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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과 -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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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등불과기름 작성일10-07-18 22:40 조회5,264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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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 7월 24일 일몰: 오후 7시 48분

제4과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義)>

<記憶節> : (롬 3:28).
“그러므로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얻는 것은 율법의 행위에 있지 않고 믿음으로 되는 줄 우리가 인정하노라”

▣ <시작하는 이야기)>
우리는 믿음으로 의(義)를 받았다. (로마서 3:22절)
가령 평범한 보통 사람과, 살인(殺人)을 범한 죄인을 비교할 때 전자(前字)의 사람은 “에베레스트” 정상(頂上)에 서있는 사람과 같고, 후자(後字)의 사람은 지하 수백 미터의 밑바닥에 있는 사람과 비교 될 수 있을 것이나, 둘 다 하늘의 별에 닿을 수 없기는 마찬가지이다.
우리가 아무리 올라간다 할지라도 하나님의 의(義)에 미칠 수는 없을 것이다.
용서는 죄의 옷을 벗는 것으로 우리의 불의(不義)를 제거(除去)하는 것이다.
칭의(稱義)는 하나님께서 친히 마련하신 의(義)의 옷을 입는 것으로 이것이야 말로 완전한 것이다.
약 한 시간 전에 그리스도 안에 믿음을 두기로 결심하고 그리스도인이 된 사람도,
몇 십년동안 그리스도인으로 있었던 사람과 똑 같이 의(義)로워 지는 것이다.
그리스도를 개인의 구주(救主)로 영접하는 순간보다 더 의(義)로워지는 때는 결코 없다. 우리를 의(義)롭다고 하시는 근거(根據)는 우리 밖에서 있었던 일 즉 갈보리의 십자가(十字架) 위에서 있었던 일에 있는 것이다. 이 칭의(稱義)야 말로 우리의 죄와 허물을 다 거두어 예수 그리스도의 무덤 안에 묻어버리고 우리로 우리 구주(救主)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하늘 백성이 되는 특권을 갖게 한다.

<要點>
하나님의 율법은 완전하며, 인간은 절대로 그 표준에 도달하지 못한다.
그러나 우리가 우리의 불완전함을 대신하여 제공된 그리스도의 의를 받아들일 때,
하나님은 우리를 의로운 자로 여기신다.

(일) 7월 18일
<律法의 行爲>

▣ 바울은 율법에 관하여 율법이 할 수 있는 역할과 율법이 할 수 없는 역할을 설명하기를, 율법은 모든 사람이 죄인(罪人)이며, 하나님의 심판 아래 있음을 깨닫도록 도와준다. 하지만 율법은 사람을 의(義)롭게 만들어 주지는 않는다고 로마서 3장19-20에서 설명하고 있습니다.

▣ <율법으로 죄를 깨달음이니라>
모든 사람이 율법이 보여주는 대로 죄인인데 그 율법은 모든 자가 죄인이라는 것을 보여주기는 하나, 그 죄에서 벗어날 길을 보여 주지는 않는다는 점을 강조하면서 한 단락을 끝맺는 것이다.
그러고 나서 이다음21절의 “이제는 한 의(義)가 나타났으니”라는 구절로 자연스럽게 연결되는 것이다.
사건중심으로 전개되는 역사서 및 복음서는 비교적인 작은 단위로 형성된 시편, 잠언 등과 달리, 이처럼 한 주제를 일관되게 다루고 있는 욥기나 로마서는 문단을 적절히 구분하여 이해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 로마서 3:19-20절에는 상호 연관성을 가진 위대한 두주제가 혼합 제시되어 있다.
⑴ 율법과 복음의 구속자적(救贖者的) 세대교체.
⑵ 구약과 신약을 불문하고 믿음으로만 구원받는다는 진리가 그것인데,
이는 오고 오는 모든 세대에 적용되는 진리이다.

▣ 하나님의 구원(救援)의 계획은 온 성경을 통해 줄기차게 흐르고 있다.
이것은 마치 선박(船舶)의 밧줄에 섞여있는 붉은 줄과 같은 것으로 그 전체 밧줄을 모두 풀기 전에는 그 붉은 줄을 따로 얻을 수 없듯이 성경 전체에 함축되어 있는 구원의 붉은 줄은 성경에서 따로 떼어 낼 수 없는 것이다.
그러나 성경의 어떤 부분에서는 이것이 더욱 분명하게 나타난다. 로마서3장은 그 중의 하나이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그저 보실 때는 우리가운데서 의(義)를 하나도 찾으실 수 없지만(롬 3:10).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보실 때는 하나님 자신의 의(義)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보시게 되므로 어떤 개선이 아닌 완전한 것을 보게 된다.

▣ 인간은 자기중심적 믿음과 관념적 신앙으로 사람들은 누구나 자기 믿음만이 옳다는 생각으로 형성된 관념적 신앙의 지붕 아래 육체를 숨기고 혼자만의 요행을 바라다가 그것들에게 깔려 고통(苦痛)속에서 죽어갑니다.
율법의 행위로 만들어진 관념적 신앙을 바꾸기가 참으로 어렵기 때문입니다.
사람의 힘으로는 불가능한 일이라고 해야 더 합당할 것 같습니다.
그것 때문에 망가져 가고 있으면서도 그것이 옳다고 생각들을 합니다.
율법의 행위로는 의롭다함을 받지 못한다는 사도바울의 로마서의 말씀을 읽을 때
우리는 율법의 행위로 구원을 받는 것이 아니라 예수를 믿기 때문에 의롭다 함을 받는다고 믿어야 합니다.
내가 예수를 믿는다는 것이 율법의 행위라는 사실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나는 율법시대에 태어나지 않았고 은혜시대에 태어나 예수를 믿기 때문이라고 철석같이 믿고 있기 때문에 감사를 드리는 것입니다.

▣ <세상의 2가지 종교(宗敎)>
1. 사람의 행위로 의(義)롭게 되고자 하는 종교 (종교 행위, 의식)
- 카톨릭, 기독교 이단들, 불교(佛敎), 이슬람교, 힌두교 등등
- 의롭게 되는 것이 불가능

2. 믿음으로 의롭게 되고자 하는 종교
- 성경적(聖經的) 기독교(基督敎)
- 믿음을 통해 주어지는 하나님의 의(義)

▣ <율법의 특징(特徵) → 유죄입증(有罪立證)>
(로마서 3장 19절~20절) “이제 우리가 알거니와 무엇이든지 율법이 말하는 것들은 다 율법 아래 있는 자들에게 말하는 것이니 이것은 모든 입을 막아 온 세상이 하나님 앞에서 유죄가 되게 하려 함이니라. 그러므로 율법의 행위로는 어떤 육체도 그분의 눈앞에서 의롭게 될 수 없나니 율법으로는 죄를 알게 되느니라.”
율법은 사람이 죄가 있다는 것을 알게 해준다.

▣ <복음(福音)의 흐름>
1. 하나님의 의 계시(啓示) – 기준 제시
2. 사람의 죄 발견 – 기준 미달
3. 하나님의 진노(震怒)가 쌓임
4. 율법의 의(義)를 행함 – 불가능(不可能) (한 조목(條目)에 아웃)
(로마서 3장 19절~20절)
“그러므로 율법의 행위로는 어떤 육체도 그분의 눈앞에서 의롭게 될 수 없나니 율법으로는 죄를 알게 되느니라.”

