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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과 반대되는 구절들 - (핵심Q & 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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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이봉주 작성일22-11-20 22:54 조회3,019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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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9과 반대(反對)되는 구절(句節)들 

                                 .(2022년11월 26일 (안) / 일몰: 오후 5시 15분)


<서언(緖言)>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구절(聖經句節)들을 자의적(恣意的)으로 해석(解釋)함으로 오류(誤謬)에 빠져 본인은 물론 그가 소속(所屬)된 집단(集團)에서도 많은 무리(無理)를 빚으며 지탄(指彈)을 받는 경우(境遇)를 볼 수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겸손(謙遜)한 자세(姿勢)로 성령님(聖靈任)의 인도(引導)하심과 역사(役事)하심으로 올바른 하나님의 음성(音聲)을 듣고 깨달아 진리(眞理)와 생명(生命)이 되시는 예수님을 잘 증거(證據)하는 그리스도인이 되자.


(11월20일) (일)  <부자(富者)와 나사로>


(Q)~(눅 16:19~31)의 부자(富者)와 나사로이야기가 사후세계(死後世界)에 관한 문자적(文字的)인 묘사(描寫)가 아닌 이유는 무엇입니까?


(A)~○. (누가복음 16:19~31)의 이야기는 사후세계(死後世界)에 관한 문자적(文字的)인 묘사(描寫)가 아니다. 이 이야기가 문자(文字) 그대로 해석하여, 이 말씀이 죽은 자의 상태를 묘사하고 있는 것으로 이해(理解)해야 한다고 주장한다면 여러 성경 구절(句節)들과 상충(相衝)되는 결론에 도달하게 한다. 첫째, 우리는 하늘과 지옥(地獄)이 각 곳에 거(居)하는 자들이 서로 대화(對話)할 수 있을 만큼 가까운 거리에 있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할 것이다(눅 16:23~31). 그러므로 사후세계(死後世界)에서 몸은 무덤에 누워있지만, “눈”과 “손가락”과 “혀”를 가지고 있을 뿐만 아니라 목마름까지 느끼는 의식(意識)을 가진 영혼이 있음을 인정해야 할 것이다(눅 16: 23, 24). 그러므로 부자(富者)와 나사로(눅 16:19~31)의 이야기는 중요한 영적교훈(靈的敎訓)을 주기 위한 비유(譬喩)로 보아야 하지 문자적(文字的)으로 해석(解釋)하여 죽은 자의 상태(狀態)를 나타내는 것으로 이해(理解)해서는 안 된다.


(11월21일) (월)  <“오늘...나와 함께 낙원(樂園)에 있으리라”>


(Q)~(눅 23:43) 예수님께서 십자가(十字架) 위에서 회개(悔改)한 강도(强盜)에게 주신 약속(約束)의 올바른 이해(理解)는 무엇일까요?


(A)~○. 십자가(十字架)상에서 한편 강도(强盜)에게 하신 본 절(節)의 예수의 약속(約束)은 전통적(傳統的)으로 영혼불멸(靈魂不滅), 곧 신실한 죽은 자들의 영혼이 부활(復活) 전 하늘에 의식(意識)이 있는 존재(存在)로 있다는 신조(信條)를 지지하는 주요 증거구절(證據句節)로 사용되어 왔다. 대다수(大多數)의 그리스도인들이 받아들이는 이 견해(見解)에 따르면, 참회(懺悔)한 강도(强盜)가 예수께 그분의 나라에서 기억해 달라고 요청(要請)했을 때 그분은 그가 당일에 낙원(樂園)에 있을 것이라고 보증(保證)하셨다는 것이다. 그러나 예수께서 부활하신 후 마리아를 만난 자리에서 “아직 아버지께로 올라가지 아니하였”(요 20:17)다고 말씀하신 것을 볼 때, 십자가(十字架)에 달렸던 그날 강도(强盜)와 함께 낙원(樂園)에 올라가지 않은 것이 분명하다. 그렇다면 이 말씀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그러므로 예수님께서는 회개(悔改)한 강도(强盜)에게 그가 오늘 낙원(樂園)에 있겠다고 말씀하신 것이 아니라 그가 회개(悔改)한 바로 그 순간(瞬間) 그에게 구원(救援)의 선물(膳物)이 주어졌음을 약속(約束)하신 것이다. 


(11월22일) (화)  <“세상(世上)을 떠나서 그리스도와 함께”>


(Q)~(빌 1:21~24, 살전 4:13~18) 바울은 언제 “세상을 떠나서 그리스도와 함께” 있기를 기대(期待)하며 살았습니까?


(A)~○. 바울의 삶은 예수 안에 포함(包含)되어 있고 예수에 의해 경계가 정해져 있었다. 그의 생각은 완전히 그의 구주 안에 싸여 있었다. 그의 계획, 소망, 모든 열망은 그리스도에게 집중되어 있다. 모든 사상은 그에게 복속(服屬)되었다. (고후 10:5). 그러므로 바울의 생각은 이기적(利己的)이거나 세속적(世俗的)이 아니었으며 주님의 지배(支配) 아래 있었다. 즉 바울은 죽음 직후(直後)가 아니라 예수님의 재림(再臨)의 때 자신을 위해 준비(準備)된 상급(賞給)을 받을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와 함께 있게 될 것이라는 사실(事實)을 확신(確信)하는 삶이였다. 


(11월23일) (수)  <옥(獄)에 있는 영(靈)들에게 선포(宣布)함>


(Q)~(벧전 3:13~20) 그리스도께서 노아의 때에 살던 “옥(獄)에 있는 영(靈)들에게” 선포(宣布)하셨다는 말의 의미(意味)는 무엇일까요?


