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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과 - 유대인과 이방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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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등불과기름 작성일10-07-07 09:43 조회4,706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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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7월 10일(안식일) 일몰 : 오후 7시 55분

제2과 <유대인과 이방인(異邦人)>

<記憶節>
“율법은 모세로 말미암아 주신 것이요 은혜와 진리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온 것이라”(요 1:17).

▣ 사도 바울이 기록한 로마서의 주된 목적은 유대인들과 이방인들이 잘못된 교리와 신앙에서 왜곡된 종교적 의무(義務)들을 바로 알도록 하기위하여 진정한 복음(福音)은 율법준수로(행위로)구원받는 것이 아니라,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구원(救援)받는다는 것을 기록하고 있지만, 그렇다고 율법을 무시하는 것이 아니라 율법의 사상(思想)은 존중되어야 한다는 것도 분명하게 기록하고 있다.

<要點>
초대 교회처럼 오늘날의 교회도 그리스도의 대속적 희생과 우리 안에 거하시겠다는 그분의 약속을 전적으로 의지하는 대신 우리의 행위에 초점을 맞추는 경향이 있다.

일요일(7월 4일)
<더 좋은 약속(約束)>

▣ 구약시대(舊約時代)의 땅이나 자식(子息)과 같은 세상적(世上的) 약속에 비해, 신약시대(新約時代)의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보다 신령한 축복의 영적약속(靈的約束)을 더 좋은 약속으로 의미한다.
여기에 언약의 중보자로 계약의 실행을 보증(保證)하는 자로의 의미를 갖고 있는바 이는 그리스도는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서 보증인의 역할을 수행하고 계신다. 따라서 그리스도께서 중보자 되시는 새 언약의 이행은 신뢰할만하며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하나님과 진정한 화목을 누릴 수 있게 되었다.
즉 예수께서 더 아름다운 직분을 얻으셨다는 기별이며 그것은 곧 더 좋은 언약의 중보자라는 것이다.
더 좋은 언약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의(義)에 이른다는 것이다.

◉ 신약 교회는 구약 교회보다 더 좋은 약속을 가지고 출발하였다.
하지만 구약(舊約)이나 신약(新約)이나 하나님의 도덕적 요구에는 변함이 없다.
그러므로 성경의 도덕법들은 아직도 유효하며 하나님의 백성들은 마땅히 지키게 된다.
거듭난 사람들은 그 생명의 성질이 하나님의 계명이 되기 때문이다.

◉ <표상의 실체이신 그리스도>
“우리 구세주께서는 당신의 생애와 사망을 통하여 당신 자신을 가리킨 모든 예언들을 성취하셨으며 모든 예표와 표상된 그림자들의 실체이셨다.”(가려 뽑은 기별 1권, 231)

월요일(7월 5일)
<유대인의 법과 규례>

▣ 율법(律法)은 은혜(恩惠)가 아닙니다.
이스라엘 후손들은 지금 전 세계에 흩어져 살고 있지만 그들이 가지고 있는 모세의 율법으로 하나가 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그 율법이 날마다 생활의 흐름을 조정하고 규율을 만드는데 기준이 된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가르침은 성경 어디에서도 찾을 수가 없습니다.

(첫째)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율법은 오직 이스라엘 자손들에게만 주어졌다는 사실입니다.(롬 2:14)
"이방인"이란 말은 유대인 밖에 다른 인종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성경은 이스라엘 이외의 전 세계를 상대로 이방인이라고 부릅니다.
사실 이방인은 유대인과 관련이 없으며 구약에 나와 있는 하나님의 계시에서 제외되었기 때문에 하나님의 법과 의(義)에 대해서는 상관이 없었습니다.(엡 2:11-12)
모세의 율법은 이스라엘의 자손에게만 특별히 부여되었던 것입니다.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서 우리가 그에게 기도할 때마다 우리에게 가까이 하심과 같이 그 신의 가까이 함을 얻은 나라가 어디 있느냐 오늘 내가 너희에게 선포하는 이 율법과 같이 그 규례와 법도가 공의로운 큰 나라가 어디 있느냐"(신 4:7- 8)
빌라도는 유대인의 법과 로마사람의 법이 다른 점을 부각시켰습니다.
그리스도에 대해서 이야기할 때 "빌라도가 가로되 너희가 저를 데려다가 너희 법대로 재판하라"(요한 18:31)고 했습니다. 이 말은 곧 모세의 율법은 유대인의 것이지 로마인의 것이 아니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과 빌라도는 이방인들이 모세의 율법에 영향을 받지 않는다는 사실에 동의했습니다.
모세의 율법은 주 하나님과 이스라엘과의 언약입니다.
"모세가 온 이스라엘을 불러 그들에게 이르되 이스라엘아 오늘 내가 너희 귀에 말하는 규례와 법도를 듣고 그것을 배우며 지켜 행하라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서 호렙산에서 우리와 언약을 세우셨나니 이 언약은 여호와께서 우리 열조와 세우신 것이 아니요 오늘날 여기 살아있는 우리 곧 우리와 세우신 것이라"(신 5:1-3)

언약은 언약을 맺어야 할 대상이 있어야 합니다.
이 언약은 하나님이 이스라엘과 맺은 언약이었습니다.
이 언약에 이방인은 포함되어 있지 않았습니다.
성경은 율법과 은혜에 대해서 아주 명백히 다른 점을 밝히고 있습니다.
율법의 언약과 은혜의 언약은 체결자가 각각 다르게 나옵니다.
"율법은 모세로 말미암아 주신 것이요 은혜와 진리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온 것이라"(요한 1:17)
모세의 율법은 선악의 기준을 선포하는 것이며 이스라엘의 사회적 규율을 다루고 있습니다.
출애굽기 20장 1에서 17절까지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지켜야 할 십계명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거룩하신 모습과 절대적인 규율에 대해서 광범위하게 표현한 것입니다.

