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7과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질문, 대답, 설명) 02/18/23 > 교과토의 자료

본문 바로가기

운영진
x


교과토의 자료 보기

교과토의 자료

제7과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질문, 대답, 설명) 02/18/23

페이지 정보

작성자 김명호 작성일23-02-10 17:42 조회6,439회 댓글0건

본문

제7과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2월 18일 안식일 / 일몰: 오후 6시 14분)

 

연구 범위: 눅 4:16~19, 사 62:1, 2, 신 15:11, 마 19:16~22, 눅 19:1~10, 욥 29:12~16

기억절: “그 때에 임금이 그 오른편에 있는 자들에게 이르시되 내 아버지께 복 받을 자들이여 나아와 창세로부터 너희를 위하여 예비된 나라를 상속받으라”(마 25:34).

 

성경은 자주 나그네와, 고아 그리고 과부에 대해 이야기한다. 그들이 바로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들”일 수 있다(마 25:40).

오늘날 우리가 어떻게 이 사람들을 알아볼 수 있겠는가? 성경 시대의 나그네들은 전쟁 또는 기근으로 인해 고향을 떠나야 했던 사람들이었다. 우리 시대에는 불가피한 상황으로 삶의 터전을 잃은 수백만 명의 난민이 우리 곁에 있는 나그네들일 수 있다. 

고아들은 전쟁, 사고 또는 질병으로 인해 부모를 잃은 아이들이다. 보호자가 수감되었거나 그 밖의 다른 이유로 인해 홀로 남겨진 아이들도 마찬가지다. 이 사역에는 참으로 넓은 섬김의 영역이 포함되어 있다. 

과부들은 고아들과 같은 이유로 남편을 잃은 사람들이다. 이들 중 많은 사람이 한부모 가정의 가장이기 때문에, 교회가 제공하는 도움이 그들에게 큰 힘이 될 수 있다.

이번 주 함께 살펴보겠지만, 우리는 이 땅 위에서 하나님의 일을 관리하는 자들이기 때문에 가난한 자들을 돕는 것은 우리에게 맡겨진 의무이다. 그것은 예수님의 모본을 따르는 것이며 그분의 계명에 순종하는 것이다.

 

 

*학습 목표

- 깨닫기: 하나님께서는 그의 청지기들이 가난한 자들을 돌보기를 원하신다. 

- 느끼기: 그것이 우리의 사명이며 이를 통해 복을 누리는 것을 느낀다.

- 행하기: 우리의 운명을 결정하는 가난한 자들에게 대한 나눔을 실천한다. 

 

TMI 위로

2. 메시아의 사명의 선언은 그대에게 하나님에 대해 어떤 인상을 줍니까?(사 61:1, 2) ※ 하나님은 인류 전체를 가난한자로 보시고 부요한 자가 되도록 하시려는 사랑의 선포라는 인상을 준다. 인류는 특히 생명의 가난뱅이들이다. 사망의 존재다.

3. 가난한 자를 도움으로써 복을 받았던 경험이 있습니까?(시 41:1)

※ 각 사람이 대답하자.

4. 마 19:21에 전 재산을 팔아서 가난한 자를 도우라고 하신 말씀은 어떤 의미로 하신 말씀이라고 생각합니까?

※ 재물을 신으로 섬기지 말라는 말씀이다. 

5. 욥 29:16이 말한 욥의 선행에 대해서 생각해 보십시오. 

※ 욥은 깨달은 대로 생활했다. 그리스도인도 말씀으로 깨닫고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했으면 좋겠다. 

6. 하나님께서는 왜 우리에게 가난한 자들을 도우라고 부탁하셨을까요?

※ 예수님의 마음을 풍성하게 경험하고 복받게 하려고.

7. 그대는 가난한 자를 돕는 것이 왜 운명을 결정하는 문제가 된다고 생각합니까?

※ 예수님의 사랑, 신의 성품이 풍성하게 되는 경험을 하기 때문이다. 

 

결론

하나님은 청지기들에게 가난한 자들을 돌보라고 하셨습니다. 그것은 메시아의 사명, 그리고 충실한 종들의 삶 속에서 잘 나타났습니다. 가난한 자들을 돕는 것은 중요한 우선순위이며 그것은 그들의 삶에 복이 되었습니다. 잠시 있다가 사라질 재물을 우상으로 삼기보다는 영원한 소망을 선택하고 가난한 이들을 도와야 합니다. 이것은 우리의 영원한 운명을 결정할 문제가 될 것입니다.  

