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2과 성경적 세계관 (질문, 대답, 설명) 12/17/22
페이지 정보
작성자 김명호 작성일22-12-10 01:47 조회5,557회 댓글0건본문
제12과 성경적 세계관
(12월 17일 안식일 / 일몰: 오후 5시 15분)
연구 범위: 눅 2:52, 마 4:23, 고전 6:19, 20, 시 24:3, 4, 행 8:4~24, 요일 3:1~3
기억절: “평강의 하나님이 친히 너희를 온전히 거룩하게 하시고 또 너희의 온 영과 혼과 몸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강림하실 때에 흠 없게 보전되기를 원하노라”(살전 5:23).
요한계시록은 그리스도의 재림 전에 있을 두 가지 중요한 ‘세계화’에 대해 말한다. 13장에는 “모든 세계”가 바다에서 나온 짐승(계 13:3, 7, 8, 12, 16)을 경탄하고 따르게 되는 ‘오류의 세계화’가 묘사되어 있다. 14장은 “영원한 복음”이 “모든 민족과 종족과 방언과 백성”에게 전파되는 ‘진리의 세계화’를 보여준다(계 14:6, 7). 그와 같은 “고통하는 때”(딤후 3:1)에는 “교훈의 풍조”가 요동하고(엡 4:14), 사람들은 “귀를 진리에서 돌이켜 허탄한 이야기를 따르”게 될 것이다(딤후 4:4). “사탄은 영혼불멸설과 일요일의 신성함이라는 두 가지 큰 잘못을 이용해 백성들을 속일 것이다. 영혼불멸설은 강신술의 토대를 마련하고, 일요일 성수는 로마와 공감의 유대를 형성한다”(각 시대의 대쟁투, 588).
이 마지막 사건들이 전개될 때까지, 우리는 그리스도의 영광스러운 재림을 준비하기 위해 성령께서 인도해주시기를 구하면서, 인간과 죽음의 본질을 포함한 우리가 가진 모든 진리에 대한 믿음을 확고히 유지해야 한다.
*학습 목표
- 깨닫기
마지막 때를 살아가는 성도들에게 필요한 말씀 중심의 삶의 자세가 무엇인지 깨닫는다.
- 느끼기
하나님의 능력을 구하며 성령의 인도하심에 따라 최선을 다하는 백성들을 돌보시는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한다.
- 행하기
성경의 원칙과 세상의 가치관이 충돌할 때 믿음을 가지고 하나님께서 인도하시는 길로 행한다.
TMI 위로
2. 누가복음 2:52은 예수님께서 성장하신 네 가지 영역을 어떻게 설명하고 있습니까?
※ 예수는 지혜(정신적)와 키(신체적)가 자라가며 하나님(영적)과 사람(관계적)에게 더욱 사랑스러워 가셨다.
3. 우리의 몸이 “하나님의 전”임을 제대로 이해하는 것이 중요한 이유는 무엇입니까?(고전 6:19, 20, 고전 10:31)
※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도록 생활해야 하기 때문이다.
4. 그리스도의 마음을 갖는다는 것의 의미는 무엇일까요?(고전 2:16, 롬 12:2, 빌 4:8)
※ 거듭나서 그리스도의 생명을 받아 그 생명으로 산다는 뜻이다.
6. 그리스도인으로서 “오늘”이라는 시간을 가치 있게 보내야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히 3:7, 8, 15)
※ 사람은 누구나 내일 일을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결론
예수님의 재림이 가까워져 올수록 하나님의 백성들을 향한 사탄의 공격은 더 강력해 질 것입니다. 세상의 기준으로 보기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는 것들이 성경적 원칙에 따라 살기로 결심한 우리들의 삶을 힘들게 할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의 모본을 따라 성경이 이야기하는 분명한 원칙에 따라 살기 위해 날마다 성령의 인도하심에 순종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12월 11일(일) 예수님의 모본
누가복음 2:52을 읽어보라. 이 구절은 예수님께서 성장하신 네 가지 영역을 어떻게 설명하고 있는가?
[눅2:52] 예수는 지혜와 키가 자라가며 하나님과 사람에게 더욱 사랑스러워 가시더라.
답: “예수는 지혜(정신적)와 키(신체적)가 자라가며 하나님(영적)과 사람(관계적)에게 더욱 사랑스러워 가”셨다.