◎ <걸레 조각 같은 인간의 이론(理論) (마 27:21; 고후 5:10; 유 15 주해 참조; 계 20:12, 13)>
“온 세상은 도덕적인 의(義)의 표준 앞에 정죄를 받은 채 서 있다.
큰 심판의 날에 지상에 살았던 모든 사람은 하나님의 율법의 빛에 비추어 선악(善惡)간에 각기 자기의 행한 대로 선고를 받을 것이다. 죽어가는 희생 제물과 함께 십자가가 제시될 때 모든 입은 잠잠할 것이다. 죄로 인하여 소경이 되고 타락되었던 모든 사람의 마음이 십자가의 참된 의미를 알게 될 것이다. 한없이 무거운 인간의 죄짐을 지시고 고개를 숙이고 있는 신비로운 희생 제물이 있는 십자가 앞에 죄인들은 정죄를 받은 채 서 있을 것이다. 모든 핑계와 거짓된 변명은 순식간에 쓸려 나갈 것이다. 인간의 배도의 그 사악한 성질이 드러날 것이다. 사람들은 그들이 선택한 것이 무엇이었는지를 깨달을 것이다. 그때에야 그들은 평강의 왕이신 그리스도 대신에 바라바를 택한 것을 깨달을 것이다.
그들은 성육신(成肉身)과 십자가(十字架)의 죽음의 오묘를 분명히 알게 될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이 마음의 눈에 제시될 것이기 때문이다. 정죄를 받은 사람들은 그가 진리를 거절한 것이 어떤 성질의 행위인지를 읽게 될 것이다. 모든 사람은 “하나님의 입으로 나오는 모든 말씀” 대신에 사단의 미혹케 하는 거짓말과 그릇된 해석을 받아들임으로써 그들이 진리를 떠나 오류를 범했다는 것을 깨달을 것이다. 그들은 다음과 같은 선고 곧 “오, 사람아 그대는 큰 배도자 사단의 깃발 아래 서기로 하였도다. 그렇게 함으로써 그대는 그대 자신을 파멸시켰도다.”라는 글을 읽을 것이다. 어떤 달란트를 가졌건, 어떤 지혜를 가졌던 간에 진리를 거절한 사람은 그때에 하나님께로 돌아설 능력이 없다. 노아 시대에 그 방주의 문이 닫힌 것같이 문은 닫히었다.
땅에서 위대하다고 하는 사람들은 그때에야 그들이 육의 마음을 즐겁게 하는 철학에 그들의 지성과 감성을 내맡겨 왔다는 것을 깨달을 것이다. 예수께서 때마다 권유하시고 희망과 은혜를 주셨지만 그들은 하나님의 이 사랑을 거절하였다. 그들의 의견과 인간적인 논리를 격찬하고, 자기들은 하나님의 신비를 깨닫고도 남음이 있다고 하였다. 그들의 분별력은 아주 뛰어나기 때문에 자기들 스스로의 힘으로도 진리를 식별할 수 있다고 생각하였다. 그들은 손쉽게 사단의 간계에 넘어가 그의 밥이 되었다. 이는 사단이 그들 앞에 인간의 철학 가운데 있는 그럴듯한 오류를 제시하였기 때문이었다. 그들은 모든 지혜의 근원이신 분에게 등을 돌리고 인간의 지성을 숭배하였다. 하나님의 기별과 그 기별자들을 무시하였다. 자비의 초청을 농담거리로 삼고 예수의 신성을 부인하고 그분이 인간의 성정을 입으시기 전에 가지셨던 선재성을 조롱하였다. 그러나 걸레 조각 같은 인간의 논리는 하나님의 크신 날에 모래로 만든 줄에 불과하다는 것이 판명될 것이다. (사인즈 1895. 3. 7)”

◎ <악인(惡人)들이 절감(切感)할 십자가(十字架)의 고뇌(苦惱)>
“거저 주시는 은혜를 거절하는 사람들은 그들이 멸시한 것의 가치를 알게 될 것이다. 그들은 그리스도께서 모든 사람의 구속을 위하여 십자가(十字架) 상에서 견디셨던 고뇌를 그때 느낄 것이다. 그때에야 그들은 그들이 잃어버린 것 곧 영생을 잃고, 불멸의 유업을 잃은 것을 실제로 느끼게 될 것이다. (리뷰 1883. 9. 4).”

◎ <필설로 다 묘사할 수 없는 악인들의 혼란상>
(마 7:23; 27:40, 42; 롬 14:11; 유 15 주해 참조; 계 1:7; 6:15-17)
“죄인들이 신성 위에 인성을 입으셨고 아직도 입고 계시는 그분을 바라보지 않을 수 없게 되어 있을 때 그들의 당황한 마음을 묘사하기가 어려울 것이다. 그들의 눈에서는 비늘이 벗겨지고 그들이 그 전에는 보고자 하지 않던 것을 볼 것이다. 그들이 그리스도를 받아들이고, 그들에게 허락된 기회들을 이용하였더라면 얻을 수 있던 것이 무엇이었는가를 보게 된다. 그들이 거절한 율법이 하나님의 보좌만큼이나 높다는 것을 깨닫는다. 하나님이 친히 그의 율법을 존중히 여기시는 것을 본다.
참으로 놀라운 장면이 아니겠는가! 어떤 사람의 펜으로도 그것을 묘사할 수가 없다. 쌓여진 세상의 죄가 벌거벗은 것같이 드러나고 악인들에게 말씀하시는 심판주의 음성이 “악을 행하는 자들아 나를 떠나라”고 하실 것이다.
그 다음에 그리스도를 찌른 사람들이 그리스도의 사랑을 경멸하고, 그의 긍휼을 모독한 것을 기억할 것이다. 그들이 어떻게 해서 그리스도 대신에 도둑이요, 살인자인 바라바를 택하였으며, 그들이 어떻게 해서 그의 머리에다 가시관을 씌웠으며, 채찍에 맞게 하고 십자가에 못 박았는지를 기억해 낼 것이다. 그들이 어떻게 해서 십자가상에서 고민으로 죽어가는 그분을 조롱하여 “십자가에서 이제 내려올지어다. 그리하면 믿겠노라” “저가 남은 구원하였으되 자기는 구원할 수 없도다. 고 말하게 되었는지를 기억할 것이다. 그들은 간구하시는 그분의 음성이 다시 들리는 듯 할 것이다. 간절한 그의 목소리는 구주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실 때와 같이 그들의 귀에 똑똑하게 울리며 들릴 것이다. 그리스도께 가해진 모욕과 조롱의 행동 하나하나가 모두, 마귀와 같은 행동을 하던 그때와 같이 그들의 기억에 생생하게 떠오를 것이다.
그들은 산과 바위를 불러 이르되, 산과 바위야 우리 위에 떨어져서 보좌에 앉으신 이의 낯에서와 어린양의 진노에서 우리를 가리우라고 할 것이다. “어린양의 진노”- 참으로 부드럽고, 인내하시고, 오래 참으셨던 그분 자신을 희생 제물로 내어 주셨기 때문에 한 마리의 양으로 도살자에게 끌리어 가셨던 그분, 그분이 그렇게 하신 것은 지금 그들에게 닥친 운명으로부터 저들을 구원하기 위함이었다. (리뷰 1901. 6. 18).”

◎ <율법에는 구원(救援)하는 성질(性質)이 없음 (갈 2:16, 17; 3:10-13, 24)>
“하늘을 쟁취하고자 하는 사람을 모두 다 찾아가서 경고하고 싶다.
귀한 은혜의 시간을 바쳐서 죄의 결과로 벌거벗은 것을 가리우려고 무화과 잎을 꿰매고 있지 말라. 그대가 하나님의 크신 도덕적 거울이요, 품성의 표준인 거룩한 율법을 들여다 볼 때에 단 한 순간이라도 그 율법이 그대를 정결케 할 수 있다고 생각지 말라. 율법에는 구원하는 요소가 없다. 그것은 범죄자를 용서 못한다.
죗값은 치루어져야 한다.
주께서는 하늘과 땅에 있는 그분의 정부의 기초가 되는 율법을 폐지함으로써 죄인들을 구원할 수는 없었다. 죄인의 대속자가 형벌을 받아야 한다. 하나님은 잔인하거나 자비가 없으신 그런 분인 반면 그리스도는 긍휼이 풍성하신 분이시기 때문에 자의적인 율법을 폐지하시려고 두 강도 사이에 못 박혀 갈바리 십자가에서 죽으신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보좌는 단 한 점의 죄나 단 하나의 악도 용납하지 않는다.
세상이 창조되기 전 하늘 회의에서 아버지와 아들이 함께 의논한 것이 있다. 그것은 만약 사람이 하나님께 불충성하면 아버지와 하나이신 그리스도께서 범죄한 사람을 대신하여 그에게 내려질 공의의 형벌을 받으실 것이라는 내용이었다. (원고 145, 1897).”