 

2월 12일(일) 예수님의 생애와 사역

 

예수님께서는 사역 초기에 갈릴리 지역에 있는 나사렛으로 여행하셨다. 이곳은 예수님의 고향이었는데 그 지역 사람들은 이미 그분의 사역과 기적에 대해 듣고 있었다. 예수님께서는 늘 하시던 대로 회당에 들어가 안식일을 지키셨다. 예수님이 말씀을 가르치는 랍비는 아니셨지만, 진행을 맡고 있던 사람이 예수님께 이사야의 글이 적힌 두루마리를 건네주며 성경을 읽어 달라고 부탁했다. 예수님께서는 이사야 61:1, 2을 읽으셨다.

 

누가복음 4:16~19을 읽고 이사야 61:1, 2과 비교해 보라(참조, 눅 7:19~23). 예수님께서 왜 이 말씀을 선택하셨다고 생각하는가? 이사야에 기록된 이 성경절이 메시아를 지목하는 말씀으로 여겨지는 이유는 무엇인가? 이 성경절들은 메시아의 사역에 대해 무엇을 보여주었는가?

[눅4:16~19] 예수께서 그 자라나신 곳 나사렛에 이르사 안식일에 늘 하시던 대로 회당에 들어가사 성경을 읽으려고 서시매 17 선지자 이사야의 글을 드리거늘 책을 펴서 이렇게 기록된 데를 찾으시니 곧 18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 눈 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롭게 하고 19 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게 하려 하심이라 하였더라.

[사61:1,2] 주 여호와의 영이 내게 내리셨으니 이는 여호와께서 내게 기름을 부으사 가난한 자에게 아름다운 소식을 전하게 하려 하심이라 나를 보내사 마음이 상한 자를 고치며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갇힌 자에게 놓임을 선포하며 2 여호와의 은혜의 해와 우리 하나님의 보복의 날을 선포하여 모든 슬픈 자를 위로하되,

 

답: 유대인들이 메시아에 관한 예언을 바르게 알지 못한 것을  깨우치시려는 목적이었다.

 

종교 지도자들이 메시아의 고난에 관해 이야기하는 예언을 간과하고 예수님의 재림의 영광을 나타내는 내용을 잘못 적용했기 때문에, 대부분의 사람들은 메시아의 사명이 이스라엘을 로마의 압제로부터 해방시키는 것이라는 그릇된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메시아의 사명 진술이 이사야 61:1, 2에서부터 왔다고 생각하는 것은 굉장히 놀라운 일이었을 것이다.        

가난한 사람들은 세리와 같은 부도덕한 관리들, 사업을 하는 사람들, 심지어 이웃들에게까지 무시당했다. 일반적으로 가난은 하나님의 저주라고 생각되었고 그들의 불행한 상태는 죄의 결과로 여겨졌다. 이런 생각으로 인해 가난한 사람들과 그들의 불행한 형편에 관심을 두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하지만 가난한 사람들을 향한 예수님의 사랑이야말로 ‘당신이 우리가 기다리던 메시아입니까?’라는 침례 요한의 질문에 답하신 내용에서 나타나듯이 그분이 메시아라는 가장 강력한 증거 중의 하나였다. “구주의 제자들처럼 침례 요한도 그리스도의 왕국의 본질을 이해하지 못했다. 그는 예수께서 다윗의 보좌를 취하시리라고 기대하였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도 구주께서 왕으로서의 권위를 주장하지 않으시는 것을 보고 요한은 당황하여 근심하게 되었다”(시대의 소망, 215). 

 

 

<묵상> 

그리스도께서 가난한 자들을 돌보고 사랑하시는 자로서 선언하신 메시아의 사명(사 61:1, 2)은 우리에게 어떤 희망을 가지게 합니까?

 

답: 예수께서 우리에게도 관심을 두시고 돌보시고 구원하신다는 희망을 준다.

 