백성을 위한 율법은 출애굽기 21장 1절 ~ 23장 33절까지 나타나 있는데 이는 이스라엘의 신앙적인 삶에 대해서 규율과 처벌에 대해서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이 택하신 나라로 다른 모든 나라와 구분되었습니다.
제사(祭祀)에 관한 율법은 출애굽기 25장 1절 ~ 31장 18절까지 나와 있습니다.
이 율법은 하나님께 드리는 희생 제사에 관련된 모든 제도를 규정하는 법입니다.
그러나 이 희생 제사는 그리스도를 상징하는 하나의 모형이었고 한시적인 것이었습니다.
이것은 앞으로 오실 주님의 예고였던 것입니다.

모세가 시내산에서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율법 말고도 구약과 신약에 걸쳐 하나님께서 명령하신 말씀을 가리켜 그림자의 율법이라고 부릅니다.
예를 들어 창세기 2장 17절에 선과 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를 먹지 말라고 하셨는데 그 말씀은 곧 법입니다. 성경 어디서나 나타나 있는 법은 모두 그림자인 율법입니다.

다시 언급하지만 율법의 대상은 이스라엘 자손들이었습니다.
하나님은 그들을 애굽에서 구원(救援)해내셨습니다.
하나님은 그들을 애굽의 종에서 해방하시고 하나님의 약속의 땅인 가나안으로 인도하셨습니다.
곧 400년 전에 아브라함과 맺은 언약을 지키시기 위해 큰 능력으로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건지셨습니다.
그것은 언약이었습니다.
하나님은 백성들이 시내산에 도달했을 때 모세를 통하여 하나님이 무엇을 하셨는지 알도록 하셨습니다.
이스라엘을 향한 구체적인 율법은 그곳 시내산에서 이루어졌습니다.

하나님은 먼저 이스라엘 백성들에 하나님의 정의와 율법을 드러내셨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본래의 의도는 율법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으로 말미암아 은혜가 은혜(恩惠)되기 위한 수단이었던 것입니다.

▣ 왜 율법인가?
율법과 은혜에 대한 정확한 구분이 없다면 백성들은 하나님을 크게 오해(誤解)할 것입니다.
율법은 결코 백성들을 구원(救援)하기 위해서 주어진 사실이 없습니다.
그 어느 누구도 율법을 통해서 구원을 얻었다는 사실은 성경 어디에도 없습니다.
이 율법의 비밀은 신약(新約)에 분명하게 나와 있습니다.
율법은 구원을 위한 것이 아니라고 분명히 밝히고 있습니다.
"우리가 알거니와 무릇 율법이 말하는 바는 율법 아래 있는 자들에게 말하는 것이니 이는 모든 입을 막고 온 세상으로 하나님의 심판 아래 있게 하려 함이니라 그러므로 율법의 행위로 그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나니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니라"(롬 3:19-20)

"내가 하나님의 은혜를 폐하지 아니하노니 만일 의롭게 되는 것이 율법으로 말미암으면 그리스도께서 헛되이 죽으셨느니라."(갈 2:21)

① 율법(律法)은 죄가 무엇이며 그 결과가 무엇인지 분명하게 밝혀주고 있습니다.
즉, 죄(罪)를 설명하고 그에 대한 사실을 증명하기 위하여 주어진 것입니다.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 하리요 율법이 죄냐 그럴 수 없느니라. 율법으로 말미암지 않고는 내가 죄를 알지 못하였으니 곧 율법이 탐내지 말라 하지 아니하였다면 내가 탐심을 알지 못하였으리라"(롬 7:7)

"그러나 죄가 기회를 타서 계명(誡命)으로 말미암아 내 속에서 각양 탐심(貪心)을 이루었나니 이는 법이 없으면 죄가 죽은 것임이니라"(롬 7:8)
사도 바울은 율법으로 말미암아 죄가 무엇인지 확실하게 알게 되었다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율법이 있기 전에도 죄는 있었지만 그것이 죄인지 아닌지 잘 몰랐지만 율법으로 말미암아 분명히 알게 되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율법의 역할은 그 법(法)으로 말미암아 구원(救援)을 받는 것이 아니라 율법을 통해 인간의 죄악을 알려주고 그 죄가 하나님의 법과 상반된다는 것을 알려주는 것입니다.

