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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과 반대되는 구절들 (질문, 대답, 설명) 11/26/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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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김명호 작성일22-11-19 18:06 조회5,593회 댓글2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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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과 반대되는 구절들 

(11월 26일 안식일 / 일몰: 오후 5시 15분)

 

연구 범위: 눅 16:19~31, 눅 23:43, 요 20:17, 빌 1:21~24, 벧전 3:13~20, 계 6:9~11

 

기억절: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줄 생각하고 성경을 연구하거니와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언하는 것이니라”(요 5:39). 

 

베드로는 우리에게 경고한다. “너희 속에 있는 소망에 관한 이유를 묻는 자에게는 대답할 것을 항상 준비하”라(벧전 3:15). 바울도 말한다. “너는 말씀을 전파하라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항상 힘쓰라 범사에 오래 참음과 가르침으로 경책하며 경계하며 권하라 때가 이르리니 사람이 바른 교훈을 받지 아니”할 것이다(딤후 4:2, 3).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가 믿는 것들과 잘 조화되는 말씀들뿐만 아니라 우리가 믿는 것과 다른 것을 가르치기 위해 사용되는 말씀도 살펴보아야 한다. 

말씀을 살펴볼 때, 우리는 예수님의 훌륭한 모본을 따라야 한다. “그리스도께서는 진리의 말씀은 하나도 감추지 않으셨지만 항상 그것을 사랑으로 말씀하셨다.…예수께서는 무례하시거나 쓸데없이 가혹한 말씀을 하시거나 민감한 자에게 공연한 고통을 주신 일이 전혀 없으셨다. 그는 인간의 약점을 비난하지 않으셨다”(시대의 소망, 353).

이번 주 우리는 사람들이 영혼 불멸에 관한 가르침을 정당화하기 위해 사용하는 성경절들을 살펴볼 것이다. 이를 통해 우리가 가진 확신을 강화하고, 이 중요한 주제에 관해 질문하는 사람들에게 친절하게 대답할 수 있도록 준비할 것이다.

 

*학습 목표

- 깨닫기

죽음과 사후 세계에 관한 성경의 말씀 가운데 잘못 이해되고 있는 말씀이 무엇인지 확인하고 제대로 깨닫는다.

- 느끼기

겸손한 마음으로 기도하며 하나님의 말씀 앞에 설 때, 깨닫게 하시는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한다. 

- 행하기

내가 믿는 것이 무엇인지 확실히 이해하고 설명할 수 있도록 말씀을 깊이 묵상하며 살아간다.

 

TMI 위로

2. 부자와 나사로(눅 16:19~31)의 이야기가 사후 세계에 관한 문자적인 묘사가 아닌 이유는 무엇입니까?

※ 거기 기록된 문자가 상징적이며 또 교훈이 사후 세계의 실상을 가르치는 것이 아니고 기회가 있을 때 미래를 준비해야 한다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 비유에는 몇 가지 중요한 진리교훈이 있다.

1. 구원은 세상의 빈부귀천의 신분과 상관없다. 2. 죽은 후에 다시 구원의 기회가 없다. 3. 진리를 깨닫는 것은 이적보다 기록된 말씀에서 들어야 한다. 4. 아브라함의 품에 있다는 것은 믿음으로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어야 한다. 등등.

3. 예수님께서 십자가 위에서 회개한 강도에게 주신 약속의 올바른 이해는 무엇일까요?(눅 23:43)

※ 예수님의 약속은 즉각적이라는 것이다. 믿을 때 바로 구원이 약속된다.

4. 바울은 언제 “세상을 떠나서 그리스도와 함께” 있기를 기대하며 살았습니까?(빌 1:21~24, 살전 4:13~18) 

※ 예수님 재림할 때.

5. 그리스도께서 노아의 때에 살던 “옥에 있는 영들에게” 선포하셨다는 말의 의미는 무엇일까요?(벧전 3:13~20) 

※ 그당시 불순종하는 사람들에게 의를 전파했다는 뜻이다(벧후2:5).

6. 죽은 순교자들의 “영혼들”이 “제단 아래”서 큰소리로 외친다는 말씀의 참된 의미는 무엇일까요?(계 6:9~11)

※ 하나님께서 주를 위해 충성한 사람들의 모든 것에 관심을 두신다는 것이다. 

 

결론

성경에 기록된 중요한 구절들을 자의적(恣意的)으로 해석함으로 오류에 빠지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말씀 앞에 늘 겸손한 자세로 서서 성령님의 도우심을 구하며 성경이 정말 무엇을 이야기하는지 자세히 살펴야 합니다. 또한, 깨달은 진리를 예수님과 같은 사랑의 마음으로 친절하게 설명할 수 있어야 합니다.

 

11월 20일(일) 부자와 나사로

 

누가복음 16:19~31을 읽어 보라. 이 이야기가 사후 세계에 관한 문자적인 묘사가 아닌 이유는 무엇인가?