<부가설명> “땅에는 언제든지 가난한 자가 그치지 아니하겠으므로 내가 네게 명하여 이르노니 너는 반드시 네 경내 네 형제의 곤란한 자와 궁핍한 자에게 네 손을 펼지니라”(신15:11). “내가 곤고하고 가난한 백성을 너의 중에 남겨 두리니 그들이 여호와의 이름을 의탁하여 보호를 받을지라”(습3:12). 죄의 세상 사망의 세상이 된 후에 땅에는 언제든지 가난한 자가 그치지 않게 되었다. 이들을 이렇게 남겨 두신 것은 하나님의 백성이 하나님의 이름으로 그들을 보호하고 돌보게 하여 하나님의 백성은 가난한 사람들을 돌보고 사랑한다는 것을 알고 그들의 하나님을 찾도록 하려는 하나님의 사랑의 방법이다. 그러므로 성도들은 가난한 자들을 돌볼 권한이 주어진 사람들이다. 메시아의 사명에 가난한 자를 돌보는 것이 들어있다. 예수께서 세상에 오셔서 이 일을 수행하셨다. 그리스도인들이 이 일을 할 때 예수님의 일을 하는 것이다. 교회가 이 일을 이어가야 한다. 교회는 예수님의 몸이요 성도들은 그 몸의 지체들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예수께서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나를 믿는 자는 내가 하는 일을 그도 할 것이요 또한 그보다 큰 일도 하리니 이는 내가 아버지께로 감이라”(요14:12)라고 하신 일을 하는 것이다. 그래서 지금 세상에서 예수님이 하시던 그 일을 하게 되고 그래서 그들이 예수님의 제자라는 증거가 되게 하셨다. 우리는 이 뜻을 생각하고 할 수 있는 대로 그들을 돌보는 것이 합당한 일이다. 

 

<교훈>

가난을 하나님의 저주라고 생각했던 당시 유대인들과 달리 메시아로 이 땅에 오신 예수님께서는 가난한 자들을 위해 일하는 것이 자신의 사명이라고 말씀하셨다.

 

2월 13일(월) 가난한 자들을 위한 하나님의 대책

 

성경의 기자들은 그들의 글 속에 가난한 자, 나그네, 과부 그리고 고아들을 위한 하나님의 대책을 기록해 두었다. 이와 같은 기록은 시내산에서 허락된 말씀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너는 여섯 해 동안은 너의 땅에 파종하여 그 소산을 거두고 일곱째 해에는 갈지 말고 묵혀 두어서 네 백성의 가난한 자들이 먹게 하라 그 남은 것은 들짐승이 먹으리라 네 포도원과 감람원도 그리 할지니라”(출 23:10, 11).

   

레위기 23:22와 신명기 15:11을 읽어보라. 당시의 상황이 지금 우리가 처한 상황과 다를 수 있지만, 이 성경절에서 어떤 원칙을 배워야 하는가? 

[레23:22] 너희 땅의 곡물을 벨 때에 밭 모퉁이까지 다 베지 말며 떨어진 것을 줍지 말고 그것을 가난한 자와 거류민을 위하여 남겨두라 나는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이니라.

[신15:11] 땅에는 언제든지 가난한 자가 그치지 아니하겠으므로 내가 네게 명령하여 이르노니 너는 반드시 네 땅 안에 네 형제 중 곤란한 자와 궁핍한 자에게 네 손을 펼지니라.

 

답: 가난한 사람을 언제나 배려하는 생활을 하라는 원칙이다. 

 

일반적으로 여기 나타난 “형제”는 동료 이스라엘 백성들 또는 동료 신자들을 가리키는 것으로 이해된다. 또한, 우리는 “형제”를 “네 형제 중 지극히 작은 자”로 이해한다. 시편은 우리가 도움이 필요한 자들을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를 가르쳐 준다. “가난한 자와 고아를 위하여 판단하며 곤란한 자와 빈궁한 자에게 공의를 베풀며 가난한 자와 궁핍한 자를 구원하여 악인들의 손에서 건질지니라”(시 82:3, 4). 이 말씀은 우리에게 그저 음식을 나누는 것 이상의 책임이 있음을 가르쳐 준다. 

성경에는 어려운 사람들을 돕는 자들을 위한 약속 또한 기록되어 있다. “가난한 자를 구제하는 자는 궁핍하지 아니 하려니와”(잠 28:27). “왕이 가난한 자를 성실히 신원하면 그의 왕위가 영원히 견고하리라”(잠 29:14). 다윗 왕은 이렇게 기록했다. “가난한 자를 보살피는 자에게 복이 있음이여 재앙의 날에 여호와께서 그를 건지시리로다”(시 41:1). 때로 사람들이 잊기도 했지만, 가난한 자를 돕는 것은 고대 이스라엘에서 항상 매우 중요한 우선순위였다. 

이와는 반대로, “사회 진화론”이라고 알려진 이론의 영향으로 많은 사람들이 가난한 자들을 도와야 할 어떤 도덕적 의무도 없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그렇게 하는 것이 잘못된 것이라는 생각을 갖게 되었다. (이런 경향은 현대 사회에 이르러 특별히 영국에서는 더 두드러졌다.) 그대신 “사회 진화론자”들은 강자가 살아남고 약자는 도태되는 자연의 힘을 따랐다. 

