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1과 마지막 때의 속임수(질문, 대답, 설명) 12/1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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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김명호 작성일22-12-04 13:30 조회5,856회 댓글0건본문
제11과 마지막 때의 속임수
(12월 10일 안식일 / 일몰: 오후 5시 14분)
연구 범위: 마 7:21~27, 요 11:40~44, 벧전 3:18, 삼상 28:3~25, 엡 6:10~18.
기억절: “이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니라 사탄도 자기를 광명의 천사로 가장하나니 그러므로 사탄의 일꾼들도 자기를 의의 일꾼으로 가장하는 것이 또한 대단한 일이 아니니라 그들의 마지막은 그 행위대로 되리라”(고후 11:14, 15).
오늘날 우리가 사는 세상은 할리우드(Hollywood) 영화의 영향으로 인한 초자연적인 현상과 신비주의에 대한 믿음으로 가득하다. 할리우드는 온갖 오류와 속임수로 가득한 신비주의적 영화를 만드는데 아무런 거리낌이 없다. “결코 죽지 아니하리라”(창 3:4)라는 오래된 거짓말은 지난 수십 년 동안 무수한 베스트셀러 책과 비디오 게임에 영향을 주었다. 우리 모두는 분명 사탄의 미혹이 온갖 형태로, 심지어 과학이라는 이름으로 꼬리에 꼬리를 물고 등장하고 끊임없이 유혹하는 세상에 살고 있다.
가장 기만적인 현상들 중 하나는 “죽었던” 사람이 사후 세계의 이야기와 함께 다시 살아나는 “임사체험”(NDE, Near Death Experience)이라고 불리는 것으로, 많은 사람들은 이런 경험이 영혼 불멸을 확인해주는 증거라고 생각해 왔다.
이번 주에 우리는 신비주의, 임사체험, 환생, 주술, 조상 숭배 등 종말에 더욱 기승을 부리게 될 속임수들을 살펴볼 것이다. 이런 것들은 우리가 알아야 할 주제이긴 하지만 그 영향력에 속지 않도록 주의해야 할 것들이다.
*학습 목표
- 깨닫기
초자연적 현상과 신비주의적 가르침들의 오류와 문제점들을 성경적으로 이해한다.
- 느끼기
갈수록 진화하는 사탄의 기만에 대항하는 유일한 방법은 하나님의 말씀 위에 굳게 서는 것임을 깊이 인식한다.
- 행하기
세상에서 보고 듣게 되는 모든 것들을 말씀의 렌즈로 보며 하나님의 뜻에 따라 살아간다.
2. 무엇을 믿느냐도 중요하지만 어떻게 믿느냐도 중요한 이유는 무엇일까요?(마 7:21~27)
※ 성경이 가르치는 대로 바르게 믿지 않으면 다른 예수 다른 복음을 믿게 된다.
3. 임사체험이란 무엇이며 그 주장이 잘못된 이유는 무엇입니까?(왕상 17:22~24, 막 5:41~43, 요 11:40~44)
※ 죽음 가까이 간 경험인데 그것은 아직 죽지 않은 않았을 때 나타나는 현상이고 그 경험은 성경과 전혀 다른 것으로 완전히 죽지 않은 상태에서 나타나는 뇌 작용이다.
4. 그리스도인으로서 환생에 관한 이론을 받아들일 수 없는 이유는 무엇입니까?(히 9:25~28, 벧 3:18)
※ 성경은 영혼불멸을 절대로 가르치지 않고 인정하지도 않는다.
5. 사울이 엔돌의 신접한 여인을 찾아간 이야기에서 우리가 배워야 할 중요한 교훈은 무엇입니까?(삼상 28:3~25)
※ 사탄은 죽은 자의 영혼이 나타나는 것처럼 속일 수 있다는 사실이다.
6. 사탄의 속임수를 물리칠 수 있도록 우리에게 허락된 약속은 무엇입니까?(엡 6:10~18)
※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입도록 예비하신 것이다.
결론
오늘날 우리는 사탄이 만들어 낸 온갖 오류와 비성서적 가르침이 가득한 세상에 살고 있습니다. 이러한 때, 하나님의 말씀 위에 굳건히 서 있지 않는다면 택하신 자들이라 할지라도 세상의 조류에 휩쓸려 갈 수 있습니다. 깨어 기도하며 말씀 위에 터를 굳건히 세움으로 갈수록 진화하는 사탄의 강력한 유혹을 물리쳐야 합니다.
12월 4일(일) 신비주의
신비주의의 거센 파도가 세상을 휘몰아치고 있다. “신비주의”라는 단어에는 매우 다양한 개념들이 들어 있다. 종교적 관점에서 말하는 신비주의는 신이나 절대자와 결합하는 영적 경험이나 자신을 완전히 잊은 상태를 의미하는데, 일부 교회에서는 이런 모습이 그들의 예배의 고유한 모습이기까지 하다. 신비주의 현상이 드러나는 형태와 정도는 서로 다를 수 있지만, 하나님의 말씀의 권위를 개인의 주관적 경험으로 대체하는 경향이 가장 두드러진 특징이다. 이런 현상은 결국 성경을 통해 원칙을 확인하기보다는, 기독교인이라고 주장하면서도 각자의 경험에 의존하게 하는데, 각 사람의 주관적인 경험과 판단에 의지하는 종교는 기만, 특히 마지막 때의 기만에 대한 안전 장치가 되지 못한다.