② 율법은 모두가 죄인(罪人)이란 사실을 다시 명백하게 하였습니다.
인간 스스로 지은 죄에 대해 반박할 것이 있겠습니까?
"우리가 알거니와 무릇 율법이 말하는 바는 율법 아래 있는 자들에게 말하는 것이니 이는 모든 입을 막고 온 세상으로 하나님의 심판 아래 있게 하려 함이니라"(롬 3:19)

③ 율법은 예수 그리스도께로 인도(引導)하는 역할을 합니다.
율법의 목적은 사람들로 하여금 구원자(救援者) 즉 예수 그리스도의 필요성을 느끼게 하기 위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선포된 율법은 영원하지만 그 유효기간은 한시적인 것입니다.
즉, 율법은 은혜의 예수님이 오시면 더 이상 효력을 발생하지 못합니다.
그러나 너무나 많은 거짓된 목사와 거짓된 인도자들이 율법의 근본적인 뜻을 변형시켰습니다.
사탄은 우리로 하여금 율법을 지키면 하나님께서 기뻐하시고 천국에 갈 수 있다고 미혹하고 있습니다.
율법을 통해 천국에 갈 수 있다면 그리스도께서 세상에 오신 것이 헛된 것이며 무의미한 것이 되고 맙니다.
율법은 우리의 모습을 보여주는 하나의 거울에 불과합니다.
하나님은 천사들을 통하여 모세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율법을 주셨습니다.(행 7:53)

우리는 여기서 하나님과 아브라함 사이에 맺은 언약을 기억해야 합니다.
아브라함은 율법이 오기 전에 하나님과 언약을 맺었습니다.
나중에 율법이 왔지만 그 언약을 침해할 수는 없었습니다.
즉, 하나님의 약속은 율법의 영향을 전혀 받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래서 율법은 아브라함과 직접 하신 약속을 어떠한 방법으로도 바꿀 수 없었던 것입니다.
"내가 이것을 말하노니 하나님의 미리 정하신 언약을 사백 삼십년 후에 생긴 율법이 없이 하지 못하여 그 약속을 헛되게 하지 못하리라 만일 그 유업이 율법에서 난 것이면 약속에서 난 것이 아니리라 그러나 하나님이 약속으로 말미암아 아브라함에게 은혜로 주신 것이라"(갈 3:17-18)

④ 율법(律法)은 죄인을 믿음에 이르게 하기 위한 수단(手段)으로 제시하셨던 것입니다.
"믿음이 오기 전에 우리가 율법 아래 매인 바 되고 계시될 믿음의 때까지 갇혔느니라."(갈 3:23)
구원(救援)을 받기 이전에 우리는 율법의 종이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율법을 몰랐더라도 율법은 죄인들 위에 군림하고 있었습니다.
이 율법은 선악(善惡)을 가르는 하나님의 기준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 백성을 위시하여 세상 모든 사람들은 이 율법을 통하여 하나님과 연관되어 있는 것입니다.
이 율법은 듣고 끝나는 것이 아니라 기록되는 것이 특징입니다.
기록된다는 말은 어느 누구도 그 법을 변경시킬 수 없다는 말이 됩니다.
그리하여 사람이 기록된 하나님의 율법 앞에 완전치 못함을 느낄 때 그는 하나님께서 보내신 예수 그리스도를 의지하게 되는 것입니다. 율법은 해결할 수 없는 죄를 끊임없이 고발(告發)합니다.
그러나 죄에 대한 완전한 용서가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시면 완성되는 것입니다.
"이같이 율법이 우리를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하는 몽학선생(蒙學先生)이 되어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갈 3:24)
몽학선생(蒙學先生)은 공식적인 학교에 들어가기 전에 집에서 가르치는 개인교사와 같은 뜻입니다.
그는 선(善)과 악(惡)의 기준을 제시하고 겸손과 존경, 그리고 순종하는 모든 것을 가르칩니다.
율법은 우리의 마음을 그리스도에게로 나아가도록 인도하는 개인교사와 같은 역할을 합니다.
개인교사의 의무(義務)가 아이들을 학교에 데려다 주는 것과 같이 율법의 의무는 우리를 예수 그리스도로 인도하는 것입니다. 아이들이 학교에 간 이상 몽학선생은 그 아이를 더 이상 가르칠 수 없습니다.
몽학선생은 한시적(限時的)인 것입니다. 율법의 역할도 그리스도가 오시기 전까지만 유효한 것입니다.
"율법은 모세로 말미암아 주신 것이요 은혜와 진리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온 것이니라."(요 1:17)
"믿음이 온 후로는 우리가 몽학선생 아래 있지 아니하도다."(갈 3:25)
이스라엘은 그리스도가 오기 전까지 율법 아래 속박당하고 있었습니다. 그리스도가 세상에 왔을 때 율법은 그의 역할을 다하고 사람들로 하여금 죄를 완전히 용서하실 수 있는 예수님 앞으로 나오도록 인도하였습니다.


율법은 죄인을 속박시키지만, 은혜는 죄인을 자유롭게 합니다.
율법은 "그대로 행하면 살리라"라고 말하지만, 은혜는 "다 이루어졌다"라고 말합니다.
율법은 죄인을 저주(詛呪)하지만, 은혜는 죄인에게 복(福)을 줍니다.
율법은 하나님 앞에서 모든 입을 닫게 하지만, 은혜는 하나님을 찬양(讚揚)하도록 입을 열게 합니다.
율법은 가장 최고의 죄인을 속박(束縛)하지만, 은혜는 가장 낮은 자를 구원(救援)합니다.
율법은 "죄의 삯은 죽음"이라고 말하지만, 은혜는 "하나님의 선물(膳物)은 영생(永生)"이라고 말합니다.
율법은 사람의 죄를 드러내지만, 은혜는 그의 죄를 덮어 줍니다.
율법은 순종을 명령하지만, 은혜는 순종할 수 있는 능력을 부여합니다.
율법은 돌판 위에 기록되었지만, 은혜는 마음판 위에 기록됩니다.
율법은 두려움을 주지만, 은혜는 안식(安息)을 줍니다.

