 있습니까?
2. 많은 저자와 철학자들은 인생이 죽음으로 끝나기 때문에 생명을 덧없이 보고 있습니다. 우리는 그런 생각을 가진 사람들에게 어떻게 말해야 합니까? 어떻게 삶의 덧없음에 대하여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소망만이 우리의 유일한 대답이 될 수 있습니까?
3. 믿음으로 얻을 수 있는 놀라운 선물이 준비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갈망하지 못 하도록 사람들의 마음을 붙잡고 있는 것은 무엇입니까? 어떻게 하면 사람들이 그리스도께서 베푸시는 것을 잘 이해할 수 있도록 도울 수 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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