[눅16:19~31] 한 부자가 있어 자색 옷과 고운 베옷을 입고 날마다 호화롭게 즐기더라 20 그런데 나사로라 이름하는 한 거지가 헌데 투성이로 그의 대문 앞에 버려진 채 21 그 부자의 상에서 떨어지는 것으로 배불리려 하매 심지어 개들이 와서 그 헌데를 핥더라 22 이에 그 거지가 죽어 천사들에게 받들려 아브라함의 품에 들어가고 부자도 죽어 장사되매 23 그가 음부에서 고통중에 눈을 들어 멀리 아브라함과 그의 품에 있는 나사로를 보고 24 불러 이르되 아버지 아브라함이여 나를 긍휼히 여기사 나사로를 보내어 그 손가락 끝에 물을 찍어 내 혀를 서늘하게 하소서 내가 이 불꽃 가운데서 괴로워하나이다 25 아브라함이 이르되 얘 너는 살았을 때에 좋은 것을 받았고 나사로는 고난을 받았으니 이것을 기억하라 이제 그는 여기서 위로를 받고 너는 괴로움을 받느니라 26 그뿐 아니라 너희와 우리 사이에 큰 구렁텅이가 놓여 있어 여기서 너희에게 건너가고자 하되 갈 수 없고 거기서 우리에게 건너올 수도 없게 하였느니라 27 이르되 그러면 아버지여 구하노니 나사로를 내 아버지의 집에 보내소서 28 내 형제 다섯이 있으니 그들에게 증언하게 하여 그들로 이 고통 받는 곳에 오지 않게 하소서 29 아브라함이 이르되 그들에게 모세와 선지자들이 있으니 그들에게 들을지니라 30 이르되 그렇지 아니하니이다 아버지 아브라함이여 만일 죽은 자에게서 그들에게 가는 자가 있으면 회개하리이다 31 이르되 모세와 선지자들에게 듣지 아니하면 비록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는 자가 있을지라도 권함을 받지 아니하리라 하였다 하시니라.

 

답: 사용한 단어가 대부분 상징적이고 비유적이다. 아브라함의 품→천국, 음부→지옥, 영혼이라는 말을 사용하지 않았음, 천국과 지옥이 빤히 보이는 것으로 묘사하여 서로 대화할 수 있는 것처럼 보임. 그렇다면 의인들이 그들을 보면 천국이 천국 될 수 없을 것이다. 지옥보다 더 고통스럽지 않을까?

 

어떤 학자들은 누가복음 16:19~31을 문자 그대로 해석하여, 이 말씀이 죽은 자의 상태를 묘사하고 있는 것으로 이해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이와 같은 견해는 몇 가지 비성서적 결론으로 이끌 뿐만 아니라 이미 살펴본 여러 성경 구절들과 상충되는 결론에 도달하게 한다.

이 말씀을 문자 그대로 해석한다면, 첫째, 우리는 하늘과 지옥이 각 곳에 거하는 자들이 서로 대화할 수 있을 만큼 가까운 거리에 있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할 것이다(눅 16:23~31). 또한, 사후 세계에서 몸은 무덤에 누워있지만, “눈”과 “손가락”과 “혀”를 가지고 있을 뿐만 아니라 목마름까지 느끼는 의식을 가진 영혼이 있음을 인정해야 할 것이다(눅 16: 23, 24).

만일, 이 말씀이 죽은 상태의 인간을 묘사하는 것이라면, 하늘은 분명 기쁨과 행복의 장소가 아닐 것이다. 왜냐하면, 구원 받은 자들이 자신들의 사랑하는 사람들의 끝없는 고통을 가까이에서 지켜볼 뿐만 아니라, 심지어 대화까지 하게 되기 때문이다(눅 16:23~31). 어머니가 사랑하는 자녀의 쉼 없는 고통을 지켜보면서 어떻게 행복할 수 있단 말인가? 그런 상태에서는 슬픔도 없고 눈물도 없으며 고통도 없을 것이라고 하신 하나님의 약속이 성취될 수 없을 것이다(계 21:4). 

이와 같은 모순으로 인해 많은 현대 성경 학자들은 부자와 나사로에 관한 이야기는 단지 비유일 뿐, 이야기의 모든 부분을 문자 그대로 받아들일 수는 없는 것으로 여긴다. 조지 E. 래드(George E. Ladd)는 비록 재림교인은 아니지만 다음의 말을 통해 마치 재림교인인 것처럼 이야기한다. “이 이야기는 당시 유대인들이 갖고 있던 생각을 이용한 비유로서, 죽은 자의 상태를 가르치기 위해 기록된 것이 아니다”(G. E. Ladd, “Eschatology,” in The New Bible Dictionary, 388).  

 부자와 나사로의 비유는 잘 갖춰 입은 “부자”와 “헌데투성이”의 나사로라 이름하는 거지 사이의 극명한 대조를 보여 줌으로서(눅 16:19, 20) 다음과 같은 교훈을 준다. (1) 현재의 신분이나 사회적 평가가 미래의 상급의 기준이 아니다. (2) 각 사람의 영원한 운명은 현재의 삶을 통해 결정되는 것으로서 사후에 뒤바뀔 수 없다(눅 16:25, 26).

 

<묵상>

“이르되 모세와 선지자들에게 듣지 아니하면 비록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는 자가 있을지라도 권함을 받지 아니하리라 하였다 하시니라”(눅 16:31). 이 말씀을 통해 성경의 권위와 그것에 우리가 어떻게 반응해야 하는지에 대해 무엇을 배울 수 있습니까? 

 

답: 성경 말씀은 이적보다 더 권위있는 신앙의 표준이다. 