예수님은 완벽한 인간이셨고, 인간 존재의 모든 면에서 성장하셨다. 누가복음 2:52에 따르면, “예수는 지혜(정신적)와 키(신체적)가 자라가며 하나님(영적)과 사람(관계적)에게 더욱 사랑스러워 가”셨다. “그는 정신이 민활하고 통찰력이 있었으며, 나이에 비하여 생각이 깊고 지혜가 있었다. 그러면서도 그의 품성에는 균형 잡힌 아름다움이 있었다. 그의 마음과 육체는 아이의 성장 법칙에 따라 점점 발육하였다. 예수께서는 유년의 독특한 사랑스러운 기질을 나타내셨다. 그의 자진하여 돕는 손은 다른 사람들을 돕기 위하여 언제나 준비되어 있었다. 그는 아무것도 침해할 수 없는 인내와 결코 고결함을 희생시키지 않는 진실성을 나타내셨다. 원칙에는 반석과 같이 확고하였지만, 그의 생애는 이기심 없는 인정을 드러내셨다”(시대의 소망, 68, 69).
마태복음 4:23을 읽어보라. 어떻게 하면 우리도 예수님께서 행하신 세 가지 사역(가르치심, 복음을 전파하심, 치유하심)을 효과적으로 수행할 수 있겠는가?
[마4:23] 예수께서 온 갈릴리에 두루 다니사 그들의 회당에서 가르치시며 천국 복음을 전파하시며 백성 중의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시니,
답: 예수님을 믿고 바울의 고백처럼 예수께서 내 안에서 예수님의 뜻을 이루도록 살아주실 때 받은 은사만큼 수행할 수 있다.
인간이 통합적이면서 동시에 분리될 수 없는 존재라는 것을 인식한다면 신앙을 영적인 영역에만 가둬 둘 수 없다. 진리는 분명 사람의 존재 전체, 살아 있는 모든 날들, 그리고 삶의 모든 차원을 아우른다. 인간의 육체적 요소와 영적 요소는 매우 강력하게 통합되어 있으므로 절대로 분리해서 생각할 수 없다. 타락한 존재들로서 우리가 결코 위에 묘사된 예수님의 모습과 같아질 수는 없겠지만,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를 힘입어 예수님을 닮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왜냐하면, “사람에게서 창조주의 형상을 회복시키는 것, 다시 말해 지·덕·체의 발달을 증진시켜 사람으로 하여금 창조되던 당시의 완전한 상태로 돌아가게 하는 것이 구속 사업”이기 때문이다(교육, 15, 16). 이것이야말로 하나님께서 재림을 위한 준비로써 당신의 백성들에게 행하시고자 하시는 일이다.
<묵상>
예수님과 우리가 너무 다르다는 사실을 마주할 때, 우리는 쉽게 낙심하게 됩니다. 하지만 그런 순간 우리를 위한 예수님의 십자가에 집중하는 것이 우리에게 어떤 용기와 희망을 주나요?
답: 십자가와 부활은 우리를 예수님의 형상을 얻도록 베푸신 하나님의 창조적 사업이다.
<부가설명> 사람으로 출생한 사람은 사람이라는 범주로서 완전한 사람이다. 그러나 각각 그 소질과 기능이 다르다. 소질과 기능에 표준이 있을까? 이렇게 해야 완전한 사람이라고 누가 정의할 것인가? 나쁜 사람, 좋은 사람이 있겠으나 그렇다고 그들이 사람이 아닌 것은 아니다. 예수님은 말씀 하나님으로서 전능하신 분이시다. 그분이 자기를 비어 사람과 같이 되어 세상에 오셨을 때 자신을 위하여 신성의 전능성을 행사하지 않으셨다. 사람과 같이 사셨다. 그러나 그분은 사람을 위하여 능력을 행사하셨다. 그랬는데도 그분을 믿은 사람이 많지 않았다. 하나님의 형상을 닮는다고 할 때 하나님의 능력을 다 받는다는 뜻은 아니다. 그래서 은사가 각각 다르다고 가르쳐주셨다. 그러나 거듭남의 출생으로 예수님의 생명을 받으면 영적 존재가 되는 것은 동일하다(롬8:9). 그러나 기능과 소질은 다르게 나타나게 된다. 그러더라도 모든 것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드러난다. 어떤 사람은 가르치는 일, 어떤 사람은 전파하는 일, 어떤 사람은 병고치는 일을 하도록 은사를 받는다. 교회가 이 여러 은사를 성령의 역사를 힘입어 수행할 때 주님이 하신 그 일을 수행하는 것이다.
<교훈>
타락한 존재로서 우리가 예수님과 같아질 수는 없지만, 하나님의 은혜에 힘입어 예수님을 닮기 위해 노력하는 삶이 재림을 준비하는 우리의 모습이 되어야 한다.