(A)~○. 노아 시대의 사람들을 “영(靈)”이라고 칭(稱)한 것이 현대인에겐 이상하게 들릴지 모르지만, 초기(初期)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오늘날 우리가 “영혼(靈魂)”(soul)이라는 말을 “사람”으로 이해하는 것과 다를 바가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영(靈)”에 해당(該當)하는 헬라어 ‘프뉴마’는 자주 인간 존재를 가리키는 말로 사용된다. 본 절에서 프뉴마라는 단어가 사용된 것은 노아를 통해서 전파(傳播)된 구원(救援)의 기별과 사람들 간의 영적관계(靈的關係)를 강조(强調)하기 위함이다. 홍수 이전 시대의 사람들은 안전하게 보였을 것이지만 그들의 세상이 홍수로 멸(滅)해질 운명(運命)에 처해 있었기 때문에 “사형수(死刑囚)의 감방(監房)” 안에 있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들의 유일(唯一)한 소망(所望)은 노아를 통해 전파(傳播)된 경고(警告)를 받아들이고 방주(方舟)로 들어가는 데 있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영(靈)이 지옥(地獄)으로 내려가서 노아 홍수시대(洪水時代)에 회개(悔改)치 아니했던 자(者)들의 영(靈)들에게 설교(說敎)했다고 믿는 것은 죽음에 관한 성경(聖經)의 가르침과 배치(背馳)되는 말씀이다. 


(11월24일) (목)  제단(祭壇) 아래의 영혼(靈魂)들


(Q)~(계 6:9~11) 죽은 순교자(殉敎者)들의 “영혼(靈魂)들”이 “제단(祭壇) 아래”서 큰소리로 외친다는 말씀의 참된 의미(意味)는 무엇일까요?


(A)~○. 다섯째 인(印)을 떼실 때에 요한은 이상(異象) 중에 한 무리의 사람들이 제단(祭壇) 아래 있는 것을 보았는데,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과 예수 그리스도의 증거(證據)로 인(因)하여 죽임을 당한 영혼들이었다. 하나님을 위해 살다가 죽은 순교자(殉敎者)들을 상징(象徵)하는 것으로서 마침내 하나님에 의해 정의(定義)가 실현(實現)될 것임을 보여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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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미부록(末尾附錄)>



  제9과 반대(反對)되는 구절(句節)들 

                          .(2022년11월 26일 (안) / 일몰: 오후 5시 15분)


<서언(緖言)>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구절(聖經句節)들을 자의적(恣意的)으로 해석(解釋)함으로 오류(誤謬)에 빠져 본인은 물론 그가 소속(所屬)된 집단(集團)에서도 많은 무리(無理)를 빚으며 지탄(指彈)을 받는 경우(境遇)를 볼 수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겸손(謙遜)한 자세(姿勢)로 성령님(聖靈任)의 인도(引導)하심과 역사(役事)하심으로 올바른 하나님의 음성(音聲)을 듣고 깨달아 진리(眞理)와 생명(生命)이 되시는 예수님을 잘 증거(證據)하는 그리스도인이 되자.


(11월20일) (일)  <부자(富者)와 나사로>


(Q)~(눅 16:19~31)의 부자(富者)와 나사로이야기가 사후세계(死後世界)에 관한 문자적(文字的)인 묘사(描寫)가 아닌 이유는 무엇입니까?


(A)~○. (누가복음 16:19~31)의 이야기는 사후세계(死後世界)에 관한 문자적(文字的)인 묘사(描寫)가 아니다. 이 이야기가 문자(文字) 그대로 해석하여, 이 말씀이 죽은 자의 상태를 묘사하고 있는 것으로 이해(理解)해야 한다고 주장한다면 여러 성경 구절(句節)들과 상충(相衝)되는 결론에 도달하게 한다. 첫째, 우리는 하늘과 지옥(地獄)이 각 곳에 거(居)하는 자들이 서로 대화(對話)할 수 있을 만큼 가까운 거리에 있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할 것이다(눅 16:23~31). 그러므로 사후세계(死後世界)에서 몸은 무덤에 누워있지만, “눈”과 “손가락”과 “혀”를 가지고 있을 뿐만 아니라 목마름까지 느끼는 의식(意識)을 가진 영혼이 있음을 인정해야 할 것이다(눅 16: 23, 24). 그러므로 부자(富者)와 나사로(눅 16:19~31)의 이야기는 중요한 영적교훈(靈的敎訓)을 주기 위한 비유(譬喩)로 보아야 하지 문자적(文字的)으로 해석(解釋)하여 죽은 자의 상태(狀態)를 나타내는 것으로 이해(理解)해서는 안 된다.