◎ <이것이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義)(롬 5:1)>
“회개하는 죄인이 하나님 앞에 통회하고 그를 위한 하나님의 속죄를 깨닫고 이 속죄를 현세와 내세의 유일한 소망으로 받아들이면 그의 죄는 용서를 받는다. 이것이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다. 모든 믿는 사람은 그의 뜻과 하나님의 뜻을 온전히 일치하게 할 것이며, 구속주의 속죄의 공로를 믿는 믿음을 활용하고 힘차게 전진하며 영광에서 영광으로 나아감으로 회개와 통회의 상태를 계속 유지해야 한다.
용서받음과 의롭다 하심은 하나요, 같은 것이다. 믿음으로 그 신자는 죄와 반역의 자리를 떠나서 그리스도 예수의 충성스러운 신하의 자리로 나아가는데 이는 그가 착한 마음을 타고 났기 때문이 아니라 그리스도가 그를 양자로 받으셨기 때문이다. 죄인이 죄 사함을 받는 것은 그의 보증인이시요, 대속 주께서 그의 죄를 지고 가셨기 때문이다. 주께서 그의 하늘 아버지께 말씀드리기를 “이 사람은 내 아이입니다. 내가 그의 사형 집행을 유예시키고 그에게 나의 생명 곧 영생을 보험 증권으로 주었습니다. 이는 내가 그의 죄를 대신해서 고난을 당했기 때문입니다. 그는 나의 사랑하는 아들입니다”라고 하신다. 이렇게 용서를 받은 사람은 아름다운 그리스도의 의를 옷 입고 하나님 앞에 흠(欠)없이 서게 된다.
그 죄인이 잘못을 저지를 수도 있겠지만 긍휼을 입지 못한 채 쫓겨나는 일이 없다. 그러나 그의 유일한 소망은 하나님을 향한 회개와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이다. 우리의 죄와 허물을 용서하시는 것은 아버지의 특권이다. 이는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죄를 담당하시고 우리의 형 집행을 유예시키시고 그분 자신의 의를 우리에게 입히셨기 때문이다. 그의 희생은 공의가 요구하시는 바를 온전히 충족시키셨다.
칭의(稱義)는 정죄의 반대 개념이다. 은혜를 받을 자격이 도무지 없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값없는 자비가 베풀어졌다. 아버지께서는 우리의 죄를 위하여 속죄가 되신 예수 때문에 죄와 허물을 용서하신다.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허물 많은 죄인은 하나님의 은총 가운데로 들어오게 되고 영생의 소망을 갖게 된다. (원고 21, 1891)”

◎ <세상에 보여주는 표징(表徵)>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는 품성 변화에서 나타난다. 이것은 우리가 고백하는 교리가 진리라는 것을 세상에 보여주는 표징이다. 우리가 살아있는 교회라는 매일의 증거는 말씀을 실천하고 있다는 사실에서 찾아볼 수가 있다. 살아있는 증언은 언행이 일치된 신자들의 행동 가운데서 세상으로 퍼져 나가는 것이다.
그것은 “우리의 안전은 성경에 매달리는데 있다”고 믿는 한 백성이 존재한다는 것을 배도한 세상에 선언하는 것이다. 이 신앙 고백은 큰 배도의 교회가 고백하는 신앙과 뚜렷한 차이가 있다. 그 교회는 하나님의 지혜와 권위 대신에 인간의 지혜와 권위를 받아들였다. (편지 83, 1896).”

◉ <율법은 죄를 깨닫게 함>
“시내산에서 율법이 반포되었을 때에 하나님께서 당신의 품성의 거룩하심을 사람들에게 알게 하신 이유는 그들이 대조하여 봄으로 자신들의 품성의 죄악성을 보도록 하시기 위함이었다. 그들로 죄를 깨닫게 해주고 구주가 필요하다는 것을 드러내기 위하여 율법이 주어졌다.”(시대의 소망, 308)

◉ 우리는 도덕법의 중요성을 알고 있지만, 그 역시 우리를 구원하지는 못함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월) 7월 19일
<믿음과 義>

▣ <믿음과 의(義)>
우리가 여호와 우리 하나님의 말씀을 바르게 이해하기 위해서 염두에 두어야 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근본적(根本的)인 것과 지엽적(枝葉的)인 것을 구분하여 그 순서를 바르게 하는 것입니다.
즉,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는 데서 “믿음과 의(義)”는 둘 다 옳고 중요한 것입니다.
그러나 거기에 순서가 있습니다. 믿음이 먼저 이고, 의(義)가 나중입니다. 왜 그런지 아십니까?
믿음은 근본적(根本的)인 개념이고 의(義)는 지엽적(枝葉的)인 개념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믿음과 의(義)를 이야기 할 때는 항상 믿음이 먼저이어야 합니다.
따라서 우리의 삶이 믿음에서 시작하면 의(義)가 따라옵니다.
그러나 의(義)로부터 시작을 하면 믿음마저 잃어버리게 됩니다.

◉ <.유대인의 의(義)와 이방인(異邦人)의 의(義)>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 하리요 의를 좇지 아니한 이방인들이 의를 얻었으니 곧 믿음에서 난 의(義)요 의(義)의 법을 좇아간 이스라엘은 법에 이르지 못하였으니 어찌 그러하뇨 이는 저희가 믿음에 의지(依支)하지 않고 행위에 의지함이라 부딪힐 돌에 부딪혔느니라. 기록된바 보라 내가 부딪히는 돌과 거치는 반석(磐石)을 시온에 두노니 저를 믿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치 아니하리라 함과 같으니라.(로마서 9:30-33절). →

☞ 의(義)를 좇는 이스라엘은 의(義)를 얻지 못하고,
의(義)를 좇지 않는 이방인(異邦人)들은 의(義)를 얻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의(義)는 믿음으로 말미암은 의(義)라는 것입니다.
이방인(異邦人)들은 그 삶을 의(義)에서 출발하지 않았고, 그들의 삶도 의(義)롭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영접(迎接)함으로 믿음의 사람이 되었고,
믿음의 사람이 된 후에 자연스럽게 그들은 의인(義人)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근본적(根本的)인 것이 해결 되면,
지엽적(枝葉的)인 것은 자연히 따라온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의(義)에서 삶을 시작했습니다.
즉, 율법으로부터 시작했다는 것입니다. 그 결과 그들은 믿음의 법에 이르지 못했고,
의(義)에도 이르지 못했습니다. 결국 근본과 지엽적인 것 다 잃어버린 것입니다.
결국 믿음에서 시작한 이방인들은 믿음과 의(義)를 얻게 되었고,
의(義)로 시작한 유대인들은 믿음과 의(義)를 다 잃어버리고 말았습니다.
“형제들아 내 마음에 원(願)하는 바와 하나님께 구(求)하는 바는 이스라엘을 위함이니 곧 저희로 구원을 얻게 함이라 내가 증거 하노니 저희가 하나님께 열심이 있으나 지식을 좇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의(義)를 모르고 자기 의(義)를 세우려고 힘써 하나님의 의(義)를 복종(僕從)치 아니 하였느니라 그리스도는 모든 믿는 자에게 의(義)를 이루기 위하여 율법의 마침이 되시니라”(롬 10:1-4절).
그렇습니다. 유대인들은 여호와 우리 하나님에 대한 열심(熱心) 대단했습니다.
우리 주변에서 “여호와 증인”들을 보면 유대인들을 보는 듯합니다.
그들의 열심을 보면 참으로 대단하다는 느낌을 받습니다.
그런데 롬 10:1-4절의 말씀은 유대인들의 여호와 우리 하나님께 대한 열심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구원(救援)에 이르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여호와 우리 하나님의 의(義)를 모르고, 자기들의 의(義)를 세우려고 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의(義)를 추구(追求)하지 않던 이방인(異邦人)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의지(依支)함으로써 여호와 우리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믿음으로 여호와 우리 하나님의 자녀가 되니 자연적으로 그의 삶도 의(義)로워지고 반듯하게 되었습니다. 그렇습니다. 그리스도인의 의(義)는 믿음의 의(義)입니다.
그러므로 이방인에게 나타난 의(義)는 그들의 의가 아니라, 믿음의 의(義) 곧 여호와 우리 하나님의 의(義)입니다.