12월 12일(월) 하나님의 전으로서의 몸
영혼은 영원하고 육체는 사멸한다는 이원론은 인간의 몸에 대한 다양한 생각을 만들어냈다. 예를 들어, 고대 그리스 철학자들은 인간의 몸을 죽음으로 해방될 영혼을 가두고 있는 감옥으로 여겼다. 이러한 이교적 개념이 이어져, 오늘날 많은 기독교인들은 육체를 부활 때 다시 결합하게 될 불멸의 영혼이 잠시 머무는 곳이라고 믿는다. 한편, 범신론자들은 인간의 몸을 신성하게 본다. 신과 우주가 하나면서 같은 존재라고 믿기에 모든 것은 신이고, 그래서 인간의 몸은 단일하고 통합적이며 범우주적인 신의 일부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이렇게 충돌하는 여러 주장들 속에서, 우리는 성경이 인간의 본질에 대해 가르치는 것을 확실히 이해하고 그 진리 위에 굳게 서야 한다.
고린도전서 6:19, 20과 10:31을 읽어보라. 우리의 몸이 “하나님의 전” 그리고 “성령의 전”이라는 사실을 제대로 이해하게 된다면, 우리의 생활 방식에 어떤 긍정적인 변화가 일어나겠는가?
[고전6:19,20] 너희 몸은 너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바 너희 가운데 계신 성령의 전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너희는 너희 자신의 것이 아니라 20 값으로 산 것이 되었으니 그런즉 너희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
[고전10:31] 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
답: 하나님이 계시기에 합당하도록 거룩하고 정결하게 보존하는 변화.
아담과 하와 모두 하나님의 모양과 형상대로 창조되었는데(창 1:26, 27), 그것은 그들의 품성뿐만 아니라 육체도 마찬가지였다. 그 형상이 죄로 인해 훼손되고 가려졌기 때문에, 구속사업은 생명 나무에 더 이상 접근할 수 없게 된 인간을 육체의 건강을 포함해 원래의 모양과 형상으로 회복시키는 것이다.
이와 같은 회복은 예수님께서 재림하셔서 “썩을 것이 반드시 썩지 아니할 것을 입겠고 이 죽을 것이 죽지 아니함을 입”(고전 15:53, 54)게 될 때에 비로소 완성되는, 인간의 삶 전체를 아우르는 과정이다.
사도 요한은 그의 친구 가이오에게 “사랑하는 자여 네 영혼이 잘됨 같이 네가 범사에 잘되고 강건하기를 내가 간구하노라”(요삼 1:2)라고 편지했다.
만약 인간이 분리될 수 없는 존재이고, 신앙이 인간의 삶의 모든 측면을 포함한다는 것을 이해한다면, 신체를 건강하게 보호하는 것 역시 우리가 가진 종교적 의무임을 기억해야 한다.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고전 10:31)는 말씀의 원칙에 따라야 한다. 하지만 선한 사람들이 최선을 다한다고 할지라도, 죄 많은 인간의 본성과 죄로 가득한 환경으로 인해 여전히 고통당할 수밖에 없는 세상에 살고 있다는 사실 또한 기억해야 할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믿고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하며, 결과는 하나님께 맡겨야 한다.
<묵상>
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의 마음과 생각뿐만 아니라 몸까지 아름답고 건강하게 관리해야 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답: 우리 몸이 하나님께서 값으로 사신 하나님의 거룩한 전이기 때문이다.
<부가설명> 생명력은 활동할 수 있는 매체가 필요하다. 생명력이 그것만으로도 바람처럼 작용할 수 있는지는 모르겠다. 에스겔 37장을 보면 심히 마른 뼈들이 있는 골짜기에 에스겔을 이끌어놓으시고 뼈들에게 예언하라고 하시면서 생기를 향하여 사람형상으로 회복된 몸에 불어서 들어가 그들을 살리라고 한다. “ 내게 이르시되 인자야 너는 생기를 향하여 대언하라 생기에게 대언하여 이르기를 주 여호와의 말씀에 생기야 사방에서부터 와서 이 사망을 당한 자에게 불어서 살게 하라 하셨다 하라 이에 내가 그 명대로 대언하였더니 생기가 그들에게 들어가매 그들이 곧 살아 일어나서 서는데 극히 큰 군대더라”(겔37:9,10). 여기 생기라고 번역한 말이 ‘루아흐’이다. 주로 ‘영’이라고 번역하는 단어이다. 말씀이 기이한 것은 생기야 사방에서부터 와서 불어 살게 하라고 한 표현이다. 생기, 곧 살리는 기운은 하나님의 은혜로 대기를 덮고 있는지도 모른다. “하나님께서 당신의 아들을 무한한 선물로 주심으로 온 세상을 은혜의 분위기로 두루 싸기를 마치 공기가 지구를 두루 싼 것같이 하셨다. 누구든지 이 생기를 주는 분위기를 호흡하기를 선택하는 자들은 살 것이요 또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장성한 남녀가 되기까지 자라날 것이다”(정로 68.1). 이 생기가 몸에 들어갈 때 생명이 몸을 통하여 작용한다. 그래서 몸이 건강해야 하고 정결해야 한다. 하나님의 영광이 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교훈>
영은 선하고 육은 악하다는 이원론적 사상은 이교적 가르침에서 비롯된 비성서적 가르침이다. 우리는 몸과 마음 모두를 깨끗하게 보전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12월 13일(화) 그리스도의 마음
환경의 변화를 통해 사람을 변화시킬 수 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다. 분명, 유혹에 더 취약하게 만들 수 있는 장소와 상황은 피해야 한다(시 1:1, 잠 5:1~8). 그러나 유혹과 죄악이라는 문제는 마음과 생각을 변화시켜야만 해결될 수 있다. 그리스도께서는 “속에서 곧 사람의 마음에서 나오는 것은 악한 생각 곧 음란과 도둑질과 살인과 간음과 탐욕과 악독과 속임과 음탕과 질투와 비방과 교만과 우매함이니”(막 7:21, 22)라는 말씀으로 문제의 핵심을 지적하셨다. 예수님의 이 말씀은 행동을 바꾸기 위해 마음이 변해야 함을 보여준다.
