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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4과 모든 것이 새롭게 됨(질문, 대답, 설명) 12/31/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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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김명호 작성일22-12-24 01:43 조회5,693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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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4과 모든 것이 새롭게 됨

(12월 31일 안식일 / 일몰: 오후 5시 23분)

 

연구 범위: 벧후 3:13, 계 21:3, 22, 요일 3:2, 3, 벧전 1:22, 사 25:8, 계 22:3–5.

 

기억절: “보좌에 앉으신 이가 이르시되 보라 내가 만물을 새롭게 하노라 하시고 또 이르시되 이 말은 신실하고 참되니 기록하라 하시고”(계 21:5) 

 

성경은 우리에게 다음과 같은 소망을 준다. “우리는 그의 약속대로 의가 있는 곳인 새 하늘과 새 땅을 바라보도다”(벧후 3:13).  

그러나 어떤 사람들은 “새 하늘과 새 땅”(계 21:1)의 약속을 마치 내세의 희망을 이용해 대중을 지배하려 했던 권력자들이 지어낸 환상 속의 이야기처럼 여긴다. ‘비록 지금은 힘들어도 언젠가는 천국 또는 그와 비슷한 곳에서 합당한 상을 받게 될 거야’라는 식의 이해 말이다.

실제로 어떤 사람들은 성경에 제시된 미래의 희망을 그런 식으로 잘못 사용했다. 하지만, 그런 일들이 있었다고 할지라도, 새 하늘과 새 땅에 대해 우리가 가지고 있는 약속의 진실은 달라지지 않는다.

마지막 때에 어떤 이들은 우리가 가진 복된 소망을 조롱할 것이다(벧후 3:3~7). 그러나 그런 비웃음은 성경이 말하고 있는 것이 사실이라는 증거일 뿐이다. 성경이 그들의 조롱까지도 예언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번 주 우리는 새 하늘과 새 땅에 대한 영광스러운 약속을 살펴볼 것이다. 그곳에는 하늘 성전이 있겠고, 하나님께서 우리와 친히 함께 하실 것이며, 죽음과 눈물이 없을 것이다. 그리고 마침내 하나님의 사랑이 궁극적인 승리를 거둘 것이다.

 

*학습 목표

- 깨닫기

새 하늘과 새 땅에 대한 성경의 약속의 확실성을 깨닫는다.

- 느끼기

우리를 위해 아름다운 집을 준비하고 기다리고 계신 하나님의 사랑에 감격한다.

- 행하기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에 꼭 들어가기 위해 날마다 믿음으로 살아간다.

 

TMI 위로

2. 성경이 묘사하고 있는 새 하늘과 새 땅의 모습은 어떻습니까?(사 65:17~25, 계 21:1~5)

※ 이전 것은 기억되지 않고 세상에서 경험한 슬픔과 아픔과 낙망 같은 것이 전혀 없는 행복하고 평화롭고 사랑의 세계다. 

3. 새 예루살렘에 있는 성전에서는 어떤 일이 이어진다고 설명하고 있습니까?(계 4:2~6, 7:9~15, 15:5~8)

※ 하나님을 경배한다.

4. 하늘에 가면 우리가 하나님의 얼굴을 직접 볼 수 있을까요? 성경은 무엇이라고 이야기합니까?(요일 3:2, 3, 계 22:3, 4) 

※ 볼 수 있다고 기록했다. 

5. 새 하늘과 새 땅에 없는 것은 무엇일까요? 어떤 위로와 소망을 얻게 되나요?(계 21:1~4)

※ 아픈 것, 애통하는 것 눈물, 사망 등등.

6. 우리가 구원의 확신을 가질 수 있는 유일한 이유는 무엇입니까?(롬 4:2, 3)

※ 예수님을 믿을 때 의롭다함을 받기 때문이다.

 

결론

성경은 매우 구체적인 언어로 새 하늘과 새 땅에 대해 설명합니다. 모든 구원받은 의인들은 죄의 흔적이 완전히 사라져 버린 아름다운 땅에서 영원토록 하나님을 경배하고 찬양하게 될 것입니다. 그 나라에 들어가기 위해 매일 우리의 마음을 깨끗하게 하며 믿음으로 하나님의 약속을 붙들며 살아야 합니다.    

 

12월 25일(일) 새 하늘과 새 땅

 

그리스 철학을 믿는 사람들에게 육체는 부정적인 것으로 여겨졌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은 진짜 사람이 존재하는 진짜 천국이 있다는 사실을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 이렇게 생각하던 사람들에게 어떤 곳이 정말로 천국이 되고 정말로 좋은 곳이 되기 위해서는 그곳이 지금 우리가 사는 물리적 세계와는 전혀 다른 순수한 영적 상태의 공간이어야 했다. 그들은 물질로 구성되어 있는 것은 절대 영적일 수 없고, 영적인 것은 절대 물질적일 수 없다고 주장했다. 이와는 반대로 성경은 매우 구체적인 언어로 죄의 흔적이 존재하지 않는 천국에 대해 묘사한다. 

 

이사야 65:17~25, 이사야 66:22, 23, 베드로후서 3:13, 그리고 요한계시록 21:1~5을 읽어보라. 이 구절들의 궁극적인 메시지는 무엇인가?