유대인들은 의(義)를 그들의 노력과 열심(熱心)으로 쟁취하려고 했습니다.
물론 인간의 노력과 열심 으로도 어느 정도는 의(義)를 쟁취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의(義)는 여호와 우리 하나님의 의가 아니고, 그들의 의(義)입니다.
따라서 그들은 자기의 의(義)를 자랑하게 되었고, 결국 교만한 자들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와 같은 교만함은 결국 여호와 우리 하나님과 구원(救援)을 잃어버렸습니다.
의(義)가 믿음을 앞서지 않도록 정말 조심합시다.

여호와 우리 하나님께서 유대인들의 실수를 보여주신 이유가 무엇입니까?
유대인들의 실수는 우리들에게 여전히 반복(反復)되고 있는 보편적인 실수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도 처음에는 겸손한 마음으로 열심히 예수만 믿습니다.
그러나 신앙의 연륜이 깊어질수록 믿음으로 말미암은 여호와 우리 하나님의 의를 마치 자기의 열심과 노력으로 얻은 자기의 의처럼 착각하여 교만한 자가 되어 믿음과 의를 다 잃어버리는 경우가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자기의 의(義)를 자랑하여 그 의(義)가 믿음을 앞서게 되면 믿음이 점점 없어집니다.
믿음이 없어지면 자연히 의(義)도 없어집니다.
그래서 자연히 위선자(僞善者)가 될 수밖에 없습니다.
왜냐하면 자기의 의를 계속 자랑하고 드러내기 위해 가짜 의(義)를 만들어낼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의(義)가 믿음을 앞서지 않도록 조심합시다.
한 순간이라도 여호와 우리 하나님을 믿는 믿음을 놓치면 벼랑에라도 떨어질 사람처럼 믿음을 의지합시다.
우리는 끝까지 여호와 우리 하나님을 의지하고 신뢰해야 합니다.
어떤 일이 있어도 우리 자신의 의(義)를 의지하거나 자랑해서는 결코 아니 됩니다.

우리의 삶에 자유와 해방과 풍성함이 없다면 그것은 우리 자신을 의지하고 우리의 의를 의지한 결과입니다.
그것을 여호와 우리 하나님은 교만이라고 하십니다. 우리들에게 교만처럼 무서운 죄는 없습니다.
여호와 우리 하나님은 교만한 자에게 경고하십니다. (잠언16장18절)입니다.
“교만(驕慢)은 패망(敗亡)의 선봉(先鋒)이요 거만(倨慢)한 마음은 넘어짐의 앞잡이니라”

물을 얻으려면 낮은 곳으로 내려가야 하듯이, 믿음과 지혜(智慧)와 은혜(恩惠)는 물과 같아서 그것을 얻으려면 누구나 낮은 곳으로 내려가야 한답니다. 죽음의 그날까지 믿음으로 여호와 우리 하나님의 의(義)만 의지하고, 우리 자신의 의를 부정하는 겸손한 자가 됩시다. 그리하면 믿음과 의(義)를 누리게 될 것입니다.
이상의 말씀은 이방인은 자신의 의(義)를 좇지 않고, 믿음을 좇음으로 믿음과 함께 의(義)도 얻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믿음으로 말미암은 여호와 우리 하나님의 의(義)를 마치 자기의 의(義)인 양 착각하다가 믿음도 잃고 의(義)도 잃고 말았다는 것입니다.
언제나 예수님 안에서 겸손한 자가 되어 유대인과 같은 우(憂)를 범하지 맙시다.

▣ <질문> : 하나님께서 어떻게 죄인을 구원(救援)하시나?
<답> : “그리스도 예수안에 있는 구속(救贖)으로 말미암아” (롬 3:24)

◉ <칭의(稱義)란 무엇인가?>
그리스도께서 하신 모든 일은 나를 위해 하신 것이므로 그의 의(義)는 또한 나의 의(義)가 된다.
그리스도의 의(義)가 우리의 의(義)로 인정될 때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고 인정을 받게 되는 것이다.
사람은 자기의 행함으로 의(義)로워지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의롭게 되는 것이다. (롬 3:28 참조)
이 위대한 진리(眞理)가 죄 사(赦)함을 받기위해 로마의 대 사원(大 寺院)의 돌계단을 올라가고 있던 젊은 수도승(修道僧)인 마틴 루터에게 임(臨)하자 그의 마음은 새롭게 밟아졌다.
그리하여 이 진리의 빛이 저 위대한 종교개혁을 낳게 하였던 것이다.
이 개혁을 통하여 행함으로 구원(救援)을 받는다는 그릇된 생각이 믿음의 생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자유로 돌이키게 되었다.
사도 바울은 믿음으로 의(義)롭게 된다는 진리를 구약의 말씀을 인용하여 보여주고 있다.특히 그는 아브라함의 믿음이 얼마나 의롭게 여김을 받았는지를 말해준다. (롬 4장)

◉ 아브라함은 믿음으로 인하여 세 가지를 받았다. (롬 4:13, 17).
① “의(義)”
② 세상의 “후사(後嗣)”
③ “많은 민족” (롬 4:3, 13, 17절).
우리는 그의 은혜로 말미암아 의로움을 입게 될 때 크나큰 혜택을 받게 된다. 은혜는 값없이 주시는 것이다.
이 땅위에서 믿음은 화평과 용서(容恕)함과 소망(所望) (롬 5:1-5),
그리고 무엇보다도 구원(救援)의 확신을 가져다준다. (롬 5:6-11).
사람이 어떻게 해야만 하나님께로부터 의롭다는 인정을 받게 될까? (롬 3:24-28 참조)

◉ 하나님께서는 그의 의(義)를 다음과 같은 방법으로 주신다.
⑴ “은혜(恩惠)”로 → (롬 3:24) 의(義)의 근원 → 무조건 적인 은혜.
⑵ “하나님”으로 → (롬 3:26, 8:33). 그 의(義)를 주시는 분.
⑶ “피”로써 → (롬 3:24, 5:9). 그 의(義)를 주시는 이유.
⑷ “믿음”으로 → (롬 3:22). 그 의(義)를 받는 길.
⑸ “행위(行爲)”로 → (약 2:21-23). 그 의(義)를 나타내는 길.
⑹ “경험(經驗)”으로 → (롬 5:1-4). 그 의(義)로 인하여 기뻐 할 축복.
하늘 보좌(寶座)에 앉으신 하나님을 우러러 볼 때 우리는 죄책감에 떨며 두려워한다. 그러나 하나님 바로 우편(右便)에서 못 자국 있는 손과 창에 찔린 허리를 내보이시며 나를 위하여 대변(代辯)하고 계시는 그리스도를 볼 때 기쁨과 평화를 가지고 구원(救援)의 확신을 느끼게 되는 것이다.

