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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과 -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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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등불과기름 작성일10-07-12 23:03 조회6,088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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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7월17일 일몰: 오후 7시 52분

제3과
<모든 사람이 죄를 범(犯)하였으매>

<기억절(記憶節)>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롬 3:23).

▣ <로마서의 개요(槪要)> (로마서 1:16-17)
복음의 사람 → “그리스도 ”
복음의 능력 → “하나님의 능력”
복음의 목적 → “구원(救援)”
전파의 대상 → “모든 사람”
영접의 계획 → “믿는 모든 사람”
특수한 결과 → “오직 의인(義人)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바울은 복음을 자랑하였으니 그것은 그 자신의 생활에서,
그리고 모든 믿는 자의 생활에서 그 복음의 능력이 입증되었기 때문이다.

<요점(要點)>
그리스도인이든지 이방인이든지 모든 인간은 죄 된 상태에서 우리를 구원해 주실 그리스도의 능력에 대한 총체적인 필요성과 의존성을 인정해야 한다.

일요일 7월 11일
<복음(福音)을 부끄러워하지 않음>

▣ <하나님의 의(義)가 필요함>
사도바울은 로마서 1장16-17절에서
로마서의 주제를 말한 다음 이 같은 의(義)에 대한 인간의 필요에 대해서 말하고 있다.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온 세상으로 하나님의 심판아래 있게 하려 함이니라” (롬 3:19)
바울은 이와 같이 강론하는 가운데 시기하는 유대인들과 교만한 헬라인들과 자만심이 많은 로마인들과
그리고 우리들과 같은 일반 죄인들을 돌아보고 있다.
로마서 1장 18-32절까지에서 그는 얼마나 무서운 죄의 장면들을 제시하고 있는지!
처음에는 이방인의 불의가, 그 다음에는 유대인의 불의가 기록되어 있다.
로마서는 우리에게 죄 있는 사람들을 선(善)하게 만드시는 하나님의 방법을 말해주고 있으며,
이 놀라운 제목의 열쇠는 로마서 1장 16-17절에서 찾게 된다.

▣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유대인은 바울을 배교자(背敎者)로 여겼다.
바울은 이방인 가운데서 멸시를 받고 핍박을 당했다. 그는 이도성에서 저 도성으로 쫓겨 다녔고, “세상의 더러운 것”과 “만물의 찌끼”로 여김을 받았다. (고전 4:13).
그는 십자가를 전파하는 일이 헬라인들에겐 “미련한 것”이고, 유대인들에겐 “거리끼는 것”임을 잘 알고 있었다. (고전 1:23). 그러나 바울은 복음의 진리에 대한 분명한 확신이 있었고, 그 자신이 충분히 복음의 축복과 능력을 체험했기 때문에 복음을 전혀 부끄러워하지 않았을 뿐 아니라 많은 사람에게 매우 혐오스러웠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자랑까지 했다. (갈 6:14) <본교 성경주석(한) 11권564p>

◉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 먼저는 유대인에게요 그리고 헬라인에게 로다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 (롬 1:16~17).

◉ 이 성경절에 등장하는 몇 가지 핵심(核心)단어는 다음과 같다.

1. 복음(福音)
이 말은 “좋은 기별” 또는 “좋은 소식”을 의미한다.
이 말이 단독으로 쓰였을 때는 어떤 기쁜 소식을 의미하지만,
그리스도와 함께 사용될 때는 “메시야에 관한 좋은 소식”이라는 의미가 된다.
(크리스투스는 메시야라는 의미의 그리스말이다.)
복음은 메시야가 오셨고 그를 믿는 모든 사람들이 구원을 얻을 것이라는 기쁜 소식이다.
구원은 우리도 하나님의 율법도 아닌 오직 예수님과 그의 완전한 의에 달려있다.

2. 의(義)
이 단어는 하나님 앞에서 올바른 상태를 말한다.
이 말은 로마서에서 고유한 의미로 발전되었다.
특히 우리는 롬 1:7에서 “의”가 “하나님의 의”임을 주목해야 한다.
그것은 하나님으로부터 나아오는 의이며, 하나님께서 공급해 주시는 의이다.
이 의(義)만이 우리에게 영생의 약속을 줄 만한 가치가 있다.

3. 믿음
이 말씀에서 “믿는다” 또는 “믿음”으로 번역된 그리스어는 피스튜오와 피스티스이다.
구원과 관련된 믿음의 의미는 앞으로 로마서를 연구하면서 배우게 될 것이다.

◉ <위로부터 내리는 은혜(恩惠)>
“제자들의 마음은 자비심으로 너무도 완전하게, 너무도 깊게, 너무도 원대하게 충만해졌으므로 그들은 세상 끝까지 가서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갈 6:14)다라고 증거할 수밖에 없었다. 그들이 그리스도 안에 있는 그대로의 진리를 선포하였을 때, 사람들의 마음은 그 기별의 능력에 굴복하였다.”(교회증언 8권, 19)

◉ 우리가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우리의 의가 아닌 하나님의 의로 영생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은,
정말 좋은 소식이다.

