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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4과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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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paulcho 작성일10-07-16 09:15 조회4,846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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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제 4과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
7월 24일
일몰: 오후 7시 48분

도입)
사람이 얼마나 의로워질 수 있을까? 스스로 힘쓰고 애써 과연 어느 정도 의로워질 수 있을까? 바울은 인간이 할 수 있는 최고의 경지까지 이르렀었다.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는 자라"(빌3:6). 예리한 율법의 잣대로 재어볼 때 흠을 찾을 수 없다니! 물론 바울 스스로 밝힌 부분이지만 그가 과장하여 이야기하였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그런데 그러한 바울이 무엇이 아쉽다고 율법으로 난 의를 포기하고 믿음으로 난 의를 주장하는가? 왜 그렇게 되었는가? 바울은 자신의 한계를 뼈저리게 깨달은 것이다. 율법으로 난 의를 이루려고 하는 자신의 그 모든 노력에는 어쩔 수 없는 한계가 있음을 보았다. "내가 가진 의는 율법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것이니"(빌 3:9절 중반절). 의가 무엇인가? 바울은 한동안 율법만을 의라고 믿었다. 그래서 그는 힘써 율법을 지켰다. 물론 율법은 하나님의 의이다. 율법에 하나님의 의가 선명하게 나타나 있다. 바울의 판단은 옳았다. 하지만 그 다음 단계로 더 나아가지는 못했다. 바로 율법의 완성자인 주 예수 그리스도이다. "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나 폐하러 온 줄로 생각지 말라 폐하러 온 것이 아니요 완전케 하려 함이로라"(마태복음5:17). "그리스도는 모든 믿는 자에게 의를 이루기 위하여 율법의 마침이 되시니라"(로마서10:4). 바울은 주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기 전에는 구약 율법이 전부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다메섹 도상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자 바울의 눈은 번쩍 떠졌다. 주 예수 그리스도가 율법의 완성자로서의 '의 자체'라는 진리를 발견하였다. 그리스도가 의이시다. 율법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완성되었다. 율법을 온전히 이루고자 한다면 마땅히 주 예수 그리스도에게로 나아가야 한다. 바울은 율법에서 예수 그리스도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율법 자체만을 따로 떼어놓고 보았던 관점에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율법을 바라보는 관점으로 바뀌어진 것이다. 이제야 의의 완전한 모습을 바라보았다. 이제야 의의 실체를 바라본 것이다. 율법은 오실 예수 그리스도를 멀리서 보여주는 모형이었고 그 모형의 실체는 예수 안에 있음을 발견하게 된 것이다.

기억절: “그러므로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얻는 것은 율법의 행위에 있지 않고 믿음으로 되는 줄 우리가 인정하노라”(롬 3:28).

* 학생은 활기찬 교과 토의를 위해 반드시 예습을 하십시오.

안식일 오후
|연구범위| 롬3:19~28.
이번 과에서 우리는 로마서의 기본 주제인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에 대하여 공부 할 것이다.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는 다음과 같은 법적인 개념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 법을 어긴 자가 판사 앞에 나아와 자신의 범죄 사실로 인하여 사형을 선고 받았다. 그때 대속자가 나타나서 모든 잘못을 자신의 것으로 돌렸다. 그 범죄자가 대속자를 받아들였을 때, 판사는 그의 유죄 판결을 삭제할 뿐 아니라, 그를 법정까지 오게 만든 죄 자체가 없다고 간주했다. 왜냐하면 대속자가 법적으로 완전무결한 신분을 그 범죄자에게 주었기 때문이다.
이 사람이 정말 무죄한 것은 아니다. 오히려 그는 유죄 선고를 받아야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용서받았다는 사실이 복음이다.
구원의 계획 속에서 우리는 이 범죄자이고 예수님은 대속자이시다. 예수님은 법적으로 깨끗한 기록을 가지고 있지만 우리 대신 법정에 서신다. 그리고 그의 의는 우리의 불의를 대신한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의롭게 되는 것은 우리의 행위 때문이 아니라, 자신의 의를 우리에게 제공하시는 예수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것이다. 그래서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인 것이다. 우리의 과거와 상관없이 예수님을 영접할 때에 우리는 그분의 의로움 속에서 하나님 앞에 선다.