▣ 유대인의 법(法)과 규례(規例)
1) 도덕법, 2) 의식 법, 3) 시민법, 4) 각종 규례와 법도, 5) 건강법 등이다.

도덕법(道德法)은 → 십계명(十誡命)으로 요약된다(출 20:1~17).
십계명(十誡命)에는 → 인간들이 지켜야 할 도덕적인 의무들이 요약되어 있다.
이 열 개의 조항으로부터 모세오경의 수많은 규례와 법도들이 확대 적용되었다.
심지어 시민법조차 도덕법에 기초되어 있다.
시민법(市民法)은 → 이웃과의 관계, 공적 권위에 대한 시민들의 의무들을 정의하고 있으며,
여러 가지 위반 사항에 대한 처벌 규정을 포함하고 있다.
의식법(儀式法)은 → 성소에서 이루어지는 제의(祭儀)에 관한 규정들과 여러 제사들,
그리고 백성 개개인의 책임들을 다루고 있으며, 지정된 절기를 준수하는 방법을 설명하고 있다.
건강법(健康法)은 → 다른 법들과 함께 다뤄지고 있다.
부정(不淨)과 관련된 여러 규례들은 제의적인 부정을 정의하고 있지만,
위생(衛生)과 건강(健康)의 원칙까지 포함된 개념이라고 볼 수 있다.
정결한 짐승과 부정한 짐승의 고기에 관한 규정은 건강에 대한 고려를 바탕으로 하고 있다.

◉ 율법은 모두 하나님께로부터 왔지만,
그 가운데 어떤 율법들은 더 이상 유효(有效)하지 않게 된 반면 십계명은 여전히 유효하며 중요하였다.

◉ <의문(儀文)의 율법(律法)>
“그리스도께서 속죄 제물로 십자가에 돌아가신 후 의문의 율법에는 어떤 효력도 없었다. 그러나 그 의문의 율법은 도덕적인 율법과 연결되어 있었으며 영광스러웠다. 그 전체가 신성(神性)의 표적을 지니고 있었으며 하나님의 거룩하심과 공의로우심과 의로우심을 나타냈다. 폐지되어야 할 율법의 직무가 그처럼 영광스러웠거늘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시고 당신을 믿는 모든 이들에게 생명을 부여하시고 성화케 하시는 성령을 주실 때 그 실체(實體)는 얼마나 더욱 영광스러웠겠는가?”(가려 뽑은 기별 1권, 238)

화요일(7월 6일)
<무엇을 하여야 구원(救援)을 얻으리이까.>

▣ <율법(律法)으로는 구원(救援)을 얻을 수 없습니다.>
율법은 한시적(限時的)인 것입니다.
"그런즉 율법은 무엇이냐 범법함을 인하여 더한 것이라 천사들로 말미암아 중보의 손을 빌어 베푸신 것인데 약속하신 자손이 오시기까지 있을 것이라"(갈 3:19)
세상은 지금 "율법의 통치" 아래 있는 것이 아니라 "은혜의 통치" 아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율법의 저주를 홀로 받으사 흘리신 피의 증거로 세상이 지금은 은혜 아래 있는 것입니다.
이제는 죄인들이 은혜를 입어 그리스도 앞에 나아가 죄의 용서함을 받게 되었습니다.
이제는 율법의 행위로가 아니라, 그리스도를 믿음으로만 의롭게 되는 길이 열렸습니다.

① 어느 누구도 율법(律法)을 통해서 구원(救援)을 얻을 수 없습니다.
"그 중에 한 율법사가 예수를 시험하여 묻되 선생님이여 율법 중에 어느 계명이 크니이까 예수께서 가라사대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둘째는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마 22:35-40)
첫째 계명은 하나님께 대한 완전한 사랑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께 대한 완전한 순종을 의미합니다.
둘째 계명은 내 이웃을 내 몸같이 사랑하라는 하나님의 명령입니다.
율법은 100% 완전하게 지킬 것을 명령하고 있습니다. 99.99%, 거의 완벽하게 율법을 지켰다고 해도 0.01% 때문에 하늘나라를 가지 못하게 되는 것입니다.
"누구든지 온 율법을 지키다가 그 하나에 거치면 모두 범한 자가 되나니"(야고보서 2장 10절)

② 구원(救援)은 율법의 행위(行爲)로가 아니라 오직 믿음으로써만 얻습니다.
"그러므로 율법의 행위로 그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나니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니라"(롬 3:20)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치 못하게 함이니라."(엡 2:9)
위의 성경구절들은 율법의 분명한 역할에 대해서 밝히고 있습니다. 그러나 구원을 얻기 위한 모든 행위는 율법의 행위인 것입니다.
"만일 은혜로 된 것이면 행위로 말미암지 않음이니 그렇지 않으면 은혜가 은혜(恩惠) 되지 못하느니라."(롬 11:6)
"일하는 자에게는 그 삯을 은혜로 여기지 아니하고 빛으로 여기거니와 일을 아니할지라도 경건치 아니한 자를 의롭다 하시는 이를 믿는 자에게는 그의 믿음을 의로 여기시나니"(롬 4:4-5)
행위(行爲) 아래서 하나님은 공정한 심판을 하시고 은혜 아래서는 완전한 용서를 하십니다.
하나님 앞에서 스스로의 행위로 의(義)를 얻으려 한다면 천국에 가는 길을 스스로 찾는 것입니다.
이것은 곧 진리를 믿지 않고 자신을 믿는 행위이기 때문에 절대로 의(義)를 얻을 수가 없습니다.