 왜냐하면 이들은 가난한 사람, 아픈 사람, 극빈자를 돕는 것은 그들의 수를 증가시켜서 국가 전체의 사회적 구조를 약화시킬 뿐이기 때문에 오히려 사회에 해롭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잔혹하기 이를 데 없는 주장이지만, 이런 결론이야말로 진화론과 그것이 주장하는 잘못된 가르침이 결국 어디에 도달하게 될 지 보여주는 것이다. 

 

<묵상> 하나님은 왜 우리에게 가난한 자를 돌보라고 부탁 하셨는지 묵상해 보십시오. 

 

답: 그들을 돌보는 것이 자기를 너그럽게 만들고 사랑을 키우는 선한 방법이다. 

 

<부가설명> 가난한 자라고 했을 때 범위는 좀 막연하다. 열심히 생활하는데 가난한 자인지, 거지도 해당시켜야 하는지, 등등. 생활 형편이 가난한 자의 필요를 도우는 것은 좋은 일인데, 몸도 씻지 않고 냄새가 풀풀 나는 사람들을 가까이 하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니다. 나그네를 들여 잠자리고 제공하고 음식도 먹이라고 할 때 그 나그네가 노숙자를 뜻하는 말은 아닐 것이다. 현대 사회에서 가난한 자라고 말할 때 어떤 상태를 뜻하는지 참 확실히 하기가 난감한 것 같다. 노숙자나 거지들에게 얼마의 돈으로 동정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다. 그리스도인은 이런 일은 기꺼이 감당할 것이다. 예수님이 없는 사람들도 잘 하는 일이 아닌가? 그리스도인은 옳은 일 이상을 하는 사람들이 아닌가? 성경이 뜻하는 것을 성령의 가르침으로 잘 깨달아서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에게 예수님의 마음으로 현실적으로 합당한 도움을 주면서 생활하는 것을 합당한 일이고 줄 수 있는 것이 얼마나 감사한 일인가? 예수님은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이 있다’(행20:35)라고 가르치셨다. 줄 수 있다는 것은 능력이 있다는 것이다. 

 

<교훈>

하나님께서는 가난한 자들을 돕고 그들의 필요를 채우는 것이 조금이라도 더 가진 자들의 의무임을 성경 곳곳에 기록해 두셨다. 

 

2월 14일(화) 젊은 부자 관원

 

우리는 젊은 부자 관원이 젊었고 관원이었으며 부자였다는 것 외에는 그에 대해 많은 것을 알지 못한다. 그리고 그는 영적인 것에 관심이 있었다. 활기가 넘치는 이 청년은 예수님께 달려왔다(막 10:17). 그는 영생에 관해 배울 수 있게 되어 흥분되어 있었다. 이 이야기가 얼마나 중요했던지 공관복음 세 곳에 모두 기록되어 있다(마 19:16~22, 막 10:17~22, 눅 18:18~23).   

 

마태복음 19:16~22을 읽어보라. 예수님께서 그에게 “네가 온전하고자 할진대 가서 네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따르라”(마 19:21)고 말씀하셨을 때 그 말은 어떤 의미였는가?

[마19:16~22] 어떤 사람이 주께 와서 이르되 선생님이여 내가 무슨 선한 일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17 예수께서 이르시되 어찌하여 선한 일을 내게 묻느냐 선한 이는 오직 한 분이시니라 네가 생명에 들어 가려면 계명들을 지키라 18 이르되 어느 계명이오니이까 예수께서 이르시되 살인하지 말라, 간음하지 말라, 도둑질하지 말라, 거짓 증언 하지 말라, 19 네 부모를 공경하라,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하신 것이니라 20 그 청년이 이르되 이 모든 것을 내가 지키었사온대 아직도 무엇이 부족하니이까 21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가 온전하고자 할진대 가서 네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따르라 하시니 22 그 청년이 재물이 많으므로 이 말씀을 듣고 근심하며 가니라.

 

답: 우상을 버리고 참 하나님께 돌아와 섬기라는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우리 모두에게 우리가 가진 것을 다 팔아 그 돈을 가난한 사람에게 주라고 말씀하지 않으신다. 그러나 이 젊은이에게 돈은 우상이었다. 비록 예수님의 말씀이 가혹하게 들릴 수도 있지만, 예수님께서는 그렇게 하는 것이 그 청년의 구원을 위한 유일한 희망이라는 것을 알고 계셨다. 