○. 이 이야기가 비유(譬喩)가 아니라 실제(實際)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만일 그 부자(富者)가 실제로 육체적(肉體的)인 고통 가운데 있다면 나사로도 그 육체가 실제로 하늘에 들어갔어야 한다는 사실을 주목해야 한다. 하지만 나사로와 그 부자(富者)의 육체(肉體)는 그 육체가 왔던 흙으로 돌아갔다(참조 창 2:7; 3:19; 전 12:7). (눅 16:19~31, 재림교주석)


○. 이 비유(譬喩)는 하나님을 의지(依支)하지 않은 부자(富者)와 하나님을 의지(依支)한 가난한 자를 대비(對比)하여 묘사(描寫)한 것이다. 그리스도께서는 이 두 계급(階級)의 사람의 처지가 뒤집어질 때가 오고 있음을 명시(明示)하시었다. 이 세상에서 물질적(物質的)으로는 가난할지라도 하나님을 의지(依支)하고 곤란(困難)을 참는 자들에게는 장차(將次) 이 세상이 줄 수 있는 최고의 지위(地位)는 가졌으나 하나님께 저희 생애(生涯)를 바치지 아니한 자들보다 높임을 받게 되는 날이 올 것이다.…(눅 16:19~31, 재림교주석)


○. 천국(天國)과 지옥(地獄)이 서로 말할 수 있는 거리 안에 있어서 천국(天國)에 있는 자들이 지옥(地獄)에서 고통(苦痛)당하는 친구들과 사랑하는 사람들을 바라보면서도 그들의 고통을 경감(輕減)시켜 줄 수 없고, 지옥에 있는 자들은 하늘에 있는 의인(義人)들의 복락(福樂)을 바라본다는 것이 과연(果然) 있을 수 있는 일인가? 만일(萬一) 이 비유(譬喩)를 실제적(實際的)인 것으로 받아들인다면, 틀림없이 그런 사실을 가르치고 있다고 보아야 한다(참조 19절 주석). (눅 16:19~31, 재림교주석)


○. (눅 16:19) 영원(永遠)한 운명(運命)은 이 세상에서 결정(決定)됨

그리스도께서는 부자(富者)와 나사로의 비유(譬喩)로써, 사람의 영원(永遠)한 운명(運命)은 저희가 이 세상에서 하는데 따라 결정(決定)되는 것임을 보여 주셨다. 은혜(恩惠)의 기간 동안에 하나님의 은혜가 각 사람에게 제공(提供)된다. 그러나 사람이 만일 자기만족(自己滿足)을 위하여 저희의 기회를 헛되이 보내면 저희는 스스로 저희 자신을 영생(永生)에서 끊어버리는 것이 된다. 소위 죽은 후에 유예기간(猶豫期間)을 얻지 못할 것이다. 저희는 저희 자신의 선택(選擇)으로 저희와 하나님 사이에 건너 갈 수 없는 큰 구렁으로 한계(限界)를 그어 놓았다. (눅 16:19~31, 재림교주석)


○. 하나님께서는 부자(富者)를 당신의 재물(財物)을 맡은 청(廳)지기로 삼았으므로 거지와 같은 처지(處地)에 있는 사람을 돌보는 것은 부자(富者)의 의무(義務)이다. 그 주신 명령(命令)은 “너는 마음을 다하고 성품(性稟)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 “이웃 사랑하기를 네 몸과 같이 하라”는 것이다(실물 261-262).


○. 천국(天國)은 지옥(地獄)의 고통(苦痛)을 보면서 사는 곳이 아님

이 비유(譬喩)는 그리스도께서 유대인의 입장(立場)에 서서 말씀하셨다. 사람이 죽은 때로부터 부활(復活)할 때까지의 사이에 죽은 자는 의식(意識)을 가지고 있다는 교리(敎理)를 믿는 사람이 그리스도의 말씀을 듣고 있던 사람들 가운데에 많이 있었다. 구주(救主)께서는 저들의 관념(觀念)을 아셨으므로 그 중요한 진리(眞理)를 저들에게 잘 가르쳐 주실 수 있도록 이 비유(譬喩)를 저들의 선입주견(先入主見)을 따라서 꾸며 말씀하셨다. 그는 청중(聽衆)들 앞에 저들로 하여금 저들과 하나님 사이의 참된 관계(關係)를 볼 수 있는 거울을 내거셨다. 그는 그가 모든 사람에게 분명히 알게 하시려는 관념(觀念), 즉 사람이 소유(所有)하고 있는 것은 오직 주께서 그에게 꾸어 주셨을 때에 한하여 그의 소유가 되는 까닭으로 사람의 가치를 재물(財物)로 헤아릴 것이 아니라는 관념(觀念)을 가르쳐 주시기 위하여 일반적(一般的)으로 떠도는 말(이야기)을 이용(利用)하셨다. (눅 16:19~31, 화잇주석)


○. 이 땅에서 우리의 성품(性稟)이 재창조(再創造)함을 받아야 함

부자(富者)와 나사로의 비유(譬喩)는 그 두 사람으로 표상(表象)된 두 반열(班列)의 사람이 내세에서는 어떻게 평가(評價)되는지를 드러낸다. 재물(財物)을 부정한 수단(手段)으로 얻는 것이 아니라면 부자(富者)되는 것이 죄는 아니다. 재물을 가졌다는 이유로 부자가 정죄(定罪)받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자기가 맡은 재물을 이기적(利己的)으로 사용할 때에 그에게 죄를 정한다.  (눅 16:19~31, 화잇주석)


○. 부자(富者)는 누가복음 16:9∼13에 나오는 가르침을 대표(代表)한다. 

즉 다른 사람을 축복(祝福)하는 데 재물(財物)을 사용하지 않으면 영원(永遠)한 처소(處所)에서 참된 부와 거처(居處)를 얻는 것을 기대할 수 없다. 예수님 당시에 많은 사람들은 부가 하나님의 은총(恩寵)의 표이고 가난은 그분의 불쾌(不快)하심의 표라고 생각했다. 예수께서는 이 비유를 통해 부자의 “상급”이 그들이 기대한 것과 정반대(正反對)였음을 보여 줌으로써 그런 잘못된 신학(神學)을 드러낸 것이다. (눅 16:19~31, 만나주석)


○. 부자(富者)와 나사로의 비유(譬喩)는 세 가지 분명(分明)한 관점(觀點)을 보여 준다.