마태복음 7:21~27을 읽어 보라.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에 비추어 볼 때, “바위 위에” 또는 “모래 위에” 집을 짓는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마7:21~27]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22 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 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 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하지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 23 그 때에 내가 그들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 24 그러므로 누구든지 나의 이 말을 듣고 행하는 자는 그 집을 반석 위에 지은 지혜로운 사람 같으리니 25 비가 내리고 창수가 나고 바람이 불어 그 집에 부딪치되 무너지지 아니하나니 이는 주추를 반석 위에 놓은 까닭이요 26 나의 이 말을 듣고 행하지 아니하는 자는 그 집을 모래 위에 지은 어리석은 사람 같으리니 27 비가 내리고 창수가 나고 바람이 불어 그 집에 부딪치매 무너져 그 무너짐이 심하니라.
답: 예수님의 말씀대로 준행하는 신앙과, 인간의 해석과 경험을 따르는 신앙이다.
포스트모던 기독교 세계에는 성경적 교리를 고리타분한 종교적 형식으로 취급하며 그 적절성을 경시하는 뚜렷한 경향이 있다. 이로 인해 그리스도의 가르침들은 개인이 자의적으로 해석한 그리스도에 대한 이해로 대체된다. 예컨대, 성경에 기록된 어떤 이야기들은 사실일 수 없다고 주장하면서, 그 이유로 그들이 이해하고 있는 예수님은 절대 그렇게 했을 리가 없다고 이야기하는 것이다. 결국 개인적인 감정과 취향이 성경을 해석하는 기준이 되거나 심지어 성경이 분명하게 가르치는 것을 노골적으로 거부하는 근거가 되기도 한다.
예수님을 믿기만 하면 어떤 교리를 믿는지는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하는 것은 매우 위험한 일이다. 수많은 개신교 신자들에게 사형을 선고했던 로마의 재판관들도 예수님을 믿었다.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냈던 사람들도(마 7:22) 예수님을 믿었다.
“사람이 어떻게 믿든지 그것이 별반 중요한 문제가 아니라는 태도는 사탄의 가장 성공적인 기만 중 하나이다. 사탄은, 사랑으로 받아들이게 되면 진리가 그것을 받아들인 자의 심령을 성결하게 해 준다는 것을 안다. 그러므로 그는 거짓 교리, 지어낸 말, 다른 복음 등으로 대치하려고 끊임없이 노력한다”(각 시대의 대쟁투, 520).
<묵상>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게 하는 인간적인 감정과 욕망에 대항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답: 철저히 말씀에 굳게 서서 준행하는 믿음을 가져야 한다.
<부가설명> 역사적으로 사탄의 속임수 기초는 ‘결코 죽지 않는다.’라는 태초의 주장이다. 사탄의 모든 속임수는 이 주장에서 파생한다. 영원 지옥설이 그렇고, 윤회나 환생 이야기가 다 이 주장에서 파생한 것이다. ‘결코 죽지 아니하리라’라는 주장은 태초에 여자에게 이야기하는 것으로 끝난 것이 아니다. 그 첫 주장이 얼마나 교묘했는지 새삼 놀라지 않을 수 없다. 역사적으로 교회 안에 이어온 신비주의 고행주의 모두 이 기초로 주장되었다. 마지막 때 두 가지 큰 기만이 강신술과 일요신성설이다(대쟁투 588). 사탄이 세상끝날까지 미래를 내다보는 예지가 있었다고 생각하지 않지만, 태초 순수한 상태에서 사람이 이 주장에 속는 것을 보고 속은 사람의 후예들은 아무런 문제 없이 이 주장에 속을 것이라고 짐작했을 것이다. 그것이 오늘날은 가상현실을 보여주는 기계를 통하여 오늘날 유년들과 청소년들을 사로잡고 있다. 그것이 상업적 가치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된 기업들이 다투어 만들어 세상을 흔든다. 대규모로 메타버스라는 것을 선전하고 단체들은 그것을 잘 사용한다. 교회가 소위 전도를 위하여 그것을 사용하려고 한다. 재림교회도 그것을 도입한다고 했다. 글쎄? 그것이 과학기술이라는 이름으로 강신술을 교회 안으로 끌어들이는 매체가 되지 않아야 할 것이다. 기계문명을 전도에 사용한다는 명목으로 의도와는 다르게 강신술을 교회로 끌어들이지 않아야 할 것이다. 성경은 ‘전도는 미련한 것’이라고 했다. “하나님의 지혜에 있어서는 이 세상이 자기 지혜로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고로 하나님께서 전도의 미련한 것으로 믿는 자들을 구원하시기를 기뻐하셨도다”(고전1:21)라는 말씀을 깊이 생각할 때가 아닐까하는 생각이 든다.
<교훈>
예수님을 믿기만 하면 어떤 교리를 믿는지는 중요하지 않다고 주장하며 성경의 권위보다 자신의 영적 경험을 더 중요시하는 것은 매우 위험한 일이다.
