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과 어둔 밤의 별처럼 빛나라(질문, 대답, 설명) 01/31/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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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김명호 작성일26-01-23 11:25 조회118회 댓글0건본문
제5과 어둔 밤의 별처럼 빛나라
(1월 31일 안식일 / 일몰: 오후 5시 54분)
연구 범위: 빌립보서 2:12–30; 로마서 3:23, 24; 로마서 5:8; 디모데후서 4:6; 고린도전서 4:17; 디모데후서 4:21, 13; 누가복음 7:2
기억절: “모든 일을 원망과 시비가 없이 하라 이는 너희가 흠이 없고 순전하여 어그러지고 거스르는 세대 가운데서 하나님의 흠 없는 자녀로 세상에서 그들 가운데 빛들로 나타내며”(빌 2:14, 15).
하나님께서 히브리인들에게 순종하라고 말씀하셨다. 그 순종이 “열국 앞에 너희의 지혜요 너희의 지식이라 그들이 이 모든 규례를 듣고 이르기를 이 큰 나라 사람은 과연 지혜와 지식이 있는 백성”(신 4:6)이라고 하게 만들 것이기 때문이었다.
오랜 후에 예수님은 말씀하셨다. “나는 세상의 빛이니 나를 따르는 자는 어두움에 다니지 아니하고 생명의 빛을 얻으리라”(요 8:12). 또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산 위에 있는 동네가 숨기우지 못할 것이”(마 5:14)라고도 하셨다. 우리가 어떻게 그런 빛이 될 수 있을까? 그것은 오직 “세상에 와서 모든 사람을 비추”(요 1:9, 우리말)는 참 빛이신 예수님과 친밀한 관계를 통해 가능하다. 빌립보서 2장이 말하는 것처럼, 하나님은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빌 2:9-11)하게 하셨다.
하늘의 빛과 능력은 예수님께 삶을 드린 우리 모두에게 주어진다. 그러나 우리는 너무 자주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다 이루어 주시기를 기대하거나, 우리 자신의 생각과 계획으로 그것을 방해한다. 그렇기 때문에 빌립보 교회를 향한 바울의 권면은 오늘도 여전히 중요하다.
학습 목표
깨닫기: 우리는 어두운 세상에서 빛으로 부름 받았으며 말씀을 따라 주님의 날을 향해 자신을 구별해야 한다.
느끼기: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 가운데 살아 있을 때 살든지 죽든지 그리스도가 존귀하게 될 것이다.
행하기: 성품과 희생하는 정신을 통해서 삶을 드림으로 하늘의 빛과 능력이 삶을 통해 비추이게 한다.
TMI 위로
2. 십자가를 통해 주신 구원을 어떻게 이룰 수 있습니까?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합니까?(빌 2:12)
*답: 주신 구원을 잃지 않도록 지키는 일을 해야 한다. 물론 성령께서 도우신다.
3. 어두운 세상에서 우리는 어떻게 하나님의 빛의 자녀로 나타날 수 있습니까?(빌 2:15)
*답: 하나님의 말씀에 전적으로 순복할 때 그렇게 된다.
4. 바울이 자신을 관제로 드린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빌 1:27)
*답: 복음을 위하여 죽는 것도 두려워하지 않는다는 것을 뜻한다.
5. 바울이 말하는 디모데의 연단된 성품이란 어떤 특성을 가리키는 것입니까?
*답: 진리 안에서 믿음에 굳게 서서 흔들리지 않는 자세로 복음을 높이는 특성이다.
6. 바울이 에바브로디도를 존귀하게 여길 사람이라고 말하는 이유는 무엇 때문입니까?(2:29)
*답: 복음과 그 전파에 고생을 마다하지 않고 충실했기 때문이다.
7. 그리스도께 가장 가까이 서게 될 사람은 어떤 특성을 나타낼 것입니까?(고전 13:4, 5)
*답: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사랑을 생활하는 사람이다.
결론: 하늘의 빛과 능력은 예수님과 친밀한 관계를 통해 그분께 삶을 드린 자에게 주어진다. 행위로는 구원을 얻을 수 없으며, 우리는 구원을 위해 주께서 하시는 역사를 알고 그에 순종해야 한다. 우리는 어두운 세상에서 빛으로 부름 받았으며 생명의 말씀을 따라 그리스도의 날을 향해 자신을 구별해야 한다. 사도들과 선구자들은 자신을 희생하며 산 제물로서 복음을 전파하기 위해 일했다. 그들은 연단된 성품과 예수의 본을 따르며 희생하는 정신을 통해 빛을 나타냈다. 그들이 살든지 죽든지 모두가 유익한 것은 모든 삶에서 그리스가 존귀하게 될 것이기 때문이었다.