◉ “의(義)란 율법에 순종하는 것이다. 율법은 의를 요구하는데 바로 이것을 죄인이 율법에게 빚지고 있다. 그러나 죄인은 그 빚을 갚을 능력이 없다. 그가 의에 이를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오직 믿음을 통해서 얻는 것뿐이다. 그는 믿음에 의해서 그리스도의 공로를 하나님께 가져갈 수 있으며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아들의 순종하심을 죄인의 계정에 두신다. 인간이 실패한 자리에 그리스도의 의를 받아들이시고 하나님께서는 회개하고 믿는 영혼을 받으실 뿐만 아니라 용서하시고 의롭게 하시며 그를 마치 의인인 것처럼 취급하시고 당신의 아들을 사랑하신 것처럼 그를 사랑하신다.”(가려 뽑은 기별 1권, 367)

◉ <죄인은 그리스도가 필요함>
“우리 자신의 죄가 중하다는 것을 깨닫게 될 때에 우리는 사유하시는 자에게로 달려가게 될 것이다. 사람이 자신의 속절없음을 깨닫고 그리스도께 손을 내밀 때에 그분은 당신의 능력을 나타내 실 것이다.”(정로의 계단, 65)

◉ 우리가 의롭게 되는 유일한 길은 예수님을 통해서 주시는 하나님의 의를 믿음으로 받아들이는 것이며,
그분의 사고와 생활방식, 그분의 명령 따르기를 바라는 것이다.

(火) 7월 20일
<恩惠와 稱義>

▣ 칭의(稱義)란 ? -1
칭의(稱義)는 하나님이 값없이 주시는 은혜의 힘을 말합니다.
칭의(稱義)의 핵심은 은혜(恩惠)에 있습니다.
더불어 칭의(稱義)라는 말은 두 가지 내용을 함의하고 있습니다.
하나는 우리 죄를 용서해 주시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의(義)롭다 여겨주시는 선포(宣布)에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의롭다고 받아주시는 것은,
오직 그리스도의 의(義)를 우리의 것으로 계산해 주시기 때문에 가능합니다. 이를 의의전가라고 합니다.
그리고 이와 같은 하나님의 은혜는 믿음으로만 받습니다.
우리의 행위와 노력이 아니라, 오직 믿음으로 받습니다.

◉ <칭의(稱義)란?> -2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을 하나님께서 의(義)롭다고 선언하시며 그들의 죄와 형벌에서 자유롭게 해 주시는 하나님의 사법적(司法的) 행동입니다.

“만일 예수 그리스도를 믿기만 하면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죄 없다고 선언해 주십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은총으로 값없이 우리 죄를 없애 주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 예수를 보내 우리가 지은 죄를 대신해서 벌(罰)받게 하심으로써 우리에게 내릴 진노를 멈추셨습니다. 그리스도의 피와 우리가 가진 믿음으로 진노를 거두고 우리를 구원(救援)하신 것입니다. 우리를 위해 그리스도께서 화목제물(和睦祭物)이 되셨다는 말입니다. 이전 시대(時代)에 죄지은 자들을 벌하지 않았던 것도 실은 그리스도께서 오셔서 그들의 죄를 없애 주실 때를 기다리신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완전히 공정하신 분입니다. 그리고 오늘날에도 하나님께서는 예수께서 그들의 죄를 제거(除去)해 주셨기 때문에 같은 방법으로 죄인을 받아들여 주십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께서 죄지은 자를 용서하시고 무죄(無罪)를 선고(宣告)하신 것이 불공평한 일일까요?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사람들이 그들의 죄를 제거하여 주신 예수를 믿은 그 사실에 근거(根據)해서 한 일이기 때문입니다” (롬 3:22-26 현대어 성경)

▣ <칭의(稱義)의 은혜(恩惠)>
AD1512년 마틴 루터란 젊은이가 교수로 일하고 있었습니다.
그는 종교에 깊은 관심을 가졌으므로, 로마 가톨릭 수도원(修道院)에 들어가서 대학교수로 일했습니다.
어느 날 젊은 루터는 어떤 일을 처리하기 위해서 교황(敎皇)을 만나려고 로마로 갔습니다.
그는 교회는 가장 고귀(高貴)하고,
교황은 완전하며 절대무오(絶對無誤)하신 분으로 믿고 기쁨으로 여행을 떠났습니다.
그러나 마틴 루터는 로마에 도착해서 교회의 부패(腐敗)상을 발견하고 분노(忿怒)를 느꼈습니다.교회의 절대 무오(無誤)함을 믿던 신앙이 흔들렸습니다.
그러나 자신이 죄가 많아 반항심(反抗心)이 생기는가 보다 생각하고,
성당으로 가서 「성(聖) 계단」(Sacred stairs=Scala sancta)으로 향해 갔습니다.
그전에 하던 대로 무릎을 꿇고 계단을 오르면서 계단마다 입을 맞추었습니다.
몇 분 후에 한 성경구절이 머릿속에 떠올랐습니다.
『의인은 오직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라는 말씀입니다.
얼마동안 깊이 생각한 후에 마틴 루터는 가톨릭교회와의 관계를 포기하고.
칭의(稱義)의 교리를 설교하기 위해 밖으로 나갔습니다.
『의인은 오직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또
『행위로 말미암지 않고, 고행(苦行)으로 말미암지 않고, 오직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고 힘써 외쳤습니다.
이 교리는 오래 전 사도 바울에 의해 선포된 교리입니다.
그러나 오랫동안 의식적(儀式的)인 종교 때문에 잊혀져 왔던 것입니다.
그러나 이제 마틴 루터에 의해 다시 살아나기 시작했고, 종교개혁(宗敎改革)이 일어났고,이 두드러진 교리로 인해 개신교(改新敎)가 탄생된 것입니다.

☞ 루터의 개혁 사상은 네 가지 성경구절에서 기초된 것인데,
즉 “히브리서 10장38절” “하박국 2장4절” “로마서 1장17절” “갈라디아서 3장11절”입니다.
이 구절(句節)들은 인간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만 구원(救援)받는다는 말씀입니다.

인간은 저주아래 놓여 있었으나, 예수님의 보혈로 그 피로 우리를 구원(救援)해 내신 것입니다.
인간은 죽어 마땅했으나 예수께서 우리가 죽을 자리에서 죽어 주신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법을 어겨서 멸망을 받아야 마땅했으나
예수님께서 그 형벌을 받으시므로 우리는 의(義)롭다고 인정(칭의(稱義))받게 된 것입니다.

칭의(稱義)(Justification)란 하나님이 죄인을 용서해 주실 뿐 아니라,그
사람을 죄가 없는 자라고 선포하는 것입니다.
죄의 형벌에서 구원(救援)하실 뿐 아니라,멸망(滅亡)으로부터 구원해 주실 뿐 아니라,죄를 전혀 짓지 않은 것같이 선포(Declare)하는 것입니다.

그럼, 누가 칭의(稱義)를 필요로 합니까.
우리 인간 모두입니다(로마서 3장10절23절).
하나님은 지극히 거룩하시고 의(義)로우신 분이므로, 죄인으로서는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으므로,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에게 의(義)의 옷을 입혀주시고,
죄가 하나도 없는 사람과 같이 만들어 주시고, 선포해 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모든 사람은 다 칭의(稱義)의 은혜(恩惠)가 필요한 것입니다.