일요일
7월 18일
율법의 행위

도입)
율법 자체만을 전부로 보고 그 율법만을 지켜야 한다고 고집부리는 것은 어리석은 모습이다. 그 자신이 여전히 미완성의 상태로 머물러 있을 뿐이다. 사람은 율법을 온전히 지킬 수가 없다. 그게 인간의 실상이다. 스스로 의를 이루기에는 인간은 한계가 있다. 율법의 완성자이신 주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아야 한다. 의의 주 예수 그리스도를 의지해야 한다.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기 전까지는 어찌하든 율법의 행위로 의를 성취하고자 기를 썼다. 하지만 그리스도를 만나 경험하고 나서는 그것이 부질없는 일임을 발견한다. 의는 결코 율법의 행위로 이룰 수 없음을 뼈저리게 깨달았다. 인간의 행위는 불완전하다. 불완전한 행위를 신뢰하여 율법을 이루겠다는 노력 역시 헛되다. 율법으로 난 의는 행위일 뿐이다.

❶ 롬 3:19~20을 읽으십시오. 바울은 율법에 관하여 어떻게 말하고 있습니까? 율법이 할 수 있는 역할과 율법이 할 수 없는 역할은 무엇입니까? 율법의 역할을 이해하는 것은 그리스도인들에게 얼마나 중요한 문제입니까?

여기서 바울은 당시 유대인들의 이해 방식에 따라 율법을 광범위한 의미로 사용하고 있다. 율법을 뜻하는 히브리어 토라는 오늘날의 유대인들에게도 하나님의 명령을 담고 있는 구약의 첫 다섯 책 또는 일반적으로 구약 전체를 의미한다. 토라에는 도덕법과 그것을 확장시킨 규례와 법도들과 제사법이 포함되어 있었다. 따라서 율법이란 유대교의 모든 체계를 말한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
율법 아래 있다는 것은 율법의 관할 하에 있다는 의미이다. 그러나 율법은 우리가 부족한 사람이며 하나님 앞에서 죄인이라는 사실을 드러낼 뿐이다. 율법은 그런 죄의 책임을 면제시켜주지 않는다. 율법이 할 수 있는 일이란 죄인으로 하여금 자신을 구할 해결책을 찾게 하는 것이다.
오늘날 우리가 로마서를 삶에 적용하기 원한다면 율법을 유대법으로 이해하는 것은 더 이상 의미가 없다. 우리는 이 율법을 도덕적인 의미에서 적용해야 한다. 도덕법은 유대교의 체계와 마찬가지로 우리를 구원할 수 없다. 죄인을 구원하는 것은 도덕적 율법의 기능이 아니다. 이 율법의 기능은 하나님의 성품을 드러냄으로 죄인들로 하여금 자신이 그분의 성품에 미치지 못함을 보게 하는 것이다.
그것이 도덕법이든, 또는 의식법, 시민법, 아니면 전체 율법이든지 상관없이 율법의 준수는 사람을 하나님의 앞에서 의롭게 만들 수 없다. 율법은 사람을 의롭게 만들기 위해 의도된 것이 아니다. 오히려 율법은 우리의 부족을 지적하고 우리를 그리스도께로 인도하기 위한 것이다.
율법이 구원을 줄 수 없는 것은 마치 증상이 병을 치료하지 못하는 것과 같다. 증상에는 치료 기능이 없다. 단지 치료가 필요함을 알려줄 뿐이다. 이것이 율법의 기능이다.

교훈: 우리는 도덕법의 중요성을 알고 있지만, 그 역시 우리를 구원하지는 못함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부가적용)
하나님은 우리의 아버지이시다.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될 수 있는 것은 율법을 지킨 행위 때문이 아니다. 율법은 복잡하지 않다. 세상사는 이치이다. 윤리와 도덕의 수준이다. 그것을 잘 지켰다고 해서 거룩해 지지 않는다. 물론 우리가 거듭났기 때문에 세상의 윤리와 도덕을 지키는 것이지 그것이 하나님께 나아가는 방법은 아니다. 믿음의 행위로 말미암아 우리가 거룩하게 되고 율법의 모든 요구를 이루게 되는 것이다. 우리가 율법을 지켜서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이 아니기 때문에 어느 누구도 우리 스스로 판단할 수 없는 것이다. 서로를 섬기며 사랑하며, 서로를 위해 헌신함으로 하나님의 아버지 됨을 세상에 나타내는 것이 우리에게 주어진 믿음의 행위인 것이다.