1월 25일(일)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우리가 이룬다
하나님의 뜻에 대한 순종과 겸손의 완벽한 본보기로 예수님을 제시한 후, 바울은 이제 빌립보의 성도들에게로 눈을 돌린다. 그는 그들이 복음의 기별을 받은 후 주님께 순종한 것을 확인하며(행 16:13-15, 32, 33 참조), 계속해서 순종할 것을 당부한다.
그리스도의 생애와 십자가를 구원의 길로 제시한 바울은 이제 더 직접적으로 이 모든 것이 실제로 어떻게 이루어지는지에 초점을 맞춘다.
빌립보서 2:12, 13절을 읽어보라. 바울이 “너희 구원을 이루라”고 말한 것은 무슨 뜻인가? 당신은 믿음과 행함의 관계를 어떻게 설명하겠는가?
[빌2:12,13] 그러므로 나의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나 있을 때뿐 아니라 더욱 지금 나 없을 때에도 항상 복종하여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 13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너희에게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나니,
*답: 복음을 복종하는 것이 구원을 이루는 것이 되는데, 하나님께서 신자들 안에서 행하도록 인도하신닫.
바울이 이 구절에서 로마서와 다른 서신들에서 설명했던 말씀과 다른 복음을 제시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그가 여기서 전하는 기별이 다른 곳과 빌립보에서도 전한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의 복음과 일치한다고 확신할 수 있다. 또한 주어진 주제, 특히 오해하기 쉬운 구원의 주제에 대해 성경이 말하는 모든 내용을 살펴보는 것도 중요하다.
로마서 3:23, 24; 로마서 5:8; 에베소서 2:8-10을 읽어보라. 이 구절들은 구원에 대해 무엇을 가르쳐 주는가?
[롬3:23,24]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24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속량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 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
[롬5:8]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엡2:8~10] 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9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하지 못하게 함이라 10 우리는 그가 만드신 바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은 자니 이 일은 하나님이 전에 예비하사 우리로 그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하심이니라.
*답: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로 그것을 믿음으로 받아들일 때 구원받게 된다.
의심의 여지없이 구원은 하나님의 사역이며, 우리 스스로는 그 어떤 공로도 주장할 수 없다. 믿음 그 자체도 성령의 역사를 통해 이루어진 선물이다. 우리 자신의 행위로는 구원받을 수 없다. 하나님은 거듭남을 통해 우리를 영적으로 새롭게 창조하시고 선한 일을 할 수 있게 하신다. 하나님의 성령은 우리 안에서 역사하셔서 옳은 것을 선택하고, 유혹을 이기며, 바른 결정을 내릴 수 있도록 우리의 의지에 힘을 더하신다.
그러므로 우리는 “두렵고 떨림으로”(빌 2:12)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이루게 된다. 그렇다면 이것은 때로 연약하기 쉬운 우리의 순종의 노력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을 두려워해야 한다는 뜻인가? 물론 아니다. 이 표현은 하나님의 임재하심을 아는 것(시 2:11 참조)과 우리가 그분께 순종해야 할 필요성에 대한 것이다.
<교훈> 자신의 행위로는 구원받을 수 없다. 구원을 이루라는 의미는 주께서 우리 구원을 위해 하시는 역사를 아는 것과 그분께 순종해야 할 필요성을 의미한다.