성경은 그가 재물이 많은 고로 예수님의 말씀으로 인하여 슬픈 기색을 띠고 떠났다고 이야기한다. 이는 그가 돈을 얼마나 숭배하고 있었는지를 보여준다. 예수님께서는 그에게 영생과 예수님의 가까운 제자가 될 수 있는 기회를 허락하셨다. “와서 나를 따르라”(마 19:21)는 말은 예수님께서 열두 제자를 부르실 때 하셨던 말씀과 같은 것이었다. 하지만 우리는 성경에서 이 청년에 관해 다시 듣지 못한다. 그는 영원 대신 재물을 선택했다.

이 얼마나 어리석은 선택인가? “만족 지연”(지난 주 교과를 확인해 보라)을 따르지 않은 얼마나 슬픈 예인가? 이 청년과 같은 선택을 하는 것은 매우 어리석은 일이다. 왜냐하면, 물질적 풍요가 지금 우리에게 무엇을 주건, 우리 모두는 머지않아 죽음을 맞이할 것이고, 그때에는 결국 각 사람에게 주어질 영원이라는 시간을 마주하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많은 부자들은 재물이 그들이 그토록 바라던 평안과 행복을 가져다 주지 못함을 깨달았다. 그보다는 오히려 반대인 경우가 더 많았다. 많은 부자들이 얼마나 불행한 삶을 살았는지에 대해 기록한 수많은 자서전이 있다. 지금까지 기록된 모든 책 중에 재물의 헛됨에 대해 가장 잘 설명하고 있는 책이 바로 전도서이다. 각 사람이 그 책에서 어떤 교훈을 얻든지 간에 한 가지 만큼은 확실하다. 돈으로는 결코 평안과 행복을 살 수 없다는 것이다.

 

 

<묵상> 젊은 부자는 영생의 기회보다 재물을 선택하였습니다. 같은 실수를 하지 않고 사라질 재물보다 영생의 기회를 잡기 위해서 그대에게 어떤 변화가 필요할지 묵상해 보십시오.

 

답: 인생관 자체를 바꾸어야 한다. 

 

<부가설명> 사람들은 자신이 언제 죽을는지 모르는 것을 전혀 의식하지 않고 호흡하고 활동한다. 난치병이나 불치병이 들어야 언제 죽을지 모른다는 생각을 하는 것 같다. 그러면서도 죽을 준비 대신에 병을 고쳐서 더 살 궁리에 여념이 없는 것이 오늘날 사람들의 모습이다. 이 부자 청년도 그렇다. 그래도 그는 영생에 관심이 있었다. 그래서 예수님께 가면 영생의 도리를 배울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까?’라고 물었다. 이 말 전에 ‘선한 선생님’라고 불렀다. 그때 예수님은 ‘선한 이는 오직 한 분이시니라’라고 대답하셨다. 이 청년이 예수님을 진실로 선한 선생으로 알았다면 예수님의 이 대답이 무슨 말인지 깨달았을 것이다. 예수님 자신이 선한 이 곧 하나님이라는 것을 암시하신 것이다. 그러니 재물 가난한 자들에게 구제하고 예수님을 따르면 생명을 얻는다고 하신 것이다. 우리는 예외 없이 언제 죽을는지 모르는 사망의 존재들이다. 그러므로 영생을 얻은 기회가 있을 동안 기회를 올바르게 사용해야 할 것이다. 그것이 바로 오늘 지금이다. 

 

<교훈> 자신이 가진 재물을 너무나 사랑했던 젊은 부자 관원은 예수님께서 허락하신 영생의 기회를 거절하고 잠시 있다 사라질 재물을 선택했다. 

 

2월 15일(수) 삭개오

 

삭개오는 미움의 대상인 로마인을 위해서 세리로 일하며 큰돈을 번 부유한 유대인이었다. 그런 이유로, 또 세리들이 실제로 받아야 하는 세금보다 더 많은 세금을 부과했기 때문에 삭개오는 미움을 받았으며 “죄인”이라 불렸다. 

삭개오는 무역을 위해 많은 상인들이 오가는 길 위에 있던 여리고라는 마을에 살았다. 삭개오와 예수님의 만남은 결코 우연이 아니었다. 삭개오는 영적 확신을 경험하였고 자신의 삶에 변화를 이루고자 했다. 그는 예수님에 관해 들었으며 그분을 만나고 싶었다. 예수님과 그분의 일행이 그날 여리고에 도착할 것이라는 소문이 퍼졌다. 예수님께서는 갈릴리에서 출발하여 예루살렘으로 향하는 마지막 여정 가운데 여리고를 지나셔야 했다. 예수님께서 삭개오에게 하신 첫 마디는 예수님께서 그 마을에 도착하시기 전부터 그에 대해 알고 계셨음을 보여주었다.