   (1) 부자(富者)는 이생에서 가난한 자를 도와주어야 할 책임이 있다.

   (2) 성경은 우리를 이끌어 회개(悔改)케 하고 성경의 윤리(倫理)를 따르게 하기에 충분(充分)한 증거(證據)가 된다.

   (3) 사후(死後)에는 마음의 변화(變化)를 위한 기회(機會)가 더 이상 없다. 당신은 당신에게 마땅한 상급(賞給) 혹은 보응(報應)을 받게 될 것이다.


○. 비유(譬喩)에 의(依)하면, 

   부자(富者)는 죽은 후에 “눈”과 “혀” 곧 매우 실제적인 몸의 지체(肢體)를 지니고 있었다. 또한 그는 나사로가 “그 손가락 끝에 물을 찍어 내 혀를 서늘하게” 해 주기를 간청(懇請)했다. 신체(身體)를 지니고 있는 이런 상태는 죽음 후에 육체(肉體)를 떠난 영혼(靈魂)이 불멸(不滅)한다는 개념(槪念)에 맞지 않는다.


○. 이 비유(譬喩)가 사후(死後)의 삶을 말하는 실제적(實際的)인 이야기라면, 천국(天國)과 지옥(地獄)은 천국(天國)과 지옥(地獄)의 거주자(居住者)들 사이에 대화(對話)를 주고받을 만큼 매우 가깝게 있다. 이는 이 두 부류(部類)의 사람 모두에게 바람직하지 못한 상황이다.


○. 여기서 부자(富者)와 거지 나사로의 비유(譬喩)도 재물(財物)을 하나님의 뜻에 따라 선용(善用)해야 하는 것을 보여 주기 위해 도입(導入)된 것이지 구원(救援)의 방법(方法)을 보여 주기 위해 도입(導入)된 것이 아니다. (그랜드 종합주석, 13:368).


○. 부자(富者)와 나사로(누가복음 16:19-31)

탕자(蕩子)의 비유(譬喩)가 우리 앞에 복음의 은총(恩寵)을 내어놓아 우리 모두를 격려(激勵)해 준 것처럼 이 비유(譬喩)는 우리 앞에 "닥쳐 올 화"를 내놓아 우리의 경성을 촉구한다. 죄에 단단히 잠들어 있는 사람은 이것으로는 깨지 않을 것이다. 바리새인들은 세속에 반대하는 그리스도의 설교를 비웃었다. 그런데 이 비유는 그런 희롱(戱弄)자들을 심각하게 만들려 한다. 그리스도의 복음의 의도는 우리를 가난과 고통에 화해시키고 또 세속과 육정의 유혹에 대항하여 무장하도록 하려는 것이다. 이 얘기의 막을 열고 저 세상에서 위의 양자의 종말을 살펴보게 되면, 이 비유는 위의 두 가지 의도를 매우 잘 추구함을 보게 된다. 이 비유는 그리스도의 다른 비유와는 다르다. 다른 비유들은 영적인 일들을 세상사(事)에서 끌어와 표현(表現)하고 있다. 즉 씨뿌리는 자와 씨의 얘기(염소와 양의 얘기는 제외하고), 탕자 등. 이것만을 제외(除外)하고서는 전부 그렇다. 그러나 여기서는 "영적(靈的)인 일 자체"가 이생과 내생에서의 선악(善惡)의 상태(狀態)에 대한 얘기와 표현으로써 나타난다. 우리는 그것을 역사적인 사실로써 생각할 필요는 없다. 그러나 인간사에 진실로 존재하는 "사실성의 문제"이다. 즉 불쌍하고 신앙 깊은 사람들이 천대(賤待)받고 소외(疏外)당하다가 죽음으로 그 불행을 벗어나 천국에 가서 축복과 기쁨을 누린다. 그것은 전생의 슬픔이 있었기에 더욱 기쁜 일이다. 그런데 부한 쾌락주의(快樂主義)자들은 사치(奢侈)와 향락(享樂) 속에 살며 불쌍한 사람들에게 무자비(無慈悲)하다가 죽어, 참을 수 없는 지옥(地獄)의 고통에로 간다. 그런데 그것은 전생(前生)에 누리던 쾌락적(快樂的)인 생활이 있었기에 더욱 괴롭고 고통스러운 데다가, 그 고통으로부터 구원(救援)받을 길조차 없는 것이다. 이것은 하나의 비유일까? 


○. 그렇다면 이 비유(譬喩)가 우리에게 말하려는 내용(內容)은 무엇일까? 아브라함과 부자(富者)와의 담론(談論)의 사실은 욥기에서 하나님과 사탄의 담론(談論)처럼 얘기를 더욱 효과(效果) 있게 하기 위한 도입(導入) 말에 지나지 않는다. 우리 구주(救主)께서 이 세상에 오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내세을 알게 하시고 이 세상에서의 우리의 생활이 "저세상"과 어떤 관련이 있는지를 보여 주시기 위해서였다. 이 얘기에서 예수님은 그런 일을 하시고 계신다.  (눅 16:19~31, 매튜헨리)


(11월21일) (월)  <“오늘...나와 함께 낙원(樂園)에 있으리라”>


(Q)~(눅 23:43) 예수님께서 십자가(十字架) 위에서 회개(悔改)한 강도(强盜)에게 주신 약속(約束)의 올바른 이해(理解)는 무엇일까요?