③ 하나님은 구원(救援)의 길이 율법이 아닌 그리스도의 의(義)를 통해 이루어지도록 하셨습니다.
"예수는 우리 범죄 함을 위하여 내어 줌이 되고 또한 우리를 의롭다 하심을 위하여 살아나셨느니라."(롬 4:25)
"예수께서 신 포도주를 받으신 후 가라사대 다 이루었다 하시고
머리를 숙이시고 영혼(靈魂)이 돌아가시니라"(요한 19:30)
구원(救援)은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치 못하게 함이니라."(엡 2:8-9)
"그러므로 후사가 되는 이것이 은혜에 속하기 위하여 믿음으로 되나니 이는 그 약속을 그 모든 후손에게 굳게 하려 하심이라 율법에 속한 자에게 뿐 아니라 아브라함의 믿음에 속한 자에게 도니 아브라함은 하나님 앞에서 우리 모든 사람의 조상이라"(롬 4:16)
믿음은 행위의 필요성을 배제시키는 역할을 하며 오직 예수님의 희생을 원뜻 그대로 마음에 받아들이는 것이 믿음이라고 밝히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니고데모에게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 같이 인자도 들려야 하리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요한 3:14-15) 광야에서 모세가 든 뱀을 본 사람들은 모두 병이 나았습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죄의 병을 앓고 있는 사람은 예수님을 바라보아 그 피가 우리의 죄를 사(赦)하셨다는 사실을 믿으면 되는 것입니다.

④ 율법을 통해서는 의(義)롭게 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율법은 예수님이 오시기 전까지만 효력이 발생되는 한정적(限定的)인 법이기 때문입니다.
"그런즉 율법은 무엇이냐 범법함을 인하여 더한 것이라 천사들로 말미암아 중보의 손을 빌어 베푸신 것인데 약속하신 자손이 오시기까지 있을 것이라"(갈 3:19)
"이 약속들은 아브라함과 그 자손에게 말씀하신 것인데 여럿을 가리켜 그 자손들이라 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하나를 가리켜 네 자손이라 하셨으니 곧 그리스도라"(갈 3:16)

⑤ 율법은 사람을 의(義)롭게 하는 방법이 아닙니다.
이유는 하나님께서 행위로서는 구원(救援)에 이를 수 없다고 했기 때문입니다.
"이제는 율법 외에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났으니 율법과 선지자들에게 증거를 받은 것이라 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믿는 자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의니 차별이 없느니라."(롬 3:21-22)
"그러므로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얻는 것은 율법의 행위에 있지 않고 믿음으로 되는 줄 우리가 인정하노라"(롬 3:28)

◉ 구원(救援)은 이루어가는 것이 아니라 다 이룬 것을 믿는 것입니다.
율법(律法)과 은혜(恩惠)에 대한 관계는 초대 교회에서부터 많은 생각을 불러일으켜 왔습니다.
갈보리에서 끝난 율법은 그 이후에도 많은 사람의 생각 속에 자리 잡고 있었습니다.
사도행전 15장에 보면 이방인(異邦人)은 모세의 율법에 관여되지도 않았습니다.
베드로가 15장 11절에 유대인과 이방인 모두 은혜로 구원을 받는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저희와 동일하게 주 예수의 은혜로 구원받는 줄을 믿노라 하니라"
"들은즉 우리 가운데서 어떤 사람들이 우리의 시킨 것도 없이 나가서 말로 너희를 괴롭게 하고 마음을 혹하게 한다 하기로"(행 15:24) 바울은 율법과 성령의 관계를 밝혔습니다.
"율법 안에서 의롭다 함을 얻으려 하는 너희는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지고 은혜에서 멀어진 자로다"(갈 5:4)
"어리석도다. 갈라디아 사람들아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이 너희 눈앞에 밝히 보이거늘 누가 너희를 꾀더냐. 내가 너희에게 다만 이것을 알려 하노니 너희가 성령을 받은 것은 율법의 행위(行爲)로냐 듣고 믿음으로냐. 너희가 이같이 어리석으냐. 성령으로 시작하였다가 이제는 육체로 마치겠느냐"(3:1-3)