12월 5일(월) 임사체험(臨死體驗)
영혼 불멸을 증명하고자 할 때 가장 인기 있는 현대적 주장은 “임사체험”(Near Death Experience)이다. 레이먼드 A. 무디 주니어(Raymond A. Moody Jr.)는 ‘삶 이후의 삶: 육체적 죽음으로부터의 생존 현상에 대한 조사’라는 책을 통해 의학적 사망 선고 이후 살아난 사람 100명 이상을 대상으로 5년간 실행하여 연구한 결과를 발표했다. 책에 소개된 사람들은 다시 살아나기 전에 사랑스럽고 따뜻한 빛의 존재를 보았다고 주장했다. 이것은 “죽음 이후에도 인간의 영이 생존한다는 흥미로운 증거”로 여겨져 왔다. 무디 이후에도 비슷한 책들이 여럿 출판되었다.
열왕기상 17:22~24, 열왕기하 4:34~37, 마가복음 5:41~43, 누가복음 7:14~17, 그리고 요한복음 11:40~44에 기록된 부활의 이야기들을 읽어보라. 여기 등장하는 사람들이 죽었을 때 의식이 있었다고 이야기하는가? 이 질문의 답이 중요한 이유는 무엇인가?
[왕상17:22~24] 여호와께서 엘리야의 소리를 들으시므로 그 아이의 혼이 몸으로 돌아오고 살아난지라 23 엘리야가 그 아이를 안고 다락에서 방으로 내려가서 그의 어머니에게 주며 이르되 보라 네 아들이 살아났느니라 24 여인이 엘리야에게 이르되 내가 이제야 당신은 하나님의 사람이시요 당신의 입에 있는 여호와의 말씀이 진실한 줄 아노라 하니라.
[왕하4:34~37] 아이 위에 올라 엎드려 자기 입을 그의 입에, 자기 눈을 그의 눈에, 자기 손을 그의 손에 대고 그의 몸에 엎드리니 아이의 살이 차차 따뜻하더라 35 엘리사가 내려서 집 안에서 한 번 이리 저리 다니고 다시 아이 위에 올라 엎드리니 아이가 일곱 번 재채기 하고 눈을 뜨는지라 36 엘리사가 게하시를 불러 저 수넴 여인을 불러오라 하니 곧 부르매 여인이 들어가니 엘리사가 이르되 네 아들을 데리고 가라 하니라 37 여인이 들어가서 엘리사의 발 앞에서 땅에 엎드려 절하고 아들을 안고 나가니라.
[막5:41~43] 그 아이의 손을 잡고 이르시되 달리다굼 하시니 번역하면 곧 내가 네게 말하노니 소녀야 일어나라 하심이라 42 소녀가 곧 일어나서 걸으니 나이가 열두 살이라 사람들이 곧 크게 놀라고 놀라거늘 43 예수께서 이 일을 아무도 알지 못하게 하라고 그들을 많이 경계하시고 이에 소녀에게 먹을 것을 주라 하시니라.
[눅7:14~17] 가까이 가서 그 관에 손을 대시니 멘 자들이 서는지라 예수께서 이르시되 청년아 내가 네게 말하노니 일어나라 하시매 15 죽었던 자가 일어나 앉고 말도 하거늘 예수께서 그를 어머니에게 주시니 16 모든 사람이 두려워하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 이르되 큰 선지자가 우리 가운데 일어나셨다 하고 또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돌보셨다 하더라 17 예수께 대한 이 소문이 온 유대와 사방에 두루 퍼지니라.
[요11:40~44]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 말이 네가 믿으면 하나님의 영광을 보리라 하지 아니하였느냐 하시니 41 돌을 옮겨 놓으니 예수께서 눈을 들어 우러러 보시고 이르시되 아버지여 내 말을 들으신 것을 감사하나이다 42 항상 내 말을 들으시는 줄을 내가 알았나이다 그러나 이 말씀 하옵는 것은 둘러선 무리를 위함이니 곧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그들로 믿게 하려 함이니이다 43 이 말씀을 하시고 큰 소리로 나사로야 나오라 부르시니 44 죽은 자가 수족을 베로 동인 채로 나오는데 그 얼굴은 수건에 싸였더라 예수께서 이르시되 풀어 놓아 다니게 하라 하시니라.
답: 성경에서 죽었다가 살아난 사람들의 사건에서 아무도 그들이 다시 살아나기 전의 상태에 관하여 말한 것이 없다. 그것은 죽은 자는 아무것도 모른다는 성경말씀의 진실성을 증명하는 것이다.
현대에 보고된 모든 임사 체험은 임상적으로 죽은 것으로 여겨지지만 실제로 죽은 것은 아닌 사람들에 대한 것으로, 죽은 지 나흘이 지나 시체가 부패하기 시작했던 나사로의 경우와는 사뭇 다르다(요 11:39). 나사로를 포함해 성경에 기록된 죽었다가 살아난 사람들 중 어느 누구도 천국, 연옥, 지옥 같은 사후 경험에 대해 전혀 말하지 않았다. 논쟁에 대해 침묵한 것이긴 하지만, 죽은 사람이 무의식 상태라는 성경의 가르침과 완전히 일치하는 답이기도 하다.
하지만 오늘날 흔히 언급되는 임사 체험은 어떻게 설명해야 하는가? 만일 우리가 죽은 자의 무의식 상태에 대한 성경의 가르침을 받아들인다면(욥 3:11~13, 시 115:17, 시 146:4, 전 9:10), 그런 경험은 극단적인 조건에서 일어난 자연적인 정신 화학적 환각, 혹은 사탄이 배후에 있는 초자연적인 속임수 중 하나로(고후 11:14) 해석할 수 있을 것이다.
특히 그런 경험을 한 사람들이 죽은 친척들과 이야기했다고 주장하는 것을 보면, 사탄의 속임수가 작용한 것이 분명하다.