◎ <칭의(稱義)는 온전(穩全)한 용서(容恕)를 의미(意味)함. (롬 5:1)>
“그리스도의 은혜는 죄인의 편에서는 아무런 공로도, 권리도 없는데 값없이 의롭다고 하시는 것이다.
칭의는 죄에 대한 충분하고 완전한 용서이다. 죄인이 믿음으로 그리스도를 받아들이는 그 순간 그는 용서를 받고 그리스도의 의가 그에게 입혀진다. 그는 더 이상 하나님의 용서하시는 은혜를 의심하지 말아야 한다.
믿음 속에는 우리의 구주가 될 만한 것이 아무것도 없다. 믿음은 우리의 죄를 없이 할 수가 없다. 그리스도는 그를 믿는 모든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다. 칭의는 그리스도의 공로를 통하여 오는 것이다. 그분이 죄인의 구속을 위하여 값을 지불하셨다. 그러나 그리스도가 믿는 자를 의롭다고 하실 수 있는 것은 오직 그분의 피를 믿음으로써 이다.
죄인은 자기의 선행을 칭의의 수단으로 의지할 수가 없다. 그는 그의 모든 죄를 포기하는 지점에까지 와야 하며, 빛이 그의 길을 비추어 주는 정도에 따라 그 빛을 차례로 받아들여야 하는 것이다. 그는 단순히 그리스도의 피로 마련된 값없이 주시는 풍성한 은혜를 믿음으로 붙잡는다. 그는 하나님의 약속을 믿는데 그것은 그리스도를 통하여 그에게 의와 성화와, 구속이 된다. 그리고 그가 예수를 따르면 그는 빛 가운데서 겸손히 행할 것이며, 빛 가운데서 기뻐하고 그 빛을 다른 사람들에게 나누어줄 것이다.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받았기 때문에 그는 그의 모든 생활에서 기쁨으로 그분의 말씀을 순종한다. 하나님과의 화목이 그가 그리스도와 어떤 관계인가를 보여주는 결과이다. 하나님께 복종하는 사람들, 그분을 영화롭게 하고 그분의 말씀을 행하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비추이심을 받을 것이다. 귀한 하나님의 말씀 속에는 아름다움은 물론 고상함과 순결함이 있다. 그 아름다움은 하나님의 도움을 받지 않으면 인간의 최고의 능력으로도 도달할 수 없는 아름다움이다(사인즈 1898. 5. 19).”

◉ <그리스도께서만 우리를 깨끗하게 하심>
“죄인은 그리스도의 대속하시는 피를 힘입음으로써만 속박과 정죄에서 벗어날 수 있으며 오직 죄가 없으신 대치 물과 담보물이 되시는 주님의 완전성을 통해서만 하나님의 모든 계명에 겸손하게 순종하는 경주(競走)를 할 수 있다. 그리스도가 없이는 인간은 언제나 율법의 정죄 밑에 있으며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통하여서만 인간이 하나님 앞에서 의롭게 될 수 있다.”(가려 뽑은 기별 1권, 330)

◉ 구원(救援)이 순전히 하나님께서 은혜로 베푸시는 것임을 믿고 받아들인다면 하나님은 우리를 의롭다고 선언해 주시며, 그 순간 우리는 구원 안에 있게 된다.

(水) 7월 21일
<그의 義>

▣ 하나님의 의(義)란 칭의(稱義)가 하나님의 넘쳐흐르는 사랑에서 출발하였음을 감격스럽게 표현하고 있다.
즉 하나님은 하나님 자신의 공의의 권위(權威)로 심판하시기 전에 먼저 우리 인간을 의(義)롭다 하시기를 원(願)하셔서 우리가 그 의(義)를 얻을 수 있는 길까지 마련해 주셨다.
더욱이 그 방법은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을 “화목제물(和睦祭物)”로 제공한 것이다.
구약(舊約)에서 보면 화목제물은 인간이 준비해서 하나님께 바치는 것이었으나 여기 예수라는 화목제물은 하나님께서 친히 준비하셔서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벽을 허무는 속전(贖錢)으로 사용 하셨다.

▣ 예수님께서 선포한 중심적인 주제가 “하나님의 나라” 였다고 하면,
바울이 선포한 중심적인 주제는 십자가(十字架)에서 계시된 “하나님의 의(義)”라고 말할 수 있겠다.
이 의(義)의 개념은 구약과 유대교적 맥락에서는 약자(弱者)를 돕는 하나님의 구원(救援)의 의(義)의 의미로,
그리고 여러 다양한 의미로 사용이 되었고,
바울의 주제는 믿음으로 말미암은 의(義)로서의 하나님의 의(義)라고 할 수 있겠다.
그것은 하나님밖에 있는 의(義)로서 말씀 안에서 경험되고, 말하여짐으로써 체험되는 의(義)이다.
듣는 일을 통해서 우리는 자신이 정말 의(義)로워졌다는 것을 깨달으며, 또 새로운 삶을 가지게 되는 것이다.
현재와 미래의 변증법(辨證法)은 언어적 용법의 변화에서 나타나고 있다.
한편 의(義)가 구원(救援)의 한 조건으로 나타나는데, 또 한편으로는 구원의 혜택 그 자체로 나타난다.
한편으로는 그것이 현재의 선물로 나타나고, 다른 한편으로는 미래의 선물로 나타난다.
로마서에 나타난 바울의 서술(敍述)에 의하면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의(義)에 관한 복음은 보편적인 차원을 지니고 있다. 그 복음은 아담으로부터 시온에 임하시는 메시야 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시(再臨時)까지의 역사를 포괄하고 있다. 그 복음은 예수의 보내심으로부터 하나님의 은혜의 능력으로 모든 믿는 자를 구원하신다는 사실을 나타내는 복음이다. 이러한 하나님의 은혜는 선택하신 이스라엘 백성과 더불어 이방인을 멸망시키시기로 한 것이 아니라 자신과의 사귐을 나누는 생명을 주기로 하신 것이다.

▣ <그의 피로 인하여 믿음으로>
로마서 3:25에서 바울은 구원의 위대한 소식을 더 심도 있게 다룬다.
그는 화목제물 (propitiation*)이라는 전문적인 말을 사용하였다. 이 단어의 그리스어는 힐라스테리온인데 신약에서 오직 이곳과 히브리서 9장5절에 “속죄소(贖罪所)”라는 의미로 사용되었다.
로마서 3장25절에서 이 말은 그리스도를 통해 베풀어지는 칭의(稱義)와 구원(救援)을 함축하고 있으며,
구약(舊約)의 성소(聖所)의 속죄 소에서 표상된 모든 것들이 그리스도를 통하여 성취되었음을 설명하고 있다.
다시 말해 예수께서 대속적(代贖的) 죽음을 통하여 구원의 방편(方便)을 마련하셨고,
속죄(贖罪)를 만족시킴으로써 하나님께서 우리의 구원(救援)에 필요한 일을 하셨다는 것이다.
(롬 3:25)는 또한 “죄의 사면(赦免)”에 대해서도 말하고 있다.
우리가 하나님께 가납(加納)되지 못하는 이유는 우리 죄 때문이다.
그런데 우리의 죄를 지우기 위해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다.
하지만 구원의 계획 속에서 하나님은 우리가 그리스도의 보혈을 믿을 때에 죄가 사(赦)하여 질 수 있도록,
길을 만드셨다.

▣ 예수의 희생(犧牲)이 그의 피를 믿는 믿음을 가진 자들에게 용서(容恕)와 화목(和睦)을 가져다준다는 것을 의미한다. 하지만 “믿음으로”와 “그의 피로 인하여”를 “화목제물”과 따로 연결하는 것도 가능하다. 그럴 경우 “하나님이 그의 피 흘림으로 말미암아 믿음을 통하여 화목제물(和睦祭物)이 되도록 세우신 분”이라는 의미가 된다.
문법적(文法的)으로 두 가지 해석이 모두 가능하다.
문맥상 그리스도의 희생(犧牲)을 화목이 이루어지는 수단으로 좀 더 명확하게 가리키기 때문에 후자(後字)의 의미가 더 적합하다고 볼 수 있다.
속죄(贖罪)의 희생은 그것을 자기의 것으로 수용하는 믿음을 통하여 효력이 있게 된다.
제공된 용서(容恕)를 믿음으로 받아들이지 않는 한, 속죄는 그 희생이 그들을 위하여 베풀어진 자들의 마음과 심령을 화해(和解)시키는 데 아무 소용도 없을 것이다.
신약(新約)은 구속(救贖)사역과 관련하여 그리스도의 피를 크게 강조하고 있다.
예수는 그 자신의 피가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려지는(막 14:24) 것이라고 말했다.
우리는 “그의 피를 인하여 의롭다 하심을 얻는다.”(롬 5:9)
“우리가 ……. 그의 피로 말미암아 구속(救贖) 곧 죄 사(赦)함을 받았으니” (엡 1:7). 그리스도는 “그의 십자가의 피로 화평(和平)을” (골 1:20)이루었다.
“멀리 있던” 사람들이 그의 피로 인하여 “가까워”졌다. (엡 2:13).
하나님의 교회는 “자기 피로 사신” (행 20:28)바 되었다.
우리는 “그의 피로 우리 죄에서” (계 1:5)씻음을 받았다.
구약(舊約)에서 피는 생명을 나타내는 것으로 여겨진다. (참조: 레 17:11)
하나님은 ”고기를 생명 되는 피채”(창 9:4) 먹는 것을 금(禁)했다.
구약(舊約)의 성소봉사(聖所奉仕)에서 피흘림과 피뿌림은 희생되는 동물의 생명을 취하고 드리는 것을 의미했다.
그리스도의 피는 세상 죄를 위한 속죄의 희생으로 드려진 그분의 생명을 나타낸다.
사람을 위해 드려진, 그리스도의 완전한 생애를 대표하는 그리스도의 피는“화목제물”(롬 3:25), 칭의(稱義)(롬 5:9) 그리고 화목(和睦)(엡 2:13)에만 효험이 있는 것이 아니다.
“우리를 위하여 갈바리 십자가위에서 버린 생명을 받아드림으로 우리는 거룩한 생애를 살 수 있다.”
(시대의 소망 660p) <본교 성경주석(한) 11권 602-603>