월요일
7월 12일
<인간의 처지>

▣ <능히 깨달을 자 누구리요.>
성육신(成肉身)하신 하나님 예수그리스도는 우주의 공간 예술과 시간 예술이 서로 만나 절정을 이룬 최대, 최고의 특별 계시이다.(시편 19편).

◉ <두 가지 경이(驚異)>
18세기말 독일의 비판 철학자요 자연 과학자인 칸트(Jmmanuel Kant)는 자연계와 인간의 이성(理性)에 관한 오랜 연구와 깊은 통찰을 거친 후 이렇게 진술했다. “나의 심령을 거룩한 외경(畏敬)과 언제나 솟아나는 경이(驚異)로 채우는 두 가지가 있는데, 그것은 육신적인 존재인 인간을 실제로 없는 것처럼 만드는 별빛이 찬란한 하늘 장관(壯觀)이요, 하나는 지적인 존재로서 인간을 무한한 존엄으로 끌어올리는 도덕률(道德律)이다.”
칸트는 모든 경험 이전에 독립적으로 사물을 인식하는 능력이라는 순수이성(純粹理性)과 인간에게 고유한 도덕률을 제공한다는 선험적(先驗的)인 실천이성(實踐理性)을 규명하기위해 십여 년의 각고(刻苦) 끝에 걸작 [순수이성비판(純粹理性批判)]을 썼고 이어서 역작 [實踐理性批判]을 써서 철학(哲學)의 경전(經典)이 되게 했다.
그런데 놀랍게도 그보다 2천7백여 년이나 앞선 기원전 천년경 아주 단순한 한편의 짤막한 시(詩)를 써서 이러한 모든 시도를 빈틈없이 마무리 지은 엄청난 사람이 있다. 그가 바로 지금 펼쳐지는 시편 19편1-14절인 것입니다.

“창세로부터 그의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 곧 그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그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보여 알게 되나니 그러므로 저희가 핑계치 못할지니라. 하나님을 알되 하나님으로 영화롭게도 아니하며 감사치도 아니하고 오히려 그 생각이 허망하여지며 미련한 마음이 어두워졌나니, 스스로 지혜 있다 하나 우준하게 되어. (로마서 1장20-22절)
바로 이것이다. 칸트는 모든 경험 이전의 순수이성마저도 이미 죄의 영향을 받아 망가져 빗나가고 있는 비순수(非純粹)한 불순(不純) 이성임을 깨닫지 못한 것이다.
죄라는 말의 대표적인 표현인 구약 히브리어의 “하타아트”나 신약 헬라어의 “하마르티아”가 모두 ‘목표를 빗나가다“는 뜻임은 의미심장하다.
칸트가 내세운 비순수한 인간의 이성이 생산한 빗나간 실천 이성의 부도덕 명세서가 여기 그 병인(病因)과 함께 고시(告示)되어 있다.

“또한 저희가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매 하나님께서 저희를 그 상실한 마음대로 내어 버려 두사 합당치 못한 일을 하게 하셨으니, 곧 모든 불의(不義), 추악(醜惡), 탐욕(貪慾), 악의(惡意)가 가득한 자요 시기(猜忌), 살인(殺人), 분쟁(忿爭), 사기(詐欺), 악독(惡毒)이 가득한 자요 수군수군하는 자요.” (로마서 1장 28-29절)