"어떤 율법사가 일어나 예수를 시험하여 가로되 선생님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예수께서 이르시되 율법에 무엇이라 기록되었으며 네가 어떻게 읽느냐 대답하여 가로되 네 마음을 다하며 목숨을 다하며 힘을 다하며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고 또한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였나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대답이 옳도다. 이를 행하라 그러면 살리라"(눅 10:26-28)
그러나 과연 이 말씀이 이 법을 행하면 살 수 있다는 뜻으로 말씀하신 것입니까? 과연 그렇습니다. 누구든지 이 법을 행하면 그는 율법의 심판아래 허덕이는 자신을 발견하게 되고 주님의 의를 의지하게 되므로 다시 살 수 있습니다. 그러나 율법은 믿는 것이 아니고 행하는 것이므로 이를 행하지 않으면 어느 누구도 율법 아래서 진정한 자신을 발견할 수가 없습니다.
율법을 강조하고 율법을 통해서 구원을 얻는다고 설교하는 자들은 예수님이 이루어 놓으신 구원을 믿지 않게 하는 영적인 도둑과 강도들인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은혜로 너희를 부르신 이를 이같이 속히 떠나 다른 복음 좇는 것을 내가 이상히 여기노라 다른 복음은 없나니 다만 어떤 사람들이 너회를 요란케 하여 그리스도의 복음을 변하려 함이라"(갈 1:6-9)
믿음 위에 단 하나의 율법이라도 첨가하게 되면 그것은 곧 다른 복음이 되고 맙니다.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는 오직 100% 예수님의 공로로만 이루어졌습니다. 거기에 인간의 행위를 첨가하면 그는 곧 예수님의 완벽하신 십자가의 공로를 파괴하는 행위를 하는 것입니다. 결코 자신의 생각을 첨가해서는 안 됩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회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요한 5:24)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롬 8: 1-2)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었은즉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평을 누리자"(롬 5:1)

◉ “바울은 직접적인 지도를 구하기 위하여 하나님께 향하는 반면, 항상 교회의 교제를 통해 연합을 이룬 신도들의 몸, 즉 교회에 부여된 권위를 인정하였다. 그는 자문이 필요함을 느꼈고, 중대한 문제가 일어났을 때에는 이것들을 교회 앞에 제출하여 형제들과 연합하여 하나님께 올바른 결정을 내릴 수 있는 지혜를 간구하기를 기뻐하였다.”(사도행적, 200)

◉ <진실한 대면을 외면하지 말라>
“유대인들은 그리스도를 메시야로 받아들이기를 거부하였으며 저들의 의식이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것을 깨달을 수 없었고 저들의 희생 제물과 예물들이 그 중대성을 상실했다는 사실을 이해하지 못하였다. 완고한 불신으로 말미암아 저들 스스로 가리운 수건은 아직도 저들의 마음을 어둡게 하고 있다. 만약 저들이 율법의 의이신 그리스도를 받아들이기만 한다면 그 수건은 벗겨질 것이다.”(가려 뽑은 기별 1권, 239)

◉ 유대인 신자들의 주장은 바울이 전하는 복음에 맞지 않았다.
그러나 그는 세계 교회를 통해 이 일을 원만하게 해결하고자 노력하였다.

수요일(7월 7일)
<능히 메지 못하던 멍에>

▣ <예루살렘 1차 총회>
할례문제를 발단으로 하여 처음으로 개최된 예루살렘총회는 초대교회사에서 중요한 의의를 지닌다.
예루살렘교회는 바울과 바나바를 통해 본격적으로 이방인들에게 복음이 확산되자 다소 당혹감을 느꼈던 것 같으며, 특히 구약(舊約)의 율법에 충실한 자들은 노골적으로 반발을 표출했다.
따라서 이에 대한 원만한 해결책이 마련되지 않는 한 기독교는 초기부터 심각한 당파 현상이 벌어질 판국이었다.
이러한 중대한 시점에서 예루살렘1차 총회는 율법엄수를 주장하는 자들의 폐쇄적인 태도를 물리치고 이방인들은 향한 하나님의 뜻을 자각하여 그들을 한 형제로 영접한다고 하는 내용의 결의를 공적으로 선포하기에 이르렀다.
특히 이와 같은 결의를 굳힐 수 있던 중요한 이유는 당시 예루살렘 교회의 영적지주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베드로의 단호한 설명이 있었기 때문일 것이며 (행 15:7-11), 또한 구약성경을 인용한 야고보의 증언 및 제안과 함께 이방인의 구원을 하나님의 뜻으로 받아들여 결의안으로 공표했던 것이다.

◉ (사도행전15:6-11절)의 <은혜를 통한 구원의 선포>
할례를 강력히 주장하는 그리스도인들에게 베드로는 10년 전의 고넬료 사건을 예로 들어 자신의 견해를 확신 있게 피력하였다. 사실 고넬료를 회심시킬 당시만하더라도 베드로는 성령의 강권하심에 따라 자신을 맡겼을 뿐, 유대인과 이방인간의 장벽이 무너졌다는 사실(엡 2:14)을 체계적이고 확연하게 자신의 신앙원리로 채택하지는 못했으며, 결국 이방인과 식탁을 함께하지 않는 실수도 범하였던 것이다.(갈 2:12이하) 하지만 본문은 이제 베드로가 바울과 동일한 구원관을 피력할 수 있을 만큼 성숙해있음을 보여준다. (행 15:9-11절; 갈 5:1-3)
그것은 인간의 선행이나 품성이라는 조건을 초월한 순수한 이신득의(以信得義) 진리였던 것이다.