이런 속임수가 널리 퍼지고 많은 사람들을 미혹한다 할지라도, 설령 우리 자신이나 가까운 사람들이 성경이 가르치는 것과 배치되는 어떤 경험을 하더라도, 하나님 말씀의 가르침을 확고히 고수해야 할 것이다.
<묵상>
임사 체험이 종종 “과학”이라는 이름표를 달고 등장한다는 사실은 과학적으로 증명되었다는 일들에 대해 우리가 얼마나 조심스럽게 바라봐야 하는지에 대해 어떤 깨달음을 주나요?
답: 소위 과학적이라는 사건이 전혀 과학이 아닐 수 있다는 것을 깨닫게 한다.
<부가설명> 뇌 작용에 관하여 의학이나 화학이나 생물학이 100% 다 알아낸 것이 아니다. 임사체험은 사람의 생명력이 완전히 없어진 상태에서 일어나는 체험일 수 없다. 그들의 몸이 부패하기 시작할 즈음에 그런 현상이 일어난 일은 보고된 일이 없다. 또 이 용어 자체도 사람이 죽었다는 것을 표현하고 있지 않다. ‘임사(臨死)’라는 말은 ‘사후(死後)’라는 말이 아니다. 이것은 말 그대로 ‘죽음에 가까이 이른’이라는 말이다. 아직 죽지 않았다는 것을 단어 자체가 나타내고 있다. 그가 참으로 죽으면 소생해서 그런 체험을 했다는 보고를 스스로 할 수 없다. 임사체험하는 사람들은 아직 죽지 않은 상태에서 뇌작용을 경험하는 것이다. 그것이 과학이라는 탈을 쓰고 사후 체험인 것처럼 사람을 속인다. 결코 사후 체험이 아니다. 정말 죽으면 예수님이 살리기 전에는 살아날 수 없다. 나사로가 죽어서 그 영혼이 천국에 가서 행복을 누렸다면 그를 다시 살리는 것은 그에게 형벌을 주는 것과 무엇이 다르겠는가? 그가 살아나서 불만이 얼마나 많았겠는가? 그러나 기록을 보면 그가 다시 살아난 것이 즐거웠던 것으로 보인다. 많은 사람들이 그를 보러 왔고 그가 부활한 사실만으로도 전도가 되었다(요12:9~11). 성경과 일치하지 않는 것은 어느 것도 받아들이지 않는 것이 성경적 신앙이다.
<교훈>
사탄은 마지막 때에 사람들을 속이기 위해 과학의 이름으로 우리의 정신을 현혹하지만 변함없는 성경의 진리를 확실히 붙든다면 흔들리지 않을 수 있다.
12월 6일(화) 환생
몇몇 주요 세계 종교들에서 말하는 바 영혼이 인간이나 다른 생명체로 환생한다는 비성경적 이론은 불멸의 영혼에 대한 이교적 개념에 기초를 두고 있다. 대부분의 기독교인들은 죽은 후 영원한 천국이나 지옥에서 사는 불멸의 영혼의 존재를 믿고 있다. 한편, 환생을 믿는 다른 종교에서는 사람이 땅에서 죽음과 재탄생의 많은 순환을 겪는다고 주장한다.
어떤 사람들은 환생은 영혼이 완벽을 향한 여정에서 훨씬 더 높은 수준의 지식과 도덕을 얻을 수 있도록 하는 영적 진화의 과정이라고 생각한다. 힌두교도들은 영원한 영혼이 6가지 생명의 종류, 즉 수중 생물, 식물, 파충류와 곤충, 새, 동물, 그리고 하늘에 사는 존재를 포함한 인간을 거치는 윤회(輪迴)를 경험한다고 믿는다.
히브리서 9:25~28과 베드로전서 3:18을 읽어보라. 만일 예수님께서 “한 번” 죽으셨고(히 9:28, 벧전 3:18), 마찬가지로 모든 인간도 “한 번”(히 9:27) 죽는다면, 왜 어떤 사람들은 기독교인이라고 주장하면서도 어떤 형태로든 환생을 믿는 것인가?
[히9:25~28] 대제사장이 해마다 다른 것의 피로써 성소에 들어가는 것 같이 자주 자기를 드리려고 아니하실지니 26 그리하면 그가 세상을 창조한 때부터 자주 고난을 받았어야 할 것이로되 이제 자기를 단번에 제물로 드려 죄를 없이 하시려고 세상 끝에 나타나셨느니라 27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해진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 28 이와 같이 그리스도도 많은 사람의 죄를 담당하시려고 단번에 드리신 바 되셨고 구원에 이르게 하기 위하여 죄와 상관 없이 자기를 바라는 자들에게 두 번째 나타나시리라.
[벧전3:18] 그리스도께서도 단번에 죄를 위하여 죽으사 의인으로서 불의한 자를 대신하셨으니 이는 우리를 하나님 앞으로 인도하려 하심이라 육체로는 죽임을 당하시고 영으로는 살리심을 받으셨으니,
답: 성경을 올바르게 깨닫지 못하고 잘못 배운 것을 믿기 때문이다.
많은 사람들은 믿어야 할 것이 아니라, 믿고 싶은 것을 믿는다. 어떤 이론이 살아가는데 평안과 위로를 가져다준다면, 그것만으로도 만족스럽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성경을 진지하게 받아들인다면 환생에 관한 이론은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주장이다.