고린도전서 2:16, 시편 24:3, 4, 로마서 12:2, 빌립보서 4:8, 골로새서 3:2을 읽어보라. “그리스도의 마음”을 갖는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고전2:16] 누가 주의 마음을 알아서 주를 가르치겠느냐 그러나 우리가 그리스도의 마음을 가졌느니라.
[시24:3,4] 여호와의 산에 오를 자가 누구며 그의 거룩한 곳에 설 자가 누구인가 4 곧 손이 깨끗하며 마음이 청결하며 뜻을 허탄한 데에 두지 아니하며 거짓 맹세하지 아니하는 자로다.
[롬12:2]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
[빌4:8] 끝으로 형제들아 무엇에든지 참되며 무엇에든지 경건하며 무엇에든지 옳으며 무엇에든지 정결하며 무엇에든지 사랑 받을 만하며 무엇에든지 칭찬 받을 만하며 무슨 덕이 있든지 무슨 기림이 있든지 이것들을 생각하라.
[골3:2] 위의 것을 생각하고 땅의 것을 생각하지 말라.
답: 마음을 새롭게 하여 변화를 받아서 땅의 것을 생각 않고 위엣 것을 생각하며 하나님의 법이 삶이 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새 언약”을 통해 “나의 법을 그들의 속에 두며 그들의 마음에 기록”(렘 31:31~33, 비교, 히 8:8~10, 히 10:16) 하겠다고 약속하셨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께서는 산상보훈에서 하나님의 계명을 사고와 의도의 수준까지 넓히고 심화시키셨다(참조, 마 5:17~48). 유혹에 대한 승리는 오직 하나님께서 주시는 변화시키는 은혜로만 가능하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의 죄 된 생각을 멈추기 위해 우리의 사고와 의도를 변화시켜 주시겠다는 하나님의 약속을 믿어야 한다.
예수님께서 다시 오실 때까지 우리의 죄 된 본성은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 있다면, 우리는 그분의 의로 온전히 감싸질 것이다. 비록 우리가 아직 완전하지는 않을지라도, 예수님 안에서 이미 완전하다고 여겨진다(빌 3:12~15). “우리들이 그리스도와 연합하게 될 때에 그리스도의 정신을 갖게 된다. 순결함과 사랑이 품성을 빛나게 할 것이며 온유함과 진리가 생애를 주관하게 될 것이다. 얼굴의 표정 자체도 변하게 된다. 그리스도께서 영혼 안에 거하실 때에 변화케 하시는 능력을 발휘할 것이며 그의 외모에도 마음 속에 있는 화평과 기쁨을 증거하는 모습이 떠오를 것이다”(가려 뽑은 기별 1권, 337).
매일 하나님 앞에 굴복하고, 매일 자기 자신에 대해 죽고, 매일 결심하며, 매일 믿음으로 예수님께 순종하기로 선택할 때 비로소 우리의 삶에 이런 변화가 찾아올 것이다.
<묵상>
만약 생각으로 죄 짓는 일마저도 멈출 수 있다면 우리의 삶이 어떻게 그리고 얼마나 달라질지 상상해 보십시오. 어떻게 하면 그런 일이 가능해질 수 있을까요?
답: 마음을 올바르게 지키는 것이다(잠4:23).