[사65:17~25] 보라 내가 새 하늘과 새 땅을 창조하나니 이전 것은 기억되거나 마음에 생각나지 아니할 것이라 18 너희는 내가 창조하는 것으로 말미암아 영원히 기뻐하며 즐거워할지니라 보라 내가 예루살렘을 즐거운 성으로 창조하며 그 백성을 기쁨으로 삼고 19 내가 예루살렘을 즐거워하며 나의 백성을 기뻐하리니 우는 소리와 부르짖는 소리가 그 가운데에서 다시는 들리지 아니할 것이며 20 거기는 날 수가 많지 못하여 죽는 어린이와 수한이 차지 못한 노인이 다시는 없을 것이라 곧 백 세에 죽는 자를 젊은이라 하겠고 백 세가 못되어 죽는 자는 저주 받은 자이리라 21 그들이 가옥을 건축하고 그 안에 살겠고 포도나무를 심고 열매를 먹을 것이며 22 그들이 건축한 데에 타인이 살지 아니할 것이며 그들이 심은 것을 타인이 먹지 아니하리니 이는 내 백성의 수한이 나무의 수한과 같겠고 내가 택한 자가 그 손으로 일한 것을 길이 누릴 것이며 23 그들의 수고가 헛되지 않겠고 그들이 생산한 것이 재난을 당하지 아니하리니 그들은 여호와의 복된 자의 자손이요 그들의 후손도 그들과 같을 것임이라 24 그들이 부르기 전에 내가 응답하겠고 그들이 말을 마치기 전에 내가 들을 것이며 25 이리와 어린 양이 함께 먹을 것이며 사자가 소처럼 짚을 먹을 것이며 뱀은 흙을 양식으로 삼을 것이니 나의 성산에서는 해함도 없겠고 상함도 없으리라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니라.

[사66:22,23] 내가 지을 새 하늘과 새 땅이 내 앞에 항상 있는 것 같이 너희 자손과 너희 이름이 항상 있으리라 여호와의 말이니라 23 여호와가 말하노라 매월 초하루와 매 안식일에 모든 혈육이 내 앞에 나아와 예배하리라.

[벧후3:13] 우리는 그의 약속대로 의가 있는 곳인 새 하늘과 새 땅을 바라보도다.

[계21:1~5] 또 내가 새 하늘과 새 땅을 보니 처음 하늘과 처음 땅이 없어졌고 바다도 다시 있지 않더라 2 또 내가 보매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이 하나님께로부터 하늘에서 내려오니 그 준비한 것이 신부가 남편을 위하여 단장한 것 같더라 3 내가 들으니 보좌에서 큰 음성이 나서 이르되 보라 하나님의 장막이 사람들과 함께 있으매 하나님이 그들과 함께 계시리니 그들은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하나님은 친히 그들과 함께 계셔서 4 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닦아 주시니 다시는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니 처음 것들이 다 지나갔음이러라 5 보좌에 앉으신 이가 이르시되 보라 내가 만물을 새롭게 하노라 하시고 또 이르시되 이 말은 신실하고 참되니 기록하라 하시고,

 

답: 회복될 영원한 세상에 관한 확실한 약속의 기별이다.

 

이사야서는 만일 이스라엘이 한 국가로서 하나님과의 언약에 충실했다면 지구가 어떤 모습이었을 지를 나타내 보여준다(사 65:17~25, 사 66:22, 23. 비교, 신 28장). 삶의 다양한 모습이 다채롭게 어우러진 조화로운 환경이 하나님의 원래 계획, 즉 죄가 들어오기 전의 모습으로 점점 더 성숙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 계획은 하나님께서 기대하신 대로 실현되지 않았다. 대신, 하나님께서는 새로운 계획을 유대인과 모든 나라에서부터 온 이방인들로 구성된 교회와 세우셨다(마 28:18-20, 벧전 2:9). 그러므로 이사야의 예언은 교회의 관점에서 다시 읽혀져야 한다(벧후 3:13, 계 21:1~5).

“성경은 구원 얻은 자의 유업을 본향이라고 부른다(히 11:14-16 참조). 그곳에서 하늘의 목자 그리스도께서는 당신의 양 무리를 생명수 샘으로 인도하신다. 생명나무는 달마다 그 열매를 맺고, 그 잎사귀는 만국을 소성하기 위하여 있다. 흘러 다함이 없는 강은 수정같이 맑고, 그 강에 있는 나무들은 구속받은 주님의 백성들을 위하여 준비된 길 위에 그 그림자를 던지고 있다. 넓은 평원이 아름다운 언덕으로 둘러싸여 있고, 하나님의 산들은 높은 봉우리들을 뻗고 있다. 이 평화로운 평원에서, 이 생명 강가에서, 오랫동안 순례자요 방랑자로 살아온 하나님의 사랑하는 백성들은 그들이 거할 집을 발견한다”(각 시대의 대쟁투, 675).