 

누가복음 19:1~10을 읽어보라. 예수님을 만난 부자 삭개오와 젊은 부자 법관의 차이점은 무엇이었는가?      

[눅19:1~10]

 

답: 삭개오는 예수님이 말씀하시기 전에 재물이라는 우상을 버렸다. 부자 청년은 재물을 선택하고 예수님을 떠났다. 그들의 선택의 차이다. 

 

삭개오와 젊은 부자 법관 사이에는 공통점이 있었다. 두 사람 모두 부자였고, 예수님을 만나고자 했으며, 영생을 얻기 원했다. 그러나 두 사람 사이의 공통점은 여기까지였다.

삭개오가 가난한 자들에게 “소유의 절반”(눅 19:8)을 주겠다고 했을 때, 예수님께서 그것을 참된 회심의 표시로 받아주셨음을 주목해 보라. 예수님께서는 그에게 ‘삭개오야, 미안하지만 젊은 부자 법관과 마찬가지로 네가 가진 것을 전부 다 주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아무것도 아니다. 절반은 충분치 않다’라고 말씀하지 않으셨다. 왜 그러셨을까? 삭개오는 그가 가진 재물을 소중히 여기기는 했지만 젊은 부자 법관과 달리 재물이 삭개오에게 우상이 되지는 않았던 것 같다. 

 예수님께서 삭개오에게 무엇이라고 말씀하셨는지 모르지만, 가난한 자들에게 돈을 주겠다고 먼저 이야기한 것은 삭개오였다. 이와는 반대로 젊은 부자 법관의 경우 예수님께서 먼저 모든 것을 다 나누어 주라고 구체적으로 말씀해 주셔야 했다. 그렇지 않으면 그 재물이 그를 망쳐버릴 것이었다. 다른 부자들과 마찬가지로 삭개오 역시 재물에 대해 조심할 필요가 있었지만, 삭개오는 자기 자신과 재물과의 관계를 올바르게 정립하고 있었다.

 

<묵상> 부자 법관에게 내 소유의 전부를 팔라고 하셨지만 예수님께서 실제로 원하셨던 것은 어떤 것이었을까요?(눅 19:8)

[눅19:8] 삭개오가 서서 주께 여짜오되 주여 보시옵소서 내 소유의 절반을 가난한 자들에게 주겠사오며 만일 누구의 것을 속여 빼앗은 일이 있으면 네 갑절이나 갚겠나이다.

 

답: 예수님을 따르는 것이다. 

 

<부가설명> 삭개오와 같은 결정 하기가 쉽지 않다. 삭개오는 평소에 자기 삶에 회의를 느끼지 않았을까? 부자 청년도 회의를 느끼기는 했을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을 찾아 그것을 해결하고자 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세상 재물에 연결된 끈이 너무나 견고했던 것 같다. 그것도 소유하고 영생도 하려는 욕망이 있었는데, 영생을 위하여 재물을 포기하기 보다는 확실하지도 않은 영생을 포기한 것이다. 영생을 소망했으나 영생이 있다는 확신이 없었던 모양이다. 예수님이 죽은 자를 살리신 사실을 바르게 알았다면 부활의 소망을 확실히 깨달았을 것인데. 삭개오는 예수님이 십자가를 위하여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는 길에 만났다. 그는 영생에 관한 이야기를 하지 않았다. 자기 인생에 관하여 전기(轉機)를 마련하고 싶었던 모양이다. 그것을 예수님을 만남으로 이루려는 생각으로 그분을 만나려는 열망이 있었던 것 같다. 그래서 영생은 차치하고라도 자기 인생을 올바르게 살아야 하겠다는 각오로 체면 다 버리고 나무에 올라가 예수님 보기를 열망했다. 예수님은 그런 삭개오를 이미 아셨다. 그래서 일부러 뽕나무 아래로 지나시면서 그를 쳐다보시고 그의 이름을 부르셨다. 그가 예수님을 만난 그것으로 이미 마음이 뜨거워지고 자기 인생을 바꾸게 되었다. 그의 인생이 그의 재물보다 훨씬 중요한 것이었다. 예수님이 재물에 관하여 일언반구도 하시기 전에 그는 이미 재물 우상을 버렸다. 그날 그에게 구원이 임했다. 아니 그가 예수님을 만났을 때 이미 구원이 임했던 것 같다. 우리도 삭개오 같은 믿음을 가지면 얼마나 좋을까?

 

<교훈>

삭개오는 젊은 부자 법관과는 달리 자신의 재물을 숭배하고 있지 않았고 그렇기 때문에 자신의 회심의 증거로 자기 재산의 절반을 가난한 자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2월 16일(목) 욥을 생각하라

 

욥기 1:8을 읽어보라. 하나님께서 욥을 어떻게 설명하셨는가?