월요일
7월 19일
믿음과 의

도입)
의로워지는 것은 종교의식(할례)이나 율법(법)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 믿음으로 의로워 진다고 하였는데, 믿음으로 의로워지는 것은 믿음과 의가 동격이기 때문이다. 의가 무엇인가? 의는 하나님의 인격이다. 의가 하나님의 인격이라면 믿음은 하나님의 인격을 믿는 것이다. 따라서 인격(믿음)과 인격(하나님의 의)의 만남이니 믿음으로 의로워 질 수 밖에 없는데 이에 비하여 종교의식은 어디까지나 의식이고 법(율법)은 정죄하는 도구일 뿐이지 이것들에게는 인격이 없다. 인격이 없으니 아무리 종교적 열심을 내도 의로워 질 수 없고 율법의 지식으로 아무리 사람들을 정죄해도 그 안에 생명(인격)이 없으니 의로워 질 수 없는 것이다.

“이제는 율법 외에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났으니 율법과 선지자들에게 증거를 받은 것이라”(롬 3:21).

❶ 우리는 이 말씀의 의미를 어떻게 이해해야 합니까?

이 새로운 의는 유대인들에게 익숙했던 율법의 의와 대조된다. 새로운 의는 ‘하나님의 의’로 불리는데, 그것은 하나님께로부터 나오고, 하나님께서 주시며, 그분이 인정하는 유일하고도 진정한 의이다.
물론 이 의는 예수께서 인간으로 사시는 동안 그분의 삶을 통해 이르러 왔으며, 이 의를 얻는 자들은 자격이 있어서가 아니라 그것이 필요하기 때문에 믿음으로 그것이 자신을 위한 것임을 주장하며 받아들이는 자들이다. 예수님은 이와 같이 믿는 모든 자들에게 이 의를 제공하신다.
“의란 율법에 순종하는 것이다. 율법은 의를 요구하는데 바로 이것을 죄인이 율법에게 빚지고 있다. 그러나 죄인은 그 빚을 갚을 능력이 없다. 그가 의에 이를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오직 믿음을 통해서 얻는 것뿐이다. 그는 믿음에 의해서 그리스도의 공로를 하나님께 가져갈 수 있으며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아들의 순종하심을 죄인의 계정에 두신다. 인간이 실패한 자리에 그리스도의 의를 받아들이시고 하나님께서는 회개하고 믿는 영혼을 받으실 뿐만 아니라 용서하시고 의롭게 하시며 그를 마치 의인인 것처럼 취급하시고 당신의 아들을 사랑하신 것처럼 그를 사랑하신다.”(가려 뽑은 기별 1권, 367)

❷ 이 놀라운 진리를 어떻게 우리의 삶에 적용할 수 있습니까? (롬 3:22 참조)

여기서 예수 믿음이란 의심의 여지없이 예수를 믿는 믿음이다. 믿음이란 그리스도인들의 생활에 있어서 지적 동의 이상, 즉 그리스도의 삶과 죽음을 사실로 인정하는 것 이상의 의미를 가지고 있다.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진정한 믿음은 그분을 나의 구주와 대속자로, 나의 구원에 대한 보증과 주님으로 받아들이는 것이며, 예수께서 사신 것처럼 살기로 선택하는 것을 말한다. 또한 그분을 신뢰하고 그의 명령에 따라 사는 삶을 추구하는 것을 말한다.

교훈: 우리가 의롭게 되는 유일한 길은 예수님을 통해서 주시는 하나님의 의를 믿음으로 받아들이는 것이며, 그분의 사고와 생활방식, 그분의 명령 따르기를 바라는 것이다.

부가적용)
예수 그리스도의 의는 믿음이다. 그리스도를 믿을 때 의는 완성된다. 예수의 의가 우리에게 효력을 발휘한다. 하지만 율법으로 난 의는 각자의 행위에 근거를 두고 있기에 늘 불안하다. 오늘은 우뚝 서 있었을지라도 내일은 넘어질 수도 있다. 잘 하다가 넘어지면 율법으로 말미암은 의는 효력을 상실한다. 열 가지를 잘 해도 한 가지가 걸리면 끝장이다. 바울은 이 진리를 깨달았다. 자신의 행위를 바탕으로 한 율법의 의를 붙잡는 일이 살얼음판을 걷는 것과 마찬가지임을 깨달았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를 대신하여 완성하신 의는 안전하다. 우리는 단지 믿음으로 응답하면 된다. 그러면 예수 그리스도의 의가 우리에게 전가된다. 너무 간단한 일이다. 너무 쉬워서 사람들은 쉽사리 이 진리를 믿으려 하지 않는다.