<부가설명> 처녀는 아내의 마음이 생기지 않는다. 아내가 아니기 때문이다. 총각은 남편의 마음이 생기지 않는다. 남편이 아니기 때문이다. 출산하지 않은 부부는 부모의 마음이 생기지 않는다. 부모가 아니기 때문이다. 참으로 신기하게도 처녀가 결혼하여 아내가 되고 총각이 남편이 되면 아내의 마음, 남편의 마음이 생긴다. 부부가 자녀를 낳으면 부모의 마음이 생긴다. 어디서 그런 마음이 생길까? 그들이 그런 마음이 생기게 됐기 때문이다. 예수님의 마음은 예수님과 같은 자리에 이르러야 생긴다. 그 자리에 있지 않는데 노력으로 그런 마음이 생길 수 없다. 그래서 먼저 예수님의 생명으로 출생해야 한다. 그것이 거듭나는 것이다. 그것은 예수님의 생명으로 나는 것인데, 그 생명은 예수님이 부활하셔서 드러낸 생명과 썩지 않는 것은 드러내신 그 부활의 생명이다(딤후1:10). 예수님의 부활은 우리가 거듭나는 것이 어떤 것인지 증명해주신 사건이다. “찬송하리로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하나님이 그 많으신 긍휼대로 예수 그리스도의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거듭나게 하사 산 소망이 있게 하시며 썩지 않고 더럽지 않고 쇠하지 아니하는 기업을 잇게 하시나니 곧 너희를 위하여 하늘에 간직하신 것이라”(벧전1:3,4). 부활하셔서 우리를 거듭나게 하셨다. 이것은 창조주 하나님이 새로운 피조물이 되게 하시는 창조에 속한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의 노력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 자아가 죽고 부활의 생명을 얻으면 예수님의 마음이 생기게 되어 있다. 우리는 거듭났는가?
<교훈>
외적 행동은 마음과 연결되어 있는데 삶을 변화시키는 마음의 변화는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만 가능하다. 변화를 위해 날마다 그 은혜를 구하는 삶을 살도록 하자.
12월 14일(수) 성령의 인도하심
성령은 하나님의 강력한 대리자로서 우리 마음에 하나님의 사랑을 부어주실 뿐만 아니라(롬 5:5), 우리를 참된 구원의 경험(요 16:7~11)으로 인도하고, 모든 진리로 이끌며(요 16:13) 복음의 사명을 완수할 수 있도록 힘을 주신다(행 1:8). 사탄의 타락시키는 일에 대항하는 것이 성령이 하시는 일이기 때문에, 사탄이 온갖 수단을 동원하여 성령의 본성과 그분이 하시는 일에 대한 우리의 이해를 왜곡하려 하는 것은 전혀 놀라운 일이 아니다. 어떤 이들은 성령의 인격을 부정하면서, 그분의 변화시키시는 능력보다 그분이 주시는 은사에만 집중한다.
사도행전 8:4~24을 읽어보라. 사마리아의 마술사 시몬은 성령의 도움으로 변화되는 경험은 무시하고 성령의 은사만을 받고자 했다. 이와 같은 태도가 오늘날에는 어떻게 나타나고 있는가?
[행8:4~24] … 13 시몬도 믿고 침례를 받은 후에 전심으로 빌립을 따라다니며 그 나타나는 표적과 큰 능력을 보고 놀라니라 14 예루살렘에 있는 사도들이 사마리아도 하나님의 말씀을 받았다 함을 듣고 베드로와 요한을 보내매 15 그들이 내려가서 그들을 위하여 성령 받기를 기도하니 16 이는 아직 한 사람에게도 성령 내리신 일이 없고 오직 주 예수의 이름으로 침례만 받을 뿐이더라 17 이에 두 사도가 그들에게 안수하매 성령을 받는지라 18 시몬이 사도들의 안수로 성령 받는 것을 보고 돈을 드려 19 이르되 이 권능을 내게도 주어 누구든지 내가 안수하는 사람은 성령을 받게 하여 주소서 하니 20 베드로가 이르되 네가 하나님의 선물을 돈 주고 살 줄로 생각하였으니 네 은과 네가 함께 망할지어다 21 하나님 앞에서 네 마음이 바르지 못하니 이 도에는 네가 관계도 없고 분깃 될 것도 없느니라 22 그러므로 너의 이 악함을 회개하고 주께 기도하라 혹 마음에 품은 것을 사하여 주시리라 23 내가 보니 너는 악독이 가득하며 불의에 매인 바 되었도다 24 시몬이 대답하여 이르되 나를 위하여 주께 기도하여 말한 것이 하나도 내게 임하지 않게 하소서 하니라
답: 이적행하는 사람들이 많이 일어나는데 특히 병고치는 이적이다. 사람들은 이것을 좋아하고 많은 사람이 따라다닌다. 방언이라는 이상한 소리도 한몫한다.
하나님의 자녀들은 성령을 통해 하나님의 말씀의 모든 진리(요 16:13, 요 17:17)로 인도함을 받는 자들이다(롬 8:14). 예수님께서는 분명한 말로 경고하셨다.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 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하지 아니 하였나이까 하리니 그 때에 내가 그들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마 7:21~23). 이 말씀은 성령께서 어느 누구도 하나님의 말씀과 다른 길로 인도하지 아니하고 오히려 우리를 말씀에 순종케 하신다는 뜻이다.