▣ <화목제물(和睦祭物)>
화목제물 (propitiation)이라는 전문적인 말의 단어의 그리스어는 “힐라스테리온”인데 신약(新約)에서 오직 이곳과 히브리서 9장5절에 “속죄소(贖罪所)”라는 의미로 사용되었다.
이 단어의 이러한 용례는 법궤(法櫃)의 덮개 혹은 뚜껑을 묘사하는 히브리어 “캅포레트(kapporet)의 번역으로 (70인역)에서 자주 볼 수 있다.
대 속죄일(大贖罪日)에 피가 뿌려진 곳은 이 황금궤(黃金櫃) 위였으며(레 16:14-15)
“거기서, 속죄의 공로로 말미암아 용서가 회개하는 죄인에게 허락되었다.” (부조와 선지자 349p).

모든 히브리 의식(儀式)중 가장 거룩한 이것은 그리스도의 속죄 사역을 예표(豫表)하였으므로, 속죄의 표상적 예식에서 중추적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캅포레트(kapporet)라는 이 이름의 중요성에 대한 이해는 이것을 그리스도의 희생과 관련하여 사용한 바울의 용례에 빛을 비추어 줄 수 있다.
소위 “속죄소(贖罪所)”라는 이 히브리어는 기본적으로 “덮다”를 의미하는 단어 “카파르(kapar)에서 파생되었다.
그러나 가장 단순한 형태인 카파르는 구약에서 단 한번 일반적으로 “덮게”라는 의미로 사용되었다. (창 6:14).

이 단어는 다른 형태로 매우 자주 등장하며, “죄를 덮다”라는 비유적 의미로 사용되며, 따라서 “용서하다”, “자비롭다”, “속죄하다”를 의미한다.
루터는 이 카포레트에 해당하는 용어로 그나덴쉬툴(Gnadenstuhl) 즉 “시은좌”(mercy seat)를 사용하였다.
후에 틴털이 이 단어를 인수받았고, 그가 번역한 성경을 통해 주요 영역 성경에 전수되었다.
어떤 이들은 그곳에서 성취된 구속(救贖)과 화목의 사역이라는 것을 더 분명히 나타내는 “속죄의 장소”(place of atonement)라는 번역을 제시했다.
(70인역) 번역자들이 그것을 헬라어 “힐라스테리온”으로 표현하기로 했을 때 그 이름이 지닌 이런 의미를 알고 있었음이 분명하다.
“힐라스테리온”의 의미는 신약에 등장하는 동계어와 대조함으로써 한층 더 밝히 조명된다.
힐라스코마이((hilaskomai)는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옵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 (눅 18:13)라는 기도에 그리고 ”백성의 죄를 구속하려“ (히 2:17)는 그리스도의 사역을 묘사하는데 사용되었다.
관계된 다른 형태인 “힐라스모스(hilasmos)는”우리 죄를 위한 화목제물“ (요일 2:2; 4:10)로서의 그리스도를 묘사하는 데 두 번 사용되었다.
로마서 3:25절에서 사용된 대로 그리고 문맥상 그리스도를 통한 칭의와 구속의 제공을 기술하는 “힐라스테리온”즉 “화목제물”은 구약 성소의 “속죄소” 곧 “힐라스테리온”으로 표상된 모든 것의 성취를 나타내는 것으로 보인다.
그리스도의 희생적 죽음으로 그리스도는 대속(代贖), 속죄(贖罪)(참조: 시대의 소망 469)
화목(和睦)(정로의 계단 15p)의 수단으로 제시되었다.
이모든 의미를 적합하게 묘사(描寫)할 수 있는 영어 단어는 없을 것이다.
그리고 신학자들은 위에 언급된 몇몇 용어에 속죄의 진정한 본질과는 전혀 조화되지 않는 정의를 내리기도 했다.
부적절한 의미가 이 용어들에게 부가되지 않도록 이 용어들을 사용하는데 세심한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어떤 단어가 사용되든 의미는 분명하다. 다시 말해 예수그리스도의 희생적 죽음은 죄의 형벌을 충족시켰고, 그리스도를 믿는 모든 사람의 용서와 화목을 가능하게 했다. 물론 이를 그리스도의 희생이 이교의 희생제물과 같이 분노한 신(神)을 달래거나 설득하여 죄인에게 호의를 베풀게 하려고 드려진 것이라고 이해해서는 안 된다.
“그리스도의 속죄는 그렇게 하지 않더라면 미워하셨을 사람들을 사랑하도록 하나님을 권유하기 위해 행해진 것이 아니다. 없는 사랑을 만들어 내기 위한 것도 아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마음에 이미 존재하고 있었던 사랑의 표현으로서 행해진 것이다.”(정로의 계단 15 참조)
실제로 하나님이 사람의 구속을 위하여 그리스도 안에서 자신을 희생하신 것이다.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 계시사 세상을 자기와 화목하게 하셨다” (고후 5:19; 시대의 소망 762p 참조) <본교 성경주석(한) 11권 602-603>

◉ <十字架>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자신의 몸으로 우리의 죄를 담당하신 것은, 하나님께서 공의로우시고 또한 그분을 믿는 자들을 의롭게 하시는 자가 되기 위함이었다. 그리스도께 굴복하는 모든 자에게는 생명, 곧 영생이 있다.”(교회증언 9권, 193)

◉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한 화목제물이 되심으로 우리의 죄는 사하여졌고, 하나님의 공의는 만족되었으며, 하나님의 품성에 대한 의문은 해소되었다.

(木) 7월 22일
<믿음과 行爲>

▣ 하나님의 편에서는 칭의(稱義)이고, 이를 얻는 인간의 편에서는 득의(得義)이다.
의롭다 하심은 “의(義)롭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의(義)롭다고 간주해 주는 것”이다. 즉 칭의(稱義)는 상태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의 지위를 밝히는 것이다.