▣ <깨달을 자 누구리요.>
불순한 인간의 이성이 아니라 “순결하여 눈을 밝게 하며”, “확실하여 우둔한 자를 지혜롭게 하는”
하나님의 말씀의 빛으로 진정한 자신을 보게 된 시인(詩人)은 괴로움 중에 부르짖으며 마지막으로 탄원한다.
(시편 19:12-14절)
시계는 스스로 정확한 시간을 알 수 없고 지킬 수 도 없다.
천문대(天文臺)가 천체(天體)에서 따오는 별 시간(Star Time)만이 시계의 정확한 시간이다.
시계(時計)도 별로부터 계시를 받아야 시계구실을 하듯,
죄 때문에 빗나간 인간의 이성(理性)도 말씀의 특별계시가 있어야 이성 구실을 할 수가 있는 것이다.
“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한 것은 마음이라 누가 능히 이를 알리 요마는” (예레미아 17장9절).
빗나가 잘못 가고 있는 자신의 실상과 허물(쉐기옷)을 깨닫고 돌이킬 수 있는 사람은 얼마나 다행한가!
잘못된 줄 알면서도 하나님의 말씀과 권위를 끝내 거역하여 (민수기 15장 30-31절 참조)
뻔뻔스러운 인간이 되게 하는 고범죄(제딤)는 속죄의 여지도 없이(히브리서 10장26-27절 참조)
사람을 죄의 영원한 노예(奴隸)로 만드는 까닭에 이 큰 죄(罪)과(페쉐아)에서 한사코 벗어나야 한다.
첫 부분에서 “엘(EL)로 한번 불리우신 영광과 능력의 창조주 하나님은
뒷부분에서 말씀의 언약에 성실하신 ”여호와“로 일곱 번씩이나 불리워지고,
마침내 죄에 빠진 인간을 속량(贖良)하시는 ”구속자(救贖者)이신 여호와“가 되신다.
그리고 끝내 영원한 우주 공간(空間)을 뒤에 두시고,
“말씀이 육신(肉身)이 되어” 인간의 시간 속에 들어오셔서
“우리 가운데 거하” (요한복음 1장14절)심으로써, 하나님의 특별계시는 시간예술(時間藝術)의 극치에 이른다.
성육신(成肉身) 하신 하나님 예수그리스도는 우주 공간예술(空間藝術),
시간예술(時間藝術)이 서로 만나 절정을 이룬 최대, 최고 그리고 최선의 특별계시(特別啓示)인 것이다.

▣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아담의 죄는 사람 속에 있는 하나님의 형상을 훼손 했으며( 참조: 롬 5:12; 복음교역자 80p)
인간의 타락한 이래 아담의 모든 후손은 하나님의 형상과 영광에 계속 미치지 못하고 그것이 결핍되었다.
경험과 역사의 모든 증거가 부패한 본성을 지닌 타락한 사람은 하나님의 율법의 요구를 이루고 그 자신의 의를 확립하기에 전적으로 무능함을 입증한다는 중요한 사실을 유대인과 이방인 모두 인정하라고 바울은 촉구한다.
의(義)를 얻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통해서이다.
이 믿음의 경험을 통해 사람은 다시 한 번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로 들어가게 되고(롬 3:24) 그들 속에 새 마음이 창조되며, 그렇게 하여 다시 한 번 하나님의 율법에 순종하는 삶을 살 수 있게 된다. (롬 5:1 참조) <본교성경주석 (한)11권 599p>

▣ <의인(義人)은 없나니>
시편 141:1이나 시편 53:1에서 인용된 바울은 “선(善)을 행하다”라는 말을 사용하는 대신 “의(義)로운”이란 용어를 사용하여 같은 의미를 주지만,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義)에 관한 그의 전체 논증에 더욱 용이하게 들어맞는 형태가 되도록 하고 있다.
죄로 흐려지면 깨닫는 자도 없는 지력(智力)의 흐려짐과 왜곡됨으로 시편53편1절에서 “어리석은 자는 그 마음에 이르기를 하나님이 없다 하도다.”는 선언으로 시작을 한다.
성경과 역사가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의롭게 산 고상한 많은 남녀의 삶을 기록하고 있다는데 대해서는 이의를 제기할 수 있을지 모른다. 그러나 로마서 3장12절에 선을 행하는 자는 하나도 없다라는 진술을 한 후에 시편기자 자신은 “의인의 세대”(시편 14:5)를 언급한다. 바울의 제자요 동역 자였던 누가(참조 사도행전 16장10)는 스가랴와 엘리사벳. “이 두 사람이 하나님 앞에 의인” (눅 1:6)이었다고 주저함 없이 말한다. 그러나 “의인의 세대”는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롬 3:23)다는 것, 그리고 인간의 보편적인 죄 됨에 대한 기술에 그들도 예외가 되지 않았다는 사실로 신속하게 바울과 의견을 같이 할 것이다. 그들은 자신들이 한 때 죄의 권세아래 있었다는 것과 그들이 현재누리고 있는 의(義)는 믿음을 통하여 하나님께로부터 왔음을 제일 먼저 인정하는 사람이 될 것이다.

◉ 우리의 절망적인 처지를 잘 알려면 하나님의 거룩함과 의로움에 우리의 삶을 비교해야 한다.
우리가 심각한 죄인임을 인정하는 것은 구원(救援)의 길에 들어서는 첫 단계이다.