[욥1:8] 여호와께서 사탄에게 이르시되 네가 내 종 욥을 주의하여 보았느냐 그와 같이 온전하고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자는 세상에 없느니라.

 

답: ‘그와 같이 온전하고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자는 세상에 없느니라.’

 

하나님께서 친히 “온전”하고 “정직”하다고 말씀하실 정도로 욥은 당시 지구상의 그 누구와도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완벽한 사람이었다. 그렇다, 하나님께서 친히 욥에 대해 이렇게 말씀하셨다.

욥이 계속해서 이어지는 재난을 경험한 후에도, 하나님께서는 처음 욥에 대해 하신 말씀은, 곧 지구상에 그와 같이 완벽하고 정직한 사람이 없다는 말씀을 반복하셨을 뿐만 아니라 한 마디를 추가하셨다. “네가 나를 충동하여 까닭 없이 그를 치게 하였어도”(욥 2:3) 욥은 여전히 변함이 없었다.

우리는 그에게 일어난 예상치 못한 재난과 아내의 비난에도 불구하고 하나님 버리기를 거부한 욥의 모습을 통해 그의 온전함과 정직함을 확인할 수 있다. 하지만 욥기는 이 책의 이야기가 펼쳐지기 전에 있었던 욥의 삶에 대한 또 다른 중요한 사실을 보여준다. 

      

욥기 29:12~16을 읽어보라. 이곳에 우리에게 욥의 성품의 비밀을 알게 해주는 어떤 모습이 묘사되어 있는가?

[욥29:12~16] 이는 부르짖는 빈민과 도와 줄 자 없는 고아를 내가 건졌음이라 13 망하게 된 자도 나를 위하여 복을 빌었으며 과부의 마음이 나로 말미암아 기뻐 노래하였느니라 14 내가 의를 옷으로 삼아 입었으며 나의 정의는 겉옷과 모자 같았느니라 15 나는 맹인의 눈도 되고 다리 저는 사람의 발도 되고 16 빈궁한 자의 아버지도 되며 내가 모르는 사람의 송사를 돌보아 주었으며,

 

답: 맹인의 눈이 되고, 저는 자의 발이 되고 빈국한 자의 아버지가 되었고 모르는 사람의 송사도 돌보아 주었다.

 

여기에서 가장 인상적인 부분은 “내가 모르는 사람의 송사를 돌보아 주었으며”(욥 29:16)라는 말씀이다. 다시 말해 욥은 남루한 차림의 거지가 그에게 다가와서 도움을 요청할 때까지 기다리지 않았다는 것이다. 욥은 적극적으로 도움이 필요한 자들을 찾아 나섰으며 그들의 필요를 채워 주었다.

엘렌 G. 화잇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그들이 그들의 필요에 대하여 그대의 주의를 환기시키기까지 기다리지 말라. 욥처럼 행동하라. 알지 못했던 것을 그는 찾아내었다. 사정을 알아보기 위한 여행을 통해 필요한 것을 알아내고, 그것을 가장 잘 충족시켜 줄 수 있는 길을 연구하라”(교회증언 5권, 151). 

 욥의 행동은 오늘날 하나님의 백성이라 말하는 사람들의 태도를 뛰어넘는다. 하나님의 자원을 관리하는 신실한 청지기는 재정을 이렇게 관리할 것이다. 

 

<묵상> 타인에게 친절을 베푸는 것조차 쉽지 않은 현대 사회 속에서 우리는 어떻게 욥이 보여준 모본을 따라갈 수 있을까요?

 

답: 가까이 있는 도움이 필요한 사람을 찾아 도우는 것으로 본을 따를 수 있을 것이다. 

 

<부가설명> 어떻게 생각하면 욥은 충분히 도울 수 있는 재물과 세력이 있었던 것을 알 수 있다. 흔히 하는 말로 도우는 것은 반드시 재물이 있기 때문은 아니다. 한달에 70만원 버는 짜장면 배달원 김우수 씨는 그 돈으로 고아를 돌보고 고아 기금도 넣고 그렇게 살았다. 독신으로 몬 하나 누우면 꽉차는 쪽방에서 살았다. 그러다가 택배 배달 나가서 차에 치어 사망했는데 장례식에 이명박 대통령이 참가해서 애도했다. 이런 사람도 있다. 세상에서 볼 때 이런 사람이 의인이다. 재림신도들은 이런 사람은 거의 없다. 이런 글을 쓰는 나부터 그렇지 않다. 그런데 김우수 씨처럼 살지 못한다. 이런 글을 읽으면 하나님께 황송하다. 기회가 있을 때마다 가난하고 힘없는 자들을 도우도록 삶의 계획을 짜고 삭개오 같은 정신으로 주님이 하신 그 일을 이어갈 수 있도록 성령께서 능력으로 일해주시기를 기도한다.