 

<묵상>

성경이 말하는 영원을 향한 소망을 알지 못하는 많은 세상의 작가들이나 철학자들은 인간 존재의 무의미함에 대해 한탄합니다. 비록 그들이 가진 미래에 관한 이해는 잘못되었지만, 희망이 없는 삶은 무의미하다는 그들의 주장을 반박할 수 없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답: 예수 안에 있는 소망이 없으면 진짜로 무의미 하기 때문이다. 

 

<부가설명> 새 하늘과 새 땅을 생각할 때는 태초에 창조하신 지구를 생각하는 데서 출발하면 바른 길을 걷게 될 것이다. 태초에 지구와 지구에 속한 모든 것을 창조하시고 창조주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보시기에 심히 좋았다고 선언하셨다. 예수께서는 구원받은 성도들이 받을 영원한 나라를 “창세로부터 너희를 위하여 예비된 나라”(마25:34)라고 하셨다. 그러므로 새 하늘과 새 땅은 창세로부터 예비된 나라이다. 그것이 죄의 침입으로 변질되고 망가진 것이 현재 지구와 인류다. 예수께서 이것을 회복시키신다. 리모델링하는 집은 원형은 살리면서 더 좋게 만든다. 새 하늘과 새 땅이 되는 지구도 그와 같이 될 것이다.이사야서나 베드로후서나 계시록에 기록된 새 하늘과 새 땅은 태초에 창조하신 세계가 현실인 것처럼 현실적이다. 다만 죄가 처리되고 오직 의와 생명만이 존재하는 것이며 의와 생명이 존재하기에 합당하도록 창세로부터 예비된 그 나라를 받게 된다. 그러기 위하여 아담 자손들도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서 새로운 피조물이 되어야 한다(요3:3~6, 고후5:15~17, 엡4:23,24). 

 

<교훈>

천국을 영적인 세상으로 이해하며 그 실체를 부인하는 세상의 가르침과는 달리, 성경은 매우 구체적인 언어로 죄의 흔적이 존재하지 않는 천국에 대해 묘사한다. 

 

12월 26일(월) 하나님의 성전에서

 

어떤 사람들은 하늘 자체가 하나님의 성전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요한계시록은 하나님의 보좌와 유리 바다가 있는 새 예루살렘 안에 있는 특정한 성전(성소)에 대해 기록하고 있다(계 4:2~6, 계 7:9~15, 계 15:5~8). 그곳에서 각 나라와 족속과 백성과 방언에서 나온 큰 무리의 성도들이 하나님을 영원토록 경배할 것이다(계 7:9~17).

 

요한계시록 7:9~15을 요한계시록 21:3, 22과 비교해 보라. 구원받은 허다한 무리가 “그의 성전에서 밤낮 하나님을 섬기매”(계 7:15)라는 구절과 새 예루살렘에서 “성전을 보지 못하였으니”(계 21:22)라는 구절을 어떻게 조화시킬 수 있는가?

[계7:9~15] 이 일 후에 내가 보니 각 나라와 족속과 백성과 방언에서 아무도 능히 셀 수 없는 큰 무리가 나와 흰 옷을 입고 손에 종려 가지를 들고 보좌 앞과 어린 양 앞에 서서 10 큰 소리로 외쳐 이르되 구원하심이 보좌에 앉으신 우리 하나님과 어린 양에게 있도다 하니 11 모든 천사가 보좌와 장로들과 네 생물의 주위에 서 있다가 보좌 앞에 엎드려 얼굴을 대고 하나님께 경배하여 12 이르되 아멘 찬송과 영광과 지혜와 감사와 존귀와 권능과 힘이 우리 하나님께 세세토록 있을지어다 아멘 하더라 13 장로 중 하나가 응답하여 나에게 이르되 이 흰 옷 입은 자들이 누구며 또 어디서 왔느냐 14 내가 말하기를 내 주여 당신이 아시나이다 하니 그가 나에게 이르되 이는 큰 환난에서 나오는 자들인데 어린 양의 피에 그 옷을 씻어 희게 하였느니라 15 그러므로 그들이 하나님의 보좌 앞에 있고 또 그의 성전에서 밤낮 하나님을 섬기매 보좌에 앉으신 이가 그들 위에 장막을 치시리니,

[계21:3,22] 내가 들으니 보좌에서 큰 음성이 나서 이르되 보라 하나님의 장막이 사람들과 함께 있으매 하나님이 그들과 함께 계시리니 그들은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하나님은 친히 그들과 함께 계셔서/ 22 성 안에서 내가 성전을 보지 못하였으니 이는 주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와 및 어린 양이 그 성전이심이라.

 

답: 같은 사실을 다른 측면으로 보여준 계시적 형상일 뿐이다. 

 

하늘 성전(성소)은 항상 하늘의 천사들이 하나님을 경배하는 장소였다. 그러나 죄의 출현과 함께, 그 성전은 인류에게 구원이 주어지는 장소의 역할도 하게 되었다. “죄의 문제가 끝나면, 하늘 성소는 다시 본래의 기능을 회복하게 될 것이다. 요한계시록 21:22절에서 요한은 만군의 주 하나님과 어린 양이 그 성전이기 때문에 더 이상 성전을 보지 못했다고 전한다. 그렇다면 이 말이 더 이상 그분의 피조물들이 와서 그분과 특별한 교제를 나눌 수 있는 하나님의 집이 없다는 것을 의미하는가? 결코 아니다”(Richard M. Davidson, “The Sanctuary: ‘To Behold the Beauty of the Lord,’ ” in Artur Stele, ed., The Word: Searching, Living, Teaching, vol. 1, 31).