(A)~○. 십자가(十字架)상에서 한편 강도(强盜)에게 하신 본 절(節)의 예수의 약속(約束)은 전통적(傳統的)으로 영혼불멸(靈魂不滅), 곧 신실한 죽은 자들의 영혼이 부활(復活) 전 하늘에 의식(意識)이 있는 존재(存在)로 있다는 신조(信條)를 지지하는 주요 증거구절(證據句節)로 사용되어 왔다. 대다수(大多數)의 그리스도인들이 받아들이는 이 견해(見解)에 따르면, 참회(懺悔)한 강도(强盜)가 예수께 그분의 나라에서 기억해 달라고 요청(要請)했을 때 그분은 그가 당일에 낙원(樂園)에 있을 것이라고 보증(保證)하셨다는 것이다. 그러나 예수께서 부활하신 후 마리아를 만난 자리에서 “아직 아버지께로 올라가지 아니하였”(요 20:17)다고 말씀하신 것을 볼 때, 십자가(十字架)에 달렸던 그날 강도(强盜)와 함께 낙원(樂園)에 올라가지 않은 것이 분명하다. 그렇다면 이 말씀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그러므로 예수님께서는 회개(悔改)한 강도(强盜)에게 그가 오늘 낙원(樂園)에 있겠다고 말씀하신 것이 아니라 그가 회개(悔改)한 바로 그 순간(瞬間) 그에게 구원(救援)의 선물(膳物)이 주어졌음을 약속(約束)하신 것이다. 


○. 본문의 구두점(句讀點) : 

문제의 관건(關鍵)은 예수의 이 진술(陳述)에 구두점(句讀點)을 어떻게 찍을 것인가에 달려 있다. 대부분(大部分)의 번역본(飜譯本)들처럼 쉼표를 “오늘” 앞에 찍는다면 이 본문은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樂園)에 있으리라.”가 된다. 그렇다면 예수께서 실제로 어떻게 말씀하셨을까?


○. “원래 기록된 대로의 헬라어는 구두점(句讀點)이 전혀 없다. 부사(副詞) “오늘”은 헬라어에서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와 “네가 나와 함께 낙원(樂園)에 있으리라” 사이에 위치한다. 헬라어 용법(用法)에 의하면 부사(副詞)는 어느 구절(句節)이든지 수식(修飾)할 수 있다. 따라서 문제는 예수가 말하고자 한 것은 무엇인가? 라는 것이다. 예수께서는 강도(强盜)가 그날(오늘) 예수와 함께 낙원(樂園)에 있을 것이라고 약속(約束)하셨는가, 아니면 그날(오늘) 강도에게 네게 이르노니 라고 말씀 하셨는가? 예수께서 의도한 의미에 대해 알 수 있는 유일의 길은 특별(特別)한 연구(硏究)에 있어서 남아 있는 문제들에 대하여 성경적(聖經的) 해답(解答)을 이해하는 것이다.” (핵심, 인간의 상태>9. 회개한 강도는 하늘에 갔는가?)


○. 그러므로 그리스도가 십자가(十字架) 위에서 강도(强盜)에게 실제(實際)로 한 말은 “진실로 오늘 내가 네게 말하노니, 네가 나와 함께 낙원(樂園)에 있으리라”였다. 강도가 그 순간(瞬間)에 생각하고 있던 큰 의문점(疑問點)은 언제 자기가 낙원(樂園)에 이를 것인가가 아니라, 자기가 결국(結局) 낙원(樂園)에 갈 수 있을지 여부(與否)였다. 강도가 아무리 무가치(無價値)하고, 사형선고(死刑宣告)를 받아 죽어가고 있는 예수가 그런 약속(約束)을 하는 것이 가당(可當)치 않게 보일 수 있지만, 예수의 간단한 그 진술은 강도가 분명히 그곳에 있게 될 것이라는 보증을 주었다. 실제로 그런 소망을 가능하게 한 것은 예수가 십자가(十字架) 위에 달렸기 때문이다.  (눅 23:43, 재림교주석)


○. “오늘”이라는 단어(單語) 앞에 구두점(句讀點)을 찍음으로써, 번역자(飜譯者)들은 죽은 자가 사망시(死亡時)에 보상(報償)을 받게 된다는 비성경(非聖經)적인 개념(槪念)의 지도(指導)를 받았음을 분명히 드러낸다. 그러나 위에서 제시(提示)한 것처럼, 예수나 신약기자(新約記者)들은 그런 가르침을 믿거나 가르치지 않았다. “오늘”이라는 단어(單語) 앞에 구두점(句讀點)을 찍는 것은, 그리스도와 여러 신약 기록자(記錄者)들이 다른 곳에서 분명히 언급(言及)한 내용들과 그의 말을 모순(矛盾)되게 만드는 셈이다. 따라서 성경 자체(自體)의 사상(思想)에 의하면, 그 구두점(句讀點)을 “오늘”이라는 단어(單語) 앞이 아니라 뒤에 찍어야 한다(참조 요 4:35, 36 주석). 