    

<부가설명> 사탄은 사람들이 성경을 사람의 생각대로 해석하도록 교묘한 속임수를 쓴다. 예수님께 ‘기록되었으되’라고 하면서 시91:11,12절을 인용하였다. 성경 전체의 사상을 바르게 이해하지 않으면 성경 말씀으로 속이는 사탄의 술수에 빠질 수 있다. 아주 그럴듯해 보이기 때문이고, 인간의 시각에는 더 합리적으로 보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성경은 사람의 마음으로 생각해보지도 못한 하나님의 생각을(고전2:9) 사람의 언어로 기록하여 주셨으므로 성령께서 친히 해석하는 것을 들어야 바르게 깨달을 수 있다. 신자는 누구든지 알아듣는 귀와 깨닫는 마음을 주시도록 간구해야 할 것이다(사50:4,5). 성경은 ‘해석은 하나님께 있다’(출40:8)라고 분명히 선언했고 이것을 위하여 성령께서 오신 것이다(요16:13~15, 고전2:9~14). 그러므로 우리는 모든 생각을 사로잡아 예수님께 복종시켜야 한다(고후10:5). 그렇지 않고 세상 철학이나 초등학문으로 성경을 해석하려는 세상의 지혜와 지식을 경계해야 한다. “누가 철학과 헛된 속임수로 너희를 노략할까 주의하라 이것이 사람의 유전과 세상의 초등 학문을 좇음이요 그리스도를 좇음이 아니니라”(골2:8). 영혼 문제에 관하여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원리를 바르게 이해하는 시각으로 말씀을 해석해야 한다. 사탄이 ‘결코 죽지 아니하리라’라고 한 주장을 진리인 것처럼 보이기 위하여 영혼불멸설을 사람들에게 주입 시키고 사탄의 부하 천사들이 죽은 자의 영혼인것처럼 활동해서 사람을 기가막히에 속인다는 것을 우리는 다 안다. 성령님 감사합니다. 

 

<교훈>

부자와 나사로(눅 16:19~31)의 이야기는 중요한 영적 교훈을 주기 위한 비유다. 문자적으로 해석하여 죽은 자의 상태를 나타내는 것으로 이해해서는 안 된다.

 

11월 21일(월) “오늘...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영혼 불멸에 관한 가르침을 증명하기 위해 가장 많이 사용되는 성경절 중의 하나가 바로 누가복음 23:43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하시니라.” 대부분의 성경 번역본들은 이 성경절을 예수님께서 돌아가신 바로 그날 예수님과 강도가 낙원에 함께 있게 될 것처럼 번역한다. 이와 같은 사실이 놀랍지 않은 것은, 그 성경들이 영혼 불멸에 관한 교리를 믿는 신학자들에 의해 번역되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렇게 번역하는 것이 가장 정확한 번역일까?

 

누가복음 23:43을 요한복음 20:17 그리고 요한복음 14:1~3과 비교해 보라. 예수님께서 막달라 마리아에게 하신 말씀과 제자들에게 주신 약속에 비추어 볼 때, 십자가 위에서 회개한 강도에게 주신 약속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눅23:43]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하시니라.

[요20:17]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를 붙들지 말라 내가 아직 아버지께로 올라가지 아니하였노라 너는 내 형제들에게 가서 이르되 내가 내 아버지 곧 너희 아버지, 내 하나님 곧 너희 하나님께로 올라간다 하라 하시니,

[요14;1~3]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 2 내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도다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일렀으리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거처를 예비하러 가노니 3 가서 너희를 위하여 거처를 예비하면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

 

답: 부활하시고 마리아를 만났을 때 아직 아버지께 가지 않았다고 하셨다. 또 예수님 재림하셔야 성도들이 예수님과 함께 있게 된다고 하셨다. 죽은 후에 그 영혼이 바로 천국에 간다면 이 두 구절은 사실이 아닌 것이 된다.

 

예수님과 강도가 바로 그날 낙원(또는 하늘)으로 갔다고 추정하는 것은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후에 막달라 마리아에게 내가 아직 하늘에 계신 아버지에게로 올라가지 않았다고 하신 말씀과 상충된다(요 20:17). 또한, 그와 같은 이해는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자신이 재림하는 날 비로소 그들을 하늘로 데리고 가겠다고 하신 약속과도 상충된다(요 14:1~3).

누가복음 23:43의 쟁점은 “오늘”(sēmeron)이라는 부사가 그 뒤에 이어 등장하는 동사(“있으리라”)와 연결되느냐 아니면 그 앞에 있는 동사(“이르노니”)와 연결되느냐 하는 것이다. 윌슨 파로시(Wilson Paroschi)는 이에 관해 “문법적인 관점”으로 볼 때 둘 중 어느 것이 옳은지 선택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함을 인정한다. “하지만 누가는 많은 경우, 이 부사를 앞에 나오는 동사에 연결한다. 누가복음과 사도행전에 오늘(sēmeron)이라는 부사가 20번 등장하는데, 그중에서 14번이 앞서 나온 동사와 연결되어 사용되고 있다”(The Significance of a Comma: An Analysis of Luke 23:43, Ministry, June 2013, 7).

 그러므로 누가복음 23:43의 가장 자연스러운 번역은 “진실로 내가 오늘 네게 이르노니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이다. 이 경우, “내가 오늘 네게 이르노니”라는 관용적 표현은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는 말의 적절성과 엄숙함을 강조한다. 예수님께서는 그가 분명히 구원받을 것임을 바로 그 순간 그 자리에서 약속하고 계셨던 것이다.