<부가설명> 자신의 행위로는 구원받을 수 없다는 뜻이 무엇인가? 왜 이런 말을 하는가? 그래서 어거스틴은 원죄론을 끌어냈다. 아담으로부터 도덕적 타락성을 유전받았으므로 도덕적 선을 전혀 할 수 없는 존재가 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펠라기우스는 사람은 도덕적 선을 얼마든지 행할 수 있다고 주장해서 어거스틴 시대에 대 논쟁이 있었다. 우리 교회는 원죄론을 인정하지 않는다. 그러나 아담으로부터 타락한 본성을 물려받았다고 말한다. 이 말이나 도덕적 타락을 유전받았다는 말이 어떻게 다른가? 내게는 같은 말로 보인다. 그래서 사람은 선을 행하기보다는 악을 행하는 경향이 있어서 극기하고 힘써 자기 구원을 이루어야 한다고 말하는 것으로 보인다. 어거스틴의 주장은 영혼불멸설에 기반한 주장이다. 그러나 영혼불멸을 믿지 않는 우리 교회의 이 표현은 출생하는 사람은 죄도 없고 구원받은 의도 없는 중립 상태로 출생한다는 것이 표현되지 않은 주장이 아닌지 모르겠따. 그새서 갓태어난 아기는 죄가 없고 죄인이 아니라고 한다. 그러나 죄성을 가진 육체를 가지고 출생했기 때문에 성장하면서 죄를 짓게 되어 있다고 말하는 것 같았다. 이런 설명은 사람이 자기 노력으로 구원에 이를 수 있다는 주장으로 나아간다. 예수님은 구주가 아니라 인간이 연약해서 잘 못하는 것을 도와주셔서 의를 행할 수 있게 하시는 도우미로 전락시킨다. 사람이 자기 행위로 구원받을 수 없다는 것은 아담 후손은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그 생명의 행위를 할 수 없다는 뜻이다. 왜냐하면, 아담 안에서 죽은 자이기 때문이다. 죽은 자가 자기 행위로 살아날 수 있는가? 그래서 예수님을 믿을 때 그는 생명을 얻게 되고 생명을 얻은 후에는 그 생명이 하나님의 뜻을 생활하게 되는 것인데, 그것이 하나님의 뜻에 전적으로 순복하는 삶이다. 이 이치는 전혀 어렵지 않다. 그래서 중생해야 하는 것이다. 중생하지 않으면 썩어져가는 구습을 따르는 옛사람일 뿐이다.
1월 26일(월) 어두운 세상의 빛
빌립보서 2:14에서 바울은 빌립보 성도들에게 “모든 일을 원망과 시비가 없이 하라”고 권면한다. 교회의 연합을 가로막는 어려움은 너무나 커서 우리의 상당한 노력 없이는 유지될 수 없다. 교회 안의 연합은 그리스도와의 연합과 그분의 말씀에 대한 순종의 결과이다. 바울이 지적하듯이, 우리는 “어두운 세상에서 밝은 빛을 발하”(빌 2:15, 쉬운)도록 부르심을 받았기에 우리의 증거에 연합은 매우 중요하다.
달이 없는 밤, 도시의 눈부신 불빛과 가로등에서 벗어나면 더 많은 별이 눈에 들어오고, 더욱 밝게 빛나는 것처럼 보인다. 이러한 차이는 어둠과 빛의 대비 때문이다. 하늘이 어두울수록 별이 더욱 선명하게 보인다. 우리의 증거도 마찬가지이다. 주변의 도덕적 어두움이 짙을수록, 하나님을 참되게 따르는 자들의 삶과 세상에 속한 사람의 삶 사이의 대비는 더욱 뚜렷해진다. 그렇다면 세상의 생각, 압력, 관행이라는 인공적인 불빛이 우리가 증거하는 빛을 흐리게 하거나 완전히 안보이게 만들지 않게 하는 것은 얼마나 중요한 일인가.
빌립보서 2:15, 16을 읽어보라. 바울은 하나님의 자녀인 우리가 어떻게 되어야 하고 무엇을 해야 한다고 말하는가?
[빌2:15,16] 이는 너희가 흠이 없고 순전하여 어그러지고 거스르는 세대 가운데서 하나님의 흠 없는 자녀로 세상에서 그들 가운데 빛들로 나타내며 16 생명의 말씀을 밝혀 나의 달음질이 헛되지 아니하고 수고도 헛되지 아니함으로 그리스도의 날에 내가 자랑할 것이 있게 하려 함이라.
*답: 흠이 없고 순전하여 세상에 빛들로 나타나고 생명의 말씀을 밝히는 자들이 되어야 한다.
“흠이 없고”는 “결점이 없고, 책망받을 것이 없다”라는 뜻이다. 이 표현은 특별히 욥과 그의 흠 없는 성품을 가리킬 때 사용된다(욥 1:1, 8; 욥 2:3; 욥 11:4; 욥 33:9 참조). “순전하”다에 사용된 헬라어는 문자 그대로 “순수하고 섞이지 않은” 것을 의미한다. 예수님은 당신의 증인들이 당할 수 있는 악랄한 공격을 염두에 두고 우리에게 “비둘기처럼 순결하라”고 권면하셨다(마 10:16). 바울 역시 우리에게 “악한 데 미련”(롬 16:19)하라고 권고한다. 현대 미디어 채널들은 순수하거나, 영혼을 고양하거나 영감을 주는 것과 동떨어진 내용으로 가득하다. 이런 시대에 “내가 사악한 것을 내 눈앞에 두지 아니하”(시 101:3, 흠정역)겠다고 한 다윗의 방침은 오늘날 우리를 위한 훌륭한 규칙이 된다.