○. 그러므로 그리스도가 십자가(十字架) 위에서 강도(强盜)에게 실제(實際)로 한 말은 “진실로 오늘 내가 네게 말하노니, 네가 나와 함께 낙원(樂園)에 있으리라”였다. 강도가 그 순간(瞬間)에 생각하고 있던 큰 의문점(疑問點)은 언제 자기가 낙원(樂園)에 이를 것인가가 아니라, 자기가 결국(結局) 낙원(樂園)에 갈 수 있을지 여부(與否)였다. 강도가 아무리 무가치(無價値)하고, 사형선고(死刑宣告)를 받아 죽어가고 있는 예수가 그런 약속(約束)을 하는 것이 가당(可當)치 않게 보일 수 있지만, 예수의 간단한 그 진술은 강도가 분명히 그곳에 있게 될 것이라는 보증을 주었다. 실제로 그런 소망을 가능하게 한 것은 예수가 십자가(十字架) 위에 달렸기 때문이다.  (눅 23:43, 재림교주석)


○. 그러므로 누가복음 23:43의 가장 자연스러운 번역(飜譯)은 “진실(眞實)로 내가 오늘 네게 이르노니 네가 나와 함께 낙원(樂園)에 있으리라”이다. 이 경우(境遇), “내가 오늘 네게 이르노니”라는 관용적(慣用的) 표현은 “네가 나와 함께 낙원(樂園)에 있으리라”는 말의 적절성(適切性)과 엄숙(嚴肅)함을 강조(强調)한다. 예수님께서는 그가 분명히 구원(救援)받을 것임을 바로 그 순간(瞬間) 그 자리에서 약속(約束)하고 계셨던 것이다. 


(11월22일) (화)  <“세상(世上)을 떠나서 그리스도와 함께”>


(Q)~(빌 1:21~24, 살전 4:13~18) 바울은 언제 “세상을 떠나서 그리스도와 함께” 있기를 기대(期待)하며 살았습니까?


(A)~○. 바울의 삶은 예수 안에 포함(包含)되어 있고 예수에 의해 경계가 정해져 있었다. 그의 생각은 완전히 그의 구주 안에 싸여 있었다. 그의 계획, 소망, 모든 열망은 그리스도에게 집중되어 있다. 모든 사상은 그에게 복속(服屬)되었다. (고후 10:5). 그러므로 바울의 생각은 이기적(利己的)이거나 세속적(世俗的)이 아니었으며 주님의 지배(支配) 아래 있었다. 즉 바울은 죽음 직후(直後)가 아니라 예수님의 재림(再臨)의 때 자신을 위해 준비(準備)된 상급(賞給)을 받을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와 함께 있게 될 것이라는 사실(事實)을 확신(確信)하는 삶이였다. 


○. 이와 같은 확신(確信)을 가지고 바울은 이미 죽은 신자(信者)들을 “예수 안에서 자는 자들”(살전 4:14)이라고 부르며, 재림(再臨)의 날 그리스도께서 그들을 깨우셔서 영생(永生)을 주실 것이라고 말했다. (고전 15:16~18, 살전 4:13~18).


○. 항상(恒常) 주와 함께 있으리라. 

바울은 독자(讀者)들을 그 황홀(恍惚)한 만남의 순간 그 너머까지 데려가고자 시도(試圖)하지 않는다. 각 시대의 제자(弟子)들은 마침내 주와 연합(聯合)되고, 미래는 보장(保障)된다. 이 시점(時點)에서 그 너머에 있는 것을 탐구(探究)할 필요가 없다. 그러나 여러 성경절(聖經節)들을 통해 우리는 연합한 후에 구속(救贖)받은 자들은 그들이 시작한 여행(旅行)을 계속하여 그리스도와 함께 하늘 집으로 간다는 것을 안다(참조 요 14:2, 3 주석). 그리하여 그들은 “항상 주와 함께 있”을 것이다. (살전 4:13~18, 재림교주석)


○. 사도 바울이 그리스도의 나타나심으로 박해자(迫害者)에서 한 사람의 그리스도인으로 회심(悔心)하였을 때 그는 자신을 만삭(滿朔)되지 못하여 난 자 같다고 하였다. 그때 이후로 그에게 있어서 그리스도는 전부였고, 모든 것 속에 그리스도가 있었다. “내가 사는 것은 그리스도”라고 그는 선포(宣布)하였다. 이 말씀이 모든 성경절(聖經節) 가운데서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意味)하느냐? 에 대해서 몇 마디로 된 가장 완전(完全)한 해석(解釋)이다. 이것이 복음 진리의 전부이다. 바울은 많은 자들이 깨닫기가 불가능(不可能)한 것같이 보이는 것을 깨닫고 있었다. 그는 참으로 열렬(熱烈)하였다. 그의 말들은 그의 마음이 그리스도께 집중(集中)되어 있다는 것을 보여주며 그의 전 생활이 그리스도께 매여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그리스도는 그의 생명의 근원(根源)이시요, 창조자(創造者)시며, 유지(維持)해 주시는 분이었다(리뷰 1897. 10. 19).  (빌 1:21~24, 화잇주석).


(11월23일) (수)  <옥(獄)에 있는 영(靈)들에게 선포(宣布)함>


(Q)~(벧전 3:13~20) 그리스도께서 노아의 때에 살던 “옥(獄)에 있는 영(靈)들에게” 선포(宣布)하셨다는 말의 의미(意味)는 무엇일까요?