요한계시록은 경배를 받으시는 분과 그분을 경배하는 자들에게 특별한 주의를 기울인다. 하늘에서 드려지는 예배의 중심은 하나님과 어린 양이다(계 5:13, 계 7:10). 언제나 그랬고 앞으로도 그래야 하는 바, 경배의 중심은 그리스도이시다.

예배자들은 “큰 환난에서 나오는 자들인데 어린 양의 피에 그 옷을 씻어 희게”(계 7:14)한 자들이다. 그들은 하나님의 구속과 변화시키시는 능력의 산증인들이다. 그들은 그분의 하나님 되심과 그분이 그들을 위해 행하신 것에 대하여 찬양한다.

 

<묵상>

하나님이 우리의 하나님이 되시며 우리가 그의 백성이 될 것이라는 말이 지금 여기 지구에 살고 있는 우리에게 어떤 의미입니까? 

 

답: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은 다 하나님의 자녀가 된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이 땅에 살아간다는 것이다. 그날 새 하늘과 새 땅에 살 것이다. 

 

요한계시록 21:3은 “보라 하나님의 장막이 사람들과 함께 있으매 하나님이 그들과 함께 계시리니 그들은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하나님은 친히 그들과 함께 계”신다고 말합니다. 이 구절은 성경의 수없이 많은 다른 구절에도 되풀이됩니다(렘 32:38, 겔 37:27, 슥 8:8, 히 8:10). 천국이 좋은 이유는 하나님이 우리와 친히 함께 계시기 때문입니다. 비록 지금은 죄로 인해 볼 수 없고 만질 수 없지만, 하나님은 지금도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그 사실을 믿고 하나님께 소망을 두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하늘에 들어가게 될 것입니다. 

 

<부가설명> 우리가 성경에 기록된 계시에 관하여 연구할 때 세심한 주의가 필요하다. 계시로 보여주신 것을 선지자는 본 그대로 묘사하여 기록하였을 뿐이다. 그가 계시로 본 것이 실제하는지 여부는 모른다. 에스겔 8장에 에스겔이 본 계시의 기록은 에스겔이 예루살렘에 가서 안뜰로 들어가는 북향한 문에 이르니 투기의 우상이 서 있었다. 그러면 이 투기의 우상이 그당시 예루살렘 북향한 문에 모든 사람이 볼 수 있는 투기의 우상이 세워졌을까? 에스겔의 계시에 보여진 것일까? 다니엘 7장, 8장에 있는 짐승들은 세상에 그런 모양으로 실재로 존재하고 있을까? 아니다. 그것은 어떤 사실을 상징하는 계시로 보여주는 계시적 형상이다. 계시록 1장에는 예수님의 형상이 양털 같고 눈 같은 흰 머리털, 불꽃 같은 눈, 입에서는 좌우에 날선 검이 나오고 발은 풀무에 단련한 주석 같았다. 얼굴은 해가 힘있게 비치는 것 같았다. 하늘에 계시는 예수님의 실제 모습이 그럴까? 이런 형상들은 다 사람들에게 가르쳐주려는 많은 의미를 상징하는 계시적 형상들이다. 그렇게 이해하는 것이 옳지 않을까? 계시적 형상은 실물 그대로 보여주시는 것도 있지만 대부분은 상징적이 내용을 포함한 계시적 형상이다. 하늘의 성전도 같다고 보는 것이 옳지 않을까? 세상에 사는 사람들이 아는 것은 세상에 주신 성소와 지으라고 한 성전뿐이다. 그것을 통하여 예수께서 수행하실 구원의 도리를 사람들이 알 수 있게 하신 것이다. 그러므로 하늘의 사정도 사람이 알도록 계시해야 하니까 사람들에게 익숙한 성소와 성전으로 보여서 설명하고 깨닫게 하신 것이다. 그리고 최종적으로 하나님께서는 요한에 성 안에 성전을 보지 못하였다고 기록하게 하시고 하나님과 어린양이 친히 성정이라고 결론을 맺은 것이다. 그렇다고 하늘 전체가 성전이라는 논리도 그리 합리적이지 않다. 새 예루살렘 성은 정육면체이다. 그것은 세상에 짓게 하신 지성소의 원형이라고 할 수 있다. 천사들과 성도들은 새 예루살렘에서 월삭과 안식일에 경배할 것이다. 깊이 생각해보자. 

 

<교훈>

새 예루살렘에 있는 하나님의 성전에서 각 나라와 족속과 백성과 방언에서 나온 큰 무리의 성도들이 하나님을 영원토록 경배할 것이다.

 

12월 27일(화) 하나님의 임재 가운데서

 

성경은 하나님이 “가까이 가지 못할 빛에 거하”시며(딤전 6:16), “본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요 1:18, 요일 4:12)다고 말한다. 그렇다면 이것이 성도들이 하늘에서 아버지 하나님을 보지 못할 것이라는 뜻인가? 절대 아니다. 하나님을 보지 못한다는 것은 분명 타락한 이후의 인간에 대한 설명이다. 성경에는 성도들이 실제로 하늘에서 하나님을 보게 될 것이라고 설명하는 구절들이 있기 때문이다. 