우리는 남들과 다른 것을 결코 두려워해서는 안되며, 우리의 믿음은 더욱 더 우리를 구별되게 하는 것이어야 한다. 우리의 목표는 “세상에서 … 빛으로 나타나는 것”(빌 2:15)이다. 그렇게 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생명의 말씀을 굳게 잡”(빌 2:16, 새번역)고 세상을 따라가는 것을 거부하는 것이다(롬 12:2). 우리가 “그리스도의 날”을 바라보며 살았는지, 아니면 “헛되이 달음질”(빌 2:16; 고전 9:24-27 참조)하였는지는 우리의 선택에 따라 결정된다.
<교훈> 악이 가득한 세상에서 빛으로 빛나도록 부르심 받은 우리는 생명의 말씀을 굳게 잡고 어두운 세상을 따르지 않으며 주의 날을 향해 자신을 구별해야 한다.
<부가설명> 만일 우리가 진정으로 물과 성령으로 거듭났다면 그는 예수님의 생명을 가진 자가 된다. 그러면 그는 예수님의 마음을 가지게 된다. 속에서 예수님의 생명이 샘솟는 사람이 된 것이다. “모든 지킬 만한 것 중에 더욱 네 마음을 지키라 생명의 근원이 이에서 남이니라”(잠4:23). 예수님의 생명은 그 자체가 빛이다(요1:4). 그런 사람은 어두운 세상에 빛을 비출 수 있다. 이것은 진정한 그리스도인의 소망이 아닌가? 예수님이 없으면 생명이 없다(요일5:11,12). 생명이 없으면 썩는 삶을 살게 된다. 그것이 옛사람의 삶이다. 세상에 예수님을 모시지 않은 모든 사람은 생명이 없다. 그래서 세상이 어둡다. 사망은 음침하다(시23:4). 어둡다. 죽은 자는 삶이 없다. 행동이 없다. 그래서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다. 우리는 자신을 점검해서 생명이 있는 자인지 사망인지 스스로 확인하는 일이 매일 필요하다. 생활이 빛이 아니면 그는 사망에 속한 자이다.
1월 27일(화) 산 제사
빌립보서 2:17; 디모데후서 4:6; 로마서 12:1, 2; 고린도전서 11:1을 읽어보라. 바울은 이 구절에서 무엇을 말하고 있는가?
[빌2:17] 만일 너희 믿음의 제물과 섬김 위에 내가 나를 전제로 드릴지라도 나는 기뻐하고 너희 무리와 함께 기뻐하리니,
[딤후4:6] 전제와 같이 내가 벌써 부어지고 나의 떠날 시각이 가까웠도다.
[롬12:1,2]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 이는 너희가 드릴 영적 예배니라 2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
[고전11:1] 내가 그리스도를 본받는 자가 된 것 같이 너희는 나를 본받는 자가 되라.
*답: 바울이 자기의 순교를 암시하고 성도들도 그런 정신을 살도록 권한다.
바울은 살든지 죽든지 그리스도를 섬기겠다는 놀라울 정도로 양면적인 견해를 이미 밝힌 바 있다(빌 1:20-23). 이제 그는 “나를 관제로 드릴”(빌 2:17)것이라는 매우 실제적인 가능성을 시사한다. 이와 같은 형상화는 기름, 포도주, 물 등의 액체를 하나님께 제물로 부어 드리는 고대 제사 의식인 '전제'에서 유래한 것이다(창 35:14, 출 29:40, 삼하 23:15-17 참조). 헌납의 행위에서 귀한 액체를 “허비하는”듯한 모습은 마리아가 “매우 값비싼 나드 향유”로 예수님의 머리와 발에 기름을 부은 행위를 생각하게 한다(막 14:3-9; 요 12:3). 그것은 엄밀히 말하면 전제는 아니었지만, 분명히 엄청난 희생을 상징하며 우리의 구원을 위해 치르신 그리스도의 무한한 희생을 적절하게 예시했다.