◉ 할례(割禮)를 받는 이들은 원래 율법에 얽매여 있었습니다.
"내가 할례를 받는 각 사람에게 다시 증거(證據)하노니 그는 율법 전체를 행할 의무를 가진 자라"(갈 5:3)
율법의 하나를 지킬 때 당신은 율법의 모든 법을 지킬 의무가 생기는 것입니다.
"알 것은 이것이니 법은 옳은 사람을 위하여 세운 것이 아니요 오직 불법한 자와 복종치 아니하는 자며 경건치 아니한 자와 죄인이며 거룩하지 아니한 자와 망령된 자며 아비를 치는 자와 어미를 치는 자며 살인하는 자며"(딤전 1:9) 율법은 이같이 불법한 자를 정죄하기 위한 수단이지 율법을 통해 의인 만들려는 것이 아닙니다. 또한 모든 율법 중에 그 하나라도 어겼다면 그는 오직 죽음으로만 그 요구를 만족시킬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그 분의 삶 속에서 율법의 요구를 이루셨던 것입니다.
"내가 말하노니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진실하심을 위하여 할례의 수종자가 되셨으니 이는 조상들에게 주신 약속들을 견고케 하시고"(로마서 15장 8절)
또한 예수님은 골고다 언덕에서 피 흘려 죽으심으로 율법의 저주를 받으셨습니다.
즉, 예수님의 죽음으로 하나님과 율법의 요구를 이루신 것입니다.
그것을 증명하신 것이 곧 예수님의 부활이었던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다시 사신 것이 없으면 너희의 믿음도 헛되고 너회가 여전히 죄 가운데 있을 것이요"(고전 15:17)
"우리를 의롭다 하심을 위하여 살아나셨느니라."(롬 4:25)
"할례나 무할례가 아무 것도 아니로되 오직 새로 지으심을 받은 자 뿐이니라. 무릇 이 규례를 행하는 자에게와 하나님의 이스라엘에게 평강과 긍휼이 있을지어다."(갈 6:15-16)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 지은 자가 된 것입니다. 이 뜻은 부활하신 그리스도는 믿는 자의 마음에 규율이 되시고 삶에 있어서 중심이 된다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주님을 믿음으로 의롭게 되는 자는 주님의 영과 함께 동행하고 성령의 열매를 맺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도 율법을 행하면 이로 말미암아 살 수 있다고 하셨습니다.

◉ 사도들은 할례와 모세의 법을 이방인들에게 적용하지 않기로 결정했다.
왜냐하면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모두 은혜로 구원을 받기 때문이다.
다만 그들은 이방인 신자들에게 영적, 도덕적 순결을 강조하는 몇 가지 지침을 제안하기로 하였다.

◉ 결론은 유대주의자들의 의견과 반대되는 것이었다.
유대주의자들은 이방인 신자들도 할례를 받고 모든 의식법을 지켜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그들은 유대인의 율법과 의식이 그리스도교의 의식 속에 반영되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사도행적, 189)

◉ <그리스도를 바라보라 1>
“건조한 이론이 제시되고 있지만 귀한 영혼들은 생명의 떡이 없어 굶주리고 있다. 이런 설교는 필요한 것도 아니고 하늘의 하나님께 인정받지도 못한다. 왜냐하면 그 안에 그리스도가 없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의 거룩한 모습이 백성들 앞에 계속 제시되어야 한다. 그분을 바라봄으로 인간은 그분을 공경하고 그분께 더욱 매료되고 이끌릴 수밖에 없으며, 그분의 형상에 동화되며 그리스도의 마음을 갖게 되기까지 그리스도와 같아지기를 더욱 소망하게 될 것이다.”(가려 뽑은 기별 3권, 169)

◉ 왜곡된 종교적 의무들을 이방인들에게 적용하는 것은 복음의 정신이 아니었다.
그러나 율법의 사상은 여전히 존중되어야 했다.

목요일(7월 8일)
<갈라디아의 이설(異說)>

▣ 구원(救援)은 믿음으로 얻는 것이지 율법(律法)이나 도덕법(道德法)을 지킴으로 얻는 것이 아니다.
그렇다고 도덕적 율법을 지킬 필요가 없다는 것이 아니다.
갈라디아서나 로마서에서는 의식법(儀式法)을 말하는 것이지 도덕법(道德法)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즉 모세의 법(할례를 받고 제사를 드리고)해서 구원을 받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통해서 구원을 받는 것이다.

▣ <이신득의(以信得義) 이해>
◉ <행함이냐 믿음이냐 와 율법이냐 복음이냐>
사람들은 흔히 이두 문제를 같은 문제로 생각하고 있다.
왜냐하면 율법은 그 속성상 인간의 자기 의(義), 곧 행함을 요구하고 있고, 복음은 그 속성상 예수님의 구속(救贖)의 복음을 강조하며 믿음을 먼저 요구하고 있기 때문이다.
율법과 복음은 구속(救贖)사의 전개에 따른 계시의 내용과 형식의 변화, 발전으로서 구약과 신약의 기본적 차이를 보여준다. 반면 행함과 믿음은 신. 구약의 시대변화와는 상관없는 인류 구원의 근거를 보여주는 것이다.
즉 하나님의 구속사의 전개에 따라 율법은 복음으로 대치되었지만 신. 구약을 막론하고 행함이 아니라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다는 진리는 전혀 변함이 없다. 곧 구약시대에 멸망 받은 자도 율법을 다 안 지켜서가 아니라 율법이 말하는 하나님을 않아서이고 신약시대에 멸망한 자도 복음이 말하는 명령을 행하지 않아서가 아니라 복음의 가르침을 믿지 않아서이다.