 

<묵상>

회개한 강도는 하나님께 드릴 것이 아무것도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런 그가 예수님으로부터 영생을 약속받았습니다(눅 23:39~43). 이 이야기가 오직 믿음으로 말미암는 구원에 대한 위대한 진리를 어떻게 나타내 보여줍니까? 

 

답: 이 이야기는 구원이 자기의 행위 공로에 달린 것이 아니라 예수께서 구원하신다는 것을 확실히 믿는 신앙고백에 연결된다는 것을 가르쳐준다.

 

<부가설명> 구약성경에는 범죄한 영혼은 죽는다고(겔18:4) 직설적으로 말씀하셨고 신양성경에서는 부활과 관련하여 말씀하실 때 사람이 재림하시는 예수님의 음성을 듣는 곳이 무덤 속에 있을 때라고 하셨다. “이를 놀랍게 여기지 말라 무덤 속에 있는 자가 다 그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선한 일을 행한 자는 생명의 부활로, 악한 일을 행한 자는 심판의 부활로 나오리라”(요5:28,29). 분명히 재리하실 때 예수님의 음성을 무덤 속에 있는 자가 듣는다고 하시지 않았는가? 만일 그들이 영혼이 천국이나 지옥에 가 있다면 그 영혼이 있는 곳에서 예수님 음성을 들을 것이다. 왜냐하면, 죽어 흙이 된 몸은 음성을 들을 수 없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죽었을 때 바로 아버지 나라에 가시지 않았다고 예수께서 친히 말씀하셨다. 이미 본대로 요20:17에 말씀하셨고, 마12:40에서도 말씀하셨다. “요나가 밤낮 사흘 동안 큰 물고기 뱃속에 있었던 것 같이 인자도 밤낮 사흘 동안 땅 속에 있으리라.”예수님은 분명히 밤낮 사흘을 땅속에 있을 것이라고 하셨다. 사람들이 예수님의 몸은 그래도 영혼은 하늘에 갔다고 우긴다. 그런데 요20:17은 부활하신 직후 아버지께 아직 가지 않았다고 하셨다. 여기에는 또 부활하셔서 안직 안가셨지 영혼은 갖다왔다고 말할 것이다. 이사야 선지자를 통하여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그 영혼을 버려 사망에 이르게 한다고 예언했다. “그러므로 내가 그에게 존귀한 자와 함께 몫을 받게 하며 강한 자와 함께 탈취한 것을 나누게 하리니 이는 그가 자기 영혼을 버려 사망에 이르게 하며 범죄자 중 하나로 헤아림을 받았음이니라”(사53:12). 이 모든 말씀을 종합할 때 눅23:43을 바르게 깨달을 것이다. 

 

<교훈>

예수님께서는 회개한 강도에게 그가 오늘 낙원에 있겠다고 말씀하신 것이 아니라 그가 회개한 바로 그 순간 그에게 구원의 선물이 주어졌음을 약속하신 것이다. 

 

11월 22일(화) “세상을 떠나서 그리스도와 함께”

 

빌립보서 1:21~24과 데살로니가전서 4:13~18을 읽어 보라. 바울은 언제 “그리스도와 함께”(빌 1:23) 그리고 “주와 함께”(살전 4:17) 있기를 기대했는가?

[빌1:21~24] 이는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라 22 그러나 만일 육신으로 사는 이것이 내 일의 열매일진대 무엇을 택해야 할는지 나는 알지 못하노라 23 내가 그 둘 사이에 끼었으니 차라리 세상을 떠나서 그리스도와 함께 있는 것이 훨씬 더 좋은 일이라 그렇게 하고 싶으나 24 내가 육신으로 있는 것이 너희를 위하여 더 유익하리라.

[살전4:17] 그 후에 우리 살아 남은 자들도 그들과 함께 구름 속으로 끌어 올려 공중에서 주를 영접하게 하시리니 그리하여 우리가 항상 주와 함께 있으리라.

 

답: 세상을 떠나서 그리스도와 함께 있는 것이 훨씬 좋다고 했는데. 세상을 떠나 그리스도와 함께 있는 때는 예수께서 재림하셔서 모든 의인들을 공중으로 끌어올렸을 때라고 확언했다.

 

바울은 지금 “그리스도 안에”(고후 5:17) 살며, 예수님께서 재림하신 후에는 “그리스도와 함께”(참조, 살전 4:17) 살고자 하는 열정으로 가득했다. 죽음조차도 구세주 그리고 주님께 속하고자 하는 그의 의지를 막을 수 없었다. 로마인들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이야기했듯이 “사망이나 생명” 조차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을 것이었다(롬 8:38, 39).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다”(롬 14:8).

이와 같은 확신을 가지고 바울은 이미 죽은 신자들을 “예수 안에서 자는 자들”(살전 4:14)이라고 부르며, 재림의 날 그리스도께서 그들을 깨우셔서 영생을 주실 것이라고 말했다(고전 15:16~18, 살전 4:13~18).

바울이 “차라리 세상을 떠나서 그리스도와 함께”(빌 1:23) 있고자 하는 그의 바람을 이야기했을 때, 그것이 그가 죽은 후에 자신의 영혼이 그리스도와 함께 살기 위해 몸을 떠나는 것을 의미했는가? 전혀 그렇지 않다. 이 성경절에서 “바울은 문제 가득한 현재의 삶을 벗어나 그리스도와 함께 있고 싶은 소망을 말로 표현한 것이다. 여기서 바울은 자신의 죽음과 예수님의 재림 사이에 존재하는 시간 간격은 말하지 않는다. 이 구절은 바울이 죽음과 동시에 하늘로 가리라고 기대했다고 가르치지 않는다. 그는 재림의 때까지 자신의 상급을 받지 못할 것임을 분명히 알고 있었다(딤후 4:8)”(Andrews Study Bible, 1555, 빌 1:23).