(A)~○. 노아 시대의 사람들을 “영(靈)”이라고 칭(稱)한 것이 현대인에겐 이상하게 들릴지 모르지만, 초기(初期)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오늘날 우리가 “영혼(靈魂)”(soul)이라는 말을 “사람”으로 이해하는 것과 다를 바가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영(靈)”에 해당(該當)하는 헬라어 ‘프뉴마’는 자주 인간 존재를 가리키는 말로 사용된다. 본 절에서 프뉴마라는 단어가 사용된 것은 노아를 통해서 전파(傳播)된 구원(救援)의 기별과 사람들 간의 영적관계(靈的關係)를 강조(强調)하기 위함이다. 홍수 이전 시대의 사람들은 안전하게 보였을 것이지만 그들의 세상이 홍수로 멸(滅)해질 운명(運命)에 처해 있었기 때문에 “사형수(死刑囚)의 감방(監房)” 안에 있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들의 유일(唯一)한 소망(所望)은 노아를 통해 전파(傳播)된 경고(警告)를 받아들이고 방주(方舟)로 들어가는 데 있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영(靈)이 지옥(地獄)으로 내려가서 노아 홍수시대(洪水時代)에 회개(悔改)치 아니했던 자(者)들의 영(靈)들에게 설교(說敎)했다고 믿는 것은 죽음에 관한 성경(聖經)의 가르침과 배치(背馳)되는 말씀이다. 


○. 1세기만큼 극렬(極烈)한 고난(苦難)이 없는 시대에 사는 신자(信者)들에게 이 본문은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예수께서 우리를 죄와 사망의 세력에서 건져주신 구원자(救援者)이시며, 동시에 악(惡)한 영적세력(靈的勢力)들에게까지 승리(勝利)를 거두신 진정한 만물의 통치자(統治者)라는 사실을 알려줍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이미 얻은, 그리고 약속된 최종적 승리를 확신하면서 능히 위기를 극복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참된 신자들은 위기(危機)의 한복판에서도 영적세력(靈的勢力)들은 물론 만물을 통치하시는 진정한 승리자 그리스도 예수께 영광을 돌릴 것입니다. 그가 모든 상황과 위기를 다루실 것입니다. 


○. 옥(獄). 헬라어 퓔라케(pulake-), 

“감시(監視)하다”, “지키다”, 따라서 사람들을 감시(監視)하고 지키는 장소(場所), 곧 “옥(獄)”을 가리킨다. 베드로가 여기서 실제적(實際的)으로 말하는지 상징적(象徵的)으로 말하는지는 문맥(文脈)에 따라 결정해야 한다. 실제적(實際的)인 것으로 볼 경우, 이 “옥(獄)”은 어떤 이들이 주장(主張)하는 것처럼 19절에 나오는 “영(靈)”들과 같은 죽은 자의 영혼(靈魂)들이 그들의 운명이 결정되기까지 감시(監視)를 받는 장소일 것이다. 그러나 상징적(象徵的)이라고 볼 경우(境遇), “옥(獄)”은 “순종(順從)치 아니하던 자들”의 영(靈)들의 영적(靈的)인 상태(狀態)를 가리킬 것이다. 후자(後者)의 의미(意味)로 “옥(獄)”을 사용하는 경우는 (사 4:27; 61:1; 눅 4:18)을 참조하라. 홍수전(洪水前) 사람들이 얼마나 든든하게 죄의 감옥(監獄) 가운데 갇혀 있었는가는 (창 6:5~13)의 내용과, 오직 여덟 사람만이 거기로부터 나올 수 있었다는 사실(벧전 3:20)을 보면 분명(分明)해진다. 그리스도 외에는 사단이 인간을 속박(束縛)하는 악(惡)한 습관(習慣)과 욕망(慾望)에서 그들을 해방(解放)시켜 주지 못한다. 벧전 3:13~20, 재림교주석)


○. (벧전3:19) 영(靈)으로 가서 옥(獄)에 있는 영(靈)들에게 선포(宣布)하시니라. 

본 절은 해석(解釋)상에 있어서 난해(難解)한 구절(句節) 중의 하나이다. 

본문에 있는 영(靈)은 누구인가? 


○. 만약 영(靈)을 예수 그리스도로 본다면 예수 그리스도께서 친히 전파(傳播)하셨는지, 아니면 구약(舊約) 시대(時代)의 선지자(先知者)들을 통해서 전파(傳播)했는지,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전파하셨다면 누구에게, 언제, 무엇을 전파하셨는지에 대해 논란(論難)이 많다. 몇 가지 견해는 다음과 같다.

   (1) ‘에녹의 영(靈)’이 음부(陰府)에 있는 타락(墮落)한 천사들에게 전파(傳播)했다는 견해(見解)이다(Nestle, Harris, offatt, Goodspeed).

   (2) 그리스도가 죽으신 후 부활(復活)하기까지의 동안에 노아의 홍수 때 멸망(滅亡)하여 음부(陰府)에 갇혀 있는 자들을 구원(救援)하기 위하여 전파(傳播)했다는 견해이다(Bigg, Hunter).

   (3) 그리스도께서 타락(墮落)한 천사들에게 전도(傳道)하신 것이라는 견해이다(Blum, Dalton,Kelly).

   (4) 그리스도가 성육신(聖肉身) 전에 성령(聖靈)으로 노아를 통해 당시의 패역(悖逆)한 사람들을 살리기 위해 전도(傳道)했다는 견해(見解)이다(Jerome,Augustine, Aquinas). 이 견해에 따르면 본 절의 ‘옥(獄)’은 이 세상을 의미한다. 이러한 견해들 중 네 번째 견해(見解)가 가장 타당(妥當)하다. 본 절에 대한 가장 자연스럽고 정직한 이해에 따르면, 예수께서는 그분의 영을 통해서 그들에게 가셨다. 