첫째, 환생에 관한 이론은 영혼의 죽음과 육체의 부활에 대한 성경적 가르침과 모순된다(살전 4:13~18).
둘째, 그와 같은 주장은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엡 2:8~10)에 대한 믿음을 통해 은혜로 받는 구원의 교리를 부정하고 인간의 업적을 그 자리에 대신 놓는다.
셋째, 그 이론은 사람의 영원한 운명이 각자의 생애를 통한 선택으로 영원히 결정된다는 성경적 가르침과 배치된다(마 22:1-14, 마 25:31-46).
넷째, 그 이론은 그리스도의 재림(요 14:1~3)의 의미와 타당성을 경시한다.
그리고 다섯째, 그 이론에서는 전생에서 부족했던 점을 극복할 수 있는 다른 기회가 있다고 말하지만 그것은 성경의 가르침과 다르다(히 9:27).
한마디로 환생이라는 개념은 그리스도인 신앙에는 설 자리가 없다.
<묵상>
사탄이 사후 세계에 대한 잘못된 사상과 가르침을 널리 퍼뜨리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답: 성경의 가르침과 성경의 하나님을 올바르게 믿지 못하게 하기 위하여.
<부가설명> 환생과 윤회 사상은 같은 이야기인 것 같다. 윤회는 죽은 사람의 영혼이 생전의 업보(業報)를 따라 식물이나 동물이나 영계의 존재로 새롭게 태어나서 살다가 또 죽어서 업보를 따라 다른 생물로 태어난다는 설인 것 같도 환생은 사람이 죽어서 그 영혼이 다른 사람으로 재 탄생한다는 주장인 것 같다. 인도에서 이런 환생 이야기는 심심찮게 일어나는 것 같다. 그들은 종교 신앙 배경이 힌두교이거나 브라만교, 또는 불교 계통이기 때문에 사탄이 그들의 풍습에 맞도록 속임수를 쓰는데 그들의 풍습에 젖어 있어서 잘 속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내가 안동교회에서 일할 때 전도회를 열었는데 교인들이 교회 대문 앞에서 길에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전도회 참석을 강권하는 중에 한 고등학교 여학생을 붙들고 전도회 참석하라고 하니까 이 학생이 ‘아이구 내가 전생에 무슨 업이 있어서 이러지?’라고 탄식을 했다. 나는 그 소리를 듣고 물었다. ‘학생은 전생이 있었나?’ ‘그럼요’ ‘그러면 전생의 학생과 지금(이생)의 학생 사이에 의식의 연결이 있나?’ ‘아니요’ ‘그렇다면 어떤 전생이 학생으로 환생했는지 전혀 모르네’ ‘그걸 어떻게 알아요?’ ‘그렇다면 전생의 학생과 지금 학생은 전혀 다른 존재야. 의식의 연결이 없는 전생은 전생이 될 수 없지. 만일 전생이 있었다 해도 그것은 학생일 수 없어’ 그렇다 인격의 의식이 연결되지 않는 전생은 전적으로 허구이고 환생은 전생과 인격이 연결되는 것처럼 말한다. 그것은 사탄의 장난이다. 사탄은 죽은 자의 생전 삶을 잘 알고 있기에 죽은 자가 환생한 것 같은 연극을 기막히게 잘한다. 성경의 계시를 떠나면 속게 되어있다.
<교훈>
사람이 땅에서 죽음과 재탄생의 많은 순환을 겪는다고 주장하는 환생에 대한 가르침은 죽음에 대한 성경적 가르침과 모순되기 때문에 결코 받아들여서는 안 된다.
12월 7일(수) 강신술과 조상 숭배
강신술(necromancy)이라는 영어 단어는 죽음이라는 뜻의 ‘네크로스’와 점을 친다는 뜻의 ‘만테이아’라는 두 개의 헬라어에서 유래했다. 고대부터 강신술은 주로 미래의 사건을 예측하기 위해 죽은 자의 영혼을 소환하는 행위를 가리켜왔다. 한편, 조상 숭배는 죽은 조상을 여전히 가족으로 여기며, 그들의 영혼이 살아 있는 사람들의 일에 영향을 미칠 수 있다고 믿고 숭배하는 관습을 말한다. 이와 같은 이교적 관습들은 영혼이 죽지 않는다고 믿으며 사랑하는 사람이 죽은 뒤에도 그들을 계속해서 그리워하는 사람들에게 매력적으로 느껴질 수 있다.
사무엘상 28:3~25을 읽어보라. 사울이 엔돌의 신접한 여인을 만난 경험에서 죽은 사람과의 대화에 대해 어떤 영적 교훈을 배울 수 있는가?