화요일
7월 13일
<1세기에서 21세기까지>

▣ 하나님을 모르거나 하나님을 떠난 인간은 하나님을 신령(神靈)으로(요한복음 4:23-24) 예배하는데 만족을 느끼지 못했다. 그들은 천연계에 나타난 하나님의 자기계시에 만족하지 않았다.(로마서 1:20). 그들은 사람, 새, 짐승, 또는 파충류(爬蟲類)를 닮은 형상으로 하나님을 나타내기로 선택하였다.
여기서 바울은 이방인들의 도덕적 및 지적 타락의 연속적인 단계를 구분하고 있는 것으로 보이는데, 결국에는 부정한 파충류와 당에 기어 다니는 다른 피조물로써 하늘의 살아계신 하나님을 나타내는 데까지 이른다.
헬라와 로마종교에서 인간의 형상을 입은 신들이 흔했다.
애굽에는 소, 악어, 뱀, 그리고 따오기 등과 같은 온갖 종류의 피조물 숭배가 편만했다.
애굽의 우상숭배를 본받아 이스라엘 백성들은 금송아지를 만들었다. (출애굽기 32:4).
후일에 ‘여로보암’은 단과 벧엘에 두 금송아지를 세우고 그것들에 희생을 드렸다. (왕상 12:28-32절)

좀 더 개화된 어떤 이교도(異敎徒)들은 형상을 단순한 상징적 조형물로 여겼을 수도 있지만, 평민(平民)중 다수는 이 우상들을 신(神)자체로 보았다. 성경은 이런 차이에 상관없이 우상을 숭배하는 모든 사람을 우상숭배자로 정죄한다. (출 20:4-5; 레위기 26:1; 미가 5:13; 하바국 2:18-19절).

어리석은 사람들은 하나님에 대한 경배를 우상숭배와 맞바꾸었다.
위엄과 권능으로 옷 입은 분을 우러러 경외하는 대신, 그들은 짐승과 파충류에게 엎드려 절했다.
그들은 영광스러운 경배의 대상을 퇴락시키고 굴욕을 가져다주는 것과 바꾸어 버렸다. (참조: 시편 106:20; 예레미아 2:11). 사람은 동물계의 군주로 임명되었지만(시편 8:6-8), 하나님께서 그들을 섬기도록 만드신 피조물을 섬김으로써 자신을 격하시키신다. (참조: 호세아 8:6) <본교성경주석(한)11권 568-569p>

◉ 20세기가 시작될 무렵 사람들은 인간성이 개선되고, 도덕성은 증가하며, 과학과 기술의 발달은 인간을 “유토피아(Utopia)”(이상적인 사회를 의미하는 말).로 이끌 것이라는 믿음을 가지고 있었다. 인류가 점점 완전해지고 있다는 신념을 바탕으로 바른 교육과 도덕적 훈련을 통하여 인간은 자신과 사회를 개선시킬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이 모든 것들이 우리가 20세기로 진입할 때, 일제히 시작될 것처럼 생각했다.
그러나 불행히도 모든 것들이 그렇게 바뀌지 않았다. 오히려 20세기는 역사상 가장 폭력적이고 파괴적인 세기 중 하나로 기록되었다. 과학의 진보는 크게 감사히 여겨야할 부분이지만, 역설적으로 그것은 과거 극단적인 광인이나 꿈꿨을 법했던 대량 살상이 가능하도록 만들었다. 도대체 무엇이 문제였는가? <교과 42p>

◉ 20세기 초에는 인간 사회에 대한 낙관적인 전망이 우세했다.
그러나 하나님을 부인하는 인간 사회는 오히려 정신적으로 퇴보하고 말았다.

수요일
7월 14일
<유대인들과 이방인(異邦人)들이 다같이>

▣ 우리는 쉽게 다른 사람의 죄를 분별하고 지적한다.
우리도 동일한 죄, 심지어 더 한 죄를 지으면서 그렇게 할 때가 많다.
문제는 우리가 자신에 대해서는 눈을 감고, 다른 사람과 자신을 비교하면서 스스로 만족해 한다는 것이다.
즉 남이하면 “불륜(不倫)”이고 내가하면 “로맨스”로 생각하는 것처럼 말이다.
사도 바울은 선택받았다고 자부하는 유대인들이 이방인들을 쉽게 정죄를 하고 멸시를 하지만,
선택받았다고 자부하는 유대인들 역시 죄인이며 경우에 따라선 이방인들보다 더 큰 죄인일 수 있다.
그 이유는 더 많은 빛을 받은 자들이 이방인들보다 낫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인간은 유대인이든 이방인이든 아무도 의(義)롭지 않으며 하나님의 표준에 도달하지 못한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믿고 구원(救援)의 특별함을 생각하고 타인(他人)을 경멸하거나 정죄하지 않는 것이 옳다.
즉 구원(救援)이 특별한 것이지 구원받은 사람이 특별한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 우리말 속담(俗談)에 “분(糞)”묻은 강아지 “쌀겨” 묻은 강아지를 흉본다는 말이 있으며, 성경에도 다음과 같이
(마 7:3) 어찌하여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고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
(마 7:4) 보라 네 눈 속에 들보가 있는데,
어찌하여 형제에게 말하기를 나로 네 눈 속에 있는 티를 빼게 하라 하겠느냐
(마 7:5) 외식하는 자여 먼저 네 눈 속에서 들보를 빼어라 그 후에야 밝히 보고 형제의 눈 속에서 티를 빼리라
(눅 6:41) 어찌하여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고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
(눅 6:42) 너는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를 보지 못하면서 어찌하여 형제에게 말하기를 형제여 나로 네 눈 속에 있는 티를 빼게 하라 할 수 있느냐 외식하는 자여 먼저 네 눈 속에서 들보를 빼어라 그 후에야 네가 밝히 보고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를 빼리라