○. 몇몇 역본(譯本)들이 보여 주는 것처럼, 베드로가 예수께서 몸과 분리(分離)된 형체(形體) 없는 영(靈)의 상태로 그들에게 가셨다고 생각하지 않았음이 이 편지의 다른 언급들에 분명하게 나타난다. (베드로전서 1:11)은 그리스도의 영(靈)이 예수를 통해 이르러 올 구원(救援)을 예언하는 데 선지자들을 어떻게 지도하셨는지를 묘사(描寫)한다. 노아도 구원(救援)의 기별(寄別)을 선포(宣布)했다. 베드로는 노아를 “의(義)를 전파하는 [자]”(벧후 2:5, 헬라어 ‘케뤽스’)로 칭(稱)하는데, 이 단어는 본 절에 나오는 “선포(宣布)하다”(헬라어 ‘케뤽소’)라는 동사(動詞)와 같은 어근(語根)을 가진 말이다. 사실 신약(新約)에서 이 단어들은 오직 복음 전파(傳播)를 가리키는 경우에만 사용된다.


○. 예수께서 성령(聖靈)으로 말미암아 노아시대에 노아를 통해 “옥(獄)에 있는 영(靈)들” 즉 당시의 패역(悖逆)한 사람들에게 전파(傳播)하셨다는 것이 이 난해(難解)한 본문에 대한 최선의 이해이다. 예수께서는 당신의 제자들에게, 성령이 와서 죄에 대해 책망(責望)할 것이라고 말씀하셨다(요 16:5). A. D. 1세기에 하나님의 영(靈)께서 제자(弟子)들을 통해 말씀하신 것처럼 홍수시대(洪水時代)에도 노아를 통해 말씀하셨다. 예수께서는 이사야의 말을 인용하여(사 61:1, 42:7),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전파하는 것이 그분의 사역(使役)에 포함(包含)된다고 말씀하셨다(눅 4:18).  (벧전 3:13~20, 만나주석)


(11월24일) (목)  제단(祭壇) 아래의 영혼(靈魂)들


(Q)~(계 6:9~11) 죽은 순교자(殉敎者)들의 “영혼(靈魂)들”이 “제단(祭壇) 아래”서 큰소리로 외친다는 말씀의 참된 의미(意味)는 무엇일까요?


(A)~○. 다섯째 인(印)을 떼실 때에 요한은 이상(異象) 중에 한 무리의 사람들이 제단(祭壇) 아래 있는 것을 보았는데,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과 예수 그리스도의 증거(證據)로 인(因)하여 죽임을 당한 영혼들이었다. 하나님을 위해 살다가 죽은 순교자(殉敎者)들을 상징(象徵)하는 것으로서 마침내 하나님에 의해 정의(定義)가 실현(實現)될 것임을 보여 준다. 


○. 제단(祭壇). 

예언적 장면에 제시된 제단(祭壇)은 히브리 성소(聖所)의 놋 제단을 상기시키기 때문에, 순교자(殉敎者)들은 하나님께 바쳐진 희생제물(犧牲祭物)들로 여겨졌을 것이다. 희생제물의 피는 그 제단 아래에 쏟아졌고, “육체(肉體)의 생명(生命)”(70인역, 프쉬케[psuche-], 즉 “영혼(靈魂)”)이 피에 있으므로 순교(殉敎)에 스스로를 바친 자들의 영혼(靈魂)이 제단(祭壇) 아래 있는 것처럼 간주(看做)되었을 것이다. 후기 유대인 전승(傳承)은 이스라엘의 죽은 자들은, 말하자면 제단 아래 매장(埋葬)되었고, 제단 아래 매장(埋葬)된 자들은, 말하자면 영광의 보좌(寶座) 아래 매장(埋葬)되었다는 사상(思想)을 제시(提示)한다(참조 Strack and Billerbeck, Kommentar zum Neuen Testament, 3:803).

어떤 사람들은 그 제단(祭壇)이 (계 8:3)에서 언급(言及)한 것과 동일시(同一視)되어야 한다고 주장(主張)한다.” (계 6:9~11, 재림교주석)


○. 다섯째 인(印)을 떼실 때에 요한은 이상(異象) 중에 한 무리의 사람들이 제단(祭壇) 아래 있는 것을 보았는데,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과 예수 그리스도의 증거(證據)로 인(印)하여 죽임을 당한 영혼(靈魂)들이었다. 이 장면(場面)이 지나가고 난 후에 계시록(啓示錄) 18장에 묘사(描寫)된 장면(場面)이 나왔다. 그때에 참되고 충성(忠誠)스러운 사람들이 바벨론에서 부름을 받고 나왔다(계 18:1-5 인용)(원고 39, 1906). (계 6:9~11, 화잇주석)


○. 제단(祭壇) 아래 있는 “영혼(靈魂)들” 또한 상징적(象徵的)이다. “영혼(靈魂)들”이라는 표현을 문자(文字) 그대로 받아들인다면, 순교자(殉敎者)들이 하늘에서 온전히 행복하지 않다고 결론(結論) 내릴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그들이 여전히 원한(怨恨) 갚아 주시기를 외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런 모습은 그들이 하늘에서 구원(救援)의 상급(賞給)을 마음껏 누리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 않는다. 원한(怨恨)을 갚고자 하는 마음은 우리의 삶을 비참(悲慘)하게 만든다. 

네 생물(生物)은 기록(記錄)된 짐승의 특징(特徵)들을 지닌, 실제적(實際的)으로 날개 달린 생물들을 나타내지 않는다. 마찬가지로 하늘에는 제단(祭壇) 밑에 있는 ‘영혼(靈魂)들’이 없다. 광경(光景) 모두는 위에서 기록한 영적교훈(靈的敎訓)을 가르치기 위해 시각적(視覺的)으로 표현(表現)된 상징(象徵)이었다. (제칠일안식일예수재림교 주석, 14권, 502쪽).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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