바울은 “죽음 후에 자신이 알게 될 바로 다음의 것은 죽은 자를 다시 살리기 위해 구름을 타고 오시는 그리스도이며, 그때야 비로소 ‘그리스도와 함께’(살전 4:17) 있게 될 것이라고 이야기한다. 또한, 성경의 기자들이 때로 긴 시간을 두고 떨어져 있는 두 가지의 사건을 함께 언급한다는 사실도 기억해야 할 것이다”(Andrews Study Bible, 1555, 빌 1:23).

 그렇다면 바울이 사는 것보다 죽기를 더 원했던 이유는 무엇인가? 그래야지만 마침내 자신이 겪고 있던 모든 문제로부터 쉼을 얻을 수 있기 때문이었다(고전 9:27). 그는 재림의 때 “의의 면류관”을 받게 되리라는 확신이 있었다(딤후 4:6~8). 바울은 죽고 싶지 않았지만 자신의 죽음 뒤에 무엇이 기다리고 있는지 분명히 알고 있었다.

 

<묵상>

정말로 감당하기 힘든 시간을 지날 때, 차라리 죽었다가 다시 눈을 떴을 때 “그리스도와 함께”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해 보지 않은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이런 우리의 경험이 바울이 빌립보서에서 한 말을 이해하는 데 어떤 도움을 줍니까? 

 

답: 바울의 표현은 이 땅에서 고생하는 삶과 예수님 안에서 복된 삶을 살게 되는 것을 대조하여 표현한 것이다. 

 

<부가설명> 바울은 자기에게 좋은 것보다 성도들의 유익한 것을 택한다고 말한다. 바울이 여기서 말하는 것은 영혼이 하늘에 가서 예수님과 함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는 부활하여 하늘에 가서 예수님과 함께 있는 것을 뜻한다. 그러므로 바울은 “어떻게 해서든지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에 이르려 하노니”(빌3:11)라고 간절히 말하고 있다. 만일 사람이 죽은 후에 그 영혼이 천국에 가서 그때부터 예수님과 항상 함께 있는다면 바울이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에 이르려고 ‘어떻게 해서든지’라는 말을 사용하지 않았을 것이다. 죽으면 영혼이 천국 가는데 부활에 이르기 위하여 그렇게 간절히 바랄 필요가 있을까? 바울은 가족이 죽어서 슬퍼하는 사람들에게 부활에 관한 소망을 확실히 말하고 이것을 생각하고 위로하라고 권고했다(살전4:16~18). 만일 영혼이 천국에 간다면, 그 영혼이 천국에 가서 예수님과 함께 행복한 중에 살고 있으니 기뻐하라고 권고하는 것이 옳지 않을까? 사람이 죽은 후에 영혼이 천국이나 지옥에 가서 행복이나 고통의 삶을 산다는 것은 결코 죽지 않을 것이라고 주장한 뱀의 주장을 믿는 것이다. 사람은 각각 생명을 가지고 있는 이원적 존재가 아니다. 오직 한 사람, 한 생명, 한 인격, 한 생활이 있을 뿐이다. 성령께서 사람들을 사탄의 기만의 사슬에서 풀어주시기를 바란다.

 

<교훈>

바울은 죽음 직후가 아니라 예수님의 재림의 때 자신을 위해 준비된 상급을 받을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와 함께 있게 될 것이라는 사실을 확신했다. 

 

11월 23일(수) 옥에 있는 영들에게 선포함

 

베드로전서 3:13~20을 읽어 보라. 그리스도께서는 어떻게 노아의 때에 살던 “옥에 있는 영들에게” 설교하셨는가?

[벧전3:13~20] 또 너희가 열심으로 선을 행하면 누가 너희를 해하리요 14 그러나 의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면 복 있는 자니 그들이 두려워하는 것을 두려워하지 말며 근심하지 말고 15 너희 마음에 그리스도를 주로 삼아 거룩하게 하고 너희 속에 있는 소망에 관한 이유를 묻는 자에게는 대답할 것을 항상 준비하되 온유와 두려움으로 하고 16 선한 양심을 가지라 이는 그리스도 안에 있는 너희의 선행을 욕하는 자들로 그 비방하는 일에 부끄러움을 당하게 하려 함이라 17 선을 행함으로 고난 받는 것이 하나님의 뜻일진대 악을 행함으로 고난 받는 것보다 나으니라 18 그리스도께서도 단번에 죄를 위하여 죽으사 의인으로서 불의한 자를 대신하셨으니 이는 우리를 하나님 앞으로 인도하려 하심이라 육체로는 죽임을 당하시고 영으로는 살리심을 받으셨으니 19 그가 또한 영으로 가서 옥에 있는 영들에게 선포하시니라 20 그들은 전에 노아의 날 방주를 준비할 동안 하나님이 오래 참고 기다리실 때에 복종하지 아니하던 자들이라 방주에서 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은 자가 몇 명뿐이니 겨우 여덟 명이라 21 물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이제 너희를 구원하는 표니 곧 침례라 이는 육체의 더러운 것을 제하여 버림이 아니요 하나님을 향한 선한 양심의 간구니라.