◉ “자신을 다른 사람보다 낫게 생각하거나 자신을 그들의 심판관의 자리에 두지 말라. 그대는 동기를 식별할 수 없으므로 남을 능히 판단할 수 없다. 남을 비판함으로 그대는 자신에게 유죄 선고를 내리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대는 그대가 형제를 참소하는 자인 사단과 한통속임을 보여주기 때문이다.”(시대의 소망, 314)

◉ 우리가 하나님을 믿게 될 때, 구원의 특별함을 생각한 나머지 다른 사람을 경멸하거나 정죄하는 것은 옳지 않다. 구원이 특별한 것이지 구원받는 사람이 특별한 것은 아니다.

목요일
7월 15일
<회개(悔改)>

▣ <참된 회개(悔改)>
“내가 주께만 범죄(犯罪)하여 주의 목전(目前)에 악(惡)을 행하였사오니 주께서 말씀하실 때에 의(義)로우시다 하고 주께서 심판(審判)하실 때에 순전(純全)하시다 하리이다”(시편 51:4)

기독교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은 회개(悔改)이다.
그리고 실제로 참된 기독교는 회개(悔改)의 기독교 밖에 없다.
즉, 참된 기독교에는 회개의 특징이 나타난다.
회개(悔改)는 하나님의 법을 어기고 범죄한 부분에 대해 회개를 통해 깨끗하게 된다.
“주께서 말씀하실 때에 의(義)로우시다 하고 주께서 심판하실 때에 순전하시다 하리이다” (시 51:4).
당신은 하나님 앞에서 이러한 고백을 한 적이 있습니까?
“나의 하나님, 주의 거룩한 법을 어긴 제가 이러한 심판을 받는 것은 합당합니다.”
“제가 주께만 범죄하여 주의 목전에 악을 행하였습니다. (시 51:4).
회개의 본질은 자신을 변명하려는 욕구를 파괴시킨다.
만일 변명하길 원하는 욕구가 남아 있다면 아직 참된 회개가 될 수 없다.
회개는 우리가 하나님의 법을 어겼으니 법대로 벌을 받는 것이 합당하다는 것을 인정하고 벌을 받을 자세가 되는 것이다. 이러한 회개의 자세는 하나님의 법이 옳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 된다. 이것이 바로 회개(悔改)다.

안타까운 것은 회개에 대해 바르게 아는 사람들이 많지 않다는 사실이다.
현시대는 하나님은 사랑이 많으시고 온유하시고 자비하시기 때문에 우리가 해야 할 모든 것은 단지 잘못 행한 것에 미안한 마음을 가지고 더 노력하는 것을 회개로 잘못 알고 있다.
이것은 회개가 아니다.
회개는 나를 용서하신 하나님이 옳다는 것을 증명하는 선상에서 다시 재창조되어지는 것이 회개다.

이러한 사고가 당신의 마음에 임할 때 당신은 죄의 책망(conviction)이 무엇인지 이해하게 될 것이다.
회개하는 사람은 자신이 하나님의 법을 어긴 사실에 대해 치욕을 체험하면서 당장 그 순간부터 거룩한 삶을 살 수 있도록 하는 새 생명을 선물로 받고자 한다.
정확하게 말하면, 회개는 하나님의 선물이다. 사람은 스스로 회개할 수 없다.
회개는 사람의 마음에서 나올 수 있는 것이 아니다.
회개는 사람의 마음 밖에 있는 또 다른 근원에서 나오는 것인데 바로 구속(救贖)의 반석이다.
더욱 주의 뜻대로 살고자 하는 마음이 넘치십니까?
그렇다면 주께로 돌아가 더욱 주님과 깊은 관계를 누리십시오.
회개의 합당한 열매를 맺으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원합니다.

1. 우리가 어떻게 함으로써 죄 없이 함을 받을 수 있습니까?(행 3:19)
그러므로 너희가 회개하고 돌이켜 너희 죄 없이 함을 받으라. 이같이 하면 유쾌하게 되는 날이 주 앞으로부터 이를 것이요 ( 행 3:19)

☞ 회개는 인간의 지성(知性 - the mind), 감정(感情 - the emotions), 의지(意志 - the will) 모두와 관련되어 있습니다. 지성과 관련해서는“마음을 바꾸는 것”을 의미하고, 감정과 관련해서는“죄를 슬퍼하는 것”을 의미하고, 의지와 관련해서는“돌아서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회개는 후회와 다른 것입니다. 후회는 대개 정서적 반응에 불과하지만 회개는 과거의 죄 된 생활을 슬퍼하고, 그 생활에서 마음을 돌이키고, 마침내 새로운 삶을 사는 데까지 이르는 것입니다. 이것이 참된 회개입니다. 에서의 경우와 유다의 경우가 후회로 그친 대표적 예입니다.