 

마태복음 5:8, 요한일서 3:2, 3, 그리고 요한계시록 22:3, 4을 읽어보라. 이 구절들은 하나님을 보게 되는 최고의 특권에 대해 무엇을 말해주는가?

[마5:8]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을 볼 것임이요.

[요일3:2,3]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지금은 하나님의 자녀라 장래에 어떻게 될지는 아직 나타나지 아니하였으나 그가 나타나시면 우리가 그와 같을 줄을 아는 것은 그의 참모습 그대로 볼 것이기 때문이니 3 주를 향하여 이 소망을 가진 자마다 그의 깨끗하심과 같이 자기를 깨끗하게 하느니라.

[계22:3,4] 다시 저주가 없으며 하나님과 그 어린 양의 보좌가 그 가운데에 있으리니 그의 종들이 그를 섬기며 4 그의 얼굴을 볼 터이요 그의 이름도 그들의 이마에 있으리라.

 

답: 성도들은 친히 아버지 하나님의 얼굴을 볼 것이다.

 

“본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다고 말한 바로 그 사도 요한(요 1:18, 요일 4:12)이 “그의 참모습 그대로”, “그의 얼굴”을 (요일 3:2, 3, 계 22:3, 4) 볼 것이라고도 기록했다. 이 구절들이 아버지 하나님을 가리키는지 아니면 그리스도를 가리키는지 논란이 될 수 있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을 볼 것임이요”(마 5:8)라고 하신 말씀을 기억한다면 그런 문제는 모두 해결된다. 구원받은 자들이 그분의 성전에서 하나님을 경배하는 것은 얼마나 큰 영광이겠는가! 그중 최고의 특권은 하나님의 얼굴을 직접 보는 것이 될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형상을 마치 거울 속에 비친 것처럼 천연계 가운데서, 또한 그분께서 인류를 취급하시는 일을 통하여 바라본다. 그러나 그 때에는 사이를 가로막아 놓았던 희미한 휘장 없이 하나님을 직접 대면하여 보게 될 것이다. 우리는 그분 앞에 서서 그분의 얼굴의 영광을 직접 바라볼 것이다”(각 시대의 대쟁투, 676, 677). 

오늘 함께 살펴본 구절 중에 순결함과 하나님을 보는 것을 연결 짓는 말씀이 있다는 사실을 집중하여 보라. “마음이 깨끗한 자”가 하나님을 볼 것이라는 구절과 하나님을 볼 자들은 “그의 깨끗하심과 같이 자기를 깨끗하게”(요일 3:3) 한다는 구절은 우리가 천국에 갈 준비를 하도록 하나님께서 지금 우리 안에서 일하셔야 한다는 사실을 말해주고 있다.

 비록 최종적으로는 예수님의 죽음을 통해 하늘을 향한 우리의 구원이 확실해지긴 했지만, 우리는 지금 이곳에서 우리의 영원한 집을 위해 준비하는 데 도움이 될 정결하게 되는 과정을 거치게 될 것이다. 정결하게 되는 과정의 핵심은 그분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이다.

 

<묵상>

베드로전서 1:22를 읽어보십시오. 이 구절은 순종과 정결하게 되는 것의 관계에 대해 무엇을 보여주고 있습니까? 순종이 우리를 어떻게 정결하게 하나요? 베드로는 우리의 순종이 어떻게 나타난다고 이야기하고 있습니까?

[벧전1:22] 너희가 진리를 순종함으로 너희 영혼을 깨끗하게 하여 거짓이 없이 형제를 사랑하기에 이르렀으니 마음으로 뜨겁게 서로 사랑하라.

 

답: 진리를 순종함으로 깨끗하여 진다. 

 

<부가설명> 영원한 나라에서 성도들은 하나님의 얼굴 앞에서 생활할 것이다. 새 땅이 된 지구 어느 곳에 있든지 무소부재하신 하나님을 뵐 수 있을 것이다. 우리가 그분을 보지 못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지금도 우리 하나하나를 다 보신다. 다윗은 이 진리를 시편 139편에서 자세히 기록하였다. 그러나 그곳에서는 우리도 어디서든지 아버지 하나님을 뵐 수 있다고 믿는다. 그러려면 지금 우리는 마음이 청결한 자로 살아야 한다. 예수께서는 내가 일러준 말로 깨끗하여졌다고 하셨다(요15:3). 바울도 “이는 곧 물로 씻어 말씀으로 깨끗하게 하사 거룩하게 하시고”(엡5:26)라고 했다. 그러므로 성도들이 깨끗하게 되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되는 것이다. 예수께서는 “내가 너를 씻기지 아니하면 네가 나와 상관이 없느니라”(요13:8)라고 하셨는데, 예수께서 우리를 씻기시는 것이 그분의 말씀으로 하신다. 그러므로 날마다 말씀을 읽고 말씀을 준행하며 생활한다. 이 말씀은 생명이요 영이다(요6:63). 성도는 날마다 말씀을 읽고 명상하고 준행하므로 깨끗한 존재로 하나님을 뵐 것이다.