우리를 모든 진리로 인도하시는 바로 그 성령께서 우리가 다른 사람들을 그 놀라운 진리로 인도할 힘도 베풀어 주신다(마 28:18~20, 행 1:8). 우리에게 맡겨진 신성한 임무를 수행하는 동안 우리는 성령의 특별한 도움을 받는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아침마다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고 그분께 자기 자신을 드리기로 다시 헌신해야 한다. 그렇게 한다면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성령을 선물로 주실 것이다.
우리는 매일 의식적인 선택을 통해 잘못된 것은 피하고 옳은 일을 행할 수 있도록 성령의 인도하심에 우리 삶을 내어 맡겨야 한다. 우리가 마땅히 살아야 할 삶을 살기 위해 하나님의 능력에 힘입어 간절히 구할 때,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성령을 받을 수 있다.
<묵상>
매일 아침 성령께서 우리 삶을 인도하시도록 마음을 열고 기도하는 것이 그렇게 중요한 이유는 무엇입니까?
답: 그것은 영적 생명의 호흡이기 때문이다.
<부가설명> 성경 종교의 초기에는 예수님의 신분에 관하여 많은 의논들이 있었다. 그분이 여호와 하나님이신가? 여호와 하나님의 최초 피조물인가? 니케아 회의로 예수님도 여호와 하나님이심을 고백하게 되었다. 다음에는 성령도 하나님이신가 하는 논의가 일어났다. 니케아 회의 이전에는 교회 지도자들이 성령은 하나님이시라는 것을 부인하지 않았고 삼위일체를 믿었다. 그래서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트는 성부, 성자, 성령을 신성의 삼화음이라고 했다. 그 후에 터툴리안이 삼위일체라는 신학용어를 만들었고 교회가 지금까지 사용한다. 그 후에 성부 성자에 관하여는 니케아 회의 후에 기독교 주류에서 의심하지 않았으나 성령에 관하여 많은 이론들이 있었던 것 같다. 지금도 성령님에 관하여는 그런 생각들이 있다. 재림교회 안에서도 성령님을 하나님으로 인정하지 않는 사람들이 있다. 불행한 일이다. 예수님은 분명히 성령님의 개체성과 신성을 인정하셨다. 우리가 성경을 자세히 읽어야 한다. 예수님이 승천하신 후에 비로소 성령님이 활동하신 것이 아니다. 예수님을 이 세상에 사람이 되어 탄생하게 하는 일에 성령께서 일하셨다(마1:18). 예수님 승천하신 후에 하나님께 예수님의 피를 드린 일을 성령께서 하셨다(히9:14). 그리고 예수님이 오순절에 은혜의 왕으로 즉위하실 때(행5:31) 성령님을 세상에 보내셔서 은혜의 왕국의 세상 교회를 주관하게 하셨다. 그래서 성령님은 모든 사람들을 진리로 인도하신다. 그분은 예수께서 하신 말씀으로 사람들을 일깨우시고 거듭나게 하시며 말씀의 사람들이 되도록 이끄신다. 이적은 사탄도 행할 수 있다는 사실을 기억하는 것은 속지 않는 방편의 하나가 될 수 있다.
<교훈>
성령께서는 우리를 모든 진리로 인도하실 뿐만 아니라, 우리가 다른 사람들을 그 놀라운 진리 속으로 인도할 수 있도록 힘을 베풀어 주신다.
12월 15일(목) 그분의 다시 오심을 위해 준비함
우리는 너무 많은 거짓 필요와 눈길을 끄는 방해물로 정신없이 바쁘게 돌아가는 세상에 살고 있다. 조심하지 않는다면, 그런 것들이 우리의 모든 시간을 집어삼키고 우리 삶의 우선순위를 왜곡시킬 것이다. 시대를 초월하여 모든 기독교인들은 삶에서 정말로 중요한 것들로부터 그들의 시선을 떨어뜨리기 위해 노력하는 사탄의 시도를 경계해야 한다.
세속적이고 육적인 것들, 결코 우리를 만족시킬 수 없을 뿐 아니라 결국 우리를 영적인 파멸로 몰아넣을 뿐인 것들을 바라보느라 방심하고 있다가 하나님을 외면할 위험으로부터 안전한 사람이 한 사람이라도 있겠는가?
베드로후서 3:14과 요한일서 3:1~3을 읽어보라. 재림을 위해 계속해서 준비하는 것과 그 영광스러운 사건을 위해 준비되는 것에는 어떤 차이가 있는가?
[벧후3:14] 그러므로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이것을 바라보나니 주 앞에서 점도 없고 흠도 없이 평강 가운데서 나타나기를 힘쓰라.