2. 성경은 회개(悔改)가 어떻게 일어난다고 말합니까?(행 11:18)
저희가 이 말을 듣고 잠잠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 가로되 그러면 하나님께서 이방인에게도 생명 얻는 회개를 주셨도다. 하니라 (행 11:18)

3.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회개 시키기 위하여 어떤 일을 하십니까?(고후 7:10)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은 후회할 것이 없는 구원에 이르게 하는 회개를 이루는 것이요 세상 근심은 사망을 이루는 것이니라. (고후 7:10)
☞ “참된 죄의식은 우리의 삶에 내재하는 죄와 하나님과의 관계 단절을 경고하는 마음의 비상벨이다.”(C. S. 루이스) 죄책감을 가지고 있다고 하는 것은 위험하긴 하나 아직 절망은 아닙니다. 아직 회복할 기회가 있기 때문입니다.

4. 성경은 죄책감을 느끼지 못하는 사람에 대하여 무엇이라고 말합니까?(엡 4:18, 19)
“저희 총명이 어두워지고 저희 가운데 있는 무지함과 저희 마음이 굳어짐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생명에서 떠나 있도다. 저희가 감각 없는 자 되어 자신을 방탕에 방임하여 모든 더러운 것을 욕심으로 행하되”

☞ 디모데 후서 4:2에도 “자기 양심이 화인 맞아서 외식”하는 자들에 관하여 이야기 합니다. 이와 반면에 지나치게 신경과민한 사람도 있습니다. 이런 사람들은 거짓되고 불필요한 죄책감으로 고통하고 있습니다. 이런 사람은 밑 빠진 물동이 같아서 하나님의 은혜를 쏟아 부어도 만족함이 없습니다.

5. 다음은 죄책감을 잘못다룬 경우들입니다. 성경 절을 읽고 어떤 경우들인지를 말씀해 보십시오.

⑴ 벨릭스 형(形)(행 24:24,25) 수일 후에 벨릭스가 그 아내 유대 여자 드루실라와 함께 와서 바울을 불러 그리스도 예수 믿는 도(道)를 듣거늘 바울이 의(義)와 절제와 장차 오는 심판을 강론하니 벨릭스가 두려워하여 대답하되 시방은 가라 내가 틈이 있으면 너를 부르리라 하고 (행 24:24, 25)

⑵ 아담 형(形)(창 3:12) 아담이 가로되 하나님이 주셔서 나와 함께 하게 하신 여자 그가 그 나무 실과를 내게 주므로 내가 먹었나이다. (창 3:12)

⑶ 유다 형(形)(마 27:3-5) 때에 예수를 판 유다가 그의 정죄됨을 보고 스스로 뉘우쳐 그 은 삼십을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에게 도로 갖다 주며,

6. 베드로는 죄책감이 그를 억누를 때 어떻게 했습니까?(눅 22:60-62)
베드로가 가로되 이 사람아 나는 너 하는 말을 알지 못하노라고 방금 말할 때에 닭이 곧 울더라. 주께서 돌이켜 베드로를 보시니 베드로가 주의 말씀 곧 오늘 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 하심이 생각나서 밖에 나가서 심히 통곡 하니라 (눅 22:60-62)

7. 예수님은 베드로를 위하여 어떻게 기도하셨습니까?
“시몬아 시몬아 보라 사단이 밀 까부르듯 하려고 너희를 청구하였으나 그러나 내가 너를 위하여 네 믿음이 떨어지지 않기를 기도하였노니 너는 돌이킨 후에 네 형제를 굳게 하라”(눅22:31,32)

8. 참된 회개(悔改)를 위하여 무엇을 해야 합니까?

⑴ 요 16:9 죄에 대하여라. 함은 저희가 나를 믿지 아니함이요

⑵ 시 32:5,6 내가 이르기를 내 허물을 여호와께 자복하리라 하고 주께 내 죄를 아뢰고 내 죄악을 숨기지 아니하였더니 곧 주께서 내 죄의 악을 사(赦)하셨나이다 (셀라) 이로 인하여 무릇 경건한 자는 주를 만날 기회를 타서 주께 기도 할지라 진실로 홍수가 범람할지라도 저에게 미치지 못 하리이다.