화요일
7월 20일
은혜와 칭의

도입)
칭의는 재판을 수반하는 법정적 용어이다. 칭의의 원천은 하나님의 은혜이다. “죄가 없으면 칭의가 필요 없다. 반면에 은혜가 없으면 칭의도 가능하지 않다(Tom Wright).” 칭의의 근거는 그리스도의 피다. 속죄가 없이는 칭의가 불가하다. 칭의 수단은 오직 믿음이다. 칭의의 효과는 의롭게 되는 것이며, 그리스도와의 언약관계가 맺어지고 메시야 공동체 일원이 되는 것이다.

❶ 지금까지 배웠던 율법의 기능에 대하여 생각하면서 롬 3:24을 읽으십시오. 바울이 말하 고자 하는 바는 무엇입니까? 속량(redemption)이 예수 안에 있다는 말은 무슨 뜻입니까?

본문에서 “의롭다 하심을 얻는다”는 것은 무슨 뜻인가? “의롭게 하다”라는 의미의 그리스어 디카이오오는 “의롭게 만들다”, “의롭다 칭하다”, “의롭게 여기다”라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같은 어근을 가지고 있는 디카이오수네는 “의”, 디카이오마는 “옳은 행실”을 뜻한다. 여러 번역 성경에서 항상 그 연관성이 드러나지는 않지만 “칭의 (justification)”와 “의(righteousness)” 사이에는 밀접한 연관성이 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의로운 자라고 선언하실 때 우리는 의롭다 칭함을 받는 것이다. 따라서 칭의 이전에 인간은 불의하며, 하나님께 가납될 수 없다. 반면 칭의 이후에 인간은 의롭게 간주되며 하나님께 가납된다.
이런 일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만 가능하다. 은혜는 공로가 없어도 주어지는 “호의”를 의미한다. 죄인이 구원을 얻기 위해 하나님께로 돌이킬 때, 그 사람을 의롭다고 여기거나 선언하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의 행위이다. 그것은 아무 조건 없는 호의이다. 신자가 의롭다 칭함을 얻는 것은 그에게 어떤 공로가 있기 때문이 아니다. 그는 단지 총체적으로 대책 없는 자신의 상황을 하나님께 가져갈 뿐이다. 그러므로 그 죄인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구속 안에서 의롭다 칭함을 얻는다. 그 구속은 그리스도께서 죄인의 대속자와 보증인이 되심으로 가능한 것이다.
로마서에서 말하는 칭의는 적시에 이루어지는 정밀한 조치이다. 칭의 직전에도 죄인은 구원 밖에 있으며 불의하고 가납되지 못한 상태에 있다. 그러나 칭의 직후에 그는 구원 안에 있으며 의롭고 가납된 상태에 있게 된다.
이미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에게 칭의는 자신을 그리스도께 전적으로 굴복시켰을 때 일어났던 과거의 사건이다. 롬 5:1에 “의롭다 하심을 받았”다는 말의 시제는 현재완료인 것이다.
물론 의롭게 된 죄인이 타락하여 다시 그리스도께로 돌아오면, 칭의는 다시 일어난다. 그래서 매일 재회심의 경험이 이어져야 한다면 그 말은 칭의도 반복적인 경험이 될 수 있음을 암시하고 있는 것이다.

교훈: 구원이 순전히 하나님께서 은혜로 베푸시는 것임을 믿고 받아들인다면 하나님은 우리를 의롭다고 선언해 주시며, 그 순간 우리는 구원 안에 있게 된다.

부가적용)
사람들은 흔히 이 의롭게 되는 길이 우리들의 생활과 관계있는 것으로 잘못 알고 있으며 이 축복이 점진적으로 우리들에게 이루어지는 줄 알고 있다. 그러나 성경은 우리 칭의가 도덕적인 변화가 아니고 우리 인간들을 향하신 하나님 아버지의 법정적인 선언이라고 하였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구속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24절)고 확실히 선언하셨다. 이 의는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으로 말미암은 하나님의 일방적인 은사요, 베푸시는 축복이요, 법정적인 선언이기에 그 아무도 정죄하거나 취소할 수가 없고 차별이 없는 것이다. 롬 8:33에 "누가 능히 하나님의 택하신 자들을 송사하리요 의롭다 하신 이는 하나님이시니라"고 하셨다. 우리가 의롭다 함을 받으면 어떻게 되는지를 분명하게 알아야 한다. 의롭게 되면 신분의 변화가 생긴다. 다시 말하면 마귀의 자식들이 변하여 하나님의 자녀가 된다는 말이다.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다“(요 1:12)고 하셨으며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를 자기의 아들로 미리 정하셨다"고 하였다. 칭의 된 자에게는 하나님의 보장이 있다. 엡 2:19에 "이제 우리들은 성도들과 동일한 시민이요 하나님의 권속이라"고 하셨다. 하나님이 나를 그의 손바닥에 새겨놓으셨다(사 49:16)고 하셨다. 하나님의 손바닥에 새겨진 것을 누가 지우며 그 권능의 손에 붙잡힌 우리를 빼앗거나 해할 자가 없는 줄을 확실히 깨닫고 담대히 살아나가시기 바란다.