 

답: 옥에 있는 영들은 노아 당시 불순종하던 자들이고 노아를 통하여 방주 복음을 전하였다.

 

영혼 불멸을 믿는 주석가들은 그리스도께서 무덤에서 쉬고 계시는 동안 “옥에 있는 영들에게”(벧전 3:19) 설교하셨다고 주장한다. 예수님의 몸을 떠난 영이 지옥으로 가서 홍수 전 사람들의 영들에게 설교하셨다는 말이다.

하지만 이와 같은 기발하기까지 한 개념은 성경적으로 볼 때 결코 받아들여질 수 없다. 왜냐하면, 죽은 자들을 위한 두 번째 구원의 기회는 없기 때문이다(히 9:27, 28).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왜 더 이상 구원받을 기회도 없는 자들에게 설교하셨겠는가?

더불어 가장 중요한 점은, 이와 같은 이론이 죽은 자들은 최종적인 부활의 날까지 아무것도 모른 채 무덤에 누워있다는 성경의 가르침과 조화를 이루지 않는다는 사실이다(욥 14:10~12, 시 146:4, 전 9:5, 10, 고전 15:16~18, 살전 4:13~15).

또한, 만일 이 성경절이 정말로 예수님의 영이 지옥으로 내려가서 홍수 전에 살았던 악인들에게 설교했다고 이야기하고 있다면, 왜 그들만 예수님의 기별을 들었던 것인가? 지옥에서 그들과 함께 불타고 있던 다른 멸망 당한 사람들은 없었는가? 오직 홍수 전의 사람들만 예수님의 설교를 들었던 이유는 무엇인가?

그리스도께서 노아의 때 불순종 했던 타락한 천사들에게 설교하셨다는 주장 또한 말이 되지 않는다. “옥에 있는 영들”이 순종하지 아니하던 자들이라고 묘사되어 있는 반면(벧전 3:19, 20), 성경은 악한 천사들이 오늘까지도 여전히 불순종하고 있다고 이야기한다(엡 6:12, 벧전 5:8). 뿐만 아니라 타락한 천사들은 구원받을 다른 어떤 기회도 없이 “큰 날의 심판까지 영원한 결박으로 흑암에” 갇혀(유 6) 있다.

우리는 베드로전서 3장 19절에 나타난 “옥에 있는 영들”이 20절에서 “노아의 날... 복종하지 아니하던 자들”이라고 설명되어 있다는 사실을 주목해야 한다. 신약 다른 곳들에서와 마찬가지로 본문에서 사용된 영(spirit, pneuma)이라는 표현은, 구원의 초대를 듣고 응답할 수 있는 살아 있는 사람을 가리키기 위해 사용되었다. 

 “옥에 있는”이라는 표현은 분명 문자 그대로의 감옥이 아니라, 죄로 가득한 인간의 본성이 발견되는 죄의 감옥을 가리킨다(롬 6:1~23, 롬 7:7~25).

그리스도께서 회개하지 않는 홍수 전 사람들에게 설교하시는 것은 하나님의 인도하심에 따라(히 11:7) 당대의 사람들에게 “의의 설교자”가 되었던(벧후 2:5) 노아에 의해 성취되었다. 오늘 살펴본 본문은 참된 충성이 무엇인지를 설명하는 문맥에서 기록된 것이지 죽은 자의 상태를 설명하기 위해 기록된 것이 아니다.

 

<묵상>

히브리서 11:7을 읽어보십시오. 다시 한번 죄로 인해 타락해 버린 세상에서 하나님께서 노아에게 주신 사명은 무엇이었습니까?

[히11:7] 믿음으로 노아는 아직 보이지 않는 일에 경고하심을 받아 경외함으로 방주를 준비하여 그 집을 구원하였으니 이로 말미암아 세상을 정죄하고 믿음을 따르는 의의 상속자가 되었느니라.

 

답: 홍수 사건에 관하여 예언하고 경고하며 불신 세상을 정죄하는 사명이었다. 

 

<부가설명> 옥에 있는 이 사람들이 죽은 사람들의 영혼이 아니라 노아 때에 불순종하는 살아있는 사람들이었다. 성경은 “그가 또한 영으로 가서 옥에 있는 영들에게 선포하시니라 그들은 전에 노아의 날 방주를 준비할 동안 하나님이 오래 참고 기다리실 때에 복종하지 아니하던 자들이라”(벧전3:19,20)라고 그들이 누구인지 분명히 밝혔다. 옥이라고 한 말은 ‘퓔라케’인데, 지옥이나 음부라고 말하는 무덤이 아니다. 이것은 감옥이라는 말이다. 이 죄의 세상은 사형수들의 감옥이다. 아담의 자손들은 예외 없이 사형 선고를 받은 존재들이다. 이들은 본질상 진노의 자녀들이고(엡2:3), 아담 안에서 다 죽은 자들이고(고전15:22), 한 번 죽는 것이 정해진 자들이다(히9:27). 죽는 것이 정해진 사람은 사형수이다. 그래서 성경은 이 세상을 어두움의 세상,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 지옥(타르타로스)(벧후2:4) 등으로 기록하였다. 노아 시대 죄가 세상에 차고 넘쳐서 그 시대 사는 사람들은 다 사형집행이 되어야 할 사람들이었다. 그러나 사랑과 자비의 하나님께서 노아를 시켜 방주를 만들게 하고 누구든지 방주에 들어오기만 하면 사형집행을 면할 것이라고 그런 감옥에 있는 사람들에게 의를 전파했지만(벧후2:8) 그들이 듣지 않아서 노아 8식구 외에는 다 죽었다. 그들은 바로 그 시대에 불신하는 사람들이었다. 성경을 올바르게 읽는 것이 대단히 중요하다. 