⑶ 행 26:20 먼저 다메섹 에와 또 예루살렘에 있는 사람과 유대 온 땅과 이방인에게까지 회개하고 하나님께로 돌아가서 회개에 합당한 일을 행하라 선전하므로

☞ 토마스 풀러(Thomas Fuller)는 “사람이 지니고 있는 약함이 바로 하나님께서 원조의 은혜를 접붙이시는 유일한 나무줄기이다”라고 하였습니다. 회개는 굴욕을 내포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하나님의 보시기에 가장 가치(價値)있는 것입니다.

9. 우리가 용서받을 수 있는 것은 하나님 앞에 누가 계시기 때문입니까?(요일 2:1,2)
나의 자녀들아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씀은 너희로 죄를 범치 않게 하려 함이라 만일 누가 죄를 범하면 아버지 앞에서 우리에게 대언 자가 있으니 곧 의로우신 예수 그리스도시라 저는 우리 죄를 위한 화목제물이니 우리만 위할 뿐 아니요 온 세상의 죄를 위하심이라 (요일 2:1, 2)

10. 예수님의 희생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죄악을 어떻게 하셨습니까?(롬 3:25, 26)
이 예수를 하나님이 그의 피로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는 화목제물로 세우셨으니 이는 하나님께서 길이 참으시는 중에 전에 지은 죄를 간과하심으로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려 하심이니 곧 이 때에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 내사 자기도 의로우시며 또한 예수 믿는 자를 의롭다 하려 하심이니라 (롬 3:25, 26)

11. 우리는 죄의 용서에 관한 어떤 보증을 가지고 있습니까?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저는 미쁘시고 의(義)로우서 우리 죄를 사하시며 모든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케 하실 것이요”(요일 1:9)
“주와 같은 신이 어디 있으리이까 주께서는 죄악을 사유하시며 그 기업의 남은 자의 허물을 넘기시며 인애를 기뻐하심으로 노를 항상 품지 아니하시나이다. 다시 우리를 긍휼히 여기셔서 우리의 죄악을 발로 밟으시고 우리의 모든 죄를 죄에 대하여라. 함은 저희가 나를 믿지 아니함이요 깊은 바다에 던지시리. 이다.”(미 7:18, 19)
“하나님은 우리의 죄를 바다 깊은 곳에 던지시고, 해변(海邊)가에‘낚시 금지’라는 팻말을 꽂아 놓으셨다.” (코리 텐 붐) <권오갑 장로님 글 인용>

▣ (이사야 1:18)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오라 우리가 서로 변론하자 너희 죄가 주홍 같을지라도 눈과 같이 희어질 것이요 진홍같이 붉을지라도 양털같이 되리라.

<설명> 이 말씀은 회개와 용서에 대한 약속입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우리의 허물을 솔직하게 다 아뢰면 하나님은 다 용서하시고 눈과 같이 깨끗하고 갓 세탁한 양털처럼 희게 해 주실 것이라고 약속하신 말씀입니다. 우리가 우리의 허물을 솔직하게 고백하는 일이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용서의 기쁨을 맛보려면 그렇게 해야 합니다. 이것을 성경은 회개(悔改)라고 합니다. 하나님은 이렇게 회개(悔改)한 죄인의 죄를 다시 기억하지 않으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회개(悔改)하고 다시는 죄를 짓지 않도록 해야 하며, 마음에는 원이지만 육신이 약해서 자주 죄를 범하게 되는데 죄를 짓지 않고 살 수 있도록 성령의 능력으로 지켜주시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진정으로 그렇게 원하면 하나님은 이 약속을 지키십니다. 그러나 많은 경우 우리는 죄의 결과를 무서워하면서도 죄를 즐기고 있습니다. 그래서 진정한 회개(悔改)가 더욱 어려운 것입니다. 그러나 참으로 정직하게 회개(悔改)하는 모든 죄는 완전히 용서하시고 다시 기억하지 않으십니다. 그래서 우리는 예수님의 십자가의 용서하신 사랑을 직접 맛보게 됩니다. 다음 말씀 보십시다. (시편 37:3-5)입니다.

▣ (에스겔 18:24) 만일 의인이 돌이켜 그 의에서 떠나서 범죄하고 악인의 행하는 모든 가증한 일대로 행하면 살겠느냐 그 행한 의로운 일은 하나도 기억함이 되지 아니하리니 그가 그 범한 허물과 그 지은 죄로 인하여 죽으리라.

<설명> 이 말씀은 회개(悔改)하고 돌이키면 삶을 얻는다는 약속의 말씀입니다. 우리는 심판대 앞에 서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심판장이신 하나님은 우리가 살게 되기를 원하시는 분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회개(悔改)하면 우리의 모든 죄가 용서받는 것은 보증된 일입니다. 그러므로 예수 안에서 회개(悔改)의 삶을 사는 한 우리는 심판을 인하여 기뻐해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죄를 범하고 회개(悔改)하기를 원하지 않으면 이 심판은 우리의 영원한 운명을 멸망이라고 선언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참으로 회개(悔改)하는 삶을 살아야 할 것입니다. (마태복음10:32)를 봅시다.