 

<교훈>

구원받아 하늘에 들어가게 될 모든 성도들은 하나님을 대면하여 보게 될 것인데, 그와 같은 최고의 특권을 누리기 위해 지금 우리의 마음이 정결케 되어야 한다.

 

<적용>

하나님을 대면하여 보는 특권을 누리기 위해 우리의 마음이 정결케 되어야 합니다. 그대 마음에서 아직 정결케 되지 못한 것은 무엇입니까?

 

12월 28일(수) 다시는 사망이나 눈물이 없고

 

영원히 불타는 지옥에 관한 가르침은 새 하늘과 새 땅에는 “다시는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니”(계 21:4)라는 성경 가르침과 배치된다. 영원히 불타는 지옥에 관한 가르침이 사실이라면, “둘째 사망”은 우주에서 죄와 죄인을 근절하는 것이 아니라 슬픔과 통곡의 지옥에 그것들을 영원히 감금하는 것에 불과할 것이다. 그리고 더 나아가, 그렇다면 우주는 결코 원래의 완전한 모습으로 온전히 회복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성경은 완전히 다른 그림을 그리고 있다.

 

이사야 25:8, 요한계시록 7:17, 그리고 요한계시록 21:4을 읽어보라. 이 구절들은 현세의 시련과 고통 속에서 우리에게 어떤 위로와 희망을 주는가?

[사25:8] 사망을 영원히 멸하실 것이라 주 여호와께서 모든 얼굴에서 눈물을 씻기시며 자기 백성의 수치를 온 천하에서 제하시리라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셨느니라.

[계7:17] 이는 보좌 가운데에 계신 어린 양이 그들의 목자가 되사 생명수 샘으로 인도하시고 하나님께서 그들의 눈에서 모든 눈물을 씻어 주실 것임이라.

[계21:4] 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닦아 주시니 다시는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니 처음 것들이 다 지나갔음이러라.

 

답: 다시는 사망이 없고 눈물도 애통도 질병도 없다. 건강과 평안와 행복만 있다.

 

인생은 매우 힘들고, 불공평하고, 참혹할 수 있다. 우리에게 너무나 소중한 누군가가 비참한 죽음을 맞이할 수도 있다. 또한, 누군가가 우리 삶에 살그머니 들어와 마음을 헤집어 놓곤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떠나 버릴지도 모른다. 사랑하고 믿었던 사람에게 배신당하는 것은 얼마나 끔찍한 일인가! 그러나 우리의 슬픔과 상관없이 하나님은 항상 우리의 뺨에서 가능한 한 많은 눈물을 닦아내시기를 원하신다. 그러나 우리의 가장 고통스러운 눈물 중 일부는 죽음과 슬픔과 애통이 완전히 사라지게 될 영광스러운 날까지 계속 흘러내릴 것이다(계 21:1~5).

우리는 하나님께서 최후의 심판에서 모든 인간을 공평함과 사랑으로 대하실 것이라는 사실을 믿을 수 있다.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우리의 사랑하는 모든 사람들은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여 우리와 영원히 함께 살 것이다. 영원한 생명을 누릴 자격이 없는 자들은 마침내 완전히 멸망하게 될 것이다. 우리의 가장 큰 위안은 하나님이 모든 사람을 공평하게 대하시는 데서 비롯된다. 죽음이 마침내 완전히 사라지게 되면, 구원받은 자들은 기쁘게 외칠 것이다. “사망아 너의 승리가 어디 있느냐 사망아 네가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고전 15:54, 55).

 하나님께서는 새 하늘과 새 땅에서 “이전 것은 기억되거나 마음에 생각나지 아니할 것”(사 65:17)이라고 약속하셨다. 이것은 천국에서 우리의 기억이 다 사라지게 될 것이라는 뜻이 아니라, 과거의 기억이 천국의 지속적인 기쁨을 약화시키지 못할 것이라는 뜻이다.

 

<묵상>

죄악 세상에 살면서 온갖 쓰라린 고통을 경험해 보지 않은 사람이 어디 있을까요? 어떻게 하면 그와 같은 고통의 시기에도 여전히 하나님을 신뢰하고, 그분의 선하심과 사랑으로 인해 기뻐하는 법을 배울 수 있을까요?

 

답: 말씀과 기도로 그렇게 될 수 있다.

 

<부가설명> 태초에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세계는 하나님이 보시기에 심히 좋았다. 하나님은 눈이 정결하셔서 악을 차마 보지 못하시는 분이시다(합1:13). 그런 분의 눈에 심히 좋은 세상은 인간이 상상할 수 있는 것을 훨씬 뛰어넘는 좋은 것이다. 회복될 새 세상이 그런 세상이다. 그래서 성경은 “기록된 바 하나님이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을 위하여 예비하신 모든 것은 눈으로 보지 못하고 귀로도 듣지 못하고 사람의 마음으로도 생각지 못하였다 함과 같으니라”(고전2:9)라고 가르쳐준다. 성령께서 깨닫도록 해주시기 전에 아무리 상상해도 그것을 온전히 상상할 수 없다. 차원이 전혀 다른 세계이기 때문이다. 그것을 이 세상의 것으로 재어보려는 것은 무리다. 성경 기자들도 최대한으로 아름답고 좋은 것으로 묘사하였다. 누군가가 하늘나라 가면 세 가지 놀랄 일이 있다고 했는데 그 중 하나가 하늘나라가 세상에서 상상하던 것보다 너무나 더 좋은 것에 놀랄 것이라고 했단다. 우리가 그런 나라에 갈 것이다. 항상 깨끗하게 하는 생활이 이어지도록 성령께서 늘 주장해주소서.