[요일3:1~3] 보라 아버지께서 어떠한 사랑을 우리에게 베푸사 하나님의 자녀라 일컬음을 받게 하셨는가, 우리가 그러하도다 그러므로 세상이 우리를 알지 못함은 그를 알지 못함이라 2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지금은 하나님의 자녀라 장래에 어떻게 될지는 아직 나타나지 아니하였으나 그가 나타나시면 우리 가 그와 같을 줄을 아는 것은 그의 참모습 그대로 볼 것이기 때문이니 3 주를 향하여 이 소망을 가진 자마다 그의 깨끗하심과 같이 자기를 깨끗하게 하느니라.
답: 계속해서 준비하는 것은 매일의 삶이 재림을 맞을 수 있는 삶이 되게 하는 것이고, 영광의 사건을 위한 준비는 재림의 날을 직접 맞을 준비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실제로는 이 둘을 구별하는 것은 합당하지 않다고 생각한다.
종종 재림을 위해 계속해서 준비한다는 개념은 중요한 결정을 미루기 위한 핑계가 된다. 이와 같은 개념은 “주인이 더디 오리라”(마 24:48)고 생각하며 긴장을 풀고 있었던 악한 종의 실수를 되풀이하게 만든다.
시편 95:7, 8, 히브리서 3:7, 8, 15, 히브리서 4:7을 읽어보라. 이 성경절들은 지금 당장 준비하는 것에 대해 무엇이라 말하고 있는가?
[시95:7,8] 그는 우리의 하나님이시요 우리는 그가 기르시는 백성이며 그의 손이 돌보시는 양이기 때문이라 너희가 오늘 그의 음성을 듣거든 8 너희는 므리바에서와 같이 또 광야의 맛사에서 지냈던 날과 같이 너희 마음을 완악하게 하지 말지어다.
[히3:7,8,15]그러므로 성령이 이르신 바와 같이 오늘 너희가 그의 음성을 듣거든 8 광야에서 시험하던 날에 거역하던 것 같이 너희 마음을 완고하게 하지 말라/ 15 성경에 일렀으되 오늘 너희가 그의 음성을 듣거든 격노하시게 하던 것 같이 너희 마음을 완고하게 하지 말라 하였으니,
[히4:7] 오랜 후에 다윗의 글에 다시 어느 날을 정하여 오늘이라고 미리 이같이 일렀으되 오늘 너희가 그의 음성을 듣거든 너희 마음을 완고하게 하지 말라 하였나니,
답: 오늘 그의 음성을 준행하라고 한다.
성경적 관점으로 볼 때, 구원의 시간은 항상 “오늘”이다. 결코 내일이 아니다(참조, 시 95:7, 8, 히 3:7, 8, 15, 히 4:7). 뿐만 아니라, 어떤 특별한 회심의 경험이 있지 않는 한, 우리는 계속해서 지금까지와 같은 사람으로 머물러 있을 것이다. 시간이 흐른다고 해서 저절로 마음의 변화가 일어나는 것이 아니다. 만약 누군가가 은혜 안에서 계속해서 성장하고, 날마다 믿음으로 전진하지 않는다면, 사람의 마음은 결국 굳어지고, 의구심을 품게 되고, 냉소적이고, 심지어 믿음으로부터 돌아서게 될 것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볼 때, 매일의 삶은 하루라는 시간으로 압축된 우리 삶의 전체라고 말할 수 있다. 미래를 위한 계획도 중요하지만, 하루하루 하나님의 은혜 안에서 재림을 위해 준비해야 한다. 오늘이 우리의 마지막 날이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묵상>
그리스도인의 삶에서 “오늘”이라는 시간이 갖는 중요성은 무엇입니까?
답: 사람은 내일일을 자랑할 수 없다. 오늘 어떤 일이 일어날는지 모르기 때문이다(잠27:1). 그래서 오늘이라 일컫는 매일 주님 안에 있어야 한다(히3:13).
<부가설명> 사람은 오늘만 사는 존재다. 더 극단적으로 말하면 순간순간만 사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이태원 참사를 보라. 죽은 사람들이 그 환락의 날이 마지막 날일 줄 안 사람이 한 사람이라도 있었을까? 그것이 사망에 매인 사람들의 실상이다. 그런데 영원한 생명이 걸린 삶을 다음으로 미룰 수 있다는 말인가? 성경은 전체적으로 하루만 사는 것을 전제하고 있다고 봐도 과언이 아니다. 예수님은 일용할 양식을 구하라고 하셨다. 내일일을 염려하지 말라고 하시며 한날의 괴로움은 그날에 족하다고 가르치셨다. 광야에서도 만나를 하루치만 거두라고 하셨다. 이런 훈련은 사람은 하루만 사는 존재라는 것을 깨닫게 하시려는 하나님의 지혜이다. 그렇다고 내일을 팽개치라는 말은 아니다. 내일이라고 한 그날도 밤아 지나서 호흡하고 눈을 뜨는 사람에게는 그냥 ‘오늘’일 뿐이다. 그래서 성령은 ‘오늘이라고 하는 매일’이라는 표현을 했다(히3:13). 야고보는 너희 생명이 잠깐 보이다가 없어지는 안개라고 했다. 그래서 내일 일을 너희가 알지 못한다고 경고했다. 오늘 예수님의 재림을 맞을 사람으로 충성하자.