복음을 전파하는 일 때문에 처형당한다 해도, 바울은 자신의 생명이 하나님께 드리는 제물로 “부어지는” 것이기에 그는 기뻐할 것이다. 구약 성경에서 전제는 일반적으로 단독으로 행하지 않고 희생 제물과 함께 드려지기 때문에(민 15:1-10, 민 28:1-15 참조) 바울은 자신의 생명을 드리는 것이, 믿음으로 자신의 삶을 “산 제사”(롬 12:1)로 하나님께 헌신하기로 선택한 빌립보 신자들의 “희생과 섬김”에 알맞게 드려지는 것으로 여겼을 것이다.
빌립보의 신자들을 포함한 초기 그리스도인들(빌 1:27-29)은 믿음을 전파하는데 열심이었다. 그들은 집집마다 다니며 복음을 전파했다(행 5:42). 그들은 성경공부를 위해 자신의 집을 내어주었고(행 12:12; 고전 16:19; 골 4:15; 빌레몬 1, 2), 자신들이 믿는 이유를 성경으로 제시할 수 있었다(행 17:11, 행 18:26, 벧전 3:15).
재림교회의 선구자들도 마찬가지였다. 이웃에게 복음을 전하는 일을 목사들에게만 맡기지 않았고, 자신들의 믿음을 나누고 성경을 가르치며 목사가 돌아왔을 때 침례를 받을 수 있도록 사람들을 준비시켰다.
요컨대, 그들은 큰 개인적 희생을 치르면서, 곧 “산 제물”로서 복음을 전파하기 위해 일했다. 우리가 그들보다 적게 헌신해서 되겠는가?
<교훈> 바울은 복음을 전파하다 죽어도 기뻐할 것이었다. 빌립보 신자들, 재림교회 선구자들도 큰 개인적 희생을 치르며, “산 제물”로서 복음을 전파하기 위해 일했다.
<부가설명> 여기서 저자는 모든 진실한 그리스도인은 전제물이 되어야 할 것을 암시한다. 그것은 삶이 복음 전파가 되도록 하라는 것이다. 이것을 산 제물이라고 표현했다. 오늘 하루 너는 산 제물이 되었는가? 그것은 기록한 말씀을 따라 살아가는 삶이요, 생명의 양식을 제 때에 먹은 삶이요, 사람들에게 이 진리를 증거할 기회가 있으면 열심히 증거하는 삶이다. 또한 주님의 몸된 교회에 맡은 임무를 주님의 영광을 위하여 힘써 감당하는 봉사다. 아무쪼록 금년은 그런 삶이 이어지도록 성령께서 능력으로 신자마다 역사해 주시기를 간절히 기도한다.
1월 28일(수) 연단된 성품
디모데가 이 서신의 공동 발신자라는 사실은 이미 언급하였다(빌 1:1). 이제 바울은 디모데가 자신의 동역자로서 얼마나 귀중한 존재인지 상세히 설명하기 시작한다. 그는 바울이 마케도니아로 파송한(살전 3:2; 행 18:5, 19:22 참조) 복음 전도자(딤후 4:5)로 묘사되며, 고린도로도 여러 차례 보내졌다(고전 4:17, 고전 16:10). 이전에 그는 고린도에서 바울과 실라와 함께 일했고(살전 1:1, 살후 1:1), 이후에는 에베소에서도 함께 했다(딤전 1:2, 3; 행 19:22 참조). 바울은 디모데가 “같은 마음을 품”(빌 2:20, 우리말)고 있다고 말한다. 헬라어 원문(직역하면 “마음이 동등한”)은 그가 여러 면에서 바울과 유사했음을 시사한다. 디모데는 그리스도에 대한 헌신, 복음 전파를 위한 열정적인 노력, 특히 빌립보인들에 대한 관심을 보였다.
바울이 디모데에 대해 이토록 긍정적으로 길게 언급하는 이유는 무엇이라고 생각하는가?(빌 2:19-23 참조) 바울은 디모데에 대해 또 무엇이라 말하는가?(고전 4:17, 딤후 1:5 참조)
[빌2:19~23] 내가 디모데를 속히 너희에게 보내기를 주 안에서 바람은 너희의 사정을 앎으로 안위를 받으려 함이니 20 이는 뜻을 같이하여 너희 사정을 진실히 생각할 자가 이밖에 내게 없음이라 21 그들이 다 자기 일을 구하고 그리스도 예수의 일을 구하지 아니하되 22 디모데의 연단을 너희가 아나니 자식이 아버지에게 함같이 나와 함께 복음을 위하여 수고하였느니라 23 그러므로 내가 내 일이 어떻게 될지를 보아서 곧 이 사람을 보내기를 바라고,
[고전4:17] 이로 말미암아 내가 주 안에서 내 사랑하고 신실한 아들 디모데를 너희에게 보내었으니 그가 너희로 하여금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나의 행사 곧 내가 각처 각 교회에서 가르치는 것을 생각나게 하리라.