 

<교훈>

비록 현재의 삶이 우리를 고통스럽게 할지라도 우리는 하나님께서 최후의 심판에서 모든 인간을 공평함과 사랑으로 대하실 것이라는 사실을 믿을 수 있다. 

 

<적용>

다시는 사망과 눈물이 없는 세상에서 꼭 다시 만나고 싶은 사람은 누구입니까? 그 나라에 들어가기 위해 오늘 하나님께 어떤 약속을 하시겠습니까? 

 

12월 29일(목) 하나님의 이름이 그들의 이마에 있음 

 

요한계시록 22:3~5을 읽어보라. 우리가 하나님의 이름이 이마에 기록된 자들 중에 포함될 것이라고 어떻게 확신할 수 있는가? 

[계22:3~5] 다시 저주가 없으며 하나님과 그 어린 양의 보좌가 그 가운데에 있으리니 그의 종들이 그를 섬기며 4 그의 얼굴을 볼 터이요 그의 이름도 그들의 이마에 있으리라 5 다시 밤이 없겠고 등불과 햇빛이 쓸 데 없으니 이는 주 하나님이 그들에게 비치심이라 그들이 세세토록 왕 노릇 하리로다.

 

답: 우리를 구원하기 위하여 희생하신 어린양 예수님이 그곳에 계시기에 반드시 그곳에 갈 것이다.

 

루시퍼의 반역과 아담과 하와의 타락 이후, 하나님은 그 두 사람을 멸망시킬 수도 있으셨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피조물들에 대한 다함 없는 사랑의 표현으로써 당신께서 베푸시는 것을 받아들이는 모든 이들을 구원하시기 위한 자비로운 계획을 세우셨다. 이와 같은 “구원의 계획”은 지구가 창조되기 전에 이미 존재했고(엡 1:3, 4, 딤후 1:9, 딛 1:2, 계 13:8), 타락 직후 에덴에서 인류에게 처음으로 제시되었다. 이 계획은 훗날 이스라엘 백성들의 성소 제도(출 25장)를 통해 더 많이 드러났다. 그리고 예수님의 삶과 죽음, 그리고 부활을 통해 마침내 그 완전한 모습이 주어졌다(참조, 롬 5장).

구원의 계획의 중심에는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통해 제공하신 위대한 구원을 믿음으로 받아들이는 모든 사람에게 주어지는 영원한 생명의 약속이 자리 잡고 있다. 십자가 전이나 후에나 구원은 항상 믿음으로 주어지는 것이고 결코 행함으로 획득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의 행위는 우리가 받은 구원에 대한 표현일 뿐이다.

 

바울은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시기 훨씬 전에 살았던 아브라함이 믿음으로 구원받았다고 기록했다. “만일 아브라함이 행위로써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면 자랑할 것이 있으려니와 하나님 앞에서는 없느니라 성경이 무엇을 말하느냐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매 그것이 그에게 의로 여겨진 바 되었느니라”(롬 4:2,3). 이 구절은 믿음으로 말미암는 구원을 이해하는 데 어떤 도움을 주는가?

 

답: 아브라함이 의롭게 여김 받은 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을 믿었기 때문이다. 그의 행위가 거룩했기 때문이 아니다. 우리도 그렇게 믿으면 당연히 의로여김을 받는다.

 

우리가 예수님을 개인의 구주로 받아들이고, 그분께 순종하고, 그분 안에서 지금 누릴 수 있는 새로운 삶을 포함하여 그분의 약속을 주장하며, 오직 그분의 은혜에만 전적으로 의지한다면, 우리는 구원의 확신을 가질 수 있다. 

 아브라함은 믿었고, 그것이 그에게 의로 여겨졌다. 우리에게도 마찬가지다. 이것이 바로 우리들의 이마에 하나님의 이름이 기록되어 있다는 말씀의 의미다. 만일 지금 우리 이마에 그분의 이름이 기록되어 있고, 그분으로부터 돌아서지 않는다면, 그 이름은 새 하늘과 새 땅에서도 기록되어 있을 것이다.

 

<묵상>

우리의 이마에 하나님의 이름이 기록되어 있다는 말씀의 의미는 무엇입니까?