수요일
7월 21일
그의 의

도입)
자기 의를 의지하는 사람은 우리의 의가 해진 옷과 같음을 알아야 한다. 죄책감에 시달린다고 경건한 것은 아니다. 그리스도의 의를 자기 의로 삼는 사람들이 복된 사람이다. 자신의 의로 죄의 문제를 해결하려 할 때 우리는 더 큰 죄책감에 빠지게 된다. 하지만 그리스도의 선하심에 죄의 문제를 내려놓고 주님께서 죄의 사실을 끊어내심을 체험할 때 우리는 비로소 죄로부터 자유케 된다. 하나님의 사랑을 경험하고 그 은혜가운데 살아감으로 죄로부터 자연스럽게 멀어지게 되는 것이다. 참된 진리와 사랑을 경험한 이에게 허울 좋은 거짓은 더 이상 유혹이 될 수 없다. 이제 그리스도의 의를 우리의 의로 삼고 그 선하심을 의지해 살아감으로 반복된 죄의 속박으로부터 온전히 자유케 되기를 소망한다.

롬 3:25에서 바울은 구원의 위대한 소식을 더 심도 있게 다룬다. 그는 화목제물 (propitiation*)이라는 전문적인 말을 사용하였다. 이 단어의 그리스어는 힐라스테리온인데 신약에서 오직 이곳과 히 9:5에 “속죄소”라는 의미로 사용되었다. 롬 3:25에서 이 말은 그리스도를 통해 베풀어지는 칭의과 구원를 함축하고 있으며, 구약 성소의 속죄소에서 표상된 모든 것들이 그리스도를 통하여 성취되었음을 설명하고 있다. 다시 말해 예수께서 대속적 죽음을 통하여 구원의 방편을 마련하셨고, 속죄를 만족시킴으로써 하나님께서 우리의 구원에 필요한 일을 하셨다는 것이다.
롬 3:25은 또한 “죄의 사면”에 대해서도 말하고 있다. 우리가 하나님께 가납되지 못하는 이유는 우리 죄 때문이다. 그런데 우리의 죄를 지우기 위해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다. 하지만 구원의 계획 속에서 하나님은 우리가 그리스도의 보혈을 믿을 때에 죄가 사하여 질 수 있도록 길을 만드셨다.
간과라는 의미의 그리스어 파레시스는 문자적으로 “넘어감” 또는 “지나감”을 뜻한다. 그러나 간과한다는 것은 죄를 못 본 체 한다는 말이 결코 아니다. 오히려 그리스도께서 모든 사람의 죄를 대신하여 십자가에서 죽으셨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우리의 모든 죄를 없는 것으로 여기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의 보혈에 대한 믿음을 가진 사람은 누구든지 하나님으로부터 “용서”를 받게 된다(고전 15:3).

❶ 롬 3:26~27을 읽으십시오. 여기서 바울이 말하고자 하는 요점은 무엇입니까?

바울이 모든 사람과 나누고 싶은 복음은 인간에게 하나님의 의가 허락되었다는 것이다. 우리에게 주어진 그의 의는 행위로 말미암지 않고, 우리의 공로가 아닌, 오직 예수님과 그분이 우리를 위해 행하신 일들을 믿음으로 말미암는 것이다.
갈보리 십자가로 인하여 하나님은 죄인들을 의롭다고 선언하시고, 여전히 우주 앞에서 우리를 의롭고 합당하게 여기신다. 하늘이 최상의 희생을 치렀기 때문에 사단은 하나님을 비난할 수 없게 되었다. 사단은 하나님께서 인류에게 주는 것보다 요구하는 것이 더 많다고 비난해 왔었다. 그러나 십자가는 그런 주장을 일축하였다.

*propitiation(프로피티에이션)은 신의 진노를 달램이라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교훈: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한 화목제물이 되심으로 우리의 죄는 사하여졌고, 하나님의 공의는 만족되었으며, 하나님의 품성에 대한 의문은 해소되었다.