[딤후1:5] 이는 네 속에 거짓이 없는 믿음이 있음을 생각함이라 이 믿음은 먼저 네 외조모 로이스와 네 어머니 유니게 속에 있더니 네 속에도 있는 줄을 확신하노라.
*답: 그가 바울과 같은 마음으로 함께 일했기 때문이고, 디모데는 아들이 부모에게 효도하듯이 바울을 섬겼고 믿음의 연단으로 확실한 믿음과 진리에 굳게 서 있었기 때문이다.
바울은 디모데의 또 다른 특성으로 “연단된 성품”(빌 2:22)을 언급한다. 이 단어는 시련을 통해 철저히 시험받은 사람(롬 5:4), 성품과 봉사가 진실한 것으로 입증된 사람을 의미한다(고후 2:9, 고후 9:13). 바울은 복음을 전파하며 함께 일했던 여러 기회를 통해 이것을 직접 보았기에 디모데에게 이런 특성이 있음을 알고 있다.
삶의 역경이야말로 우리의 근성을 시험하고 우리의 내면을 여실히 드러낸다. 엘렌 화잇은 이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생애는 훈련의 장이다. … 기질을 시험하기 위한 도전이 있을 것이다. 바른 정신으로 이런 도전을 대할 때 그리스도인의 덕성은 계발된다. 상처와 모욕을 온유하게 견디고, 무례한 말들에 온화하게 대답하며, 억압적인 행동을 친절로 응하는 것은 그리스도의 영이 마음속에 거하(는) … 증거이다” “우리가 감당하도록 부름을 받은 모든 난관과 곤란(을) … 잘 견딘다면 그리스도와 같은 품성을 계발하게 하고 그리스도인을 세상 사람과 구별하게 한다”(교회증언 5권, 344).
<교훈> 바울은 디모데가 함께 일하며 시련을 통해 시험받고 성품과 봉사가 진실한 것으로 입증되었기에 빛으로 나타날 수 있는 연단된 성품을 가지고 있다고 증거했다.
<부가설명> 우리는 부모를 닮는다. 부모의 생명의 씨에는 그들의 유전자가 있다. 요즘 사람들은 친자 확인할 때 유전자 검사로 확정한다. 우리가 예수님의 형상을 닮으려면 예수님의 유전자가 내게 들어와야 한다. 유전자는 생명의 씨라고 할 수 있는 것이 아닌가? 그래서 우리가 거듭나야 예수님의 유전자로 출생한다. 그러면 예수님의 성품을 가지게 된다. 붕어빵이 되는 것이다. 외모가 아니라 생명성이 그렇고 성질이 그렇다. 그래서 예수님은 니고데모에게 거듭나지 않으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고 한 것이 바로 이것을 지적한 것이다. 성경은 예수님의 생명을 얻었느냐 못 얻었느냐를 묻고 있다. 예수님이 없음면 생명이 없다(요일5:11,12). 생명이 있는 자들만 산 자의 땅에 갈 수 있다(시27:13). 이 생명이 없으면 예수님은 눈물을 머금고 죽은 자의 따에 둘 수밖에 없다. 그곳이 불 못이다. 정말 우리는 예수님이 나의 생명인가? 자기를 시험하고 확증하도록 살아가자.
1월 29일(목) 이런 자들을 존귀하게 여기라
빌립보서 2:25-30을 읽어보라. 바울은 에바브로디도를 어떻게 묘사하는가? 이 그리스도인 일꾼의 어떤 특정한 태도와 행동이 그의 성품을 드러내는가?