[삼상28:3~25] … 13 왕이 그에게 이르되 두려워하지 말라 네가 무엇을 보았느냐 하니 여인이 사울에게 이르되 내가 영이 땅에서 올라오는 것을 보았나이다 하는지라 14 사울이 그에게 이르되 그의 모양이 어떠하냐 하니 그가 이르되 한 노인이 올라오는데 그가 겉옷을 입었나이다 하더라 사울이 그가 사무엘인 줄 알고 그의 얼굴을 땅에 대고 절하니라 15 사무엘이 사울에게 이르되 네가 어찌하여 나를 불러 올려서 나를 성가시게 하느냐 하니 사울이 대답하되 나는 심히 다급하니이다 블레셋 사람들은 나를 향하여 군대를 일으켰고 하나님은 나를 떠나서 다시는 선지자로도, 꿈으로도 내게 대답하지 아니하시기로 내가 행할 일을 알아보려고 당신을 불러 올렸나이다 하더라 16 사무엘이 이르되 여호와께서 너를 떠나 네 대적이 되셨거늘 네가 어찌하여 내게 묻느냐 17 여호와께서 나를 통하여 말씀하신 대로 네게 행하사 나라를 네 손에서 떼어 네 이웃 다윗에게 주셨느니라 18 네가 여호와의 목소리를 순종하지 아니하고 그의 진노를 아말렉에게 쏟지 아니하였으므로 여호와께서 오늘 이 일을 네게 행하셨고 19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을 너와 함께 블레셋 사람들의 손에 넘기시리니 내일 너와 네 아들들이 나와 함께 있으리라 여호와께서 또 이스라엘 군대를 블레셋 사람들의 손에 넘기시리라 하는지라(13~19).
답: 만일 사무엘의 영혼이 천국에 있다면 그가 하늘에서 내려와야 이치에 맞는다. 그런데 땅에서 영이 올라왔다고 했다. 또 하나님의 사람 사물엘이 천국에 있는데 일개 무당이 오라 한다고 오겠는가? 그것도 하나님께서 다 죽이라고 한 신접한 자인데 말이다. 이는 다 사탄의 장난이다.
성경은 하나님께서 친히 다스리시던 고대 이스라엘 가운데 있는 모든 강신술사, 영매, 마법사, 주술사들은 가증한 존재이며 따라서 돌로 죽여야 한다고 분명히 이야기 했다(레 19:31, 레 20:6, 27, 신 18:9~14). 이와 같은 율법에 따라 사울은 이스라엘 땅에서 모든 신접한 자와 박수를 쫓아내었다(삼상 28:3, 9).
그러나 사울은 하나님으로부터 거절당한 후에 신접한 여인에게 묻기 위해 가나안 땅 엔돌로 향했다(삼상 28:6, 7, 15, 비교, 수 17:11, 시 83:10). 사울은 그 여인에게 죽은 선지자 사무엘을 불러내라고 요청했고, 사무엘로 가장하여 나타난 속이는 영은 사울에게 “내일 너와 네 아들들이 나와 함께 있으리라”(삼상 28:19)고 말했다. 그 거짓 영은 사울의 죽음을 예언했을 뿐만 아니라, 사무엘의 모양을 취하고 나타나는 것을 통해 영혼 불멸이라는 비성경적 이론을 다시 한번 확인해 주었다. 이와 같은 현상은 강력한 속임수였기 때문에, 사울은 자신이 이미 쫓아내었던 것에 빠져드는 실수를 하지 말았어야 했다.
2세기도 더 지난 후, 선지자 이사야는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어떤 사람이 너희에게 말하기를 주절거리며 속살거리는 신접한 자와 마술사에게 물으라 하거든 백성이 자기 하나님께 구할 것이 아니냐 산 자를 위하여 죽은 자에게 구하겠느냐 하라 마땅히 율법과 증거의 말씀을 따를지니 그들이 말하는 바가 이 말씀에 맞지 아니하면 그들이 정녕 아침 빛을 보지 못하고”(사 8:19, 20, 참조, 사 19:3).
<묵상>
스트레스를 받을 때, 우리는 얼마나 자주 우리가 옳지 않다고 이미 알고 있는 행동을 하게 됩니까? 믿음, 기도,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만이 그런 선택을 하는 우리 자신에 대한 유일하고 확실한 방어인 이유는 무엇입니까?
답: 분노나 자기 이익에 침몰할 때 그런 행동이 나타난다. 성경을 깨달은 사람만이 그런 속임수에 속지 않기 때문이다.
<부가설명> 강신술은 태초부터 있었다. 최초의 영매는 뱀이었다. 뱀이 자원한 것은 아니지만 루시퍼는 뱀을 자기의 속임수를 전달할 매개체로 사용하였다. 뱀을 영매로 사용하지 않았으면 하와를 속이지 못했을 것이다. 사탄은 직접 자기의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매개체를 통하여 일을 한다는 것을 아는 것은 중요하다. 사탄의 매개체는 누구든지 될 수 있다. 동물을 이용한 사탄은 사람들을 이용하여 자기의 일을 행하게 하는 것은 식은죽 먹기다.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들은 스스로 속고 있으므로 신경쓸 일이 없다. 문제는 성경의 하나님을 믿는다는 사람들, 교회다. 그는 교회를 집중공격하여 교회가 영혼불멸설을 굳건한 교리로 만드는데 성공했다. 그렇게 천년을 넘게 가르치고 믿게 했으니 교회도 문제가 없다. 가장 문제는 그 여자의 남은 자손들이다. 그들을 손아귀에 넣기 위하여 젊은이들을 사용하기로 작정했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과학이라는 이름으로 가상 현실을 만들게 하고 그것을 확대해서 메타버스를 창안하여 이제는 교회에 가지 않고 집에 앉아서 마치 교회 예배에 참석한 것 같은 착각으로 예수 믿어도 되는 방법을 고안한 것이다. 그래서 마지막 때에 강신술과 일요 신성설을 기만의 도구로 성공하고 있다. 앞으로 더욱 성공할 것이다. 사울왕은 강신술을 믿어서 죽임을 당했다. “사울이 죽은 것은 여호와께 범죄하였기 때문이라 그가 여호와의 말씀을 지키지 아니하고 또 신접한 자에게 가르치기를 청하고 여호와께 묻지 아니하였으므로 여호와께서 그를 죽이시고 그 나라를 이새의 아들 다윗에게 넘겨 주셨더라”(대상10:13,14).