<교훈>
성경적인 관점에서 구원의 시간은 항상 오늘이다. 그러므로 오늘 해야 할 선택을 내일로 미루지 말고, 언제일지 모르는 재림을 맞이하기 위해 준비해야 한다.
12월 16일(금) 더 깊은 연구를 위해
<치료봉사> 241~259, “정신 치료,” <성화된 생애> 7~16, “참된 이론과 거짓 이론”을 읽어보라.
“대쟁투가 거의 끝나가고 있다. 바다나 땅에서 일어나는 모든 참화의 소식은 만물의 마지막이 가까왔다는 사실에 대한 증거가 된다. 난리와 난리의 소문이 세상 끝을 선포한다. 우리 앞에 펼쳐질 큰 사건들을 기다릴 때 맥박이 급히 뛰지 않는 그리스도인이 있겠는가? 주님께서는 오고 계시다. 우리는 다가오시는 하나님의 발자국 소리를 듣는다”(엘렌 G. 화잇, 마라나타, 220).
“주님이 곧 오신다. 우리는 평강 가운데서 그분을 만날 준비를 갖추어야 한다. 주위에 있는 사람들에게 빛을 전하는 일에 우리의 온 힘을 다하기로 결심하자. 우리는 슬퍼하지 말고 기뻐해야 하며, 언제나 우리 앞에 주 예수님을 모시고 있어야 한다.…우리는 그분의 나타나심을 위하여 준비하고 기다려야 한다. 아, 그분을 대면하고 그분의 구속받은 자로 영접되는 것은 얼마나 영광스런 일인가!
우리는 오랫동안 기다려 왔다. 우리의 믿음이 희미해져서는 안 된다. 우리가 만일 영광 중에 계신 왕을 볼 수만 있다면 우리는 영원히 복을 받을 것이다. 나는 큰 소리로 ‘본향을 향하여!’라고 소리쳐야 할 것처럼 느낀다.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그분의 구속받은 자들을 영원한 본향으로 데려가시기 위해 능력과 큰 영광으로 오실 시간에 근접하고 있다”(엘렌 G. 화잇, 하늘, 165, 166).
핵심적인 토의를 위해
1. 사람은 육체, 정신, 그리고 영혼이 분리될 수 없게 통합되어 있는 전인적인 존재이다. 이 개념은 신앙의 범위와 개인적인 생활 방식의 중요성에 대해 어떤 가르침을 주는가?
※ 이원론적 사고방식과 생활방식을 따르지 않게 해준다.
2. 진정한 부흥과 개혁의 중심에는 언제나 하나님이 계시다. 인간이 중심인 경우는 없었다. 바리새인과 세리의 비유(눅 18:9~14)는 이 원리를 어떻게 설명하는가?
[눅18:9~14] 또 자기를 의롭다고 믿고 다른 사람을 멸시하는 자들에게 이 비유로 말씀하시되 10 두 사람이 기도하러 성전에 올라가니 하나는 바리새인이요 하나는 세리라 11 바리새인은 서서 따로 기도하여 이르되 하나님이여 나는 다른 사람들 곧 토색, 불의, 간음을 하는 자들과 같지 아니하고 이 세리와도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 12 나는 이레에 두 번씩 금식하고 또 소득의 십일조를 드리나이다 하고 13 세리는 멀리 서서 감히 눈을 들어 하늘을 쳐다보지도 못하고 다만 가슴을 치며 이르되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하였느니라 14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에 저 바리새인이 아니고 이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받고 그의 집으로 내려갔느니라 무릇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 하시니라.
※ 항상 주님 앞에 회개하는 정신으로 살아야 한다는 것을 가르쳐준다.
3. 목요일의 적용 질문에 대한 각자의 답을 토의해 보라. 자신이 준비되었는지 어떻게 알 수 있는가? 개인의 추측에 의한 잘못된 확신과 어떻게 다른가?
※ 고후13:5 너희는 믿음 안에 있는가 너희 자신을 시험하고 너희 자신을 확증하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신 줄을 너희가 스스로 알지 못하느냐 그렇지 않으면 너희는 버림 받은 자니라. (서로 토의해보자.)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