▣ <믿음으로 의(義)롭다 하심>
믿음으로 의(義)롭다 하심을 얻는다는 말은 ?
칭의(稱義)가 단순히 하나님 앞에서 사람의 법적(法的)신분이 인격에 관계없이 조정(調整)된 것이 아님을
암시(暗示)한다.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은 구속주(救贖主)와의 개인적인 관계를 수반한다.
그것은 죄인에 대한 구주(救主)의 사라에 반응하여 그에게 사랑과 감사의 태도를 가지는 것을 암시한다.
그것은 예수를 더 잘 알고 그분과 같아지려는 진실 된 갈망과 아울러 그의 존재와
모든 것에 대한 충심어린 감복에 근거한다.
그것은 아무것도 아끼는 것 없이 그의 말 그대로 그를 온전히 받아들이고 어디로 인도하든지
그의 인도를 따를 정도로 그리스도를 의뢰하고 신뢰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한 믿음이 없이는 칭의(稱義)가 있을 수 없다.
하나님은 그저 과거의 죄들을 용서하는 데만 관심이 있는 것이 아니다.
그분은 근본적으로 사람의 회복에 관심이 있으며,
회복은 예수그리스도를 믿는 그러한 믿음을 통해서만 경험할 수 있다.
그러므로 칭의는 회심(悔心), 거둡남 그리고 성화(聖化)속에서 계속하여 성장하고
변화되는 경험과 분리될 수 없다.
우리의 회복을 위한 하나님의 계획의 모든 국면을 기쁘게 받아들이고
기꺼이 그 속으로 들어가는 믿음만이 칭의 안에서 그리스도의 입혀주시는 의를 정당하게 주장 할 수 있다.
(참조 롬 3:22; 롬 4:25; 롬 5:1) <본교 성경주석(한) 11권 606-607>

▣ <율법의 행위에 있지 않고>
문자적으로 “율법의 행위 없이” 헬라어 본문상 “율법”앞에 관사가 없다. (참조 롬 2:12)
이구정의 의미는 이장 전체 문맥에 비춰 볼 때 분명하다.
모든 거짓 종교 체계의 토대는 율법에 순종함으로써 칭의를 얻을 수 있다는 잘못된 사상이었다.
그러나 율법의 행위는 과거의 죄를 속할 수 없다.
칭의는 획들 할 수 없다. 그것은 그리스도의 대속적 희생을 믿는 믿음으로 받을 수 있을 뿐이다.
그러므로 이런 의미에서 율법의 행위는 칭의와 아무런 상관이 없다.
행함 없이 의롭다 함을 받는 것은 우리 속에 칭의를 받을 만한 것이 아무것도 없이 의롭다 함을 받는다는 뜻이다.
물론 이것을 의롭다 함을 받은 사람이 이제는 율법을 순종하는 데서 혹은 선을 행하는 데서 해방되었다는 의미로 해석해서는 안 될 것이다.
그로 하여금 의롭다 함을 받게 해준 그 믿음은 순종으로 모습을 드러낼 것이다.
바울은 그리스도인 삶에서 선행이 차지하는 위치를 거듭 강조 한다.
(딤전 5:10; 딤전 6:18; 딤후 3:17; 딛 2:7; 딛 2:14; 딛 3:8)
그러나 그는 이 선한 행위들이 칭의를 얻어내지 않는다는 사실도 그것 못지않게 분명히 하고 있다.
(참조 : 롬 4:2; 롬 4:6; 롬 9:32; 롬 11:6; 갈 2:16; 갈 3:2절 5절 10절; 엡 2:9; 딤후 1:9)<본교 성경주석(한) 11권 606-607p>

◉ 율법을 지키려는 노력으로 의롭게 될 사람은 하나도 없다.
인간이 의롭게 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우리를 의롭게 하실 수 있는 그리스도를 믿는 길밖에 없다.
그러나 이는 율법을 지킬 필요가 없다는 의미가 아니다.
특히 도덕적 율법은 우리가 왜 의롭게 되어야 하는지 보여주는 행위와 판단의 기준이다.

▣ <야고보와 바울의 믿음과 행위> - 1
(약 2:17) 이와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라
(약 2:18) 혹이 가로되 너는 믿음이 있고 나는 행함이 있으니 행함이 없는 네 믿음을 내게 보이라 나는 행함으로 내 믿음을 네게 보이리라
(약 2:20) 아아 허탄한 사람아 행함이 없는 믿음이 헛것인 줄 알고자 하느냐
(약 2:22) 네가 보거니와 믿음이 그의 행함과 함께 일하고 행함으로 믿음이 온전케 되었느니라.
(약 2:24) 이로 보건대 사람이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고 믿음으로만 아니니라.
(약 2:26) 영혼 없는 몸이 죽은 것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니라.

(로마서 3:28) “그러므로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얻는 것은
율법의 행위에 있지 않고 믿음으로 되는 줄 우리가 인정하노라”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게 되는 문제에 관해서, 야고보와 바울 사이에는 아무런 상충이 없다.
바울은 사람이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게 된다고 설명하며(롬 3-4장),
야고보는 사람의 믿음이 행위로 증명되지 않는다면 죽은 것이라고 설명한다.
우리는 행위로 구원(救援)받은 것은 아니지만,
우리를 구원(救援)한 그 믿음은 선한 행위로 우리를 이끌어 가는 것이다.

핵심 사상 중의 하나는 완전함, 또는 영적인 성숙이다.
이 사람들은 주 안에서 자라야 할 필요가 있었으며,
그들이 당면하는 여러 가지 시련들은 그들이 하나님께 순종할 때 그들을 성숙하도록 도울 것이다.

▣ <믿음과 행위(行爲)에 대하여> - 2
믿음은 구원(救援)의 조건이며 행위(行爲)는 믿음의 결과(結果)입니다.
이유는 중생(거듭남)과 구원은 믿음으로 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 대상이 불신자들을 대상으로 예수 믿어 구원받는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또한 믿음으로 사는 것이 행위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행위는 중생의 결과 구원받은 자로서의 성화(聖化)에 해당하는 삶의 윤리입니다.
행위는 믿는 자가 삶에서 나타나는 성화입니다.
그래서 믿음으로 구원받고 행함으로 상급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만약에 행함으로 구원을 받는다고 하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무용지물이요 인간 자신이 구원의 능력을 가지고 있는 구원자라는 말입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필요 없다는 이론과 논리가 구성되므로 이단이 되는 것입니다.

성경에 믿음과 행함에 대하여…….
로마서에는 믿음으로 구원을 받는다고 말했고
야고보서에는 행함으로 구원을 받는다고 말을 했습니다.
두 서신(書信)서들을 보면 서로 충돌을 주는 내용 같으나 그렇지 않습니다.
그래서 성경을 바로 알아야 합니다.
믿음으로 구원받는다는 로마서는
로마서를 받는 대상이 이방인 신자로 로마교회였습니다.
로마 교회는 이방인들을 전도함으로 교회가 탄생된 교회입니다.
그래서 바르게 성경을 가르쳐야 할 필요를 느낀 사도 바울이 보낸 서신입니다.
믿음으로 구원받는다고 말한 것입니다.
행함으로 구원받는다는 야고보서는
야고보서를 받는 대상이 유대인 신자였습니다.
유대인 신자들은 선민(選民)사상으로 행함이 없는 신앙이었기에
야고보 사도가 행함 없는 유대인 신자들에게 질타한 것입니다.
그래서 유대인 신자들의 잘못된 신앙, 즉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었다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서신서를 받는 대상에 따라 사도들은 믿음과 행함에 대하여 말을 했습니다.
그래서 성경 해석에 있어서 그 당시의 역사적 배경을 이해하지 못하고 문자만 가지고 말을 한다면
오해의 소지가 많고 잘못된 성경해석으로 곡해를 하게 됩니다.

☞ <성경해석(聖經解析)에 있어서>
1. 성경 원어적(原語的) 해석
2, 역사적(歷史的) 해석
3. 영적(靈的) 해석(구속(救贖)사적 해석)
4. 종합적(綜合的) 해석이 되어야 합니다.
바른 성경해석으로 바른 믿음을 소유하여 바른 행함으로 신앙의 삶이 윤택해야 합니다.

◎ <믿음은 그리스도의 의를 붙잡음(롬 3:28; 5:1; 엡 2:8)>
“믿음은 하나님이 죄인들에게 용서를 약속하시기에 적합한 상태이다. 그것은 믿음에 구원을 얻을만한 공로가 있기 때문이 아니요, 믿음이 죄를 위해서 마련된 치료제인 그리스도의 공로를 붙잡을 수 있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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