◉ <이신득의(以信得義)의 정의>
이신득의(以信得義)는 문자 그대로 “믿음으로 의(義)롭게 된다. 는 말로
하나님께서 그의 믿음을 보시고 의롭다고 인정해주시는 것을 뜻한다.

◉ <이신득의(以信得義)의 중요성>
① 성도(聖徒)들로 하여금 외적 업적주의와 형식주의에 빠지는 것을 방지하기 위함이다.
즉 행위에 의한 구원(救援)을 강조하게 되면 인간의 내면과 인격을 중요시하기보다는 외적으로 드러나는
업적과 공로(功勞)에만 치중하는 결과를 낳아 하나님에 대한 전인격적인 헌신이 무시될 수밖에 없다.
② 인간으로 하여금 자랑치 못하도록 하기 위함이다.
만약인간이 자신의행위로 구원(救援)을 얻는다면 그 구원은 단순히 행위에 대한 하나의 댓가로
전락하게 되며 하나님의 은혜는 아무런 의미를 갖지 못하게 된다.

◉ <갈라디아에서의 배도(背道)>
“바울은 고린도에 체류하는 동안 이미 설립된 어떤 교회들에 대하여 크게 염려를 하게 되었다. 예루살렘 신자들 중에서 일어난 거짓 교사들의 감화로 갈라디아 신자들 중에는 분열과 이단과 육욕주의가 신속히 유행하고 있었다. 이 거짓 교사들은 복음의 진리를 유대인의 유전과 혼합시키고 있었다. 그들은 예루살렘 총회의 결정을 무시하고 이방인 회심자(回心者)들에게 의문(儀文)의 율법의 준수를 주장하였다. 사태는 위급하였다. 들어온 악은 신속히 갈라디아 교회들을 멸하려고 위협하였다. 바울은 그에게서 복음의 원칙들을 충실히 배운 자들 중에서 생긴 이 같은 공공연한 배도로 마음이 상하였으며 그의 영혼은 흥분되었다. 즉시 그는 기만당한 신자들에게 편지하여 그들이 받아들인 거짓 교리들을 폭로하고 믿음에서 떠난 자들을 매우 혹독하게 견책하였다. “우리 하나님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 좇아 은혜와 평강이 있기를 원하노라”는 말로 갈라디아 사람들에게 인사한 후 바울은 아래와 같은 날카로운 견책의 말을 전하였다.”(행적, 383-384)

◉ 바울은 자신이 전한 복음이 개인적인 의견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계시에 의한 것임을 강력하게 호소하며,
갈라디아 교인들이 진정한 복음에서 물러나 다른 복음을 받아들인 사실에 대하여 엄중히 경고하고 있으며
또한 로마서나 갈라디아서는 “오직 믿음으로만 구원받을 수 있다”는 사실을 강조하고 있다.
▣ <그리스도를 바라보라 2>
“우리들은 바라봄으로 변하게 된다. 거룩한 모본이신 주님의 완전하심을 명상할 때에 우리들은 완전한 변화를 입으려는 욕망을 품게 될 것이며 주님의 순결하신 형상을 따라 새로 지음을 입게 될 것이다. 품성의 변화가 이루어지며 진노의 자식이 하나님의 자녀가 되게 하는 것은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때문인 것이다. 그는 사망에서 생명으로 나가게 되며 신령하게 되어 신령한 사물들을 분별한다. 하나님의 지혜는 그의 정신을 일깨워 주며 하나님의 율법의 기이한 이치를 바라보게 될 것이다.”(가려 뽑은 기별 1권, 338)

◉ “그러나 아브라함과의 언약에 구원의 약속이 포함되었다면 왜 시내산에서 다른 언약을 세우셨을까? 백성들은 노예 생활을 하는 동안 하나님께 대한 지식과 아브라함과 세운 언약의 원칙을 대부분 잊어버렸다. 그러나 그들의 마음에 새겨져야 할 더 큰 진리가 있었다. 그들은 우상숭배와 부패 가운데서 살았으므로 하나님의 거룩하심, 그들의 마음속에 가득 찬 죄악, 그들 스스로는 하나님의 율법을 순종하기에 전혀 무능함, 구세주의 필요 등에 대하여 바른 개념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 이 모든 것을 그들은 배워야 하였다.”(부조와 선지자, 371~372)

◉ “예루살렘 신자들 중에서 일어난 거짓 교사들의 감화로 갈라디아 신자들 중에는 분열과 이단과 육욕주의가 신속히 유행하고 있었다. 이 거짓 교사들은 복음의 진리를 유대인의 유전과 혼합시키고 있었다. 그들은 예루살렘 총회의 결정을 무시하고 이방인 회심 자들에게 의문의 율법의 준수를 주장하였다.”(사도행적, 383)

<초점(焦點)>
구원(救援)은 믿음으로 얻는 것이지, 율법이나 도덕법을 지킴으로(지킬 수도 없음)얻는 것이 아니다.
그렇다고 도덕적 율법을 지킬 필요가 없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 사상을 더욱 준수하여야 한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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