 

<교훈>

하나님으로부터 최고의 찬사를 받았던 욥은 사탄의 시험이 있기 전부터 적극적으로 도움이 필요한 자들을 찾아내고 그들의 필요를 채워주던 의로운 사람이었다. 

 

2월 17일(금) 더 깊은 연구를 위해

 

“‘인자가 자기 영광으로 모든 천사와 함께 올 때에 자기 영광의 보좌에 앉으리니 모든 민족을 그 앞에 모으고 각각 분별하’리라. 이와 같이 그리스도께서는 감람산 위에서 제자들에게 큰 심판의 날의 광경을 묘사하셨다. 그리고 그리스도께서는 그 판결이 한 가지 점에 의하여 결정되는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민족들이 그리스도 앞에 모일 때에 두 부류로만 나누어질 것이며 그들의 영원한 운명은 그리스도를 위하여 가난하고 고통받는 자들을 도와주었느냐 또는 도와주지 않았느냐에 따라 결정될 것이다”(시대의 소망, 637).

 

“그대가 그리스도께 속한 가난하고 고통받는 사람들에게 그대의 문을 열 때에 그대는 눈에 보이지 않는 천사들을 영접하는 것이다. 그대는 하늘 존재들의 동행을 청한다. 그들은 기쁨과 평화의 거룩한 분위기를 가져온다. 그들은 저희 입술에 찬양의 노래를 가지고 오며 화답하는 노래가 하늘에서 들린다. 자비스러운 모든 행동은 거기서 음악이 된다. 보좌에 앉으신 아버지께서는 이기심이 없는 일꾼들을 당신의 가장 귀중한 보물들 가운데 계수하신다”(시대의 소망, 639).

 

핵심적인 토의를 위해

1. “땅에는 언제든지 가난한 자가 그치지 아니하겠으므로”(신 15:11). 불행히도 이 말씀은 수천 년 전부터 계속 성취되어 왔다. 우리는 오늘날 이 말씀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어떤 사람들을 이 말씀을 이용하여 가난한 자들을 돕지 않는 것을 정당화 하려 한다. “하나님께서 가난한 자들은 항상 있을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그러므로 우리 주변에 가난한 자들이 있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이렇게 생각하는 것의 심각한 오류는 무엇인가?

※ 가난한 자들을 하나님의 이름으로 돌봐서 성도들이 하나님의 대리자로 일하는 은혜를 베푸신 것이고 예수께서 하시는 일을 하도록 한 것이다. 그런데 그들을 돌보지 않는 것은 이기심의 발로일 뿐이다. 

 

2. 디모데전서 6:17~19을 읽어보라. “네가 이 세대에서 부한 자들을 명하여 마음을 높이지 말고 정함이 없는 재물에 소망을 두지 말고 오직 우리에게 모든 것을 후히 주사 누리게 하시는 하나님께 두며 선을 행하고 선한 사업을 많이 하고 나누어 주기를 좋아하며 너그러운 자가 되게 하라 이것이 장래에 자기를 위하여 좋은 터를 쌓아 참된 생명을 취하는 것이니라.” 여기에 언급된 위험에 주의를 기울여 보라. 돈을 많이 가진 사람들일수록 돈이 영생을 가져다주지 못할 것을 알면서도 하나님보다 자신의 재물을 더 의지하기가 쉬운 이유는 무엇인가? 살아 계신 하나님 외에 그 어떤 것도 신뢰하지 않기 위해 조심해야 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 세상에서는 현실적으로 돈이 모든 것을 해결하는 힘이 있고, 또 안락하게 살게 하기 때문이 아닐까? 여기에 빠지면 보이지 않는 내세가 아주 사라져버리기 쉽다. 돈이 해결할 수 있는 것을 하나님께서 직접 해결해 주는 경험을 하지 못하고 그렇게 기대하다가 낭패를 당하면 불신이 더욱 힘을 얻는다.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


대총회 북아태지회 한국연합회 성경통신학교
제칠일안식일예수재림교 한국연합회 선교부 | 고유번호증번호: 204-82-62040 | 대표자: 강순기 | 부서장: 신광철
Copyright © 2014 안식일학교·선교부 All rights reserved.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