[빌2:25~30] 그러나 에바브로디도를 너희에게 보내는 것이 필요한 줄로 생각하노니 그는 나의 형제요 함께 수고하고 함께 군사 된 자요 너희 사자로 내가 쓸 것을 돕는 자라 26 그가 너희 무리를 간절히 사모하고 자기가 병든 것을 너희가 들은 줄을 알고 심히 근심한지라 27 그가 병들어 죽게 되었으나 하나님이 그를 긍휼히 여기셨고 그뿐 아니라 또 나를 긍휼히 여기사 내 근심 위에 근심을 면하게 하셨느니라 28 그러므로 내가 더욱 급히 그를 보낸 것은 너희로 그를 다시 보고 기뻐하게 하며 내 근심도 덜려 함이니라 29 이러므로 너희가 주 안에서 모든 기쁨으로 그를 영접하고 또 이와 같은 자들을 존귀히 여기라 30 그가 그리스도의 일을 위하여 죽기에 이르러도 자기 목숨을 돌보지 아니한 것은 나를 섬기는 너희의 일에 부족함을 채우려 함이니라.
*답: 에바브로디도를 바울의 형제라고 했다. 또 함께 수고하고 함께 군사 된 자요 빌리보 교인들의 사자로 바울이 쓸 것을 돕는 자였고 빌리보 교우들을 간절히 사모하는 자라고 했다. 이런 모습은 그가 예수님의 마음을 가진 것을 드러냈다.
에바브로디도는 빌립보서에만 등장하지만, 몇 번의 간략한 언급만으로도 그에 대해 꽤 많은 것을 알 수 있다. 그의 이름(Ep-aphroditus, 아프로디테 숭배 암시)으로 미뤄볼 때, 그는 이교적 배경에서 회심한 사람이다. 그를 “동역자”(우리말)라고 부른 것은 그가 사역에 함께 하였으며, 아마도 빌립보에서 바울과 함께 일했음을 시사한다. “함께 군사된 자”(빌 1:27 참조)라고 한 것은 에바브로디도가 복음을 전파하는 과정에서 마주했던 갈등을 가리키는 듯하며, 이를 위해 그는 목숨마저 걸 정도였다(빌 2:30).
빌립보 교회가 파송한 “사자”(apostolos, 보냄 받은 자, 헬라어)인 에바브로디도는 감옥에 있는 바울을 섬기고 그의 여러 필요를 돌보기 위해 왔다(빌 2:25). 빌립보 교인들은 바울을 돕기 위한 그들의 재물을 그에게 믿고 맡겼다(빌 4:18). 이러한 후원은 매우 중요했다. 왜냐하면 로마의 죄수들은 음식, 의복, 침구와 모든 필요한 것을 자비로 구입하거나 가족과 친구들에게 의지해야 했기 때문이다(행 24:23 참조). 로마에서의 두 번째 투옥이 끝나갈 무렵, 바울은 디모데에게 “겨울 전에 너는 어서 오라”고 부탁하며 드로아에 두고 온 “겉옷”을 가져오라고 당부했다(딤후 4:21, 13). 차가운 돌로 된 감옥에서 바울은 이 두꺼운 모직 외투가 분명히 필요했을 것이다. 빌립보 교회로 보내는 편지의 전달을 맡은 사람도 에바브로디도였다(사도행적, 479 참조).
아마도 빌립보의 문제들(4과 참조) 때문에 바울은 에바브로디도를 예정보다 빨리 돌려보내는 것이 필요하다고 여겼던 것 같다. 바울은 빌립보인들에게 “주 안에서 모든 기쁨으로 그를 받아들이”라고 권고한다(빌 2:29). 바울은 성도들이 감옥에 갇힌 자신의 상황을 걱정하지 않기를 당부한다. 또 바울은 에바브로디도 같은 사람은 그리스도인들이 존귀하게 여겨야 할 사람이라고 강조한다. 이것은 그의 부나 사회적 지위 때문이 아니라 예수님의 본을 따르는 희생하는 정신을 지녔기 때문이다(빌 2:6-11, 29, 30; 눅 22:25-27 비교).
존중 혹은 명예를 뜻하는 이 헬라어 단어는 신약성경에서 백부장의 “사랑하는”(눅 7:2) 종, 잔치 자리에서 “존귀”하게 청함 받는 자들(눅 14:8), 그리고 “보배로운” 산 돌이신 예수님을 묘사할 때(벧전 2:4, 6)에만 사용되었다. 에바브로디도가 이 같은 단어로 언급된 것은 그가 참으로 신실한 사람이었음을 의미한다.
<교훈> 바울은 에바브로디도의 부나 사회적 지위 때문이 아니라 예수의 본을 따르는 희생하는 정신 때문에 그를 존귀하게 여겨야 할 사람이라고 강조한다.