(부가적용)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으셨고 하나님이 그분으로 하여금 화목제물이 되게 하셨다면 우리 세상 사람들은 어떻게 해야 구원을 받는가이다. 속죄와 대신함의 차이는 무엇인가? 이 두 가지 사이에는 어떤 차이가 있는가? 우리는 주 예수님의 역사가 속죄의 역사이고 속죄 역사의 결과가 대신함임을 보아야 한다. 속죄는 원인이고 대신함은 결과이다. 속죄의 범위는 극히 크고 대신함의 범위는 그리 크지 않다. 한 가지 기묘한 사실은, 성경에서 주 예수님이 모든 사람의 죄를 위해 죽으셨다는 말씀을 찾아볼 수 없다. 한 구절도 없다. 성경은 주 예수님이 모든 사람을 위하여 죽으셨다는 말할 뿐이다(고후 5:14). 그분의 구속 역사는 하나님의 공의의 요구를 만족시키기 위한 것이다. 주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죄를 속량하실 때 그분의 십자가의 속죄 사업은 사람과 무관한 것이다. 죄를 속량하는 일은 우리 자신과 아무 상관이 없다는 것을 기억하라. 속죄 사업은 하나님과 죄 사이의 문제이다. 속죄 사업이란 무엇인가? 이는 하나님 자신이 죄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세상에 오신 것이다. 죄 문제가 해결될 때 속죄 사업도 완성된다. 유월절 어린 양의 피가 문 좌우 설주와 인방에 발라진 것은 하나님이 “그 피를 본즉 내가 지나 가리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이다. 피는 하나님이 보시기 위한 것이지 장자를 위한 것이 아니다. 장자는 피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 장자는 집안에 거하고 있었다. 피는 장자의 요구를 만족케 하기 위한 것이 아닌 하나님의 공의의 요구를 만족케 하기 위한 것이었다. 장자는 속죄와 관련되는 않는다. 구약 성경을 읽어보면 속죄의 피는 지성소 안으로 가져가기 위한 것으로서 휘장을 향해 일곱 번 뿌려져야 했다. 속죄일에 대제사장은 언약궤의 시은좌 앞으로 피를 가져가 하나님께 드려야 했다. 물론 피가 문둥병자의 엄지손가락과 귀와 엄지발가락에 발라졌지만, 헌신으로 말한다면 그것은 하나님께 드리기 위한 것이다. 사람에게는 이런 요구가 없다. 속죄는 하나님의 문제이다. 속죄는 하나님이 개입하시어 사람이 해결할 수 없는 문제를 해결하시는 것이다. 그러므로 성경은 주 예수님이 화목제물이 되심은 우리만 위할 뿐 아니라 온 세상의 죄를 위한 것이라고 말한다(요일 2:22) 속죄는 모든 세상 사람을 포함한다. 속죄문제는 모든 사람 곧 구원 받지 않은 사람까지도 포함한다. 누구든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는 하나님의 의를, 의의 옷을 입게 될 것이다. 이분이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우리는 죄인이지만 예수님은 죄인이 아니시기에 우리를 구원하실 수 있다. 내 의는 더러운 걸레 같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의는 곧 하나님의 의이시며 나에게 그의 의의 옷을 입혀 주신다.

목요일
7월 22일
믿음과 행위

도입)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율법의 행위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 행위와 믿음의 비교는 '행동'에 관한 것이 아니라 '근거'에 관한 것이다. 구원의 근거가 율법의 행위에 있느냐, 아니면 그리스도에게 있느냐의 문제이다. 구원의 근거가 율법의 행위라는 것은 곧 구원의 근거가 율법을 행하는 나 자신에게 있다는 것이다. 즉 율법의 행위에 구원의 근거를 둔다는 것은 율법을 지키는 것과 관련된 이야기가 아니라 구원의 근거가 나에게 있는 것을 뜻한다. 그러므로 만약에 '나는 믿었기 때문에 구원을 받았습니다.'라는 것도 엄밀하게 따지면 율법의 행위이다. 왜냐하면 구원의 근거를 믿은 자신에게 두기 때문이다. 구원의 근거는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이다. 여기서의 '믿음'은 '나는 믿었다'라는 맥락에서 나오는 믿음이 아니다. 구원의 근거가 내가 아니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이시라는 것을 표현하기 위해 '믿음'이 나오는 것이다. 즉 구원의 근거는 나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에게 있다는 것이다. 나의 믿음조차도 구원의 근거가 될 수 없다. 만약에 나의 믿음이 구원의 근거라면 그것은 율법의 행위이다. 그러기에 믿음으로 말미암는 구원이 은혜라는 것이다. 율법과의 관계에서는 죽은 것이며, 그리스도와 함께 못박혀 죽었고,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살고 있는 것이다. 이것이 믿음으로 말미암는 구원이며 하나님의 크신 은혜이다. 구원의 근거는 내가 아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내 믿음도, 내 신앙생활도, 내 고백도, 내 헌신도 구원의 근거가 되지 못한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그러기에 이 구원은 든든하다. 나에게 달린 구원이라면 얼마나 불안하겠는가. 그러나 그리스도에게 근거한 구원이란 얼마나 든든하겠는가. 주님을 의지한다는 것이 무엇인지 다시 한번 묵상해본다.