<교훈>
강신술이나 마법, 그리고 점치는 일은 하나님께서 가증하게 여기시는 일이다. 사탄의 속임수에 빠지기 보다는 말씀과 기도를 통해 하나님의 음성에 집중해야 한다.
12월 8일(목) 죽은 자의 모습으로 나타남
죽은 사람의 모습이 마치 산 사람처럼 다시 나타나는 것 역시 강신술과 마찬가지로 사탄이 꾸며내는 일이다. 이미 죽은 가족, 친구, 또는 그 누구라도 살아 있는 것처럼 나타날 수 있는데, 그들의 생김새와 목소리가 고인과 매우 유사하게 나타난다. 이 모든 사탄의 기만은 하나님의 말씀 위에 굳게 서 있지 않은 자들을 속이기 위해 사용될 것이다. 엘렌 G. 화잇은 다음과 같이 경고한다. “사도들의 모양으로 가장하고 나타나는 이 속이는 영들은 사도들이 세상에 있을 때 성령의 지도로 기록한 바와는 전혀 반대되는 말들을 한다”(각 시대의 대쟁투, 557). “큰 기만적 연극의 주역으로서 사탄은 자기 자신을 그리스도로 가장할 것이다”(각 시대의 대쟁투, 624).
고린도후서 11:14, 15과 에베소서 6:10~18을 읽어보라. 악마의 속임수에 대항하기 위해 우리에게 약속된 보호책은 무엇인가?
[고후11:14,15] 이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니라 사탄도 자기를 광명의 천사로 가장하나니 15 그러므로 사탄의 일꾼들도 자기를 의의 일꾼으로 가장하는 것이 또한 대단한 일이 아니니라 그들의 마지막은 그 행위대로 되리라.
[엡6:10~18]끝으로 너희가 주 안에서와 그 힘의 능력으로 강건하여지고 11 마귀의 간계를 능히 대적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전신 갑주를 입으라 12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을 상대하는 것이 아니요 통치자들과 권세들과 이 어둠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을 상대함이라 13 그러므로 하나님의 전신 갑주를 취하라 이는 악한 날에 너희가 능히 대적하고 모든 일을 행한 후에 서기 위함이라 14 그런즉 서서 진리로 너희 허리 띠를 띠고 의의 호심경을 붙이고 15 평안의 복음이 준비한 것으로 신을 신고 16 모든 것 위에 믿음의 방패를 가지고 이로써 능히 악한 자의 모든 불화살을 소멸하고 17 구원의 투구와 성령의 검 곧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라 18 모든 기도와 간구를 하되 항상 성령 안에서 기도하고 이를 위하여 깨어 구하기를 항상 힘쓰며 여러 성도를 위하여 구하라.
답: 그들의 속임수를 지식과 지혜로소 간파하도록 말씀해주셨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입고 악한 자의 모든 공격을 방어해야 한다.
사도 바울은 우리에게 이렇게 경고한다.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을 상대하는 것이 아니요 통치자들과 권세들과 이 어둠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을 상대함이라”(엡 6:12). 우리는 에베소서 6:13~18에 기록된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입어야만 이러한 기만으로부터 보호받을 수 있다.
사탄의 개입으로 인해 죽은 자가 살아 있는 것처럼 나타나는 현상은 매우 무섭고 기만적일 수 있으나, 하나님으로부터 보호를 받으며 하나님의 말씀에 뿌리내린 자들을 그릇된 길로 인도할 수는 없다. 인간의 조건적 불멸에 대한 성경의 가르침을 믿는 사람들은 죽은 사람과 어떤 종류의 교감이나 소통을 하더라도 그런 경험이 사탄에게서 비롯된 것이며, 하나님의 강력한 은혜를 통해 그것들을 물리쳐야 한다는 것을 안다. 다시 말하지만, 아무리 강력하고, 설득력 있고, 진짜처럼 보일지라도, 죽은 자는 무덤에서 잠들어 있다는 성경의 가르침을 확고히 믿어야 한다.
사랑하는 사람을 잃었는데 바로 그 사람이 다시 나타난 것처럼 보이는 장면을 대면했다고 상상해보라. 그 사람이 당신에게 사랑을 표현한다. 그리고 당신을 얼마나 그리워하는지, 심지어 당신과 그 사람만 알 수 있는 것들을 이야기하고, 자신이 이제 더 나은 곳에 있다고 말한다면? 죽은 자의 상태에 대한 성경의 가르침에 굳건히 뿌리를 내리고 있지 않다면, 얼마나 쉽게 이 속임수에 넘어가겠는가! 그 말을 얼마나 믿고 싶겠는가!
<묵상>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입는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마지막 때의 기만에 대항하는 것뿐만 아니라 우리 삶의 모든 영역에서 어떻게 하면 매일매일, 구체적이고 실질적으로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입고 살 수 있을까요?
답: 하나님의 말씀으로 무장하는 것이다. 기도와 말씀으로 거룩하여진다(딤전4:5).