<부가설명> 하나님께서 존귀히 여기는 자는 첫째로 예수님의 생명을 가진 자이다. 그들이야 말로 하나님의 아들이다. 다음은 이 생명으로 생활하는 사람이다. 생활은 생명이 나타내는 활동이 아닌가? 그래서 행함이 있게 마련이다. 야고보는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라고 분명히 가르쳤다. 야고보는 행함에 대하여 말한 것이 아니다. 그는 산 자와 죽은 자에 관하여 말씀한 것이다. 그는 생명이 있는자는 행동한다고 말한 것이다. 그런데 사람들은 야고보가 믿음의 행함에 대하여 말한다고 지금까지도 가르치고 있다. 아주 틀린 것은 아니지만 틀린 것이다. 우리는 정말 살았는지 스스로 물어보자. 바울은 자기 속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고 당당히 고백했다. 우리가 예수님의 생명을 받았으면, 그것이 거듭나는 것이다. 에바브로디도나 디모데나 바울 근방에는 갈 수 있지 않을까?
1월 30일(금) 더 깊은 연구를 위하여
“그리스도께 가장 가까이 서는 사람은 이 땅에서 그리스도의 자기희생적 사랑 곧 ‘자랑하지 아니하며 교만하지 아니하며 …자기의 유익을 구치 아니하며 성내지 아니하며 악한 것을 생각하지 아니’(고전 13:4, 5)하는 사랑, 마치 우리 주님을 움직이게 한 것처럼 제자들을 움직여 인류의 구원을 위해 모든 것을 주고, 살며, 수고하고, 죽기까지 희생하게 한 사랑의 정신을 가장 깊이 받아들인 자들이 될 것이다. 이 정신은 바울의 삶에 나타났다. 바울이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라고 말한 것은 그의 삶이 그리스도를 사람들에게 나타내며, ‘죽는 것도 유익’한 것은 그 죽음이 그리스도의 은혜의 능력을 나타내고 영혼들을 그분에게로 모을 것이기 때문이었다. 바울은 ‘살든지 죽든지 내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빌 1:21, 20)하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시대의 소망, 549).
“모든 영혼에게 시험이 닥칠 때가 멀지 않았다. 짐승의 표가 우리에게 강요될 것이다. 세상의 요구에 한 걸음 두 걸음 양보하고 세상의 관습에 순응해 온 자들은 조롱과 모욕, 위협적인 투옥과 죽음을 당하기보다는, 그 권세 앞에 굴복하는 것이 어렵지 않은 일이라고 할 것이다. …수많은 거짓된 신자들이 참된 형제들과 구별될 때, 숨어 있던 자들이 나타나서 호산나를 외치며 그리스도의 깃발 아래 참여할 것이다. 소심하고 자신감이 없었던 자들이 그리스도와 그분의 진리를 공개적으로 선포할 것이다. 교회에서 가장 약하고 주저하던 자들이 다윗과 같이 자원하는 마음으로 담대히 나설 것이다. 하나님의 백성에게 밤이 깊어지면 깊어질수록 별들은 더욱 빛날 것이다. 사탄은 충성된 자들을 몹시 괴롭힐 것이지만 그들은 예수님의 이름으로 대적을 넉넉히 이길 것이다”(교회증언 5권, 81).
함께하는 토의를 위하여
1. 위 인용문에서 조금씩 세상의 요구에 양보하고 세상의 관습에 순응하는 사람들에 대한 경고를 생각해 보라. 그런 행동에는 어떤 것이 포함될 수 있는가? 이것이 개인뿐만 아니라 교회 전체에는 어떻게 적용될 수 있는지 토의해 보라.
*답: 각반에서 서로 이야기를 나누어보자.
2. 하나님은 “나를 존중히 여기는 자를 내가 존중”(삼상 2:30)하리라고 말씀하셨다. 우리는 어떤 방식으로 하나님을 존중하는가? 이것은 “그에게 영광을 돌리”는 것(계 14:7)과 같은 의미인가? 왜 그런가? 아니라면 무엇이 다른가?
*답: 하나님의 말씀을 진심으로 순복하는 것이다.
3. 어떻게 하면 자기의 구원을 이루라는 개념을 바르게 이해하면서도 율법주의의 함정에 빠지지 않을 수 있겠는가?
*답: 구원이 예수님의 생명을 얻는 것임을(요5:24) 깨달을 때 그렇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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