“그러므로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얻는 것은 율법의 행위에 있지 않고 믿음으로 되는 줄 우리가 인정하노라”(롬 3:28).

❶ 이 말씀은 율법이 우리를 구원할 수 없기 때문에 우리가 그것에 순종할 필요가 없다는 뜻입니까? 그대는 어떻게 답하겠습니까?

역사적인 문맥에서 보면 바울이 롬 3:28에서 언급하고 있는 율법은 유대교 전체에 해당하는 포괄적인 의미이다. 유대인들이 율법적 체계 아래 아무리 철저히 살고자 할지라도 예수를 메시야로 영접하지 않는다면 의롭다 칭함을 얻을 수 없었다.
이 성경절에서 말하고자 하는 바울의 결론은 믿음에는 자랑할 것이 없다는 것이다. 사람이 자신의 행위로 의롭게 되었다면 아마도 그에게 자랑할 것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예수께서 믿음의 대상이기 때문에 죄인이 의롭게 되었다면 모든 공은 죄인을 의롭게 여기신 하나님께 돌아가야 마땅하다.
그래서 엘렌 G. 화잇은 다음과 같이 자문자답하였다. “믿음으로 말미암는 칭의란 무엇인가? 그것은 인간의 영광을 티끌 속에 내던지고, 인간이 스스로의 힘으로는 할 수 없는 것을 인간을 위해 행하시는 하나님의 역사이다.”(목사와 복음교역자에게 보내는 권면, 456)
율법의 행위는 과거의 죄를 속할 수 없다. 칭의는 획득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오직 그리스도의 대속적 희생을 믿을 때 우리에게 주어지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율법의 행위는 칭의를 이루는 것과 상관이 없다. 행위 없이 의를 얻는다는 것은 칭의를 이루는 데 우리의 어떤 공로도 포함되지 않았다는 뜻이다. 그러나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이 부분을 오해하며 잘못 적용하고 있다. 그들은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오직 믿는 것이라고 말하며 행위와 순종, 심지어 도덕적 율법에 대한 순종마저 가볍게 여긴다. 이는 바울의 서신을 완전히 잘못 읽는 것이다. 로마서와 다른 서신에서도 바울은 도덕적 율법의 준수에 대하여 매우 큰 가치를 부여하고 있다. 그것은 예수님과 야고보, 요한도 마찬가지이다(마 19:17, 롬 2:13, 약 2:10~11, 계 14:12). 바울의 요점은 율법에 대한 순종이 칭의의 수단은 아니지만, 믿음으로 의롭게 된 자만이 하나님의 법을 준수하며 율법을 지킬 수 있는 사람이라는 것이다. 반면 의롭다 칭함을 얻지 못하여 아직 거듭나지 않은 자들은 율법의 요구를 절대로 성취할 수 없다.

교훈: 믿음으로 의롭게 된 자는 율법을 지키려는 자기 의를 포기한 것이지, 율법을 온전하게 성취하신 하나님의 의를 포기한 것이 아니다.