<부가설명> 사울이 엔돌의 신접한 여자를 찾아 사무엘을 불러올리라고 했을 때 사울은 무당이 불러올렸다는 사무엘을 직접 보지 못했다. 여자의 설명을 듣고 사무엘인줄 알았다고 했다. 그러나 사울이 이방 종교와 신접한 여자를 찾아간 것은 영혼이 죽지 않는다는 것을 믿고 있었다는 증거가 된다. 그래서 대하10:13,14에 사울이 죽은 이유 중에 이것을 하나로 들었다. 그런데 요즘은 강신술을 통하여 원하는 사람에게 직접 보이게 나타나기도 하는 것 같다. 교과 저자의 설명대로 눈에 보이는 모습으로 나타나 직접 대화를 하고 감정을 보인다면 죽은 후의 영혼이 따로 존재하지 않는다고 한 성경말씀을 의심할 수 있도록 할 것이다. 그러므로 기록한 말씀에 굳게 서 있어야 한다. 성경은 죽은 자는 “구름이 사라져 없어짐 같이 스올로 내려가는 자는 다시 올라오지 못할 것이오니 그는 다시 자기 집으로 돌아가지 못하겠고 자기 처소도 다시 그를 알지 못하리이다”(욥7:9,10)라고 분명히 가르쳐주셨다. 그러므로 죽은 자는 아무것도 모른다(전9:5). 이런 확실한 하나님의 계시 말씀을 기억하고 확신하는 사람은 사탄의 장난을 당장 분별한다.
<교훈>
날마다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입고 살아감으로 마지막 때를 살아가는 하나님의 백성들을 넘어뜨리기 위해 온갖 노력을 다하는 사탄의 기만을 물리쳐야 한다.
12월 9일(금) 더 깊은 연구를 위해
<복음전도> 602~609, “거짓 과학과 종파와 사상과 비밀결사(秘密結社)에 대한 우리의 태도,” <대결> 146~155, “강신술”을 읽어보라.
“죽음 후의 의식 작용과 죽은 자의 영이 산 자와 교통하고 있다는 교리는 성경 상 아무런 근거를 가지고 있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이론들이 진리로 주장되고 있다. 이와 같은 거짓 교리를 통하여 귀신의 영들이 사람들을 속여 저들 자신을 죽은 자의 모습으로 나타내는 통로를 열어 놓았다. 사탄의 대리자들이 죽은 자의 모습으로 가장하여 영혼들을 사로잡는다. 사탄은 종교를 가지고 있으며, 회당을 가지고 있으며, 또한 신실한 경배자들을 가지고 있다. 사탄은 자기를 신봉하는 자들의 대열을 증강시키기 위하여 온갖 종류의 기만을 사용한다.…
강신술을 전파하는 자들은 그대들을 기만하기 위하여 비위에 맞는 매혹적인 방법으로 접근해 오고 있다. 그러므로 만일 우리가 그들의 거짓말에 귀를 기울인다면, 우리는 의의 원수의 꾀임에 빠져 틀림없이 상급을 받지 못하고 말 것이다. 일단 기만자의 괴수의 매혹적인 영향력이 그대들을 정복하게 되면, 그대들은 그 악한 영향력을 받게 되고, 그 치명적인 영향력은 그리스도를 하나님의 아들로 믿는 그대들의 확신을 오염시키고 소멸시킬 것이며, 그대들로 하여금 주님의 보혈의 공로를 의지하는 마음을 버리게 할 것이다. 이러한 철학으로 속임을 당하는 자들은 사탄의 기만을 통하여 자신의 상급을 잃어버리게 될 것이다”(복음전도, 603, 605).
핵심적인 토의를 위해
1. 문화적으로 충분히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이라는 핑계를 대면서, 많은 기독교인들은 대중 매체가 제공하는 것들을 무분별하게 읽고 본다. 대중 매체를 통해 사실과 다를 뿐 아니라 기만적이기까지 한 내용이나 관점을 대할 때, 성경의 어떤 원칙을 기준으로 삼아야 하는가?(시 101:1-8, 잠 4:23, 빌 4:8)
※ 마음을 잘 지키고 무엇에 든지 참되고 바르며 비루한 것을 멀리하는 것이다. “내 아들아 지식의 말씀에서 떠나게 하는 교훈을 듣지 말지니라”(잠19:27).
2. 마지막 때를 살아가면서 사탄의 속임수에 빠져있는 사람들을 어떻게 도울 수 있는가? 우리 자신이 같은 속임수에 빠지지 않기 위해 어떻게 해야 하는가?
※ 성경의 진리를 바르게 깨닫도록 가르칠 것이다. 듣지 않을 때는 기도로 성령의 감동을 간구할 것이다. 말씀이 가르치는 대로 흔들리지 말고 순종할 것이다.
3. 많은 기독교인들은 엔돌의 신접한 여인이 “사무엘”을 불러냈다는 이야기를 죽은 사람들에게 의식이 있고 그들과 소통할 수 있음을 보여주는 성경적 증거로 여겨왔다. 이 이야기는 하나의 교리를 만드는 데 있어, 단 하나의 성경절 또는 이야기에만 의존하는 것은 위험하며, 따라서 어떤 주제에 대해 성경 전체가 말하는 것을 주의 깊게 살펴봐야 한다는 사실에 대해 무엇을 가르쳐주는가?
※ 성경을 깨닫는 것은 파즐을 맞추는 것과 같다. 전체가 맞지 않으면 바르게 이해한 것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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