 

<교훈>

예수님의 영이 지옥으로 내려가서 노아 홍수 시대에 회개치 아니했던 자들의 영들에게 설교했다고 믿는 것은 죽음에 관한 성경의 가르침과 조화를 이루지 않는다. 

 

11월 24일(목) 제단 아래의 영혼들

 

요한계시록 6:9~11을 읽어 보라. 죽은 순교자들의 “영혼들”이 어떻게 “제단 아래”에서 큰소리로 외칠 수 있는가? 

[계6:9~11] 다섯째 인을 떼실 때에 내가 보니 하나님의 말씀과 그들이 가진 증거로 말미암아 죽임을 당한 영혼들이 제단 아래에 있어 10 큰 소리로 불러 이르되 거룩하고 참되신 대주재여 땅에 거하는 자들을 심판하여 우리 피를 갚아 주지 아니하시기를 어느 때까지 하시려 하나이까 하니 11 각각 그들에게 흰 두루마기를 주시며 이르시되 아직 잠시 동안 쉬되 그들의 동무 종들과 형제들도 자기처럼 죽임을 당하여 그 수가 차기까지 하라 하시더라.

 

답: 이것은 실제 장면이 아니고 상징적 표현을 한 장면이다. 

 

요한계시록 6장의 다섯째 인을 떼는 장면에서 특이한 모습을 보게 된다. “제단 아래”에서 하나님께 원한 갚아 주시기를 외치고 있는 순교자들의 영혼들이 비유적으로 나타나 있는 것이다(계 6:9~11). 어떤 주석가들은 이 “제단”이 일곱째 인에서 언급된 향단이라고 주장한다(계 8:1~6). 그러나 요한계시록 6:9~11에 나타난 “피”에 관한 언급은 우리로 하여금 제물의 피가 부어졌던 번제단을 떠올리게 한다(레 4:18, 30, 34). 제물들의 피가 제단 주변에 뿌려진 것과 같이, 순교자들이 하나님의 말씀과 예수의 증거에 끝까지 충성함으로(계 6:9, 참조, 계 12:17, 14:12) 목숨을 잃었을 때, 그들의 피가 하나님의 제단에 상징적으로 부어졌다.

제단 아래 있는 “영혼들” 또한 상징적이다. “영혼들”이라는 표현을 문자 그대로 받아들인다면, 순교자들이 하늘에서 온전히 행복하지 않다고 결론 내릴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그들이 여전히 원한 갚아 주시기를 외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런 모습은 그들이 하늘에서 구원의 상급을 마음껏 누리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 않는다. 원한을 갚고자 하는 마음은 우리의 삶을 비참하게 만든다. 

또한, 요한이 실제 그대로의 하늘을 본 것이 아님을 기억하는 것이 중요하다. “거기에는 흰색, 붉은색, 검은색, 청황색 말을 타고 전쟁에 나가는 존재들이 없다. 예수는 거기서 칼에 상처를 입고 피를 흘리는 어린 양의 모습으로 나타나지 않는다. 네 생물은 기록된 짐승의 특징들을 지닌, 실제적으로 날개 달린 생물들을 나타내지 않는다. 마찬가지로 하늘에는 제단 밑에 있는 ‘영혼들’이 없다. 광경 모두는 위에서 기록한 영적 교훈을 가르치기 위해 시각적으로 표현된 상징이었다”(제칠일안식일예수재림교 주석, 14권, 502쪽).

 비재림교회 학자 조지 E. 래드(George E. Ladd)는 이렇게 기록했다. “여기에서(계 6:9~11) 제단은 희생의 피가 부어진 희생 제단이다. 요한이 제단 아래 있는 순교자들의 영혼들을 보았다는 구절은 죽은 자의 상태 또는 삶과 죽음 사이에 어떤 중간지대가 있다는 생각과 아무런 상관이 없다. 그것은 그저 그들이 하나님의 이름을 위해 순교 당했다는 사실을 보다 더 선명하게 표현한 것뿐이다”(A Commentary on the Revelation of John, 103).

 

<묵상>

정의가 실현되기를 간절히 외쳐보지 않은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불공정을 직접 경험한 사람이라면 더 그럴 것입니다. 비록 지금은 찾아보기 힘들지만, 하나님께서 마침내 정의를 실현하실 것임을 믿어야 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답: 하나님은 공의롭고 사랑이시기 때문이다.