부가적용)
믿음이 없는 행위는 죽은 것일 뿐만 아니라 행위가 없는 믿음 역시 죽은 것이다. 죄인이 구원받은 일에서 이러하듯 믿는 이의 생활에서도 똑같다. 믿음이 유일하게 표현되는 곳은 바로 행위이다. 우리의 행위는 우리가 믿은 것을 나타낸다. 믿음과 행위가 일치되지 않는다면 우리의 믿음에는 반드시 문제가 있는 것이다. 많은 믿는 이들이 어떻게 믿어야 할지를 모르고 그들의 믿음을 표현할 줄도 모른다. 사실 이것은 가장 쉬운 것이다. 믿음은 행위를 통해서 표현된다. 믿음에는 두 가지 작은 원칙이 있기 때문에, 믿음은 이 두 가지 원칙의 지배를 받는다. 믿음은 하나의 문이자 길이다. 영적인 체험이 있는 사람이라면 믿음에는 믿는 것과 의지하는 것의 두 방면이 있다는 것을 알 것이다. 믿음에는 행위와 태도의 차이가 있다. 한 번의 믿음이 바로 관문을 통과하는 것이다. 이것에 이어서 오랫동안 의지하는 것이 바로 진보이다. 우리의 마음의 극적인 변화를 통해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는 믿음의 행위를 갖는 것이 바로 문으로 들어가는 것이다. 이후에 믿음의 태도를 지키는 것이 행위가 된다. 만일 믿는 이가 어떤 일에서 하나님을 믿어야 한다면, 그는 먼저 이와 같은 우리의 심령의 변화를 통한 믿음의 행위를 가져야 하고, 하나님을 참되고 전일하게 믿은 후에 비로서 믿음의 길을 갈 수 있다. 믿음과 행위는 대립개념이 아니다. 이신칭의는 혹자들이 오해하고 있는 것처럼 믿음 대 실천의 대립이 아니다.

금요일
7월 23일
더 깊은 연구를 위해

독서과제: 가려 뽑은 기별 1권, 236~239 “율법에 나타난 그리스도의 의”, 331~335 “와서 구하고 찾으라”, 373~374 “그리스도로 말미암는 완전한 순종”, 실물교훈, 128~129 “새 것과 옛 것.”
“그리스도의 품성이 그대의 품성을 대신하게 되고 그대는 죄를 도무지 범하지 않은 것처럼 하나님의 앞에 받아들이는 바 된다.”(정로의 계단, 62)
“믿음은 하나님께서 죄인들에게 사유하심을 약속할 만한지를 다루어 보시는 조건이다. 그것은 믿음 안에 구원을 얻을 수 있는 어떤 공덕이 있어서가 아니라 죄의 치유제로 마련된 그리스도의 공로를 그의 믿음이 붙잡을 수 있기 때문이다. 믿음은 죄인의 범죄와 결함 대신에 그리스도의 완전하신 순종을 제시할 수 있다. 죄인이 그리스도가 자신의 개인적인 구세주이심을 믿을 때에 하나님께서는 그의 변함이 없으신 약속을 따라서 그의 죄를 용서하시고 그를 값없이 의롭게 하신다. 회개한 영혼은 자기의 대치물이시며 담보물이신 그리스도께서 자기를 위하여 죽으셨고 그의 대속이 이루어지고 그의 의가 됨으로써 자신의 의롭다 하심이 이루어졌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가려 뽑은 기별 1권, 366~367)
“비록 율법은 죄의 형벌을 감해 주지 못하고 죄인에게 그의 모든 부채를 청구하지만 그리스도께서는 회개하고 당신의 자비를 믿는 모든 자들에게 너그러이 용서해 주시겠다고 약속하셨다. 하나님의 사랑은 회개하고 믿는 영혼에게 풍성하게 미친다. 영혼에게 찍힌 죄의 낙인은 오직 대속 제물의 피를 통해서만 지워 버릴 수 있다. 하늘 아버지와 동등하셨던 주님의 희생보다 덜한 제물로서는 그 요구에 응할 수 없었다. 주님의 생애, 겸비, 죽으심 및 멸망받은 인류를 위한 중재 등을 포함한 그리스도의 사업은 율법을 높이고 존귀케 하는 것이었다.”(가려 뽑은 기별 1권, 371)

핵심적인 토의를 위해
1. 이번 주에 공부한 말씀들을 다시 읽고 요약해서 함께 나누십시오.
2.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 어떤 대가가 치러졌는지 생각하십시오. 죄는 얼마나 나쁜 것입니까? 만약 우리가 죄를 그치고, 죄를 짓지 않게 되었을지라도 하나님 앞에 의로울 수 없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이런 사실이 죄의 유혹을 저항하는 데 얼마나 도움이 됩니까?
3. 어떤 방식으로 사람들은 오직 믿음으로 얻는 구원에 관한 놀라운 소식들을 남용하도록 유혹을 받을까요? 그런 사고에 사로잡힌 사람들은 어떤 덫에 걸립니까?(벧후 3:16, 요 일 3:7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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