 

<부가설명> 이마에 하나님의 이름이 있다는 것은 계시록 7장 3절과 14장 1절을 대조하면 확실히 알 수 있다. “이르되 우리가 우리 하나님의 종들의 이마에 인치기까지 땅이나 바다나 나무들을 해하지 말라 하더라”(계7:3). “또 내가 보니 어린 양이 시온 산에 섰고 그와 함께 십사만 사천이 섰는데 그 이마에 어린 양의 이름과 그 아버지의 이름을 쓴 것이 있도다”(계14:1). 이마에 하나님의 이름이 있는 것은 이마에 하나님의 인침을 받았기 때문이다. 어린양과 함께 시온산에 서 있는 144,000인의 이마에 하나님과 어린양의 이름이 있는데, 7장에는 살아계시한 하나님의 인을 맞은 사람이 144,000인이라고 했다. 그러니 이마에 친 인에는 하나님의 이름이 새겨진 것을 확인할 수 있다. 하나님 나라에 사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이름을 확실히 아는 사람들이다. 그 이름은 ‘여호와’이시다. 성경의 하나님이 ‘여호와’이심을 모르는 살마들은 이마에 하나님의 인이 없는 사람이다. 성경의 하나님이 여호와 인 줄 아는 것은 “또 나의 안식일을 거룩하게 할지어다 이것이 나와 너희 사이에 표징이 되어 내가 여호와 너희 하나님인 줄을 너희가 알게 하리라 하였노라”(겔20:20) 라고 하셔서 제7일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하게 지키는 것이 여호와를 하는 표라고 분명히 가르친다. 제7일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하게 지키니 않는 사람은 이마에 하나님의 이름이 없는 자들이다. 이 이름이 있는 자들이 하늘나라에 가서 하나님과 함께 영원히 행복하게 살 것이다. 

 

<교훈>

구원은 오직 믿음으로 주어지는 것이며, 그 사실을 받아들고 하나님께 순종하는 모든 자들의 이마에는 하나님의 이름이 기록될 것이다.

 

12월 30일(금) 더 깊은 연구를 위해

<각 시대의 대쟁투> 674~678, “대쟁투의 종막,” <하늘> 133~192, “땅이 새로워짐,” “하늘은 학교,” “오래지 않을 것임,” “천국은 지금 시작될 수 있다,” “하늘의 음악,” “그곳으로 우리를 초청함”을 읽어보라.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영원토록 구속받은 자들의 연구와 찬양의 대상이 될 것이다. 그들은 영광을 입으신 그리스도를 통하여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를 볼 것이다. 광대한 우주의 무수한 세계들을 창조하시고 유지하시는 그분, 그룹과 영광의 스랍들이 즐겨 경배하는 사랑받는 하나님의 아들, 하늘의 왕께서 타락한 인류를 구원하시고자 자신을 낮추시고 죄의 치욕과 슬픔을 지시고 아버지의 얼굴에서 숨겨진 채 마침내 잃어버린 세상의 죄 때문에 갈바리의 십자가 위에서 당신의 심장이 터지고 생명이 떠나간 사실은 결코 잊혀지지 않을 것이다. 온 우주의 창조자시며 모든 운명의 결정자께서 인류를 위한 사랑 때문에 당신의 영광을 버리시고 스스로를 낮추셨다는 것은 영원히 우주의 경이와 존경을 자아낼 것이다”(각 시대의 대쟁투, 651).

“대쟁투는 끝났다. 죄와 죄인들은 없어졌다. 온 우주는 깨끗해졌다. 오직 조화와 기쁨의 맥박만이 온 우주의 만물을 통하여 고동(鼓動)한다. 생명과 빛과 환희가 만물을 창조하신 분에게서 끝없이 넓은 우주로 퍼져나간다. 가장 작은 원자(原子)로부터 가장 큰 세계에 이르기까지, 만물은 생물계와 무생물계를 막론하고 조금도 흠이 없는 아름다움과 완전한 기쁨으로 하나님은 사랑이시라고 선포한다”(각 시대의 대쟁투, 678).

 

핵심적인 토의를 위해 

1. 많은 세속화된 그리스도인들이 마치 이 세상이 영원히 지속될 것처럼 살아간다(눅 12:16~21). 어떻게 하면 우리가 가진 이 땅에서의 이상과 하늘의 우선순위를 조화시킬 수 있겠는가? 예수님께서 누가복음 12장에서 우리에게 경고하신 것을 어떻게 경계할 수 있겠는가?

※ 어리석은 부자 비유로 세상의 재물에 마음을 두지 말고 하나님이 자신의 부유함이 되도록 살도록 경고하셨다. 세상 것은 다 지나가는 것일 뿐임을 깨달아야 한다.

 

2. 만약 천국이 여기서부터 시작된다면, 우리의 가정과 일상에서 하늘의 원칙들을 나타내기 위해 어떤 것들을 변화시켜야 하겠는가?

※ 그리스도인은 삶의 모든 것 자체가 하늘이 원칙 안에서 진행되도록 해야 할 것이다. 

 

3. 영생을 믿지 않는 사람들 중에는 미래에 대한 소망 없이도 꽤 행복한 삶을 사는 것처럼 보이는 사람들이 있다. 어떻게 그렇게 할 수 있는 것인가? 그들은 어떻게 이 삶 너머에 존재하는 무언가에 대한 약속 없이 사는 것을 합리화하는가?

※ 그들은 눈 앞의 현실을 즐기면서 살려고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죽음이 닥칠 때 그들은 허망한 세상을 늦게 알고 절망할 것이다. 그들은 내세가 없다는 사상으로 합리화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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