 

<부가설명> 우리는 성경을 읽을 때 본문에 깊이 유의해야 한다. 이 구절로 영혼불멸을 주장한다면 본문 말씀과 충돌된다. 왜냐하면, 제단 아래 있는 영혼들이 죽은 영혼이기 때문이다. 성경은 이렇다. “죽임을 당한 영혼들이 제단 아래에 있어”(9절). 이 구절은 영혼이 죽임을 당했다고 말한다. 죽임을 당한 사람들의 영혼이 아니다. 그러므로 이 장면이 상징적이라는 것을 당장 알 수 있다. 죽은 영혼은 호소할 수 없다. 그런데 죽임 당한 영혼이 호소한다고 했으니 이것은 아벨의 피가 땅에서부터 하나님께 호소한다고 표현한(창4:10) 것과 같은 상징적 표현이다. 창세기의 이 장면에서는 피가 호소한다. 계시록은 죽임당한 영혼들이 호소한다. 아벨은 죽었는데 그의 피는 살아있다는 뜻이 아니다. 그와 같이 죽임당한 영혼은 죽임당한 순교자들을 표상하는 상징적 표현임을 알 수 있다. 이렇게 분명한 기록도 영혼불멸이라는 선입관으로 읽기 때문에 죽임을 당한 순교자들의 살아있는 영혼이라고 의식하는 것일 뿐이다. 교과에 설명한 대로 만일 죽임당한 순교자들의 살아있는 영혼이라면 그들이 있는 천국이 행복한 곳이 아니다. 아직도 억울하고 서러운 상태에 있는 것이다. 만일 그렇다면 그곳은 천국일 수 없다. 확증편향에서 벗어나서 말씀을 순결한 마음으로 읽으면 오해하지 않을 것이다. 

 

<교훈>

다섯째 인에 등장하는 제단 아래의 영혼들은 하나님을 위해 살다가 죽은 순교자들을 상징하는 것으로서 마침내 하나님에 의해 정의가 실현될 것임을 보여 준다. 

 

11월 25일(금) 더 깊은 연구를 위해

<실물교훈> 260~271, ‘부자와 나사로,’ <시대의 소망> 749~752, ‘갈바리’를 읽어 보라.

 

“그리스도께서는 부자와 나사로의 비유를 통해 사람들의 영원한 운명은 저희가 이 세상에서 어떻게 사느냐에 따라 결정된다는 것을 보여 주셨다. 은혜의 기간에 하나님의 은혜가 각 사람에게 제공된다. 그러나 사람이 만일 자기 만족을 위하여 그들에게 주어진 기회를 헛되이 보내게 되면 저희는 스스로 저희 자신을 영생에서 끊어 버리는 것이 된다. 죽은 후에 유예 기간은 어느 누구에게도 주어지지 않는다. 저희는 저희 자신의 선택으로 저희와 하나님 사이에 건널 수 없는 깊은 골짜기를 만든다”(실물교훈, 260).

 

“초기의 그리스도인들이 산과 광야로 추방되었을 때, 지하 감옥에 들어가 기아와 추위와 고문으로 죽게 되었을 때, 순교만이 그들의 고통에서 벗어나는 유일의 길인 것처럼 보였을 때 그들은 그들을 위하여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를 위하여 고난받기에 합당한 자로 인정받은 것을 기뻐했다. 그들의 귀중한 모본은 이전에 결코 없었던 환난의 때를 당하게 될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위로와 용기가 될 것이다”(교회증언 5권, 213).

 

핵심적인 토의를 위해

1. 인간의 본질에 대한 성경적인 이해가 이번 주 우리가 함께 공부한 성경절들을 보다 더 잘 이해하도록 어떻게 도와줄 수 있는가?

※ 영혼불멸설이 성경적이 아니라는 것을 확인할 수 있도록 깨닫게 한다.

 

2. 기독교 순교자들이 가졌던 타협 없는 신앙과 포스트모던 시대의 타협하는 신앙을 비교해 보라. 다시 말해, 그대에게 있어 목숨을 걸만한 일은 무엇인가? 만일 누군가가 모든 진리는 상대적이거나 문화에 따라 다른 것이라고 믿는다면 그 진리를 위해 목숨을 걸 필요가 있겠는가? 우리가 보기에는 옳지 않은 것을 위해서조차 기꺼이 목숨을 내놓는 사람들을 보면서 우리는 무엇을 배워야 하겠는가?

※ 죽기를 무서워하는 사람들과 죽어도 산다고 하신 말씀을 믿는 사람들의 삶의 태도는 분명히 달라야 한다.

 

3. 부자와 나사로의 비유를 다시 한 번 묵상해 보라. 예수님께서 부활하셨을 때 많은 사람들이 그분을 믿었다. 하지만 같은 증거를 가지고서도 믿지 않은 자들도 있었다. 이와 같은 사실이 굳어 버린 사람의 마음이 진리에 대해 어떻게 반응할 수 있는지에 대해 무엇을 가르쳐 주는가? 우리도 그와 같은 완고함을 갖지 않도록 어떤 노력을 해야 하겠는가?

※ 자기의 의식대로 진리를 왜곡하고 그것을 주장하는 위험한 반응을 한다. 우리는 말씀이 그렇다고 하면 아멘 할 줄 아는 신자가 되어야 한다.

댓글목록

김명호님의 댓글

김명호 작성일

열심히 공부하시는 독자들에게 대단한 실례를 했습니다. 집회 돌아다니다 오늘 집에 돌아와서 교과를 올리려고 컴퓨터를 켜서 교과를 열었는데 무조건 4기 9과를 그냥 올렸네요. 공부하신 분이 지적해서 확인하니 그런 실수를 했습니다. 용서하시기 바랍니다. 덕분에 다시 올렸습니다. 앞으로는 실수 않기를 기도하며 양해를 구합니다. 감사합니다.

이한용님의 댓글

이한용 작성일

목사님 감사드립니다. 그래도 빨리 수정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늘 건강 하시고 행복 하세요. 이한용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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