◉ 하나님은 성령을 통하여 우리가 회개하도록 이끄시되 절대로 강요하지 않으시며, 진정으로 회개하는 사람은 죄를 극복하며 선행에 참여하기를 바라게 된다.

◉ “많은 사람들은 저희 심령의 상태에 관하여 속고 있다. 그들은 육신에 속한 마음이 만물보다도 거짓되며 몹시 악하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하고 있다. 그들은 저희 자신의 의로 스스로 감싸고 있으며 그들 자신의 인간적인 품성의 표준에 도달하는 것으로 만족하고 있다. 그러나 그들이 거룩한 표준에 이르지 못하고 그들 자신의 힘으로 하나님의 요구들을 감당하지 못하게 될 때에 그들의 절망이 얼마나 처절할 것인가!”(가려 뽑은 기별 1권, 320)

◉ “세상 형편에 대한 비참한 광경이 내 앞에 제시되었다. 부도덕이 어디나 만연하고 있다. 방탕은 이 시대의 특별한 죄악이다. 악이 그 흉악한 머리를 오늘날처럼 대담하게 쳐든 때가 일찍이 없었다. 사람들은 마비된 듯이 보이며, 덕성과 참된 선을 사랑하는 자들은 죄악의 대담성, 힘, 편만함으로 거의 낙망하고 있다. 편만한 악은 불신자들이나 신앙을 비웃는 자들에게만 국한되어 있지 않다. 그랬으면 좋겠는데 사실은 그렇지 않다. 그리스도께 대한 신앙을 고백하는 많은 사람들이 죄를 범한다. 그리스도의 나타나심을 고대한다고 공언하는 이들조차 그 사건을 위하여 사단 자신보다도 준비가 덜 되어 있다. 그들은 모든 부패로부터 자신을 깨끗하게 씻어내지 않았다. 너무 오랫동안 정욕을 섬겨 왔으므로, 그들의 생각이 부정하고 그들의 상상이 부패한 것이 당연하다.”(교회증언 2권, 346)


<결어(結語)>
▣ 로마서의 주제는 인류의 보편적 죄악성과 죄인이 용서받을 뿐만 아니라 완전하고 거룩하게 회복될 수 있는 길을 마련하시는 하나님의 보편적 은혜(恩惠)이다.
그 “길”(Way. 道)은 인류의 화목(和睦)과 화목을 위해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고 영원히 사는 하나님의 아들 예수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이다.
사도 바울이 로마서를 기록할 때 그의 마음은 유대화 주의자들(Judaizers)과의 논쟁에서 야기된 여러 문제들로 가득차 있었다. 그는 그 문제들 중에서 기본적인 것들을 다루면서 죄의 전반적인 문제와 그에 대한 하나님의 계획을 광범위한 예증(例證)들로서 대답하고 있다.
먼저 바울은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이상에 이르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롬 3:23)
이에 대해 어떤 핑계도 댈 수 없는 것은 유대인이나 이방인을 막론하고 하나님의 뜻에 대한 얼마간의 계시를 받았기 때문이다. (롬 1:20). 그러므로 모든 사람이 다 정죄(定罪)아래 있는 것은 정당하다.
게다가 죄인인 인간은 이러한 곳에서 자신을 건져낼 능력이 전혀 없다.
왜냐하면 인간은 타락(墮落)한 상태에서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기가 전적으로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롬 8:7)
하나님의 율법에 순종하려는 율법주의적인 시도는 실패(失敗)할 수밖에 없을 뿐 아니라, 인간의 연약성과 인간에게 구주(救主)가 필요하다는 것을 인정하기를 거절하는 오만(傲慢)함과 자기의 의(義)를 증명(證明)한다.
하나님만이 구제책(救濟策)을 강구(講究)할 수 있다. 하나님은 아들의 희생을 통하여 그것을 마련 하셨다.
타락한 인간에게 요구되는 것은 믿음, 곧 그의 죄 된 과거를 해결해주기 위해 이미 마련된 것을 받아들이는 믿음과 그가 의(義)롭게 살 수 있도록 인도하기위해 주시는 능력을 받아들이는 믿음을 행사하는 것뿐이다.

<초점(焦點)>

유대인이든, 그리스도인이든 이방인이든 모든 인간은 죄인이다.
이러한 사실을 깊이 깨달은 바울사도는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고 복음을 증거하고 있으며, 또한
선택 받은 백성이나 이방인이나 “구원(救援)이 특별한 것이지, 구원받는 사람이 특별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생각하여 이에 모든 인간은 회개하여 변화 받아 기쁨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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